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광야"로 들어가는 습관 주일설교 2021-10-17 Youtube
◈‘나만의 광야’로 들어가는 습관 마14:22~23 2021-10-17
▲‘역린의 기도’ (아래 내용 중에서)
‘역린’이라는 게 뭡니까? 한자어로 치면, 용의 목에 있는 그 비늘 중에,
‘거꾸로 된 비늘’을 뜻해요. 그거 만지면 용이 분노한다는 거예요.
용이라는 것은, 그 조선시대나 고려시대 때 왕을 뜻하지 않습니까?
‘왕의 약점을 건드리는 것’을 ‘역린’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우리의 기도에도 ‘역린의 기도’가 있어요.
‘하나님의 약점, 하나님이 싫어하는 걸 건드리는 기도’가 있다고요.
아니 하나님이 왕이신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뜬금없이 그 진짜 왕한테 가서
‘왕을 달라’고 기도한다니까요. 이게 역린이 아니고 뭡니까?
이게 뭐 역모가 아니고 뭡니까?
우리가 역모의 기도를 꾀할 때가 있어요.
‘돈이 왕이고, 자녀 잘 되는게 왕이고, 내 편안함이 왕(우상)인데,
그거 달라고 왕(하나님)한테 기도하는 거예요.’ 그거 들어 주시겠어요?
그게 역린의 기도입니다.
.........................................
저희가 지금 ‘습관’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있고요. 다섯 가지 습관을 나눌 겁니다.
2주 전에 첫 번째로 축복하는 습관, 너무나 아름다운 습관이죠,
블레싱하는 습관을 가져야 되고
두 번째는 식탁교제하는 습관을 우리가 가져야 되고,
오늘은 이제 성령의 인도함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음성 듣는 성도가 되어져야 된다,
그래서 리슨 Listen 이라는 부분을 배울 겁니다.
▲오늘 이 본문 배경을 보면, 오병이어 기적 후에 무리들이 예수님을 좇아오는 겁니다.
막 예수님을 좇아오는데, 그때 예수님이 어떤 반응을 보이시는가 봤더니
다시 한번 마14:23절을 보겠습니다.
무리들이 막 쫓아왔지만 ‘무리를 보내신 후에’ 예수님은 무리와 분리되는 것이죠.
무리를 보내시고 예수님은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14:23
또 다른 예도 있습니다. 눅5:16절에 보니까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 기도하시니라’
왜 한적한 곳으로 가셨을까요? 그 앞절에 보면 그 배경이 나와요.
눅5: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오되’ 무리가 막 몰려오는 거예요.
본문 마14장도 그렇고, 눅5장도 그렇고,
예수님이 홀로 한적한 곳에 나가서 기도했을 때는.. 무리가 다 자신을 좇아왔을 때입니다.
제가 한번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해봤어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무리들이 막 따라오는 상황,
요즘 말로 수많은 팬들이 따라오는 그런 스타가 되셨는데,
‘이럴 때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예수님이 그 무리와 동조해서, 그 무리들에 휩쓸려서, 매일 그 무리들과 함께 지냈더라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요?
우리는 이미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40일 금식 후,
사단에게 시험을 받았던 내용을 근거로 유추해 보면,
그 무리들과 함께 다니면서, 예수님께 어떠한 시험이 생겨날지에 대해서.. 예측 가능합니다.
그 사단의 시험이 한마디로 정리하면 뭡니까?
‘너의 신적인 능력을 드러내서 스펙타클하게 사역하라’는 얘기였어요.
막 돌을 떡으로 만들고, 공중에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그러라는 것 아닙니까?
더 많은 팬들을 만들라는 것 아닙니까?
다시 한번 질문 드려볼게요.
‘예수님이 한적한 곳에서 홀로 기도하지 않으셨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 질문의 각도를 다시 바꿔보면, 예수님은 이런 팬덤, 인기를 구가하면서
이렇게 무리들이 자신을 좇아다니던 그 상황 속에서
과연 그 한적한 기도의 장소에서... 무슨 기도를 하셨을까요?
주님은 무리와 떨어져 나가서, 무슨 기도를 하셨을까요?
새벽에 기도하신 후에 예수님이 내린 결정에 대한 근거가, 막1장에 나옵니다.
막1: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서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무리들이 지금 예수님을 찾고 있다는 거예요.
말씀도 듣기 원하고, 병도 낫기 원하고, 먹을 것도 좀 기적적으로 주시길 원하고...
지금 예수님 팬들이 막 모여있다는 거예요.
막1: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나는 팬덤 만들러 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나는 무리들의 박수 받으러 온 게 아니다’ 라는 거예요.
뭐하러 왔다? 전도하러 왔다. 인류를 구원하러 왔다!
여러분 예수님의 무리들, 예수님을 좇았던 무리들의 소리는, 팬들의 박수예요.
‘당신 대단합니다’ 라는 소리였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한적한 곳에서 기도할 때 들렸던 하나님의 음성은 뭡니까?
‘예수여, 네가 온 목적을 기억해야 돼!’ 소명의 소리가 들리더라는 거예요.
‘나는 여기에 머물러 팬덤을 키우는 것이 아니고, 다른 마을로 가서 전도해야 된다’
그걸 새벽에 들으신 거예요.
‘너 십자가에 달려 희생해야 돼. 인류를 구원해야지!’
▲정리하면,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영적인 원리가 뭐냐?
예수님이 사역하실 그때도 수많은 무리들의 소리가 들려져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소리가 우리에게 들려집니까?
외부에서 듣지 말아야 될 소리들, 부정적인 소리들, 나를 낙심시키는 소리들,
나를 현혹하는 소리들, 또 내 내면에서도 그러한 소리들이
우리를 실타래 얽듯이 얽고 있는 것 아닙니까?
얼마나 우리의 마음이 복잡하고 많은 생각들이 있으면
어느 책 제목이 ‘내 마음에는 수다쟁이가 산다’ 그런 책이 있을 정도예요.
얼마나 많은 소리들에, 우리가 영향을 받는지 몰라요.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지 않을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이겁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그것은 내 삶의 홀로 한적한 곳을 확보하는 것이다...
라는 메시지를 주시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이 다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음성만이 정말 우리를 살리는 말씀인데, 그 음성을 들으려면 전제가 무엇인가요?
홀로 있는 한적한 곳이 확보되어야 됩니다!
이게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에요.
▲그리고 보면 성경 안에서 하나님을 대면했던 많은 사건들은,, 다 광야에서 일어납니다.
예수님도 금식 후에 광야로 나가시죠. 매일 홀로 한적한 사막과 같은 곳으로 들어가시죠.
모세.. 하나님을 떨기나무에서 만날 때 미디안 광야에서 만납니다. 홀로 있을 때 만납니다.
야곱.. 홀로 스스로 부모의 곁을 떠나, 그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죠.
사도 바울.. 예수님을 대면한 후에 바로 사역하러 가지 않아요.
3년 동안 아라비아 광야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대면하죠.
다윗.. 사울이 쫓아다닐 때, 쫓겨다녔던 곳이 유대 광야, 또 엔게디 광야 아닙니까?
엘리야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곳도 광야예요. 호렙산의 굴입니다.
우리에게 과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는 나만의 광야가 있는가요?
▲오늘 설교 제목이 “나만의 광야로 들어가는 습관이 필요하다”
이 분주한 세상 속에서 그것이 없다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라는 사람의 글을 좀 인용하고자 합니다.
외로움하고 고독은 다른데요.
‘외로움’은 혼자 있는 고통을 표현하는 거예요.
어찌 보면 요즘 말로 하면 왕따, 남들은 다 즐거운데 거기에 나를 끼워주지 않는 것,
그게 외로움입니다. 이건 부정적 감정이에요.
반면에 ‘고독’은 ‘혼자 있는 즐거움’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폴 틸리히 라는 신학자는,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고독, 광야라는 것은 하나님을 대면하기에 즐거운 곳이다’라는 거예요.
혼자있는 괴로운 시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독을 추구해야 돼요. 나만의 광야를 추구해야 됩니다.
창28:16~17에, 지금 야곱이 광야에서 돌베개 베고 혼자 자고 있는 거예요.
부모의 품을 떠나서 젊은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그 당시만 해도, 야곱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라는 생각을 전혀 못 했어요.
부모로부터 떨어져 나간 외로움의 감정이 지배하던 그때,
하나님이 전격적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한마디로 뭐라고 말씀하냐면
‘야곱아, 너는 혼자가 아니야.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돼요.
그 순간 부모의 품을 떠났던 외로움의 장소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고독의 장소가 되는 겁니다.
그러자 야곱은 이렇게 고백하는 거예요. ‘과연 하나님이 여기 계셨구나!’
이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게 아니에요. 여러분이 지금 외로워하고 있다면,
그 부정적 감정이 우리를 감싸고 있다면,
그것은 그 가운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신분석학자 설리번이라는 학자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관계로부터 격리된 부정적 혼자됨을.. 외로움이라고 한다면
야곱이 하나님 만나기 전까지 이랬단 말이에요.
‘나는 부모를 떠나서 혼자구나’
그런데 스스로 선택해서 나다움을 찾는 긍정적 혼자됨이 고독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는, 다시 벧엘로 돌아올 날을 약속받고 떠나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과 동행하면 이건 ‘고독’이에요. 외로움이 아니라요.
자기의 길을 하나님과 함께 걸어갈 수 있다면.. 그게 고독의 길이예요.
왜 이렇게 오늘 광야, 고독에 대한 이야기를, 제가 설교 서론에서 길게 말하는가요?
우리 기독교 신앙은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는 겁니다.
듣는 것에 근거하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만 바라봐라!’ 할 때, 뭘 바라봅니까?
하나님이 어디 계신다고 보여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이고,
그분의 말씀에 귀기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식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1) 먼저는 성경, 이미 쓰여진 하나님의 문자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2) 또 하나는 성령, 우리 안에 거하시는 분,
순간순간 우리의 마음에 주시는 감동, 혹은 인상, 때로는 진짜 들려지는 음성,
상황을 깨닫게 하는 분별력, 이런 것을 통하여, 지혜를 통하여 하나님 말씀하신다고요.
우리는 이 두 가지의 말씀을 듣지 않고는 신앙생활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세요.
신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게 우리나라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이란 단어가 문장에 제일 먼저 나왔지만,
히브리 성경에는 '쉐마 - 들으라' 부터 시작됩니다.
'들으라. 듣는 것이 신앙이다. 이거 듣지 못하면 너는 죽는다'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들어라 이스라엘아!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
성경을 통해 볼 때 '신앙의 타락'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 나타나죠.
농작물에만 물이 필요한 게 아니고, 우리 영혼에도 물이 필요합니다.
그 물이 사라져버리면, 우리 영혼에도 영적인 기근이 오고, 영혼이 메말라버립니다.
암8:1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고,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이라' 이게 영적 기근이죠.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괜찮은 척하고 있지만,
이미 우리의 영혼은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그 목마름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우린 지금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만약 지금 그렇다면, 우리에게 "나만의 광야"가 절실하게 필요한 때라고 생각됩니다. *주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살아가는 인생은, 너무 혼란한 인생입니다.
길이 아닌 길, 길처럼 보이는 길이.. 우리 눈앞에 너무 많아요.
가서는 안 되는 길, 갈 필요 없는 길들이.. 너무 많이 놓여 있고요.
마찬가지로 듣지 않아도 될 말, 들어서는 안 될 말들이
가감없이 우리에게 들려지는 이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러, 적극적으로 우리가 광야로 나가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혼란할 수밖에 없고, 불행해질 수밖에 없고,
지금과 같은 영적 기근 때에, 우리 삶에 열매 맺는 일이 적어지거나,
아예 없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다시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간절한 영적인 욕구가,
여러분 가운데 있길 바라고, 또 그것을 위하여 실천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좋은 습관들이
우리 삶 가운데 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하루에 수없이 듣는 음성은.. 크게 3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고요.
-또 사단의 음성이 있어요.
-또 내 내면의 음성이 있습니다. 크게 나누어 보면 그렇다는 겁니다.
1) 하나님의 음성은 어떤 음성일까요?
우리 마음 가운데 여러분들이, 만약에 하나님의 음성처럼 감동이 온다면,
하나님의 음성은, 항상 진리만을 말하고, 이 진리는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하면,
인간관계를 늘 세웁니다. 인간관계를 더 견고하게 해 줍니다.
'저 사람을 돕거나.. 저 사람에게 위로가 되는 말을 하거나.. 저 사람이 힘을 얻게 해라'
그게 하나님의 뜻이요, 음성이죠.
2) 반대로 사단의 음성은 어떤 겁니까?
사단의 음성은, 내가 입만 열면.. 관계가 깨져요.
저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내 마음이 무너져버려요. 사단은 항상 거짓말을 말합니다.
우리 안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혼돈을 불러일으키고, 분노하게 하고,
수치심을 갖게 하고, 남탓을 하게 하고,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불러일으켜서,
관계를 깨버립니다.
내 언어가, 내 생각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한다면... 그건 사단의 음성이에요.
3) 내 내면의 음성은 뭘까요? 그건 이기적인 겁니다.
'이거 나한테 이득이 되나?' 이거 따지는 거, 그게 바로 이기적인 것이죠.
나를 편하게 해주는 방향으로 음성이 들려진다면, 그건 이기적인 거예요.
우리가 뭐 '하나님의 음성이 안 들려요' 라고 하지만, 이미 다 아는 것 아닙니까?
-관계를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이고,
-관계를 깨는 것은.. 사단의 음성이고,
-나만 편하게 하자는 것은.. 이기적인 음성, 나의 음성입니다.
이 중에서 어떤 음성을 들어야 돼요? 하나님의 음성 들어야 돼요.
성경의 예를 보면, 열왕기상 19장 전체에 3가지의 음성이 등장합니다.
-엘리야라는 사람의 음성도 등장하고요.
-외부에서 들려오는 사단의 음성도 들려오고요.
-또 하나님의 음성도 있어요.
엘리야가 그 당시 아합왕 시대인데, 그 아내 왕비가 이세벨 아닙니까?
악한 왕비였고, 우상의 신상을 이스라엘에 들여왔던 왕비였습니다.
이 왕비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종교 지도자들을 세웠던 사람이고
엘리야는 이 850명의 종교 지도자들과 대결해서, 누가 진짜 신인지 싸움을 하게 되죠.
영적인 전쟁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불을 내려주시는 사건을 통하여, 엘리야가 승리를 했어요.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이 아무리 제사를 드려도 하늘에 불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엘리야 한 사람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불을 내려주셔서
‘참 신이 하나님이시구나’ 라는 것을 모든 사람이 봤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하나의 외부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왕비 이세벨이 ‘850명이 졌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열이 받은 거예요.
그리고 뭐라고 경고합니까? 엘리야를 향하여 ‘너가 내일 죽으리라. 내가 너를 죽여버릴 거야’
이건 사단의 음성이에요.
이 외부의 얘기를 듣는 순간 엘리야는 마음이 위축돼 버려요.
아니 방금 불까지 하늘에서 내린 엘리야 아닙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켰던 위대한 선지자 아닙니까?
그런데 그 이세벨의 널 죽여버릴 거야 라는 말에 위축되어 버리고,
그 소리가 크게 들려지는 거예요. 그리고 로뎀나무 밑으로 가서 ‘하나님 날 죽여주세요..
난 이제 죽을 거야.. 끝났어...’ 내면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기 시작해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난 죽을 거야.. 난 죽을 거야.. 나는 결국 죽을 거야..’
이게 우리와 똑같은 상황이에요.
특히 자녀들 키울 때 어때요? 아이들 받아쓰기 하나만 틀려오면
주변에서 사단의 소리가 들려오죠.
‘우리 아들은 100점 맞았는데, 우리 집 딸은 100점 맞았는데...'
'누구네 집은 100점 맞았는데, 누구네 집은 100점 맞았는데...'
'쟤는 이것도 잘하는데, 얘는 영어도 잘하는데, 얘는 수학도 잘하는데,
얘는 국어도 잘하는데, 얘는 뭐 천재라던데, 얘는 수재이라던데...’ 사단의 음성일 수 있어요.
왜 내 아들하고 비교를 합니까? 내 자녀하고 비교합니까? 내 딸하고 비교합니까?
그 외부의 음성이 들려지는 순간, 내 내면에는 어떤 소리가 들려와요?
‘맞아, 얘는 받아쓰기 하나 틀린 거 보니까 끝장났구만..
에이 멍청한 놈, 에이그 바보 같은 놈!’ 내 내면의 소리가 그대로 투영되어서
애들에게 저주를 퍼붓기 시작하죠. 아니면 레이저를 쏘며 아이를 노려봅니다.
여기에 무슨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외부의 음성과 내면의 음성에만 귀 기울일 때가 너무 많아요.
하나님의 음성에는 귀기울이지 않아요...
아이들이 내 명함이 아니잖아요. 부모님들이나 잘 사세요.
물론 자녀교육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엘리야의 예
그때 하나님이 이 로뎀나무가에 쓰러져 있는 엘리야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호렙산으로 부르셔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세요.
왕상19:11~1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우리는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그러면, 우르릉 쾅쾅하고 소리가 들릴 것 같은데,
안 그러더라는 겁니다.
‘또 바람이 분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특히 한국교회 우리 성도님들은 불을 너무 좋아하고요.
막 바람 너무 좋아하고요. 막 지진으로 하나님이 진동하시며 역사하는 거를 너무 좋아해요.
근데 오늘 엘리야의 하나님은, 그렇게 나타나지 않아요.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의 성향과 여러분의 어떤 성격에 맞춰서 다 해주시나요? No
그러니까 제발 내가 받은 은혜를 남한테 강요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 사람에 맞게 역사하세요. 오늘 엘리야에게는 세미한 음성이 필요했습니다.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엘리야는 살아나기 시작하죠.
세미한 음성이..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도, 이 세미한 음성이 들려온다면.. 나는 살아납니다.
비록 산이 갈라지고, 바위가 쪼개지고, 으르릉 쾅쾅하는 역사가 없더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주목해 보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질 때까지의 시간이에요.
자, 보십시오. 이세벨이 ‘엘리야, 너 죽여버릴 거야’ 라고 협박을 했을 때,
엘리야가 두려워서 도망치거든요.
왕상19:4에,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루쯤 길로 갔다’고 해요.
하루 도망쳐서 결국 갔는데, 거기서는 하나님의 음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19:8절을 보십시오. 그 하룻길 가서 넘어져 있는 엘리야를 하나님이 일으켜 세우셔요.
먹을 걸 주십니다.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40주 40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19:8
하룻길 가서 로뎀나무 앞에 자빠져 있을 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질 않아요.
하나님이 먹을 거 주시고 ‘일어나라 그리고 40일길을 걸어가게 해서
호렙산의 굴에서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이 없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가요?
우리는 하루길 가고.. 음성 듣기를 원해요. 고작 10분 기도하고 음성 듣기를 원해요.
하루 기도하고 음성 듣기를 원해요.
하나님은 때로 40일을 걸어가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곤 음성을 들려주세요.
우리가 믿어야 될 것은,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건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이것을 듣지 못하는 많은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가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그 호렙이라는 산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물에 티백을 넣고 차를 우려내는 동안도,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그 시간이 지나야만, 물과 그 티백이 하나가 되잖아요.
그런 것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그 때가 있습니다. 조급하면 안 돼요.
내 타임에 맞추는 게 아니고, 내 스케줄에 맞추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스케줄에 맞춰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음성 듣기’를 위하여, 제가 몇 가지 실제적인 제안을 좀 드리고 싶어요.
여러분들 오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한다면,
네 가지 간단간단하게 그 제안들을 좀 설명할 텐데,
꼭 기억하시고, 여러분들이 해야 될 일을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제안 첫 번째는 “정해진 시간을 확보하셔야” 돼요.
매일도 좋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도 좋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도 좋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로 들어가실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일도 그런 거잖아요. 정해진 시간입니다.
만약 이 정해진 시간에, 주일을 우리가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혼은 훨씬 더 피폐해질 거예요.
그러나 정해진 시간의 한 번의 예배일지라도,
이것이 한 주간을 살아낼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다면, 주중에라도 예를 들어.. 목요기도회 같은 게 있을 때,
그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 한 시간 반의 시간을 찬양하고, 말씀 듣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우리의 삶은 많은 변화가 있을 거예요.
목요기도회 하는 동안, 우리 교역자 한 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참 재밌는 음성이었습니다. 기도하는데 주님이 그런 마음을 주시더래요.
‘너는 왜 맨날 목요일 날만 내 음성을 듣니?’ 이러시더래요. 그 얘기는 뭡니까?
부끄러운 얘기지만, 목요기도회처럼 한 시간 반 동안 하나님께 집중할 시간들이
일주일 동안에 없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한 시간 반 동안 찬양하고,
말씀에 집중하고 기도하니까... 주님의 음성이 왜 안 들리겠습니까? 들려지는 거예요.
은혜를 받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질문하시더라는 거예요. ‘왜 너는 꼭 목요일에만 음성을 듣니?’
그 얘기는 뭐예요? ‘내가 매일 만나고 싶다’ 그 얘기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떻습니까? ‘목요일에라도 그 음성을 들었을 때,
그 교역자의 삶이 훨씬 더 풍성해진다’는 간증이 있는 거예요.
이 날이 더 많아지면 좋겠지만,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여러분 ‘수요 리마인드 예배’ 때라도, 그 시간을 드려서, 정기적인 시간을 드린다면,
하나님 음성이 왜 안 들려지겠습니까?
우린 짜투리 시간, 남는 시간, 늘 바쁘다가 언제 시간이 되면,
우선 순위의 맨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만나려 합니다.
그러니 그 시간은, 늘 흐지부지 없어지고 말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최 우선순위에 두고,
‘늘 이것만큼은 내가 지키리라’
하나님과의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그리고 만약에 여러분들이, 집에서 혼자 뭔가 기도하고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면,
기도 시간만 20분 정도를 갖는 게 좋습니다. 이게 뭐 통계적이에요.
19분도 좋고 15분도 되겠지만, 20분 정도는 여러분들이 확보해서 좀 머물러 계셔야 돼요.
‘하나님, 저에게 지금 오늘 어떤 메시지를 좀 들려주시기 원합니다’ 하고
좀 오래 기다려 보세요.
많은 기도하시는 분들이 팁처럼 얘기하는게 뭐냐면,
‘내가 정해 놓은 시간보다 5분만 더 있어 보라’ 입니다.
엉덩이를 좀 진득하게 붙이고 ‘아 이제 그만하자’ 할 때부터, 5분을 더!
그때 주님은 말씀하신다는 거예요.
이 얘기는 뭡니까? 조금 더 진득하게 있으란 얘기예요.
내 귀를 드리는 정해진 시간, 이것 없이는 어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습니까?
이것 없이 어떻게 하나님과 친밀해지겠어요?
여러분들의 삶에 정해진 시간을, 지금 이 시간을 좀 마음에 가져보세요.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뭐 새벽기도 하고, 큐티하고, 말씀 보고 하시는 분들도 마찬가지고,
그거 안 하시는 분들은 특히 ‘내가 이날만큼은 주의 음성에 귀 기울여 보리라’
한 번에 20분의 시간을 가져보십시오!
▲2. 두 번째, 이제 시간도 중요하지만, 공간도 중요하단 말이에요.
방해물이 없는 나만의 부스가 필요합니다! 부스 아시죠? *기도의 골방
좀 주변에 방해가 없는 홀로 한적한 곳을 정해 두셔야 됩니다.
제가 지난 주에 어떤 신문 자료를 찾아보니까
유럽에서 요즘 이렇게 소통하느라고, 회사마다 개인 칸막이들을 다 걷어버렸잖아요.
없앴다고 해요. 옆에 사람과 소통하라고요.
근데 그걸 하고 결과를 놓고 봤더니, 일의 효율이 높아지기보다는
훨씬 더 방해받더라... 이런 결과가 있었다는 거예요.
서로 소통하기보다는, 옆사람, 안 쳐다봐도 될 걸 자꾸 보게 되고, 기웃대게 되고,
옆사람들 하는 얘기가 들리게 되고... 해서 방해가 되더라...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얼마나 방해물이 많은지요. ‘방해학’이라는 학문이 나올 정도예요.
우리는 무엇에 방해받는가요? 그 ‘방해학’의 내용을 보면,
요즘 현대인들은, 보통 3분에 1번씩 방해받는대요. 3분의 1번.. 맞는 것 같아요.
성경 보다가도, 한 두어장 읽고 나면, 뭐가 좀이 쑤시고,
그 지속 시간이 한 3분 정도 되거든요.
여러분 어떠세요? 요즘은 뭐 3분이 뭡니까?
이런 핸드폰으로 뭐 영상 하나 볼 때도, 슝 슝 슝 보다가도,
옆에 뭐 또 신기한 거 있으면 또 눌러보고, 눌러보고, 눌러보고 하다가,
‘내가 왜 핸드폰 봤지?’ 원래 목적은 까먹고... 이런 일이 얼마나 많아요?
수시로, 내가 진짜 중요한 일을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이 너무너무 많다는 거예요.
이왕 하나님을 대면하기로 작정하고 그것을 소망한다면,
핸드폰도 좀 20분 동안 멀리 두고, 주변에 좀 내 눈길을 사로잡을 게 없을
골방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자꾸 한적한 곳으로 나간 것 아닙니까?
마6:6절 ‘너는 기도할 때 네 골방에 들어가라’ 이렇게 돼 있잖아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하나님께 기도하라’ 마6:6
하나님은 어디 계세요? 은밀한데 계시대요.
우리와 은밀하게 대화하기를 원하신대요.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6:7절 ‘또 기도할 때 이방인과 같이 중언 부언 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우리 이거 성경구절을 다 알고 있는데, 생각보다 이렇게 믿고 기도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이고, 아무리 그래도 오래 기도해야지... 기도는 질보단 양이지...’
중언부언하는 이유가 뭡니까? 주문 외우듯 하는 이유가 뭐예요?
불안해서 그런 거거든요. ‘어? 한 번 기도해서 될까? 이거 내게 중요한 기도인데,
좀 더 강조해야 되지 않을까?’
‘이게 진짜 중요한데, 이 기도만 가지고 오래 좀 더 반복 집중해야 되지 않을까?’
왜 그런 생각을 할까요? 하나님이 들으시지 않으신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중언부언하지 마라!’
그러면서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마6: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미 아시느니라’
그럼 왜 기도하라고 하냐고요? 아시는데, 그냥 주시면 되지, 왜 기도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네 얼굴 보고 싶다’는 거예요.,
여러분 기도는 ‘네 얼굴 좀 보고 싶다’는 거예요. ‘너랑 얘기 좀 하고 싶다’는 거예요.
‘내가 너한테 할 말이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이 기도의 진짜 목적을 놓쳐버린 거에요. 내 할 말만 하고 가잖아요.
그러니까 기도하는 분들이 팁을 주는 거 아닙니까?
‘5분만 더 있어 보라고!’
‘이제 주님이 말하실 차례인데.. 네 할 말만 하고 가냐고?’
여러분, 내가 기도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기도의 시간에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가 중요한 거죠.
이방인의 기도를 벗어나셔서 하나님의 얼굴 좀 보세요.
하나님의 음성 좀 들으십시오, 방해받지 말고 은밀한 곳을 정해서 기도드려 보세요!
그리고 ‘듣는 기도’에 집중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듣는 기도
▲3. 세 번째, 그 부스에 들어가셔서 제발 하나님께 맡겨 버리십시오.
짐을 반만 맡기지만 말고, 짐을 나도 어느 정도 갖고 있지 말고, 다 맡겨 버리세요.
여러분 그 부스에 들어가셔서 꼭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부터 말하지 마세요.
처음에 그 기도의 부스에 들어가셔서 ‘내가 이거 필요해요’ 라는 문제를
반복적으로 외우듯이 하는 기도를 멈추십시오.
왜요? 하나님이 이미 아시기 때문에!
‘문제 해결 중심의 기도’가 오히려 문제를 낳습니다.
‘이거 꼭 해결돼야 돼요?’라는 것이, 나에게 우상일 수가 있어요.
먼저 들어가셔서 하는 기도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부터 하셔야 돼요.
제가 지지난주 목요기도회 할 때, 그때 설교 제목이 “역린의 기도”입니다.
‘역린’이라는 게 뭡니까? 한자어로 치면, 용의 목에 있는 그 비늘 중에,
‘거꾸로 된 비늘’을 뜻해요. 그거 만지면 용이 분노한다는 거예요.
용이라는 것은, 그 조선시대나 고려시대 때 왕을 뜻하지 않습니까?
‘왕의 약점을 건드리는 것’을 ‘역린’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우리의 기도에도 ‘역린의 기도’가 있어요.
‘하나님의 약점, 하나님이 싫어하는 걸 건드리는 기도’가 있다고요.
아니 하나님이 왕이신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뜬금없이 그 진짜 왕한테 가서
‘왕을 달라’고 기도한다니까요. 이게 역린이 아니고 뭡니까?
이게 뭐 역모가 아니고 뭡니까?
우리가 역모의 기도를 꾀할 때가 있어요.
‘돈이 왕이고, 자녀 잘 되는게 왕이고, 내 편안함이 왕(우상)인데,
그거 달라고 왕(하나님)한테 기도하는 거예요.’ 그거 들어 주시겠어요?
그게 역린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이 왕이라고 믿는다면, 무엇부터 해야 될까요? 왕을 찬양해야죠.
내게 주신 은혜를 찬양해야죠.
△제가 이렇게 정리를 해봤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를 그저 즐거워하는 것부터 시작하라.
하나님께서 나를 소유하시도록 나를 내어드려라.’
그냥 머물면 되는 거예요. 그곳에 머물면 됩니다. 이미 기도의 장소는 피난처예요.
여러분의 이미 안전한 곳입니다. 여러분 피난처 안에 들어왔는데, 왜 걱정을 기도하세요?
이미 피난처니까, 기도의 장소는 이미 피난처니까,
기도의 장소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기뻐하십시오.
피난처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찬양입니다.
감사입니다. 그분을 높여 드리는 일이죠.
여러분, 내가 가지고 온 기도의 제목을,
하나님께 다 맡겨 버리고, 거기에 머물러 계시면서,
주님과 교제하시는 시간, 그것이 우리에게 지금 필요합니다.
△요즘 컴퓨터들은 좋아졌는데, 옛날 컴퓨터들은요.
제가 대학생 때 보면 ‘조각 모음’이라는 게 있습니다.
컴퓨터의 메모리라는 게, 저장을 할 때 순서대로 처음에는 잘하는데,
지웠다 썼다를 반복하다 보면, 어떤 한 내용을 저장할 때도 여기저기에 저장을 해놓거든요.
그럼 그걸 불러올 때, 여기저기서 불러오느라고 컴퓨터 성능이 떨어져요.
그럼 이제 ‘조각 모음’ 같은 걸 통해서, 딱 메모리를 정리를 하면, 좀 더 속도가 빨라집니다.
기도는 우리의 ‘영혼을 조각모음’ 하는 거예요.
수많은 음성이 우리 머리에, 마음에 가득 차 있는데, 막 마구잡이로 끄집어내거든요.
어떨 때는 막 사단의 음성을 끄집어냈다가,
어떨 때는 내 속의 이야기를 막 끄집어냈다가,
가끔 하나님의 얘기도 끊어냈다가... 그게 아니고,
이 기도의 장소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가운데,
이 모든 짐을 하나님께 맡겨버리는 가운데 ‘조각모음’을 하는 거예요.
영적으로 정리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영성가 토마스 머튼은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하면
언제나 일이 간소화되고 최적화된다’고 말한다고요.
왜 우리가 혼란스러운가? 소리가 많거든요.
사단의 소리, 내면의 소리, 하나님의 소리가 짬뽕이 돼 있거든요.
‘조각모음’을 해야 된다, 그게 기도의 시간이다.. 하나님의 성소에서 가능한 일이에요.
시간 정하시고, 공간 정하시고, 골방에 들어가셔서 여러분의 문제 해결을 위한 기도가 아니고
하나님께 머물러 계세요. 맡겨버리고 맡겨버리고 머물러 계십시오.
하나님을 즐거워하시고 하나님 찬양하세요.
▲4. 마지막 네 번째 순종해야 되는데요.
순종해야 되는데, 이게 가장 중요한 얘기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음성 inner voice 을 들려주시지 않는가요?
우리가 순종할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나, 안 들리나?’를 자꾸 시험해요.
신앙생활을 오늘 말씀에 근거해서, 크게 두 가지 부류의 신앙인으로 구별해 보면
첫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한번 들어보고 제가 결정할게요.’ 이고요.
두 번째는, ‘주여 제가 여기 있습니다. 순종할 테니 말씀하여 주십시오’ 입니다.
여러분은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하나님 말씀해 주세요’ 라고 기도는 해 놓고,
마음 속에는 ‘내가 한번 들어보고 결정해야지’ 그런 사람에게 왜 음성을 들려주시겠어요?
하나님은 딜하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우리에게 옵션을 제시하는 분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분이 요구하시는 것,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가장 좋은 것이죠.
하나님은 그 음성을 누구에게 들려주시는가요?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에게 들려주시죠.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으면, 질문하셔야 돼요. 그때 들려집니다.
이거는 대부분 기도하시는 분들, 하나님께 예민한 분들의 공통적인 이야기에요.
질문하십시오!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이 얘기는 뭡니까?
‘말씀해주세요. 제가 한번 그대로 해볼게요.’ 하는 사람에게 들려주세요.
우리는 왜 못 듣는가요? 아예 하나님께 질문을 안해요.
히브리어 ‘히네니’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꼭 기억하세요. 히네니!
이게 한국말로 하면 ‘주여 내가 여기 있습니다.’ 영어로 하면 Here I AM 이에요.
히네니, 내가 여기 있습니다! ‘히네니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어요. 말씀하세요.’ 이건 뭡니까?
‘저는 순종할 겁니다!’
△창22:1 ‘그 일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게 히네니예요.
이게 지금 하나님이 뭐 명하시죠? ‘이삭을 바쳐라!’
아브라함이 ‘히네니’ 하기 때문에, ‘이삭 바치라’ 하는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히네니’ 했기 때문에 순종해야죠.
‘하나님이 뭐 말씀하시는가 보고 내가 결정하겠습니다’가 아니고,
‘저는 뭘 말씀하셔도 순종하겠습니다’ 라는 자세였기에,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대로 순종해야죠.
그리고 이삭을 데리고 사흘길을 가는 겁니다.
그리고나서 이 히네니의 신앙 고백으로 말미암아 어떤 하나님을 만나요?
여호와 이레, ‘아 하나님은 준비하시는구나. 내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구나’
비로소 그때 이 하나님을 만나는 겁니다.
우리는 그냥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만 기도해요.
‘하나님, 예비하시리라 믿습니다. 준비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응답 안 해주세요. 왜요? 순종할 마음이 없는데요.
히네니가 없는데 어떻게 그걸 주시겠습니까?
아브라함이 만약 여러분 순종하지 않았다라고 우리 가정해 봅시다.
히네니 하지 않고 ‘하나님 한번 말씀해 주시면, 들어보고 제가 결정할게요’ 라고 했더라면,
혹시 그 상태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한테 ‘나 너한테 이삭 바치라고 할 건데..’라고 했더라면,
아브라함이 순종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안 했을 가능성이 99%예요.
그리고 나서 아브라함의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요?
상상이지만 이후로 하나님의 음성 듣기가 쉽지 않았을 거예요.
왜요? 그는 순종하려는 자세도 없었고,
이삭을 바치라는 음성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의 마음에는 어떤 하나님이 자리잡아 버려요?
‘하나님은 못된 하나님이구나.. 나한테 제일 중요한 거 뺏어가는 하나님이구나..
다시는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말아야지..
하나님은 늘 나한테, 내가 절대 못하는 거 요구하시는 분이야..
하나님은 내 거 뺏어가는 분이야..
하나님은 내 중요한 걸 내놓으라고 하시는 분이야..
이제부터 난 하나님 음성 안 들을 거야..’ 이렇게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생각보다 우리 중에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음성 한번 들어보고.. 아닌 것 같으니까..
불순종함을 통하여, 이미 부정적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도 안 하는 거예요.
그리고 어떤 기도만 합니까? 내가 요구하는 것만 요청하지요. 이게 바로 반쪽짜리 기도예요.
주님께 물으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내가 간구하는 건, 맨 마지막이고요.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뜻을 분별하는 것이죠.
▲결론을 내립니다. 어떤 남자가 배를 타고 가다가 무인도에 난파가 됐대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좀 여기서 꺼내주세요.
그런데 마침 그 무인도 주변으로 배가 많이 다니는 길이었어요.
배가 한 척 오더니 ‘거기서 나오려고 하냐고? 제가 구해줄까요?’
그랬더니 그 표류된 남자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전 지금 기도하고 있고, 하나님이 저를 구원해 주실 거예요.’
그래요? 하고 가버렸어요.
그 다음에 또 보트가 한 척 옵니다. ‘구조해 드릴까요?’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저를 구원해 주실 겁니다.’
몇 척이 지나가는데, 이 남자의 대답은 늘 똑같아요.
‘아, 저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구원해 주실 겁니다.’
도움의 손길이 너무 많아요. 하나님의 하실 길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하나의 레일로 된 철길이 아니에요.
수많은 주차장에 비어있는 주차 공간이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때, 근데, 우리는 레일 하나 가지고 ‘이거 하나여야만 된다고’
기도하고 있는 건 아니냐고요?
‘여기에만 주차해야 된다고’ 얘기하는 건 아니냐고요?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잃어버리면, 분별력이 사라지고요.
가지 말아야 될 길로 가고, 듣지 말아야 될 음성을 들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여러분, 이번 한 주간 뿐만이 아니고, 우리 일평생 신앙생활하면서
제발 외부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마시고요.
내면의 부정적 자아가 말하는 얘기에 귀 기울이지 마시고,
주의 성소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을 들으세요.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데요.
그리고 그 사랑을 신뢰한다면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주여, 말씀해 주세요.’
이 ‘히네니의 영성, 히네니의 기도’를 회복하시는
주의 백성들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