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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8장 성도들의 탄식과 소망

LNCK 2026. 7. 16.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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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1_로마서 강해(45)_성도들의 탄식과 소망 (8:23-25)_ Youtube

 

◈성도들의 탄식과 소망                   롬8:23~25              2026.06.21. [로마서 45강]

 

◑복습                              

 

로마서 8장에서 우리가 조금 자세하게 구절 구절 이 말씀을 살피고 있는데요.

전체 문맥을 우리가 놓치기가 굉장히 쉽습니다.

 

그래서 사실 성경을 읽을 때, 성경만은 아니죠. 어떤 글을 보든지

맥락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한데, 그래서 제가 자주 반복을 하는 거죠.

 

로마서 8장이 어떤 장이냐 하면, 어떤 맥락의 내용이냐 하면,

로마서 5장부터 8장까지는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

특별히 이 얘기를 지금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이.. 내가 시험에 합격을 해서, 내 실력으로, 내 힘으로 얻은 구원 같으면,

그게 무슨 ‘구원의 확신’ 같은 것을 말할 필요가 있겠어요? 내가 내 실력으로 얻은 건데요.

 

근데 내 실력이 전혀 아닌, 나에게 아무 근거도 찾을 수 없는,

심지어 불경건하기가 짝이 없는 나같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해주셨다는 거죠.

 

내가 그리스도를 붙잡음으로 나에게 구원을 주셨다’는 것은,

사실 근거 '나'이기 때문에 늘 흔들릴 수 있는 것이고,

 

또 사탄은 우리의 그런 연약함을 알기에 늘 도전을 하고, 우리를 고소하고 하는 겁니다.

‘너 따위가 무슨 구원을 받을 자격이...’ 하는 거죠.

‘너 따위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는 겁니다.

 

그게 이제 롬5장부터 8장까지 쭉 바울사도가 ‘이게 얼마나 든든한 것인지,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우리 삶을 얼마나 다르게 만들 수 있는지’

그 다르게 만드는 것에 대해서, 지금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 아셔야 됩니다.

이게 맥락이라는 거죠.

 

▲근데 이제 더 큰 맥락에서 보면, 바울이 로마서를 왜 썼습니까?

이것도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것이죠.

 

바울이 로마서를 쓴 이유를, 제가 적어도 세 가지 목적을 가지고 썼다고

로마서 강해 처음에 말씀을 드렸죠.

 

1) 첫 번째는 바울이 이제 스페인 선교를 가기를 원하는데,

스페인으로 가기 전에 로마에 들러서,

로마가 로마 교회는 자기가 세운 교회도 아니고, 자기가 복음을 전했던 교회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로마 교회가, 그러나 스페인에서 가장 가깝기 때문에,

로마 교회가 스페인 선교의 교두보가 되어주기를 바랬습니다.

 

사실은 물질적 섬김도 필요했을 것이고, 많은 면에서 서포트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바울은 분명하게 편지의 뒷부분 롬15장에서 분명히 쓰고 있습니다.

 

2) 그리고 또 하나는 교육적인 목적인데,

첫 번째는 선교적인 목적이며, 두 번째는 교육적인 목적인데,

바울은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자기가 복음을 전해서 세운 교회가 아니기에,

사도로서 자기가 받은 이 복음의 도리를 정확하게 그들에게 가르쳐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서신서보다도 더 정교하게 바울은

로마서에서 구원의 도리를 쓰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게 교육적 목적이죠.

 

3) 세 번째는 목회적인 목적이 있었는데

로마 교회가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이 함께 있는 교회였는데

이들 사이에 갈등이 있고, 반목이 있다는 것을.. 바울은 들어서 알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가지는 능력은, 우리의 사회적인 장벽, 차별 또는 갈등, 분열, 이런 것들을

복음은 하나로 묶는 것이라는 것,

삼위 하나님이 하나이심과 같이, 그들을 하나가 되게 하는 이 은혜의 기적을 만들어내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바울은 알았고 확신했기에,

 

이 복음을 전함으로써 이런 하나 된 공동체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기도하셨던 대로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들 로마 교회가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라고 하는 말씀이

로마교회에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요17:21

 

바울은 그런 면에서 목회적인 목적을 가지고, 로마교회가 하나가 되는

이 서신을 지금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큰 맥락 속에서, 바울은 구원의 도리를 설명했고,

그리고 중간에 5, 6, 7, 8장에서 우리가 얻은 구원이 얼마나 확실한 건지,

흔들릴 수 없는 것인지, 이게 우리를 얼마나 당당하게 만들고 담대하게 만들고,

어떤 고난 앞에서 어떤 세력 앞에서 그 무엇이라도 우리를 주눅들게 할 수 없으며,

우리를 당당하게 만들 수 있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복음,

이 복음을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근데 바울은, 로마서의 독자들인 1차 독자들은 로마 교회의 성도들이잖아요.

우리는 2차, 3차 독자들이라고 볼 수 있는데,

1차 독자들인 로마 교회의 성도들의 마음이

‘아 정말 내 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이 이렇게 놀라운 거구나!’

하는 것들을 지금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의 시선을, 온 세상을 향해서 눈을 들라고 얘기를 합니다.

‘온 세상에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를 바라보라’고 얘기를 하는 거죠.

지난 시간에 44강에서 우리가 살폈던 것입니다.

 

‘온 세상이 신음하고 있고, 고통하고 있고, 탄식하고 있는 게 보이느냐?’고 말합니다.

‘그걸 왜 봐야 되는데요?’

 

이게 바울 사도가, 지금 로마교인들의 시선을

롬8:18절부터 조금씩 열어서,

‘너 자신만 쳐다보는 게 신앙이 아니야!’ 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제가 지난주에 얘기했던 비유가 생각나시죠?

‘군인이 제대 날짜를 기다리는 것, 그리고 이 땅의 전쟁이 끝나는 날을 기다리는 것’

이거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게 좋고, 어떤 게 나쁘다’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대 날짜만 기다리는 군인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사실은 이 땅에 전쟁이 끝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은 바라봐야 하는 겁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저 ‘나 나 나 나’    *자기 중심적 신앙

어린애들 말을 들어보세요. ‘나 나 나 나’ 얼마나 그래요?

그게 죄인인 거를 증명해 주는 거잖아요.

 

그런데 아기들만 그런가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저 ‘나 나 나 나’

여러분의 기도는 어떻게... 이 수준을 벗어나고 있나요?

‘나, 내 배우자, 내 자식, 나, 나, 나, 나’ 이거를 벗어나는 거예요.,

 

신자는 그 사람이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예요.

‘죄성, 자기중심성’이라고 하는 죄성을 넘어서게 만드는 거예요.

 

다른 사람을 진짜 사랑할 수 있는 관점과 능력이,

내게 절대 존재하지 않던 것들이 생기는 거예요. ,

 

보세요. 우리 교회의 기도 제목이 ‘정죄와 판단이 아니라 용납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

근데, 정죄하고 판단하는 거는 자동으로 되는겁니다. 그건 애쓰지 애쓸 필요가 1도 없어요.

그건 자동이에요. 자동 반사적이에요.

 

그러나 ‘용납하고, 맘에 안드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건’

어려운 게 아니고 불가능한 겁니다.

그건 복음의 은혜 안에서가 아니면 못합니다.

 

바울은 지금 그렇게 가려고 하고 있는 거죠.

자기 인생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그는 자기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신앙이라는 것도 이런 거죠.

내 인생, 내가 보는 건, 내 인생밖에 없어요.

‘내 인생에 하나님이 날 도와주셔야 되고’

‘저 사람도 나의 도움이 돼야 되고, 나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고..’

이런 것만 보는 거예요.

 

그런데 정말 우리의 신앙이 자라가면서 뭘 보게 되나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하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내가 어떤 존재가 돼야 되고,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되고... 이거를 보기 시작하는 거예요.

 

바울은 지금 그런 자리로 우리를 데려가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계속해서 그냥 ‘나와 하나님의 관계’,

그냥 ‘나 중심적 신앙’, 그것만 계속해서 우리가 집중하게 된다면,

우리 신앙은 자랄 수 없겠죠.

 

그래서 이제 바울 사도는, 성도들의 시선이, 로마교회 성도들의 시선이,

자기 인생에만 머물지 않고, 하나님 나라라는 큰 그림을 보게 하기 위해서,

피조물들이 탄식하고 있는... 죄 때문에 허무한데 굴복하고 있는...

그것도 자기 뜻이 아닌, 그리고 썩어짐에 종노릇하는 데 가운데서 피조물이 허덕대고 있는...

그런 모습을... 그런데 그러면서 기다리는 게 있다는 거죠. 그게 뭐예요?

 

롬8: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19절에서 뭐라고 얘기했습니까? 고대하고 있다고 했어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

 

그리고 21절에서 뭐라고 그랬어요?

롬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 같은 걸 얘기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그때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이고, 피조물은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요.

이게 이제 우리가 지난 주일에 살펴본 이야기죠.

 

이게 ‘사람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자연이 타락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땅을 저주하셨다’ 하는 데서 시작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가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그저 피조세계에 대한 이야기였을까요?

아니요. (우리 사람에 대한 이야기죠)

 

피조세계들이 그렇게 허무한데 굴복하고 썩어짐의 종노릇 하게 된 것은,

아담의 범죄와 타락 때문에, 자연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굴복하게 된 것인데,

그렇다면 자연도, 피조세계도...

 

피조세계는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무생물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런 피조세계가 그렇게 인격이 없는 건데, 그렇게 기다린다면,

여러분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은, 즉 성도들에게는

어떤 정당한 탄식이 있으며, 성도들이 기다리는 것은 과연 뭔가요?

 

여러분에게 만약에 여러분이 진짜 기다리는 게 뭐냐고 물어보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을 하실 것 같아요? 진짜 기다리는 것!

 

뭐 진짜 기다리는 게 많겠죠. 그렇지만 궁극적인 여러분의 기다림은 뭡니까?

이런 질문을 하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진짜 원하는 거.. 뭐 이렇게 많은 대답이 있잖아요.

-내 자식들이 좀 이렇게 잘 되는 거.. 뭐 많잖아요.

근데 그래서 뭐 하려고요? 그게 전부입니까?

 

이런 질문들을 우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우리의 대답은 어디로 가고 있나요.

‘왜 사나? 내가 왜 존재하나?’

바울은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인인 성도가 가지는 탄식에 대해서,

그는 말하고 싶은 겁니다.

 

◑롬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그래서 23절을 보면, 오늘 본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렇게 얘기하죠.

‘그뿐 아니라 또한’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리고 뭐라고 그래요?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과,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여러분, 바울이 롬5장부터 여기까지 말해온 게 어떤 것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신자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행위로, 내가 실력으로 얻은 게 아니고,

정말 나에게 그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이었다고 얘기하죠.

 

그러니까 나에게서 난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근데 내가 너무나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에게,

하나님이 큰 은혜를 베푸셔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됐다고 여기까지 쭉 온 거예요.

 

바울은 롬5장 시작하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5:1~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이제 하나님하고 평화로운 관계, 화목한 관계,

하나님이 나에게 적대적이지 않다. 더 이상 하나님이 나에게 진노를 퍼부을 이유가 없다’

 

왜요? 그리스도에게 진노가 퍼부어졌으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실 것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실 것은 사랑밖에 없다’

이게 이게 바울이 처음으로 얘기한 거예요. 5:8 

 

그리고 우리가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고,

이 은혜에 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대요.  5:11

 

이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 따위는 관심도 없었어요.

근데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한대요.

이런 자리에 우리가 이르렀다고... 얘기를 하는 거죠.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에 환란이 와도,

환란에도 불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한다가 아니고,

심지어 환란 때문에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얘기해요.  5:3

이런 사람을 어떻게 세상이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나에게 주어지는 이 환란이,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가는 하나님의 손이기 때문이죠. 그걸 아는 거예요.

 

그리고 5: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내게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부어지게 만드셨다.

하나님이 나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다’ 우리가 그런 존재라고요.

 

그리고 6장으로 넘어가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존재라고’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 이 허접한 아니 죄 덩어리인 나를 보실 때,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는 것처럼,

똑같이 그렇게 보고 기뻐하시고 즐거워 하신다고...

 

스바냐3:17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시고, 그 기쁨을 참으실 수가 없다고’

마치 자식을 보면서, 손주를 보면서, 우리가 그런 느낌을 가지는 것처럼,

그런 존재가 되었다고 얘기를 하는 것이죠.

‘영광스러운 존재라고..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고.. 은혜 아래에 있다고..’

 

7장으로 넘어가면, 옛날의 남편인 율법은, 

우리를 그냥 ‘너는 이것밖에 못해?’ 그렇게 정죄하고, 판단하고, 요구하고...

이런 숨막히게 하는 남편 밑에 살았는데,

 

이제 율법에 대하여 죽게 하셨고, 이 혼인관계가 해소되게 하셨고,

이제는 새로운 남편인 그리스도를 만나서, 무한한 은혜 속에서

‘나를 판단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고, 요구하지 않고,

나를 용납하시고,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얘기를 해요.

 

그래서 거룩한 열매를 맺게 됐다고...

그래서 우리가 엉망이 되는 게 아니라,

그 은혜가 나를 바꾸어내서 내가 이제는 진짜가 됐다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됐다고... 거룩한 열매를 맺게 됐다고...

 

그리고 롬8장으로 넘어와서 어떤 얘기를 합니까?

성령이 너희 안에 있으면,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는 죄와 싸우고, 죄를 죽이는 삶을 살 수 있는 힘이 생겼다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고...

성령이 내 삶을 인도하실 거라고...'

 

이것만이 아니라, 성령께서는 그 하나님을

옛날에는 무섭고 두렵고 떨리고 조금만 잘못하면 나를 회초리를 드는 하나님으로 봤는데,

그 하나님을, 이제는 나를 향해서 무한한 사랑과 선하심으로 나를 대하시는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시고... 이런 얘기를 지금까지 쭉 한 거에요.  8:15

성령께서 그런 확신을 주신다고요.

 

비록 우리의 인생에 고난이 있지만, 그러나 그 고난조차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상속하기로 예비하신 영광과는 비교가 안 된다고...

여기가지가 5장에서 8:18절까지 얘기해요.   *8:19절부터 '장래의 소망'으로 넘어가죠.

 

▲그러면서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얻게 된 영광스러운 신분, 그 정체성,

그리고 이 땅에서 누리는 영광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정말 많은 말을 했습니다.

 

‘너는 지금 살아가던 관성을 따라 살지마.

사람들이 너에 대해서 말하는 대로 살지마.

율법주의가 여러 가지 옷을 입고,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통해서 너에게

이 바보야, 멍청아, 이거밖에 못해? 라고 말하는 것들을 개념치 개의치 마!

내가 너에게 주는 복음의 메시지를 들어라’ 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까지가 얘기한 거잖아요.

이게 이 땅에서 삶에 고난이 없다가 아니었어요.

 

롬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왜냐면 5:2절에서도 ‘우리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라고 얘기했고,

8:18절에서도 ‘우리가 지금 받는 환란과,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은 비교할 수 없다’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고난도, 영광과 함께 받는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또 ‘우리의 구원이 다 끝났다, 완성됐다’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3절을 보면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라고 얘기하죠.

이게 무슨 말이에요?

 

성령님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다고, 5:5절에서 이미 말을 했어요.

성령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음바 되었다고’

 

그래서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셨어요.

그리고 성령이 떠나지 않으세요.

 

예수님이 요14~16장 사이에 쭉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믿는 자 안에서 떠나지 않으세요.
그런데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로 우리에게 주신’ 거라고 얘기해요. :23

성령님을 처음 익은 열매라고 표현을 하는 거예요.

 

이 말은, 하나님이 어떤 일을 시작하셨다는 얘기죠. 추수를 시작하셨다는 얘기죠.

근데 이게 처음 익은 열매가 있으면, 이제 나머지가 다 익게 되는 날이 오잖아요.

첫 열매가 그것을 보증하는 거에요.

 

그래서 엡1:14절에서는 성령님을 뭐라고 표현했냐면 ‘보증이 되게 하사’ 이렇게 얘기했어요.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1:14

 

‘보증’은 우리가 이해하기 정말 쉬운 말이죠. 보증금이에요.

보증금은 이제 앞으로 계속 돈을 내야 되는데, 이거는 첫 번째로 낸 돈이에요.

앞으로 낼 거라는 얘기죠.

 

이게 말로만 하는 걸 어떻게 믿어요? 내 돈을 걸고 내가 앞으로 이거를 살 거라고

보증금을 내는 거예요. 이렇게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에게 주신 보증이에요.

 

그래서 성령님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확신이라는 주제와 굉장히 깊은 관련이 있어요.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확신을 하게 하세요.  *보증

 

우리가 이미 천국에 들어간 게 아니에요. 우리가 아직 살아있어요.

그렇지만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명해 주시고, 확증해 주시고, 증거해 주시는 거예요.

 

처음 익은 열매로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8:23

이제 익어갈 것이다.. 끝날 것이다.. 추수가 끝날 때가 있다.. 그게 확실하다 라는 얘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되었다는 얘기도 바울사도는 했었습니다. 8:15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거는 불가역적 사실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려야 할 모든 것들을, 지금 다 완벽하게 누리는 것은 아니에요.

 

유언장은 존재하지만, 아직 상속이 완전히 일어나지는 않았어요.

비유컨대 그래서 본문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에요.

 

오늘 본문 8:23~25절은.. 내가 그리스도인인데,

그리스도인은 두 시대 사이에 끼어서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항상 헷갈림이 있거든요.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내 맘대로 살면 돼요.

내가 원하는 거 하면 돼요. 

 

그런데 예수를 믿는 다음에는, 신자들의 삶은,

항상 우리의 삶의 목적이 그리스도죠.

 

그런데 내 안에서는 육신의 소욕이, 남아있는 죄성들이 또 작동을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 싸움을 해요.

 

하나의 주인을 섬기고 살았는데, 옛날에 그 주인은 (듣기에 기분 나쁘시겠지만) 마귀였죠.

엡2장에서 하는 표현이 그대로 그래요.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엡2:2

 

그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을 시작하셨어요.

그리고 그 시작하신 일(구원 사역)을, 빌1:6절에서 말씀하는 대로 끝내실 거예요. ↙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이 구절을, 사업이나 사역을 시작했는데,

하나님이 그걸 끝까지 이루어지게 하실 것이다.. 라고 해석, 적용해선 안 되죠.

'내 구원'을 끝까지 이루신다는 뜻이죠. 구원의 완성까지!

 

사람이 시작해서 끝내지 못하는 일들, 용두사미가 되는 일은 허다하지만,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끝내실 거예요.

‘그 일이 네 안에서 벌써 시작됐어!’ 라고 바울은 얘기하는 거예요. 빌1:6

 

여기 긴장이 있죠. 그래서 오늘 이 본문에서 뭘 바라본다고 그래요?

‘탄식하여 양자될 것,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고 했어요. ↙

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성도는 하나님의 양자가 됐다며요.

그런데 여기서 양자 될 것이라고 말하는 건 뭐죠?

성도의 삶에서는 상속받게 되는, 상속이 끝나는 날, 

우리의 구원이 시작됐지만,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날을 의미해요.

그래서 지금과 그날 사이에 긴장이 존재해요.

 

▲그래서 이 긴장 사이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23절에서 말하는 ‘탄식’이 존재해요.

이게 어떤 탄식이냐가 문제인데요.

 

탄식이 없는 거는 신앙이 좋은 증거가 아니예요. 탄식이 있는 거예요.

신자에게는 구원이 아직 다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요.

 

분명히 바울이 앞에 롬6장 말한 것처럼,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맞아요.

그렇지만 우리의 죄성은, 아직 죽을 몸 안에 살아 있어요. 남아 있어요.

 

그리고 성도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already not yet

여전히 양자될 것,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려요. 이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러면 성도의 소망은 뭐예요? 성도가 기다리는 건 뭐예요?

'양자될 것, 우리 몸의 속량'이라고 말했는데,  :23

이게 언제 일어날 것이며, 이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똑같은 말들을, 바울은 이렇게 저렇게 돌려서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18절을 보십시오.

18b절에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 같은 말입니다.

'양자될 것, 우리 몸의 속량'과, 그게 같은 표현이에요.

 

그리고 1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 역시 같은 말입니다.

역시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2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

똑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같은 것을, 표현을 살짝 살짝 달리하는 거죠.

 

그리고 29절로 쑥 넘어가서 보면, 29절에서는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일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고 30절에서 마지막에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건 영화롭게 되는 날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어요. 성도의 구원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러면 ‘양자 될 것’이라고 한 걸 먼저 한번 생각을 해보죠.

23절에서 ‘양자 될 것’이라고 표현했고, ‘곧 우리 몸의 속량’이라고 그랬는데요.

‘waiting for the adoption, to wit, the redemption of our body’ :23

 

‘양자 될 것’은, 조금 아까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29절에서 말한 것도 그래요. 우리는 양자가 법적으로는 이미 됐어요.

근데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죠.

 

그래서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다운..

흠도 없고, 점도 없고, 주름 잡힌 것도 없고, 영광스럽고,   *성화

기가 막히게 멋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우리를 빚어가세요. 완성하실 거예요.

안 믿어지시죠? 설마 내가? 잘은 안 믿어집니다.

 

근데 하나님은 그걸 하실 거래요. 그게 우리의 인생의 시간입니다. 시간을 통해서 하세요.

그리고 우리는 ‘양자될 것’이라고 하는 이 말은, 아직 공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즉 공개적으로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인 것을 영광스럽게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뭘 너 같은 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자식 자랑하실 거랍니다. 자식 자랑하실 거랍니다.

자식 자랑을 온 세상 앞에서 하실 거랍니다.

그날에는 우리의 양자됨의 모든 특권의 상속이, 완벽하게 실행이 될 겁니다.

 

▲또 사도는 이것을 ‘몸의 속량’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the redemption of our body’ :23

 

오늘 설교에서 이게 사실 되게 중요한 개념인데요.

‘속량’이라는 것은 ‘풀려난다, 구원받는다, 해방된다’ 하는 의미입니다.

 

성도의 몸이 속량을 받을 것이라는, ‘몸의 속량’이라고 하는 얘기는

지금은 우리가 좀 묶여있다는 얘기죠. 지금은 우리가 구속을 받고 있다는 얘기죠.

이걸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구원받은 성도의 몸에 대해서, 바울이 로마서에서 쭉 표현하고 있는 맥락들을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는데, 여러분이 6:6절을 한번 가보세요.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으려 함이니’

‘죄의 몸’이라는 표현이 여기 있었습니다.

 

6:12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죽을 몸’이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죽음에 굴복해야 하는 몸입니다. 죽을 겁니다.

 

성도의 몸은 죄로 인해서 죽음에 굴복할 수밖에 없지만, 영혼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도가 죽을 때 다 나타나는 거죠.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죽게 되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요?

 

죽을 때 우리의 영혼과 몸이 다 죽습니까? 안 그래요.

우리의 몸은 죽을 몸이기 때문에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옆에 죽어가는 강도에게 말한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언제까지요?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우리의 죽을 몸이 죽어서 부패하고 썩어서 없어졌어도

부활의 날에 우리의 몸을 부활시키실 것이고,

그 부활한 몸을 우리의 영혼이 만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화로운 구원이 완성되게 될 겁니다.

이게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는 말 속에 들어있는 말입니다. 8:30   *성화를 거쳐서 영화

 

그때 우리의 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처럼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이고,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 영광스러운 영광의 자유로 대체되게 될 겁니다.

피조물들도 그때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게 되겠죠.  :23

 

이렇게 성도의 영혼은, 현재 속량을 받았지만, 몸은 아직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몸은.. 계속 노쇠해 갑니다.

예수 믿으니까 나이를 거꾸로 먹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죽음이 찾아옵니다.

 

성도의 몸은.. 여전히 연약하고 피로와 질병과 고통과 노쇠함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죽음에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종말론적으로 우리는 완성된 게 아니라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건 정말로 우리의 구원이 불확실하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너무나 확실하고 불가역적이나 아직 미완성이다’ 라고 얘기를 하는겁니다.

 

존 스토트는 이거를 굉장히 놀랄 만한 표현을 써서 말을 했는데

우리는 절반만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연약하고 탄식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절반만 구원을 받았다 We are only half saved!'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표현을 해요. '나는 지금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또 중생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됐고,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았고,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앉힘을 받았습니다.'

에베소 2:6을 말하는 거죠.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부활)을 받았고,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앉혀졌다(통치)...’

이건 절대적 사실입니다. 절대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 몸은 아직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already not yet

 

죄가 내 몸 속에 있습니다. 이 죽을 몸이 아직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기는 몸의 속량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몸은 ‘죄의 몸’입니다. 죄가 그 몸 속에서 기회를 잡고 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이게 지금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상태라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몸의 속량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절반만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구원이 불가역적이고 확실하지만 미완성이다’ 하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뭘 기다려야 되겠어요? 완성을 기다리는 거죠.

‘양자될 것,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는 말이 그 뜻이에요. 8:23

 

어정쩡한 상태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수 있는데, 어정쩡한 상태는 좋지는 않죠.

이 어정쩡하다는 것은, 한편 우리가 받은 구원의 절반이라는 것을 표현하기에는 적합하지만

우리가 받은 5장부터 지금까지 얘기했던 영광스러움에는 미치지 못하는 표현이기 때문에

적절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날을 기다려야 한다는 면에선 그렇죠. 어정쩡해요.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말하죠.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겉사람이 낡아진다고 얘기해요. 예수를 이렇게 잘 믿는데도, 겉사람이 낡아진대요.

근데 ‘낡아진다’는 이 표현은 어떤 뜻인가 하면,

예수님이 누가복음에서 ‘너희가 너희의 소유를,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이렇게 말씀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는 좀을 먹는다’ 하고 똑같은 표현이에요. *디아프테이로 perish

‘좀 먹는다’와 ‘낡아진다’라는 말이 같은 단어예요. 부패해지는 거예요. *눅12:33

 

우리의 몸은 노쇠해져요.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고 말을 해요.

 

◑롬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제가 몇 주 전에 말씀드렸어요. ‘믿음이 아니고 소망이었어?’ 그 얘기가 아니고,

‘우리는 바로 이런 소망 안에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여기에는 긴장이 있죠. 왜요? 소망이라는 것은 미래잖아요.

‘구원을 얻었으니라’는 것은 과거 시제를 쓰고 있거든요. 여기에는 긴장이 있어요.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진 거예요.

그러나 또한 완성을 향해서 가고 있고, 완성이 될 거예요. 이런 긴장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절망, 탄식을 23절에서 얘기를 했는데,

이 성도의 탄식이 어떤 것인지요? 이거는 사실 절망의 탄식이 아니에요.

절망의 탄식이 아니고, 제가 ‘피조물의 탄식’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44강

이게 ‘산고’라고 말씀을 드렸잖아요.

 

자식을 낳기 위해서 엄마가 고통을 당하는...

말하자면 희망이 있는...

그런 의미에서 이 ‘탄식’을 우리도 이해를 해야 합니다.

 

왜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맛봤기 때문에, 탄식하는 거라고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신앙 좋은 사람은 탄식하지 않는다? 아니요.

이 탄식이 있는 게 신앙이에요.

 

이 탄식이 없고, 오늘이라는 현재에 나는 그냥 너무 좋아 희희낙낙하고 살아가는 것,

‘어휴 하나님이 너무 좋아.. 하나님이 나한테 이런 환경을 주시고.. 이렇게 해 주시고...’

그게 아니라고요.

 

존 머레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탄식은 현재의 불완전한 상태에 눌려 생기는 탄식이 아니고,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는 탄식이다. 이 탄식은 확신의 결과다!

이 탄식은 그날이 올 걸 알기 때문에 탄식하는 거다!’

 

△제가 이거를 쉽게 설명을 드리려고 생각을 해보니까,

약간 예를 들면... 정확한 예는 아니에요. 그렇지만 그냥 알아서 들으세요.

 

너무너무 사랑하는 사람이 결혼식 날짜를 잡았어요. 일주일이 남았어요.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 자꾸 시계를 보고

‘아직도 월요일이야?’ 이런 이런 탄식, 뭐 이런 것과 비슷하죠.

 

▲자연스럽게 이 탄식의 주제가 ‘소망’의 주제로 연결된다고 그랬는데,

‘우리가 이 소망 안에서 구원을 얻었다’ 이렇게 얘기하죠. :24

 

이런 거예요. 이 미완성의 날들을 우리가 어떻게 지내는가? 소망으로 지내는 거죠.

우리를 향한 죄의 지배가 십자가에서 완전히 종식됐어요. 예수님께서 끊어버리셨어요.

 

그러나 죄의 잔재는.. 죽을 몸 안에 남아있어요. 죄의 통치권은 남아있어요.

퇴위되었지만 죄의 현존은 말살된 건 아니에요.

 

성도는 바로 이 소망 가운데, 그날이 올 것을 기다리면서

죄와 싸우며 때로는 죄와 싸움에서 비통하게 패배를 하고,

그러면서 그날을 또 소망하는 겁니다. 탄식하면서...

 

이것을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라고 표현을 해요. already not yet

이미 우리의 구원은 일어났어요. 그러나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에요.

고난과 영광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18절에서 말한 것처럼, 현재의 고난과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사이에서

그럼 어떻게 살아가야 되겠어요?

 

그냥 물끄러미 ‘뭔가 되겠지..’ 그런 게 아니고,

여기서 얘기하는 그 ‘기다리라’고 하는 말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보세요.

8:25절에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여기 참음으로라고 하는 이 단어는,

이빨을 꽉 깨물고 그냥 이렇게 수동적으로 참는 것이라기보다는,

능동적인 뉘앙스를 전달하는 단어예요.

 

그날은 와! 그날은 기필코 온다.. 주님이 그날을 주실 것이다하는 거예요.

이런 소망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죠.

 

▲이 본문을 지나가기 전에 우리가 하나 좀 살폈으면 하는 것이 있는데

7:24절로 한번 돌아가 보십시다.

거기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게 ‘사망의 몸’이라고 하는 표현을 쓰면서, 그는 탄식을 했습니다.

 

이 탄식과, 오늘 본문 8:23절에서 ‘우리가 속으로 탄식하여’ 라고 하는 이 탄식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여러분? 이거를 안 살피고 가도 되겠지만, 이거는 살피는 게 좀 필요하다 싶습니다.

바울사도가 ‘몸’에 대해서 둘 다 말하고 있습니다.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 그리고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24절의 탄식에 대한 바울의 1차적인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서,

7:25절에서 말한 것과 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까?

8:1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정죄함이 없다’

 

그리고 두 번째 8:2절에, 이것은 실제적이기도 하지만, 영적으로 우리를 해방시켜준 것입니다.

(구원이, 해방이) 일어났습니다. 해결됐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여전히 사망의 몸 안에서 죄와 싸우며,

때때로 죄에게 쓰라린 패배를 경험하며, 고통스러워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을 알았지만, 정죄함이 없다는 것도 알았지만,

이러한 삶 속에서 우리가 또한 살아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요?

 

아까 존 스토트의 설명을 빌리면 ‘절반만 구원을 받은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탄식하는 것이죠.

종말론적인 완성의 날을 향한 소망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몸은.. 더 이상 그날에는 그날에는 죄의 몸도 아니고, 죽을 몸도 아니고,

사망의 몸도 아닙니다. 어떤 몸입니까?

 

고전15장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한 몸과 같이 영화로운 몸이고,

신령한 몸이 될 것입니다.’

 

롬7:24절의 탄식을.. ‘절망에 가까운 탄식’이라고 말한다면,

절망 자체는 아니지만 절망에 가까운 탄식이라고 말한다면,

 

본문 8:23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탄식’은.. 소망에 가득 찬 탄식입니다.

 

우리의 삶은 항상 여러분들이 절망에 가까운 탄식을 7:24절처럼 우리의 삶에서 할 때가 있죠.

그러나 우리는 8:23절의 (소망의) 탄식으로 또 가야 되는 거예요.

 

‘그래 그날은 반드시 오지!’

말라기 4장에서 말한 것처럼 ‘송아지들이 그 축축한 소 외양간에 갇혀 있다가

하나님께서 풀어 주시자, 그냥 햇볕을 받으며 나가서 뛰듯이,

우리를 괴롭게 하던 죄를 짓밟게 되는 날이 온다’고 해요. 그날은 확실히 옵니다.

 

▲40년 전에 신학대학원 시절의 일이 생각납니다.

7:24절의 탄식을 경험하던 가운데,

이런 경험은 우리의 삶에서는 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도대체 이런 거를 어떻게 설명해야 되지? 신자의 이런 삶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존 스토트가 로마서 5장부터 8장을 강의한 <Men Made New>라는 책을 그때 읽고 있었는데,

오늘 본문에 해당되는 내용을 읽고 있었는데,

 

어디서 읽고 있었나 하면, 저녁 때 깜깜한 저녁에,

좌석버스의 맨 뒷칸에서... 버스 전등빛이 어둡고 밝지도 않잖아요.

저는 그 장면이 잊혀지지가 않아요.

 

그때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제 심장을 멎게 할 정도로 제 눈길을 사로잡았던 게

뭔가 하면, 바로 이 문장이었어요. “We are only half saved”

 

어떤 책에서도 저는 이런 표현을 본 적이 없거든요.

‘아 내가 (구원받았지만 아직) 불완전한 존재구나’

망치로 얻어 맞은 것 같이, 그리고 성경의 설명에 눈이 확 뜨어졌어요.

 

그리고 8:23절에 소망의 탄식으로 가는 게,

얼마나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보게 됐어요.

그리고, 열렬하게 참음으로 그날을 고대하고 바라보게, 소망하게 되는 거죠.

 

▲여러분 이런 탄식이 여러분 가운데 거기서 머물러 버리나요?

아예 탄식이 없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에게 있는 탄식은 어떤 겁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영적 싸움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백전백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것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약함과 상처와 질병과 고통과 노쇄함과 죽음이라는 고통이

우리의 삶에는 존재합니다.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반만 구원받은 존재로서, half saved

우리는 몸의 속량,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려야 하는 존재고,

이미와 아직 already not yet 사이에서 종말론적인 긴장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인식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야 우리는 정당하게 확신 가운데에서 소망을 가지고,

‘내가 이 소망 안에서 구원을 얻었어!’ 라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제가 가끔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아담이에요.

아담이 930년을 살았다고 창세기 5장에 말해요. 오래 살았어요.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어요.

 

그 사람은 에덴을 경험한 사람이잖아요.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그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교제를 상실했죠.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부부 사이에 조금도 수치심이라고는 없는 그런 관계가 깨어지고,

부부 싸움도 무지하게 했을 겁니다. 900년 동안 죽지도 않아요.

900년 동안 부부싸움하고 살았을 거예요.

 

하와는 자기 배에서 낳은 두 아들이... 한 아들이 한 아들을 죽이는 일도 경험합니다.

자기들이 지은 죄가 900년 동안 얼마나 비참한 세상을 가져왔는지를

그들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 자체가 형벌 아니었을까요?

 

근데 제가 주목하고 싶은 거는 그게 아니에요. ‘아담은 어떻게 살았을까?’

백년도 안 되는 삶을 살기도 우리는 힘들어 해요. 저는 힘든 것 같아요.

이렇게 인생이 힘든데... ‘아담은 어떻게 930년을 살았을까?’

 

그건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신, 그 오실 메시야를, 3:15

그 언약의 약속을 기억하는 것 말고, 그에게 무슨 소망이 있었을까요?

 

소망은 이런 겁니다. 아담은 이 소망이 아니었으면 살 수가 없었을 것 같아요.

‘이게 혹시 아담이 900세에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건 아닐까?’

아니요. 일반적으로 우리가 추측하건데,

어떤 학자는, 창조된 당일날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 설명이 다 이유가 있어요.

 

그런데 오래지 않아서.. 그들은 범죄했고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무슨 뭘로 사세요? 살만하니까 살겠죠? 그것도 은혜에요.

근데 어떻게 잘 살고 계세요?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복음이 진짜 우리에게 위로인가?

이 세상을 사랑하는 우리에게 진짜 복음은 위로인가?

아니 복음만이 위로일까?’ 그런 거 같아요.

우리 모두에게 그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 영광의 날을 바라보고 소망하는 게 성도에게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소망을 이렇게 썼습니다.

요일3:1~3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우리가 지금 살아가며 가지고 있는 이 몸은, 죽어서 썩어질 몸이에요.

하지만 부활의 날에 우리가 입게 될 영화로운 몸은,

지금의 몸과 상관없이 새롭게 어디서 창조되는 몸이 아니고, 이 몸이 부활하는 겁니다.

 

이 몸이 부활하고 영광의 몸이 될 것이라는 얘기에요. 연속성이 있다는 얘기에요.

그래서 요한은 지금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지금의 몸과 부활의 영화로운 몸은 같은 거예요!’

그것이 바울이 얘기하는 ‘몸의 속량’이라는 소망에 피력되어 있는 의미입니다.

redemption of the body

 

이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바울은 나중에 뭐라고 얘기하나요?

롬12장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 죽을 몸을! 그럴 이유가 있죠. 사도 요한이 뭐라고 그랬어요?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내가 그리스도와 같이 될 것을 알고,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네 몸을 함부로 굴릴 수 없다’ 요일3:3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도마에게 말씀하시죠. ‘만져보라고 못자국과 창자국을 만져보라고’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해 주는 얘기입니까? 흔적이 남을 수 있다는 얘기를 하는 거죠.

 

부활한 저의 몸에, 그리스도를 위한 흔적이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영광스러운 흔적이 내가 부활하는 그날,

그 신령한 몸에 남겨진 흔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소망은 우리를 주를 위해 살려야 합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을 위해서 산 제물이 되게 합니다.

 

로마서 8:18절부터 사도의 시선이 일관되게 향하는 지점은

역사의 끝,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성도의 영화로운 구원의 완성의 그 날에 있습니다.

 

성도가 탄식 중에 소망하는 바, 양자 될 것과 우리 몸의 속량의 날입니다.

사도가 이렇게 자신이 시선을 고정하는 그 자리로 우리의 시선을 초대하는 겁니다.

 

여러분의 삶의 그 지지고볶는 그 삶.. 하나도 소망이 보이지 않는 그 거기에만

집중하지 말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 영광의 날을 소망하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왜요? 성령을 받았으니까!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가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내가 알기 때문에!

 

그 소망이 우리를 이 고난의 세상에서 쓰러지지 않고

그리스도인답게 살게 하는 힘인 것을 알기에

바울은 우리를 그날을 바라보라고 초대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눈앞에 있는 현실에 무너지고 절망하는 일을 되풀이하는 대신,

사도가 바라보는 그 지점 그 영광의 날 그날을 믿음으로 바라고 소망하고

참음으로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들은 살아납니다. 그날을 볼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