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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5장 상처가 사명이 되다

LNCK 2026. 7. 29. 15:08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회복>        ▣ 내적 치유

요셉 시리즈13. 상처가 사명이 되다 (2026-07-03) Youtube

 

◈상처가 사명이 되다                창45:4~15                 2026-07-03 [요셉 시리즈13강]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한 아버지가 10대 아들과 심한 갈등을 겪었다고 합니다.

급기야는 그 아들이 집을 뛰쳐나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렸지만, 그 아들이 집에 돌아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찾기 위해서 신문사에다가 광고를 냈습니다.

 

“사랑하는 파코, 몇날 몇일 정오에 시내 OO신문사 정문 앞에서 만나자.

너를 용서한다, 사랑한다, 아버지가" 라고는 문구로 광고를 낸 겁니다.

 

파코라는 이름은요. 스페인에서 매우 흔한 이름이라고 합니다.

프란시스코 라는 이름을, 집에서 부르는 애칭이 파코 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철수 영희’ 정도의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광고를 신문에 게재해 놓은 거예요.

 

그리고 아버지께서 그날 그 신문사 앞에 갔더니만, 800명의 파코가 나왔다고 합니다.

수많은 아들이 집을 나갔는데, 저마다 아버지의 용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광고를 보고 몰려들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슴속에, 하나쯤은 지워지지 않는 상처들을 안고 살아갑니다.

누군가에게 받았던 상처들, 부모에게 받았던 아픔들, 배우자에게 받았던 가슴 아픈 기억들,

친구에게 받았던 상처 등등이, 우리 가운데 남아있는 것이죠.

 

누군가에게 용서를 받아야 하고, 또 용서해야 할 일들이,

우리 가운데 너무나 많이 쌓여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말을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그런데요, 상처는 시간이 지난다고 잊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지더라고요. 저만 그런 거 아니잖아요.

 

또 어떤 분들은 말합니다. ‘잊어버려, 잊어버리면 되잖아!’

근데 여러분, 내가 잊겠다고 해서, 상처가 잊어집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잊고 싶은데 잊혀지지 않는 것이 상처입니다.

부모에게, 가족에게, 주변 지인에게 받았던, 혹은 교우관계 속에서 겪었던 그 아픔과 상처는

쉽게 잊을 수가 없는 것이죠.

 

컴퓨터 가운데는 ‘삭제 del’ 버튼이 있지만, 인생 가운데는 삭제 버튼이라는 것이 없어요.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상처는, 현재와 미래 가운데 반드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와 관련된 주제는, 우리 가운데 너무나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풀러 신학교에서 평생 “용서”를 연구한 기독교 윤리학자 루이스 스미디스 교수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쓴 책이 있는데, 이번 주에 말씀 묵상하면서 이 책을 읽었는데,

정말 큰 도전이 되었어요. 이 책의 여러 문장을, 오늘 설교 가운데 조금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는 잊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한다.」

용서라는 것은요.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어서, 잊을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 잊을 수가 없는 것들을 용서한다는 것이죠.

 

만약에 그 사건을 잊었다면, 그것은 용서가 아니에요. 그것은 용서할 필요도 없죠.

그래서 교수님은 또 다음과 같은 글을 쓰셨어요.

용서는 기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기억하는 것이다」*주제

 

이 한 문장의 글이, 요셉의 인생 전체를 해석해 나갑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읽었던 창세기 45장의 이 긴 본문의 말씀을, 한 절로 말한다면,

위 문장으로 말할 수가 있어요.

‘용서는 기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창세기 45장은 성경 가운데 등장한 "용서"와 관련된 본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본문 중에 하나입니다.

이 본문이 아름다운 이유는, 요셉이 착해서가 아닙니다. 요셉의 인격이 훌륭해서도 아닙니다.

요셉과 형들이 화해의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아닙니다.

 

이 본문이 너무나 아름다운 이유는 따로 있어요.

오늘 우리는 그와 같은 사실을 함께 묵상해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흔히 요셉의 인생의 클라이막스는

‘종되었다가.. 죄수 되었다가.. 총리가 되었다..’ 라고 하는 인생 역전 성공 신화

이런 것들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강조점은 조금 다릅니다.

 

여러분, 총리가 되는 그 본문 자체는, 요셉의 전체 이야기 가운데 단 9절밖에 되지 않아요.

아무리 길게 잡아도 9절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형제들과 만나서 그 화의를 푸는 전체의 과정은, 42장부터 50장까지 흘러가는데

그 핵심 부분만 떼어놓고 보더라도 149절이 넘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인생 전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주된 메시지는 무엇이냐면,

고진감래, 힘든 것 끝에 성공이 온다뭐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

상처받은 한 인간이 어떻게 온전히 그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가?

어떻게 진정한 용서자가 되는가?’에 대해서 중심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요셉의 그와 같은 용서와 화해의 모습을 통하여,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요셉 인생에 너무나 중요한 주제가 되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요셉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본문의 말씀인 이 창세기 45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기 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음성을 나눌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1. 첫 번째, 오늘 본문의 강조점은 하나님은 과거의 기억을 새롭게 하십니다.

과거의 기억을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과거의 기억을 새롭게 재해석하게 하십니다.

 

드디어 22년 만에 요셉과 형들이 마주했습니다.

애굽의 총리 사브낫바네아인 줄 알았던 그가, 형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어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시중드는 사람들을 물리고, 요셉은 엉엉 울기 시작합니다. 45:1

그 울음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바로의 궁까지 들리더라고 했죠. 45:2

 

요셉이 그렇게 엉엉 울고 있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형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엄청난 공포였을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저가 요셉이라고?’

저 사람이 엉엉 울고 있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죠.

 

‘또 우리에게 어떤 누명을 씌우려 그러나?’ 라고 하는 의심과 불안과 두려움의 마음에

아마 형들은 벌벌 떨고 있었을 거예요. 그때 요셉이 다음처럼 말을 합니다.

 

창45: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그렇죠. 요셉이 형들에게 말을 합니다.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요셉이 맨 처음에 정체를 밝힌 다음에, 형들에게 한 이야기는 무엇이냐면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입니다. 아니 왜?

요셉이 다가가지... 저 같으면 제가 달려갔을 것 같아요.

 

왜 요셉은 자신이 다가가지 않고, 형들을 보고 다가오라고 말했을까요?

화해의 자리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미 형들을 용서했어요. 그런데 화해하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 용서화해는 다른 거예요. 용서는 혼자 할 수 있어요.

화해는 둘이 같이 해야만 합니다.

 

용서는 그 사람이 받든지 안 받든지, 알든지 모르든지,

내 편에서 할 수가 있는 나의 주도적인 행위입니다.

용서는 내 편에서 할 수 있는, 나의 주도적인 행위입니다.

 

그런데 화해라는 것은요. 두 사람 간의 마음이 좁혀져야만 이뤄질 수가 있는 것이죠.

요셉은 이미 용서했어요. 문제는 형들과의 화해가 이뤄지기 위하여

형들이 요셉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오는 그 걸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가 ‘용서와 화해’의 그림을 우리 가운데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가지고 집 밖을 뛰쳐나갔습니다. 허랑방탕한 인생을 살았어요.

유산을 받고 집에 나간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면

아버지를 더 이상 안 보겠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을 이미 용서했어요. 그 용서의 표시가 무엇입니까?

집밖에 나가 매일 기다립니다. 이미 용서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았죠.

 

화해는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그 아들이 돌이켜 아버지를 향하여 돌아오는 발걸음 속에서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이죠. 용서와 화해는 다른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용서를 선언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이미 용서를 선포하셨어요. 그런데 화해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죄인되었던 인간들이, 자신들이 어떤 죄를 저지렀는지 깨닫고 예수님께로 나아가야만,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요셉은 이미 용서를 끝냈어요. 용서하지 않았으면

그냥 42장에서 그들을 붙잡아놓고 때리든 죽이든 하면 끝날 일입니다.

 

지금까지 요셉이 기다려준 것은, 형들과의 화해를 위한 단계적 일들이었죠.

이제 요셉은 형들을 그 화해의 자리로 초청하고 있는 거예요.

 

▲이제 형들이 요셉에게로 가까이 옵니다.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요셉의 얼굴을 봅니다.

그때 요셉이 다가가서 조곤조곤 말하는 것입니다. 뭐라고 말했을까요?

 

‘그때 왜 그랬어? 이제 내 차례다’ 이런 말을 했나요?

아니요. 그런 얘기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말을 하냐면, 더 무서운 말을 해요.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형들은 얼마나 놀랬을까요? 여러분 요셉은 고통의 사건을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형들의 죄를 없다고 치부하지도 않았어요. 정확히 말합니다.

‘나는 당신의 아우 요셉인데,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입니다.’

 

절대 잊을 수가 없는 사건이죠. 요셉은 그 사건을 정확하게 언급합니다.

그 사건을 정확하게 언급한 다음에, ‘우리 없던 일로 합시다 오케이? 난 쿨하니까!’

그래서 허그하고 이러지 않았어요. 그건 회피입니다.

 

죄를 죄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용서가 아니라 회피죠.

상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부정이요.

그런 식의 방법으로는 우리 안에 있는 상처의 감정을 해결할 수 없을 뿐더러,

진정한 용서의 자리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성경적인 용서는, 진실된 고백 위에 서있어요.

요셉이 형들을 가까이 부른 다음에 ‘나는 당신들의 아우인데,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입니다’

라고 말했을 때, 형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을 겁니다.

머리가 깨질 듯 복잡했을 것입니다.

 

마음은 너무 놀라고 복잡해서 ‘이 상황에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될지’

그들은 정말 불안감에 벌벌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니까 요셉인 거죠.

멀리서 보니까, 요셉이 가발 쓰고 있고, 총리의 옷을 입고 있어서 누구인지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그 동생이 맞는 것입니다.

 

▲너무나 두려워 떨고 있는 그들에게 요셉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45: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5절 한 절의 말씀이, 요셉 인생 전체를 떠받돌고 있는 기둥같은 말씀이 됩니다.

 

요셉은 먼저 형들의 마음을 안심시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그렇죠. 요셉은 정확하게 찝어 말합니다.

 

여러분 요셉이 어떻게 한 사람이 일생동안 다 경험할 수 없을 만큼의

큰 상처와 아픔을 경험했는데,

만약 우리가 요셉이 경험했던 사건들 가운데 한 가지만 경험해도,

제대로 된 인생을 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형들에게 옷이 찢겨져서 노예로 팔려갑니다. 인신 매매를 당한 것이죠. 구덩이에 갇혔어요.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객지 타국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강간 미수범으로 오해를 받습니다.

한 술 더 떠서 감옥에 갇혔어요.

 

이 가운데 한 가지만 우리 인생 가운데 벌어져도, 우리는 PTSD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가

없을 거예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그런데 요셉은 어떻게 이와 같은 과정을 다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새벽 이슬처럼 순결한 자의 모습처럼, 이렇게 서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이 한절의 고백 때문에 그래요.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당신들이 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여기로 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화해와 용서의 첫 단계는 무엇이냐면, 내 삶의 주어를 바꾸는 것입니다.

내 삶의 주어를 하나님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인생간에 풀리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당신들이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형들은 자기들이 동생을 팔았다고 하여 근심하고 있지만, 요셉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당신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의 주어를 바꾸는 거예요.

 

우리 인생 끝에 다양한 문제들이 벌어질 수 있잖아요.

그 문제를 일으킨 주어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들을 바꾸는 것입니다.

‘당신 때문에.. 부모 때문에.. 자녀 때문에.. 그 상사 때문에.. 이 사회 구조 때문에..
심지어 나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사고에 빠지면, 용서의 감정에서 헤어나갈 수가 없습니다. 원망하느라 인생을 끝내요.

 

그런데 모든 일은 하나님이 행하셨습니다!’ 라고 믿으면, 원망의 대상이 사라져요.

그때부터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 가운데, 이런 일을 하나님이 행하셨다면,

반드시 이 모든 일을 합하여 선을 이루실 것인데,

그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가 있단 말이죠.

 

하나님이 행하셨는데, 형들을 용서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요셉은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아요.

 

요셉의 인생을 원망으로 채우자면, 죽을 때까지 다해도 다할 수가 없을 겁니다.

요셉은 그렇게 인생을 낭비하지 않아요. 왜요? ‘하나님이 나를 먼저 보내셨습니다.’

그의 인생의 주어를 하나님으로 내밀 때, 그 삶 가운데 해결되지 않았던 많은 인생의 문제가

재 배열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용서 화해, 치유는 그럴 때 이어져요.

 

▲그래서 오늘 본문 전체의 가운데 요셉은,

1) 계속해서 주어를 ‘하나님’으로 두어서 말하고 있어요. 우리 5절을 다시 한번 읽어볼까요?

 

45: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그렇죠.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45: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역시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45: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참고로, 요셉이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라고 고백한 것은,

자신이 애굽의 왕(바로)에게 지혜와 조언을 제공하는 국정의 최고 고문이자

국부(國父)로서의 영적·정치적 권위를 얻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45:5절, 7절, 8절에서 요셉은 하나님을 주어로 자기 인생을 설명해 나가고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 인생을 무엇을 기준으로 설명해나가겠습니까?

 

2) 그렇지만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가지고,

자기 인생을 설명하기 시작하면 풀리지가 않아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죠.

 

‘당신들이 나를 팔아서...’

‘보디발의 아내가 나를 모함하지 않았어도...’

‘술관장이 나를 잊지 않았어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반응 아닙니까?

 

3) 아니면 자기를 주어로 두고 말할 수도 있겠어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압니까? 내가 팔려갔지만 정신 똑바로 차려서 여기까지 살아남았습니다.’

‘그녀가 나를 유혹했지만, 나는 그런 걸로 넘어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옥에 갇혔지만, 2년 동안 잊혀졌지만, 나는 인내력이 장난이 아니거든요.

내가 결국 총리가 되었습니다. 내가 됐어요.’

 

이게 전부 다 뭡니까? ‘자기를 주어로 해서 자기 인생을 풀어가는 거예요.

 

4) 아니면 타인을, 사회를, 구조를, 누군가를 두고.. 자기 인생을 풀어갑니다.

그것으로는 우리가 온전한 용서와 화해의 길로 갈 수가 없다는 것이죠.

 

요셉은 말을 하잖아요.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이렇게 하나님으로 자기 인생을 해석해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용서는...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주인을 바꾸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누구 때문에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하여 여기까지 왔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그 사람이, 요셉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죠.

 

△여러분, 상처가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이 못 되도록 만드십시오

상처가 아닌 하나님의 섭리가,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내 인생을 풀어나가게 시작할 때

내 삶 전체가 이해되어지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기대가 되어지는 것이죠.

 

그래서 스미디스 교수님은 그 책에서도 그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셨어요.

「용서는 우리가 잊을 수 없는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기억하게 한다」

얼마나 맞는 말이에요?

 

요셉의 인생 끝에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죠.

새로운 방식으로 기억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기억상실이 아니에요. 용서는 잊어버리는 것도 아니고, 부정도 아닙니다.

용서는 하나님 안에서 내 인생을 다시금 해석해 나가는 것이죠.

 

▲여러분, 그래서 인생은 사건보다 해석이 중요.하잖아요.

‘내 인생을 어떻게 해석해 나갈 것인가?’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같은 비를 맞아도... 진흙은 더러워지고, 씨앗은 꽃을 피웁니다. 비의 문제가 아니죠.

그 비를 받아들이는 토양의 문제입니다.

 

같은 물을 먹어도... 소는 우유를 만들고, 뱀은 독을 만들어냅니다.

물의 문제가 아니죠. 그 물을 소화하여 만들어내는 객체들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건을 만나느냐? 그것도 중요하겠지만,

그 사건을 내가 어떻게 기억하고 해석해 내느냐? 하는 것이

내 인생의 의미를 풍성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심리학자 가운데 에드가 루빈이라는 분이 있으세요.

그가 “루빈의 꽃병”이란 그림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을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그림인데요. 이 꽃병을 보면 어떤 모습이 보이세요?

누군가는, 사람 얼굴이 맞대고 있는 것이 보이고,

누군가는, 가운데 꽃병이 보일 것입니다.

에드가 루빈은 뭐라 그랬냐면 ‘한 군데 집중하면, 다른 곳은 사라진다!’는 거죠.

 

그래서 루빈은 뭐라 그러냐면 ‘한 사람의 인생을 설명할 때,

혹은 그 사람과 벌어진 사건들을 해석할 때 중요한 것은,

일어난 객관적인 사실보다, 그 사람의 배경을 뭘로 두고 이 사람을 이해할 것이냐?’

이 부분이 더욱 중요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와 같은 ‘루빈의 꽃병’을 예로 들었어요.

 

요셉의 인생을 설명할 때, 그 배경을 상처 얻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깔아놓으면,

이 사람은 피해자가 됩니다.

 

그런데 요셉의 인생을 설명할 때, 하나님의 섭리 역사를 깔아놓으면,

이 사람은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소망의 사람이 되는 것이죠.

 

우리 인생에 수많은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데, 그 일들을 어떻게 해석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이 믿음을 가지고,

이 말씀을 우리 인생까지 배경으로 두어,

그 말씀 앞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배신도 선이다. 거짓도 선이다. (요셉을) 판 것도 선이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세요.

 

다만 인간의 악함이 얼마나 크든지 간에,

하나님은 그 악함으로 인하여 무너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얼마나 악한 짓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하나님의 일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지금 그걸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들은 나를 팔았으나 당신들이 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먼저 보내셨습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하나님을 주어로, 하나님의 섭리로,

우리 과거 모든 문제를 재해석, 새롭게 해석해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2. 두 번째,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메시지는 무엇이냐면

하나님은 오늘의 나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용서하기를 원하지만, 실은 용서를 잘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내가 상처받은 것도 힘든데, 나보고 먼저 용서하라고요?’

이게 잘 풀리지가 않는 거예요.

 

‘내가 누구 좋아라고 그를 용서합니까? 내가 왜 손해 보는 짓을 합니까?

그 사람이 용서를 구하면, 내가 용서할런지 모르겠지만,

아니 내가 왜?

상처받는 건 난데, 내가 왜 그를 용서해야 됩니까?’

이 마음 때문에 용서가 안 되는 거죠.

 

그런데 성경은 전혀 다르게 말하고 있어요.

용서는 상대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스미디스 교수님의 책에 보니까, 이런 구절이 또 있더라고요.

용서란 죄수를 석방하는 것이다. 그런데 감옥에서 나온 죄수가 바로 나 자신이었다!」

 

용서는 죄수를 석방하는 건데, 그 나온 죄수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거예요.

정말 놀라운 통찰이라고 생각이 들어집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괴로울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아요. 내가 더 괴로워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에게 상처 준 분들 있죠? 그 분을 떠올려 보세요.

그분들이 여러분이 용서하지 않았다고 해서, 지금 잠 못자고 있을까요?

아니에요. 그분들은 사실요. 나에게 상처를 준지도 모를겁니다.

 

나를 마음을 아프게 한 그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도 몰라요.

 

내가 용기를 내어서 그분에게 말할 때가 있잖아요.

‘저 그때 당신 때문에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러면 그분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그때 말을 하지... 내가 몰랐어... 알았으면 안 그랬지...’

그 말 듣고나면, 더 열 받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용서는 용서할 때까지 내가 괴롭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나를 풀어놓는 거예요.

용서하지 못하면 그 미움의 감정에 내가 묶여요. 불편한 마음에 묶여요.

떨리는 마음에 묶여요.

 

그 생각과 부정적인 감정에 묶이기 시작하면, 내 인생이 죄인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했어요. ‘원한을 품는 것은 상대방이 죽기를 바라며,

내가 먼저 독약을 마시는 것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상대를 미워하지만, 사실은 나에게 독약을 계속 먹이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 여러분을 자유롭게 놓아주십시오.

 

오늘 본문의 말씀 보면 되게 재밌는 구조가 있어요.

그것은 무엇이냐면 오늘 본문 전체의 가운데, 누가 자유한 자로 등장하고 있는가? 입니다.

 

요셉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유한 자로 등장해요. 사실 그는 피해자잖아요.

근데 그는 자유해요.

 

가해자들은 다 두려움에 떨고 있어요. 피해자였던 요셉은 왜 이렇게 자유합니까?

이미 용서했기 때문에 그래요. 자신을 그 감옥에서 스스로 풀어놓은 것입니다.

 

우리 창45:3절 읽어보겠습니다.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형들이 말을 했어요.

요셉이 ‘나는 당신들이 판 요셉입니다’ 라고 말을 하자,

형제들이 너무 놀랐을 때, 말이 안 나오는 거예요. 너무 두려운 겁니다.

 

22년 동안 묶어 놓았던 자신들 안에 죄책감이 올라오고 있는 거예요.

반면 요셉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요셉은 울고 있고요.

형들을 위로하고, 아버지를 모셔오라고 말을 하고, 고센 땅을 준비하고...

미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형들은 과거 사건에 매여서, 과거에 묶여있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데,

요셉은 온통 미래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왜요?

요셉은 과거의 상처에서 풀려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전체, 아니 창세기 전체의 말씀을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요셉은 한 번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제가 형들을 용서하겠습니다!’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저에게 용서를 구하세요. 제가 용서해 드릴게요.’ 이런 말도 하지 않았고,

‘한 번만 미안하다고 말해주세요. 그러면 내 안에 있는 모든 응어리가 풀어질 것만 같아요.’

이런 말도 하지 않았어요.

 

요셉은 아예 그 모든 사건을 언급하지도 않습니다.

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그냥 맡긴 거에요.

 

▲창세기 50장을 가보면 아버지 야곱이 죽습니다.

장례식을 치른 이후에 형들은, 아버지를 보낸 슬픔보다, 자신들의 안위가 더 걱정되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을 보내서 요셉에게 ‘우리를 좀 보호해달라’고 간청합니다.

50: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아버지 장례 이후에 형들이 무엇을 간청하냐면

‘우리 허물과 죄를 제발 용서해주세요.’

그러니 지금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냐면,

오늘 본문의 45장에서 요셉이 용서와 화해에 초청을 하고 있지만,

형들은 아직 온전히 50장 끝까지 가도록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왜요? 본인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거예요.

본인들이 지었던 죄들이 있잖아요.

본인들이 지었던 죄책감의 감옥에 갇혀서, 자기를 풀어놓지 못하니까,

끝까지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요셉이 뭐라고 말합니까?

50: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놀라운 믿음의 고백이죠. 무슨 말입니까?

‘심판은 내 몫이 아닙니다. 판결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저는 감히 하나님의 자리에 앉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용서예요.

 

많은 사람들은 ‘용서란 내가 상대방을 봐주는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용서가 아닙니다. 진정한 용서는 심판 자리에 앉은 그분께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우리는 선으로 악을 이겨나가는 거예요.

 

롬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용서는요. 맡기는 거예요. (갚아주심은)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선을 행하는 것 뿐입니다.

 

롬12:20~21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오늘 이 밤에 우리가 이 마음 가지고 기도했으면 좋겠어요.

‘하나님, 이 말씀을... 내 맘에 품고 이렇게 살아가는 용서의 사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누군가의 악을 갚으려 하면, 우리 안에 용서의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만 커져요. 또 다른 악을 불러올 뿐입니다.

우리는 선으로 악을 이겨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요셉이 언제 자유로워졌습니까? 형들이 사과했을 때 자유로워졌습니까?

형들이 회개했을 때입니까? 형들이 눈물을 흘리고 용서를 구할 때 요셉은 자유했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요셉은 자기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을 때 그냥 자유했어요.

 

용서한다는 말 자체도 하지 않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영역이에요.

나는 그냥 이들에게 선으로 악을 갚겠습니다. 내가 당신과 당신의 후손을 살리겠습니다.

그와 같은 고백을 하고 있는 거죠. 현재를 자유한 자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용서라는 것은요. 과거에 내 인생 가운데에 벌어진 모든 것들에게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상처, 아픔, 고통, 눈물 그것이 무엇인지 간에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용서로 바라보는 순간,

모든 것이 정렬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흐르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안에 있는 이 상처들은 꼬이고 꼬여서

내 마음과 생각을 복잡하게 만들고 내 인생을 절망 속에 집어넣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누군가를 용서하기 시작할 때, 상처에 딱지가 앉고,

얽힌 실타래가 풀리며, 보이지 않았던 미래 가운데 새로운 빛이 들어오게 됩니다.

 

사람을 붙잡고 있으면 용서할 수 없어요.

하나님을 붙잡으십시오. 그럴 때 용서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3. 세번째,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하나님의 가르침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은 과거의 상처를, 미래의 사명으로 바꾸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상처를 미래의 사명으로 바꾸십니다.

이제 요셉이 빠르게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던 요셉은 과거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과거 이야기는 아까 살펴본 것처럼 45:5절, 7절, 9절에서

하나님을 주어로 그냥 빠르게 해석해버립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하는 모든 이야기들은 미래와 관련된 이야기들입니다.

 

45:9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

 

10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11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위 말씀 보시길 바랍니다. ‘과거에 왜 그랬어요?’ 이런 얘기 하지 않아요.

과거 이야기 아니라, 미래 이야기를 말하고 있어요.

 

9절에 보니까 ‘빨리 아버지를 이리로 모시고 오십시오.

지체하지 말고 아버지를 모시고 오십시오’

 

10절에 보니까 ‘내가 고센 땅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곳에 거하시면 됩니다.’

 

11절에 보니까 ‘아직 흉년이 다섯 해가 남았습니다.

거기서 내가 당신과 아버지와 후손들을 봉양하겠습니다.’

 

요셉은 계획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는 용서의 사람입니다. 용서하면 과거에 집착하지 않아요.

미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누가 미래 가운데 소망을 품고 나아갑니까? 진짜 용서하는 그 사람,

나와 내 자신과 내 주변을 용서하여, 온전한 화해를 이룬 그 사람이

과거를 절단하고, 과거와 화해하고, 미래로 나아가게 되는 줄 믿습니다.

 

이 본문의 말씀이 얼마나 놀라운지 모르겠습니다.

‘고센으로 오십시오’ 무슨 말이에요?

 

요셉은 이미 고센 땅을 준비해 놓았어요. 이 땅을 언제 준비해 놓았을까요?

아마 총리가 되자마자 그는 전국을 순찰하게 됩니다. 41:46

순찰을 도는 가운데 아마 그 땅을 눈여겨봤을 거예요.

 

아, 이 땅이면 되겠다 그래서 그는 그 땅을 준비해 놓았다가

형들과 온 가족을 고센 땅으로 인도하여 그곳에서 양을 치게 만듭니다.

 

 

왜 고센 땅이 중요하냐면 지도를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도를 보면 고센 땅이 보이세요? 고센 땅은 약간 푸릇빛 나지 않습니까?

땅이 좋아요. 목축하기 좋은 땅입니다.

 

더군다나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 특별히 야곱의 후손들은 농사도 지었지만

주된 업무가 양떼와 소떼를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집트 사람들은 목축을 경시했어요. 그래서 고센땅, 좋은 땅을 골라놓아서

이 땅에서 목축하면 되겠다라고 그 땅은 선별해 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어요. 여러분 고센땅을 가만히 보십시오.

그 땅에서 조금만 옆으로 가면 어느 땅이 나옵니까? 가나안 땅이 등장해요.

 

그러니까 이 고센 땅은 애굽 전체 땅으로 보면 변두리에 있는 땅이지만,

가나안 땅까지 놓고 보면 바로 경계선에 있는 땅이 고센 땅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요셉은 고센 땅을 바라보며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냐면,

고센 땅이 단순한 피난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약속의 땅을 준비하는 어머니의 태의 자궁과 같은 곳으로

이곳을 지금 삼고 있다는 말입니다.

 

애굽 속에 있어서 흉년을 피해야 되지만, 애굽 중심 안으로 들어가

애굽과 동화되어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애굽의 보호 속에 있지만, 애굽의 풍요로움을 누리지만

 

민족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을 만한 그곳,

더군다나 하나님의 땅에 곧바로 가나안 땅으로 넘어갈 수 있는 그곳,

조상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그곳으로 넘어갈 수 있는

최적지를 고센땅으로 보았다는 말입니다.

 

▲요셉은 이렇게 말했어요. 아직 기근이 5년 남았습니다. 그럼 이 땅에서 함께 거합시다

라고 말을 했지만, 5년이 문제가 아닙니다. 요셉은 400년을 바라보고 있어요.     주1)

 

이곳에서 오랜 시간 있다가, 하나님이 말씀하셨던 거대한 민족이 되어,

다시금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그 날들을,

지금 요셉이 준비해 나가고 있는 거예요.

 

요셉이 이곳에 끌려온 것은 상처였습니다. 아픔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 안에서 인생을 해석하고,

하나님 안에서 상처를 바라보자... 상처가 사명이 되었단 말입니다.

 

끌려온 땅, 상처의 땅이 그에게는 사명의 땅이 되었고,

한 사람의 역사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구속사를 준비하게 되는 놀라운 일 가운데

요셉이 지금 쓰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상처가 극복된 모든 사람은,

그 상처를 안고 동일한 아픔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나아가는 사명의 연료로,

그 상처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오프라 윈프리가 사명에 대한 네 가지를 말했잖아요.

그 가운데 한 가지가 이것입니다.

‘남보다 아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아파 본 사람만이, 고통 겪는 사람을 위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상처가 사명이다’ 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오프라 윈프리가 먼저 이 말을 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고후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우리가 어떤 일에 아픔을 당하고 있는데,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란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우리가 겪었던 똑같은 아픔, 그 가운데 겪었던 똑같은 위로의 마음을 가지고

누군가 우리와 동일한 아픔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나아가

동일한 위로의 사람으로 우리를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 위로받은 위로자’로 우리를 쓰시기 위하여

그 상처까지도 허용하시고 결국 합력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의 통로로 우리를 사용할 것을 믿습니다.

 

그러니 상처가 사명이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상처 경험을 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상처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상처로 인하여 사명의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예를 들어서 조니 에릭슨 타다 라는 여인이 있습니다.

17살에 다이빙 사고로 전신마비를 앓게 되었어요. 전신마비를 앓게 되었지만,

하나님 안에서 회복되어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신처럼 똑같은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복음으로 치유하는 일을

지금까지 감당하고 있어요.

 

또 코리 텐 붐 여사, 그는 나치 수용소에 갇혀서 수많은 학대와 고통을 당했지만

하나님 안에서 빚어진 코리 텐 붐 여사는 그 이후에 모든 동일한 상처가 되어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위로자로 쓰임받게 됩니다.

 

페니 크로스비, 그는 태어나자마자 시력을 잃어버렸어요.

하지만 어둠 가운데서 주님을 만나 그는 하나님을 향한 찬송가를 지어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나의 갈 길 다하도록, 인애하신 구세주여’ 등

수많은 주옥같은 찬송시를 지어서, 똑같은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고 있어요.

 

이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무엇이냐면, 상처 뒤로 숨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상처에 갇히지도 않았어요.

하나님께서 이루실 그 상처를 통해서 이루실 자기의 사명의 땅으로

담대하게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픔 가운데 있습니까? 상처를 받았습니까?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반드시 여러분을 동일한 아픔 가운데 있는 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위로의 통로로 쓰실 것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미래로 우리의 시선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을 이끄실 미래로 소망으로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 인생 가운데 새로운 길들이 열리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우리가 잠시 살펴보았던 요셉의 이 45장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의 과거가 새롭게 해석이 되어지고

그의 현재가 자유하게 되었으며 그의 미래가 새로운 소망으로 나아가게 되었는데,

이것이 어떻게 우리 인생과는 실제적으로 가능할까요?

 

요셉은 그런 인생을 살았는데,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요셉 같은 삶을 살 수가 있을까요?

성경은 ‘요셉이 이렇게 살았으니, 그 요셉을 바라보라’고 이 말씀을 기록해 놓았을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요셉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요셉의 모습을 통하여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되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요셉의 이야기는요.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적 그림이 됩니다.

요셉은 고백했어요. ‘당신들이 나를 이곳으로 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습니다’ 라고 고백했어요.

이 고백을 누가 하게 되냐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성으로 이 땅 가운데 오셔서

연거푸 말씀하십니다.

 

요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항상 이 땅 가운데서 자신의 사역을 말씀하셨을 때

‘나를 보내신 이가 있다’ 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마치 요셉처럼.

 

요8:42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요17: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여러분 보십시오. 요한복음에만 3번 이상 등장하는데, 우린 3 구절만 보았어요.

예수님은 스스로 오신 분이 아니라, 보냄을 받아 오신 분이십니다.

 

창세기 요셉의 이야기, 특별히 그 가운데 용서, 화해의 얘기가 이렇게 길게 쓰여진 이유는,

그러므로 요셉을 닮아라이것을 말해주기 위함이 아니라,

온전한 화해와 용서를 이루실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며, 그 분이 오실 것인데,

그분을 바라보는 모든 자마다, 요셉 같은 용서와 화해의 삶을 살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요셉이 그리스도의 모형이자, 예표인 거죠.

 

요셉은 형제들에게 팔림받았어요.

예수님은 동족들에게 팔림받았습니다.

 

요셉은 은 20에 팔렸지만

예수님은 은 30에 팔렸습니다.

 

요셉은 억울하게 죄수의 자리에 들어갔지만

예수님은 억울하게 죄인으로 십자가를 지셨어요.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고, 하나님안에서 화해를 이루었어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들을 향한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온 인류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니 요셉의 전체 스토리는, 이 땅까지 온전한 용서와 화해를 이루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요셉 같은 내 인생에 벌어진

과거의 문제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해석하며,

 

내 인생에 주어진 현재의 삶을 용서하여 자유로운 인생을 살아가며,

내 인생의 미래를 소망껏 나갈 수 있을까요?

 

그것을 이루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어요. 그리고 화해로 우리를 초청하여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함께 예배 드리고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그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와 화해를 경험했다면,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어요?

우리가 죽을 죄인이었는데 화해할 수가 없는 존재였는데

그분의 사랑을 먼저 입어서 우리가 이 자리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우리 인생까지 주어진 모든 상처와 아픔, 고통은

하나님 안에서 재해석이 되어지고

오늘의 삶 역시 죄인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자유한자로 살아가며

우리의 미래 역시 하나님의 이것이 소망 가운데 거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 예수만 바라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상처가 사명이 됩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기억을 새롭게 하세요.

현재, 오늘의 나에게 자유를 주시길 원하십니다.

또한 과거의 상처를 넘어 미래의 사명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세요.

 

즉, 예수 안에서 우리 인생을 바라볼 때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님 안에서 해석이 되어지고 은혜 가운데 나아가게 되는 줄 믿습니다.

 

.............................

 

주1)

창15: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4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들이 다른 나라의 객이 되어

400년 동안 종살이를 하며 고통받을 것을 미리 예언하셨습니다.

 

창15:16에 "네 자손은 4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라는 말씀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후손들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고난을 겪다가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가득 찰 때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것을 약속하신

'횃불 언약'의 일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지만,

이 말씀이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까지 전수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아브라함이 이 중요한 말씀을 받고서, 자기 혼자만 꼭 기억하고 있다가

무덤까지 가지고 갔다고 보기는 대단히 어렵죠.

 

그래서 요셉이, 고센 땅으로, 아버지 야곱의 가정을 모두 초대할 때

위 창15:13, 15절을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