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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12장 자기중심성 깨기

LNCK 2026. 8. 3.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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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중심성 깨기 |  주일예배설교 | 2026-07-19   Youtube 

 

◈자기중심성 깨기              삿12:1~16              2026-07-19 [사사기 12강]

 

▲얼마 전에 책을 한 권 읽었는데 그게 <너는 특별하단다> 제목의 동화책입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이 쓰신 책인데, 2권이 나왔더라고요.                   주1)

 

<너는 특별하단다 2>는 나무사람들(웸믹)이 공과 상자를 많이 모아야만 가치 있다고 착각하는

세태를 꼬집습니다. 주인공 펀치넬로 역시 남들에게 뽐내기 위해 자신의 소유물을 모두 팔아

공과 상자를 사들이고, 결국 집까지 잃으며, 공허함과 깨달음을 얻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죠.

 

이 책은 외적인 소유나 남들과의 비교가 아닌, 나를 창조한 목수 엘리의 사랑,

그 자체만으로 우리가 얼마나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인지를 일깨워주는 따뜻한 동화입니다.

 

엘리(하나님 상징)라는 목수가 나무사람들(웸믹)이 사는 마을을 만든 건데,

그 마을에서는 이상하게 웸믹들이 계속 공을 사는 거예요.

또 빈 상자를 사는 거예요.

가진 재산을 다 털어서 공을 많이 사고, 또 빈 상자를 많이 사면,

사람들한테 이렇게 인정을 받는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빈 상자를 많이 모으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빈 상자를 쌓아서 그 위에 올라갑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더 환호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웸믹(나무 사람)들이, 이번에는 그 빈 상자를 이끌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산에 올라가서 빈 박스를 세워서, 그 위에 올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박수를 쳐주는 거죠.

 

펀치넬로라는 주인공도 이유를 모른 채, 빈 공과 빈 상자를 사서 모으기 시작합니다.

그때 이 웸믹(나무 사람)들을 만들었던 엘리가, 주인공 펀치넬로한테 물어보는 거예요.

 

'내가 너희한테 공 많이 모으고, 빈 상자 많이 모으라고 너희를 만들었냐?'

아니라는 얘기죠.

 

그러면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너 그 공 사고, 그 빈 상자 모으느라고 뭐를 희생했니?'

라고 물어보니까, 펀치넬로가 '저의 전 재산을 다 썼습니다. 저의 돈을 다 희생했습니다.

제 돈을 이 공들과 상자들을 사는 데 다 썼습니다' 라고 대답할 때,

 

엘리 (하나님 상징)가 뭐라고 대답하는가 하면,

'아니다. 너는 너의 재산을 희생한 게 아니고, 너의 행복을 대가로 지불하고 그걸 샀다'는 거에요.

 

여러분, 행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목적대로 살아가는 게 행복한 것인데,

'너는 그 행복을 버리고, 이유도 모른 채, 그저 공을 사고, 빈 상자를 모으는 데 몰두했다'는

얘기예요. 하나님이 만드신 삶의 목적대로 살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이 웸믹들이 왜 공을 샀을까요? 왜 더 많은 상자를 샀을까요? 왜 그 상자에 올라가려고 했을까요?

그 상자를 가지고 왜 산에 올라갔을까요. 현대인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모두가 나를 주목하기 원하는 마음이죠. 모두가 나를 박수 쳐주기 원하는 마음,

내가 인정받으려는 마음... 그래서 우리는 조금만 제외되고,

그 중심에서 조금만 내가 주목받지 못하면... 섭섭해요. 섭섭함이 금방 분노로 바뀌고요.

그 분노가 다툼이 될 때가 많습니다.

 

▲한 철학자는 이런 얘기를 합니다. '욕망은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라는 얘기예요.

그래서 '모방 욕망'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모방 욕망!

 

다시 말하면 타인이 가진 것을 봄으로써, 내 안에 욕망이 만들어진다는 얘기예요.

'저 사람처럼 되고 싶은데...'

그러니까 저 사람이 공을 많이 모으면, 무슨 이유인지 몰라요. 나도 공을 많이 갖고 싶고,

저 사람이 빈 상자, 그 아무 의미 없는 상자를 많이 모으면,

나도 그 상자를 가져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식탁에서도 '누가 더 많이 먹었느냐?'를 가지고 싸우는 게 아니고,

'그 식탁의 어떤 자리에 내가 앉았는가?'를 가지고 싸운다는 얘기예요.

중심의 자리, 대접받는 자리, 높은 자리... 교회 안에도 많죠. 특히 리더십들 사이에.

 

저는 많이 경험했습니다. 교회 재정 조금 쓸 때,

'나를 빼놓고.. 나한테 허락받지 않고.. 나한테 말하지 않고 감히?'

그 일이 어떤 선한 일일지라도, 내가 몰랐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그것으로 싸우고 대항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이것이 바로 "자기 중심성"입니다. Self-centeredness

성경이 말하는 죄의 핵심은 자기 중심성이에요.

내가 왕이 되고, 내가 주인 노릇하려고 하는 것!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죽인 이유가 뭐냐면,

가인 자기의 예배는 하나님이 안 받고, 동생인 아벨의 예배는 하나님이 받았다는 이유예요.

 

여러분의 예배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여러분이 취해야 될 바른 행동은 뭡니까?

하나님께 물어봐야죠.

 

'하나님 왜 제 예배는 받지 않으십니까? 제 예배에 뭐가 잘못되어 있습니까?'를 묻고,

자기 예배를 바꿔야 되는데... 여기도 똑같이 '모방 욕망'이 나오는 거예요.

 

'어?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는데, 왜 나의 제사는 안 받아? 감히 내 예배를 안 받아?'

그리고 화가 나서 아벨을 죽여버리는 거죠.

 

아벨이 왜 죽습니까? 하나님께 그 예배가 받아들여졌다는 이유로 죽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자기로 가득 찬, 자기 중심성이 강한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대적하게 돼 있다는 얘기죠. God-centeredness

 

교회 공동체의 많은 문제도, 가정도, 일터도... 그 문제의 핵심을 뚫고 뚫고 들어가 보면,

결국 해결되지 못한 자기 중심성, 그게 나오거든요.

 

▲여러분 신앙생활의 최고의 지향점, 목적점이 어디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답을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게 신앙의 정점에 서는 겁니다.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신앙생활을 한다는 게 뭡니까?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도록 하는 것이죠.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내가 이 땅 가운데 생명이 있는 이유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러므로 예수를 따른다는 게 뭡니까? 예수를 따른다 할 때 그 예수는 어떤 예수입니까?

자기 자신을 버리신 예수,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뭘 요청하세요?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이게 뭡니까? 자기를 버리라는 거죠.

누구처럼? 예수님처럼!

그리고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인데, 어떤 그리스도입니까?

자기 자신을 버리신 그리스도!

 

자아파쇄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아를 깨트리는 거죠. 이게 신앙의 핵심이에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일을 막는 것이,

외부의 박해만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깨어지지 않고, 파쇄되지 않은 자아를 갖고 있는 사람들...

 

자존심, 수치심, 거절감, 두려움에 쌓여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쓰임 받으면서도,

자기의 겉사람을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자아가 강해지면, 점점 더 자기의 자아를 단단한 성으로 만들려고 하게 됩니다.

이게 더 죄(자아)가 강해지는 모습이죠.

 

◑본문의 배경

 

오늘 본문의 입다의 이야기는, 바로 자기 중심성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를 무너뜨리고,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입다는 암몬에게 큰 대승을 거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승리한 입다에게 불청객이 찾아오는데, 그게 바로 에브라임이에요.

 

에브라임 족속이 4만 2천명을 모아서 입다에게로 올라옵니다.

입다에게 있는 곳으로 찾아왔어요.

 

그런데 입다의 지파는 므낫세 지파예요. 그런데 에브라임 지파가 와서 협박합니다.

'너희들 다 죽여버리겠다'는 거예요.

 

여러분 에브라임하고 므낫세는 서로 형제예요. 또 형제 지파입니다. 주1)

요셉의 아들로서, 누구보다 가까운 지파 사이였죠.

 

입다는 므낫세 지파입니다.

입다가 므낫세 지파 중심으로 군대를 모아서, 암몬에 대해 승리했다면,

형제인 에브라임 지파는 축하해주러 와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근데 지금 협박하러 옵니다.

 

삿12:1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

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하니'

 

'왜 우리가 함께 가지 못하도록 했느냐?'라는 이 질문이,

바로 에브라임은 항상 모든 지파의 중심에 서 있길 원하는 '자리 싸움'을 하는 거예요.

'왜 너만 승리하고, 너만 칭찬받고, 너만 주목받느냐?'는 거예요.

 

'내가 (에브라임 지파가) 같이 나가서 싸워서,

승리하고 나서, 나도 주목받고, 내가 이스라엘 지파들의 중심에 우뚝 서야 되는데,

왜 입다 네가, 그 권한을, 특권을 뺏어갔느냐?' 그 얘기예요. 완전 시비를 거는 거죠.

그리고 '너와 네 집안을 이제 불태워 버리겠다!' 12:1

 

오늘 우리가 볼 본문의 핵심은, 자기중심성을 깨는 겁니다.

이 본문의 이야기를 통하여서, 혹시라도 내 안에 자기중심성이 깨지지 않은 모습이 보이거든,

오늘 하나님의 은혜 앞에, 그 모든 중심성이 깨지고,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으로 돌아가는...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성도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세 가지 대지로 말씀 드릴 텐데요.

 

◑1. 에브라임의 교만, 자기 중심성

 

첫 번째는 에브라임 지파에 대한 얘기입니다.

에브라임 족속은 오래전부터, 늘 12지파들 중에 중심을 요구해온 민족이에요.

갑자기 교만해진 게 아닙니다.

 

발단은 야곱이 축복을 거꾸로 한 거로부터 온 거예요.

요셉이 깜짝 놀라서 '아버지, 므낫세가 오른손이고, 에브라임이 왼손입니다'

라고 얘기해도, 야곱은 개의치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창48:19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에브라임이, 조상 야곱의 특별한 축복을 받았다는 거예요.

사실 에브라임만 이렇게 야곱의 특별한 축복을 받은 것은 맞습니다. 성경의 기록 상으로는.

 

그래서 에브라임 지파는, '우리는 요셉의 후손이고, 두배의 축복(장자)의 후손이고,

우리는 둘째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특별히, 아주 특별히 오른손의 축복, 장자의 축복을

준 그런 족속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중심이고,

우리 없이는 이스라엘은 움직여서는 안 된다. 내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하기는 그럴만 해요. (그래도 섬기는 리더십이 돼야죠. 군림하는 것은 원래 취지에 어긋나죠.)

 

또한 가나안 땅을 정복해서 차지할 때 여호수아가 에브라임 지파입니다.

언약궤가 있는 실로 땅도, 에브라임 산지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종교적으로, 영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컸는지...

 

이스라엘이 남북왕국으로 분열된 이후 역사에서

북이스라엘의 10지파를 통치한 지파가, 에브라임이에요.

그래서 북이스라엘을 다른 말로 '에브라임'이라고 칭할 정도로   *남왕국은 '유다'

에브라임은 중요한 위치였습니다.

 

문제는 뭐예요? 에브라임이 특별해서 특별한 대우를 해주는 게 아니에요.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축복을 준 건, 하나님의 은혜고, 하나님의 복입니다.

 

우리가 늘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그 특별한 은혜, 모두에게 주신 특별한 은혜인데,

본인이 받은 것만 특별한 것인 줄 알고, 그것을 소명으로 삼지 않고, 특권으로 삼는 거예요.

 

하나님이 맡기신 자리가 있는데, 영적으로 섬김으로써

장자의 역할, 어른 역할을 감당해야 될 것 아니에요?

근데 '자리 주장'하는 겁니다. 에헴! 하는 거죠.

 

여호수아 17장에도 이게 그대로 나타납니다.

수17:14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 하니'

 

지금 '12지파의 땅 분배'할 때가 그 배경입니다.

요셉 자손이 누구예요? 므낫세하고 에브라임 아닙니까?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이게 에브라임의 평소 워딩이에요. '우리는 큰 지파, 특별한 민족이 되었는데...'

여호수아, 네가 감히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만으로 줘? 나는 특별한데?'

이 얘기예요.

 

그때 여호수아가 뭐라고 얘기합니까?

수17:15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하니라'

 

하나님이 주신 분깃을 스스로 찾으라는 얘기에요.

'너희가 아무것도 안 하고, 단지 특별하다는 이유로, 그 특권의식으로

두 분깃을 줄 수 없다...' 잘 한 거죠.

 

에브라임은 오래된 문제가 있었습니다.

받은 복을 사명으로 바꾸지 못하고, 늘 더 많은 몫을 요구한 민족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크게 하셨다. 나를 특별하게 하셨다. 고로 나를 특별하게 대우하라'는 얘기죠.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사랑해 주셨으면... 감사해야죠.

그 하나님의 사랑이... 특별 대우받아야 될 권한이 되고,

'내가 중심이 돼야 된다'는 고집으로 바뀌어진다면... 결국은 스스로 괴로운 거죠.

 

지금 에브라임 지파가, 므낫세 지파의 입다를 찾아와서,

시비를 걸고, 폭언을 하는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 중입니다.

과거부터 그랬다는 거죠. *수17장

 

나중에, 에브라임 지파에서 '여로보암'이 나옵니다.

그가 북이스라엘 10지파를 모아서, 북왕국을 건설하고, 다윗의 집안에서 탈퇴합니다.

(조상 야곱의 축복을 받아서 그런지)  잘난 지파인 것은 틀림 없어요.

 

그렇지만, 본문 삿12장을 보면, 에브라임은 그 교만 떄문에,

본문에서 결국 몰살을 당하게 됩니다...

 

▲‘이 공동체 안에 복을 크게 주셨는데, 나는 그 복을 받았으니 나는 더 인정받아야 된다’

라고 자꾸 요구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합니까?

 

이 에브라임의 특권의식은 사실상 우리가 사사기 오는 동안 다루진 않았지만,

사사기 8장, 기드온이 미디안에 승리한 이후에도 똑같이 나와요.

(*지금은 입다가 암몬에 승리한 이후)

 

삿8:1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

 

‘왜 우리 허락 없이 움직였어? 우리를 참여시키지 않고 왜 전쟁했어?

우리를 이같이 대접하면 어찌 됨이냐 감히 나한테?’ 이 얘기에요.

 

우리는 에브라임 지파야. 우리는 특별히 축복받은 지파야.

우리는 하나님의 오른손의 축복받은 지파야. 감히 우릴 무시해?’ 이 얘기예요.

 

그때 기드온은 그들과 싸우지 않고 체면을 세워줍니다.

‘너희가 한 일에 비하면, 우리가 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지. 너희가 최고지!’하고 인정해주고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사사기 12장에 넘어오니까, 에브라임의 마음이 더욱더 강팍해집니다.

‘너희가 나를 참여시키지 않았으니, 너희의 집을 다 불태우리라’ 협박하죠. 12:1

 

여러분, 은혜가 빠져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조건 없는 복이 망각되어지면,

그때부터 우리는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마음에... 살인적인 분노가 나옵니다.

아직 자아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지 않은 사람이죠.

 

-에브라임 지파가 수17장에서는 ‘땅 분배를 더 주세요’라는 요구였고요.

-그 요구가 삿8장에 들어오니까 ‘우리를 왜 빼놓았냐고?’ 중심 싸움이 되고요.

-그게 이제 삿12장에 오니까 ‘다 불살라버릴 거야’ 라고 나오게 됩니다.

 

우리의 자기 중심성 욕망이라는 게 있잖아요.

이렇게 자기를 주장하는 것은, 우상과 같은 건데, 자기 자신에 대한 우상인데,

이게 처음에 다 섭섭함으로 옵니다. ‘나를 빼놓고 하나?’ 섭섭함으로 와요.

 

근데 그게 비교로 발전됩니다. ‘저 사람은 인정받는데 나는 못 받는 것 같아’

그러면서 이 자기중심성의 욕망이 자라나기 시작하고요. 그 다음에는 주장합니다.

‘왜 난 안 줘?’ 자기 권리 주장하고요.

그게 나중에는 내 손에 칼을 들게 만든다니까요. 다 불살라버리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안에 ‘에브라임’이 있습니다.

내가 인정받지 못할 때, 내가 중심에 서지 못할 때,

내 마음, 내 동의를 구하지 않고 무슨 일을 결정할 때,

그게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못마땅한 거예요.

 

이게 여러분, 성격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성품 문제가 아니고, 이 안에 우상이 있는 거예요.

‘주도성의 우상’이 있고, ‘인정받는 우상’이 있고,

‘교만의 우상’이 있고, 그게 내 왕좌에 똬리를 틀고 있으니까... 이게 나오는 거라고요.

 

▲팀 켈러 목사님이 “자유”라는 주제를 다룬 책이 있습니다. 그 안에 이런 단어를 씁니다.

‘자아 망각, 자아 파쇄’라는 말도 있고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지는’ ... 다 비슷한 얘기입니다만,

특별히 ‘자아 망각’이라는 표현을 해요.

 

‘자아 망각!’ 우리 현대인에겐 수많은 문제 정신적인 피로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얼마나 긴장하고, ‘저 사람이 날 어떻게 볼까?’

‘저 사람이 나보다 더 주목 받네?’

‘담임 목사님이 왜 저 사람만 띄우고 칭찬하는 거지?’

‘저 사람만 인정받으면 나는 어떡하지? 교우들이 나를 무시하면 어떡하지?’

‘나는 제외되면 어떡하지?’ 그런 긴장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나도 지지 않으려고 빈박스 세워놓고, 그 위에 올라가서 앉아서

내가 두드러진 존재라고 보이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서두의 동화

 

그러니까 비교하고 열등감에 빠지고, 거절당하면서 수치감에 빠지고,

그게 교회 안에서 있다는 게 말이 되냐고요?

 

현대인의 이런 수많은 정신적 피로감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과도하게 몰입하고 집중하기 때문이란 얘기입니다.

자기를 증명하는 경주에 지치는 거란 얘기예요.

 

‘모방 욕망’이라고 그랬죠. 저 사람 쳐다보고 그 다음에 나를 쳐다보고

‘저 사람은 이게 있는데, 왜 나는 없지?’

‘저 사람은 저게 되는데, 왜 나는 안 되지?’

있으면 교만해지고, 없으면 절망해버리고...

그래서 팀 켈러는 ‘자아를 망각하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설명을 해요.

 

여러분 눈이 깜빡이는 거 여러분들이 인식해요?

눈을 깜빡일 때마다 계속 인식하면 그거 어떻게 삽니까?

숨 쉴 때마다 코로 들어오는 공기를 인식해요?  No

우리는 모른 채 살아가잖아요.

 

그런데 언제 압니까? 아플 때 알죠. 열이 나는 거예요. 통증이 오는 거예요.

 

자아도 똑같다는 겁니다. 자아가 건강하면.. 자아가 거의 인식되지 않는다는 얘기예요.

내 자아를 계속 인식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내 자아가 병들었다는 얘기라고요.

 

자아는 원래 자기 인식이 없어야 하고,

하나님에 의하여 자꾸 이끌려가야 되거든요.

그러면 나오는 성품이, 그 자아를 망각한 성품이 나오면, 겸손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책에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진정한 복음적 겸손’,

다시 말하면 자아를 망각한 자들의 성품이 어떠한가?

 

겸손이라는 것은, 스스로를 낮추어 생각하는 게 아니에요.

자꾸 겸손 그러면 ‘더 낮아져, 더 겸손해, 더 인사해!’

원래 우리가 마치 높은데 더 낮아져야 되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은데,

스스로를 낮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스스로에 대하여 덜 생각하는 것,

‘자아 망각’으로 자꾸 가는 거예요.

 

왜 자꾸 남과 비교합니까? 진정으로 자아를 망각하고,

자아를 인식하지 않고, 자아를 잊는 사람들은... 작은 비판에 무너지지 않아요.

또 작은 찬사에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서 이미 인정받았으므로, 스스로를 증명하거나,

스스로를 변호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자유함이 있거든요.

 

저는 ‘우리는 교회’ 공동체가, 여러분의 삶이,

‘저 사람과 나를 비교하느라, 에브라임같이 자기 자리가 항상 중심이어야 된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다가... 소모적으로 신앙생활하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복음은 ‘나는 죽고 예수가 살아나는’ 데까지 가도록,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생각하십시오. 에브라임이 자기가 받은 은혜를 생각했어야 되는데,

은혜는 잊고, 자꾸 특권을 생각하니까 무너지듯이,

우리가 받은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는 더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특권으로 생각하면, 우리가 가는 곳마다 싸움이 나는 거예요.

한국교회가 왜 내리막길을 타고 있어요? 은혜를 특권으로 오해했기 때문이에요.

늘 이 세상의 중심에 서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영문 밖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영문 밖에 계세요. 예루살렘 도시 밖에 있었다고요.

베데스다 38년 된 병자 가운데 있었다고요. 우리가 자꾸 이걸 놓치는 거예요.    주2)

 

혹시 내 안에 에브라임이 발견되거든,

다시금 내 특권을 내려놓는 은혜가 있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두 번째는 입다에 대한 얘기입니다.

입다는 옳은 반박을 했지만, 은혜의 방식으로 대응하지 못했어요. 이게 문제를 일으킵니다.

 

삿12:2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내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

 

입다가, 전쟁에 나갈 때 에브라임을 불렀다고요.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

그런데 에브라임이 제때 안 왔어요. 그래놓고 지금 딴지를 거는 겁니다.

 

12:3 ‘나는 너희가 도와 주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겨 주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 내게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니라’

 

입다는 원래 타협가입니다. 협상을 잘해요.

그러니까 지금 삿12:2~3절, 방금 우리가 읽었던 말 중에 하나도 틀린 게 없습니다. 팩트예요.

 

그러나 여러분, 사실을 말한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입술에 거짓이 있어서 안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옳은 말을 할 때도, 더불어 말하는 태도가 너무 중요합니다.

편하게 반응하는 반응 방식도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내가 너희 불렀잖아? 근데 너희 안 왔잖아? 그래갖고 지금 왜 이래?’

다 맞는 말인데, 그러나 맞는 말이라고 해서, 언제나 사람을 살리는 말은 아니라는 얘기예요.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을 살리기 원하세요. 옳은 말과 은혜로운 말은 다를 수 있습니다.

정확한 사실과, 살리는 말은 다를 수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이겼다고 해서, 그것이 공동체를 반드시 살리는 것도 아니에요.

 

입다는 말에 능했고, 늘 타협할 줄 알았던 사람이지만,

오히려 이번에는 에브라임의 말 앞에는 참지를 못해요. 바로 까칠하게 반응합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에브라임이 입다의 가장 깊은 상처를 건드렸거든요.

12:4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으며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무찔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공동번역) ‘입다는 길르앗 전군을 이끌고 에브라임과 싸워 에브라임을 격파하였다.

길르앗 사람들은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는 처지였다. "에브라임에서 도망친

길르앗 놈들, 에브라임과 므낫세 사람들 속을 떠도는 놈들"이라는 말을 들어왔던 것이다.’

 

4절은 길르앗 군대가 에브라임 지파를 공격하게 된 결정적인 도발 원인을 설명합니다.

에브라임은 길르앗 사람들을 "에브라임에서 도망친 자들(배신자, 도망자)"이라고 모욕한 거죠.

이 모욕적인 언사가 동족상잔의 비극을 촉발했습니다.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후손인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과 므낫세 사이에 거주하는 것을 두고,

길르앗 사람들을 ‘고향에서 떨어져 나와 요단 동편으로 도망친 무리’라고 폄하한 것입니다.

 

이러한 에브라임의 오만한 특권의식과 모욕은

가뜩이나 전쟁으로 지치고 분노한 길르앗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질러

결국 요단강 나룻가를 장악하고, 도망치는 에브라임을 학살하는 보복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너희 길르앗 사람들 너의 출신은 본래 에브라임 사람이었는데,

거기서 쫓겨난 사람이라’는 얘기예요.

 

여러분, 입다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입다의 출신 배경을 말씀드렸죠? 기생의 아들이에요.

그런데 탁월했기 때문에 형제로부터 쫓겨났죠. 입다의 정체성은 ‘쫓겨난 사람’입니다.

죽지 않으려고 도망친 사람입니다.

 

여러분 부부끼리 싸울 때도 넘으면 안 되는 선이 있죠.

그 말만큼은 안 해야 되는 말이 있죠.

그 말 하면, 도장 찍자고 얘기 나오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안 하잖아요.

 

에브라임이 해 서는 안 되는 말, 넘지 말아야 될 선을 넘는 말을 한 겁니다.

입다는 도망자고 쫓겨난 자인데,

에브라임이 ‘너 도망친 존재잖아?’ 라고 찌른 것이죠. 지역적, 차별적 발언입니다.

 

또한 암몬과 전쟁에서 주축이 된 므낫세 군대는 주로 길르앗 사람들이었는데,

그 길르앗 사람들도, 에브라임과 므낫세 사이에 거주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조상 마길이 ‘본토에서 떨어져 나와 요단 동편으로 도망친 무리’라고 폄하한 것입니다.

7절에 입다를 ‘길르앗 사람’이라고 말하죠.

 

이게 입다와 길르앗 사람들(요단 동편 므낫세 반 지파)의 자존심을 건드린 거예요.

그 순간 입다는 타협하지 않습니다. 칼을 들죠.

상처가 은혜로 다뤄지지 않으면 칼이 됩니다.

우리의 수치심이, 거절감이, 상처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녹여지지 않으면

우리는 칼을 듭니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영성>이라는 책 안에 보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정서적인 성숙과, 영적인 성숙은 결코 분리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성품 있잖아요. 말하는 성품, 사람을 대하는 성품과 영적인 성숙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근데 한국교회가, 특히 우리가 이렇게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할수록

이거를 굉장히 자연스럽게 분리합니다.

자기가 옳은 말을 하면, 영적으로 성숙한 줄 알아요.

맞는 말 하면, 신앙이 성숙한 줄 알아요. 안 그래요.

 

내가 종교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니까, 내가 목사니까, 내가 장로니까,

내가 무슨 일에 열심히 봉사를 하니까,

마치 내가 성숙한 사람인 줄로 착각한다고요. 안 그렇습니다.

 

새벽기도 매일 나오는 권사님이 한 교회를 무너뜨린 일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새벽기도를 통하여 내가 성숙했다’고 스스로 가면을 쓰는 겁니다.

그리고 더 이상 정서적 성숙, 또는 성령의 열매를 이루려고 하지 않아요.

 

맞는 말이면 자기 맘대로 하는 거예요. 아닙니다. 여러분 태도가 중요해요.

입다가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을 암몬으로부터 구원해냈지만,

결국 자기의 상처를 다루지 못하여, 에브라임이라는 형제 지파를 몰살시키는 일을 하죠.

 

목사가 설교한다고 성숙한 게 아니에요. 여러분 그렇게 저를 보시면 큰 착각입니다.

저도 정서적 성숙, 다시 말하면 제 성품을 다루기 위하여 몸부림칩니다.

 

여기서 이렇게 설교한다고, 제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는 얘기예요.

여러분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에브라임에게 교만이 있다면, 또 입다의 다루지 못한 상처처럼,

똑같이 그것들이 우리의 가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고로 받으셔야 되죠.

 

교회도 또 여러분이 속한 모든 공동체도, 외부의 공격으로 무너지는 게 아니고,

때로는 에브라임과 같이, 내 안에 있는 인정욕구로

때로는 입다와 같이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에,

사랑 없이 옳은 말만 하는 그 말 때문에... 항상 공동체가 무너집니다.

 

오늘 우리도 조심해야 됩니다. 이 두 가지 얘기를 듣고 보니까,

여러분은 어느 쪽이 더 강하세요? 둘 다 있을 텐데 에브라임입니까? 입다입니까?

여러분은 어느 정도는 다 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건, 사람을 살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자기중심성을 자꾸 깨야 되는 이유도,

그래야 다른 사람이 살기 때문이고,

우리의 상처를 다루어야 되는 이유도, 다른 사람을 살려야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상처를 드러내서, 우리에게 수치심을 주려고 그 상처를 드러내시는 게 아닙니다.

싸매어 주고... 그 싸매어지지 않으면 다른 형제를 해할 수 있기 때문에,

상처를 다루어 주시려고 하는 거예요. 치유해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정도의 거절감이나 두려움이나 상처가 있죠.

그러나 그거를 이고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내가 예배를 드린다고, 성경을 본다고, 기도한다고, 그게 자동으로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오늘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그것이 다루어짐을 받고, 나도 몸부림 쳐서

그것을 직면하고, 대면하여 치유받아야만, 나도 살고, 너도 살고, 우리도 사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 우리의 낡은 상처를 가지고 나가서,

그 상처가 칼이 되지 않도록, 경고함을 받는 주의 백성들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세 번째는, 하나님은 주도권의 우상,

이것이 어떻게 공동체를 무너뜨리는가를 보여주세요.

 

주도권의 우상은 둘 다 맞죠.

-에브라임은 교만, 내가 중심에 있어야 돼! 이것도 주도권의 우상이고요.

-입다는, ‘내 자존심을 건드리면, 널 가만히 두지 않을거야’ 이것도 자기 주도성이죠.

이게 어떻게 공동체를 무너뜨리는가요?

 

자 오늘 본문에, 요단강 나루턱에서 에브라임과 형제 므낫세 지파인 입다가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이런 성경을 읽을 때 무서운 건 뭐냐면, 하나님이 없어요.

하나님의 개입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이게 무서운 거에요.

 

원래 사사가 일어나고, 암몬과 같은 대적으로부터 전쟁을 통하여 구원을 받으면,

그 후에 나오는 이야기는 뭐냐면 ‘입다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이 평안했다’

이게 맺음말인데, 오늘 입다의 맺음은 매우 무미건조합니다.

 

삿12:7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육 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에 있는 그의 성읍에 장사되었더라’

 

하나님이 주신 평안도, 안식도,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찬양도 없습니다.

‘그냥 입다는 죽었다’는 말 뿐입니다.

 

삿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스라엘의 왕이 없지 않았죠. 하나님이 왕이셨고요.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고,

-또 하나, 이스라엘의 왕이 없다 라는 이야기는, 원래 왕은 한 사람이어야 되잖아요.

모든 이스라엘의 백성이 왕노릇 했다는 얘기예요. 모두가 왕이예요.

자기 주도권의 우상이 사로잡혀 있으면, 모두가 다 왕이죠.

 

내가 왕이야... 내 주장이 법이고, 내가 선택하는 게 법이고, 내가 곧 법이야!

내 말이 곧 기준이야! ... 이렇게 모두가 왕이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고 나니까 형제지파인 에브라임지파를 학살하는 일이 가능해지는 거죠.

 

12:6 ‘그에게 이르기를 쉽볼렛이라 발음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그렇게 바로 말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강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4. 오늘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사건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구원받았던 요단강에서 일어났던 사건이에요.

 

요단이 어떤 강입니까? 가나안 땅에 진입할 때 마지막으로 넘어와야 되는 강이고

하나님께서 그 강을 열어주셔서 들어왔잖아요.

 

근데 그 강이 대학살의 피로 물들여지는 강이 됩니다.

삿12:6 ‘그에게 이르기를 쉽볼렛이라 발음하라 하여    שִׁבֹּלֶת

에브라임 사람이 그렇게 바로 말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סִבֹּלֶת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강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이제 에브라임 사람이 전쟁에 지니까 도망가는 거예요. 요단강이 있고요.

요단강을 건너가야 되거든요. *요단 서편에서 동편으로 되돌아가는 상황

 

그러니까 요단 나루터로 사람들이 다 이동을 하는 거예요.

왔는데 길르앗 사람들이 딱 지키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강을 건너는 사람에게 ‘쉽볼렛’을 발음을 시켜보는 거예요. *강 줄기, 또는 이삭

 

그런데 마치 일본 사람들이, 받침 발음이 안 되어, 김치를 ‘기무치’ 라고 하고,

필리핀 사람들이 ‘애’ 발음이 안 되어서, 백 팩을 ‘박 팍’이라고 하듯이,

요단 서편 사람들은 ‘쉬’ 발음이 안 되어서, ‘시’로 하는 거예요. 십볼렛 *쉽볼렛과 같은 뜻

 

그럼 딱 그 자리에서 에브라임 사람, 므낫세 사람이 구분이 되는 거죠.

요단강 서편 사람과, 요단강 동편 사람이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4만 2천이었다고 해요. 12:6

 

이게 무서운 얘기예요. 언어가 생명을 살리는 도구가 아니고,

사람을 가르고 사람을 죽이는 암호처럼 된 거죠. 특히 이게 어디예요. 요단강이라니까요.

 

요단강은,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들어올 때, 기적적으로 마른 땅처럼 건너 온 강이에요.

그 하나님의 은혜, 복을 경험했던 곳인데,

그러나 입다는 그 은혜와 복을 망각했던 것입니다.

 

요단강이 약속의 땅으로 건너들어왔던 통로인데, 은혜의 기억이 있는 땅인데,

이제는 쉽볼렛이라는 단어를 하나 발음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서

동족을 편을 가르고 죽이는 장소가 된 것이죠.

 

이처럼 오늘날에도 ‘자기 주도성’의 우상이 들어와 있으면,

내 마음에 안 들면, 다 죽이는 방식으로 사는 거예요.

 

▲여러분, 내 이상에 맞춰서 교회가 세워지는 게 아닙니다.

본 회퍼 목사님이 공동체에 대한 책을 썼는데,

그 안에 ‘참된 공동체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상, 내가 꿈꾸는 교회,

이런 데에 소망이 있는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선물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썼습니다.

 

제가 우리가 꿈꾸는 교회..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하나님이 꿈꾸시는 교회가 있는데, 그 꿈이 어디에서 이루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위에 세워진 거예요.

 

우리가 이곳에 모일 수 있는 근거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예수께 은혜 받은 겁니다.

십자가의 은혜 받은 겁니다. 우린 공로 없는데 하나님이 부르시고 택하셔 버린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제 살만하니까, ‘나의 언어’를 만드는 거예요.

이 언어에 동의하면 내 편이고, 아니면 아니다...

 

저한테도 많은 목사님들이 물어봅니다. ‘쉽볼렛 해보세요’ 무슨 의미냐면,

‘내가 동의하는 이 말에, 목사님도 동의하는지 예 아니오로 대답하세요!’

 

예를 들어, 요즘 정치적으로 좌우 색깔론이 있잖아요.

그게 ‘쉽볼렛, 십볼렛’ 구분하는 것의 현대적 적용이에요.

나랑 발음이 다르면, 나와 성향이 다르면, 완전히 죽일 사람 취급을 한다니까요...

 

지금도 그 ‘십볼렛, 십볼렛’ 때문에 한국교회가 망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기의 이상적인 취향, 자기의 지역, 자기의 신앙의 언어, 사역의 방식, 예배의 스타일,

정치적 성향, 누구와의 친밀도, 경력 다... ‘쉽볼렛, 십볼렛’이에요.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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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그런데 여러분 므낫세와 에브라임에 대한 이야기를 좀 알아야 합니다.

야곱에게는 12명의 아들이 있었고, 그 중에 한 사람은 요셉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형제에 의해서 팔려가잖아요. 나중에 만납니다.

야곱 입장에선 요셉을 만나니까 얼마나 좋아요?

잃어버린 인생을 보상이라도 해주듯... 너무 행복했죠.

 

야곱은 이 요셉의 아들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축복을 해줍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각각 한 지파씩 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래서 요셉은 두 몫을 받은 셈입니다. 그건 '장자권을 상속했다' 라는 뜻이죠.

 

므낫세가 첫째이고, 에브라임은 둘째예요.

근데 이 요셉의 두 아들을, 할아버지인 야곱이 축복하는데,

원래는 장자인 므낫세에게 오른손을 얹어야 하고, 둘째인 에브라임에게 왼손을 얹어야 되는데,

그 야곱이 손을 바꿉니다. 에브라임을 장자 취급해주는 거예요.

 

주2) 베데스다 연못은 본래 성벽 밖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헤롯 아그리파 1세가 예루살렘의 '제3성벽' 건설을 시작한 시점은 서기 41년경이며,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서기 66년경에 완공되었습니다.

이 성벽의 확장 공사를 통해 베데스다 연못(양문 곁에 위치)은

예루살렘 성 안으로 흡수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