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19ㅣ의미 가득한 삶 Meaning-ful Life 골1:13~27 Youtube
◈의미 가득한 삶 Meaningful Life 골1:13~27 2026.07.19.
여러분, 요즘 행복하십니까? 어떻게 살면 행복할까요?
‘행복의 조건’ 인류가 오랫동안 물어보고, 질문하고, 실험해온 얘기지만,
지난 30년 동안에 세계 심리학계에서 ‘행복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이 됐습니다.
1998년 마틴 셀리그만이라는 학자가 미국 심리학회 회장이 되면서부터입니다.
▲그간 학자들이 밝힌 행복의 조건은 대략 이렇게 모아집니다.
1) 첫 번째 <몰입>입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놀면 좋고, 즐겁고 일하면 힘들다.. 그랬는데,
연구해보니까 그게 아니에요. 놀아도 지겹고요. 일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거죠.
문제는 몰입입니다. 뭘 하든.. 공부를 하든, 일을 하든, 놀든...
집중해서 시간이 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몰입할 수 있다면,
땀이 송골송골 맺히면서도, 인간은 깊은 만족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2) 두 번째는 <관계>입니다.
‘내가 혼자가 아니다.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고, 사랑받고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이 인간에게 소중합니다.
그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3) 셋째는 <의미>입니다.
‘내가 나만을 위해 있지 않고, 나보다 더 큰 무엇을 위해 기여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어야,
인간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수긍이 가시죠?
사실 우리가 웬만큼.. 특별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라면, 많이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생의 의미가 행복의 필수’라는 것은 알겠는데,
인생의 의미, 일하고 공부하는 의미를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남보다 앞서기 위해서, 보란듯이 살아보기 위해서, 자랑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면,
여러분 열심히 살다가도.. 땀 흘리며 달려가다가도..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 힘이 빠지는 때가 있지요.
그만큼 삶의 의미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인간은 의미를 찾고, 추구하는 존재
이런 고민을 기피한 사람 중에 알베르 까뮈 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는 이렇게 말했죠.
“인간은 본성상, 세상에 합리적이고 목적이 있으며, 분명한 의미가 있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우주는 철저히 무관심하고, 비합리적이며, 어떤 답도 주지 않는 침묵상태에 있다”
의미를 향한 필사적인 갈망,
목숨을 걸고 인간은 의미를 찾아 헤맨다는 거죠.
그런데 우주는 냉담하게 침묵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을 부조리라고 말합니다.
‘냉담한 침묵’이라는 말을 들으면 저는 생각나는 시가 있습니다.
유치환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어떤 이성을 짝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한 시입니다.
나는 열정적으로 이렇게 사랑하는데, 님은 꿈쩍도 하지 않는 냉담한 침묵!
알베르 까뮈는 인간의 삶의 의미를 물었는데,
‘이 세상이 대답하지 않는다..’
‘파도가 끊임없이 친다’ 그러면, 그게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들고,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한시도 쉬지 않고 계속 몰아치는 그 마음!
까뮈는 시지프스의 신화를 얘기했죠.
그리스 신화에 나옵니다.
그가 바위를 굴려서 산 꼭대기에 올려놓으라 해서
천신만고 끝에 몸에 상처가 나고, 온 힘을 다해서 겨우 올려놓으면,
바위가 또 아래로 굴러떨어진다는 거죠.
이게 아마 ‘끊임없는 노동에 시달리는 인간의 모습을’
‘우리 삶이 이제 좀 나아지려나? 이제는 형편이 풀리려나? 이제는 좀 만족이 되려나?’
이렇게 끊임없는 일에 시달리는 인간에 대한 유비(쉽게 말하면 비유)인 것 같아요.
그래서 바위가 굴러떨어지는데,
그 다음에 이 시지프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낙담하지 않고,
또 바위를 끌어올리려고 터벅터벅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그 순간,
‘그 결연한 의지 안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다’ 라고 까뮈는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해요.
‘우리는 시지프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그가 행복했다’가 아니고요. 그렇게 말할 자신은 없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런 노력 자체가 의미 있지 않으면,
인간은 너무 처량하고, 인생은 슬픈 거예요.
▲지난 주에 우리가 시8편을 나누었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온 우주에 가득 차 있나이다’ 라고 노래했던 다윗!
다윗이 원더 wonder를 경험해서,
‘이 세상은 굉장히 원더풀, 경이에 가득 찬 세상이다’ 라는 그의 노래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 사람이요. 진짜 아름다움을 만나면, 그 안에 어떤 일이 생기는가요?
플라톤이 그런 말을 했어요.
‘인간이 아름다움을 경험하면, 그걸로 만족 못한다는 거죠.
더 높은 아름다움, 더 깊은 어떤 의미를 추구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꾸 더 높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그 욕망,
위로 올라가려는 그 상행의 의지가 굉장히 강한데,
그것을 플라톤은 ‘에로스’ 라고 불렀습니다.
에로스는 여러분 성적인 사랑을 말하는 단어 아닌가요? 맞습니다.
같은 단어인데, 플라톤은 조금 다른 의미에서
인간의 굉장히 강한 욕구,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욕구,
한 번 아름다움을 맛보면, 그걸로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에로스(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전부가 아니고요.
인생의 세계에 다른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간이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여러분 인간이, 아름다운 경치, 저녁 노을을 보거나
정말 아름다운 음악을 듣거나 그러면요.
‘야, 좋다. 만족한다’ 라는 것도 있지만,
여러분 그 안에 어떤 숭고함, 숙연함 같은 게 있고요.
모든 종류의 깊은 아름다움에는, 어떤 슬픔 같은 것이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이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을 넘어서서,
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감각을 살려놓는 거예요. 일깨우는 거예요. *영원을 향한 추구
△어거스틴이라는 교부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면서 보니까
인간이 창조될 때에 우리 영혼에 각인된 그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근원적인 기억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걸 ‘그리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좀 전에 읽었던 유치환의 시의 제목도 ‘그리움’이에요.
그걸 ‘에로스’ 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이게 사실은 하나예요. 보세요.
그렇게 어떤 여성을 사랑했는데,
그 여성이 ‘그래요. 우리 같이 살아요’ 해서 오래 같이 살았다면,
그 파도치는 열정이 계속 유지가 될까요? 아니죠.
결국 여러분, ‘에로스’라는 것도,
그 여인을 통해서 그 너머의 무언가를 꿈꾸는 통로가 되는 거예요.
우리 영혼은 본래, 세상의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그런 자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따뜻한 품을 경험하면요.
하나님의 품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누군가 나를 포용해주고 안아주고 하면,
더 진한 그리움과 슬픔이 그 안에 있는 거예요.
진정한 우정을 느껴보면,
그 안에 즐거우면서도, 뭔가 애틋하고 슬픔의 느낌이 들어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죠.
△자크 라캉 이라는 철학자는 ‘아름다움은 실재의 끔찍함에 다가가기 전의 마지막 커턴이다!’
아주 재밌는 말입니다.
‘그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에, 인간은 그 커튼만 벗기면,
바로 다음에 아주 텅 빈, 결핍되어 있는 끔찍한 자아, 공허함을 마주하게 된다’라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지난주에 그런 말 했던 거 기억하십니까?
현대인은 우주를 옛날에는 코스모스라고 했는데, 이게 '조화로운 세계'라는 뜻이죠.
현대인은 코스모스 대신에 스페이스라고 해요.
스페이스.. 아무것도 없어요. 텅 빈 공간이에요.
그러니까 '텅 빈 공간' 우주를 살아가야 되니까,
사람 안에 '텅 빈 자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과학의 한계
여러분, 이 우주 전체에, 이 세계에 아무런 의미가 없고, 그냥 텅 빈 공간이라면, space
여러분, 지구가 어떻게 존재했습니까?
'우연하게 온도와 습도와 태양의 각도가 맞아서 이 정도의 온도가 나와서
생명체가 살고 문명이 발달한 조건을 우연히 갖추어서 이렇게 되었다'
이 스페이스 안에서! 라고 생각한다면, *진화론
인간은 불안하고 허무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또 어떤 일이 생겨서, 태양과 지구의 각도가 조금만 틀어져도,
우리는 태양열에 타죽든지, 얼어죽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겁니다.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우연 가운데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허무하고 끔찍한 공허가
과학주의가 만들어낸 세계관입니다.
과학자들 중에 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는 아닙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라고 하는,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님이 있습니다.
이분이 본래는 옥스퍼드 대학의 분자생물학 박사, 최고의 과학자였어요.
그런데 후에 신학을 합니다.
그러면서 신학적인, 성경적인 생각을 가지고 자연을 연구해보니까, 깜짝 놀랐다는 거예요.
왜 놀랐나? 우주에 Surprised by Meaning 그 안에 의미가 있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놀랐다는 거죠.
‘이 우주 공간 안에, 그냥 우연히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우주 안에
Meaning, 깜짝 놀랄 정도로의 의미가 존재하더라’는 놀라운 고백입니다.
그래서 한국말로도 번역이 됐는데 <우주의 의미를 찾아서>
진화론, 창조론 이런 분야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은, 꼭 읽어볼 만한 아주 좋은 책입니다.
이 책의 주안점은.. 과학에는 how는 있지만 why는 없다는 거죠.
과학은 별이 어떻게 생겼느냐? .. 그건 가스 덩어리다.. 라고 밖에 설명을 못 합니다.
‘DNA가 어떻게 작용하며, 생명이 어떻게 탄생하며, 우주가 얼마나 오래되었느냐?’
과학적으로 설명은 하지만,
‘인간이 왜 아름다움에 감동하는지, 왜 사랑하는지, 왜 우리가 이렇게 안타까운지’,
‘사람은 가지고도 왜 불만족하는지, 인간의 삶의 가치가 어디 있는지?’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과학은 대답할 수 없다는 거죠.
‘커피는 카페인이 아니다’ 기억하십니까?
커피가 카페인이라는 그건 과학적 설명이고요,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커피는.. ‘뭔가 따뜻한 것, 뭔가 편안하고 안정적인 것’입니다.
카페인의 작용은 우리가 얼마든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은, 커피 한 잔이 주는 의미도.. 제대로 가늠하기 힘듭니다.
인간은 내 눈에 보이는 이것을 넘어서는 의미를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호모 시그니피컨스, ‘의미를 찾는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homo erectus significance
◑ 표현적 개인주의가 만연하는 세상 expressive individualism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전3:11 ‘하나님이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하나님이 사람들에게는, 짐승은 아니지만,
여러분 하나님이 이 세상을, 분명한 목적을 갖고, 의미를 갖고 창조하셨고요.
그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 마음을 심어 놓으셨다는 거죠.
그런데 왜 인간은 그 의미를 잃어버렸나, 못 찾고 있는가요?
현대에 와서 이것은 더욱더 심각해졌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아서 헤매고 있습니다.
(*수많은 서구의 청년들이, 동양의 사찰을 찾아서, 승복을 입고 템플 스테이 하고 있습니다.
강원도 절에 가면, 우리나라에도 템플 스테이 하는 서양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찾고싶다는 거죠)
옛날에는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질문하고 표현하는 걸 자꾸 억압했습니다.
아마 여기 계신 연세되신 분들은 그런 기억이 있을지도 몰라요.
‘시집가면 입 꼭 다물고 있어라 3년은 벙어리, 3년은 귀머거리, 3년은 장님으로 살아야 된다’
9년을 그렇게 살고 나면 어떻게 될까요?
보아도 볼 줄 모르고, 내 마음이 어떤 지도 모르고, 자기를 잃어버릴 것 같아요.
지금은 그렇지 않죠. ‘너 자신을 소중히 여겨라 표현해라’
좋아요. 필요합니다. 그래서 억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근데 지금 세계적으로 문제는, 자신을 솔직히 표현하는데.. 갈등이 더 많죠.
더 우울하다고 그러죠.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말은 사회에 편만한데, 너무 많은데,
사람들의 자존감은 과거보다 더 떨어져 있어요.
‘이제는 시집 가서 벙어리, 귀머거리 안 해도 돼. 네 하고 싶은 대로 해!’
근데 이제는 아예 결혼 자체를 안 해요. 뭐가 잘못됐습니까?
표현적 개인주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능적 개인주의하고 좀 다른데
expressive individualism, 개인의 고유한 감정, 직관, 내면의 자아를 나 자신이 발견하고,
이를 외부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삶의 가치로 여기는 태도!
20세기 중반 이후에, 미국 그리고 세계 전체에서 이 말은,
단순히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사고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내 안의 진정한 자아를 찾고,
그 자아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가장 도덕적이고 이상적인 삶이라 믿는 그런 가치관입니다.
▲이걸 적용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요.
자신에 대한 진정성 Authenticity 추구로 나타납니다!
외부의 잣대나 사회적 기대에 나를 맞추는 것을 억압으로 여기고,
대신 나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나답게 사는 것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깁니다.
직업은.. 옛날에는 직업을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거나,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보았는데,
지금은 내가 누구인지, 나의 열정을 표현하고, 자아를 실현하는 무대로 여깁니다.
그래서 내가 사업도 하고, 직장에 갑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합니다.. 라고 말하는 거죠.
그 다음에 관계는, 정서적 만족입니다.
결혼이나 인간관계를.. 의무, 가문, 전통적 역할의 결합으로 보지 않습니다.
서로의 자아 성장을 돕고, 깊은 정서적 만족을 줄 수 있을 때만,
관계가 유효하고 의미가 있다는 거죠.
옛날에는 결혼했으니까 무조건 살았잖아요. 마음에 안 들어도 살았잖아요.
그러니까 지금은 ‘모든 관계가 나에게 만족을 주어야, 그게 의미가 있는’ 거죠.
그래서 결혼이 정말 황폐하고 스트레스가 많으면요.
그 결혼을 유지할 필요를 못 느끼는 거예요.
내 눈에 보기에 우리 선배들 결혼이 그저 그러면, 내가 결혼해야 될 이유를 못 느끼는 거예요.
나의 만족이 중심이 되니까요.
Expressive individualism은 멋진 말이죠.
맞는 것 같다면서 틀린 말인 거예요.
◑자기 직업을 통해, 삶의 의미를 추구하려는 현대인, 그것은 오답
직업.. 과거에는 ‘돈을 번다’ 그렇게만 살았는데, 지금은 ‘자아성취를 한다.’
멋지죠. 멋지게 들리죠.
그런데 여러분 실제로 이런 생각으로 무장하고 직장에 가보세요.
여러분, 지금 젊은이나 연세 드신 분들이나,
직장에 가서 정말 삶의 의미를 느끼고, 보람을 느끼고,
‘나는 딱 이 직장이 맞야, 나는 이 일을 위해 태어났어’
이렇게 직장을 통해 자아성취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팀켈러 목사님이 <일과 영생>이라는 책을 참 잘 쓰셨는데,
(영어 제목 Every Good Endeavor이며, 부제는 Connecting Your Work to God's Work)
그 책은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모두 내가 누구인지를, 직업을 통해서 증명해야 된다’는
끊임없는 요구를 받고 있다는 거죠.
'직업을 통한 자아 성취'가, 잘 될 때보다, 안 될 때가 훨씬 많습니다.
여러분 직장에서 일하면서 '내가 이거 하려고 세상에 태어났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예요. 정말 소수일 거예요.
그래서 심지어 드라마 제목도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에 시달리고 싸우고 있다" 그러잖아요.
특히 한국 사람들은 더 그렇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요즘 드라마 제목에 계속해서 '김부장' 이런 말이 많이 나오는데,
내가 나로 사는 게 아니라, '김부장'으로 사는 거예요. 그게 하나의 문화가 됐습니다.
'이과장, 사장님, 선생님' 이렇게 자기 직업 안에서 나를 성취해야 된다라고 못 박아놓으면,
여러분, 회사 그만두면 아무것도 안 하는 존재가 돼요.
옛날에는 '직장을 잃었다' 그러면 '돈을 못 벌겠네' 했지만,
요즘에는 직장을 잃으면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직업 자체가, 의미를 부여하는 장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표현적 개인주의'는 결국에는, 세상을 도구상자 tool box 로 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경이로운 세상 Wonderful world' 으로 보지 못하는 거죠.
자연을 도구상자로 보죠.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세계'로 자연을 그렇게 봅니다.
'뭘 계발할까, 뭘 이용할 수 있을까?'
세상도 그렇게 봅니다.
심지어 하나님도.. 나의 힐링을 위해서, 내 위로를 위해서, 내 성공을 위해서,
내가 정말 열심히 용기 있게 해야 되는, 동기부여를 위한 도구로 봅니다.
이웃도 도구고요. 인맥의 네트워크죠.
'이 사람 알아 놓으면 도움이 되겠지...'
그러다 보니 나 자신도 도구 중에 하나로 여기게 되는 거죠.
삐끗하면 '나의 쓸모가 없어졌다. 나는 무가치한 존재야'
이렇게 스스로 무의미한 인생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거죠.
여러분, 얼마나 요즘에 사람들이 나 자신을 소중히 여깁니까?
부모들이 그럽니다. 아이들 기 안 죽이려고...
그래서 요즘에 유치원을 보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과장이겠지만,
유치원 선생님들이 이렇게 인터뷰하는 거 보면 기가 막혀요.
'달리기도 시키지 마라. 1, 2, 3등 못하면 얼마나 우리 애가 기가 죽겠냐?'
'받아쓰기도 시키지 마라. 뭐도 하지 마라. 뭐도 하지 마라...'
왜요? 내 아이가 소중하고 특별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부모가 그렇게 이 아이의 소중하고 특별함만 보호하고 자라서
앞으로는 장래에 뭐가 되겠습니까?
직장 가서 '나의 삶의 의미'만 찾으면, 어떻게 함께 일하겠습니까?
왜 우리는 이렇게 외로운가? 왜 이렇게 많이 가지고도 불안한가요?
여러분, 내가 나를 자꾸 증명해야 되는 거예요.
결혼도.. '결혼을 하면 좀 번듯하게 살아야지, 남보란 듯이 살아야지,
자랑할 만큼, 자부할 만큼...
그렇지 못하는 결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니까 결혼을 못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더 나은 삶'에 대한, '의미'에 대한 갈망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에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거예요.
의미를 찾는 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것입니다. 다만 엉뚱한 데서 찾는다는 거죠.
◑하나님을 알 때, 자신의 의미를 찾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골1:26절을 보면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었던 것인데'
만세와 만대, 즉 오랜 세월 동안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싶었지만, 알지 못했던 그 비밀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는 거죠.
골1:27을 함께 읽습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이 비밀은, 역사의 비밀이고, 인생의 비밀이고,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이 포함되어 있는 비밀입니다.
이 비밀은 영어로 말하면 시크릿 secret 이 아니에요.
시크릿은 뭐예요? '쉿! 조용히 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그게 시크릿인데,
여기서 '비밀'은 사실 잘못된 번역이에요. 정확한 번역은 '미스터리, 신비'입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역사의 목적과 인간성의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셨다는 거죠.
골1:15절을 보면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그러니까 이 만물의 의미를 알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된다는 거죠.
그 아래 구절에 보시면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아 Through him,
그를 위하여 for him 창조되었다'
여러분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그리고 그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가?
만물 창조와 존재의 목적이 무엇인가도, 그리스도를 알아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야, 이 세계를 하나님이 지으셨기 때문에,
나도 하나님이 지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는데... 우리 눈 앞에 하나님이 안 보이잖아요.
그래서 눈에 보이게 계시해 주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거죠.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을 알 때 세계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셨잖아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요?
우리가 볼 때, 인간은 참 보잘것없고 하찮은 존재처럼 보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아 인간이 벌레.. 그런 게 아니야.
인간이란 존재가 이렇게 고귀하고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그리스도에서 보여주시는 거죠.
▲이것이 인류 최대의 질문입니다. 미스터리입니다. '나 자신을 아는 것!'
너무 중요한 도전이에요.
그러나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우리가 어떻게 대답하는가요?
예수 안에서 계셨다는 것이죠.
그게 아니면, 예수가 아니면,
우리가 만물을 보아도, 우주를 보아도, 그냥 텅 비었어요. 몰라요. 아무 것도 의미를 몰라요.
그래서 여러분, 인간은 이 텅 빈 우주 속에서
우연히 어느 구석에 툭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목적을 갖고 만드신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지금 이 자리에 우리를 세우신... 그런 중요하고도 존귀한 존재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역사의 완성에 대한 대답이 있고,
그 안에서 참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내 인생이 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대답이 모두 있다는 거죠.
그것이 인간의 "영광의 소망"입니다. 골1:27

▲정리하면요, 인간 안에 어떤 갈망이 있었어요. 오랜 역사에 많은 사람들이 얘기했습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 그리고 상향'
즉 아름다움을 한 번 맛보면, 그걸로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다는 거죠.
'나는 의미 없이 살 수 없다'는 강력한 갈망과 의지가 인간 속에 있습니다.
플라톤은 그것을 '에로스의 상향의지'라고 말했고,
까뮈는 시지프스 신화를 통해서, '저항 냉담한 타인의 저항에서 끝까지 의미를 추구하는 결단'
을 강조했습니다.
어거스틴은요. '아, 이거는 그리움이야.
우리가 본래 창조함을 받은 인간 본연의 그 그리움이 남아있는 거야'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삶의 의미, 인생의 아름다움, 고상함을 본능적으로 추구한다는 거죠.
C S Lewis라는 학자는, 여기에 전적 으로 동의 하면서
결국에는 '참여'
여러분 이게 그리움인데, 무슨 그리움이에요?
돌아가고 싶은 거예요. 참여하고 싶은 거예요.
그 본래 자리에, 나를 위치 시키고 싶은 거죠.
그래서 여러분, 사람이 아름다움을 보면요.
그 아름다운 세계에, 내가 일부가 되고 싶다는 갈망이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 여행할 때 바닷가 가면, 나도 모르게 신발 벗고 바닷가에 발을 밤그잖아요. 그렇죠?
단지 시원해서가 아닙니다. 그 아름다움에, 내가 동화되고 일부가 되고 싶은 본능인 거죠.
우리가 산에 가서 바람을 깊이 들이마시고, 두 팔을 벌려서
그 자연 풍경 속으로 녹아들고 싶어져요.
이렇게 인간 안에는 나도 모르게, 내가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일부로서
참여하고 싶은 본능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죠.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8:1
바로 그 다음에 '사람이 무엇이관대, 인자가 무엇이기에...'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나도 그 아름다운 세계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 피조세계를 그렇게 눈부시게 지으셨다면,
비록 타락하고 망가졌지만, 우리 모두 그 아름다운 피조세계의 일부인 줄 믿습니다.
숨쉬는 모든 순간이 사실은 신비해요. 여러분 숨이 뭐예요? 들숨과 날숨!
여러분 들숨을 통해서, 나는 이 세계를 나에게 환영합니다.
그리고 날숨을 통해서, 이 세계의 나를 표현합니다.
사람이 사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 한국에서 월드컵 할 때, 저는 그때 미국에 있었는데, 2002
사람들이 막 응원하면요. 축구 선수들이 축구하는 그 축구 동작과 사진들 보면,
그 안에 아름다움이 있어요. 그렇죠?
응원하면서 나도 그 일부가 되고 싶은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멋지게 열정적으로 응원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그 안에 녹아들어가서, 나도 그 안에 일부가 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진정한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그리움을 향한 상향욕구' 와 '내재된 그리움'을 일깨울 뿐 아니라,
'내가 그 안에 들어가서 일부로 살고 싶은 강력한 욕망'을 자극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우리를 구원으로 초청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이때 비로소 '원더풀 월드'에 살면 우리가 '미닝풀 라이프'를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Wonderful World. Meaningful Life
먼저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되는 거예요.
오늘 우리가 찬송가를 불렀죠. 이 내용을 잘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알고, 그 아름다움 때문에
내가 존귀함을 알고, 내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내 인생의 의미는 나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나 자신에서 찾으려고 하니까 이게 너무너무 힘든 거예요.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여러분, '누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입니까?
더 쉬운 질문은 이거예요. '누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가 아닙니까?'
다 힘들게 살아요. 그런데 왜 힘듭니까?
일이 많아서 힘듭니까? 아니에요.
여러분, 과거에 우리 어머니들 살림할 때 비하면,
지금은요. 세탁기 있죠. 냉장고 있죠. 에어컨 틀고 살죠. 자동차 타고 다니죠.
다 가지고 있죠. 뭐가 힘들어요?
근데 사람들은 '옛날보다 사는 게 더 힘들다' 그럽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이 말씀은, 텅 빈 우물에서 의미를 길어올리느라 지친
모든 인생을 향한 초대로 볼 수 있습니다.
출근해서 열심히 일하는데, 자녀 키우자고 열심히 달려가는데,
누굴 이겨보자고 지쳐도록 일하는데요. 의미가 없는 기예요.
가끔씩 물을 긷기도 하죠. 여러분 그거 빗물이 고여서 그냥 찰랑찰랑 하는 거예요.
좀 있으면 또다시 말라요.
그래서 이 메마른 바닥에서, '의미'라는 물을 길어 보려고,
좀 더 괜찮은 두레박(스펙)을 소유하면 되겠지...
그게 인간끼리의 피나는 경쟁인 거에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다른 말로, 의미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인생의 의미는 내 안에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프랭크 시나트라 아시죠? 대표곡이 My Way죠.
인생의 말년에 한 남자가, 자기 인생을 회고하면서 부르는 노래 가사죠.
'사람이 뭐라 그래도 나는 내 뜻대로 살았다'
그 노래의 key verse가 그거죠. I did it my way!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았다. 후회 없다'
이 노래가 소위 표현적 개인주의의 주제가 같은 노래예요. expressive individualism
프랭크는 이 노래로 정말 큰 히트를 쳤고, 늘 프랭크 시나트라 하면 이 노래가 따라다니죠.
어르신들이 좋아하시는 분 많을 거예요.
그런데 그 딸이 이렇게 말했어요. 2000년에 BBC와의 인터뷰에서,
'아빠는 이 곡이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노래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싫어했죠.
딱 달라붙어서 벗지 못하는 신발같다고 얘기했어요.'
프랭크 시나트라가 이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자꾸 부르기는 부르는데,
정작 자기는 부르기 싫다는 거예요.
여러분, 인생이 내 마음대로 하는 그 삶에 의미가 있지 않습니다.

다른 마이웨이가 있어요. 윤동주 시인의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지'
비슷하지만 엄청난 차이죠.
내가 가고 싶은 길, MY way, I did it my way가 아니고요.
'나한테 주어진 길!'
저는 이 안에 윤동주의 신앙이 숨어있다고 봅니다.
그렇게 살면요.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자기 결단이에요.
나에게 주어진 길을, 너 억지로 이렇게 살아라고, 하나님이 나를 밀어넣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결단하게 하십니다.
까뮈가 잘 이야기했어요. 자발적 결단으로 걷는 길!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스스로 받아들이신 십자가의 길이죠.
그럴 때에 윤동주가 하는 말이,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여러분 별이 바람에 스치우는 것을 알고 사는 사람, 모르고 사는 사람,
그 삶의 의미와 풍성함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원더풀 월드(하나님이 창조하신 놀라운 세상)에 사는 다윗 같은 사람이죠. 시8:1
그럴 때에 우리가 작은 일을 해도요. meaningful life 를 살아갈 수 있는 거예요.
이 세계 안에 신비가 없다면, 우리 삶에도 결코,
'내가 만들어내야 된다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내가 아무리 똑똑해도'
의미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이 신비로운 아름다운 세계 속에서, 내 삶의 의미를 부여받는 거예요.

▲골로새서 1장의 말씀을 정리하면, 세 가지 키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사함을 얻었다 이게 출발입니다.
예수를 만나고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거예요. 그게 끝이 아니에요.
그다음에 만물 전체를 시야에 넣고
만물 안에서 삶의 의미를 인생의 의미를 역사의 의미를 아는 거예요.
세 번째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18절 공동체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골1:18
죄사함의 초점이 나에게 있어요.
나에게 다가오시고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만나야 돼요.
예수님을 만나야 돼요. 죄사함 받아야 되는 줄 믿습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새 창조, 만물 전체의 의미를 우리가 알아가고요.
그것을 우리의 삶으로 가져오는 것은 공동체입니다.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내 삶에 허락하신 나에게 주어주신 이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현실화해 나가는 겁니다.
또 하나 중요한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엡5:31~33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이 비밀, 미스테리(신비) !
여러분, 골로새서에서 우주 전체의 의미, 역사 전체의 의미,
만대로부터 만세로 감추어졌던 역사의 엄청난 비밀을, 많은 그 미스테리를,
결혼에 대해서 쓰고 있어요. 가정에 대해서 쓰고 있어요. 놀랍지 않습니까?
이 신학적 폭 그렇죠. 온 우주와 역사 전체의 의미,
태고 쪽부터 역사 끝날까지의 그 전체 의미를 말하는 이 미스터리가
교회 안에서, 가정 안에서 현실화된다는 거죠.
여러분 이 세계가, 온 우주가 의미로 충만하다면요.
당연히 우리 가정도, 우리 교회도, 그 안에 의미 있는 공동체로 들어있는 줄 믿습니다.
특별히 나를 향한 의미는요. 집약적으로...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내가 함께 살아가는 이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내 인생의 의미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떠나서는 우리는 어떤 세상에 대한 기여도 할 수 없고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습니다.
'표현적 개인주의', 한국에도 그 세계에 들어왔어요.
'내 인생은 나의 것이야'
때로는 엄마로서 평생 살아가는데, '그게 아니고, 나 자신을 찾아야 돼'
맞는 말이지만, 틀린 말이에요.
여러분, 엄마로서의 나를 제외하고, 누구의 아내로서의 나를 잘라내고,
누구의 친구, 누구의 딸로서의 나를 다 잘라내고, OO교회 권사, 집사로서의 나를 잘라내고,
그러면 뭐가 남겠습니까? 앙상한 뼈대밖에 남지 않는 거예요.
여러분 내 인생의 의미는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 마음대로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길, 그것을 헤아리고
그것을 나가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균형은 필요합니다. 외부에서 주어진 엄마, 권사, 딸,
거기에 너무 눌려서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관계의 총체 안에, 역사의 의미가 있고
이 가정 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심어주신 인생의 가장 깊은 신비가 있습니다.
그걸 알아야 되는 거예요.
내가 나에게 주어진 길이 뭡니까? 내가 살아가는 바로 이 자리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겁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텅 빈 세상이 아니고요. 경이 가득한, 의미 가득한 세상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알 때에, 우리의 매일매일의 삶, 특별하게 위대하지 않아도,
특별하게 짜릿하지 않아도요. 매일매일의 삶이 원더풀한 세상을 살아가는
미닝풀한 삶이 될 줄 믿습니다.
이 경이 가득한 아름다운 세상에서 매일매일의 삶 주님과 동행하면서
그 의미 가운데 충만함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