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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장 하나님의 임재에서 동행으로

LNCK 2026. 7. 22. 18:10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임재, 교제, 친밀

하나님의 임재에서 동행으로 2026-07-19 Youtube

 

◈하나님의 임재에서 동행으로          출40:36~37, 창5:21~24           2026-07-19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우리의 손으로 만져질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불과 구름과 언약궤를 통해서,

‘지금 내가 너희와 함께 하고 있다’ 라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셨어요.

 

그래서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 임했던 그 불을 보면서,

번제단의 임하였던 그 불을 보면서, 성막과 성전에 임하였던 그 구름을 보면서,

지성소에 안치되어 있던 언약궤를 보면서

‘아,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구나’ 라는 사실을 의심 없이 믿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공간과 장소에만 임재하여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셨고

그 시내산에서 불 가운데 임재하셨어요.

 

그리고 이후에는... 성막과 성전의 영광의 구름으로 임재하셨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은 그 성막과 성전에 임재하여 계신 것으로 끝나지 않으셨어요.

하나님은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광의 구름으로 앞서 인도하셨습니다.

 

출40:36~37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이 떠오르면

그 구름을 따라 앞으로 나갔고, 그 구름이 머무르면 앞으로 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임재는 단순히 한 곳에 머물러 계시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기 위함인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는요. 목적이 아니라 동행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끝이 아니라, 동행의 시작이 된다는 사실이죠.

 

그래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감격만 하며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이 앞서 나가면, 원치 않아도 순종하며 나아갔어요.

동행했어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경험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는요. 우리를 머물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앞서가시는 그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주제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이 뭐예요? “하나님의 임재에서 동행으로”

 

그렇기 때문에 광야의 인생길은, 얼마나 빨리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내 인생에 대해서 환호하고, 박수갈채를 보내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꽃길을 거닌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다면.. 그 길은 위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남들이 가지 않는 좁은 길, 아니 남들이 싫어하는 광야의 길을 걷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그 길이 우리에게는 가장 안전하고 복된 길이 되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그토록 사모하며 기다리는 이유가 뭐예요?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기다리시나요?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기다리는 것은,

단순히 그 임재 속에 머물러 있기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광야길 같은 인생길, 앞서 가시는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함입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자만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는 것이에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세요.

 

성막과 성전에 임하였던 영광의 구름을 본 사람들이

앞서가시는 영광의 구름을 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자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우리는 많은 경우에, 하나님과의 동행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고, 바라고, 사모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고, 원하고, 기도하고 있지만,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거에요.

 

◑자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뭘까요?

 

▲1. 동행이란.. 첫째로, 하나님의 자녀된 자가 이 세상 속에서 누리는 삶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매우 신비롭거나, 매우 특별한 체험을 하는

사람들만의 삶의 방식으로 이해(오해)하고 있어요.

 

소수의 사람들이, 특별한 체험을 하는 사람들이,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뭐 영안이 열려가지고 영적인 세계를 보는 사람이라든지,

아니면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있다든지,

 

아니면 40일 금식기도를 하는 사람이라든지,

아니면 복음을 위해서 특별하게 부름을 받은 소수의 목회자라든가 선교사님들,

이런 소수의 사람들만이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근데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에녹을 보십시오.

에녹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거든요.

 

창5: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자 300년을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는데, 그 뒤에 무슨 말이 나와요?

‘므두셀라를 낳았다는 말, 자녀를 낳았다’는 말이 나와요.

 

그러니까 에녹은 가정 생활에 충실하면서, 자녀를 낳고 기르면서,

일상의 삶에서 평범한 삶에서 하나님과 300년 동안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거예요.

 

오늘날로 말하면 직장생활을 하면서, 학생으로 말하면 공부를 하면서,

사업을 하면서, 식당을 운영하면서, 우리 청년들로 말하면 알바를 하면서,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가정을 무시하거나, 정상적인 삶을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우리의 가정에 더 충실하고, 직장생활에도 충실하면서

이 세상 속에서의 빛과 소금의 삶을 감당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말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임재연습> 책으로 익히 알려진 로렌스 형제가 있습니다.

로렌스 형제는 어떤 사람이냐면 설교자도 아닙니다. 신학자도, 목회자도 아닙니다.

 

이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냐면 수도원에서 주방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이에요.  *수도사

그러니 수도원에서 주방일이라는 게 뭐겠어요? 끼니 때마다 음식을 만들어내고, 설거지하고,

그릇을 옮기고, 식사 준비를 하는 일이잖아요. 반복된 삶의 연속이에요.

 

매일 눈만 뜨면,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하고, 요리하고, 청소하고...

그런데도 그는 그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의식했어요.

설거지를 하면서도 지금 나와 함께 함께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어요.

그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했어요. 

나중에 모든 이의 존경을 받아서, 수도원장까지 추대받았어요.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역시,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 세상이 악하고 음란하고 더럽다고 포기하지 말고, 에녹처럼,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두번째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뭐냐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끊임없이 묻는 삶

 

여러분 동행은.. 단순한 공간에 같이 머물러 있는 것을 동행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동행은 말그대로 함께 걷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함께 걷는 것이 동행인데,

함께 걷는 사람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게 뭐냐면.. 대화라는 거예요. 대화가 있어야 돼요.

 

함께 걷기는 걷는데, 두 사람 사이에 말이 없어요. 대화가 없어요. 그것은 정말 고통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걸어보신 적이 있나요? 함께 걷는 데 말이 없어요. 그건 동행이 아니죠.

 

△한 부부가 해가 진 무렵에,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숲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호수 위에는, 백조 한 쌍이 유유히 물결을 가르며 떠다니고 있었어요.

 

그때 아내가 환한 얼굴로 남편을 부르며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저녁 노을 좀 보세요. 얼마나 예뻐요? 저 호수에 백조가 있어요.

너무나 평화롭고 멋지지 않아요?’ 이렇게 감탄하면서 말을 했단 말이에요.

 

근데 남편이라는 인간이, ‘응 그래?’ 이렇게 짧은 대답만 하고

계속해서 자기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걸어요.

 

여러분 함께 걷는다고 해서, 동행하는 게 아닙니다.

함께 거닐면서 대화가 없다면... 그건 동행이 아니죠.

 

그런데 그 대화 속에는 뭐가 필요하냐면... 물음이 필요해요.

왜냐하면 우리는 그 물음을 통해서 상대방의 의중을 알게 돼요.

 

‘당신은 무슨 음식을 좋아해요?

당신은 무슨 칼라를 좋아해요.

당신은 무슨 꽃을 좋아해요?

언제가 가장 기뻐요?’ 이런 질문을 던지잖아요.

이런 물음을 통해서 우리는 상대방의 의중을 알게 돼요.

그리고 상대방의 의중을 깨달으면 깨달은 만큼, 관계가 깊어집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목자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주님께 끊임없이 물어야 됩니다.

 

‘주님, 제가요... 오늘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이 결정이 주님의 뜻입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이 말을 해도 되나요?

주님, 멈춰야 합니까? 아니면 계속 가야 합니까?’

이렇게 끊임없이 주님께 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그 많은 인물들 중에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물었던 사람이 있어요.

다윗입니다. 다윗은 정말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던 사람이거든요.

 

자, 블레셋 나라가 쳐들어왔어요. 다윗은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 제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올라가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내 손에 붙이셨나이까?’

라고 물었어요. 역대상14:10

 

여러분, 아니 적군이 쳐들어왔다면, 왕으로서 당연히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싸우는 게

마땅한 일이잖아요! 그런데 너무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께 물었다는 사실이에요. 이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를 물었어요.

 

이 물음에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을 하셨어요.

대상14:10b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다윗은 이렇게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근데 이건 묻지 않았어요. 다윗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물었지만, 이건 묻지 않았어요.

그게 뭔지 알아요? 적군의 숫자와 상태에 대하여 묻지 않았어요.

 

블레셋 나라가 쳐들어왔어요. '하나님 저 블레셋 나라가 지금 몇만 명이 쳐들어왔어요?

저 군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 거예요? 병거는 어떻게 돼요?'

그 적군의 숫자와, 상태와, 무기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어요. 왜 묻지 않았을까요?

그건 별로 의미가 없어요.

 

이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가 네 손에 붙였다' 라고 말씀하시면,

적군의 상황은 의미가 없는 것이에요. 문제가 얼마나 크냐 적으냐는 문제가 아닌 거예요.

 

블레셋 사람들이 또다시 쳐들어왔잖아요. 또다시 쳐들어왔을 때도 다윗은 어떻겠어요?

'지난 번에 나가서 싸워서 우리가 이겼기 때문에, 뭐 이번에 또 나가서 싸우면 되겠지?'

'뭐 또 나가서 싸우면 되겠네?' 라고 생각하지 않고, 또 다시 하나님께 물었다는 거 아니에요.

 

대상14:14~15a '다윗이 또 하나님께 묻자온대 하나님이 이르시되

마주 올라가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그들을 기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나가서 싸우라'

 

하나님은요. 언제 나가서 싸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어요.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나가서 싸우라’

언제 나가서 싸워야 하는지... 시간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셨어요.

 

이것을 보게 되면 다윗은요. 블레셋이 쳐들어왔을 때에 하나님의 뜻만 물은 것이 아니라

‘내가 언제 싸우러 나가야 하는지’ 그 시간에 대하여서도 물었어요. 구체적으로 여쭈었습니다.

 

다윗은 아말렉의 군대를 추격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시간을 물었어요.

 

여러분, 우리는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뜻만 묻지, 시간에 대해서 묻지를 않아요.

언제 나가야 하는지.. 언제 실행을 해야 되는지.. 언제 순종을 해야 되는지..

하나님의 시간을 묻지 않아요. 그래서 실패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는데, 머뭇거리다가 실행하지 못하여 실패하는 경우도 있고,

하나님의 시간보다 앞서 행함으로 실패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다윗처럼, 아무리 급해도,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시간을 물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동시대를 살았던 사울왕은, 하나님께 묻지를 않았어요.

여러분 왜 사울왕이 죽었는지 아세요?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사울왕이 죽었다’는 거예요.

대상10:14a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사울은 다윗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이지만,

하나님께 묻지 않고 신접한 자를 찾아가 물었어요.

 

△사30장을 보면, 유다 나라가 위기를 만났을 때에,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애굽을 찾았어요.

사30:2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애굽이라는 나라를 의지했어요.

그래서 여호와께 묻지도 아니하고, 애굽과 동맹을 맺었거든요.

그때 하나님께서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어요.

사30:1b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죄에 죄를 더하도다' [개역한글]

 

하나님께 묻지 않은 것에 대해서 ‘죄에 죄를 더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우리는 많은 경우에 ‘죄’라고 하면

간음을 한다든지, 미워한다든지, 도둑질 한다든지, 사람을 죽인다든지,

우리는 이것을 죄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이사야 성경에 보게 되면, 여호와께 묻지 않음이 뭐라고 말해요?

죄라고 했어요.

아니, 더 나아가서 ‘죄에 죄를 더한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왜 그럴까요? 그 이유가 있어요.

왜 하나님은 당신에게 묻지 않음을 죄라고 말씀하시는가? 그 이유가 있어요.

 

우리는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말하잖아요.

그런데 내가 여호와께 묻지 않고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는다는 증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을 배제시키는 거예요.

 

자 여러분이 가장인데, 가정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데.. 내가 배제됐어요. 무시당했어요.

예를 들면 이사를 가는데, 가장은 몰라요. 어느 날 아내가 말하는 거예요.

‘여보, 우리 오늘 일산으로 이사 갑니다. 그때 강아지 챙겨서 오세요.’

이렇게 말한다면, 여러분 기분이 어떨까요? 남편으로서 무시당하는 거죠. ‘나는 뭐야?’

 

예전에 제가 캐나다 캘거리에 집회를 가는데, 장로님 한 분이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어느 날 아들이, 하루는 결혼한다고 청첩장을 가지고 왔더래요.

아들이 ‘아빠 나 결혼해요!’ 하면서 청첩장을 주더래요.

그래서 굉장히 서운했다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여러분 그래도 아빠인데, 결혼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하고,

이런 걸 전혀 아빠하고 상의하지 않은 거예요.

아버지로서 무시당한 느낌이잖아요.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게 뭐냐?

그러면 끊임없이 하나님께 묻는 거예요.

 

우리가 물을 때, 하나님은 당신의 의중을, 그 뜻을 알게 하시고,

우리가 물을 때에 하나님은 드디어 우리의 삶에 개입을 하시는 겁니다.

 

△자 이렇게 설교하면, 여러분 중에 이런 생각을 속으로 품으실 거예요.

‘목사님, 저는 이제까지 많이 물었거든요? 제가 많이 물었는데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대개의 경우 답이 없으세요’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설교를 듣는 분이 계실 거예요. 그죠?        주1)

 

근데 여러분, 우리가 물었는데, 어떤 때는 하나님이 말씀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근데 여러분, 내가 듣지 못했을지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물어야 돼요.

왜냐하면, 내가 일단 물어 놓으면,

하나님은 내가 말씀을 묵상하고 읽어가는 가운데,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하시고,

때로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당장 듣지 못할지라도, 끊임없이 하나님께 묻고 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세 번째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게 뭐냐면,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즐거워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라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 이 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산다.. 함께 산책을 한다..’ 그런 의미도 있거든요.

 

여러분, 사랑하는 연인끼리 손을 꼭 잡고 산책을 하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손을 맞잡고 산책을 하는데,

그 사랑 안에서 함께 걷고, 서로 함께 즐거워하는 그 모습이 뭐냐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억지로.. 막 돌을 씹는 것처럼.. 인상을 쓰면서

어쩔 수 없이 함께 걷는 것이 아니고,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그게 바로 동행하는 거라는 거예요.

 

△저희 교회에 청년들이 많다 보니까, 제가 주례를 좀 자주 사는데

근데 이제 신혼여행을 갔다가 친구들이 돌아와서 인사를 할 때가 있어요?

그럼 제가 꼭 물어보죠. ;야, 결혼하니까 뭐가 제일 좋니?‘

 

그러면 100이면 100 꼭 이렇게 말했어요.

한 사람도 지금까지 ’힘들어요.. 부담스러워요..‘ 이렇게 말한 친구는 한 명도 없었어요.

 

백이면 백 뭐라고 말해요? ’함께 있어 너무 행복해요.‘

함께 있어서 행복하대요.

 

그럼 제가 뭐라고 말하겠어요? ’평생을 그렇게 살아라.

지금만이 아니고 평생을 그렇게 살아라‘ 제가 그렇게 축복하죠.

 

자,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서

그 손을 잡혀서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그분 안에서,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거에요. *소요리문답 1번

 

그래서 다윗은 시16:11절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주의 앞에는 뭐가 있다고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뭐가 있어요?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라고 말해요.

 

이 말은 무슨 말이죠? 하나님과 함께하는 곳에는요.

참된 만족과 기쁨이 있다는 것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함께 걷는 동행의 삶은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이 있을 정도로, 하나님을 인조이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굉장히 외롭고 고독한 것으로 생각을 해요.

 

아니 황량한 사막의 길을, 주님과 함께 저렇게 터벅터벅 걷는 모습으로 생각을 하고 있어요.

여러분 이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인조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입니다.

 

△리차드 웜브란트 Wurmbrand 라는 루마니아 목사님이 계셨는데요.

우리 나라에서는 범브란트 목사님으로 알려져 있죠.   *영어로 윔브란드, 독일어로 부름브란트  

이 목사님은 루마니아에 공산 정권이 들어섰을 때에 복음을 타협하지 않고

지하교회를 섬기다가 체포돼서 14년 동안 감옥에서 계셨어요.

 

14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3년은 독방에 갇혀 있었어요.

말로 다할 수 없는 그런 고문을 당하고 굶주림도 당하고 고립된 삶을 살아왔어요.

 

가족들도 그 분의 생사를 알 수 없을 만큼, 그렇게 외롭고 고독한 삶을 감옥에서 보냈거든요.

그런데 그분은요. 이런 놀라운 간증을 하고 있어요.

감옥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곳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놀라운 기쁨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찬송할 수 있었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감옥이..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빼앗지 못했다는 거예요.

감옥이라는 환경이, 주님이 내게 주시는 그 기쁨을 뺏지 못했다는 거죠.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빌립보 감옥에 갇혔잖아요. 여러분 옷은 다 찢겨져 나가고 몸은 맞아서 피멍이 들고

피가 흐르고 발은 차꼬에 매여 있었지만,

그들은 한밤중에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죄수들이 들을 정도로, 큰 소리로 찬양과 기도를 드렸단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요.

이 세상 사람들이 맛볼 수 없는 그러한 감격과 기쁨을 누리는 거예요.

누구도 맛볼 수 없는 영적인 희열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는요. 누구도 맛볼 수 없는 영적인 희열이 있고

그리고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주님의 그 안아주심과 포근함이 있어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이루어심이 있는 거에요.

 

△광야의 인생길을 걸으면서 매일매일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걷는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사랑하는 딸아,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두려워하지 마라.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할게’

 

여러분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그 주님과 함께 우리의 광야의 인생길을 걷는다면,

광야의 인생길이 힘들고 어렵지만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고독과의 전쟁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외롭고 고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조이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고 축복인 것이지요.

 

△여러분에게 한 번 질문해 보겠습니다.

「열정적인 사람과 하나님을 인조이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두 사람 중에 세상의 유혹에 누가 쉽게 더 넘어지겠어요?」

 

네, 답은 ‘열정적인 사람’입니다.

여러분, 열정적인 사람은요. 열정은 있는데, 쉽게 유혹에 넘어집니다.

유혹에 쉽게 넘어질 가능성이 더 많아요.

 

그런데 하나님 안에서,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인조이 하는 사람은요.

세상에 유혹이 와도 쉽게 넘어지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이 더 크기 때문이에요.

 

주님 안에서 누리는 그 인조이하는 삶의 즐거움이 너무 크기 때문에,

세상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어느 때보다도 바쁘고 분주한 삶을 살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바쁘고 분주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긴급한 일보다도 중요한 일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긴급한 일보다도 중요한 일을 먼저 해야 돼요.

 

우리 예수님이 그랬어요. 우리 예수님도 긴급한 일보다도 중요한 일을 먼저 하셨어요.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잖아요.

그때 사람들은 놀래가지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자신들의 임금으로 삼으려고 그랬어요.

 

그때 예수님은, 그 순간을 즐기고 계셨나요? 아니에요.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이 위기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 무리들을 강제로 흩으셨어요.

그리고 제자들을 배태워가지고 빨리, 호수 건너편으로 보냈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하셨어요?

그 다음에 우리 주님은 산으로 들어가서,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사귐의 기도를 드리셨어요.

 

주님은, 긴급한 일보다도, 중요한 일을 먼저 하셨어요.

여러분, 누가 예수님의 제자인지 아세요?

그것은요 우선순위가 분명한 사람, 일을 많이 하는 사람도 좋지만,

‘중요한 일을 우선적으로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스티븐 코비 박사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책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에게는 7가지 습관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뭐냐면

‘소중한 일을 먼저 한다’라고 했어요. 급한 일이 아닙니다.

소중한 일이란,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교제인줄 믿습니다.

 

△여러분 찰스 험멜이 1967년에 쓴 <늘 급한 일로 쫓기는 삶>이라는 책이 있어요.

그런데 거기 보게 되면, 이 책에서 긴급한 일을, 하나의 폭군으로 간주했어요.

 

긴급한 일을 하나의 폭군으로 간주했어요.

폭군이 사람들을 폭압하고 죽이듯이, 긴급한 일들이 우리 영혼을 죽인다는 거예요.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하도록 부르심을 받지 않았어요.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 모든 것을 다 하도록,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시간도 능력도 없어요.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뭘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주함에 중독돼서, 내 영혼을 병들게 하면 안됩니다.

 

여러분, 우리 삶이 얼마나 바쁘고 분주합니까?

그런데 그 분주함 때문에, 여러분이 영혼이 병들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주함 때문에, 그 긴급한 일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도할 수 없을 만큼 바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수 없을 만큼 바쁘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을 만큼 바쁘게 인생을 살아간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실패할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 보시기에, 여러분의 인생은 아름답지 못한 것이죠.

열심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고,

그리고 분주함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자, 에녹의 인생은요. 우리가 오래 사는 것 보다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더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어요.

오래 사는 장수보다, 중요한 것이 뭐냐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더 중요하다는 거에요.

 

여러분 성경을 보게 되면, 에녹에 대해서 이런 평가가 `.

‘에녹은 그 시대의 영웅이었다’ ‘에녹은 가인처럼 성을 쌓았다. 이런 업적을 남겼다’

‘이런 훌륭한 사람이다..’ 이런 말이 없어요.

 

에녹의 인생에 대해서는.. 또 그 시대의 사람들에 비하면

에녹은 짧은 인생을 살았어요. 에녹이 살던 시대의 사람들의 수명이 언젠지 알만지 아세요?

전부 다 구백년을 넘게 살았어요. 또는 구백년 가까이 살았어요.

 

그러니까 그 시대 사람들은 살았다고 하면 전부 다 900살이 넘었어요.

무지무지하게 오래 살았어요. 그런데 그 시대를 살았던 에녹은 몇 살을 살았어요?

365세밖에 안 살았어요.

‘그는 365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심으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3~24

 

365세밖에 안 살았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에녹은 요즘으로 말하면 30대 초반밖에 살지 못한 거예요.

 

30대 초반만 살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예요. 그런데 성경을 보게 되면,

그 시대에 900년을 넘게 살았던 사람들은.. 그저 오래 살았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에녹에 대해서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인생을 살았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에녹은요. 지금으로 말하면 30대 초반밖에 살지 않았는데

당시 기준으로는 짧은 인생을 살았는데,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하고 있어요.

 

이렇게 짧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 살았기 때문에,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천국으로 들어간 사람이 됐어요.

 

그래서 성경은 창세기 5:24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심으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최초로 죽음을 맛보지 않고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살았던 에녹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평가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히11:5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대요.

여러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게 뭔지 알아요?

어떤 업적을 남기는 것 보다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남보다 오래 산다는 것은 축복일 수 있어요.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하면서 주신 축복이 뭐예요? ‘네 생명이 길리라’ 출20:12

그러니까 우리가 단명하지 않고 오래 사는 것도 축복입니다.

 

그런데 에녹의 인생을 보게 되면, 꼭 오래 사는 것만이 축복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여러분, 우리 주변을 보세요.

오래 살았는데... 누군가에게 짐이 되고, 부담이 되고, 그런 분들이 얼마나 많아요?

오래 살면서 누군가에게 부담이 되고, 짐이 되고, 추한 인생을 살아간다면,

그렇게 인생을 오래 사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장수의 복을 주시면, 그 복을 누리지만,

오래 살면서 누군가에게 짐이 되고 부담이 되는 것보다는,

에녹처럼 짧은 인생을 살지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서,

인생의 마지막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평가를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자,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후로는 자연스럽게 동행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자만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이 세상의 삶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끊임없이 하나님께 묻고 묻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인조이 하는 삶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인생에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에녹처럼 끝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나를 기쁘게 하는 자라’ 하는

그런 놀라운 평가를 우리 모두가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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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우리가 ‘하나님의 응답’을 듣는데 있어서, 주목해 볼 게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질 때까지의 시간이에요.

 

자, 보십시오. 이세벨이 ‘엘리야, 너 죽여버릴 거야’ 라고 협박을 했을 때,

엘리야가 두려워서 도망치거든요.

 

왕상19:4에,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루쯤 길로 갔다’고 해요.

하루 도망쳐서 결국 갔는데, 거기서는 하나님의 음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19:8절을 보십시오. 그 하룻길 가서 넘어져 있는 엘리야를 하나님이 일으켜 세우셔요.

먹을 걸 주십니다.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40주 40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19:8

 

하룻길 가서 로뎀나무 앞에 자빠져 있을 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질 않아요.

하나님이 먹을 거 주시고 ‘일어나라 그리고 40일 길을 걸어가게 해서

호렙산의 굴에서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이 없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가요?

우리는 하루길 가고.. 음성 듣기를 원해요. 고작 10분 기도하고 음성 듣기를 원해요.

하루 기도하고 음성 듣기를 원해요.

하나님은 때로 40일을 걸어가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곤 음성을 들려주세요.

 

우리가 믿어야 될 것은,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건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이것을 듣지 못하는 많은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가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그 호렙이라는 산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물에 티백을 넣고 차를 우려내는 동안도,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그 시간이 지나야만, 물과 그 티백이 하나가 되잖아요.

 

그런 것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그 때가 있습니다. 조급하면 안 돼요.

내 타임에 맞추는 게 아니고, 내 스케줄에 맞추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스케줄에 맞춰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