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관련글 모음
※여러 설교에 단편적으로 들어 있는 '중독' 관련 조각글을 한데 모아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취미생활 수준의 신앙으로는, 이 세상을 버텨낼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유혹을 이겨낼 재간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주는 즐거움에 탐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 이렇게 중독이 많잖아요. '중독 사회'잖아요.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는 기쁨을 주지 않아요. 거짓 친밀감이에요. 거짓 사랑이에요.
우리는 1급수의 영적 물줄기를 찾아내야 돼요. 그게 뭐예요?
주님과 나와의 친밀한 관계예요. 그냥 교회만 왔다갔다 다니는 수준으로는 안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과 살아있는 영적 교제가 갈수록 깊어져 가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서 주는 기쁨과 만족, 그 수준까지 가야 한다는 거예요.
부부관계 안의 거짓된 친밀감으로는, 세상의 유혹을 버텨내기 어려워요.
다른 곳에서 친밀감을 누리려고 한다면, 그 부부의 관계는 깨어지고 마는 거죠.
여러분 그리스도는 ’밭에 감춰진 보화‘와 같습니다. 숨겨져 있어요.
그냥 교회생활만 하는 것을 신앙의 전부라고 여기지 마십시오.
그분 자체, 그분과의 교제, 그분과의 친밀함... 그 친밀함이 더 깊어져 가야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형식적인 기도 생활을 중단하십시오. 공허한 예배를 그만 드리십시오.
이름만 있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그만하십시오.
그 정도로는 우리를 끌어당기는 세상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일 중독자는 성과주의자
여러분 쉬지 않고 일만 하는 사람을 가르쳐서 우리는 성과주의자라고 얘기합니다.
성과주의자가 되면 잔인해집니다. 애굽의 바로왕이 그렇습니다.
히브리인들에 대한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서 압력을 가합니다.
더 많은 걸 생산해내라고 채찍질합니다. 생산성을 높여야 하고, 할당량을 채워야 합니다.
그런 시스템에는 자비가 없습니다. 언제나 긴장감이 있고 그곳은 관계가 깨어져 있습니다.
일에 빠진 사람들은 관계의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관계를 회피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채찍질하는 사람은 일종독자라고 부릅니다.
일종독이란 일에 갇힌 상태를 말합니다. 일에 포로가 된 사람들.
내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나를 통제합니다. 그리고 일을 스스로 멈출 수 없습니다.
멈추는 순간 불안해져요. 중독과 불안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불안사회로 가고 있습니다. 한 개인의 불안으로 끝나지 않아요.
시대 전체를 뒤덮고 있는 불안, 그래서 ‘불안사회’라고 해요.
불안할 때 인간은 우상을 만듭니다. 하나님을 대신할 대체품을 찾습니다.
일만 하면, 결국 어느 순간 멈추게 됩니다.
생산을 추구하던 사람은 소비되어지고, 결국은 자신의 삶이 망가지게 되는 겁니다.
여인은 얼굴이 검게 되도록 일을 했습니다. 오빠들의 학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무거운 멍에를 던져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지금 쉴 곳을 찾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안식하시는 분입니다.
여섯째 날까지 일을 하고, 일곱 번째 날을 쉬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쉴 곳을 제공하십니다. 쉬어야 할 때 쉬는 게, 영성이에요.
멈춰야 할 때 멈출 줄 아는 것이 믿음이에요.
지칠 대로 지쳐 쓰러져서 쉬는 것은 쉬는 게 아니에요. 그건 요양이에요.
그것은 회복이기보다는 치료에 가까워요.
그래서 지치기 전에 쉬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등산이나 하이킹을 할 때도, 지치기 전에 쉬는 것이 지혜입니다.
일단 지치고 나서 쉬면, 회복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거든요.
식사도 마찬가지죠. 배고파서 허기 지기 전에, 가볍게 먹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여러분, 성경적 쉼은 다릅니다. 쉼을 통하여 영혼의 소생을 얻는 것입니다.
쉼은 새 힘을 얻게합니다. 그 새 힘은 재창조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에요.
♣프랑스에 신부이면서 샹송 가수로 유명한 분이 있었습니다.
바쁜 연주 일정과 심한 불면증 때문에 술을 가까이 했다가 알코올중독자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우여곡절 끝에 신부로서 또 인기 가수로서 자존심을 접고
중독자 모임에 참석하여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중독에서 헤어나자 다른 중독자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중독자 한 사람을 자기 방에 데려다 사흘 동안 함께 머물면서
자기의 경험을 그에게 들려주며 회유하였습니다.
그의 그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그 중독자가 중독자 모임에 나가기로 마음을 정하자,
그는 그 중독자를 자기 집에 데려다 주고 돌아오면서, 차 안에서 혼자 말합니다.
“나는 보잘것없는 인간입니다. 인류가 범하는 죄에 내던져진 인간입니다.
그런데 보잘것없는 나라는 이 인간은,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소경을 보게 하고,
절름발이를 걷게 하고, 나병환자를 깨끗이 낫게 하는 그 인간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 말은 물론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는 말이지만,
술을 끊은 알코올중독자에게도 조금은 적용되는 말입니다.”
인간의 불행을 퇴치하려는, 나의 노력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신다는 고백입니다.
♣스마트폰에 중독되어, 그 기기의 노예로 살아가는 현대인
아마 마귀가 오늘날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속박은 이놈이 아닐까 싶습니다.
뭐 대단한 거 동원할 필요도 없고요. 이거 하나만 잘 이용하면
수많은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 SNS, 게임, 각종 미디어를 통해서 우리의 자유를, 생각할 수 있는 범위와 능력을
제한하고 의존성을 갖게 해서, 그것과 분리되면 불안함을 느끼게 합니다.
처음에는 재미나 취미로 시작하던 것이, 나중에는 벗어날 수 없는 족쇄가 됩니다.
그래서 하기 싫어도 멈출 수 없고, 피곤해도 계속하게 되는 노예가 되죠.
노예는 자기가 하기 싫어도, 그냥 주인이 하라고 하면 멈출 수 없이 해야 되고,
피곤해도 하라 그러면 해야 되듯이... 이게 비슷한 것 같아요.
이런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이 시대의 각종 중독들은,
우리가 하기 싫어도, 피곤해도 멈춰지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어쩌면 이거 하나만 통해서 역사해도 충분할 것 같아요.
대부분의 경우에 쾌락은, 마치 자유인 것처럼 위장해서 다가옵니다.
이 부분을 잘 보셔야 돼요. 쾌락은 자유를 주는 것처럼 다가와요.
돈을 소유하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술을 마시면 평상시엔 하지 못하던 말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 같고,
마약은 더 심각하죠. 현실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방되는 느낌을 줍니다.
이 도파민을 통해서, 자유에 이른 듯한 착각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마귀의 전략은 항상 동일한데, 그것은 속이는 거예요. 속이는 겁니다.
할례를 받으면 구원에 이른다고 했지만, 사실은 속박에 이르고요.
공산주의 혁명을 하면 자유가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더 큰 정치적 속박을 받게 됐습니다.
쾌락을 즐기면 자유롭다고 하지만, 사실은 개인적인 속박에 이르게 됩니다. 속임수이지요.
마치 자유에 이를 것처럼 말하지만, 막상 발을 들여놓으면 꼼짝없이 노예가 됩니다.
할례도 그렇고, 혁명도 그렇고, 쾌락도 그렇고... 모양은 달라도 영적인 본질은 똑같아요.
왜냐하면 그것은 그 뒤에서 마귀가 하는 역사이기 때문에 그래요.
마귀는 자유를 줄 것처럼 속이면서 다가오지만, 그것을 덥석 물면
자유가 아니고 속박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또 다른 전략이 있는데, 이것도 역시 속임수 한 종류인데 또 다른 속임수는 뭐냐면
<즉각적인 만족의 노예>로 만드는 거예요.
즉각적인 만족... 미디어 중독, 알코올 중독, 약물, 도파민에 이르기까지
노예가 되는 과정을 보면 대부분 뭐가 있냐면 즉각적인 만족이 있어요.
그러니까 중독은 도파민이 순간적으로 폭발되고 난 후에,
더 큰 자극을 요구하는 이런 패턴을 가지는데,
그러니까 도파민이 확 하고 올라왔어요. 술을 마시거나, 게임을 하거나 뭐를 해가지고서
이 도파민이 확 하고 올라오면, 그 다음에 우리 뇌에서 무슨 반응이 일어나냐 하면,
그거보다 더 큰 도파민을 요구해요. 그런 구조를 갖고 있는데,
마귀는 이 순간적 쾌락이 장기적인 중독으로 이어지는... 이 뇌구조를 정확히 알고 있어요.
우리 안에 있는 뇌구조를 정확히 알고 있어서, 순간적인 쾌락이 장기적인 속박으로 이어지는..
그러니까 이 쾌락을 한 번, 두 번 덥석 물게 되면,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고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여러분, 긴 시간에 걸쳐서 얻어지는 만족은, 대부분 우리를 노예로 만들지 않아요.
잘 생각해 보세요. 긴 시간에 걸쳐서 얻어지는 것들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성실한 노력을 통해서 얻어진 실력, 이런 게 우리를 노예로 만들지 않죠.
또 꾸준함을 통해서 얻은 평판, 오랜 세월을 통해서 만들어진 우정,
이렇게 긴 시간의 투자와 노력으로 얻어진 만족들은.. 대부분 우리를 속박하지 않아요.
그런데 반대로 짧은 시간에 주어지는 만족들 있죠. '짧은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주로 어떤 자극을 통해서 확 하고 도파민이 올라오는 건데,
그거는 거의 대부분 중독으로 인도해요. 거의 대부분 중독으로 인도합니다.
왜 그러냐면 하나님의 창조섭리가 그렇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창조섭리는 '심은 대로 거두는' 거예요. 그게 창조섭리입니다.
그러니까 이 열매는 여러분, 즉각 맺히지 않는단 말이에요.
항상 심고 나면, 그 열매가 있을 때까지 긴 시간이 요구되죠.
그러니까 그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방식이에요.
사람의 정상적인 삶은 어떻게 이루어지도록 만드셨냐 하면, 시간이 걸리도록 만드셨어요.
뭔가를 심어놓으면 한참 시간이 걸리고, 땀을 흘리고 그랬을 때,
거기에 합당한 열매를 얻고, 그럼 이것은 우리 삶에 유익하고,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하는 복이 돼요.
그런데 타락한 인간의 욕심은 뭐냐 하면, 이걸 전부 다 스킵하고 (건너뛰고) 싶어요.
이 긴 시간 동안 들어가는 인내와 노력.. 그거는 그냥 스킵하고,
딱 씨앗을 뿌리면 바로 먹고 싶어 하죠.
딱 뿌리면 바로 먹고 싶어 하는데, 이게 하나님의 성품이랑 다르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런 것들은 거의 대부분 문제를 일으킵니다. 거의 대부분 우리를 속박해요.
뭐 다 라고 말할 수는 없는데, 대부분 그래요.
그래서 이 짧은 시간에 즉각적으로 주어지는 만족에 대해서 조심하십시오.
즉각적으로 주어지는 만족은, 대부분 우리를 중독에 이르게 하고, 자유를 속박합니다.
그래서 원수마귀는 즉각적인 만족을 제시하면서,
이 창조의 법칙을 무력화시키고,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어요. 중독에 빠지게 하죠.
광야의 금송아지는 즉각적인 만족을 위한 것이었지만,
가나안 땅의 정복은 장기적인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지죠.
또 즉각적인 쾌락을 쫓은 결과는 다윗에게 밧세바 사건을 일으켰지만,
장기적인 충성은 다윗을 왕으로 만들어줬습니다.
즉시 왕이 되었던 사울은 실패했지만,
오랜 시간을 걸쳐 왕위에 오른 다윗은 성공했습니다.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세 가지로 시험하는데, 그 시험의 내용도 뭐예요?
즉시 하라는 거잖아요. 모든 과정을 다 스킵하고, 즉시 하라는...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즉시 하라고 하는 마귀의 그 유혹을 거절하시고,
십자가에 오르시는 길고 먼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성경의 예를 보십시오. 즉각적인 것은 대부분 사탄의 유혹이었어요.
즉각적인 것은 대부분 사탄의 유혹이었고, 장기적인 것은 대부분 하나님의 방식이었습니다.
우리의 자유를 속박하는 중독들은.. 대부분 인스턴트(즉각, 당장) 적인 것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여기 ‘시간의 신학’이 있어요.
즉각적인 것은 대부분 자유를 속박하고,
장기적인 것은 대부분 자유에 이르게 한다는 거예요.
100%는 아니고 예외적인 게 조금씩은 있습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 그래요.
거의 대부분 즉각적인 것은 자유를 속박하고요. 장기적인 것은 자유에 이르게 합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하나님의 원리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같이 볼까요?
갈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그래서 영성은, 오래 기다리는 것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짧은 자극이나 즉각적인 만족을 주는 것들을 경계하십시오.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갑니다.
긴 호흡으로 바라보고, 긴 호흡으로 살아야 됩니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뭔가가 없다고, 너무 불안해하지 마세요.
그 불안을 틈타서 우리 자유를 빼앗아갑니다.
그 불안이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 시발점이고, 촉진제가 될 수 있어요.
오늘 열매가 없더라도, 내일은 열매가 달릴 수 있어요. 긴 호흡을 가지고 재촉하지 마세요.
막 이렇게 조바심 갖지 마세요. 당장 뭐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고,
좀 긴 호흡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면 반드시 될 거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면, 오늘은 안 돼도 내일은 될 거고, 내일은 안 돼도 모레는 될 거고..’
그게 믿음이죠.
그러니까 이 기다림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하고 아주 깊게 연결되어 있어요.
믿음이 있는 사람만 기다려요.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하실 거야. 오늘은 안 해도 내일은 하실 거고, 내일이 아니면 모레 하실 거고,
반드시 하실 거야’ 이게 이제 믿음이잖아요.
그래서 믿음과 기다림은, 이게 아주 뗄래야 뗄 수 없는 그런 하나의 패키지입니다.
그래서 재촉하지 마세요. 재촉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불안 때문에 그러는데,
불안이라고 하는 게 본질이 불신이잖아요.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음(불신)이, 불안으로 나타나고,
그 불안이 나를 재촉하게 만들고, 그 재촉하는 것이 나를 속박하게 돼요.
영성은 여러분, 오래 기다리는 겁니다. 오래 기다릴 수 있는 거예요.
오직 인내만이 영적인 열매를 얻게 합니다. 긴 호흡으로 사세요.
너무 그렇게 막 이렇게 촉박하게 살지 마시고요. 긴 호흡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성경은 ‘기다림의 영성’을 얘기합니다...
♣A성도님이 이런 간증을 하신 적이 있다.
그분은 외국에서 공부하시고, 한국에서 좋은 대학에 교수로 임용되어서,
직장생활을 잘 하고 계셨다. 남들이 보기에는 부러울 것 없는 훌륭한 분이었지만,
문제는 알코올중독자였다.
그는 술을 계속 마셔야만 살 수 있었다.
술을 마셔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계속 마신다.
그래서 아침에 깨보면, 어떤 날은 식당에 혼자 누워있었다.
직장 동료들과 같이 회식하다가, 거기서 잠들어서, 거기에 자기를 놓고 간 것이다.
그러니 가정에도, 자녀들에게 많은 피해가 있었다.
그는 스스로 술을 끊어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약물치료도 받아보고, 정신과치료도 받아보고..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면 될 줄 알고, 열심히 교회봉사도 해 보고..
그런데도 거기서 도저히 빠져 나올수 없었다고 한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알코올 중독은, 죽어야만 빠져나온다’고 한다. 사실이 그렇다.
그런데 어떻게 그 분이 자유케 되었는가 하면, 지금부터 약 10년 전의 일이다.
우리 교회가, 그 분이 살던 지역에서 ‘십자가 성령 컨퍼런스’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당시까지 그 분이 거기 사는지도 몰랐다.
다만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그 지역에서 컨퍼런스를 열게 되었다.
그 분의 아내가,
그 지역에서 집회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남편을 거기에 모시고 왔다.
아내는 기도로 준비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날 저녁부터 집회가 시작되면, 남편을 데려가려고 했는데,
그 전날에도, 남편은 술 마시고, 여관에서 쓰러져 자다가, 아침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아내가 우선 일단 집에서 잠을 재우고,
자고 깨어난 다음에, 저녁에 남편을 모시고 왔다.
집회 첫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A성도님은, 자기 신앙이 완전히 껍데기뿐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기는, 하나님과 개인적 교제는 전혀 없이,
종교적/형식적 몇 가지 의식에 참석하는 것에 불과하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지식도 없이, 교리적 지식만 몇 가지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동참하는 것에는.. 아예 개념도 없었고,
그저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이, 신앙생활 잘 하는 것인 줄로..
자기 신앙이 완전히 껍데기뿐인 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비로소 보게 되었다.
하나님이 그에게 적나라하게 보이신 것이다.
그날 집회 가운데, 우리 팀들이, 여러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가운데,
그 분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다.
그 분은, 그 날 이후로 지금까지, 술 한 모금 안 마셨다고 한다.
그 후에 그 분은, 자기 자녀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고,
그 가정도 너무나 놀랍게 회복되었다.
이런 일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절대로!
사람만 많이 모인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노력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이 하셔야만 가능한 일이다.
♣제가 아는 형제가 한 명 있는데,
그는 한 때, 인터넷 음란 중독에 빠져서 매우 괴로워하고, 힘들어했다.
더욱이 자기가 너무나 사랑스럽고 정결한 자매를 만났는데,
자기가 그런 음란 중독에 걸린 것이, 양심에 무척 괴롭다는 것이었다.
‘나같이 더럽고 음란한 것이, 어떻게 그 정결한 자매에게 가서 교제해 주세요’
말할 수 있느냐는 양심의 가책이었다.
‘끊으려고, 끊으려고, 결심하는데도.. 되지 않더라’는 솔직한 고민이었다.
그리고 밤새워 갈등하고, 힘들어한다고 했다.
끊으려는 의지와, 유혹하는 유혹의 갈등 사이에서. 그는 번민했던 것이다.
그는 목사님을 찾아가서, 자기 사정을 다 털어놓고 얘기했다.
그 목사님은 ‘끊으려고 하는 것보다, 그 자매를 더 사랑해 보라’고 조언해 주었다.
그 자매에게 꽃을 사다주고,
노래를 작사 작곡해서 불러주고,
기타 치며 노래도 불러주고,
퇴근시간에 길 모퉁이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나 동행해주고..
네가 그 자매를 더욱 더 열렬히 사랑할 때, 그보다 못한 것들은 다 잊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매에 대한 사랑은.. 점점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우리가 주님을 뜨겁게, 열렬히 나의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할 때,
주님보다 못한 세상 것들에 대한 사랑과 열망은.. 접을 수 있다고.. 조언해 주셨다.
일년 후에, 제가 그 친구를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일년 전에, 그가 고민하던 중독 문제가, 다 해결되었는지.. 물어보았다.
신기하게 친구는 ‘자기가 끊은’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자매를 미치게 사랑하는 사이에, 다른 잡다한 것이 다 끊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통해, 이제는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일에
몰두해야 한다는, 그런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제가 율법과 복음의 차이점을 잠깐 설명 드린 것이다.
율법은.. 자기 의지로 뭘 끊고, 안 해 보려고.. 안간 힘을 쓰는 것이라면,
복음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열렬히 사랑하기에.. 내가 점점 변화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교육은
‘똑바로 살아라, 착하게 살아라, 네가 네 인생의 주인이니까, 책임감 있게 살아라!
네가 잘 해야돼, 그렇지 않으면 실패해! 내 팽개침을 당해!’ 라고 가르치지만,
그러나 복음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대신에 이렇게 말씀한다.
‘넌 할래야 할 수 없어! 안 돼잖아!
하지만 네 대신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을, 믿음으로 한 번 바라봐!’ 5~10~20분 길게.
2천년 전 그 분의 죽음이, 나에게 실상으로 다가올 때,
내 가슴은 터질 수밖에 없다.
♣성공의 우상에 중독된 사람
그동안 우리가 배워온 것 역시 ‘성공하라’는 것 아니었나요?
성공이 우상인 것은,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공에 중독되면 계속해서 더 많은 것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고, 모함하고,
피해를 주는 일조차 서슴지 않고 합니다.
교회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가정을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나라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자신만 모를 뿐이지 지켜보는 모든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열망에 도취해 있는지를 말입니다.
‘중독’의 증상은 자신이 제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중독자는 늘 중독 증상에 목말라하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중독의 열망을 채우려고 하지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성공을 추구하는 그것도 잘못된 것이지만,
더욱이 성공에 중독되어, 삶의 우상이 되어버리는 것은, 더 큰 잘못입니다.
‘성공’이라는 우상에 휩싸이는 순간, 잠시의 휴식도 공포의 순간이 되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누군가에게 내 성공이 잊혀질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성공을 따라가는 순간 하나님과의 친밀함의 관계가 깨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겨지던 것이 어느 순간
자신의 힘으로 증명해 보아야 하는 것으로 변해버립니다.
‘성공’이라는 우상에 사로잡히면, 자꾸 외부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려 합니다.
그러나 남의 평가에 좌우되기 시작하면 늘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전도서 2장 10~11절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솔로몬의 고백이 있습니다.
10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11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솔로몬은 성공을 향해 달려가면 갈수록,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죠.
그가 많은 것을 얻으면 얻을수록 헛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무리 채워도 채어지지 않는 공허함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성공’이라는 우상에 사로잡히면 소중한 관계들을 희생하게 됩니다.
물론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변명할지 모르지만,
끊임없이 성공을 향해 달려가며 다른 사람을 희생시킵니다. (이용합니다)
어쩌면 성공이라는 우상에 사로잡히는 순간 그렇게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라도 깨어진 관계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성공이라는 우상에 사로잡힐 때 나타나는 또 다른 현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에 목을 맨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했어도,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공허해진다는 것이죠.
이 우상에 사로잡히면 자기 일을 마치 자신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에게서 일이 전부가 됩니다. 누군가 자기 일을 비난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면
자신을 버리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평생을 일했던 직장에서 쫓겨나는 순간에 힘들지만,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 누군가에게 버림을 받으며 자신을 포기하는 사람들,
자신 스스로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생각하지 못하게 되죠.
이건 목회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인데, 목회하는 교회에서
아무리 성도가 늘어나도 결코 만족스러워하지 못하게 되는 현상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목회의 목적이 그리스도께 사람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고,
자신이 세워놓은 기록을 넘어서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죠.
이 사람의 목표는 늘 ‘한 단계’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이죠.
그래서 끊임없이 만족이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성공이라는 우상에 사로잡히면, 항상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성공을 기뻐하지 못하죠. 오히려 다른 사람의 단점을 드러내고
비웃는 사이에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라는 기분이 들게 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을 비웃으며
그 사람에 대하여 은근히 질투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남을 비난하며 은근히 자신을 부풀리고 있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
그런 생각을 해보셨나요?
우리가 이루어 놓은 성공이, 최악의 실패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마태복음 16장 26절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우리 삶의 가치는 자신이 세상에서 성취한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에서 시작된다는 것 말입니다.
우리 자신은 우리가 이루어 놓은 일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능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남의 말에 의해 좌우되는 그런 존재 이상의 것입니다.
우리의 명함에 새겨진 직책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우리가 사는 집의 크기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시편 139편 14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모든 중독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귀신이 들려서 중독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 ‘축귀 사역’을 논하면,
일부 신자들은,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봅니다. 부정적인 시각을 가집니다.
그러나 성경을 펴고 보십시오. 축귀 사역은 예수님이 강조하신 사역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대부분 기독교계는, 축귀 사역에 관한 데릭 프린스의 메시지를
귀담아 듣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Derek Prince
그렇지만 감사하게도, 데렉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자기 사명을 감당해 나갔습니다.
데릭은, 축귀 사역에 관해서, 성경을 통해, 그 신학적 정당성을 계속 증명해 나가면서,
한편으로는 실제 현실에 있어서, 귀신에 사로잡혀 있었다가,
풀려나서 자유롭게 된 신자들의 삶을 예로 들면서..
그는 축귀사역이 꼭 필요하다며.. 꿋꿋이 계속해 나갔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치유함을 받으면,
그들의 삶은 완전히 드라마틱하게 변하게 됩니다.
그의 가정 식구들까지, 싹 다 구원 받는 것을 봅니다.
꼭 귀신에 완전히 점령된 사람뿐만 아니라,
어떤 중증 중독에 빠진 사람, 우울증, (일부) 질병, 습관적인 죄..
사람들은 그 사로잡힘에서 다 자유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데릭 프린스의 메시지나 집회를 통해서,
그렇게 자유함 받는 역사들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데릭 프린스의 사역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데릭은 아주 심하게 비난을 받았으며, 때때로 (교계로부터) 제지를 당했는데,
어쩌면 이것은, 참 복음사역자들이 마땅히 감당해야 되는 핍박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데릭 프린스는, 그 모든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가 주님께 받은 축귀 사역의 사명을, 계속 꿋꿋이 감당해 나갔습니다.
데렉의 축귀사역의 열매를, 한 가지만 들어보겠습니다.
공산주의가 몰락하기 전에, 헝가리에서 어떤 한 여인은
그저 영어를 배울 목적으로, 자기 집에 굴러다니던
데렉 프린스의 영어설교 카세트테이프를 들어보았습니다.
당시에 그녀는 아직 크리스천도 아니었고, 크리스천이 될 생각도 없었던 때였습니다.
다만 정통 영국영어 발음을 배우기 위해서, 그녀는 카세트를 들었을 뿐이었습니다.
마침 그 카세트테이프 설교의 주제는, ‘더러운 귀신으로부터 자유하기’ 이었습니다.
그 카세트테이프 설교가 다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면서, 바로 그 자리에서 귀신으로부터 자유함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카세트테이프를 듣게 했고, 남편도 그 즉시로 구원 받았습니다.
그 부부는, 이제 이웃들을 자기 집에 초대해서, 그 카세트테이프를 듣게 했습니다.
그 데릭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도, 다 귀신이 떠나가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당시는 아직 공산주의 아래에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바로 그 때로부터, 거기서, 지하 교회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아주 작은 숫자의 무리들이었지만,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이 지하교회가 자유롭게 세워졌을 때,
이 교회는 나중에 1만 명이나 모이는, 큰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이제는, 헝가리에서 오순절 계열의 교회 중에서는, 제일 큰 교회가 되었습니다.
위의 이런 간증은, 데릭의 사역에 있어서, 일상적인 것이었습니다.
늘 일어나는 일이니, 특별할 게 없다는 뜻입니다.
20년 전에, Brighton, England 에서 (축귀 사역과 능력전도에 대한)
초교파적 컨퍼런스가 있었습니다.
(이 글의 필자이며, 또한 데릭과 같은 능력전도자인) 저 카린은
거기서 아프리카, 아시아, 태평양 섬나라 등지에서 온 수많은 목회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모두 데릭 프린스로부터, 배웠거나, 능력을 전가 받은 사역자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뉴질랜드는,
데릭 프린스의 사역이, 곳곳에 침투했습니다.
나라의 구석구석 전 지역에서,
데릭 프린스의 능력 전도 사역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제 (카린) 개인적 경험으로 볼 때도,
특히 마약 중독, 자살 기도, 동성연애, 우울증, 그 외 강한 집착증 등,
이런 것들에 한 번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시달리는 사람은,
귀신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일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또한 이런 불쌍한 사람들은, 가정이나 사회에서도 거의 버림을 받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해, 그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파편’을 꺼집어내야 합니다. 귀신의 역사를 제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모든 케이스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그렇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신약성경에서 ‘영들을 분변하다 discerning of spirits’는
말에서 사용된 헬라어가
사실은 ‘고대 의학 용어’였습니다.
고전12:10절의 ‘분변하다’는 말이, ‘그 표면을 잘라서, 그 속을 들여다본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영적인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디아크리시스 discern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저 표피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깊이 감추어진, 근본 원인을 찾는 것이요, 찾았으면 제거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사역은, 인간적 힘과 능력으로는 불가능하고,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받아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장기적인 어떤 문제들로,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문제들은, 어쩌면 이전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일 수도 있고,
또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음 세대로 물려줄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우울증, (일부) 고질적 질병, 폭발적인 분노, 알코올 중독, 습관적 거짓말,
남을 자꾸 지배하려는 욕망, 상황 조작 manipulation,
그리고 수많은 다른 파괴적인 습관과, 또 그와 비슷한 문제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이러한 문제들의 일부는, 조상적부터 내려온 것이라서
도저히 자기가 피할 수 없는, 즉 고치기 어려운 습관적 문제들이며,
그래서 자기가, 이런 문제들로부터 절대로 자유할 수 있다는 생각을
스스로 포기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거기에 그냥 체념하고, 굴복해서 삽니다.
귀신의 역사와, (내게 역사하는) 저주는
그 속성이 영적 영향력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단지 영적인 방법으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런 영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어떤 사람에게 문제가 발생하면,
의학적 치료, 정신치료 상담사, 또는 다른 형태의 의학적 약물 치료 등으로,
증상을 완화하려 하지만, 그러한 시도들은, 문제의 근원을 터치할 수 없습니다.
문제의 원인은, 더 깊은, 영적인데 있기 때문입니다. 붕대 감는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들은, 오직 성령의 사역에 의해, 해결되고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정신과적 치료와, 성령의 치료를 병행하시면 되겠습니다.)
♣이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히12:1)을 생각할 때면
저 데이빗 윌커슨은, 이전에 마약과 알코올중독자였고,
창녀였고 동성애자였으며, 갱단 원이었고 마약 판매원이었고, 살인자였으며
아내를 구타하는 자들, 이단자들과 포르노 중독자들-사회가 포기했던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봅니다.
그들은 모두 회개했고 예수님의 팔에 안겨 죽었으며,
이제는 사랑의 아버지의 자비와 인내에 대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모든 자들이, 예수님께서 그분의 자비를 그들이 받기 전에는
심판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하나같이 증거하며 말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파멸시킬 수 있는 심판들을 미루셨습니다.
그분은 어떤 사람도 희망 없거나 절망적인 상태로 잃어버린 바 되는 것을
정말로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진노를 참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대한 소망의 마음을 변치 않고 계십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행복이라는 병의 중독자들”이라고
유명한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e) 박사는 말했습니다.
이러한 행복이라는 병에 중독이 되었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현대인들은 ‘공허함(emptiness)’라는
더 심각한 병에 걸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난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인생의 귀한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참된 경건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난의 삶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에 동참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은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높아지려 하는 삶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하지만 낮아지려 할 때에는 행복이 주어집니다.
이 소박한 모습이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인정 중독 또는 ‘페이버 favor 욕구’ *인정 받고자 하는 중독
자유를 구속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에요.
하고 싶은 일도.. 해야 되는 일도.. 사람들 눈치 때문에 하지 못하고 주저해요. 노예죠.
사람의 눈치를 보고.. 인정에 목을 매는 모든 것은... ‘페이버 favor 욕구’라고 했죠.
누군가의 기쁨이 되고 싶고, 인정을 받고 싶은... 그것은 타락한 욕구입니다.
사람의 인정이나 칭찬도.. 다른 쾌락만큼이나 우리 안에 도파민을 일으킵니다.
그런 면에서 이게 중독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중독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게임 중독, 알코올 중독과 사람 중독, 인정 중독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 봉사를 지나치게 열심히 하는 교인들 중에 ‘인정 중독’에 빠져서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남편이나 자녀들은 거의 관심 끄고, 주중에도 계속 교회 일에만 매달리는 거죠.
일부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회자가 말려줘야 됩니다.
그것도 우리 안에 있는 이 좋은 기분, 뿌듯한 기분... 도파민이 확 올라오는 거죠.
그걸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다른 중독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그 자극을 통해서 우리 안에 어떤 인정에 대한 욕구를 채우고, 허전함을 채우는 건데,
이것은 결국 더 깊은 속박으로 이어집니다.
계속 사람들의 인정을 구하고, 계속 칭찬을 구하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페이버를 구해야지, 사람에게로 ‘페이버 받으려는 욕구’가 향하면,
그건 우리의 자유를 뺐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인정과 시선에서, 관심을 돌리십시오.
사람들에게서 돌려서 하나님께 고정하십시오. 의지적으로 그렇게 하십시오.
‘사람의 인정?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지?’
의지적으로 이렇게 생각을 돌리라는 거예요.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그 생각이 들어오는 순간, 딱 끊으시고
‘아니야, 하나님은 어떻게 보시지?’ 의지적으로 이렇게 생각을 바꾸시라는 거예요.
계속 그 생각을 선택할 때,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탈레마 desire 가 작동하기 시작해요.
그 성령께서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시는 건 맞지만, 이게 마치 우물물하고 비슷합니다.
우물물 펌프질 해서 퍼올릴 때도, 처음에 마중물이라는 걸 붙잖아요.
그냥 처음부터 물이 올라오는 게 아니라, 일단 마중물을 조금 붓고 펌프질 해야지
물이 올라오듯이... 이것도 참 비슷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지?’
하는 것을 선택하기를 계속할 때,
성령께서 그쪽 방향의 마음을 계속 만들기 시작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의지적으로 그렇게 하십시오.
바울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갈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이 말씀을 암송하고 선포하십시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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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중독 (긍정적 의미의 중독)
요즘 새벽기도에, 하나님께서 많은 분들을 보내주십니다.
"언제 이런 시절이 있었나?" 꿈꾸는 것 같습니다.
이전 예배 처소에서는, 새벽 기도에 거의 새로운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습니다.
몇 명 인원 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새벽기도회 말씀 준비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몇몇 주위 친구 목사님들은 저보고 웍홀릭(workaholic, 일 중독자)이라고 오해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매일 새벽을 그렇게 열심히 준비해서 무슨 유익이 있느냐?
그 내공들을 한 곳에 모아 주일 낮 예배에 탁 터뜨리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저도 많이 흔들렸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마음을 붙잡고 새벽예배 준비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람들은 목회자의 능력이 없어서, 새벽기도 식구를 늘리지 못한다고 생각해도
저는 꾸준히 새벽기도의 비전을 가지고 준비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알아주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니까 기도 식구들을 계속 보내주십니다.
요즘 새로운 기도식구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시간차 은혜!"에 그저 놀라고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3년 전에 새벽기도를 위해 기도한 것도
마치 어제 기도한 것처럼 응답해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새벽마다
"오늘 새벽에 또 사람을 보내주셨구나!" 하면서 하나님의 섭리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다시 한 번,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기도는 외상이 없다"고 합니다. 현찰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외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잠시 외상일 뿐입니다. 반드시 현찰화 됩니다.
♣복음으로 중독자들이 가득 찬 도시를 변화시키다
과테말라에 알모롱가 라는 작은 도시가 있는데,
우상숭배와 알코올 중독자들과 마약중독자들과 조직폭력배들만이 득실거리던 죄악의 도시,
소망 없던 도시가,
리스카흐체 마리아노(54세)라는 목사가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전도를 시작했는데,
온갖 핍박과 협박을 받으며 생명의 위협을 수없이 받는 중에,
어떤 때는 권총을 입에다 넣고 쏘았는데도, 총알이 비켜나가서 죽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그리하여 무서운 죄악이 사라지고 98%가 예수님을 믿고, 거룩한 도시가 되어
교도소가 필요 없게 되어 결혼식장이 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었고, 농사가 풍년이 들어서
채소농사나 나무 열매가 보통농사보다 몇 배가 크게 되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되고 있고,
많은 목사님들이 그곳에 가서 영성훈련을 받고 변화되어 나온다고 합니다.
마리아노 한사람 때문에 알모롱가 도시 전체가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인구는 8,000명이었으나 24,000명이 되었습니다.
성경에도, 그 땅 자체가 복된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복 받을 사람이 되면,
따라서 그 땅이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신명기 28장 2~6절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땅이나 어떤 장소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 사는 사람이 복 받을 사람이냐 /아니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과테말라의 알모롱가는 죄악이 관영한 저주의 땅이었으나,
‘마리아노’라는 젊은 목사가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이 변화되니까
저주의 땅이 축복의 땅이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