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강해(09)/사사기5:28/‘두 개의 창’/ Youtube
◈두 개의 창문 삿5:28 2025.08.10. [사사기 9강]
◑도입
지난 주 8강은 드보라와 바락, 그리고 가나안 왕 야빈과 그의 군대대장 시스라의
기손 강가에서의 전쟁 이야기를 나누었었습니다. 그것은 팩트였어요.
역사 속에 실존했던 전쟁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제 오늘 5장은 그 역사적 팩트를 담아서, 그 토대 위에
여선지자 드보라가 가사를 쓰고, 노래로 만들어 이스라엘이 부른 내용이에요.
이건 지난 시간에 삿4장의 그 실재했던 산 역사를, 단지 팩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노래라는 장르에 얹어서, 하나님의 시선으로 새롭게 해석하는가?
그리고 그 노래를 만든 의도는.
그것을 어떻게 그 후손들에게 역사 속에서 메시지화하려 했고,
또 하나님은 이 드보라의 노래를 통해서 뭘 말씀하고 싶으신가?
이것이 오늘 설교의 큰 초점입니다.
삿5:1 ‘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이르되’
본문 삿5장 전체는 노래예요. 가사를 쓰고 곡을 얹은 노래입니다.
우선 오늘 본문으로 세밀히 들어가기에 앞서서,
우리가 한 단계 큰 생각을 나누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드보라에게, 왜 이 노래를 만들어, 성경이라는 책에 기록하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메시지가, 계속 신앙의 유산이 되어서 후대에 전달이 되고,
대대로 물려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캄보디아 단기선교팀이 이번 주에 가죠? *2025년 8월
캄보디아에 이제 준비하는 팀원이, 무슨 노래를 하나 저한테 보내줬어요.
무슨 노래인가 들어봤더니, 우리 교회에 POP로 섬겼던 *Power Of Praise
'십자가의 전달자'의 작사, 작곡자인 전용훈 목사님이 ☞십자가의 전달자
우리와 함께 늘 선교 현장에 다니면서
그때그때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시상, 그리고 곡들을 노래로 만든 CCM 노래가 있어요.
대표적인 것이 “너는 교회가 되어라” 저도 여러 교회를 다니다 보면
이 노래가 요즘 꽤 많이 청년들에 의해서, ☞너는 교회가 되어라 (Lyrics Video)
또 교회 성도들의 입에서 회자되고 불리워지더라고요.
근데 우리 교회 1청년부에 어느 자매가 크메르어로 '너는 교회가 되어라' 이 노래를
전 대원들, 캄보디아 가서 현지인 아이들하고 청년들하고 같이 부르겠다고
그거를 노래로, 크메르어로 녹음을 했어요. 근데 너무 소리가 좋아요.
저도 이제 은혜를 받고, 이거를 어제 저녁에 전용훈 목사님한테 보냈어요.
그랬더니 감동을 한 거예요.
‘전 목사가 우리 교회에 섬길 때 만들었던 이 노래가,
이렇게 아직까지 선교지에서까지 불려지고 있고,
또 여러 교회에서도 많이 애창하고 있다’
자기가 굉장히 쓰임받는 것에 대해서 감동하더라고요.
본인도 감동이 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음악의 장르를 통해서, 이 노래가 메시지가 담아져서,
후배들에게 계속해서 불려지고 있다는 거예요.
노래라는 것은 그런 힘이 있습니다. 저도 돌아보면 세상 노래였지만,
어릴 적에 또 공장 다닐 때 흥얼흥얼하면서 그 귀에 꽂혀 있던 노래가,
지금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계속 나와요. 힘들 때도 나오고, 즐거울 때도 나오고,
계속 그 노래가 나옵니다. 노래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겁니까!
돈도 열심히 벌어야 되겠지만, 여러분들 각자에게 하나님이 주신 그런 장점과 특기와
은혜들을 통해서... 그런 것들을 많이 창출하시면 좋겠어요. *문화명령
글도 쓰시고, 영화도 만들고, 꿋꿋하게 이런 노래들도 만들어서,
많은 후배들이... 선배들의 신앙의 그런 흔적들을 계속 유산으로 계승할 수 있는
그런 생태계가 이루어져야 됩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오늘 이 드보라의 그런 의미가 담아진 노래를 통해서
세 가지 대조를 살펴 볼 겁니다.
그것은 제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노래 속에 세 가지를 대비를 시켰어요.
그리고 그 세 가지 렌즈의 대비를 통해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선명한 의도를, 자연스럽게 결론으로 만나게 될 겁니다.
◑1. 이스라엘은 사기가 죽어서 축 늘어진 시대에, 하나님은 액티브하게 활동하셨다!
삿5:4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
여기 동사를 주목해보면, 하나님께서 나오세요. 어디서 나오시죠?
세일산에서!
또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
하나님의 어떤 역동성이, 계속 동사를 통해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세일산, 에돔... 이것은 사실상 야곱의 형제였던 에서의 후손들이에요.
나중에 거의 이방인 취급을 받다시피 하죠.
이스라엘과 늘 대적, 대척점에 세워진 족속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거기서 진행하시고, 거기서 나오십니다.
이것은 정확히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니시고, 이방의 통치자가 되시고,
이방의 주권자가 되시고, 하나님과 대척점에 서 있던 이들마저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역동성 있게 표현한 거예요.
5:4b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
말하자면 5장, 드보라의 노래는
4장에 실재했던 전쟁사의 승리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노래한 겁니다.
4장에서 바락의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내려서, 시스라의 병거들이 뻘밭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거예요.
이 사실이 사실 삿4장에는, 자세히 설명되어있지 않아요.
삿4:14b~15에 보면 ‘이에 바락이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에서 내려가니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한지라’
‘뭐 갑자기 비가 와서, 시스라의 철병거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런 자세한 설명이 4장에는 하나도 없었어요.
그런데 깜짝 비밀이, 이 5:4절에서, 드보라의 노래에서 풀어져요.
5:4b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
갑자기 비가 내려서, 시스라의 철병거 900대가 그냥 쓰지도 못하는 고철 덩어리가 됐어요.
그래서 적장 시스라는, 그냥 할 수 없이 철병거를 버려두고 도주합니다. 4:15
얼마나 상황이 다급했으면, 맨발로 도망가다가 *진흙뻘에서 샌들도 벗겨졌을 거예요.
도주 중에 평화조약을 맺은 자기 친구 헤벨의 집에 들어가서 숨었다가,
그 아내 야엘의 손에, 관자놀이에 말뚝이 박혀서 죽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은 이방여인 야엘의 손에 마침표가 찍어집니다.
우리는 몰랐어요.
지난주까지만 해도 도대체 기손 강가에서 어떤 혼란이 있었길래,
철병거 9백대가 무용지물이 되었는가, 궤멸되었는가? *4장에는 설명이 없었음
군대의 숫자나 무기의 상황으로 볼 때, 이스라엘은 상황상 말이 안 되는 대적,
비교조차 불가합니다. 그런 약체 이스라엘이
또 정말 자멸하는 방식으로 군대를 전개했습니다.
방어에 유리한 위치인 다볼산 꼭대기에 진을 치고 있다가,
철병급 900대가 진치고 있는 기손 강가로, 이스라엘 군인들을 데리고 내려와요.
그러니까 적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격입니다.
내려오자마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지난주 삿4장까지는, 승리의 자세한 이유를 몰랐는데,
오늘 본문 삿5장의 드보라의 노랫말 속에, 그 비밀이 풀어지고 있어요.
‘하늘에서 물이 내렸다’는 건 뭐가 왔다는 얘기입니까?
갑자기 느닷없이 폭우가 부어졌다는 얘기예요.
자, 강가입니다. 근데 갑자기 폭우가 내렸어요. 그러면 그 강변이 전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전부 뻘밭이 되고 진흙밭이 되는 거예요.
철병거라는 것은 탄탄한 길 상태, 마른 땅에서 달려가게 돼 있는데,
이게 진흙밭이 되니까 철병거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병거가 푹푹 빠져요. 쇳덩어리예요. 더 잘 빠지죠. 그러니까 움직이질 못하는 거예요.
이게 무기가 되는 게 아니라, 자기들한테 흉물이 되는 겁니다.
*2차대전 때도 진흙밭에서는, 전차부대가 기동하기 어려웠다고 하죠.
그래서 할 수 없이 무용지물이 된 병거를 버려두고,
적장 시스라는 부하들을 다 잃은 채, 단신으로 도망을 가게 된 겁니다.
누가 하셨던 일일까요? 하나님이 하신 거예요.
보세요. 세상의 방식은 항상 데이터, 숫자, 예측, 합리적인 미래...
이런 가치 분석을 통해서 ‘이건 뭐 틀림없이 될 거야’ 이런 예측을 잘 하고, 그걸 맹신하죠.
이번에도 가나안은 ‘과거의 경험상으로도 비추어 보면,
이번에도 우리의 대승으로 끝날 것이다’ 이렇게 계산이 섰단 말이에요.
그 대표적인 상징이, 막강하게 훈련된 병력과 철병거 900대입니다.
거기에 견주어서 이스라엘 군대는 오합지졸에 불과해요.
게다가 심리적으로도 20년 동안 압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비상태입니다. 움츠려 있어요.
군대라는 것은 제일 중요한 게.. 병력의 숫자도, 무기도 아닙니다. 사기 morale 입니다.
근데 지금 갑자기 내린 비로 인해, 가나안 군대는 사기도 다 풀어졌어요.
여러분 이거를 사람이 머릿속에 예상을 했겠습니까?
고대 시대에.. 예측이나 했겠습니까?
이거는 1서부터 100까지, 이미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계획하신 일이에요.
그래서 여기 동사를 보시면 이렇게 쓰여져 있죠.
5:4a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땅이 진동을 하기 시작해요. 하나님의 역사죠.
고대인들은 ‘땅의 진동’을, 즉 지진을, 하나님의 역사로 믿었어요. 틀리지 않습니다.
▲삿5:5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니
저 시내 산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도다’
이제는 세일산을 넘어서, 시내 산이 소개됩니다.
이 시내산은 마치 이런 거죠.
여러분 ‘시내산’ 하면 키워드가 우두두둑 걸려 올라와야 돼요.
예를 들면 ‘구원’ 하면.. ‘십자가, 예수님, 하나님의 사랑’ 이런 키워드가 올라오잖아요.
마찬가지로 ‘시내산’ 하면.. 제일 먼저 어떤 키워드가 올라올까요? 홍해 사건!
홍해 도하 전에는 무슨 일이 있었죠? 어린 양의 죽음, 유월절의 밤,
그 일은 왜 필요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400년 동안 신음하던 고통의 역사가 있었어요.
이게 전부 시내 산과 연결고리를 갖고 있는 키워드예요.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기 위해서,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십니다.
이들이 홍해를 건너서, 제일 먼저 광야에 발을 딛고 도착한 데가 시내산입니다.
그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너희는 내 백성이다(내 신부다)’라고 언약을 맺어요.
그 언약의 말씀을 주세요.
그래서 시내산 하면 항상 ‘언약의 장소’이고,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통치’를 위해서 말씀을 주셨던 산입니다.
▲여기 드보라가 그 과거에 박제되었던 것 같은 역사를
왜 갑자기 노랫말 속에 가사로 인용해서까지 소환을 할까요? 이유가 있겠죠.
‘하나님은, 그런 먼 수백 년 전 그냥 역사에 어떤 박제된 하나님이 아니시다.
시내산에서 자기 백성에게 모세를 통해 말씀을 주시면서까지 약속하셨던 그 약속은
하나님은 신실하고 성실하셔서
오늘날에도 적의 넘어설 수 없는 철옹성 같은 대적들을
하나님께서 깨부수고 물리치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설명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드보라가 그 기억을 소환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드보라의 노래 속에 이 ‘시내 산의 등장’은
이스라엘에게 ‘다시 하나님의 언약을 갱신’케 만듭니다. *갱신 : 기억하고 새롭게 되새김
시내 산에서 성실과 신실하심을 걸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시고
반드시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똑같이
절망스러운 상황,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앞에 던져진 자기 백성들에게
그 액티브한 하나님,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첫 번째 대조가 일어납니다.
5:6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길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
시대가 하도 무법한 시대이고, 악한 자들이 득세하던 시대인지라,
사람들은 큰 길로 다닐 수가 없어요. 그래서 대로가 비었습니다. 큰 길에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선량한 시민들은 오솔길로 다니기 시작합니다.
골목길로 숨어 숨어 다니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자연히 상거래도 끊어지고 무역도 끊어지면서, 침체에 빠집니다.
5:7 ‘이스라엘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쳤으니
나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그쳤도다’
(공동번역) ‘오, 드보라, 당신이 일어서기까지 이스라엘의 어머니 당신이 일어서기까지,
이스라엘의 촌읍들은 죽어 있었네’
‘사람들이 그쳤으니’ 라는 말은,
또한 지도자가 끊어진 시대, 눈 씻고 찾아봐도 지도자감이 없는 시대, 그 뜻입니다.
시대가 어두울수록 지도자감이 사라지잖아요. 그런 시대가 되었단 말이에요.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슨 희망이 있겠어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정말 심리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무기력한 상태에서
양손을 축 늘어뜨리고 있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잘 생각해 보세요. 상황은 그러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시내산의 언약을 성실하고 신실히 지켜내기 위해서
그 역사의 공간과 역사의 언덕을 넘어,
이 고난 속에, 두 손을 축 늘어뜨리고 있는 절망에 던져져 있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달려오시는 하나님! 역사하시는 하나님, 활동하시는 하나님이 대조되고 있죠.
무엇이 대조됩니까? 그들의 상황과 하나님의 일하심이 대조되고 있어요.
▲오늘 이 가운데 우리 청년들이, 어떤 사정과 어떤 현실적 문제로,
‘이젠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이 절망의 한숨을 내뿜고 있는 그 문제를 향해서,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성실하셔서, 그 문제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습니까?
이것이 오늘 이 4부예배에 참석한 여러분들이 붙잡아야 될 첫 번째 렌즈예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그때, 하나님의 자기 사람들을 위해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일어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내 상황, 내 상태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움직이기 시작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2. 두번째의 대조는, 즐거이 헌신한 무리들과 머뭇거린 무리들의 대조!
5:2 ‘이스라엘의 영솔자들이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백성들이 즐거이 헌신했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전쟁에서, 드보라가 백성들을 소집할 때,
즐겁게 헌신한 무리들이 있었어요. 이스라엘 민병대에 자원한 거죠.
5:9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이거는 사실상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누가 전쟁에 부름받았는데... 막 콧노래가 나오고, ‘야 나 전쟁 나간다. 너무 마음이 기쁘다’
그럴 사람 있겠어요? 그런 사람은 없어요.
근데 이 말은 좀 문학적인 표현이에요.
어떤 사람을 이렇게 ‘즐겁게 헌신했다’고 문예적으로 표현을 했는가 하면,
5:18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납달리도 들의 높은 곳에서 그러하도다’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는, 이스라엘에 전쟁이 벌어지고 드보라의 소집명령이 떨어지니까,
계산하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이것은 우리의 일이다 우리 공동체의 일이다’
하고 목숨을 던졌다.. 그 말이에요. '즐거이 헌신했다'는 말씀이. :9
물론 지금 전쟁이, 갈릴리 호수 북쪽에서 내려온 가나안의 군대와
갈릴리 주변을 기업으로 받았던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가 격돌한 상태입니다.
그 가운데서, 스불론과 납달리의 용사들은..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원했다는 거죠.
민족 공동체가 위기에 서 있을 때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 그러고 나섰어요.
그 말은 ‘내가 목숨 걸면, 하나님이 살려주지겠지’ 그런 마음이 아니에요.
‘나는 그냥 죽겠다’ 그 뜻이에요.
‘내가 이 민족을 위해서 죽겠다. 이때를 위해 내가 준비된 인물인지 누가 알겠느냐?’ 에4:16
‘내가 그냥 죽겠습니다’ 그 뜻이에요.
그러니까 그 말을 문학적으로 ‘즐거이 헌신했다’고 표현을 한 거예요.
‘사느냐, 죽느냐?’ 피가 엉키고 피가 튀고, 팔다리가 잘라져나가고,
눈이 뽑히는 그런 살벌한 전쟁의 현장에, 자녀들을 내보내야 되고,
내가 거기에 몸을 던져야 되는데,,, 막 할렐루야 그러면서
콧노래 부르고 나갈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즐거이 헌신했다’는 말의 실질적인 의미는.. ‘목숨을 던졌다’ 그 뜻이에요.
△제가 언젠가 여러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드렸어요.
"신앙생활은 밸런스 게임이 아니다.. All or Nothing 전부를 드리는 싸움이다"
여러분, 그 원형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최고의 좋은 분을, 최고로 사랑하는 것을,
그 아드님을 나의 구원을 위해 주셨어요.
거기 만약에 하나님이 균형상, 윤리상, 밸런스 상 ‘이거 좀 지나쳐...’ 그랬으면,
그런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헌신이 가능했을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드려서 헌신하신 거예요.
우리를 위해서 아들을 주셨습니다.
헌신이라는 말이 뭐예요? ‘드린다’ 그 말이 목숨을 바치는 거예요.
‘즐거이 헌신한 무리’가 있었어요.
반면에 머뭇거리고 계산하는 무리들도 있었어요. 그 장면을 한번 볼까요?
▲머뭇거린 지파들
5:15 ‘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 하니 잇사갈과 같이 바락도 그의 뒤를 따라
골짜기로 달려 내려가니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
‘르우벤 시냇가에 큰 결심이 있었다’는 말은,
근데 르우벤 지파는 결심만 해요., 결심만!
오늘날 우리 가운데도 결심만 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요단 동편 르우벤 지파가 그랬다는 거죠.
5:16 ‘네가 양의 우리 가운데에 앉아서 목자의 피리 부는 소리를 들음은 어찌 됨이냐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
네, 르우벤 지파는 계속 결심만 하죠. 르우벤지파의 특기는 ‘결심만 하는 사람들’이에요.
여러분, 결심만 20년씩 해봐요. 무슨 역사가 일어나나요?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아무 하나님의 기적과 역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결심 그만! 결심하지 마세요. 이제는 실천이에요.
이것이 IBM 회사의 구호입니다. “이제는 실행이다”
“The roadmap is set, now let's execute!”
지금도 그 구호를 쓰는지 모르겠어요.
자, 그런데 또 비슷한 종류의 지파를 만나게 됩니다.
5:17 ‘길르앗은 요단 강 저쪽에 거주하며 단은 배에 머무름이 어찌 됨이냐
아셀은 해변에 앉으며 자기 항만에 거주하도다’
여기서 ‘길르앗’은 요단강 동편에 거주하던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를 가리킵니다.
길르앗 성을 사이에 두고, 두 지파가 아래 위로 거주하고 있었죠.
아셀 지파는, 지중해 쪽으로 땅을 분배 받았는데, 주1) 땅 분배 지도
이 사람들은 자기네 항구만 지키고 있었어요.
‘우리 집만 안 무너지면 되지’
철저히 ‘지파 이기주의’에 익숙한 행테입니다.
목숨을 던지는, 목숨을 거는,
하나님의 명령에 계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스불론, 납달리
계속 계산해요. *르우벤, 갓, 시므온 반, 아셀
그런데 이상하죠? 목회의 세계에서도 보면... 항상 대안을 준비해 놓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렇게 안 되면, 저렇게 하면 되지’ 뭐 그 야곱의 근성이에요.
야곱이 얍복강을 건널 때, 계속 나누어가지고, 먼저 1대대 보내 보고,
애서의 눈치를 좀 보다가, 빠꼼하면 다음 2대대 보내고,
그리고 자기가 제일 나중에 건너요. 이게 야곱의 근성입니다.
결국 여기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두 종류,
-하나님의 부름 앞에 목숨을 던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계산과 타산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는 어느 쪽에 설 것인가요?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통틀어서 23절에서 이렇게 얘기했어요.
5:23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주민들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하나님이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직선적으로 표현하신 경우가 흔하질 않아요.
‘메로스’는 가나안과의 전쟁 당시, 이스라엘 군대를 돕지 않고 방관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특정 지역 또는 성읍의 이름입니다.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전쟁이 벌어졌던 기손 강 근처의 마을로 추정됩니다.
(아마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아셀 지파들이 군대를 모아서 메로스까지는 집결했으나,
참전의 득실을 계산하면서, 출정하지 않고 머뭇거리고 주저하였던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의 부름 앞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얘기하는 거예요.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주민들을 저주할 것은...’
메로스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여러분, 제가 평생 연극 관람을 많이 다닌 경우는 아닌데,
같은 연극을 두 번 본 연극이 하나 있어요.
첫 번째 갈 때는 대학 친구들하고 ‘그 작품이 좋다’ 그래서 한번 따라갔다가,
거기서 충격을 먹고, 그 다음에 그 공연이 끝날 무렵이 돼서, 제 혼자서 한 번 더 갔어요.
그 연극 제목이 뭐냐면 “착한 사람들”이에요.
나치 치하를 겪어낸 선량한 서민들의 이야기예요.
근데 그 ‘선량’의 의미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좀 사뭇 다릅니다.
나치가 패배를 했죠. 나치 정권에 부역했던 사람들을 소환해서 취조를 하는데,
‘너 이거 했지?’ ‘아, 저 안 했어요.’
‘그럼 이건 네가 한 거 아니야?’ ‘아, 전 안 했어요. 저는 한 거 없습니다.’
그때 취조하던 사람이 열받아가지고 이런 얘길 해요.
‘네 죄는, 이 악한 시대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네 죄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그 나치 치하에 순응되어 간 착한 사람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
이게 ‘메로스의 저주’의 본질입니다.
‘여호와의 전쟁의 날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
메로스의 저주를 얘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격하게 표현을 하신 적이 드물어요.
◑3. 세 번째, 마지막 비교입니다.
드보라가 바라본 창문과, 시스라의 노모가 바라본 창문의 비교
5:28 ‘시스라의 어머니가 창문을 통하여 바라보며 창살을 통하여 부르짖기를
그의 병거가 어찌하여 더디 오는가 그의 병거들의 걸음이 어찌하여 늦어지는가 하매’
적장 시스라의 어머니가, 자기 집의 한 창문을 통하여, 세상을 궁금해서 내다봅니다.
‘창살을 통하여 부르짖기를 그의 병거가 어찌하여 더디오는가?’
아들의 병거죠. 어머니니까
비록 적장에 아들이지만... 이 여인은 시스라의 어머니예요.
‘전쟁터에 나간 우리 아들은, 왜 오늘따라 이렇게 늦게 올까?’
과거 같으면, 진작에 돌아오고도 남을 시간이었는데,
이번에 전쟁은 손쉬운 전쟁이라고 하고 나갔는데,
확실하게 전쟁을 이기기 위해서 900대의 최정예 병거를 인솔해 나갔는데,
왜 이렇게 더디올까?' 아들이 안 오니까, 엄마니까 걱정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그 옆에 시녀가 그 걱정 가득한 어머니를 위로합니다.
이게 세상의 위로 방식이에요. 어떻게 위로하는가 잘 보세요.
5:29 ‘그의 지혜로운 시녀들이 대답하였겠고 그도 스스로 대답하기를
30 그들이 어찌 노략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으랴
사람마다 한두 처녀를 얻었으리로다 시스라는 채색 옷을 노략하였으리니
그것은 수 놓은 채색 옷이리로다 곧 양쪽에 수 놓은 채색 옷이리니
노략한 자의 목에 꾸미리로다 하였으리라’
자 이게 지혜로운 시녀들의 어머니를 향한 안돈시키는 위로입니다.
‘아휴, 마님 생각해보세요. 아드님이 누구십니까?
이번 승리는 워낙 큰 승리래서 취할 노략품들이 아마 많아서
그걸 정리하여 가지고 오느라고 이렇게 시간이 여느 때보다 더 걸리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 시스라의 엄마는 얼마나 마음이 흐뭇하겠어요, 얼마나 격려가 되겠어요?
그러면서 시녀들은 이런 얘기를 합니다.
5:30 ‘그들이 어찌 노략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으랴
사람마다 한두 처녀를 얻었으리로다’
시스라는 채색 옷을 노략하였으리니 그것은 수 놓은 채색 옷이리로다
곧 양쪽에 수 놓은 채색 옷이리니 노략한 자의 목에 꾸미리로다 하였으리라’
여기서 ‘처녀’라고 번역을 했는데, 원래는 자궁을 얘기하는 거예요.
여성의 생식기를 표현하는 거죠. 보세요. 고대시대나 지금이나
여성에 대한 폄하적 사고방식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한낱 그냥 성적인 대상이나 노리개 정도로 표현을 한 거예요.
사실은 여긴 근데 완곡하게 ‘처녀’라고 번역을 했는데, 원래는 자궁이라는 의미입니다.
오늘날에는 안 그렇습니까? 시대가 비슷합니다.
여성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엄한 존재로 이해하지 않고,
성적인 대상이나 기능으로 이해해버리는 이런 몰상식한 시대적 가치를 가졌어요.
오늘날에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더해요. 교묘하게 더하죠.
그러니까 고대시대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노리개가 될 처녀들을 한두 명씩 꿰차고 올 겁니다.
이게 세상의 방식이에요. 세상의 거짓 평안이고 세상의 거짓 위로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결론 31절입니다.
5:31 ‘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하니라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
자 여러분 이제 우리는 마지막 두 대비를 드러내 보십시다.
궁궐의 창문을 통해서 바라본 어머니의 불안,
시녀의 위로는 철저하게, 그 기대도 위로도.. 세상 방식이고, 세상 통념이었습니다.
그런데 드보라가 바라본 창문의 형식은 뭐였을까요? ↓
4:14 ‘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 주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에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 하는지라
이에 바락이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에서 내려가니’
드보라가 바라본 세상의 방식은 뭐였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 약속의 창문으로 세상을 해석했습니다.
‘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내 손에 넘겨 주신 날이라’
시스라의 노모가 바라본 창문과, 하나님의 사람들(드보라)의 창문은 이렇게 달랐습니다.
*두 개의 창문 : 설교 제목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느 창문으로 인생을 해석하시겠습니까?
궁궐의 창문의 방식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믿음의 창문의 방식입니까?
다 일어나서 찬송하고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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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