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12ㅣ경이 가득한 세상 Wonder-ful World 시8:1~9 Youtube
◈경이 가득한 세상 Wonder-ful World 시8:1~9 2026.07.12.
※설교 마지막 부분이 하이라이트 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를 소중히 여기고 대하십니다!' 이하
▲커피
여러분 커피 좋아하십니까? 커피 한 잔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언제입니까?
일 해야 하는데 집중이 잘 안 될 때,
가장 간절할 때는 고속도로에서 운전해야 되는데 졸릴 때,
휴게소 들러서 종이컵에 커피를 담아서, 서둘러 차에 앉아 또 시동을 겁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커피가 아니고, 사실 카페인입니다.
커피와 카페인... 그게 그거 아닌가요?
아닙니다. 커피에는 카페인이 포함되지만, 카페인은 커피가 아닙니다.
‘나는 피곤하니 커피가 필요해’ 할 때, 그 말은 ‘카페인을 주입해야겠다’는 말입니다.
‘커피 한 잔 하실래요?’ 라는 말은
‘나는 당신과 얘기하고 싶다.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이 좋다’는 말입니다.
카페인은, 종이컵에 담아 마셔도 되지만, 저는 커피는 그렇게 마시기 싫습니다.
이 시간, 제가 좋아하는 잔을 하나 들고 나왔는데요. 예쁘죠?
요게 반 고흐의 ‘아몬드 나무’ 그림입니다. *꽃 피는 아몬드 나무
반 고흐가 평생 살면서, 그의 생전에 아무도 그의 그림을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딱 한 사람, 동생 테오!
그래서 이 동생에게 쓴 편지가 참 많은데, 동생 테오를 참 사랑했는데,
이 테오에게 아들이 태어났을 때, 사랑하는 동생의 아들(조카)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서
그린 ‘아몬드 나무’ 그림입니다.
저는 그날 그날 기분에 따라서, 다른 잔을 꺼내서 커피 마시는 것을 즐깁니다.
여름에 어울리는 잔이 있고, 가을날 분위기에 맞는 잔이 있고,
비오는 날에 꺼내고 싶은 잔, 크리스마스 시즌에 적절한 머그(잔)가 있습니다.
카페인을 담은 종이컵은, 곧 쓰레기통에 버려지지만,
커피 잔은, 마시고 나서도, 잔을 잔장에 고이 보관합니다.
카페인 효과는, 두세 시간 반짝하고 지나가지만,
커피의 잔향과 여운은, 또한 커피 마시며 나누었던 대화는... 오래 가기도 합니다.
그때 열렸던 마음이, 힘들 때 안식처가 되기도 합니다.
저는 미국 유학생활 초기에, 일주일에 한두 번,
아내와 함께 걸어서 근처 커피숍에 가는 시간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때는 돈도 없었고, 시간도 부족해서, 자주 못 갔지만.. 어쨌든 참 좋았습니다.
1999년에 제가 시카고에 처음 갔을 때, 우연히 들렀던 카페에서 맛본 커피 맛이 너무 좋았어요.
지금도 그 브랜드 원두를 주문해서 먹고 있습니다.
△커피만이 아니라 음식도 그렇지요. 음식의 맛, 냄새,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이야기,
음식 나누면서 함께 나누었던 대화들, 표정들... 그래서 음식이 주는 위안이 있습니다.
컴포트 푸드 Comfort food 라는 말도 있지요.
(먹는 이에게 정서적 안정과 어린 시절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음식)
음식에 깃든 추억과 이야기가 있습니다.
엄마가 즐겨 해주던 음식은.. 그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핑 돌기도 합니다.
정성껏 차린 음식은.. 마음을 열게 하고, 마음을 머물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격식을 갖춘 음식으로 대접받으면.. 사람의 무너진 자존감이 위로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먹을 때는, 먼저 칼로리 계산합니다.
여러분, 커피는.. 카페인이 아닙니다.
음식은.. 칼로리가 아닙니다.
▲무지개
200여 년 전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가 이런 노래를 했습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가슴은 뛰노라
나 어린 시절에 그러하였고
어른이 된 지금도 무지개를 보면 가슴이 뛴다
늙어서도 그러할 것이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무지개를 보고도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이니...」
유명한 시입니다.
여러분, 무지개는 오랫동안 인류에게 꿈과 희망의 상징이었습니다.
신비로운 경탄을 자아내는...
어떤 사람은,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무지개를 보고 희망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읽어내려 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17세기에 와서, 데카르트와 뉴턴의 시대에, 과학이 발전했습니다.
‘이 무지개는 사실 빛이 굴절돼서 분광되는 것일 뿐이야.. 스펙트럼이야..’
라고 과학적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틀리지 않습니다.
근데 그때부터 하늘의 신비가, 과학적 현상으로 축소되어 버렸습니다.
◑놀람과 경탄을 회복하자
워즈워스는 19세기 사람이에요.
그는 이런 과학적 사실을 잘 아는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무지개를 보면 가슴이 뛴다’
그러면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다’
어른들이 어린이들에게 배워야 될 점이 많다는 겁니다.
뭘 배워야 됩니까? 놀랄 줄 아는 것, 경탄할 줄 아는 것입니다.
‘와~’ 뭐예요?
영어로 ‘원더’, 한국어로 ‘경이’입니다.
▲여러분, 놀랄 줄 아는 사람에게,
이 세상은 ‘원더풀 월드, 멋진 세상, 경이 가득한 세상’이 됩니다.
여러분, 어떤 세상을 살고 계십니까?
밖에 나가서 다닐 때, 어떤 세상이 여러분 눈에 보입니까?
‘내가 사는 세상이, 전혀 새로운 것이 없고, 지겹고 시시하다’
그러면 둘 중에 하나예요.
-세상이 잘못되었든지..
-내 눈이, 또는 내 마음이 잘못되었든지...
워즈워스, 이 위대한 시인은.. ‘하늘의 무지개를 보고 가슴이 뛴다’ 그랬습니다.
‘만일 무지개를 보고도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노래했습니다.
경이를 잃어버리는 것은요.. 새로움을 잃어버리는 것은요.. 영원히 시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과학은, 있는 힘을 다해서, 인간의 삶을 개선하려고 노력합니다.
동시에 있는 힘을 다해서, 세상을 시시하게 만들고,
우리의 삶을 메마르게 만드는...
경이 wonder 를 볼 줄 아는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C S 루이스가 쓴 <나니아 연대기>는 유명한 소설이죠.
거기에 인상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새벽 출정호의 항해" 라고 하는 대목에서,
아이들이 라만두 라는 노인을 만나는데요.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나는 쉬고 있는 별이야’ 라고 소개하는 거예요.
그런데 한 아이가 따지듯이 말합니다.
‘우리 세계에서는 별은요, 그냥 거대한 불타는 가스 덩어리예요.
과학 시간에 그렇게 배웠어요.’
그때 노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너희 세계에서도, 그것은 별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일 뿐,
별이 무언가는 아니란다’
△여러분, 사람이 무엇으로 만들어졌어요? 단백질, 그죠?
얼마간의 인, 그게 사람의 전부입니까?
당연히 아니죠!
별...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선망하는 사람들을 ‘스타’라고 그러잖아요.
‘별은 가스 덩어리다’ 라는 과학적 사실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저 별은 나의 별’ 그러면서요.
별 안에 꿈을 싣고, 반짝이는 눈으로 서로 사랑을 주고받기도 하잖아요.
음식에서 칼로리가, 성분표가 전부가 아니듯이,
‘별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가, 별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를, 다 말해주지 못합니다.
◑그 별을 다윗은 옳게 바라보았습니다.
시8: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다윗은 하늘의 별을 보면서..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경탄하는 순간,
그는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을 알고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음을 보았습니다.
텅 빈 공간처럼 보이는 밤 하늘에,
그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신비를 보고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래 여러분 우주는.. 코스모스라고 그랬습니다.
‘조화로운 (우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즘에 사람들은, 우주를 뭐라고 하는가 하면 스페이스라고 해요.
우주선을 Space ship 이라고 그러잖아요.
스페이스가 뭐예요? 그냥 텅 빈 공간이에요.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 의미도 없어요.
현대인은 이 우주를 그냥 스페이스, 텅 빈 공간으로 말하는 세계관에 익숙합니다.
그래까 세계가 비어 가고, 인생이 비어 가는 것입니다.
▲옛날에 고대 세계에, 인류 전체의 지식이 아주 작을 때에,
그때 어린이들은, 이 세계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아주 많았습니다.
고대 사회... 그때 자연은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애굽은 태양을 섬겼고, 바벨론은 달과 별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주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창세기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창1: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두 큰 광명체가 뭘까요? 해와 달을 말하죠.
그런데 왜 하필 ‘해를 만드시고 달을 만드시고'라고 말하면 돼지,
왜 ’광명체‘라고 굉장히 건조한 말로 했을까요?
이거는요. 여러분, 이때 이미 해와 달이 신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신의 이름'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거예요. '광명체일 뿐이야! 저게 신이 아니고 광명체야!'
여러분, 해를 보고 두려워하고, 달을 보고 소원을 비는데,
'그건 신이 아니고 하나님 지으신 피조물이요, 광명체일 뿐이야!' 라고 말하는 거예요.
학자들은 이것을 ’자연의 비신화와‘
혹은 ’자연의 비신비화 de-mystification‘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성경에 바로 이런 사고가,
과학의 역사를 공부해보면, 서구과학의 발전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자연이 신이다’ 그러면요.
여러분 ‘바다의 신이 노해서 무슨 일이 생겼다’
지금까지도 (우리가 사는) 포항에서, 아직도 바다를 향해 제사 지내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자연을 탐구할 수 없습니다. 자연을 두려워할 것 뿐이죠.
‘어떻게 하면 바다 신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을까?’
그런데 여러분 ‘이 모든 자연이 피조물일 뿐이다’라고 했기 때문에,
탐구를 할 수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이 지으셨기 때문에, 그 안에 어떤 신적인 하나님의 질서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알아보자’ 하는 게 과학의 출발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기독교 국가에서 과학이 먼저 발달한 거잖아요.
◑과학주의의 반성이 필요
그런데 그렇게 발전한 과학이,
어느새 그 자체로 또 다른 ‘신화’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과학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줄 안다’라고 생각하고,
‘측정되지 않는 것은 의미가 없다,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생각,
그래서 우리가 과학주의라고 부릅니다.
과학이 아니고, 과학주의가 문제입니다.
과학 자체가 하나의 신화가 되어버렸습니다.
※과학주의는.. 과학적 방법이나 경험적으로 검증된 지식만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 태도나 신념을 뜻합니다.
모든 문제 해결과 세계관을 과학에 의존하며,
과학의 권위를 비과학적인 영역에까지 무리하게 확장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즉 ‘과학만능주의’ 또는 ‘과학지상주의’가 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은.. 옛날 고대의 세계에서, 원래 숭배의 대상이었는데
근대로 들어오면서 탐구의 대상이 되었죠. 여기까지는 성경이 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과학이 자기 마음대로 뻗어나가서,
자연이 (과학에 의한) 착취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별은 가스 덩어리일 뿐이다’ 라고 선언하면서,
비신화와 함께, 신비도 함께 사라져버린 겁니다.
여러분 ‘측정 가능한 것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과학의 대 전제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모릅니다.
△가끔씩 여러분, 집에서 농담반 진담반으로 자녀들이 그럴 때가 있죠.
‘엄마 아빠가 나에게 해준 게 뭐야?’
‘그래, 한 번 따져보자’ 그래서 부모가 팔 걷어붙이고
‘계산기 가지고 와가지고 등록금 얼마, 밥값 얼마,
지금까지 네가 잔 방 값도 다 계산해’ 그거 다 계산해보세요.
그걸 다 계산해서 합친다고 해서, 부모의 사랑을 다 측정할 수 있습니까? No
부모의 나를 향한 기대, 내가 아플 때 흘리던 눈물,
잠 못 들고 나를 걱정하던 그 시간,
아이가 늦게 들어오면 발 동동 구르면서 힘들어하던 그 순간,
내가 잘 되기를 바라고 드렸던 그 모든 간절한 기도,
그 안에 있는 모든 의미를.. 전부 다 수치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과학으로 증명 안 되죠.
여러분, 분명한 것은, 이 대상의 세계는 무한히 넓은데, 인간의 지식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렇죠? 인간의 지식이...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전부 다 알지는 못합니다.
△예를 들어서, 이 우주의 모든 과학적 사실만 하더라도,
우리 대상세계, 우리 모든 지식의 대상세계가
줄여서 말하면, 우리 예배당만큼 크다고 생각하십시다.
(축구공을 들어보이며)
그 중에서 인간이 아는 부분은 이 축구공 하나만 합니다. *아주 작습니다.
인간의 지식이 이 축구공만 하다 할 때에,
인간이 자신의 무지를 자각할 수 있는 조건이 뭡니까?
‘내가 아는 게 별로 없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는 것은, 내 지식의 표면인 거예요.
내가 아는 세계와, 모르는 세계가 만나는 부분밖에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이것만 아는데.. 저기에 있는 무엇을 내가 안다, 모른다 말할 수가 없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미지의 세계
그래서 모든 인간의 지식은,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아는 것이 요만하다. 탁구공만하다‘ 그럼 어떤 생각을 가질까요?
(탁구공을 들어보이며)
내 지식이 작기 때문에요. 나의 무지에 대한 자각도 대단히 작습니다. 그렇죠?
여러분, 인류가 남긴 모든 말 중에, 성경을 제외하면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말이
소크라테스가 했던 말이에요. ‘너 자신을 알라!’
무슨 말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지혜롭다고? 나는 아니야..’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지혜. 지혜’ 그러니까, 소크라테스는
‘그래, 내가 만약에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지혜로운 면이 있다면,
그것은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라고 뜻에서 한 말이 ‘너 자신을 알라’란 말이에요.
즉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지혜가, 지식이 늘어날수록, 지혜로워질수록
자신의 무지에 대한 자각은 함께 늘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동양에서도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그랬죠.
▲그런데 현대에 와서 왜 이 과학주의의 맹신이 시작됐는가 하면,
속도의 문제입니다. 지식의 양이 문제가 아니고 속도의 문제예요.
여러분, 수천 년 동안 인간의 지식은 거의 평평하게 조금씩 발달했습니다.
그러다가 17, 18세기 오면서,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달했어요.
기차가 생기고, 타이타닉 호를 만들고,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그러니까 이 ‘속도’에 도착이 된 겁니다.
'어린이의 세계'가 있고, *상상력과 순수가 풍부했던 고대 세계를 지칭하는 말
이 고대의 순진한 어린이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인간이 많이 똑똑해졌다, 어른이 되었다’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게 아니고요.
지금의 인류는 ‘사춘기 청소년’같습니다.
내가 너무 똑똑해지니까.. 뭐 학교에서 배우는 게 많으니까...
(사춘기 청소년처럼) 엄마 아빠가 우습게 보이는 거에요.
지금 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우습게 보고 있다는 거죠. ‘사춘기 청소년’이니까!
아이들이 중학생쯤 되면 그러죠.
‘나 이제 엄마, 아빠 없어도 잘해!’
그래서 밖에 나가면요. 뭐 잘 하는 것처럼 잠시는 그렇게 보여요.
그러다가 조금만 뭐가 잘 안 되면, 집에 전화 오잖아요. ‘엄마, 아빠 도와줘요!’
(과학주의, 이성적 똑똑함만 가지고는 못 삽니다)
△여러분 미국의 학교들이 1962년에, 공립학교에서 기도를 못하게 했습니다.
근데 이게 기도를 못하게 정책적으로 정했는데, 계속 유지되는 게 아니라,
가끔씩 살아나요.
2001년의 911 아시죠? 이게 한 번 어려움이 생기니까, 사람들이 다시 기도를 하는 거예요.
학교에서도요.
여러분, 인간이 ‘내가 얼마나 연약하고 아는 것이 얼마나 작은가?’
그걸 알수록 인간은 겸손해지고,
이 세계에는 내가 모르는 신비가 많다는 것을, 비로소 인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근대에 와서 사람들의 지식이 늘어나면서요.
‘자연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하면,
이런 툴박스, 공구 상자로 생각을 했습니다. (툴 박스를 보여주며)
이전에는 자연이 경이의 대상이었는데,
혹은 함께 살아가는 친구쯤으로 여겼는데요.
이제 자연에서 꺼내 씁니다.
망치가 필요하면, 망치를 꺼내 쓰고 (망치를 꺼내서 보여줌)
드라이버가 필요하면 드라이버를 꺼내 쓰듯이...
물을 끌어와서 수력 발전을 하고,
희토류를 꺼내서 반도체를 만들고,
석유를 끌어와서 자동차를 움직이고...
그래서 지금 현대인에게는요. 이 자연이 삶의 동반자가 아니고, 도구일 뿐입니다.
큰 도구 상자, 공구 상자!
그렇게 살다 보니까.. 모든 것을 도구로 생각하는 거예요.
심지어 하나님도 도구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왜 필요합니까?
내 마음이 낙심될 때..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해요.
예배 잘 드리면.. 내가 힐링될 것 같아요.
우리 집 식구가 아파요.. 그러면 마지 못해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부분에서 어떤 내 필요를 채워줄 수 있을까?’
하나님도 '도구상자 tool box' 가 되고 말았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웃도 도구로 생각을 합니다.
‘이 사람을 알아 놓으면 내 삶에 어떻게 도움이 될까?’
그런 계산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작용하잖아요.
그래서 줄 자를 가지고, 이 사람의 견적을 내 보고,
그의 스펙을 보고,
‘그가 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혹은 돋보기로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지? 내가 가까이 할 수 있을까?
멀리 하는 게 도움이 될까?’ 라고 생각을 합니다.
*과학주의가 ‘도구상자 문화’를 만들었죠.
이런 세계를 살아가다 보면,
자연도 도구상자로,
하나님도 도구상자로,
이웃도 심지어 가족도.. 도구상자로 여깁니다.
‘내 자녀가.. 내 (부모의) 열등감을 어떻게 치유해줄 수 있을까?’
이렇게 ‘식구도’ 도구 중에 하나가 되어 버리고 말면,
인간이 자기 자신을 보는 눈도 바뀝니다.
▲인간의 도구화가 판 치는 세상
요즘 젊은이들이 워낙 취직하기 힘드니까요.
이 취직의 관문을 넘는 것이, 우리의 생각과 인성에 굉장히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 같은 거 보면, 그런 거 많이 나오잖아요.
면접 보는 순간.. 앞에 느끼하게 생긴 50대 아저씨가 앉아있고, 돋보기를 끼고 있습니다.
돋보기를 코밑으로 내려서 이력서를 보죠. 지원자의 스펙을 보죠.
그리고 다시 돋보기를 들어서 사람을 봅니다. 이 두 시각이 함께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서류에 나와 있는 내가 평가받는’ 거죠.
그래서 이 젊은이들이 끊임없이, 이력서 스펙에 한두 줄 추가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 돋보기 낀 아저씨의 시각’이
내 인생의 가치를 결정해버리는 겁니다.
△이제 앞으로 조금 바뀔 수도 있어요.
이러면 ‘스마트 안경’이라는 거 아십니까? 벌써 시중에 나와 있습니다.
안경 딱 끼면, 사람 얼굴을 인식해가지고, 그 사람의 스펙이 쫙 나오는 거예요.
신기하죠? 면접 볼 때 좋을 것 같아요.
아마도 이거 좋아하는 사람들이 정치인일 것 같아요.
이 스마트 안경 쓰고 다니면, 저기서 누가 다가오면
‘저 사람은 상인회 회장이야’, ‘저 사람은 무슨 고등학교 동문회 실세야’
그렇게 미리 알려주면, 정치하기 얼마나 좋겠어요?
모르겠어요. 미래의 어느 날에는, 목사님들도 그 안경을 끼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집사님, 둘째 아들이 병원에 입원했다는데 어떻게 됐나요?’
이렇게 스마트폰, 스마트 안경이 알려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모르겠어요. 어쩌면 이게 이제 컨택트 렌즈로 들어와서,
인간 눈 자체를, 인간의 머리 자체를, 개선시킨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이전에 사실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렇죠?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 학생들은 다 알아요.
‘선생님이 나를 바라볼 때,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선생님 사이에 성적표가 있는’ 거예요.
‘이 아이는 몇 등짜리야..’
‘이 아이는 이렇게 해봐야 대학 갈 가능성 없어’ 그러면 그냥 제끼고 있는 거예요.
이러한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 자녀들의, 우리 젊은이들의, 우리 모두의 자존감이 형편없이 낮아져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자녀를 소중히 여기고 대하십니다!
이런 세계에서 시편 8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8: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아멘!
시인은 노래합니다.
‘하나님, 이 세상이 참 아름답습니다.
하나님, 이 세계는 텅 빈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합니다.’
그 다음에 자신을 보는 거예요.
‘사람이 무엇이기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알고, 하나님의 영광을 알면..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거예요.
‘사람이 무엇이관데’ .. 이 말은요.
‘내가 무슨 쓸모가 있길래’ 라고 하는 말씀이죠.
여러분, 존재의 가치는 늘 쓸모보다 큽니다. 쓸모와 다릅니다.★
여러분, 오늘날 같은 세상.. 옛날보다 훨씬 더 좋은 집에 살고,
다 자동차 몰고 다니고.. 피부도 여러분 20년, 30년의 사람들에 비하면
얼마나 좋아졌는지, 예뻐졌는지 모릅니다. 옷도 예쁜 거 입고 다니고요.
근데 자존감은 옛날보다 형편없이 낮아졌습니다. 왜 그래요?
쓸모로, 유용성으로, 도구상자처럼 인간을 대하는 이 시각이 편만하기 때문이에요.
그 시각으로 이웃도 대하고.. 나 자신도 대하고..
‘야 너 그래서 어디에 써먹을래?’ 라고 내 자녀도 그런 눈으로 대하는 거예요.
시8:4절은 우리가 회복해야 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시편 8편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8: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하나님이 세상을 무엇으로 지으셨어요?
창세기 1장에 말씀이라고 나오잖아요.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위 8:3절은 ‘시적인 표현’이에요.
‘하나님이 손가락으로 세상을 지으셨다’라는 말이, 도대체 왜 필요.한가요?
다윗이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지금 ‘로봇 공학’이 아주 많이 발달했습니다.
예를 들면 로봇이 1톤짜리 무게를 쉽게 드는데요.
‘이거를 2톤, 3톤, 10톤으로 어떻게 개선해봐라’ 하면, 쉽게 해결합니다.
로봇이 그런 일은, 쉽게 해냅니다.
근데 로봇 공학자들이 하는 말이, 로봇이 정말 힘들어하는 것, 잘 못하는 게
신발 끈 묶는 거래요.
여러분, 신발 끈 묶는 것, 이거는 등학생도 하잖아요.
사람은 그 손가락으로 쉽게 이걸 배웁니다.
근데 로봇에겐 이게 너무 힘든 거예요.
매듭을 지을 때, 어느 정도 힘을 주고, 어느 정도 힘을 빼야 되는지,
이 로봇들이, 휴머노이드 로봇들이, 이세돌에게 바둑도 이기고,
우리가 평생 걸려도 공부하기 힘든 것들을, 몇 분 만에 다 공부해서
정리해내는 수준에 이르렀지만,
초등학생이 손가락으로 할 수 있는 신발끈을 잘 못 맨다... 이러면 놀랍지 않습니까?
고양이 키워 본 분들은.. 고양이를 이렇게 만져주면 좋아합니다.
정말 좋으면 그릉그릉 소리를 내면서, 이렇게 아주 만족해하죠.
그런데 아이들이 한 서너 살만 돼도, 고양이 만져주는 거 이거 배울 수 있습니다.
고양이와 교감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것을 로봇은 하기 힘듭니다. 로봇은 고양이와 교감이 안 되는 거예요.
그 터치, 손가락의 미세한 터치를 배우는 게 대단히 힘들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머플러가 있다고 할 때에, 이 머플러를 공장에서 만들 때
‘잘 접어서 넣어라’ 라는 것도, 로봇은 잘 못한다는 것 같아요.
최근에 조금씩 조금씩 연구돼서 개선된다고 합니다.
청바지처럼 두꺼운 패브릭(섬유)은 잘 다루는데,
아주 부드러운 패브릭을 만지거나, 혹은 이거를 목에 메어줘라,
그러면 로봇은 잘 못합니다. 손가락이 아직 잘 발달되어있지 않기 때문이죠.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주의 하늘’ 이라는 말,
여러분 저는 이 표현이, 다윗의 인생의 고백에서 나온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전부 다 다른 감각으로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터치하십니다.
네가 아파하는 것, 네가 좋아하는 것, 네가 힘들어하는 것,
네가 눈물 흘리는 대목... 우리는 각자가 다 다르잖아요.
저는 목회하면서 절실하게 그것을 느낍니다.
같은 설교를 해도요.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각각 다 다르게 터치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의 고백은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There is none like you 찬양
내 마음을,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딱 잘 만져 쓰다듬어주시는 분은
세상에 없다 라는 거예요.
여러분 그 섬세한 돌보심 안에서 우리가 자라납니다.
◑하나님은 나를 보시고, 감탄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우리를 존귀하게 여기는 분입니다.
여러분, 갓난아이가 자라나면서 받는 사랑,
그 사랑 중에서도 ‘감탄이 쌓이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발달 심리학자들이 그럽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아기가 처음에 누워만 있다가, 자기가 스스로 뒤집잖아요.
그럼 엄마가 어떻게 합니까? 엄청 놀라워하고 감탄합니다.
아기가 처음 일어나가지고 걸으면, 서서 첫 발을 떼면.. 온 집안이 난리가 나요.
놀랍게 감탄을 합니다.
아기가 그냥 뭐 옹알거리다가.. 한두 마디 말을 하기 시작하면,
엄마는 ‘우리 아이 천재다’ 그러고요.
그 감탄, 그 감탄이 차곡차곡 쌓여가면서.. 아기가 사람이 되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나를 보고 좋아해주고
나를 보고 원더, 경이롭게 느끼는 그 엄마의 눈빛, 아빠의 눈빛을 내재화하면서 internalize
아이는 자기 존중을 배우는 거예요. 자존감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선생님들도 좋은 선생님은요. 감탄할 줄 아는 선생님입니다.
칭찬도 좋지만 감탄, 원더, 어드마이어 admire 하는 힘이 영혼을 살립니다.
양육자는 칭찬의 기술을 넘어서,
열린 마음으로 존재의 아름다움을 탐색할 줄 아는 능력!
그게 중요합니다. 그게 성숙한 전문 양육자죠!
▲그래서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요.
그 학생 안에, 이 아이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아는 거예요.
그래 혹시 이 아이가 좀 헤매더라도, 더듬거리더라도
여전히 그 안에 있는 아름다움과 가능성이 반짝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좋은 선생님인 거예요. 그렇죠?
상대의 말에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는 돌봄 가득한 경청 careful listening!
우리 9월달에 이 주제로 함께 말씀드릴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감탄의 사람으로 자라가야, 감탄할 줄 알아야, 그 능력을 다시 회복해요.
우리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는 거예요.
무지개를 보고도 경탄할 줄 아는.. 그래서 여러분, 어린이가 어른의 아버지니까
어린이에게 배워야 되는 겁니다.
학생과 선생 사이에 성적표가 있지 않고 감탄이 있다면요.
여러분 그 선생님은 아이를 살릴 수 있습니다.
감탄받아본 사람이 감탄할 줄 알고,
존귀여김을 받아본 사람이 남을 존귀여깁니다.
결국 인생은 어떻게 보면요. 감탄받고 감탄하는 삶이에요.
여러분 감탄이 얼마나 기쁩니까? 내가 감탄받는 게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먼저 감탄해 주신 거예요. ‘보시기에 좋았더라’ 할렐루야!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은 그를 말씀하셨어요.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으리라’
‘야, 그 사람 이것밖에 안 돼?’
스펙으로, 경력으로, 생산성으로... 그렇게 헤아린다면,
‘너희 스스로도 그런 헤아림을 받을 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날카로운 분석의 칼날을 사람들에게 들이댄다면,
그 칼날은 당신에게도 향할 것입니다.
그래서 대단히 메마르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감탄하라 감탄 받을 것이다!’
여러분 놀랄 줄 아는 경이를 회복하는 은혜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플라톤이 그런 말을 했어요.
‘놀라움이야말로 철학자의 마음이다!’
철학은 어디서 시작된다고요? 놀라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같은 것을 보고도요, 같은 말을 듣고요,
‘와~’ 라고 wonder, wondrous, wonderful, 놀랄 줄 아는 사람이
결국에는 진리에 이른다는 겁니다.
여러분, 현대인들은 감탄을 잃어버렸습니다. 내 마음이 메말라있기도 하고요.
또 하나는 눈치 본다고 그래요.
별로인 것 같은데 자꾸 감탄하면.. 나를 아주 이상한 사람 취급할까봐 입을 닫아버리죠.
그래서 좋아도.. 침묵하고,
맛있어도.. 맛있다는 표현을 안 하고 사는 거예요.
여러분 그러지 말고요. 맛있으면.. 맛있다,
꽃이 예쁘면.. 예쁘다
그러는 거예요. 표현하고, 감탄하는 겁니다.
내 눈에 예쁘면.. 예쁘다 그러는 거예요. 그렇게 사는 거예요.
그렇게 사는 사람이 훨씬 더 풍성한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도저히 감탄할 줄 모르고, 놀랄 줄 모르는..
‘놀람의 세포가 다 죽어버린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이 오셨어요.
막1: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사람들이 경탄한 거예요.
말씀을 마치고 나서 27절에 또 뭐예요?
막1: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예수님이 말씀하시자마자 전부 다 진리를 믿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모두의 반응이여 ‘놀랐다’는 거예요.
거기서 우리의 딱딱한 마음의 균열이 가고 생명이 심겨지는 것입니다.
진리는 언제나 놀랄 줄 아는 사람, 원더할 줄 아는 사람, 경탄의 문을 통해서 들어옵니다.
▲시편 8편을 다시 보면, 1절과 9절이 똑같죠.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1절을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9절 함께 읽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예 처음에 가졌던 그 마음 끝까지 가는 거에요.
경탄으로 시작해서, 경탄으로 마칩니다.
여러분 이 사이에 뭐가 있었습니까? 2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8: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이 입으로 권능을 세우시며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대적, 원수, 보복자들.. 피튀기는 전쟁터의 은유죠. 생존 전쟁이 있는 겁니다.
다윗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노래했다고 했어요.
그의 인생이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치열한 생존 경쟁이 있었고요.
국가를 경영하는데 골치 아픈 문제가 많았어요.
대충 살아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경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저는 이 시편 8편을
‘다윗의 인생, 한 인생의 압축’으로 보고 싶습니다.
어릴 때 우리가 경탄했습니다. ‘너무 예뻐요. 너무 놀라워요.’
그런데 쭉 가서 원수와 대적자, 보복자들...
그 무슨 엄청난 그 틈에서 실망하기도 하고, 속기도 하고, 속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마음이 딱딱해졌을 수 있는데,
마지막까지 우리 인생의 마지막 고백까지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할 수 있다면, 즉 경탄할 수 있다면,
마지막에 ‘제 인생 전체도 하나님 아름다운 인생이었습니다...’ 고백하게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 80, 90세 사는 동안에 얼마나 많이 사람에 대해서 실망했어요?
‘저 사람 참 괜찮은 사람이야’ 감탄했는데 실망시키잖아요. 배신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처음 배우자 만났을 때 얼마나 가슴이 뛰었습니까?
하늘의 무지개를 보고 뛰는 것하고는 비교할 수 없이 가슴이 뛰었지만
10년 20년 살다 보니까 ‘그냥 뭐 사는 거지...’ 그렇습니까?
여러분 배우자와 함께 30년 40년을 살고도
여전히 가슴이 설레이고 함께하는 시간에 눈이 반짝인다면.. 복된 사람인 줄 믿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그 주님의 은총의 빛 아래서, 이 세상이 얼마나 멋진지...
나에게 허락하신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는 계속해서 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올해 시작하면서 제가 이런 간판을 소개했죠.
‘커피 온 더 런’
이게 고속도로 휴게소에 있는 커피집입니다.
그냥 지나가다가 대충 카페인 주입하는 게 아니고요. 잠시 커피 마셔도 됩니다.
‘온 저니’에서 마셔도 온전히 마실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 앞으로 한 주 동안 살아갈 때에,
지난 주와 똑같이 똑같은 루틴으로 똑같은 사람들 만나면서 살아가겠지만
내 눈이 달라진다면, 내 마음이 달라진다면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계, 원더풀 월드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별은 가스 덩어리가 아닙니다. 커피는 카페인이 아닙니다.
음식은 칼로리가 아닙니다. 사람은 단백질 덩어리가 아닙니다.
세상은 도구 상자가 아니에요.
우리가 어린아이부터 Wonderful world 알게 되면요.
우리의 삶이 meaningful life 의미 가득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럴 때에 graceful한 관계를 맺어갈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해 갈 줄 믿습니다.
오늘부터 3주일 동안에 이 말씀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8월을 건너서 9월에 가서 4주 동안의 careful listening(경청)
그 모든 아름다움을 알게 하는 보석같은 순간을 놓치지 않게 하는 우리의 마음,
들을 줄 아는 마음, 돌봄 가득한 경청을 함께 배우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멋진 세상에 의미 가득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지
하나님이 주시는 그 사랑 안에서 우리 삶이 얼마나 원더풀하게 바뀔 수 있는지
기대로 가득 찬 우리 모두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