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6 하나님, 왜 이런 고난을 허락하시나요? 욥기38:1-7 2026.07.19 Youtube
◈하나님, 왜 이런 고난을 허락하시나요? 욥38:1-7 2026.07.19. [하나님 나라 6강]
여러분은 그동안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이 무엇입니까?
물론 답은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렇게 답하겠죠.
제가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로 달려나가,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그러나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리거나, 너무나 고통스럽게 투병 생활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을 구하는 것이, 지나친 욕심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침묵만을 지키실 때가 있으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런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 도대체 왜 저에게 이런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허락하십니까?’
‘그리고 왜 때로는 아무리 부르짖어도 침묵만을 지키시는 것입니까?’
아마 누구라도 한 번쯤은 해볼 수 있는 질문이겠죠.
▲그래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던 에피큐로스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만약에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이 세상은 이렇게 고난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질문을 이어 나갑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든 고통 가운데 건지실 수 있는 마음은 있는데,
그럴만한 능력이 없는 거라면, 그는 전능자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고통 가운데 우리를 건지실 수 있는 능력은 있는데,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셔서 그럴만한 마음이 없는 거라면.. 그는 선한 존재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최종 결론으로,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모든 고통 가운데 건지실 수 있는 능력도 없고, 사랑도 없다면,
도대체 왜 그런 존재를 신이라고 하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정말 논리적이지 않습니까?
만약에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면, 여러분 같으면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전개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계시고, 그에게는 무한한 능력과 무한한 사랑이 있다면
어떻게 이 세상이 고난과 아픔으로 가득 차 있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능력이 부족하시거나, 또는 사랑이 부족하시거나.. 둘 중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것은 유독 세상 사람들만의 질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들 가운데서도, 이와 동일한 의문을 마음에 품고 있는 분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왜 때로는 아무리 불러도, 하나님께서 침묵만을 지키시는 것일까요?’
오늘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담고 있는 욥기는, 고통의 문제를 가장 심도있게 다룬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간 욥의 삶의 이야기 안으로, 우리가 함께 들어가 볼까요?
◑욥이 당한 전대미문의 극심한 고난
욥기 1장에 보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재력가였는지를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욥1:3절에, 그의 재산 목록을 정확하게 공개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에게는 양이 7000마리, 낙타가 3000마리, 소가 500겨리 *1겨리 : 2마리
그리고 암나귀가 500마리 있었습니다.
그는 막대 한 부를 축적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 보다도 그에게는 7명의 아들 과 3명의 딸이 있었는데
모든 자녀 들이 사이 좋게 지냈기 때문에, 욥은 하루 하루를 굉장히 부유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욥의 삶에는
무서운 고난의 폭풍우가 휘몰아치기 시작합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7천마리의 양을 다 불살라버립니다.
그리고 갈대아 사람들과(북쪽) 스바 사람들이(남동쪽) 쳐들어와서
다른 모든 목축들을 다 빼앗아갑니다.
그는 하루아침에 전재산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일이 여러분에게 실제로 일어났다면,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너무나 크나큰 절망감에 밤에 잠이 오지를 않겠죠.
그러나 욥에게는 이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고통스러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10명의 자녀들이 하나의 사고로 인하여, 한날 한시에 모두가 목숨을 잃었다는 겁니다.
자 지금 이 시간 욥기 1장을, 부모의 눈으로 부모의 심정으로,
다시 한번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땅에 묻고, 자녀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자녀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한 날 한 시에 다 떠나보내야만 하는
부모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그냥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힘들었을 것입니다.
일생일대에 이거보다 더 큰 고통은 없겠죠.
그런데 욥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는 건강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합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종기가 납니다. 그래서 개역한글판에는 ‘악창이 났다’라고 기록했죠.
이제는 살아 숨쉬는 모든 순간순간이 고통일 뿐입니다.
이런 고난의 시간에 나를 유일하게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누굴까요?
나의 배우자겠죠. 그런데 욥의 아내는 그를 위로해 주기는 커녕
그를 비난하고 몰아세우기 시작합니다.
‘당신이 아직도 하나님에 대한 순전함을 굳게 지키고 있습니까? 당신 제정신이에요?
우리가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는데,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은 차라리 욕하고 죽어버리세요!’
욥이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그리고 그가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이제 마지막으로 그의 세 명의 친구들이 찾아옵니다. 처음에는 욥과 함께 울어주었습니다.
거기까지는 참 좋았는데, 그 다음 순간 무서운 정죄의 손가락질을 하기 시작합니다.
‘네가 뭔가 잘못한 것이 있으니 하나님이 너를 벌하시는 거 아니냐?’
‘네가 분명히 무서운 죄를 지은 게 있을 거야’
욥이 아무리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그의 결백함을 주장해도 믿어주지를 않습니다.
대화를 나누고 나눠도 말이 빙 돌아서, 결국에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옵니다.
욥이 얼마나 괴로웠을지를 한번 상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고난을 크게 네 종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건강상의 문제,
두 번째는 관계적인 갈등,
세 번째는 재정적인 어려움,
네 번째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입니다.
그런데 욥은 이 모든 고난을 한꺼번에 다 당했습니다.
첫째로 그는 전재산을 잃어버렸죠. 극심한 재정난에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는 건강도 잃어버렸습니다.
세 번째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지금 관계적인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배우자와 그리고 가장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 관계적인 갈등을 겪고 있기 때문이죠.
네 번째로 그 무엇보다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열 명의 자녀를
한날 한시에 떠나보내야 되는 가장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세상에 인간으로 이 땅에 태어나서, 이거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가 있을까요?
그렇다면 대체 왜 욥의 삶에는 이렇게 무서운 고난이 임한 것입니까?
정말 그의 친구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가 무엇인가를 잘못했기에,
하나님께서 징계적인 차원에서 그를 벌하신 것입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욥기를 통해서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자 욥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욥을 어떤 사람이라고 소개해 주십니까?
욥1: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하나님께서 친히 욥을...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순전함을, 그리고 그의 결백함을 증언해 주신 것이죠.
실제로 욥기 1장과 2장을 읽어보면 욥이 무엇인가를 잘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벌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욥기의 마지막 장인 42장에 가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욥을 정죄하던 그 세 친구를 꾸짖고 책망하시는 과정에서,
욥의 결백함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욥의 삶에 임한 고난의 의미가,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있겠죠.
물론 성경에 보면, 때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무엇인가를 잘못하고 죄를 범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징계적인 차원에서 그들을 벌하실 때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다만 욥의 경우에는 그것이 아니라는 점을 설명해드리는 겁니다.
◑그러면 욥의 삶에 임한 고난의 의미가 징계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일까요?
우리가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고난을 허락해 주시는
대표적인 이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징계이고,
두 번째는 훈련입니다.
무엇인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고난을 통해 그들을 단련시키고 훈련시키사
더 강인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때로 고난을 허락해 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욥의 삶에 임한 고난의 의미가 훈련이겠습니까? no
물론 우리는 욥23:10절의 말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자 이 말씀을 근거로, 욥 자신이 ‘하나님께서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욥의 삶에 임한 고난의 의미가 훈련이구나’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딱 한 구절만 읽어서는 안 되겠죠.
그 전후의 문맥을 함께 살펴봐야 됩니다. 그래야 올바른 해석이 가능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자, 욥기 23장을 모두 읽어보면, 욥은 도대체 왜 나의 삶에 이런 고난이 임했는지
그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도 친구들에게 이렇게 외치죠.
‘나도 그게 궁금하단 말이야. 하나님이 도대체 나한테 왜? 왜 이러시는지?’
‘그래서 하나님께 직접 물어보고 싶은데,
아무리 하나님을 찾고 찾아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어서 나도 답답하단 말이야’
이것이 욥기 23장에서 울려퍼지는 욥의 비명소리입니다.
그는 자기가 도대체 왜 고난을 당하는지... 그 이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러므로 욥23:10절의 그의 고백은 욥의 비명소리입니다.
나의 삶에 임한 이 고난의 의미가 훈련이다라고 확언하는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이 대체 나에게 왜 이 고난을 허락해 주셨는지는 모르겠으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니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욥에게 임한 고난의 의미가.. 징계도 아니고, 훈련도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실 때도 있고
또는 훈련적인 차원에서 고난을 허락해 주실 때도 있으나,
또 때로는 둘 다 아닐 수도 있는 겁니다.
욥의 삶에서도,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도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는데,
욥의 삶에 임한 고난의 의미가 징계도 아니고, 훈련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 미스터리를 어떻게 풀면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대답
참으로 다행히도 너무나 놀랍게도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고난의 의미를 설명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 말씀을 우리가 올바르게 이해하면
이제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있겠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본문 욥기38:4~7절을 보겠습니다.
욥38: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6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7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자, 하나님께서 친히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들은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셨죠? 그런가요?
아니 그런데 이게 웬 동문서답입니까!
욥의 질문은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고난을 허락하시나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질문에 답은 안 하시고,
오히려 하나님이 욥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시는 질문은, 욥기 38장에서 시작되어서
39장, 40장, 41장, 총 4장에 걸쳐서 욥에게로 쏟아져 내려옵니다.
그 질문을 하나하나 세어보면 70개가 넘습니다. 정말 황당하지 않나요?
아니, 욥의 질문에 답은 안 하시고,
하나님이 오히려 욥에게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당혹스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 질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더 황당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질문은 대략 이런 종류의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느냐?’
‘너는 생명의 신비를 알고 있느냐?’
‘너는 낚시질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하나같이 황당한 질문들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이 수많은 질문들을 통해서,
욥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도대체 무슨 메시지를 전하시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갈수록 미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넉장에 걸쳐 하나님께서 하시는 질문을 천천히 읽으면서 묵상해보면, 38~41장
이 모든 질문에는 한 가지 뚜렷한 패턴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패턴이 무엇입니까?
이 모든 질문들을 단 두 가지의 유형으로 요약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1) 첫 번째 유형의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너는 이것을 할 수 있느냐?’
2) 두 번째 유형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너는 이것을 알 수 있느냐?’
그렇다면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우리의 가장 솔직한 답은 무엇일까요?
1) 아니요. 전혀 할 수 없습니다.
2) 아니요., 저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무지무능한 존재인지를,
우리가 얼마나 작고 유한한 존재인지를,
스스로 자각할 수 있게 해주는 질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이 모든 질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과연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너는 너무나 작고 무지하여서 이 모든 질문에 답을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지금 내가 너에게 고난의 의미를 설명해 주어도, 너는 아직은 이해하지 못할 거야.
그러나 내가 너를 너무나 사랑하니, 나를 믿고 신뢰하여, 나를 한번 따라와 주지 않겠니?’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한 것은 이유입니다.
‘하나님, 도대체 왜 저에게 이런 고난을 허락해 주십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이유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사랑의 관계, 신뢰의 관계 안에서, 때로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주님을 믿고 따라오지 않겠느냐?’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자 아마도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서는
이 메시지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답답해 하시는 분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한때는 그랬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히려 하나님께 항의했습니다.
‘아니, 이해할 수도 없는 하나님을 신뢰하라고요?
하나님이 생각하시기에는 이게 말이 됩니까?’
◑설교자의 간증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저의 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더 헤아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세 명의 딸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저의 첫째 딸이 태어났을 때, 제가 그 아이를 가슴에 품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첫째가 태어난 지 단 2주 만에, 어느 날 이 아이가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서둘러서 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뇌수막염이라는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그때 의사선생님이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뇌수막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바이러스성과 박테리아성입니다.
바이러스성 뇌수막염은 상대적으로나마 치료하기가 조금 더 쉽고 간단합니다.
반면에 박테리아성은 치료하기가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합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저희 첫째가 앓고 있었던 병은, 치료하기가 좀 더 힘들다던,
박테리아성 뇌수막염이었습니다.
처음에 이 아이가 입원했을 때, 잠시 호흡까지 멈췄기 때문에,
딸은 인텐시브 케어 유닛 (중환자실)에 입원이 되었습니다.
코에는 산소호흡기가 부착이 되었고, 머리와 몸에는 수많은 와이어들이 연결되었습니다.
생후 2주 밖에는 되지 않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딸의 몸이 이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게 어린 아기의 몸에 수많은 와이어들이 연결되는 것을 보는
초보 아빠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처음에는 의사 선생님들이 ‘완치는 아니더라도 2주 후에는 퇴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2주가 3주가 되고 3주가 한 달이 되어도
우리 첫째는 퇴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치료 과정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는, 뇌척수액을 채취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백혈구 수를 세어보아야지, 제대로 치료가 되는지 안 되는지를 확인할 수 있거든요.
여러분은 혹시 뇌척수액을 채취하는 과정을 겪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한 번도 없는데요. 그것을 겪어보신 분들의 증언담에 의하면
남자 성인에게도 정말 묵직한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그런데 생후 2주밖에 되지는 않는 어린 아기의 몸에
허리뼈 밑으로 주사바늘이 들어가게 되면, 그 다음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면서 울게 되겠죠.
울면서 몸이 뒤틀려서 피가 섞이면 모든 게 무효처리됩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됩니다.
그래서 아기가 절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간호사들이 몸을 꽉 쥐고 누릅니다.
그 가운데서 이제는 채취를 하게 되는데요.
그 과정을 지켜보기를 원하는 부모도 없을 것이며,
부모가 그 자리에 있어서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에
의료진은 밖으로 나가 대기실에서 기다려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대기실이 병실에서 많이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비명에 가까운 울음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옵니다.
첫째가 병원에 한 달 넘게 입원해 있으면서, 뇌척수액 채취를 총 일곱 번 했습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그 아이를 병실에 데려다주던 그날을, 저는 오늘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 병원 복도에 차가운 공기, 아이의 살 냄새,
그리고 제발 이번이 마지막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저의 마음...
참으로 감사하게도 일곱 번째가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첫째는 잘 회복해서, 아주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자 지금 이 시간 이 상황을, 아기의 눈으로 한번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생후 2주밖에 되지 않는 아기에게는 지적인 능력이 거의 없겠죠.
그러나 이 한 순간만이라도 2주밖에는 되지 않았으나,
이 아기에게는 아주 기본적인 사고능력과 언어능력이 있다라고 한번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자, 만일에 그 순간 아기에게 ‘너네 아빠는 어떤 사람이니?’ 라고 물었다면,
이 아기는 과연 무엇이라고 답할까요? 아마도 이렇게 답하겠죠.
‘우리 아빠는요., 참 좋으신 분이에요. 저를 사랑해 주시고 저를 따뜻하게 안아주시며,
제가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참 좋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기는 있어요. 평소에는 항상 아빠가 제 곁에 머물러 계시며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다가도, 내 삶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는,
내 인생의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에는, 아버지가 어디론가 사라지셔서 눈에 보이지 않아요'
대신에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나에게 달려들어서 뾰족한 바늘로 나를 마구 찔러댈 때
나는 너무나 아프고 고통스러워서 아빠를 찾습니다. ‘아빠 저 지금 너무 힘들어요.
아빠 지금 저 너무 아파요. 그러니 아빠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그런데 아무리 불러도.. 우리 아빠는 참 이상한 사람이에요...’
이것이 생후 2주밖에 되지 않는 아기가 내릴 수 있는 가장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일
것입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입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계시다면, 그리고 그에게 무한한 능력과 무한한 사랑이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고통당하는 것을 지켜만 보고 계시겠는가?’
‘하나님에게 사랑이 부족하든가, 능력이 부족하든가, 둘 중에 하나가 아니겠는가?’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결론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번에는 아기의 눈이 아닌, 부모의 눈으로
이 동일한 상황을 한번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여러분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십니까?
자,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아빠인 제가 능력이 부족하거나, 사랑이 부족해서,
제 딸이 그런 고통을 당한 것이겠습니까?
자 먼저 사랑에서부터 시작을 해볼까요?
여러분은 제가 제 딸을 죽을 만큼 사랑합니다.
만일에 서연이가 죽게 되었는데, 제 목숨과 맞바꿔서 그 아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저는 두 번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저뿐만이 아니겠죠.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부모님들도 다 마찬가지죠.
부모는 목숨을 내어 걸고 자녀를 지키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제가 사랑이 부족해서, 어린 딸이 그 고통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겠죠.
그러면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면, 제가 능력이 부족해서,
제 딸이 그런 고통을 당한 것일까요? 아니요.
저는 제 딸을 이 고통에서 건져낼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습니다.
제가 대기실에서 기다리다가도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병실로 돌아가서 ‘멈추세요!’ 라고 딱 한마디만 하면,
그 모든 고통스러운 과정은 끝납니다.
미국에서 부모의 허락 없이, 자녀의 몸에 의술을 처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멈추라’는 말 한마디만 하면, 이 모든 고통은 끝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만을 지킬 뿐입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말 한마디만 하면, 내 딸을 그 고통에서 건져낼 수 있는데,
왜 저는 침묵만을 지키는 것일까요?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어야만, 제가 그토록 사랑하는 제 딸이
비로소 건강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침묵만을 지키는 것이죠.
물론 훗날 첫째가 다 성장한 후에, 이 사실을 알았다면, 굉장히 억울할 수도 있겠죠.
저에게 이렇게 항의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깊은 뜻이 있었던 거라면,
‘아빠 저에게 그 고난의 의미라도 설명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내가 왜 이 고통을 당해야 되는지, 그 이유라도 알았더라면,
이 고난의 시간을 견뎌내기가 좀 더 쉬웠을 텐데요...
근데 왜 아빠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침묵만을 지키셨나요?’
그러면 이제 이 아기에게 그때 뭐라고 설명을 해줘야 될까요?
이렇게 설명을 하면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내 딸아, 너의 병명은 박테리아성 뇌수막염이란다.
치료의 과정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뇌척수액을 채취해야 돼.
그리고 백혈구 수를 카운트해봐야 된단다.
그래서 네가 지금 고통을 당하고 있는 거야’
이렇게 정확하게 설명을 해주면, 생후 2주 밖에는 되지 않는 아기가
이 설명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해하기는 커녕 개념조차 없습니다.
박테리아가 뭔지, 뇌수막염은 무엇인지, 백혈구는 또 도대체 무엇인지...
제가 설령 의학적인 용어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더 쉽게 설명해 준다 해도,
이 아이가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러면, 고난의 의미를 설명해 주어도 아직 어려서 이해하지 못하는 아기에게
제가 아빠로서 해줄 수 있는 말이 있다면, 그 말이 과연 무엇일까요?
이렇게 말해줄 수는 있겠죠. ‘사랑하는 내 딸아, 아빠가 지금 이 고난의 의미를 설명해 주어도
너는 아직 너무 어려서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거야.
그러나 아빠가 너를 죽을 만큼 사랑하니까... 이 아빠를 믿고 한 번 따라와 주지 않겠니?’
▲마치는 말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인격을 신뢰함으로써,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우리는 너무나 작고 무지해서, 무한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설령 하나님꼐서 설명해 주신다 하여도 말입니다.
여러분이 지나가는 개미를 붙들고, 여러분 자신의 인생계획과 비전에 대해서 설명해 보십시오.
아무리 쉽게 설명해도, 개미가 여러분의 뜻을 다 이해하겠습니까? 불가능하겠죠.
우리는 그 크신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해할 수 없기에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모르는 것 투성입니다.
‘하나님은 그 그때 우리에게 왜 그러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유독 우리 가족에게만 잔인하신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우리에게 재정적인 어려움을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도대체 왜 하나님은 그때 하필이면 그 사람을 만나게 해서
그 사람으로 인하여 오늘날까지도 내가 아파하게 하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병상에 누워있는데
그래서 치료해달라고 그토록 부르짖고 또 부르짖는데
왜 하나님은 치유해 주시지 않는 걸까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허락해 주시는 이유가 대체 무엇입니까?
우리는 다 모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 무한하신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모르는 것이 참 많고 답답할 뿐입니다.
다만 제가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모르는 것을 붙들고 언제까지나 절망과 불평의 자리에 머무르시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을 붙들고 소망과 예배의 자리에 서시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다른 건 다 몰라도 이것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 그리고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어떤 능력입니까?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하는 능력이오
사망권세도 깨뜨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능력 가운데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영원한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지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십자가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심지어는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그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멸시키지 아니하시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심장을 터뜨려서 우리를 대신 살리신 사랑입니다.
우리가 바랄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우리의 일생일대 가장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때, 한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겠죠.
하나님에게는 무한한 능력과 무한한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자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최종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됐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무한하신 능력과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임한 그 어떤 고난과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건져주실 수 있는 충분한 능력과 사랑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나의 삶에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려야 될까요?
‘그러므로 이 고난에도 (내가 모르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목적이 있구나!’
바로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최종 결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왜 이 고난을 허락해주셨는지 모를 때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무한한 능력과 무한한 사랑이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오늘 나에게 하나님이 이 고난을 허락해주셨다면,
그 고난을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겠으나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목적이 있음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그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우리는 삶의 그 어떤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삶의 그 어떤 폭풍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노래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 삶의 고통 가운데 예배 자리를 찾아오신 분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지금 이 시간 우리 모두가 다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서 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십자가에서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은,
추악한 죄인인 피조물을 진멸시킨 것이 아니라
나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목숨값을 치르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전능자이시라면
지금 설령 나의 삶에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인격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믿고 따라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온전히 오늘도 주님만을 신뢰함으로써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고
삶의 그 모든 역경을 믿음으로 뚫고 나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