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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8장 탄식의 기도를 아십니까?

LNCK 2026. 7. 22. 14:05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기도

260628_로마서 강해(46)_탄식의 기도를 아십니까?(롬 8:26-27)_Youtube 

 

◈탄식의 기도를 아십니까?     롬8:26-27, 요14:18       2026-06-28 [로마서 46강]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복습 / 성도는 영광도 받지만, 고난도 함께 받는다

 

전체적인 말씀은, 고난을 당하는 현재의 삶 속에 있는 로마 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하고

읽으시는 것이 좋고요. 그들을 위로하기를 원하는 거죠. 어떻게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은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 정말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난,

그런 고난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으시겠어요?

 

세상에 제일 힘든 게, 제가 볼 때는 위로 같아요. 위로할 수 있는 능력도 없고,

괜히 위로한답시고 무슨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도리어 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죠.

정말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사람은 진정 위로할 수가 없어요.

 

근데 바울은 지금 그걸 (위로를) 하고 있는 거죠.

우리가 이걸 배우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고난의 현실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장차 나타날 영광을 볼 수 있도록,

그것을 소망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이것이 굉장히 큰 위로.

 

그런데 이 위로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왜냐면 믿음이 아니고서는,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고 그랬는데, 8:23

우리는 제가 지난주 설교에서 그랬죠. '우리는 절반만 구원받은 사람이다' - 존 스토트

 

이거는 우리의 구원이 불확실하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지만 already

아직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not yet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만.. 우리의 몸은 노쇠해질 것이고, 우리의 몸은 썩을 것입니다.

(아직 완전한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거죠)

그러나 장차 부활의 영광을 우리가 보게 될 것이죠. 이게 온전한 구원입니다.

 

그래서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탄식한다'고 그랬는데' :23

사실 이 몸의 속량을 바라는...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는 것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난이 뭐 0에서 10까지 범위를 정하고,

내 고난이 10을 넘어간다 할지라도,

그 고난이.. 장차 나타날 영광과는 비교 불가능하다고 바울은 얘기하는 거예요.

그 장래 영광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바울은 롬5장부터 지금 여기 8장까지 그 주제를 쭉 끌고 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고난 속에서 우린 절망하잖아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왜 내가 이런 고난 가운데 있는데,

하나님은 날 돌보시지 않나?'

또는 '왜 이런 고난이 내 삶 속에 일어나도록 그걸 허용하시는가? 왜 막지 않으시는가?'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인데...' 우리가 이런 생각들을 하잖아요.

 

고난은 우리를 절망으로 데리고 가요.

그래서 바울은 절망 속에서 소망으로 대답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이런 거죠. 5:2절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환란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라고 했어요. 5:2

 

그 환란이 우리를 (내 구원의 완성으로) 만들어가기 때문에...

환란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수단이라는 것을, 바울은 알기 때문에,

신자들은 이걸 알기 때문에,

환란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같이 들리지만,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게 뭐라는 거를,

우리는 조금씩은 알아가는 거예요.

 

△그리고 바울은 고후4:17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잠시 받는 환란의 가벼움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무거운) 것을

우리 안에 이루어지게 한다'

그러니까 이 고난이 하는 일이 있다고 얘기를 하는 거죠.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들어가는 중이라고 말씀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현재의 고난이 장래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8:18

이거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어마어마한 위로인 거죠.

 

그리고 확신인 거예요. 고난은..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는 증거가 아니고,

이 고난은.. 내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고, 영광을 상속할 존재가 되었는데,

그것은 고난도 함께 상속하는 것이라고... 8:17

 

이 말은, 내가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이 '고난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성경처럼 고난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나 철학, 사상 체계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근데 이거를 예수를 믿는 사람들조차도,

또는 번영신학이라고 하는 소위 기복주의 신학에 기본을 둔 사람들은,

 

어떤 고난이 일어나면 '그거는 네가 잘못한 것에 대한 벌이야' 라고 얘기하는 거죠.

그건 이단 사설이에요. 기독교가 아닙니다.

 

성경을 조금만 제대로 읽어보면, 그게 얼마나 허무 맹랑한 소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무지, 성경에 대한 문맹, 이런 것들이

거짓된 교리를 멀쩡하게 말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여기까지 바울은 얘기했어요. '장차 나타날 영광,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 있어.

그거는 지금 네가 겪는 고난하고 비교할 수가 없어, 성도는 그걸 소망하는 거야.

예수 믿는다는 거는 그걸 소망하는 거야' 이렇게 얘기했어요.

 

근데 이럴 수 있잖아요. '저는 너무나 믿음이 연약해서 그런지, 그 희망이 잘 남아있지 않고,

소망이 보이질 않아요. 그 영광이 너무 희미해요. 잘 보이지 않아요.

나는 그냥 오늘 내가 당하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참혹하고, 너무 힘들어요!'

이렇게 말할 수 있잖아요.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이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이게 오늘 본문이에요.

'너희를 놀라운 능력으로 도우시는 분이 계시다. 그분이 성령 하나님이시다'

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8:26

 

'나는 그 영광이 잘 안 보여요.'

'성령님이 그걸 볼 수 있도록 해 줘!'

 

'저는 고난이 심해서 기도도 못하겠어요. 너무 힘들어서...'

'그분 성령님이 너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드셔!' 이렇게 얘기하는 거죠.

 

앞에서 사도는 '성령님께서 성도들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한다'

그래서 '성령은 양자의 영'이라고 얘기를 했었어요. 여러분 15절을 다시 한번 보세요.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느니라'

 

△성령이 하시는 일을 어떻게 얘기했나 하면,

십계명을 처음 받았던 광야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생각해보세요.

그들은 너무나 무서웠어요. 하나님이 흑암 속에서, 번개 속에서, 어두움 속에서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들은 너무나 무서워서 모세에게 빌었어요.

 

'모세,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와서 우리한테 전해주세요.

우리는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시내산으로 혼자 올라간 거잖아요.

 

그런 무서운 하나님을, 신약 성도인 우리는 '아빠'라고 부를 수 있다고 성경은 얘기하는 거예요.

왜? 어떻게? 무슨 근거로?

성령님이 그렇게 하신대요. 8:15

 

뿐만 아니라 '아빠'라고 부를 수 있다는 얘기는 뭐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딸인 것을 확인해 주는 거죠.

 

그거는 논리적으로 추론을 해서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에요.

성령 하나님께서, '내가 하나님의 자식인 것을' 알게 하세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은혜를 주세요.

 

그러나 우리가 구별해야 하는 것은, 우린 믿음으로 구원 받지, 확신으로 구원받지 않아요.

말하자면 믿음으로 구원받은 신자에게도, 확신이 없을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신앙생활이 늘 힘들죠.

 

그러나 확신이 있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그러면 어떤 두려운 길을 마주하더라도, 어떤 고난 속에서도 확신이 있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우리는 그런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죠.
또 우리 자신들의 삶에서도 그런 (확신의) 경험을 더러 하기도 합니다.

확신은 중요한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고 기도하게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인 것을 알게 하신다(증거하신다)' 이런 얘기를 했었어요.

 

◑본론 / 탄식으로 우리 기도를 도우시는 성령님!

 

그런데 이제 26절을 시작하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이와 같이'

'이와 같이' 라는 말을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1)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 봐. 그 소망이 고난 가운데서 절망하려고 하는 너희들을

도와주는 거야' 이렇게 얘기했어요.

 

근데 '나는 소망이 잘 안 보여요..' 이렇게 말할 수 있잖아요.

그때 바울은 '이와 같이 성령님이 계셔, 성령님이 너희들을 도와주셔!'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소망이 잘 안 보이면, 그 소망이 잘 보일 수 있도록 해 주실 거야' 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와 같이'가 그런 뜻이야. 이렇게 이해할 수가 있고,

 

2) 또 하나는 뭔가 하면, 조금 아까 15절, 16절에서 읽은 것처럼

바울은 성령님을 소개하면서, '기도'라고 하는 주제를 다뤘어요.

 

그리고 여기서 다시 '그 성령님과 더불어, 성령의 은혜 가운데서

내가 기도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지금 다시 그 주제를 꺼내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우리가 기도하는 게 쉽나요, 어렵나요?

쉽기도 하고 어려워요.

 

힘들어 죽겠는데... '기도하라고' 그러면, 그 말을 듣는 내가 기분이 나쁠 때가 있어요.

그러고 힘들어서 기도가 잘 될 때도 있어요.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해요.

 

근데 어떻든 바울은 이 이야기를 통해,

'이와 같이' 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해석을 취해도 상관은 없어요.

 

근데 분명한 것은, '고난 중에 성도를 향한 성령의 도우심' 이거는 분명해요.

이게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에요.

 

▲그래서 칼빈은 이런 말을 합니다.

제가 이렇게 인용을 가끔 하는데, 인용을 하는 것은, 제가 다른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이 문장 자체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에요.

 

「바울은 믿는 자들이, 자신들은 너무나 연약해서

그토록 무거운 수많은 짐들을 감당할 수 없다는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모든 어려움들을 넉넉히 이겨나갈 수 있게 해주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그들 앞에 제시하고 있다.

 

하늘의 능력이 우리를 붙잡아 주기 때문에, 그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십자가를 질 수 없다고 하소연할 이유가 없다. 성령님이 도와주셔서 가능하게 한다」

 

신자를 보고 무작정 '견뎌!' 이렇게 얘기하는 게 아니고,

'기도하면서 좀 견뎌봐!'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도우시는 성령님께서 계시다고 얘기를 해요.

 

고난 중에 우리가 있을 때, 무슨 말로 위로할 수 없는데,

이렇게 어줍잖게 위로하는 사람을 보면은 미워지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죠. '그게 무슨 위로가 되냐? 네가 한 번 내 처지가 돼 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근데 지금 바울이 하는 말 앞에서는, 우리가 그렇게 말할 수가 없어요. 왜냐면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성령 하나님이다'라고 얘기하기 때문이에요. :26

 

이런 말이에요. 아브라함한테 하신 말씀인데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창18:14

 

즉 '여호와께서 너를 위로 못할 것 같아?

여호와께서 너를 고난 중에서 건지지 못할 것 같아?

여호와께서 이 고난을 통해서 너의 삶을 붙잡으시고,

너를 완전하게 만들어 가실 것을 못하실 것 같아?' 이런 질문을 하는 거예요.

 

▲이 모든 걸 인정하더라도, 우리가 이 땅에서

본문이 언급하는 바대로 '연약함에 싸여서 살아간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어요. :26참조

 

우리는 연약한 존재들이에요.

우리가 마주하고 싸우는 원수 마귀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닌 것도 분명합니다.

 

'우리의 고난이 마귀의 작품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거 아니에요.

'고난의 의미, 그 원인과 목적' .. 이거는 보통 우리에게는 숨겨져 있는 영역이에요.

 

그러나 마귀는 고난을 이용해서 우리의 연약함을 공격해요.

질병을 통해서.. 내 육신이 피곤하고 힘들어지면... 나를 공격해요.

 

내 정신이 낙심하고, 포기하고 싶고, 다 내려놓고 싶을 때.. 나를 공격해요.

말하자면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연약함은, 상처를 받게 되죠.

그때 마귀는 우리를 공격한다고요.

 

여러분 '성도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간다' 하는 거는, 연약함을 안고 살아간다는 얘기죠.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딸이지만.. 연약함을 우리는 가지고, 탄식하는 존재라고,

우리가 지난 주일 살펴봤어요.  *45강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주님이(내가) 떠나가신다'는 말하니까

제자들이 큰일 났어요. 근심이 생겨요.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시죠.

'근심하지 마. 그리고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절대로 버려두지 않을 거야' 라고 말씀하세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을 거야' 그 핵심이 뭐예요?

성령 하나님을 보내시겠다는 얘기잖아요.

 

우리는 이런 비교를 하잖아요.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거닐고, 예루살렘 거리를 다녔을 때,

야 나도 예수님을 그렇게 정말 몸으로 만져볼 수 있는,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그런 분이 내 옆에 하나님으로 계시면 정말 좋았겠다'

그때가 좋았을까요? 21세기 지금이 좋을까요?

 

눈으로 '예수님, 굉장히 잘생겼을 것 같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안 그랬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요. 그냥 보통 유대인 남자였을 거예요.

키가 컸을까요, 작았을까요? 그건 몰라요.

 

그러나 분명한 건 이사야 선지자는.. 요즘말로 '외모가 허접했다' 그렇게 얘기해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53:2

 

그런 분을 하나님이라고 믿고 따라간다고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 이렇게 고백한다고요?

 

주님은.. 성령의 도우심이 있을 것이고,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한순간도 버려두지 않을 거라고 약속하셨어요.

 

주님이 주신 약속과 위로의 핵심은,, 보혜사 (도우시는 분) 성령의 도우심이에요.

이 약속에 의하면,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한순간도 고통의 무게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요. 삶의 전부가 고난이니까요. 고통이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절망에서 헤어날 길이 없어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제가 살아서,

지금까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 때문이에요.

 

한 순간도 저를 놔두지 않으시고 도우시는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에,

여전히 지금처럼 (별 일 없는 것처럼) 살 수 있어요.

 

'살아온 내 팔자가 좋았고..' (팔자는 물론 교회에서 쓰는 말은 아니죠.)

'살아온 인생이 너무나 괜찮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신자는.. 나의 대속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뿐만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내 곁에서, 내 안에서 나와 동행하시고 나를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는

성령 하나님 덕분에... 우리가 살아요. 이게 신자예요. 그래서 고난을 감당해요.
그리고 끝까지 인내할 힘을 얻어요.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아요.

'내가 너한테 준 믿음으로 좀 견뎌라, 이놈아, 맨날 죽는 소리 좀 하지 말고!'

이런 책망과 훈계의 소리.. 우리는 사람들 한테 많이 듣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아요.

 

이게 오늘 본문 말씀의 의미에요. 8:26~27

'내가 성령으로 내 안에서 너와 함께 있음을 기억해! 너는 안 죽어, 절대 안 죽어!

너는 안 망해!' 이렇게 말씀하세요.

 

신자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 신자 안에 거주하시는 성령님께서는,

장래의 영광을... 뭐 보일듯 말듯 하는 장래의 영광을...

(환히)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주세요.

 

지금의 내 고난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보증해 주신 그 사랑으로부터

나를 끊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세요. 8:39

그게 바울 사도가 로마 교회에게 주는 위로예요.

 

▲이제 제가 여러분에게 물을게요.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존재를 아십니까, 인식해요?'

'의식하고 살아요? 성령님과 동행하세요?'

 

예수님은 약속하셨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안에 성령이 오셔서 내주하신다고,

떠나지 않으신다고요!' 요14:16~17

 

이 사실을 아세요?

아니면 그냥 여러분들은 '좀 더 열심히 살아보자,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데.. 

좀 더 애써 보자...' 이렇게 결심하는 것, 그게 여러분의 삶의 전부예요?

(이렇게 성령님의 도움을 의식하지 않고 살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마28장에 보면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랬어요. 그 약속을 여러분 믿으세요?

 

이거는 어떤 사람의 얘기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에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어떻게?

'보혜사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사, 너희 안에 영원히 거하게 하심으로써!'

 

▲내 안에 성령님의 임재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어요?

이 일반적인 원리를 얼른 좀 설명하고, 오늘 본문을 좀 다루려고 생각하는데,

 

1) 신비적인 체험이나 황홀경과 같은 현상으로 몰아가지 않으면서도,

또 반대로 메마른 논리적인 추론에 갇히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는 성령님의 임재를 확인해야 돼요. 이게 두 극단 이에요.

 

하나는 황홀경이나 무슨 신비체험.. 이런 쪽으로 가서,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을 확인하겠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그냥 논리적으로 추론을 해서, 이론적으로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확인하겠다는 사람이 있어요. 둘 다 극단이죠.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성령님은 당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것보다는,

그리스도를 부각시키세요. 드러내세요. 16:14

 

그래서 제임스 패커는 그의 <성령론>에서 이런 표현을 쓰죠.

'성령님은 마치 조명과 같은데,

건물 옆에 바닥에 있는 조명인데, 건물을 향해서 쏘는 조명, 그런 조명과 같다'고 해요.

 

성령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건물을 드러낸다는 거예요.

그리스도를 드러낸다는 거예요.

만약 이걸 무시하면, 우리는 계속 신비체험으로 가게 되겠죠?

 

성령님의 임재와, 성령님의 임재를 확인하는 것은 달라요. 구분해야 돼요.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다고 해서,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을, 내가 언제나 인식할 수도 있고, 아닐 수 있다는 얘기를 하죠.

'믿음과 확신의 관계'와 비슷한 거죠. *믿음이 있지만, 확신이 들 수도 있고, 안 들 수도 있다?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임재는.. 하나님의 약속이에요. 주님의 약속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사실 이거는, 느낌의 차원 이전에, 사실의 차원으로 성경을 설명하고 있어요.

(그래서 확신이 안 들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사실, 팩트예요)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증거, 몇 가지를 제가 설명을 드릴게요.

우리가 지금까지 한 것들을 복습하는 거예요.

 

1) 이제 성도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어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이에요.

 

2) 두 번째는 장래의 영광에 대한 탄식과 갈망이 있는 것도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증거예요. 지난 주 45강에서 설명한 거예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면 이 고난에서 그냥 벗어나기만을 바라는 그런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럽고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신다고 믿죠.

그리고 영광의 날을 바라봅니다. 그 소망이 있어요. 믿음은 소망을 전제합니다. 포함합니다.

 

3) 세 번째는, 잘 되든 잘 되지 않든, 기도의 자리로 계속 나아가려고 해요.

무엇을 구해야 될지도 몰라요. 그런데 기도해야 한다는 그 끌림이 있고,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이게 성령님의 일하심의 증거입니다.

 

4) 네 번째는 죄를 죽이는 싸움이 있습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라고 말한 거 기억하시죠? 8:13

이런 것들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증거들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몇 가지를 더 얘기하죠. 세 가지 테스트를 얘기해요.

교리적 테스트, 도덕적 테스트, 관계적 테스트예요.

 

1) 교리적인 테스트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와 주님이신 것을 분명하게 고백하고

믿는가 하는 것이에요.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있는가 하는 거예요.

 

그냥 '예수 믿어요.' '뭘 믿어요?'

'저는 그냥 믿어요.'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누구신지에 대해서 분명한 고백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이게 교리적인 테스트예요.

 

2) 두 번째, 도덕적 테스트예요.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개의치 않고 살아가요.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살 수 없다고 말해요.

 

주님을 안다고 하면서, 주님의 계명을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사도요한은 앎과 지식과 삶을 분리시키지 않아요.

 

3) 세 번째, 관계적인 테스트예요.

형제를 사랑하는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안 돼요.

 

예수 믿는 사람, 주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 이웃을 사랑하게 돼요.

형제이기 때문에!

이게 내주하시는 성령의 임재를 확인할 수 있는 성경적인 방식들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란?

 

이제 본문 26절에서 말씀하는 성령의 도우심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좀 살펴볼게요.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연약하지 않으면, 성도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거죠. 우리는 다 연약해요.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사람이 정말 연약해지면, 뭐라고 기도해야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오는 거예요.

 

이때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의 도우심은 이런 상황 가운데 있는 우리를,

연약함 때문에 뭘 기도해야 될지를 모르는 이런 상황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친히 탄식하심으로 간구하십니다. 누구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이게 성령의 도우심을 바울이 얘기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면 기도는 여러분 쉬워요? 어려워요? 둘 다 답이 될 수 있죠.

근데 이런 거예요.

 

여러분은 그 아버지가 아주 너무나 인자하고 좋은 분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여러분, 아빠한테 말하는 거 쉬워요, 어려워요?

 

걍 아주 친한 아빠한테 말하는 거 어려워요, 쉬워요? 쉽죠.

어려운 점은 뭐예요? 영이시기 때문이죠.

우리의 믿음이 아니고서는, 그분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죠.

 

때로는 기도가 나의 독백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은,

바로 그런 믿음의 결핍과 부족함의 문제라는 거죠.

 

그러면 엄밀한 의미에서 비신자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왜죠? 기도할 수 있다는 전제는 내 안에 성령이 계시다는 거예요.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는 거예요.

 

지금 이 논리를 쭉 따라와 보세요. 이것은 딱딱한 그저 기계적인 논리가 아니에요.

성령이 계시니까 내가 아빠라고 부르는 거예요.

아니면은 '미지의 신이시여!' 이 정도는 부를 수 있겠죠.

 

엄밀한 의미에서 비신자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어요.

성령이 계시지 않으니까!

 

근데 외관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데, 하나님의 이끌림을 받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저에게 믿음을 주세요. 저는 믿고 싶습니다.' 라고 할 때,

그 기도는 진짜 기도일까요? 진짜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나님께 이끌림을 받고 있고,

하나님께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중생의 씨가 심겨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교리를 정확하게 아는 건 굉장히 중요해요.

여기서 제가 말하려는 건 뭔가 하면, 신자만 기도할 수 있다는 거예요.

성령이 계시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할 때 무력감을 느끼지 않나요? 너무나 힘들 때요.

절망이 나를 삼킬 것 같은 상황에 처해져 있을 때는, 기도하는게 힘들어요.

 

우린 연약함에 싸여 있는 존재예요.

'성도의 연약함'을 얘기할 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은 죄의 결과야' 라고 얘기하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수준이 있어요.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취약하게 지으셨어요.

원래 이거는 죄와 상관이 없는 우리가 가지는 취약함이에요.

 

-그러나 두 번째 수준의 약함이 있어요. 그거는 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찾아온 것들이에요.

고통, 질병, 인간이 경험하고 살아가는 허무함, 좌절, 절망, 도덕적인 부패,

모든 삶에 일어나는 비극들 이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서 무방비 상태입니다.

 

이 연약함은 옛 시대와 새 시대 사이를 살아가는 신자가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이고

절반만 구원받은 신자의 상황에서, already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며 탄식하게 되는 그런 상황 속에서 겪게 되는 연약함입니다. not yet

 

▲그때 우리의 기도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뭔가 하면,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 해요.'

이 말을 조금 자세히 설명을 하면 이런거죠.

'내게 고난이 있을 때, 여러분 고난이 물러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까?

아니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까?'

 

정답은 case by case 예요. 하나님의 뜻을 몰라요.

우리가 바울도 빌립보서에서 '내가 지금 감옥에 갇혀있는데

내가 죽는 것과 사는 것 사이에, 무엇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인지 잘 모르겠다'

이런 식의 표현을 쓴단 말이에요. 빌1:22~24

 

바울이 자기 '육체의 가시'라고 말할 수 있는 고난이 있었습니다.

이걸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 간구하였더니

하나님께서 '노! 내 은혜가 너에게 충분해 그거는 너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내가 너에게 허락하는 거야. 그게 나쁜 게 아니고, 내가 너에게 주는 은혜야!'

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사실 잘 몰라요.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지,

이 병을 통해서 하나님의 어떤 계획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해야 할지... 잘 몰라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해요.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다 모르니까!

 

근데 정확히 아시는 분이 계세요. 성령 하나님이에요.

성령 하나님이 뭐라고 얘기를 해요?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이걸 방언 기도라고 해석하는 분도 있습니다. 방언으로 기도할 때, 그렇게 된다는 거죠.

그런데 꼭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더라도, 성령이 탄식으로 기도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절을 보면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8:27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단어는 '탄식'이에요.

여기서 이 탄식의 주체가 누굽니까? 누가 탄식한다고 성경이 얘기해요?

성령이시죠!

 

그러면 성령이 탄식하시는 거잖아요.

근데 사실은 이 본문을 읽을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이 있어요.   주1)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우리는 탄식하게 된다고 얘기해요.

그 탄식은 '혼자서 망했다' 하는 탄식이 아니고요. 하나님 앞에서 하는 탄식이에요.

 

이 탄식에 대해서 제가 로이드 존스의 설명도, 좀 부가해서 설명을 드리고 싶어 인용합니다.

「하나님께서 해석하시고 이해하시는 이 탄식을 산출하도록

성령을 보내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런 탄식에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

그럴 때 있죠. 그것은 여러분이 성도라는 적극적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 말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적극적인 증거가 된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도 이런 식으로 탄식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도 이런 탄식에 대해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성도들 속에서만 그런 탄식을 산출해내십니다.

 

여러분의 삶에 있는 탄식들은

여러분의 최종적이고 궁극적이고 완벽한 구원에 대한 절대적인 증거일 뿐 아니라

하나의 보증입니다. 그리고 그 탄식들 모두가 말로 표현이 안되는 탄식이잖아요.

그 탄식들 모두가 하나님께 알려진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이런 위로가 어디 있어요? 이런 위로가 어디 있어 이런 위로를 들어보셨나요?

문장 구조를 보면 탄식의 주체는 성령님이에요.

그러나 성령님이 우리의 무지와 연약함 가운데에서 탄식하게 하세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몰라요. 그렇지만 내가 하나님을 사랑해요.

성령님은 이런 연약한 성도 안에서 탄식을 만들어내십니다.

 

결국 이 두 가지의 입장 어떻게 봐도 상관이 없는데

어느 쪽으로 읽든지 탄식의 근원은 성령님이에요.

그 탄식이 터져 나오는 자리는 연약함에 쌓여 살아가는 우리들이죠. 성도들이죠.

 

그래서 8:26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을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이 성령의 도우심을 알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게 바울이 주는 위로예요. 바울이 주는 위로!

 

▲여기서 우리는 ‘도우시나니’라는 특별한 단어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헬라어로 이 단어는 세 단어의 조합으로 구성된 특별한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 ‘쉬난티람바노마이 συναντιλαμβάνομαι’는

-‘함께’를 의미하는 ‘쉰’,

-‘대하여, 대항하여’라는 의미를 가지는 ‘안티’,

-‘취하다, 얻다, 받다’ 등을 의미하는 ‘람바노’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그 의미는 ‘합하여 돕다, 짐을 함께 지다, 맞은편에서 들다’인데,

칼빈은 이 단어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단어는 강력한 의미를 지닌다. 이 단어는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무거운 짐에

눌릴 때에 성령께서는 우리가 진 짐 아래로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짐을 져 주심으로써

우리를 도우시고 구조해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들어올려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받쳐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즉시 무수한 악들에게 압도되어

버리는 까닭에, 바울은 우리가 모든 면에서 연약하고 온갖 연약함들이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위협할지라도, 하나님의 영은 그런 우리가 무너지지 않고 무수한 악들에 의해 압도당하지

않게 해주시기에 충분할 정도로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아울러, 성령이 이렇게 우리에게 힘을 공급해 주신다는 사실은 우리가 신음하고 탄식하며

우리의 속량을 향하여 힘써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임을

우리에게 더욱 분명하게 증명해 준다.」

 

▲여러분, 이걸 아세요?

그리스도인이 기도할 때, 성령님이 내 안에서 친히 나를 위해서 간구하세요.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갈 때

나 혼자 기도하는 게 아니고요.

 

성령님이 내 안에서 나를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친히 간구하세요.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데, 성령님은 나는 탄식만 하고 있는데,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 뜻대로 기도하고 계세요.

 

우리의 불완전한 기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완성이 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완성하세요.

연약함에 싸여서 고난을 날마다 마주하고 살아가야 하는 로마의 성도들에게

바울은 이 말을 전하고 있는 겁니다. 위로하는 겁니다.

 

때로는 우리가 기도한다고 엎드리지만, 우리 기도가 탄식과 신음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있어요. 그냥 '아버지 아시죠?' 그 말도 안 나와요.

근데 그런 탄식이에요. 눈물만 흐를 때가 있어요.

 

사도는 이게 뭔지를 경험적으로도 아는 사람이에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탄식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그는 생각해요.

 

여기서 사도가 27절에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신다'고 얘기했을 때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누구예요? 성부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예요.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에요.

 

그런데 마음을 살피실 뿐만 아니라, 그 다음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우리의 마음의 생각, 마음의 탄식을 다 읽어내시는 하나님께서는

내 안에서 나를 위해서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님의 생각을 아세요. 그 뜻을 아세요.

그게 하나님의 뜻과 일치해요.

 

그래서 우리의 기도 탄식으로 표현되는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열망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게 하시는 거죠.

 

탄식은 중요합니다. 탄식의 기도는 중요.합니다.

그게 이제 28절 말씀으로 연결되는 거거든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죠.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였다 선을 이루느니라'

 

도대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은 알겠는데,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너무나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고,

일어날 수도 없는 일들이 우리 삶에 일어난다고요.

 

무엇을 기도해야 될지도 모르겠어요. 27절을 지나서 우리는 거기로 가는 거예요.

28절로 가는 거예요. 그냥 28절만 달달달 외운다고 되는 게 아니고,

이걸 경험적인 고백으로 말하는 거예요.

 

성령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해서 간구하시기 때문에,

최고의 기도는 뭐예요?

화려한 미사여구로 수식되고 인간의 웅변으로 채워지는 기도 아니에요.

 

최고의 기도는 마음의 간절한 열망을 그냥 탄식과 신음만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기도를,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식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세요.

그건 최고의 기도예요.

 

제가 로이드 존스를 인용해서 말한 것처럼

이런 기도의 탄식들은 성도의 최종적이고 궁극적이고 완벽한 구원을 얻은 것에 대한

절대적 증거이고 보증입니다.

 

이 모든 탄식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셔서

8:28절의 결과가 만들어지도록 이끌어가세요.

우리 인생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우리가 힘겨운 고난의 상황을 마주할 때,

기도할 힘도 없어요. 엎드릴 힘도 없어요.

 

오늘 말씀의 배경이 그런 환경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 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예요.

한가하게 궁궐에서 낮잠 자고 있는 사람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고요.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을 위한 말씀이라고요.

 

로마서의 이 본문을 기록하고 있는 사도는 이걸 알아요.

자신의 삶에서 겪고 경험했던 일들 이에요. 이 성도의 탄식은 하나님 앞에서의 탄식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주시는 탄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아는 성령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해 간구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탄식의 기도는 최고의 기도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큰 위로죠.

 

성도의 탄식은 허공을 향한 탄식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기도입니다.

아버지라고 외치는 외마디 탄식의 기도를 하나님은 받으십니다.

사도는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뭐가 뭔지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답답해서 탄식할 때 너희가 방치되고 있는 거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한순간도 우리가 방치되는 순간은 없습니다.

우리가 약함에 쌓여 상실과 고통 속에 처해 있을 때

성령님이 너희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이걸 아는 성도는 고난의 깊은 심연 속에서도 탄식하면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31절을 같이 읽읍시다 31절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아멘 우리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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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8:27

이 본문을 읽을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이 있어요. 

학자들은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데

 

1) 이건 성령의 탄식이다 라고 얘기하는 분들이 있고,

이거는 문법적으로나, 문장 자체가 문장 구조가 성령의 탄식이에요.

 

-그런데 사실은 이 말이 품고 있는 의미를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아요.

이분들이 '이거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만들어 내시는 탄식이다' 라고 이해해요.

 

조금 설명을 드릴게요. 만약에 '성령님의 탄식'이라고 읽으면 은유적으로 읽어야죠.

우리는 탄식을 하는 게, 일반적으로 부정적이에요. 잘 모르니까 탄식해요.

답답하니까 탄식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답답하실 수 없어요. 다 아세요.

 

'성령님의 탄식'이라고 이해를 한다면, 그렇게 이해할 수 있어요. 문장 자체가.

그런데 그러면 은유적으로 이해를 하는 게 맞죠. 하나님은 탄식 안 하시니까요.

 

2) 그런데 '신자의 탄식'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칼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약간 길지만 제가 인용을 할게요.

 

「바울은 실제적으로는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 같지 않아 보일지라도

우리가 기도하고자 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하늘의 은혜가 우리에게 비치고 있다는 증거라고 결론을 내린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자기 힘으로 경건하고 뜨거운 기도의 열망을 생겨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성령께서 정해 주셔야 한다.

 

바울은 성령의 감동을 따라 나오는 우리의 탄식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이라고 한다.

왜냐면 그 탄식은 우리의 지성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고 말하는 이유는,

성령이 스스로 낮아져서 실제로 간구자가 되어

우리를 위해 기도하거나, 탄식하기 때문이 아니라,

먼저 우리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마땅한 기도를 생각나게 해주고

다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여 뜨겁게 함으로써

우리의 기도와 소원이 하늘에 상달되게 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우리가 드리는 기도 전체가 다 성령의 은혜로 인한 것임을

한층 더 무게있게, 우리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드려라고 명하시지만,

만약 하나님이 먼저 자신의 영의 비밀한 감동을 통해

우리의 마음문을 두드려 그를 향하여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지 않으신다면

그 누구도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자신의 힘으로 단 한마디도 생각해낼 수 없다.」

 

제가 너무 빨리 읽었습니까? 나중에 원고 읽어보세요. 홈페이지에 원고가 올라가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