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없는 안정이 가져온 우상들 주일예배설교 | 2026-06-28 Youtube
◈하나님이 없는 안정이 가져온 우상들 삿10:1~16 2026-06-28
◑도입
로마 시대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었습니다. 만신전(판테온) 이런 곳이 있을 정도죠.
신이 계속 만들어지는 거예요. ‘로마 시민의 수보다 로마의 신들의 수가 많았다’
이게 너무나도 당연한 겁니다.
우상은 인간의 마음에 탐욕이 발현된 거거든요.
우리의 욕심이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닙니다.
또 시시로, 때때로 이루고 싶은 것들이 너무너무 많거든요.
그때마다 그것을 이루어줄 신을 찾다 보니까,
사람 한 사람당 섬기는 신의 숫자가 어마어마한 것이죠.
로마인들은 ‘신들과의 평화’를 원했기 때문에, 늘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를 안 드려서 신을 노하게 만들면,
내가 원하는 걸 이루어주지 않을 거니까,
또 심판하니까... 두려움 속에서 늘 제사를 드렸죠.
그런데 따지고 보면 로마는, 그 당시에 가장 강대했던 나라입니다.
부강했던 나라, 안정된 나라, 풍요로운 나라입니다.
풍요롭고 안정되면 어느 정도 바램이 없어져야 하는데,
놀랍게 신은 계속 만들어지더라는 거죠.
▲여기서 신은 뭡니까? 우상이에요. 우리의 탐욕이에요.
여러분들 풍요롭다고 해서, 더 이상 풍요를 바라지 않는 게 아니죠.
무언가 다 이루었다고 해서, 우리 마음의 욕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만하면 안정되었지만.. 더 큰 안정을 원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우상의 특징은.. 지금 내 손에 부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간절하게 바라는 것들이거든요.
더 이상 바라지 않을 만큼, 나를 채워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우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뭡니까? 예를 들어 “돈”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돈을 도대체 얼마를 가지면, 더 이상 ‘돈 우상’을 바라지 않을까요?
'그 돈을 원하는 우리의 탐욕은 한계가 없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돈이 우리에게 우상이 될 때, 문제가 뭐냐 하면
완전하게 채워질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돈을 우상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은,
반드시 돈에게 예속되게 돼 있다는 겁니다. 왜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 '우상은 그냥 소금물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목이 마르니까 바다에 있는 소금물 한 사발 떠 마셔서, 잠깐 해갈이 됐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전보다 더한 목마름이 온다는 얘기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여러분들, 저도 이번 한 주 동안 한번 살펴봤지만,
핸드폰 안에 어플들 보세요. 계속 앱을 깝니다. 왜 그래요?
그게 우리의 탐욕의 발현이에요.
‘뭐 좀 더 얻고 싶고, 뭐 좀 더 바라고 싶고, 남들과 똑같아지고 싶고...’
그게 핸드폰 안에 계속적으로 깔리는 앱 아닙니까?
그러니까 로마의 만신전(모든 신을 섬기는 신전)이,
지금은 우리 핸드폰 안에 있다... 그렇게 보시면 돼요.
내 안에 핸드폰에 뭐가 깔려있는지 한번 보세요...
△이제 저희가 성경읽기 프로그램 이렇게 깔려고 하니까, 그냥 좀 우려는 뭐냐면,
그냥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 어플 중에 하나처럼 (취급당하게) 되는 것 같은 우려가 있어요.
돈을 원할 때는, 주식 창 열어서 막 하다가...
또 그러다가 또 하나님 도움이 필요하면, 성경 어플 열어서 막 읽다가...
뭔가 두려우면서, 또 큐티했다가...
좀 생활에 안정이나 만족이 있으면, 또 다른 거 다운받아서 보다가...
이 핸드폰 안에 모든 것들이 다 이루어지는...
이게 바로 ‘판테온 만신전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습니다.
어찌보면 풍요의 때일수록, 더 큰 풍요를 바라는 욕망이 끓어오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물질의 풍요, 쾌락의 풍요, 오락의 풍요, 즐거움 풍요, 먹거리 풍요...
△그러므로 ‘고난의 때보다 안정의 때가 훨씬 더 위기다!’ .. 이 말은 사실입니다.
고난의 때는 붙잡을 게 없으니까 ‘하나님을 붙잡습니다’ 하다가
그러나 풍요롭고 안정되었을 때, 오히려 더 큰 탐욕이 일어나더라는 거죠.
결국 그게 우상을 붙잡는 거잖아요?
그래서 요즘 이런 단어가 있습니다. “풍요속의 이상한 우울감”
아니 지금만큼 대한민국이 잘 살았던 때가 있었습니까?
지금만큼 풍요로울 때가 있었습니까?
근데 지금만큼 우울한 시대가 있습니까? 이상한 때죠.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풍요 속에, 이상한 우울감이 찾아오는...
정말 이상한 이 시대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질문해야 되는 거예요. ‘왜 이럴까?’
고난 중에는 아마 다 하나님 붙잡을 겁니다. 다른 거 붙잡을 거 없잖아요.
물에 빠졌을 때,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라도 하나님을 붙잡을 텐데...
‘과연 나는 안전한 가운데, 안정감 속에, 풍요 속에, 제법 괜찮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절박하게 붙잡고 있는가? 나는 자족하고 있는가?
나는 나의 한계를 알고 있는가?’ 자꾸 질문해야 합니다.
고난의 때에는 하나님을 간절히 붙잡다가,
안정할 때, 평안할 때 넘어지는 경우가 성경에서 허다하거든요.
▲오늘 본문 사사기 10장은 바로 그 얘기예요. 안정된 것 같은데 위기더라는 얘기입니다.
지난 시간에 “아비멜렉의 폭정”을 말씀드렸잖아요.
진짜로 왕이 되려고 했던 그 아비멜렉에게, 폭정기가 끝난 이후에, *그가 죽은 후
두 명의 小사사가 나옵니다. *아비멜렉은 세겜을 중심으로 3년간 통치
小사사는 그 존재감이 작다라는 의미가 아니고, 성경의 분량이 작을 때
우리는 小사사라고 불러요.
선지서도 마찬가지죠. 이사야가 대선지자라 할 때,
정말로 이사야만 위대했던 게 아니고, 성경의 분량이 많기 때문에 대선지자라고 불러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성경의 분량이 적기 때문에 소선지자 이렇게 분류를 하죠. *호세아~말라기 12명
오늘 등장하는 돌라 사사, 야일 사사는 小사사예요. 왜냐하면 성경 분량이 너무 작아요.
그런데 이 小사사는 아비멜렉의 폭정 뒤에, 45년 동안의 평화가 있었던 시기를
묘사하고 있거든요.
삿10:2 ‘(돌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23년 만에 죽으매 사밀에 장사되었더라
3 그 후에 길르앗 사람 야일이 일어나서 22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니라’
그런데 놀랍게도 그 45년이라는 안정기 이후에,
이전보다도 더 많은 우상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지배하기 시작하거든요. 삿10:6 ★
여러 우상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지배하기 시작하거든요.
우린 여기서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안정된 것 같은데, 그게 위기구나!
깨어있지 않으면 더 많은 우상들이 만들어지는구나!’ *주제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혹시 내 안정된 심령 안에 찾아 들어온 우상들이 있는지?’
우리 각자를 점검하는 은혜가 있길 바랍니다.
◑1. 첫 번째는 <돌라 사사>에 대해서 좀 살펴보려고 합니다.
삿10:1 ‘아비멜렉의 뒤를 이어서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그가 에브라임 산지 사밀에 거주하면서’
‘아비멜렉의 뒤를 이어서’
이제 아비멜렉의 폭정이 약 3년 지나서 끝난 거예요.
스스로 왕이 되려고 자기 형제들을 70명이나 죽였잖아요. 피바람이 분겁니다.
그게 이제 ‘안정기’에 있었던 일인 거예요. *외부의 공격이 없었던 안정기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돌라의 특징이 몇 가지가 있죠. 그 특징 중에 하나가,
원래 사사가 등장할 때는, 미디안이나 블레셋같이 외부의 압제가 있거든요.
하나님이 외부의 압제를 통하여, 그들을 권고하셨거든요.
근데 지금은 외부의 압제가 없습니다.
‘아비멜렉 이후에 돌라가 일어났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1
다시 말하면 이 사사의 역할은 내부를 정비하는 것이었겠죠.
아비멜렉 이후에 혼란스러웠던 이스라엘을, 내부적으로 다시 정비하는 역할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눈여겨봐야 될 문장이 나오는데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났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사는 원래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하나님이 세우시죠.
그러나 본문에는, 돌라가 스스로 일어난 거예요. :1
여기에 주목하셔야 돼요.
이스라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아비멜렉 이후의 내부의 회복입니다.
무너진 공동체를 다시 추스르고, 무질서해진 이스라엘을 안정시키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누가 일어나요? 돌라가 일어나는데,
어떻게 일어났다? 스스로 일어났다는 겁니다.
사실 이 문장만 가지고, 이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할지, 부정적으로 해석할지는
선택의 문제인데요.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45년간 두 사람의 小사사가 통치한 이후의 현상을 보니까,
이전에는 바알과 아세라 라는, 가나안의 풍요의 신만 등장했는데,
그 돌라, 야일 후로는 7개의 우상이 나와요.
그것으로 보았을 때는, 이것을 부정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무슨 말씀인가요? ‘돌라가 스스로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돌라는 악한 사람’이라고 직접적으로 정죄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스스로 일어난 거예요.
여기에 대한 부정적 해석은 이렇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성령의 특별한 임재 없이도,
얼마든지 인간이 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얘기예요.
탁월한 리더쉽, 탁월한 행정가, 탁월한 재력가가 일어나서
얼마든지 혼란을 잠재울 수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로 치자면,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서
어떤 사람의 탁월함이, 그의 행정력이, 교회 시스템이, 어떤 프로그램이,
그 교회를 제법 괜찮은 교회로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우심이 없어도
누군가 스스로 일어나서, 자기의 인간적 능력의 탁월함으로
교회를 탁월하게 만들 수 있다는 얘기예요.
(돌라, 야일 시대에 45년간) 이스라엘에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
곧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겉으로는 회복처럼 보였지만, 그 속에는 우상이 자라고 있을 수 있다.. 라는 얘기입니다.
그 45년 후에, 여러 우상, 도합 7개의 우상이 출현해요... 10:6
하나님이 첫자리에 계시지 않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안정은,
때로는 은혜가 아니고 위험이 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위험의 증상은 또 있습니다.
‘돌라’라는 사사의 원래 지파는 잇사갈이에요.
그러나 지금 사역하는 곳은 에브라임입니다. :1
물론 아비멜렉이 일어났던 세겜 땅이라는 곳, 그곳이 에브라임 지파의 땅이었기 때문에,
그곳에 가서, 그곳을 정비했다는 말도 되겠지만,
이 ‘사밀’이라는 땅 자체가 풍요의 땅이었고,
이 돌라가 사역하던 23년 동안은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그 풍요는 매우 극에 달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파의) 경계를 허문 이것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왜냐면 12지파에게 하나님의 땅을 분배할 때는. ‘그 경계를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거든요.
하나님이 주신 땅은 누구도 돈으로 살 수 없고, 누구도 팔 수 없는 땅이므로,
그곳에 거주하도록 한계를 정해놓은 것인데,
그 한계를 왔다 갔다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법도을 어기고 있다..
라는 사사시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자기가 있어야 될 자리를 자기가 결정하는 거에요.
여러분! 사람이 스스로 일어나 공동체를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행정도 회복할 수 있고, 질서도 세울 수 있습니다. 시스템도 잘 만들 수 있죠.
그러나 그 안정이 때로는 우상을 만들 수 있는데,
그 우상은 때로는 매우 교묘하게 숨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자는 얘기죠.
질서는 회복됐는데, 그 안에 우상은 제거되질 않아요.
무언가 질서가 잡히고 회복은 일어났는데, 예배가 회복되진 않아요.
여러분 지금 ‘돌라가 일어나서 그 우상을 제거했다’는 얘기가 한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도 경고를 받아야죠.
여러분들, 고난의 때를 경험하신 분 계세요?
기도를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정말 절박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켜주신 경험이 있는 분들 계십니까?
그런 경험을 통해, 지금 마음의 심령의 안정감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은 괜찮은 상태’라고 가만히 계실 게 아니고,
다시 한 번 우리의 심령을 점검해 봐야죠.
무언가 내 상황이, 내 삶의 환경이 좀 더 나아졌는데,
기도가 줄어들고.. 말씀에 대한 갈망이 줄어들고.. 예배에 대한 절박함이 줄어들고 그렇다면..
그 안정은 복이 아니죠.
오히려 시험에서 안정되면 안정될수록, 복음에서 멀어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너는 고난 끝에, 안정 가운데서도 나를 의지하고 있는 것이냐?
문제가 해결된 뒤에도 나를 찾고 있는 것이냐?
너는 내가 주는 문제 해결보다도, 나를 여전히 원하고 있는 것이냐?’
하고 물어보고 계신 것입니다.
고난만 우리를 무너뜨리는 게 아닙니다.
때로는 안정도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을.. 우리가 경고로 받아야 한다는 것이죠.
◑2. 야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스라를 죽인 ‘야엘’과 구분 요. 삿5장
삿10:3~4 ‘그 후에 길르앗 사람 야일이 일어나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니라
그에게 아들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성읍 삼십을 가졌는데
그 성읍들은 길르앗 땅에 있고 오늘까지 하봇야일이라 부르더라’
야일도 마찬가지죠. 하나님이 일으킨 사사가 아니에요. 스스로 일어난 사사입니다.
‘그에게 아들 30명이 있어 어린 나귀 30을 탔고 성읍 30을 가졌는데
그 성읍들을 하봇 야일 이라 부르더라' :4
여러분 여기서도 '스스로 일어난' 사사로 표현됩니다.
성경은 하나님 없는 직책에 대하여 늘 경계하거든요.
이건 오늘날도 똑같아요.
여러분 유진 피터슨이라는 분이 '목사들의 목사'라고 알려진 영성가거든요.
그 피터슨 목사님도 똑같은 경고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가진 목사가 있고, 종말로 가면 갈수록 직업 목사가 있을 것이다‘
여러분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저같은 목회자에게는 해당되는 얘기죠.
'내적으로 외적으로 목사의 소명이 있는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고 할 때만, 목사로서의 그 기능이 유효한 것이죠.
그러나 한때는 목사가 되어서, 대우도 많이 받고, 사회적 명성도 얻고, 지위도 얻고...
그래서 성직자가 되려고 했던 때가 있었잖아요.
그게 중세뿐만이 아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있지 않습니까?
이게 목사뿐만이 아니고, 장로든, 권사든, 집사든
스스로 세운 직책을 가지고, 영적인 권위 없이도,
지도력을 행사하려는 것이... 늘 문제가 된다는 얘기예요.
▲제가 오래 전에 찬양팀 리더로서 섬길 때, 찬양팀에 들어오겠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셨죠.
그럼 이제 면담을 하잖아요. 지원자들과 개인적으로 상담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보거든요. '왜 찬양팀을 하시려고 하나요?'
여러 분들이 그랬어요. 늘 비슷하게 하는 얘기가
'저는 이전 교회에서도 찬양팀을 했습니다. 이번에 이제 이 교회에 등록하게 됐는데,
여기서도 찬양팀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계속 물어보는 거죠. '그게 아니고 왜 찬양팀을 하시려고 하시냐고요?'
그분이 한 대답은, 제 귀에는 그렇게 들렸어요.
'저는 노래하기를 참 좋아해요. 전 찬양을 참 좋아해요.'
'그럼 회중석에서 부르세요.'
아니, 앞에 나와서 찬양팀 하는 찬양이나, 회중석에 앉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나
하나님이 뭐 다르게 받으십니까? 똑같잖아요.
그래서 아마 제가 예전 교회에서 찬양팀을 인도할 때, 찬양팀이 많지 않았나 봐요.
제가 아주 까칠하게 구니까, 많이 지원 안 했던 것 같아요.
제가 계속 물어보니까요. '왜 그러시냐고? 왜 자꾸 앞에 서시려고 하시나요?'
그걸 계속 물어봤거든요.
'3주간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답을 찾아서 오세요.'
이렇게 제가, 지원자들에게 3주의 기간을 드리거든요.
그 3주 후에 안 오신 분도 계세요. '뭐 이런 교회가 다 있어? 내가 봉사하겠다는데!'
봉사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제 생각에는, 회중 앞에서나, 회중 가운데서나
하나님이 들으시는 찬양은 똑같은데, 왜 자꾸 앞에 서려고 할까요?
저는 너무 많이 봤거든요. 사람들 앞에 서려는 분들...
그 앞에서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사람들... 저는 너무 많이 봤습니다.
그래서 찬양팀이 8명인데 마이크도 6개만 준비했거든요. 돌아가면서 마이크를 안 줬습니다.
제가 정말 까다롭게 굴었죠. "마이크 없어도 설레요?"
제가 원했던 답은 '하나님이 저를 찬양팀으로 부르셨습니다. 저에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이 일로 섬기라고 저를 부르셨습니다.' 였어요.
여러분, 부르심 받은 사람은 리더의 컨트롤을 받지 않아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늘 섭니다.
전화해서 나오라고 독려해야 나오는 게 아니고, 교육해서 잘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늘 지키거든요.
▲똑같습니다. 교회도 스스로 일어난 사람들이 세워가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스스로 탁월한 능력, 재능, 단란트, 은사... 다 갖고 계실 겁니다.
'이전 교회에서 내가 뭘 했고.. 뭘 했고.. 뭘 했고..'
그러나 이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오셨다면, 오늘 이 말씀에 근거하여 말씀을 좀 드립니다.
‘스스로 일어나는 사람 되지 마시고,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일어나시는 성도가 되신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은사와 단란트를 그 경험을, 그 리더십을, 그 탁월함을,
아름답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만약 스스로 일어나려고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 공동체에 어려움을 주는 요소가 되겠죠.
▲오늘 본문의 야일도 똑같아요. 이 야일의 상황을 보면,
지난 주에 기드온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어요.
기드온이 미디안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 이후에
사람들이 기드온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을 때,
‘아, 나는 안 된다고, 나는 안 안 된다고’ 손사래쳤지만,
결국 아들을 낳고 ‘아비멜렉’으로 이름을 지어요.
‘너의 아빠는 왕이다!’ 라는 뜻인데, 이게 스스로 왕이라 칭함을 받는 것이잖아요.
오늘 야일도 똑같아요. 자녀가 30명인데, 나귀가 30마리이고, 성읍이 30개입니다.
무슨 얘기예요?
자녀 30명에게 각각 나귀 1마리씩 줬다는 얘기예요.
그 당시 나귀는 뭐예요? 지금으로 치면 고급 승용차예요. 자랑하듯이 뽑아준 겁니다.
모두가 걸어다니던 그 당시에, 짐을 싣고 다니며 무역할 수 있도록,
또 성읍간에 이동하기 편하도록, 나귀 한 마리씩 주었고요. 성읍도 하나씩 준 거예요.
그리고 성읍을 뭐라고 불렀다고요?
하봇야일, ‘그것은 야일의 도시다. 야일의 마을이다!’ 라는 뜻이죠.
언제부터 그 땅이 야일의 땅이 됐습니까?
‘길르앗’ 이라는 땅이,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이 배분하신 은혜로 받은 땅이지,
언제부터 야일 자기가 소유한 땅이 됐습니까?
'하봇 야일'은, '아비멜렉' 이라는 이름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 당시는 사사가 왕과 같았습니다. ‘왕’이 없었던 시절에, ‘왕’같은 존재였어요.
▲한국교회도 똑같잖아요. 목사가 왕 노릇하다가 무너지는 것 아닙니까.
목사가 제왕적 권력과 지도력을 가지다가... 무너지는 것 아니에요?
여러분들은 ‘우리는 교회’를, 어떻게 소개하고 계십니까?
혹은 여러분들이 예전에 다녔던 교회를 어떻게 소개하고 계세요?
사람들은 늘 교인 숫자 얘기하죠.
‘이전에 내가 다니던 교회는 몇 명 모이는 교회였어’
‘내가 아는 목사는 이렇게 유명한 목사인데, 내가 그 사람한테 결혼 주례를 받았어,
세례를 받았어...’ 그게 뭐 중요합니까?
그 분한테 세례 받으면 세례가 유효하고,
어디 시골에 있는 목사님께 받은 세례는 무효한 겁니까?
우리 안에도 헤아리는 숫자가 있다고요.
본문의 30, 이 숫자가 우리에게 주는 상징성이 있거든요. :4
그 당시 30개의 성읍을 가졌으면.. 그건 거의 작은 나라예요.
그 지역의 왕이었다는 얘기예요.
오늘날 뭐가 우리의 자랑이 됩니까? 숫자가?
그 숫자가 ‘예수로 충분하다’는 예수의 충분성을 오히려 가리우는 것이라면,
그 숫자는 축복이 아니죠. 오히려 우상의 숫자가 되는 것을, 경고 받으셔야 되는 것이죠.
내 이름이 드러나고, 내 자녀의 이름이 드러나고, 내가 가진 소유가 드러나는 것,
이것이 바로 번영 prosperity 의 위험입니다.
▲사사기 10:1~5절 돌라와 야일이라는 사사가, 스스로 일어난 45년 동안,
세상은 평화로운 것 같았지만, 결국 결과가 뭡니까?
1~5절의 평화기를 거친 이후, 이어지는 6절을 보십시오.
10:6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7부류의 우상들
이때까지는 가나안의 풍요의 신만 섬겼는데, *바알과 아스다롯의 두 신
돌라와 야일의 통치 이후부터는
아람의 신들, 시돈의 신들, 모압의 신들, 암몬 자손의 신들, 블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려 그를 섬기지 않았다... 고 했습니다. *다섯 신의 이름이 추가됐어요.
도대체 45년 동안 평화로웠는데, 이스라엘 백성들 평화 속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우상이 자라난 거예요.
아람과 시돈은, 북방의 신들, 경제적 풍요, 무역하는 신이거든요.
모압과 암몬의 신들.. 동방의 신입니다. 군사력과 국가적 안전의 신이거든요.
서방으로는 블레셋의 신들.. 강력한 철기 문화,
사방의 신들을 다 가져온 거예요. 사방에 있는 대로 다 끌어모은 겁니다.
안정을 준다면 안정할수록 좋은 거고,
풍요를 준다면 풍요할수록 좋은 거고,
더 풍요로워지고, 더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사방의 신들을 다 끌어 모았던 것이, 돌라와 야일의 45년이에요.
위장된 풍요와 평화죠. 하나님이 주신 풍요와 평화가 아니죠.
저는.. 괜찮다 하는 교회, 안정되게 보이는 교회일수록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보는 것이죠.
'우리는 교회'도 매우 위험한 교회일 수 있죠.
복음을 들어도 ‘다 아는 거야.. 아니 목사님이 늘 얘기한 거야’
이제 몇 년만 지나보세요. 복음이 들려지는 게 점점 식상해질걸요?
복음 듣는 일에 게을러질걸요. ‘뭐 좀 더 신선한 게 없나? 내 복을 채워주는 뭔가가 없나?
내게 더 위로가 될만한 뭐가 없나? 저 목사님은 맨날 왜 복음 복음만 얘기할까?
내 삶에는 더 중요한 게 많은데...
그것을 채울 수 있는 무언가가 왜 내 귀에 들리지 않는가?’ 하면서 예배가 시들해질걸요?
△여러분, 인도 같은 나라에 왜 선교가 어려운지 아세요?
복음을 전하면 그냥 받아들여 버리거든요.
그런데 복음만 받아들이는 게 아니고, 여러 신들을 받아들여요.
복음도 그 신들 중에 하나로 받아들여 버리거든요.
왜 ‘하나님 없는 안정’이, ‘하나님 없는 괜찮은 사람들의 모임’이 위험한 줄 아세요?
그게 복음인줄 알고 받아들여 버리거든요.
또 다른 것도, 또 다른 우상도 받아들이고 있거든요.
안정되어 있으니까, 좋다는 것은 뭐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탁월함은 ‘예수로 충분하다는 복음’만 받아들이는 데 있는 겁니다.
▲성경에도 이런 예가 많습니다.
1) 아브라함이 아들을 원했죠. 하나님이 이삭을 선물로 주세요.
그럼 아브라함은 무엇을 기뻐해야 될까요?
아들을 주신 하나님을 기뻐해야 되죠.
그런데 사람은 자꾸 눈에 보이는데 마음이 쓰여지니까... 이삭이 기쁜 거예요.
‘이삭을 주신 하나님’은 감사하지 않게 되는 거예요.
그때 하나님이 뭘 요구하십니까? ‘이삭을 바쳐라!’
이 메시지는, 이 황당한 명령은, 이삭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죠.
이삭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 말라는 메시지죠.
‘너의 삶에 내가 준 선물을, 나보다 더 사랑하지 말라’는 얘깁니다.
‘내가 준 안정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 말라’는 얘기거든요.
그러나 우리는 안정과 풍요가 올 때,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이 올 때,
하나님께 선물을 받을 때,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될 때가 많다는 얘기예요.
2) 다윗도 전쟁을 치를 때, 골리앗과 싸울 때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골리앗, 얼마나 위험할 때입니까? 누구도 이길 수 없는 대상인데...
그때는 영적으로 긴장하는 거죠.
그런데 안정되어 왕좌에 이르고, 그 말년에 평화로울 때,
다윗은 범죄하는데, 그 범죄가 바로 인구조사입니다.
‘내 왕국의 숫자가 얼마나 불어났는지... 다른 적군들이 쳐들어왔을 때
우리 군사의 규모가 얼마나 많은지...’ 헤아려 보고 싶은 거예요.
내 군사인 겁니다. 내 백성인 겁니다. 내 나라가 된 거예요.
하나님은 그 인구조사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 헤아린 숫자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 숫자가.. 이스라엘에 안정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군대의 많고 적음으로 승리를 얻어내는 것이 아닌 것을.. 다윗도 알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물맷돌을 가지고 골리앗과 싸웠던 것 아닙니까?
그러나 말년에 가니까, 편해지니까... 인구조사 하는 거예요. *전쟁 나갈 군인 숫자 계수
3) 솔로몬도 처음 성전을 건축했을 때는, 하나님이 이 성전에 머물러 주시고,
나의 지혜가 되어주셔야 됨을 늘 말했지만,
풍요로워지니까, 안정이 되어지니까... 이방인의 아내들을 들여오잖아요. 결혼하잖아요.
그 아내와 함께 수많은 우상들이 들어오잖아요. 그 일이 다 언제 벌어집니까?
평안했을 때에요. ‘하나님 없는 평안’이 가져온 우상들입니다.
4) 눅12장의 ‘어리석은 부자’는, 풍년이 들어서 곡식이 풍성해져요.
그러니까 창고를 더 많이 짓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영혼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내 영혼아 평안히 쉬자.. 내 영혼아,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거 다 내꺼야’
그때 하나님이 그 부자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어리석은 자여, 이 밤에 내 영혼을 거두면, 그 소유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안정이 은혜일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안정이, 그 하나님의 선물이
‘안정과 축복을 주신 하나님’을 잊게 만든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고 우리를 우상으로 빠뜨리는 덫이 됩니다.
번영은 선물일 수 있지만.. 그 번영이 하나님보다 더 소중해지면,
숫자는 은혜일 수 있지만.. 그 숫자가 ‘그 숫자를 주신 하나님’보다 더 커진다면,
그것은 우상이죠.
◑이제 이후에 참 무서운 일이 벌어집니다. 또 다시 이스라엘은 압제를 당합니다.
하나님은 이 백성을 드디어 외부의 압제에 노출시키시죠.
삿10:7~9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그들을 파시매
그 해에 그들이 요단 강 저쪽 길르앗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땅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쳤으며 열여덟 해 동안 억압하였더라
암몬 자손이 또 요단을 건너서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과 싸우므로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
블레셋과 암몬이 또 쳐들어와서 압제하니까, 지금 이스라엘은 또 꼬리 내리는 거예요.
10:10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
그런데 이게 진짜 회개일까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구하는 기도를 안 해요.
'하나님'을 구하는 기도를 안 해요. 하나님께 '이 압제로부터의 구원'을 원한다고요.
이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치를 떠십니다. 게다가 지금 ‘바알을 섬겼습니다’ 하고 회개하고 있죠.
앞서 몇 가지 우상이 있었습니까? 일곱 가지가 있었어요. 10:6
이스라엘은 본인들의 범죄의 크기를, 아직 잘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10:13~14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언어, 늘 했던 언어적 수사에 속지 않으세요.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질문하시는 겁니다.
‘돈이 너를 구원하게 해?
네가 그토록 의지했던 그 사람이 너를 구원하게 해?’
근데 다 왜 하나님께 나옵니까?
돈 때문에 망했거든요.
의지하던 그 사람한테 배신당해서 망했거든요.
내가 그렇게 지키려 했던 그 건강 때문에, 그 질병을 통해서, 내가 지금 고난받고 있거든요.
내가 다 의존했던 것으로부터 다 배신당해서... 내가 괴로워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뭐라고 그래요?
‘너가 그 우상들에 가서 너를 구원해 달라고 말해 봐!’ 라고 지금 말씀하시는 것이죠.
‘네가 바라던 신들에게 가서, 구원을 요청해라!’ 해결이 불가능하겠죠.
▲이스라엘을 인하여 근심하시는 하나님
16절부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실체가 보여집니다.
10:16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여기서 ‘하나님이 근심하신다’는 표현이 나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마도 우상들을 제거하는 척이라도 했던 것 같아요.
이 장면을 하나님이 또 속아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왜 근심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전능자에게 무슨 근심이 있어요?
전능하신 하나님께 무슨 근심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여기서 ‘근심하다’라는 뜻을, 아마 많은 번역 성경이
이만큼 다르게 번역한 내용도 없을 겁니다.
여기서 개역개정은 ‘근심했다’라는 표현으로 썼지만,
원어적인 의미로 보면 ‘그 영혼이 짧아졌다’ 이런 의미예요.
다시 말하면 이게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됐다’는 얘기예요.
‘마음이 조급해졌다’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그 마음이 비통해졌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걸 제가 다 요약해서 표현하자면, 여기 다 부모님들은 아실 겁니다.
자녀들 볼 때 짠한 거 있잖아요. 짠한 거!
자녀의 잘못한 것 때문에 막 화가 나서 한 대 때렸다가,
아들이 시무룩하고 있으면.. 그 짠한 마음 있잖아요.
저도 어릴 때 잘못해서 매맞고 나서 흑흑흑 울고 있으니까,
어머니가 이렇게 약 발라주시던 그 기억이 있거든요.
청소년기니까 그때는 몰랐지만, 제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뭐 때려놓고.. 병 주고 약 주고 다 하시네!’ 이런 마음이었지만,
제가 커서 자녀를 키워보니까 그 마음을 알겠어요.
맞은 나보다, 때린 부모의 마음이 훨씬 더 아픈 거죠. 이런 게 짠함 아닙니까?
죄를 내버려 둘 수도 없는데.. 그렇다고 그를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근심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한테는 이게 너무 어려웠어요.
‘이거를 어떻게 설명하나?’ 이걸 말로 잘 표현할 수가 없거든요.
하나님의 근심은 짧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1) 첫 번째는 사랑하기 때문에 당하는 근심이에요.
여러분, 이건 자초하는 근심이에요. 하나님이 스스로 만든 근심이에요.
하나님은 고통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분이 왜 고통이 있으셔야 됩니까? 완전하신 분인데!
그런데 그 고통을 자초하신다면, 하나님의 전능함이 부족하기 때문에 오는 근심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찾아오는 고통이거든요.
여러분, 자녀에게, 부모로서 거절을 당해보신 적 있으세요?
자녀의 사랑이 부모의 사랑을 넘어설 수 없잖아요. 우리는 내리 사랑이잖아요.
여러분이 준 사랑, 부모가 베풀어 준 사랑만큼, 자녀에게 효도받아보신 분 계십니까?
아무도 없을 거예요.
아마 되돌려 받은 것이 있다면, 대부분 다 배신감일 겁니다.
자녀에게 이만큼 해줬지만, 반의 반의 반도 부모에게 안 돌아오죠.
자녀로부터 받은 거절감과 그 배신감으로부터 온 아픔들이 있잖아요.
바로 그거예요. 부모가 스스로 자초한 거죠.
언제 자녀가 부모한테 잘해달라고 그런 적 있어요?
늘 자녀가 얘기하는 게 뭐냐면 ‘언제 내가 해달라고 그랬어? 언제 내가 도와달라고 그랬어?’
그런 얘기 들으실 때 어때요? 억장이 무너지죠. 부모가 스스로 자초한 거잖아요.
애들 싹 버리고, 나만 잘 살 것 같으면... 세상 편하죠.
자식만 없어도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초한 근심이에요.
2) 두번째는, 거룩함과 하나님의 사랑의 거대한 충돌입니다.
이게 근심으로 오는 거예요.
공의, 거룩함은 뭡니까? 죄를 내버려두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거룩하기 때문에 죄를 내버려둘 수 없어요.
그러니까 블레셋과 암몬을 통하여, 그들을 압제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겁니다.
그러나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거예요.
그 이방의 압제를 통하여, 자녀들을 다 멸절할 수는 없는 겁니다. 또 구원해내야 되는 거예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살려주세요’ 할 때,
저 살려달라는 것이 가짜 회개인 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내버려둘 수는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근심은 죄를 심판해야 하는 거룩한 공의와,
죄인을 살려내야 되는 불타는 사랑이 충돌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음이 뭔가 타오르는 거예요. ‘이거 내버려 두면 안 되는데...’
이 거룩한 딜레마가 바로 하나님의 근심이죠.
3) 세 번째는 이것으로부터 잉태된 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근심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십자가가 주어진 거에요.
사사들로는 이 긴장감이 해결될 수 없죠.
사사가 세워져서, 또 미디안으로부터 블레셋으로부터 암몬으로부터 또 구원해내는 데
쓰임 받을 겁니다.
그러나 이들을 완벽하게 우상으로부터 구원해낼 순 없죠.
하나님은 그 백성을 징계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방법 대신에
하나님의 근심의 근원이 되는 그 죄의 문제를 스스로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죠.
본문 사사기 10장의 이 하나님의 근심은, 수천 년 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의 근심으로 표현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근심하여 죽게 되었다’
그것이 예수님의 자기 죽음에 대한 근심이겠어요? No
네, 이게 오늘 하나님의 근심이예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근심,
이 근심을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를 기꺼이 지신 것이죠.
이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은 공의를 이루시고, 사랑도 완성함을 통하여
우리에게 죄로부터, 사단으로부터, 우상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은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않겠다’ 냉정하게 선언하신 것 같았지만,
결국은 자녀의 신음소리를 들으시면서 ‘더는 못 참겠다, 더는 못 보겠다’
가슴이 타들어가는 심정으로, 그들을 다시금 구원해 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초대하시는 것이죠.
‘이 사랑 안으로 들어오라’는 얘기예요.
‘내가 너희를 책임지겠다’ 말씀하셨다면,
그들도 우리도, ‘하나님만으로 충분합니다!’
라고 반응하는 자녀가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지금 밖에서도 판매하고 있는 책이지만
<왜 당신은 절반의 삶에 머물러 있는가?> 고윤 저
그 책 안에 보니까 이런 문구가 있더라고요.
「우리는 자라면서 ‘나는 충분하지 않다’ 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들었다.
그 말이 쌓여서 어느 순간 사실이 되었다.」
여러분 이게 우상들이 늘 우리에게 들려주는 거예요.
‘너는 충분하지 않아.. 지금으로 충분하지 않아..’
예를 들면, 이런 거죠.
‘네가 지금 가진 돈으로 충분하지 않아.. 지금 네가 가진 안정으로 충분하지 않아..
지금 네가 가진 풍요로 충분하지 않아.. 너 자녀들 지금 같은 공부 성적으로 충분하지 않아..’
늘 충분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드니까.. 우리는 계속 움직여야 되는 거예요.
쉬지 말고 움직여야 되는 거예요. 뭔가를 해야 되는 거예요. 뭘 찾아야 되는 거예요.
쉼이 없는 겁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서) 부족하지 않은데... 하나님이 이미 계신데...
그분이 아버지가 되시는데...’ 우린 움직여야 되는 겁니다.
자녀는 충분히 아버지 집에 머물러 쉬어도 되지만,
스스로 종이라고 여겨지니까, 계속 움직여야 되는 거예요.
우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노예로 만듭니다.
여러분 부자의 기준이 뭐예요? 어떤 사람은 한 10억 정도는 자산이 있어야 된답니다.
또 어떤 사람의 기준은 한 70억 정도는 가져야 된대요. 여러분은 얼마나 갖고 계십니까?
현대인은 옆 사람하고 늘 비교하죠. 그 옆 사람에 근거하여, 부의 기준이 생기죠.
그러나 전 세계 평균을 보자면, 연봉 2천이면 부자인 거예요.
그만큼 빈부의 격차가 크고, 그만큼 대한민국은 풍요롭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자가 아니래요. 우리는 부족하대요.
그리고 우상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멈추지 않는 겁니다.
‘나는 여전히 부족해.. 난 충분하지 않아.. 더 움직여야 돼!’
자녀들을 향해서 ‘넌 더 움직여야 돼.. 넌 아직 상당히 부족해.. 그렇게 해서는 안 돼!’
우리 가정이 하나님이랑 함께 하는데요.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완벽하심을, 이 완전하심을...
이 참지 못하시고 우리를 향한 근심을' ... 알려줘야죠. 가르쳐 줘야죠!
‘너는 지금 수준으로도 충분해.. 조금 멈춰도 돼.. 쉬어도 돼..’
왜 이런 얘기가 신앙 안에서 있지 않는가요?
△말씀을 맺으며 사무엘상 5장의 말씀을 드립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전쟁에서 이긴 다음에, 여호와의 법궤를 가지고 가서
블레셋 지경의 아스돗 고을의 다곤의 신전에 둡니다. 전리품으로 전시한 거죠.
블레셋의 마음은 뭐예요? ‘우리가 이스라엘을 이겼다. 이스라엘 신.. 별 것 아니네’
그래서 블레셋의 다곤 신전 앞에 둔 거예요.
그랬더니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삼상5:3~4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
여러분, 여러분의 우상을 끄집어내는 데 방법이 다른 게 없습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지, 뭘 사랑하지 말아야지’
그것을 끄집어내려고 끄집어내지는 게 아니고,
우리 안에 여호와의 법궤가 들어와야 되는 거예요.
우상은 우리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왕을 바꿔야만, 우상이 사라지는 거예요.
법궤가 들어오니까, 다곤 신의 우상이 엎드러지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7, 8월 동안 이렇게 어플을 통해서라도 다시 큐티를 하고,
다시 말씀을 읽자고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성경을 읽으실 때, 꼭 창세기부터 안 읽어도 돼요.
오늘이라도 그냥 오늘 주어지는 말씀이, 신비하게 우리를 이끌어 가거든요.
말씀의 법궤가 우리 안에 들어올 때, 다곤의 신상은 그 말씀 앞에 무릎을 꿇는 겁니다.
하나님을 왕좌에 두지 않고, 나는 여전히 풍요를 꿈꾸면서
‘돈 없어져라, 우상 나와라, 우상 없어져라, 주여 우상을 없애주세요...’
이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답은 하나예요.
‘나를 너의 왕좌로 복귀시켜라!’
△여러분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뭘 물어보실까요?
‘너는 풍요의 때에도,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법궤가 너의 왕좌를 지배하고 있느냐?’ 그걸 물어보시는 거예요.
사람으로 이 교회를 세워갈 수 없습니다.
말씀만이, 복음만이, 이 교회의 중심부를 완벽하게 붙잡고 있을 때,
복음으로부터 나오는 것들,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오는 것들이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복음에 게을러지고, 진리에 게을러지는 교회가 아니고
‘나는 복음으로 충분합니다. 난 예수로 충분합니다.
하나님, 늘 나의 왕좌에 법궤로 역사해 주셔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는 우상들이 그 창조주 앞에 무릎 꿇고 무너지는 역사가
보여질 수 있도록 주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의 제목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