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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39편 데스티니를 따라 살면 삶이 풍성해진다

LNCK 2026. 7. 30. 09:00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데스티니>

데스티니 [데스티니 1] - 금요예배 설교 Youtube

 

◈데스티니를 따라 살면, 삶이 풍성해진다     시139:14~16          2026년  [데스티니 1강]

 

시139:14~16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위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시대요.

나를 은밀한 데서 지으셨는데 기이하게 지으셨는데,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해요.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나를 위해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무슨 얘기예요?

하나님께서 내가 잉태되기도 전에, 나에 대한 계획을 다 가지고 계셨다는 거예요.

 

내가 세상에 존재하기도 전에, 이미 나에 대한 계획을

다 하나님의 책에 기록해 놓으셨다고... 성경이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는데, 언제부터 가지고 계셨냐면

천지를 지으시기 전부터 가지고 계셨어요.

세상을 창조하기도 전부터, 우리 각 사람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는 거예요.

 

그 계획 가운데 저와 여러분이 이곳에 존재하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도 우연히 존재하게 된 사람은 없어요.

그냥 어떻게 어떻게 하다 보니까,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져 존재하게 되는...

이런 건 없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도 그런 사람은 없고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섬세하고 복된 계획 가운데 지음받은 줄 믿습니다.

 

그래서 그 계획을 뭐라고 그러냐면 '데스티니'라고 부르는 거죠.

제가 데스티니 destiny 라고 영어 단어를 사용하니까

좀 불편해하시는 분들도 있는 것 같아요.

 

▲'아니 목사가 잘난 체하려고 영어 쓰고 있어?' 하는데,

제가 잘난 체하려고 그러는 건 전혀 아니고요.

이 단어는 한글로 번역이 정확하게 안 되는 단어예요.

 

그게 번역을 하다 보면, 제대로 한글로 번역할 수 없는 말들이 있죠.

영어에는 있는데, 우리말에는 없고... 그러면 그런 없는 말들은 어떻게 해야 되냐면

길게 풀어서 설명을 해야 됩니다.

근데 길게 풀어서 설명을 하면, 그 내용이 잘 전달이 안 돼요.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냥 원어를 써야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할렐루야’도 여러분 한국말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할렐루야의 뜻이 뭘까요?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그렇게 풀어서 쓰기보다는,

우리가 그냥 ‘할렐루야!’ 할 때, 그 안에 담기는 뜻이 더 잘 전달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냥 그 말을 사용하잖아요. ‘데스티니’도 똑같습니다.

 

이게 한국은 유교 불교 문화권이기 때문에,

그 단어 속에 어쩔 수 없이 유교적이고 불교적인 의미들이 담겨요.

‘데스티니’를 가장 비슷하게 번역할 수 있는 말은 뭐냐면,

그것은 뭐 ‘부르심, 소명, 운명’ 그런 식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제일 가까운 번역은 ‘팔자’예요.

 

그런데 이 ‘팔자’라는 말이, 이게 사실은 윤회사상을 담고 있는 말이잖아요.

그러니까 기독교적인 단어로 사용하기에는 참 힘든 단어예요.

 

그래서 ‘팔자’ 이러면, 저는 그런 의미로 얘기하지 않았을지라도,

듣는 사람들은 이미 그 단어 안에 담겨있는 의미들이 있기 때문에, 그게 막 섞이게 됩니다.

그런 내용들이 섞이게 돼서, 잘못된 혼합적인... 그런 걸 혼합주의라고 하죠.

 

그래서 한 나라에 복음이 들어갈 때, 그 나라의 문화하고 섞여가지고서

복음이 이상하게 변하는 걸 ‘혼합주의’라고 하는데, 그런 현상들이 개인적으로 일어나게 돼요.

 

그래서 그러는 것보다는, 그냥 그렇게 어려운 단어는 아니니까, 발음이 어렵진 않잖아요.

‘데스티니!’ 이렇게 하면 되니까, 그냥 한국말이다 생각하고,

‘없던 한국말 하나 만들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 거 사실 많잖아요. 할렐루야도 그렇고, TV도 그렇고, 라디오도 그렇고,

없던 것을 한국말(외래어)로 만들어 쓰는 거잖아요.

그렇게 없던 한국말 하나 만들었다 생각하시고, 사용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신조어들 계속 만들잖아요. 없던 말들 만들어 쓰잖아요.

 

데스티니라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를 다 뺀 팔자라는 뜻입니다.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팔자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창조주가 계시기 때문에,

그 창조주가 우리의 팔자를 기획해 놓으셨다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이 어떤 팔자로 살아갈지를, 태초부터 다 계획해 놓으셨다는 거예요.

 

근데 방금 제가 ‘팔자’라고, 이렇게 얘기하니까, 여러분이 다 웃잖아요.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팔자’ 개념과, 섞이니까 그래요...

그래서 ‘데스티니’라는 용어를 계속 쓰겠습니다.

 

그래서 이 ‘데스티니’라는 것을 다 이렇게 계획을 해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보니까 아주 ‘파워 J'이세요.               *MBTI에서 J유형

 

얼마나 빨리 계획을 하시냐면, 태초부터 아직 지구도 안 만드셨는데

저와 여러분 만들 계획부터 세우셨다는 거예요.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에 목적이 있다면, 그 데스티니를 발견하고 이루어가는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계획을 발견하고 이루어가는 복이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데스티니 안에는 여러가지 속성들을 하나님 집어넣으셨는데,

우리 각자가 자기 데스티니의 길에 들어서면 복을 누리게 되어있어요.

 

복을... 처음에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뭐라 그러셨지요?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창1:28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과 사람을 창조하시고 나서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그러니까 사람 창조하시고 제일 먼저 나온 단어가 뭐냐면 ’복을 주시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뭐였냐면 ’복 주는‘ 거였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을 창조하시고는, 제일 먼저 하신 게 ’복 받아라‘ 하고 복부터 주신 거예요.

그것이 사람을 창조한 가장 본질적인 이유라는 거죠.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을 향한 데스티니는 뭐냐면, 본질적으로 복을 누리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은 복 주시는 분이세요. 아멘!

 

▲자 이 ’복‘이라는 것의 의미는 뭐냐면, 히브리 단어에서 복이라는 의미는 ’많다, 풍성하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풍성해진다는 거예요. 우리 삶이 풍성해진다는 거예요.

열매도 풍성해지고.. 삶의 기쁨도 풍성해지고.. 관계도 풍성해지고..

많아지고 풍성해지는 것이 복입니다.

 

그래서 데스티니의 길에 들어서게 되면, 뭐가 있냐 하면 복이 있어요.

반대로 데스티니의 길에서 벗어나면 어떻게 될까요?

복이 없는 거지요. 데스티니에서 멀어지면 복이 없습니다.

 

복이 없는 것을 뭐라 그러냐면 ’저주‘라 그래요.

저주에 대한 개념은 제가 여러 번 설명을 했죠.

 

그리심산과 에발산이 나오죠.

그리심산에서는 복을 선포하라고 하셨고, 에발산에서는 저주를 선포하라고 하셨는데,

이게 복과 저주를 비주얼라이즈(시각화) 하는 거거든요. 신27:11~13, 수8:30~35

 

그리심산은 아주 풍성한 산이에요. 나무도 많고 녹지고 그런 곳인데

반면에 에발산은 민둥산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산,

그래서 이 그리심산에서 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했을 때는

복이 뭐고 저주가 뭔가라는 것을 이렇게 비주얼라이즈 하는 거예요.

 

그래서 복이 뭐냐 하면.. 많고 풍성한 것이고

저주는 없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것을 저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데스티니의 길에 들어서게 되면, 무슨 현상이 있냐 하면 '풍성함'이 있어요.

마음도 풍성하고, 감사하고, 감격하고, 기쁘고 즐겁고... 그게 데스티니 안에 있어요.

 

반대로 데스티니에서부터 벗어나면, 반드시 따라오는 게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공허함이에요.

왜냐하면 복이 없는 게 뭐라고 그랬어요? 아무것도 없는 거라고 그랬죠.

그러니까 공허한 거죠. 아무것도 없는 거니까 공허한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이런 목적을 위해서 지음받았는데, 그 목적에서부터 벗어나 있어요‘

그러니까 뭐를 느끼겠어요?

’나는 왜 사는 거지?‘ 이런 느낌이 드는 거죠.

 

◑1. 자기 데스티니를 따라서 살면, 자기 삶이 풍성하지만,

자기 데스티니를 벗어난 삶을 살면, 자기 삶이 공허해진다!

 

'나는 원래 이 일을 위해서 지음받았는데, 내가 거기에 가 있지 않고, 딴 데 벗어나 있어요'

그럼 '나는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나는 어디서부터 온 거지? 내 인생의 목적은 뭐지?'

이런 질문들이 자연히 따라오게 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마 여러분들도 다 그런 생각 한두 번씩 해 보셨을 거에요.

예수 믿기 전에 '내 인생이 뭐지? 내 인생은 뭐 때문에 있는 거지?'

그러면서 공허하다는 느낌들을 좀 많이 받는 사람도 있고, 적게 받는 사람도 있지만,

안 경험해 본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게 왜냐면 자기 데스티니에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래요.

 

데스티니에서부터 벗어났으면, 우리는 인생에 대한 공허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데스티니에 대한 가장 중요하고도 첫 번째 속성입니다.

 

그 데스티니 안에 하나님께서 복과 저주를 계획해 놓으신 거예요.

 

’저주를 계획해 놓으셨다‘고 하는 말은.. 또 오해가 좀 있을 수 있는데,

복과 저주가 결정되는 거예요. 저주를 주시는 분은 아니세요.

하나님은 그렇게 이상한 분은 아니고요.

복을 주시는 분이지, 저주를 주시는 분은 아니에요.

 

그런데 저주는 우리가 선택하는 거예요. 이쪽에다 하나님이 풍성한 삶, 풍성한 밥상을

차려놓으셨는데, 거기로 안 가고,

제 스스로 저기 아무것도 없는 데 가서 맴돌고 있으면, 그건 저주를 우리가 선택하는 거죠.

하나님이 가라신 쪽으로 안 가고, 자기가 다른 데로 갔으니까요!     *요나가 생각나네요.

 

근데 어찌 됐든지 간에

이 데스티니 안에는 '복과 저주'라는 것을 결정하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제가 대학생 때, 예수님을 믿게 된 것도 이 공허함 때문이었어요. *모태신자

저는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는, ‘좋은 대학만 가면 내 인생이 행복해지는 줄’ 알았어요.

 

여러분도 다 그렇게 속고 사셨을 텐데,

‘그래서 중고등학교 때는 그냥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학을 들어가야 돼.

서울대학만 가면 행복할 거야’ 그래서 열심히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서울대를 들어갔죠. 서울대 수학과를 들어갔는데...

 

처음에는 너무 행복했는데... 그 행복이라는 약발이 딱 6개월 가더라고요.

딱 6개월 가고 나니까, 그 다음부터 ‘공허함’이 몰려오기 시작하는데,

이게 감당할 수 없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허무, 공허함이 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제가 아주 혼란스러워 졌습니다.

 

‘분명히 나는 지금 가장 행복할 거라는 순간에 서있는데,

그 행복의 약발이 6개월도 못 가는 거면,

그럼 지금부터 또 다른 뭔가를 이루고 성취한다고 한들,

그건 무슨 의미가 있고, 그건 나에게 정말 행복을 줄 수 있을까?’

그래서 깊은 허무와 공허 가운데 고통을 받게 됐습니다.

 

그러고 1년 정도가 지났는데, 대학교 1학년이 지나고 났는데

아주 위험한 결론을 내리게 됐는데,

사실 위험한 결론이기도 하지만, 정직한 결론이었던 것 같아요.

 

‘삶이라는 건 의미가 없다.. 이렇게 살아도 의미가 없고, 저렇게 살아도 의미가 없고..

그래서 밥을 몇 공기 더 먹고 사나, 아니면 지금 끝내나, 아무 차이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조금만 더 그 공허감이 길게 갔으면 위험했을 거예요.

 

수학자들은 다 이렇게 극단적이거든요. O 아니면 X예요.

뭐 그냥 중간에 ‘적당히’ 라는 게 없어요.

맞든지 틀리든지 둘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래서 아주 위험한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감사하게도 그때 선배 한 분이 저한테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영리 같은 것으로) 복음을 전했고,

물론 저는 믿는 집안에서 태어난 모태신앙이었지만, 거듭난 크리스천은 아니었죠.

 

그래서 그분으로부터 복음을 들었는데, 복음을 들을 때는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어요.

저를 불신자 취급을 하는 거잖아요.

 

평생을 교회에서 자란 사람인데, 저를 불신자 취급을 하니까,

그때는 약간 자존심이 상했는데...

집에 돌아왔는데 계속 그 소리가 이렇게 뇌리에 맴도는 거예요.

계속 그 소리가 맴돌면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제가 한 밤 중에 일어나 앉아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기도를 시작하면서 뭐라고 그랬냐면

‘하나님, 나는 당신이 계신지 안 계신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근데 계시다면 날 좀 도와주십시오.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는데, 그 순간에 성령께서 제게 임하셨어요. 그 순간에 성령께서 임하셨어요.

그때는 그게 뭔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갑자기 막 오열을 하고, 울음이 터져나오고 그러는데
이게 왜 이러는지 이유도 모르고...

그런데 이게 처음 성령 받을 때 일어나는 전형적인 증상이잖아요.

 

성령이 강권적으로 임하신 거죠.

‘저를 도와주세요’ 하는 말에, 하나님께서 그대로 그 기도에 응답하신 거예요.

(아마 두 세 시간) 그러고 나서 다시 잠이 들었는데,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정말 세상이 달라져 있었어요.

정말 세상이 달라져 있었고... *이건 거듭난 사람들의 공통된 고백

사실 세상이 달라진 게 아니고, 내가 달라진 거죠.

 

‘맞아!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내 인생은 무의미한 게 아니지...

나를 창조하신 분이 계시지... 나를 구원한 분이 계시지...’

그 사실이, 제 안에 정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충만함, 풍성함을 가득 채웠어요.

 

이건 아마 성령 받아오신 분들은 다 아실 거예요.

성령 받고 나면, 이게 이렇게 꽉 찬 느낌이 듭니다.

감격과 감사와 아울러

‘그렇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시지...’ 막 이런 그게, 제 안에 가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성령께서 제게 임하신 거죠. 근데 그게 뭔지는 설명을 못했어요.

뭔지는 설명을 못하고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어요. *잘 몰라서

 

‘이상하다.. 내가 분명히 이틀 전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삶의 의미도 없고, 어둡고 공허하고 우울하고 그랬는데...

왜 이틀만에 내가 딴 사람이 됐을까?’ 설명은 안 됐어요.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니까

‘아, 그게 거듭나는 거구나.. 그게 거듭나는 거고, 그게 성령이시구나,

성령님이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시구나’

 

우리가 갈라디아에서 살펴보면서, ‘성령의 내주하심’을 지금 계속 살펴보잖아요.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면, 이전의 나하고는 다른 마음들을 만들어내시는 거예요.

 

내 마음에 또 하나의 제너레이터(발전기)가 생기는 거죠.

그래서 이전에 만들어내던 생각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생각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면서 그 생각이 제 안을 채우기 시작하고, 그게 벌써 한 40년 전 얘기인데,

그러고 지난 40년 동안 한 번도... 그렇게 공허하고 우울해 본 적이 없어요.

 

▲사람이 사는 게 힘들 때는 있어요. 힘들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이럴 때는 있지만,

그것과 ‘내 존재가 어디서부터 오는지 몰라서 느끼는 공허함’은요. 전혀 다른 종류의 겁니다.

그건 전혀 다른 종류의 건데.. 그런 종류의 공허함은 느껴본 적이 없어요.

(*자기 데스티니의 트랙에서 벗어나면 공허함)

 

살면서 슬프고 낙심되고 그럴 때는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공허함을 느꼈던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아요.

그것이 데스티니의 능력인 줄 믿습니다.

 

자 그 데스티니의 두 번째 특징은 뭐냐면,

데스티니는 우리의 생각보다 항상 크다는 거예요.

 

◑2. 나의 데스티니는..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큰 기대

 

왜 그러냐면, 데스티니는... 우리 아버지의 기대이기 때문에 그래요.

모든 부모는 자녀를 향한 큰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작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부모가 있다면, 그는 부모가 아니에요.

부모는 항상 자녀들을 향해 비현실적인 기대를 갖죠.

‘얘는 천재일 거야 와, 천재야’

세 살인데 벌써 그런 말을 해요, 막 이러는 거죠.

 

부모의 눈에는 뭐든지 우리 아이가 다 잘하는 것처럼 보이고,

뭐든지 우리 아이가 천재인 것처럼 보이고... 그게 부모의 마음이지 않습니까?

만약에 그런 마음이 없다면, 그건 부모가 아니에요. 그건 옆집 아저씨이죠.

 

우리 하나님은 하늘 아버지세요. 작은 계획을 가지실 수가 없어요.

우리를 향한 큰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인간 부모의 기대는 비현실적일 수 있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기대는 비현실적이지 않습니다.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그래요. 감사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데스티니를 처음으로 발견했던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다들 황당해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대표적으로 모세 모세가 떨기나무 사이에서, 자기의 데스티니를 듣게 되죠.

‘너는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자유케 해라’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소서. 나는 말이 둔한 자니이다'

 

이 모세가 여러분 안 가겠다고 버티는 장면이, 출애굽기에서 두 장 반인가 길게 이어져요.

그러니까 두 줄 반이 아니고, 두 장 반인가를 길게 서술되어져져요.

얼마나 버텼는지를 알 수 있잖아요.

 

모세가 왜 버텼을까요? 그게 말도 안 된다는 거예요.

이걸 오늘날 말로 풀어설명하면, 그 모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너는 시진핑한테 가서, 조선족들을 다 데리고 나오겠다고 해라‘ 그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조선족은 중국에 170만, 출애굽은 약2백만

 

아니 그거보다도, 몇 배우 더 심한 거죠.

아니 조선족들은 거기 만주(동북 3성)에 간 지 그렇게 오래되지도 않았지만,

히브리인들은 400년을 거기 산 사람들인데,

400년이면은 이게 이조 5백년 기간과 거의 비슷한... 오랜 기간입니다.

 

아니 그 사람들을, 갑자기 데리고 나가겠다고 하는 게 얼마나 황당합니까?

그러면 여러분들한테 만약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OOO야, 너는 내일 시진핑한테 가서, 조선족들을 다 데리고 나오겠다고 해!'

그러면 여러분은 아멘할 것 같아요? 뭐 비유하자면 그런 얘기입니다.

 

근데 우리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데스티니가 그런 거라는 거예요.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복된 계획을 가지고 계세요.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다 이루는 사람이 없는 거죠.

아마 하나님의 원래 계획을 다 이룬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을 겁니다.

우리의 불순종 때문에, 또 우리의 죄 때문에,

또 태어나서 예수 믿을 때까지 허송세월했던 시간 때문에,

아마 우리의 데스티니는 원래 계획의 한 10%, 20% ... 그 정도 이루지 않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열심‘으로, 하나님은 나의 데스티니를 성실히 이루어가십니다.

물론 거기엔 나의 순종과, 나의 동행이 필요하겠지만요. 고전15:10참조

그리고 그 데스티니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구원과 그 완성‘이며,

하나님은 그걸 온전히 이루어가십니다. 빌1:6

☞구원으로 푸는 내 일생과 세계역사 rfcdrfcd.tistory.com/11683484

 

▲그래서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그리신 설계도가 있어요.

사람들은 인생에 대해서 생각할 때, 이 하얀 도화지에다 멋있는 그림을 그리는 걸

상상을 합니다.

 

그래서 화려하고 멋있는 그림을 그려서,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보고 '와 멋있다!'

그리고 박수 쳐주고 인정해 주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여기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저거 아무것도 아니네.. 그러고 지나가면 실패한 인생이네‘

그렇게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하얀색 도화지에다 멋있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에 설계도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인생이 가장 성공적인 인생인가 하면, 설계도 대로 지어진 인생이에요.

설계도대로!

 

화려한 그림을 그린 인생이 아니라, 설계도대로 지어진 인생!

이 예배당 건물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건물이 좋은 건물입니까?

그렇죠. 설계도대로 지은 건물이 좋은 건물이죠.

 

설계도에는 2층 건물로 되어 있는데, ’아휴 이왕 짓는 거 한 5층 올려버리자‘

그러고 올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처음에는 좀 화려하고 멋있어 보일 수 있지만

오래 못 갈 겁니다. 한 2년 3년 쓰고 나면 금 가고 무너지고 그러겠죠.

설계도대로 지어야지.. 화려하게 지었다고, 좋은 건물이 아닌 거죠.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정확히 그렇습니다. 설계도대로 살아가는 인생,

하나님의 창조하신 설계도대로 살아가는 인생이

가장 성공적인 인생이고, 가장 복된 인생 이에요.

그 인생이 가장 복되다고 하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설계도대로 살아가면 어떻게 되냐면, 우리 마음에 만족함이 있어요.

풍성함이 있어요. 근데 결국 중요한 건 그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렇게 세상 기준에 의해서 내가 원하는 걸 다 얻고, 성공하고,

그런다고 해서 진짜로 우리가 기대했던 만족이 주어지느냐? 안 주어진다는 거예요.

그게 성경의 선언이고, 우리의 경험입니다. 솔로몬의 결론이 그거잖아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내가 다 이루어 봤는데... 부도 가져보고, 명예도 가져보고, 아내도 많이 가져보고

다 해봤는데, 아무것도 남는 게 없더라, 채워지지 않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실은, 이것은 거짓말에 속고 있는 거예요.

'이거 하면 네가 원하는 꽉 찬 행복이 있을 거야'

'이거 가지면 꽉 찬 행복이 있을 거야'

마귀가 여러분, 가장 큰 거짓말로 타락 이후 지금까지,

모든 인류를 속여온 거짓말이 그거 아닙니까? *성공, 출세

 

'이걸 성취하면.. 세상 기준에 의해서 큰 사람이 되면.. 네가 꽉 찬 행복이 있을 거야..'

그런데 그거를 가졌던 사람은요. 한 사람도 예외가 없더라는 거예요.

그런 가짜 신기루 같은 행복에 속은 거죠.

 

근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럼에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다는 게.. 그게 문제죠.

세상 구조는 결국에 피라미드 구조 아닙니까?

근데 꼭대기층은 아주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주어진단 말이에요.

 

세상이 가지고 있는 자원이 리소스가 유한하기 때문에 할 수 없어요.

천국에선 다를 거예요. 천국에서는 무한한 리소스가 있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전혀 여기와 다를 텐데... 하여간 보이는 세상은

그 자원이라는 것이 리소스가 유한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가질 수는 없어요.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 그것을 가져볼 수 있는데,

가져보면 '이게 아니구나' 이걸 깨닫게 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져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뭐라고 기대해요?

’저것만 가지면 행복해지는 거야‘ 이렇게 속고 있는 거죠.

 

'저것만 가지면 행복해지는 거야'

아니요. 여러분 절대로 그것이 우리에게 꽉 찬 행복을 주지 않습니다.

복은 어디에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 있는 거예요.

아니 세상이 제시하는 그런 기준들에 의해서

돈을 그렇게 많이 벌지 못하고, 그렇게 성공하지 못했어도,

내 안에 꽉 찬 행복이 있으면 된 거 아닌가요?

 

내 안에 꽉 찬 행복이 있으면 되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것은 데스티니 안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런 참 복을 누리는 여러분 다 되셨으면 좋겠어요.

 

▲자, 개인 뿐만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도 역시 데스티니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나라와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시죠.

이 이야기는 뒤에 가서 다음 시간에 계속 이어서 할텐데,

그래서 한 나라와 민족도 그 나라를 향한 계획 가운데로 들어가면.. 풍성함이 있어요.

 

그런데 이 나라와 민족은 개인하고는 조금 달라요.

개인하고 조금 다르다고 하는 게 뭐냐 하면,

개인은 그 행복이 우리 내면에 꽉 찬 행복이, 훨씬 더 중요한 1차적인 행복이에요.

1차적인 복이에요. 그리고 외적인 복들도 하나님은 물론 주십니다.

 

그런데 나라와 민족은 내면 세계'이라는 게 없잖아요.

그래서 나라와 민족은, 항상 눈에 보여지는 풍성함으로 나타나요.

항상 눈에 보여지는 풍성함으로 나타나요.

 

이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우리 민족에 대해서 얘기할 때 조금 더 합시다.

그래서 한 나라와 한 민족이, 그 민족을 향한 부르심 가운데로 들어가면,

하나님이 그 나라를 풍성하게 하시고 높이세요.

 

한국도 그랬고, 영국도 그랬고, 미국도 그랬고...

그래서 그 나라를 향한 부르심 가운데로 들어갔던 나라들은,

항상 하나님께서 굉장히 영향력 있는 나라들로 올리셨어요. 지금까지 항상 그렇게 하셨어요.

 

자 그래서 이 나라와 이 민족을 향한 데스티니를

기도하고 이루어가는 은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3. 그렇다면 이 데스티니를 어떻게 이루어갈 수 있는가?

또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가?

 

이 데스티니는 여러분이 연구하고 공부해서는 알 수가 없어요.

데스티니는 하나님한테 들어야 돼요. 그게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한테 들어야 돼요. 그게 유일한 길이에요.

 

왜 그렇게밖에 알 수 없는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데스티니를 연구하고 공부해서 알아낸다고 하는 건, 무슨 뜻이냐면 이런 거예요.

 

수많은 사람의 데스티니를 내가 이렇게 관찰을 해요.

관찰을 해서 대충 이렇게 분류를 해야 돼요.

 

이런 종류의 사람, 이런 개인 기질, 이런 종류의 사람 쫙 분류를 한 다음에

그래서 이런 종류의 특징이 있는 사람은, 이런 식의 데스티니를 가졌고,

저런 종류의 특징이 있는 사람은, 저런 데스티니를 가졌고... 그렇게 분류를 해 봅니다.

 

분류를 한 다음에 '나는 어디 속하는가?'

그것을 그 안에 대입을 해가지고서, 거기서 나의 데스티니를 찾아내는 것이...

 

MBTI 같은 심리유형 분류할 때, 이런 방식으로 하죠.

2만 명인가 하는 사람들에게 질문해서, 이렇게 16유형으로 나누었다고 해요.

 

근데 여기서 함정은 뭐냐 하면, 데스티니는 분류가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면 하나님이 우리 각자를 다 다르게 만드셨기 때문이에요.

 

80억 인구가 있는데, 80억 인구를, 우리 성격 테스트하면 16가지로 분류하잖아요.

그럼 MBTI를 16가지로 분류하니까, 뭐 저 같은 경우에 INTJ인데.

그러면 INTJ라는 분류된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 유형의 사람들의 특징과 장단점을 보면... 대충 맞거든요.

 

그런데 16가지로 분류를 해야, 그 다음에 뭔가를 우리가 할 수가 있는데

80억 명이 다 다르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80억 명이 아무런 공통점이 없이, 서로 각자 다 달라오.

그럼 분류 자체가 안 되는 거죠.

 

근데 하나님 그렇게 하셨다는 거예요.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다르게 만드셨어요.

다 하나도 겹치는 게 없어요. 각자 다 다르게 만드셨어요. 다 유니크하게 만드셨어요.

 

그 얘기는 뭐냐면, 하나님으로부터 듣지 않고는,

나의 데스티니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듣지 않고는 나의 데스티니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을 보십시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기의 데스티니를 발견하는 장면들을 보면, 항상 하나님과의 인카운터(대면)가 있어요.

 

모세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잖아요.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요.

'너의 데스티니는 뭔지 알아?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자유케 하는 거야!'

 

바울은요? 바울은 자기 데스티니가 교회를 핍박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메색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잖아요. 하나님과의 인카운터가 일어나죠.

그리고 거기서 '아 내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았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잖아요.

 

두 사람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예요.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하나씩 하나씩 읽어보십시오

항상 하나님께서 나타나서도 뭐라고 말씀하세요.

 

그랬을 때 '아 내가 이걸 위해서 부름받았구나' 하는 걸 알게 됐지,

자기가 연구해서 알게 된 사람은 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게 데스티니의 기본적인 속성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데스티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데스티니는 언제 알게 되냐 하면,

하나님을 인카운터 했을 때 알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을 인카운터 했을 때 알게 되는 거예요. 아멘!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인카운터 할 수 있는가?

제가 오늘까지 그 일본 DTS에서 설교하다 왔는데,

거기서도 비슷한 얘기를 나눴는데,

하나님을 인카운터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은 뭐냐면 기도와 말씀 이에요. 사실은 왕도가 없어요. 기도와 말씀이에요.

기도와 말씀 가운데,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거예요.

 

기도하는 사람은,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거 아세요?

어떤 방법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요.

어떤 방법인지 모르겠지만.. 꼭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것처럼, 그렇게 똑같이 말씀 안 하실 수 있어요.

 

그런데 무슨 마음의 감동을 통해서든지, 아니면 누군가를 통해서 전해 듣든지,

하여간 기도하는 사람은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요.

 

그러니까 기도라는 건 뭐냐면, 하늘을 향해서 문을 열어놓는 거예요.

하늘을 향해서 문을 열어놓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카운터라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낼 수는 없어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열심히 이렇게 저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인카운터 해주실 거야'

그런 공식 같은 건 없어요.

 

그건 그냥 하나님이 하시고 싶으면 하신 거고, 하기 싫으면 안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인카운터를 경험하는 비결 같은 건 없어요.

 

그런데 경험하지 않는 방법은 있어요. 기도 안 하면 돼요.

경험하지 않는 방법,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

 

그건 우리가 몰라요. 그냥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하시는 거기 때문에.

근데 경험 안 하는 방법은 확실해요.

 

이건 마치 뭐하고 똑같냐면, 아내가 그 봄비를 좀 맞아 보고 싶어서

비에 한번 흠뻑 젖어 보고 싶어서, 그러고서는 집에 앉아서는 모든 창문을 꼭꼭 닫고 있어요.

그럼 봄비를 맞을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하잖아요.

 

그러니까 비가 오는 건, 내가 오게 할 수는 없어요.

언제 비가 올지는.. 그냥 하늘에 달린 거에요.

 

어느 날 비가 올지는... 그건 그냥 하늘에 달린 거예요.

내가 인위적으로 비가 오게 할 수는 없어요.

 

근데 비를 안 맞을 수는 있어요. 비를 오게 할 수는 없지만, 비를 안 맞을 수는 있어요.

창문을 꽁꽁 닫아놓고, 밖에 안 나가고 있으면 돼요.

 

진짜로 봄비를 맞게 원한다면, 내가 비를 만들어낼 수는 없지만, 창문은 열어놔야지요.

그리고 창밖으로 내 손을 내밀어야 지요. 그래야 비를 맞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통로는 열어놔야 되는 거예요.

 

기도는 여러분, 영적인 창문을 열어놓는 것하고 똑같아요.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 거예요.

 

언제 하나님께서 나에게 특별하게 역사하시고 말씀하실지... 이런 건 정확히 몰라요.

그건 하나님의 주권이기 때문에!

그리고 매일매일 하시는 것도 아니에요.

 

제가 그전에 아브라함 설교할 때 했지만,

아브라함도 하나님과의 인카운터가 10년마다 한 번씩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거고요.

 

근데 저도 제 개인적으로 제 데스티니 여정을 돌아보니까

중요한, 어떤 제 인생의 방향을 틀게 되는 사건들이 있거든요.

', 이쪽이 아니구나. 이쪽으로 가라고 그러시는 게 아니고,

저쪽으로 가도록 하나님 계획하셨구나' 이렇게 방향을 틀게 되는 사건들이 있는데,

 

그때는요. 특별한 하나님의 역사들이 있어 왔어요.

특별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었고, 기도 가운데 특별히 하나님을 좋아하는 사건들이 있었고

'그래서 아 이게 아니구나.. 중동으로 들어가야 되는구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큰 방향 전환에는.. 무슨 큰 계기가 되는 지시가 있다는 거죠)

 

또 제가 선교사로 나가려고 하다가 '아니구나 목회해야 되는구나'

하는 걸 알게 되고, 그런 거대한 방향을 틀 때는... 터닝 포인트라고 그러죠.

터닝 포인트에는 항상 하나님과의 인카운터가 있었어요.

 

그리고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도 항상 그랬잖아요.

모세의 터닝포인트에도 떨기나무 사이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바울도 터닝포인트에 보면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사사들도 마찬가지고, 사무엘도 마찬가지고...

 

사무엘도 터닝포인트에 뭐가 있었어요?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신 하나님을 만나고,

이렇게 큰 터닝포인트가 생기는 거잖아요.

 

그렇듯이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고 초월적인 방법으로 만나실 걸 기대하지 마세요.

아브라함도 10년마다 한 번씩 만났는데,

우리가 무슨 통뼈라고 매일 그거를 기대하겠습니까?

 

이 아브라함의 호칭이 뭐냐 하면 '믿음의 아버지'잖아요.

그 분도 10년의 간격이 있단 말이에요. 하나님이 나타났을 때 말씀하시고,

그 다음번에 나타나서 말씀하시는 이 10년의 간격은, 믿음으로 걸어가는 거라는 거예요.

 

믿음으로 하나님 말씀하셨으면, 그다음에는 보이는 것이 있어도 없어도,

귀에 들리는 것이 없어도... 그냥 믿음으로 한결같이 걸어가는 것을 믿음이라는 거예요.

 

그러다가 또 때가 됐으면, 하나님께서 거기서 좌회전!

그러시면 또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그러면서 인생의 큰 방향을 트는 거예요.

 

그럼 그 방향으로 또 한 10년 가는 거예요.

믿음으로 쭉 가다가 '오케이, 거기서 우회전!' 그럼 또 한 번 트는 거예요.

그렇게 인생을 가는 거거든요.

저는 그것이 맞다고 믿고요. 지금까지도 그렇게 살아왔어요.

 

하나님께서 제게 중동에 대한 말씀을 하셨어요.

2005년, 2006년 경이었는데, 그냥 선교에 대한 말씀은, 그 전에 주셨어요.

1999년도에 하나님께서 저를 선교사로 부르셨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중동으로 갈 거라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고, 많은 곳으로 선교사를 전세계로 보내려고 하고 있었는데

2005년에서 6년도로 넘어갈 때, 하나님께서 '아니야 핸들 틀어!'

그래서 중동으로 들어가게 됐고,

그 다음 이후로는 다른 말씀은 안 주셨기 때문에, 지금까지 계속 그 방향으로 가는 거예요.

(*대체로 이렇지만, 이 방식과는 다르게 또 인도하시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공식은 아닙니다)

 

제가 임의로 오른쪽 틀고, 왼쪽 틀고... 이렇게 할 수 없다는 거예요.

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내 생각에는, 저희 교회가 더 좋아 보이고 이것도 괜찮아 보이고 하는 게 왜 없겠어요?

 

저도 생각이 있는데.. 이렇게 하면 더 좋을 것 같고..,

저것도 사역하면 좋은 열매가 있을 것 같고...

당연히 제 안에도 그런 생각들이 돌아가지만, 그 생각을 따라서 해본 적은 없어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그 다음 말씀을 아직 안 하셨기 때문에,

그러면 그냥 직진하는 거예요.

그 다음 말씀을 안 하셨으면, 말씀하실 때까지 계속 가는 거예요.

 

그래서 '혹시 여기서 꺾어야 되는데,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놓친 것 아닐까?'

이런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아듣게 말씀하세요. 하나님이 이렇게 애매하게 말씀 안 하세요.

알아듣게 말씀하시고요. 분명히 하나님이 그러실 거예요.

그러면 '잘했다 충성된 종아!' 그러실 거예요.

 

저는 그 믿음이 있어요. 꺾어야 되면.. 알아듣게 말씀해 주실 거고,

아직 나에게 하신 말씀이 없다면.. 그냥 직진 계속 하라는 거에요. 직진 계속하라는 거예요.

그렇게 사셔야 됩니다. 그게 믿음이에요.

 

10년의 간격 동안을 그 방향으로 직진한 게, 아브라함의 인생이었잖아요.

그 사이에 방향 꺾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다음 디렉션은 말씀하신 적이 없거든요.

 

그렇게 인생 길을 가셔야 돼요. 머리 굴리면서 사시면 안 돼요.

자기 머리 굴리면서 사시지 마세요. 믿음으로 사셔야 돼요.

성령과 동행하는 인생을 사셔야 돼요.

 

그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는 것은, 어떤 방법이 아닙니다. 절대로 어떤 공식이 아니에요.

그래서 방법으로 접근하면 반드시 실수합니다. 반드시 실수하고요.

그러면 이상한 헛것도 있고요. 잘못하면 신비주의에 빠지게 되고...

방법은 여러분 하나님이 모든 우주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모든 우주를 다 사용하실 수 있으세요.

 

모든 우주를 다 사용하실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방식을 제한하면 안 돼요.

이렇게도 말씀하실 수 있고, 저렇게도 말씀하실 수 있고...

 

이 사람에게는 성경 말씀 읽는데 깨달음을 통해서 말씀하실 수도 있고,

저 사람에게는 설교 듣다가 감동이 오면서 말씀하실 수도 있고,

또 저 사람은 걸어가다가 탁 넘어지면서 돌에다 박치기를 했는데,

그걸 통해서 깨달음을 통해서 깨달음을 통해서 수도 있고... 뭐 그건 모르죠.

성경에 보면은 그 나귀 나귀를 통해서도 말씀하시잖아요.

 

오늘날,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그저 성경 말씀을 읽고, 말씀의 원리를 파악해서 그 원리대로 살아가는 사람,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했으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고 어떤 삶을 사셨는가'를 잘 알고,

그걸 연구해서 그것을 그대로 따라가는 사람'으로

이렇게 기독교를 정의하는 분들이 있죠.

 

그런데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뭔가 드라이예요. 뭔가 드라이예요.

'뭐가 빠졌을까?' 생각해보세요.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게 없거나 아주 미약해요.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게 없고요.

그냥 성경의 원리를 파악해서, 그 원리를 나에게 적용해 나가는데...

그러면 그거랑 철학책 읽는 거랑 뭐가 달라요?

 

아니 여러분, 신앙의 본질은 그게 아니고요. 신앙의 본질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에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제예요.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 그게 빠진거죠.

 

물론 우리가 성경을 읽고 성경적인 원리를 잘 파악하는 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거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있고, 그 다음에 행해지는 일이지,

이거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걸 대체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요. 어쨌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요.

기도하는 사람들은 어쨌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요. 안 들을 수가 없어요.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안 들을 수가 없어요. 못 듣는 게 불가능해요.

창문을 열어놨는데.. 비가 내리는데, 어떻게 비가 안 들어올 수 있겠어요?

 

창문을 닫아놨으니까, 비를 안 들어오는 거지,

창문을 열어놓으면 날마다 비가 오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강권적으로 하늘에서부터 비가 들이칠 때가 있거든요.

그러면 창문을 열어놓은 사람은, 어쨌거나 비를 맞아요.

 

한 방울 맞기도 하고, 두 방울 튀기도 하고... 그래도 하여간 맞는단 말이에요.

그런데 (기도의) 창문을 닫아놓고 있으면, 비가 오는지를 모르죠.

 

기도하는 사람은 어찌하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우리의 데스티니가 시작되는 거예요.

거기서부터 우리의 데스티니가 시작되는 거예요.

 

그래서 데스티니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스텝은 뭐냐 하면... 기도입니다.

기도 말씀에 대한 얘기는 다음 시간에 계속 이어서 할 텐데

그러니까 자기 데스티니를 알려면, 첫 번째로 중요한 요소는.. 기도를 해야 돼요.

그런데 집중적인 기도를 해야 돼요.

 

제 신앙의 여정을 봐도, 그렇고 또 성경을 봐도 그렇고,

항상 이게 intensive prayer,

그니까 집중적인 기도를 할 때, 거기서 하나님과 인카운터가 일어나거든요.

 

물론 이것도 공식을 만들면 안됩니다. 절대로 공식 만들면 안돼요.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 그러면 실수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봤을 때, 집중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도움이 많이 되는 건 사실이에요.

집중적으로 그러니까!

매일 10분씩 10번을 기도하는 것보다,

한 번에 100분 기도하는 것이 훨씬 더 파워풀하다는 거예요. 와우!

그보다는 100분씩 매일 기도하는 것이 훨씬 파워풀해요. 동의하십니까?

 

기도해 보신 분들은 알아요. 이게 오래 기도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오래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는데... 오래 기도하잖아요.

그러면 내 영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영적인 사람이면 다 알아요.

 

5분 기도해서 우선은, 내 영이 움직이는 것이 잘 분별이 안 돼요.

그런데 방언으로 여러분 1시간만 기도해보세요.

그러면 내 영이 움직이는 것을 다 느낍니다. 뭔가 달라요.

 

저는 그 혼자 운전을 할 때면, 혼자 운전을 해서 (수원에서) 서울에 가거나 그럴 때면

방언으로 항상 기도를 합니다. 출발할 때 기도할 때, 방언 기도를 시작하거든요.

그래서 샤라발라 알라발라 이러면서 기도하는데, 한 30~40분 기도하면서 올라가잖아요.

그러면 도착할 때는, 악을 쓰고 있어요. 막 그냥 악을 쓰면서 기도하고 있거든요.

 

그게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그렇게 돼요.

그러니까 오래 기도하면.., 기도가 달라져요.

기도가 달라지면서 파워풀해지고, 깊어지고, 막 믿음이 생기고, 막 선포하게 되고..

이게 한 30분, 1시간 정도 기도하면.. 그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단 말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내 안에 영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거죠. 영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다른 표현으로 하면, 성령 충만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도를 이렇게 집중적으로 Intensive하게 그렇게 30분이 됐든 1시간이 됐든

끊지 않고 쭉 이어갔을 때, 거기서부터 내 안에 영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기도가 깊어지기 시작하고 기도의 능력이 생기기 시작하고,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과의 인카운터가 일어나죠.

 

근데 이게 없는 사람 기도를 하긴 하는데, 꾸준히 5분씩 하는 사람은

아마 이런 경험이 이해가 안 될 거예요. 무슨 말인지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될 거에요.

 

그러니까 꾸준히 한다고 하는 건, 그만큼 신실한 사람이라는 뜻이긴 하거든요.

신실하니까 예수를 따라가려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원리를 파악해서 잘 그대로 흉내 내면서, 가야 되는 거지, 근데 그게 기독교는 아닙니다.

 

저는 그게 기독교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건 딱 반쪽이고, 나머지 반쪽은 뭐냐 하면,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시죠.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죠.

이게 있어야 우리 마음이 부드러워져요.

 

그래서 아까 제가 뭐라 그랬죠? 이게 다 좋은 거긴 한데 드라이하다 그랬잖아요.

좋은 거긴 한데 드라이예요.

 

드라이하다는 건 뭐냐면, 마음이 그렇게 부드러워지기가 쉽지 않다는 거에요.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은요. 집중적으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항상 부드러워져 있어요. 마음이 부드러워져 있다고 하는 건 뭐냐면,

하나님이 하시는 작은 일에도 감동이 되고요.

 

작은 일에도 감사가 있고, 감격이 있고, 계속 그 마음가운데 울림이 있는 거에요.

이게 마음이 부드러운 거거든요. 마음이 딱딱한 사람은 감사도 잘 안 나오고,

감격도 별로 없고, 오히려 원망과 부정적인 생각들이 먼저 들고...

그게 마음이 딱딱하고 드라이한 상태인데,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건 언제냐 하면, 성령이 역사하실 때예요.

그래서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무슨 부흥회라든지 수양회 같은 데서 은혜를 만땅 받으면.. 뭘 해도 감사하잖아요.

 

은혜 만땅 full tank 받고 내려오면.. 뭘 해도 감사하고,

조금만 뭐가 있어도 막 눈물이 나오고,

'예수' 소리만 들어도 할렐루야 막 감격되고 이러잖아요.

그게 뭐예요? 마음이 부드러워져 있는 상태인 거예요.

 

그런데 성경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Do not harden your heart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마라' 히3:7~8, 시95:7~8

 

거기에 강퍅이라는 단어가 '딱딱하다'라는 뜻인데

'마음을 딱딱하게 하지 마라. 마음을 부드럽게 해라'

그건 여러분, 기도 외에는 없어요. 기도 외에는 없어요.

기도의 문을 항상 열어놓고 있으셔야 돼요.

 

기도의 창문을 열어놓고 있어야, 비가 올 때 비를 맞습니다.

기도의 창문을 닫아놓으면, 비가 내려도 내리는 줄 몰라요.

은혜의 단비를 맞을 길이 없어요.

 

비를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는 없지만, 비를 안 맞을 수는 있어요.

창문을 닫아놓으면...

항상 여러분 기도의 창문을 열어놓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거기서부터 성령님과의 인카운터가 일어나고요.

거기서부터 우리의 부르심이 풀어지기 시작합니다.

 

거기서부터 부르심(데스티니)이 풀어지기 시작해요.

데스티니에 대한 것을, 제가 지난 10년 동안 쭉 이렇게 살펴보면서

'어... 결국 데스티니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열쇠는 뭘까?' ↓

 

◑4. 받은 데스티니를 계속 이루어가려면..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결국 데스티니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열쇠는 뭘까?'

생각해 볼 때... 우선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에요.

 

처음에도 말씀드렸지만, 이게 연구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책상에서 연구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성령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없으면, 결국 데스티니의 길을 갈 수 없더라고요.

 

그리고 성경을 보니까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 성령님과 동행했다,

성령님과 친밀하게 동행해서, 그분의 음성을 듣고, 또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갔습니다.'

 

성령의 인도로 자기 데스티니를 분별하고 그렇게 살았지..

연구하고 공부해 가지고 갔다는 사람은 없어요. *연구도 필요하지만, 연구만 해서는 안 되죠.

 

말씀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거는 (말씀은) 딱 절반이라는 거예요. *나머지 절반은 성령

 

지난 2000년 교회사 동안에 주셨던 두 가지 길은, 말씀과 성령이었어요.

말씀과 성령... 이 두 가지를 분리시켜놓으면 안 되는 거예요.

 

말씀만 가지고 이렇게 가려고 하면, 거기에 한계가 있어요.

우리 마음도 드라이해지고, 그렇게 해서 우리의 데스티니를 알 수가 없어요.

 

일반적인 길들은 알 수 있을 거예요.

일반적으로 크리스천은 이렇게 살아야지... 그건 알 수 있어요.

그건 책을 보면 알지만,

우리 인생을 향한 길들은 구체적인 계획들은... 책상신학을 통해서는 알 수는 없죠.

 

거기에 성령의 역사가 함께 있어야죠. 거기에 성령의 역사가 함께 있어서,

그 말씀을 엔라이트(조명) 하시고,

그 말씀에 눈이 가게 하시고...

그렇게 해주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함께 있어야,

그래야 우리가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인도하심을 갖게 되죠. 아멘!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기도의 창문 닫아놓고 비맞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창문 닫아놓은 사람은 비가 아무리 옥수같이 내려도,

성령의 비가 내려도, 부흥의 비가 내려도, 한 방울도 안 튑니다. 창문을 열어놔야죠.

 

창문을 열어놔야, 비가 올 때 비를 맞는 거예요. 아멘?

다같이 일어나서 기도합시다 이 원리는 다른 곳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치유도 마찬가지고요. 맞아요. 치유도 하나님이 하시지요.

근데 언제 어떻게 하실지는 몰라요.

또 기도응답 하시죠. 그런데 언제 어떻게 하실 줄은 몰라요.

 

그러니까 때와 시간은 누구에게 속한 거라 그랬어요.

그렇죠. 때와 시간은 하나님께 속한 거예요.

 

우리가 기도하면 반드시 하는 응답하신다고 약속하셨어요.

반드시 하신다고 약속하셨지만, 때와 기한은 하나님께 속한 거라고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게 믿음인데,

그 믿음은 뭐냐 하면, 비 올 때 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비 올 때 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지,

언제 비가 올지 모르는데, 내가 비를 내리게 할 수는 없단 말이에요.

비는 하나님이 내리시지만, 하지만 창문을 닫아놓지는 말아야 되는 거죠.

 

기도의 창문을 계속 열어서, 하나님 앞에 집중적으로 기도하는 그 창문이 열려 있어야

어느 날 비가 올 때, 우리 가운데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아멘!

 

여러분, 이걸 잊지 마세요. 아멘이십니까?

자 오늘 이 밤 우리가 기도합시다. 좀 인텐시브하게 기도합시다. 부르짖어 기도합시다.

 

'예, 하나님 내가 기도의 창문을 엽니다. 우리가 기도의 창문을 엽니다.

하나님 강권적으로 임하여 주시고, 말씀하여 주시고, 성령의 비로 우리를 흠뻑 적셔 주십시오.

성령의 비로 우리를 흠뻑 적셔 주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사모합니다. 주여 우리 위해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이 마음 가지고 우리 주여 세 번 부르짖고, 다시 합심하여서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