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7 26 주일 말씀 / 창세기 강해 (23) / 창세기 9:18-29 / 노아의 마지막 장면
◈노아의 마지막 장면 창9:18-29 2026.07.26. [창세기 23강]
오늘 본문은 노아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노아 이야기의 결론인데요.
모든 글에는 결론이 중요합니다. 저도 설교를 위해 설교문을 작성합니다.
설교문을 작성할 때, 가장 공들이는 부분이 서론입니다.
서론을 어떻게 열지가 늘 고민입니다. 서론이 설교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부분이 결론입니다. 결론은 앞에서 한 모든 설교의 요약이고,
적용이기 때문입니다. 결론만 잘 들어도... 설교 내용을 대략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이 본문은, 창6~9장에 이르는 노아 이야기에서 결론으로 중요합니다.
또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홍수 이후 노아의 삶에 관한 유일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창9:28~29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노아는 방주에서 나온 후에도 350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 350년의 삶 가운데, 오늘 기록된 이 사건만을 남겨두었습니다.
오늘 본문인 홍수 이후 노아의 삶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는 의미죠.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본문은 노아의 세 아들들을 소개하면서 시작합니다.
9:1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노아의 세 아들들이 나옵니다. 셈, 함, 야벳.
홍수 이후 인류는, 이 세 아들로부터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을 통해 자손이 퍼져, 오늘날의 인류가 되었습니다.
◑함
그런데 이 세 아들의 소개에서 눈에 띄는 대목이 있습니다.
함이 한 번 더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뒤에 함은 따로 또 언급됩니다.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18
왜 함을 한 번 더 말할까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처음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던 인물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저 인물이 앞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겠구나' 하고 짐작하게 됩니다.
이것을 복선이라고 하죠.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함을 다시 언급한 것은,
지금부터 이어질 이야기의 중심에, 함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단순히 '함'이라고 하지 않고, 뭐라고 소개하죠?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라고 소개합니다. '가나안의 아버지'입니다.
이 '가나안'이 누구냐면, 우리가 아는 그 가나안입니다.
여러분 가나안 족속 아시죠? 그 가나안 족속이, 바로 함과 가나안의 후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땅을 '가나안 땅'이라고 부릅니다. 들어보셨죠?
이 가나안 땅이라고 하는 지명도, 오늘 본문의 가나안의 이름을 빌려서 붙여진 땅입니다.
특별히 지금 창세기의 1차 독자는 누구입니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들이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습니까? 가나안 땅입니다.
그들이 앞으로 싸워야 할 민족이, 바로 가나안 족속입니다.
그러면 이 가나안 족속의 시작이 어디인지,
왜 가나안 족속을 물리치고 그 땅을 정복해야 하는지,
왜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는지,
그 이유를 먼저 오늘 본문에서 깔아주는 것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노아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9:20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여러분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노아가 누구입니까? 노아는 어떤 사람이었죠?
'당대의 의인, 하나님과 동행하던 사람'이었습니다. 6:9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순종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은 채 잠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얼마나 취해있었던지, 자식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모를 정도로 인사불성,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술 취함만 아니라, 벌거벗은 것도 영적으로 심각한 의미를 가집니다.
여러분 '벌거벗었다'라는 단어가 최초로 등장했던 곳이 어디였죠? 기억나시나요?
창3장입니다. 아담과 하아가 죄를 짓자, 가장 먼저 나타난 변화가 무엇입니까?
자기들이 벗은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벌거벗었다는 말은, 단순히 옷을 입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와 수치를 상징합니다.
원래 벌거벗음은 수치가 아니었죠.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부끄러움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이후에는, 벌거벗음이 죄와 수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친히 가죽옷을 지어 입혀서, 그들의 수치를 덮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후에 구약의 제사장들도 성전에 들어갈 때, 반드시 긴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왜 긴 옷을 입어야 했을까요? 하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함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음, 하체를 드러냄'은
죄와 수치를 드러내는 행위로 간주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노아는 술 취했을 뿐 아니라, 벌거벗은 채로 잠에 들었습니다.
치명적인 노아의 실수이자 죄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보게 됩니다.
먼저는, 평안할 때가 더 위험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노아가 언제 술 취했습니까? 방주를 준비할 때는 술 취하지 않았습니다.
방주 안에서도 술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홍수가 끝난 뒤, 방주에서 내린 후, 술에 취했습니다.
모든 심판이 끝난 뒤에 술에 취했습니다.
특히 앞에서 하나님은, 노아 언약을 맺어 주셨습니다.
다시는 물로,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노아는 술에 취했습니다.
다시 말해 모든 위기가 끝나고 평안할때, 노아는 술에 만취해 벌거벗는 과정까지 나아갑니다.
노아만 그런 게 아닙니다. 다윗도 그랬죠.
다윗은 골리앗과 싸울 때는, 하나님을 더 의지했습니다.
또 사올의 칼날을 피해 광야로 도망 다닐 때는, 눈물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적을 물리치고 왕궁에서 낮잠을 자며 평안을 누릴 때,
밧세바를 범하는 치명적인 죄를 지었습니다.
솔로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가 가장 부강하고 평안했을 때
하나님보다 이방 여인들을 사랑했고 우상 숭배에 빠졌습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우리 삶에서 위기의 순간은, 환난의 때가 아닙니다.
위기가 끝난 다음에, 평안할 때입니다.
신앙은 위기보다 평안할 때 무너지기 쉽습니다.
이 리듬을 안 바울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권면합니다. 고전10:21
평안은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동시에 영적으로는 가장 큰 시험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울 때뿐만 아니라, 형통할 때에도 더욱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기도하고,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럴 때 평안이 위기가 아니라, 진정한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노아의 모습 속에서 발견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노아의 죄입니다.
팀 켈러 목사님이 하신 말씀인데요.
「방주 안에는 노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아의 가족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종 동물들과 새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방주에 또 하나 있었던 게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바로 노아와 가족들의 죄입니다.
인간의 죄입니다. 이 죄는 홍수 심판으로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홍수는 세상을 씻었지만, 사람의 죄성까지 씻어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지만, 사람은 여전히 부패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먼저 보여준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의 노아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노아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도 여전히 죄의 잔재가 있습니다. 죄성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깨어있어야 합니다. 왜요?
그래야 죄를 날마다 다스릴 수 있으니까요.
이런 면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방학이 없습니다.
가끔 보면, 스스로 방학을 선포하는 분이 있습니다.
'지금은 방학이니까 저는 예배를 좀 쉬겠습니다. 저는 기도를 좀 쉬겠습니다' 하면서,
이런 저런 이유로 방학을 선포하는 분들이 계시는데요.
학교는 방학이 있어도 신앙생활에는 방학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요? 죄는 방학이 없으니까요. 죄는 결코 쉬는 법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날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존 오웬은 <죄 죽이기>라는 책에서 아주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죄를 죽이지 않으면, 그 죄가 우리를 죽일 것이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죄는 처음에 우리를 속입니다. '이 죄만 지으면 너는 행복할 거야'
그러나 죄를 짓고 나면 어떻습니까?
언제 그랬냐듯이 죄는 우리를 정죄합니다. '너는 죽어야 할 죄인이다!' 하고 정죄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죄는 우리를 비참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트리고요.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우리가 죽이지 못한 죄가 우리를 죽입니다. *사사기가 이 주제죠.
또 한 주를 살아갈 때, 죄는 여전히 우리를 유혹할 것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깨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죄의 충동이 생깁니다. 미움과 다툼의 마음이 올라옵니다.
세상의 정욕과 교만한 마음이 싹트고 있습니다. 이 죄를 다스릴 수 있도록
하나님 내 안에 정결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이 죄를 이길 수 있는 말씀을 주옵소서!'
이어서 노아의 수치를 본 세 아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먼저 함의 반응을 보겠습니다.
9: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함을 그저 '함'이라고 소개해도 되는데, '가나안의 아버지'라고 소개합니다.
나중에 가나안 7족속들은, 거의 모두 저주를 받은 족속들이 되는데,
그 원인이 조상 함에게 있었다는 뜻입니다. 지금 가나안 7족속을 마주 대하고 있는
창세기의 제1 독자 출애굽 백성들에게, 그 얘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볼 수 있나요, 없나요?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면, 그게 큰 잘못인가요?
요즘은 목욕탕을 잘 안 가는데요.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아버지랑 같이 목욕 다니는 게 흔한 일이었습니다.
백미는 목욕 다 끝나고, 아버지가 사주시는 오란씨 여러분 아시나요? 얼마나 시원한지!
진짜 그 맛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바나나 우유 이전에 오란C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목욕탕에서 아버지의 몸을 보는 건 잘못된 걸까요?
그리고 밖에 나가서 동생이나 형에게 알리면 큰 죄인가요?
왜 이 말을 하냐면, 함이 이 행동을 하고 나서, 아버지 노아로부터 저주를 받습니다.
굉장히 심한 저주를 받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본문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게 저주를 받을 만큼 큰 잘못인가?
노아가 술이 덜 깬 것인가? 노아가 지금 주사를 부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식적이지 않아 보입니다.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그런데 설교를 준비하다 보니까요. 그게 아니었더라고요.
여기에도 영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 함의 행동에서 우리가 두 가지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보고 와 알리매
1) 22절에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에서 '보고'라는 단어입니다.
'보다' 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라아' 입니다.
이 단어는 우리가 앞에서 한번 살펴본 적이 있는데요.
그냥 지나가다가 우연히 보게 되었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흥미있게 계속해서 주목하고 감상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때 함의 얼굴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함은 씨익 웃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아버지 노아의 부끄러운 수치를 보면서, 함은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게 즐거워할 장면입니까?
아니죠. 아파하고 정말 슬퍼해야 할 장면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기도하지 않았겠어요?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긍휼히, 불쌍히 여겨 달라고,
아버지 노아가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정신 차릴 수 있도록...'
눈물로 기도하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함은 아버지의 죄를 보고 즐기고 있었습니다. 씩 웃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도 그런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종종 옆에 있는 사람, 혹은 내가 아는 누군가가 넘어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즐거워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기뻐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쁨은요. 우리 안에 경계해야 할 부패한 성품입니다.
이런 기쁨을 제임스 몽고메리는 뭐라고 했냐면 '마귀적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뭘 기뻐하냐면, 사람들이 죄 짓는 것을 기뻐합니다.
죄 짓고 넘어지는 것을 보고 즐기는 자가 마귀입니다.
그런 마귀적인 성품이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타락할 때, 또 죄 짓고 넘어졌다는 소식을 들을 때,
그걸 한편으로 즐기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적 반응은 달라야 합니다.
누군가가 넘어졌다면, 먼저 슬퍼하고 아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요. 두려워해야 합니다. '저 사람도 넘어졌다면, 나도 넘어질 수 있겠구나..
저 경건했던 아버지 노아도 넘어졌다면, 나는 더 쉽게 넘어질 수 있겠구나...'
두려워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함의 반응은, 슬픔이나 두려움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수치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특히 여러분 기억나십니까? 노아는 방주만 지었던 사람이 아니었죠.
방주와 함께 의를 전했던 설교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며 살았습니다. 벧후2:5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지금 죄를 범하자, 함은 그것을 보며 즐기고 조롱하는 겁니다.
'야, 꼴 좋다.. 뭐 아버지가 나보다 나은 게 없네.. 내가 아버지보다 더 낫겠다..'
하는 교만한 마음, 우월감이 들면서, 아버지의 실수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권위를 무시하고, 씩 웃으면서 아버지를 정죄하고 있었던 거죠.
2) '알리매'
그리고 함은 곧바로 밖으로 나갑니다. 왜 밖으로 나갔겠어요?
너무 놀라서 밖으로 뛰쳐나갔을까요? 너무 충격을 받아서
아버지가 죄를 짓고 넘어진 그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 밖으로 후다닥 뛰쳐나갔을까요?
아니요. 알리러 나갔습니다. '...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22
여기 '알렸다'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보면 '나가드' 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다' 라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아마르 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아마르가 아니라, 나가드 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가드라는 단어는 폭로하다는 뜻입니다. announce, declare
함은 아버지의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고 폭로하고 떠벌리며 다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벌거벗었다'는 말은, 어디서 처음 나온다고 했었죠?
아담과 하아가 타락한 이후입니다.
아담과 하아가 타락한 즉시 하나님이 그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때 아담과 하아는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이 대답하죠. '제가 동산에서... 내가 벗었음으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나님이 다시 물으십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누가 너희의 벗었음을 알려줬죠? 그 질문의 답은 사탄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의 벌거벗음을 깨닫게 만들었습니다.
그 벌거벗음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너는 수치스러운 존재야 너는 죄인이야
너는 이제 하나님의 형상이 망가졌어. 너의 수치를 봐!'
이렇게 죄의 수치를 드러내고 폭로하고 떠들고 다니는 존재가 누구냐면 사탄입니다.
사탄은 그 이름 뜻이 '참소하는 자'입니다. 계12:10
'고발하는 자, 드러내는 자, 폭로하는 자'
그래서 사탄이 하는 일이 뭐냐면, 우리가 지은 죄의 수치를 드러내고 우릴 능욕하는 일이죠.
그런데 여러분 놀랍게도 이 사탄의 행동은, 오늘 본문의 누구의 행동과 똑같이 닮아있죠?
함의 행동과 똑같습니다.
오늘 이 함의 반응은, 사탄이 한 일과 같습니다. 사탄의 하수인 함!
그러니까 이 함은 단순히 철부지 아들이 아니라, 사탄을 닮은, 사탄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셈, 야벳
반면 다른 두 아들의 행동은 전혀 달랐습니다.
셈과 야벳은 동생 함으로부터 아버지의 수치스러운 사건을 듣습니다.
그런데 듣고 다르게 반응합니다.
9: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여러분 셈과 야벳은 어떻게 했습니까? 일부러 얼굴을 돌립니다. 뒷걸음으로 들어갑니다.
아버지의 수치를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어깨에 매고 들어간 옷으로, 조용히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주었습니다.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수치, 죄악의 수치를 덮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덮어준 것도 앞에서 나온 그림입니다.
여러분 누가 한 번 덮어주었었죠?
하나님이 하나님은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셨습니다.
죄의 수치를 덮어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행동을 닮은 사람이 셈과 야벳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들들의 다른 반응은, 영적인 관점에서 뚜렷이 대조됩니다.
함이 사탄을 닮은 사람이었다면,
셈과 야벳은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었습니다.
함이 사탄을 따르는 사람이었다면,
셈과 야벳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창3:15절에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떠오릅니다.
노아 홍수 이전에 두 계보, 두 족보가 흘렀습니다.
하나는 뱀의 후손의 계보이고요, 또 하나는 여자의 후손의 계보였습니다.
뱀의 후손은 가인을 통해 흘러갔습니다. *창4장
여자의 후손은 셋을 통해 흘러갔습니다. *창5장
그런데 노아 홍수로, 이제 누구밖에 남지 않았습니까?
바로 셋의 자손 노아의 가족들 여덟 명만 남았습니다.
이제 모두가 믿음의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다시 또 두 개로 쪼개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노아의 이 사건을 기점으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두 족보로 나눠집니다.
뱀의 후손은 함을 통해 이어지고요. 여자의 후손은 셈을 통해 이어집니다.
이 사실이 그 다음 장면에서 확인 됩니다.
◑노아의 축복과 저주
노아가 술에서 깨어납니다. 깨어나서 보니 함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셈과 야벳이 한 일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아들들에 대해 예언합니다.
이 예언은 그냥 노아의 바람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한 예언입니다.
이 사건의 본질을 정확히 아시는, 꿰뚫어보시는 하나님이
노아를 통해 예언을 하시는 거죠.
▲먼저 함에 대한 예언을 보겠습니다.
9: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잘못은 함이 했습니다.
그런데 저주는 함이 아니라 누가 받는다고 합니까?
함의 아들 가나안이! 왜 그럴까요?
아버지가 죄를 지으며 자녀도 같이 저주를 받습니까?
그러면 왜 가나안(아들과 후손)이 저주를 받았을까요?
*아담이 범죄해서, 그 후손들이 다 원죄를 가진 것과 마찬가지인 거죠.
또 학자들에 따르면, 아마 가나안도 아버지 함의 죄에 공모했다고 말합니다.
어떤 식으로도 관여가 됐다고 추측합니다.
예를 들면 가나안도 아버지 함과 같이, 할아버지 노아의 수치를 보고
휼을 봤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같이 밖으로 나가 떠들고 다녔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또 하나는, 이 창세기의 1차 독자가, 바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싸워야 할 가나안 족속이, 지금 누구의 후손이라는 겁니까?
바로 이 함의 아들 가나안의 후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뱀의 후손' 그러면,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전혀 없다는 겁니다. 왜요?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심판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함의 후손'도 마찬가지이고요.
먼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믿음을 주는 거죠.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6 *출애굽 백성의 승리가, 노아에 의해 예언되어 있다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 이 하나님의 저주를 누가 먼저 받았었죠?
아담과 하아를 유혹한 뱀이 먼저 저주를 받았습니다.
홍수 이전에는 뱀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홍수 이후에는 가나안이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면 이 뱀이 받은 저주가, 누구를 통해 흘러간다는 얘기입니까?
함의 후손 가나안을 통해 흘러갑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게 되는 거죠.
'아, 함과 함의 후손들이 뱀의 후손이구나' 그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나안이 받은 저주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25
가나안은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왕 중의 왕'은 어떠한 의미죠? '가장 높은 왕'이라는 뜻입니다. king of kings
'종들의 종'은요. a servant of servants :25
가장 낮은 종이라는 뜻입니다. 완전히 종이 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이 예언이 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출애급한 이스라엘 백성들, 이 창세기의 말씀을 듣고 있는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실제로 점령합니다.
그때 이 가나안한 족속은,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정복되고 이스라엘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노아는 셈에 대해 예언합니다.
셈에 대한 예언은 축복의 예언인데요.
셈이 받은 축복은 이렇습니다.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6
노아는요. '셈의 하나님'이라고 찬양합니다.
'하나님이 셈의 하나님이다' 어떠한 의미입니까?
셈은 하나님께 택함받은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영적인 족보로 치면 여자의 후손입니다.
여자의 후손의 계보가, 셈을 통해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이 셈의 후손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실제로 뒤에 아브라함이 나오는데요. 아브라함이 셈의 후손입니다.
셈에게서 아브라함이 나오고요. 아브라함에게서 이삭과 야곱이 나오고요.
이스라엘 민족이 세워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계보를 따라 이 땅에 오십니다.
그래서 삶의 축복은요. 단순히 한 사람의 축복이 아니라
메시아의 계보가 이어지는 언약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야벳도 축복해 주십니다. 야벳을 향한 축복은 27절에 나오는데요.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27
야벳은 창대, 즉 번영의 복을 받습니다. 또 '셈의 장막에 거한다'는 것은,
야벳의 후손들이, 셈의 하나님을 믿고 그 축복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노아의 세 아들들은, 노아의 치부를 본 반응에 따라, 저주와 축복을 받습니다.
함은 저주를 받고,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갈라진 이 두 계보를 따라, 앞으로 성경의 이야기는 쭉 전개됩니다.
◑적용/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합니다.
▲1, 첫 번째, 우리도 하나님의 덮어주심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오늘 노아의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은, 노아의 만취와 수치로 끝납니다.
여러분 참 아쉽지 않습니까? 노아의 마지막 기록이 이 모습으로 끝난다는 게요.
앞에서 우리는 노아의 삶을 통해, 믿음이 무엇인지를 살펴봤을 만큼
노아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노아의 마지막 이야기는 죄로, 수치로 끝납니다.
물론 노아는 이후 회개했습니다. 본문에는 회개했다는 말은 없지만,
노아가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을 하지 않았습니까? :25~27
이 말은 노아가 자신의 죄를 회개했다는 말입니다. 회개 후에 영감이 임하여
예언할 수 있었던 것이죠. 회개가 없었다면, 영감도, 예언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에 관한 마지막 성경의 기록은 노아의 치부로 끝납니다.
여러분 어떠한 의도일까요? 노아도 역시 은혜가 필요한 죄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노아도 은혜 없이는 설 수 없는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어떠한 은혜요? 덮어주심의 은혜입니다.
죄를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노아에게도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야말로 노아가 받은 최고의 은혜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의 자리에 나와 기도를 하셨을 겁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또 한 주 동안 감사한 제목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주 동안 받은 은혜 가운데 가장 놀라운 은혜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잘 된 것일까요? 여러분이 돈을 더 많이 번 것일까요?
여러분의 질병이 많이 나아진 것일까요?
은혜 중에 은혜는 여러분과 함께 죄가 지었던 죄를, 하나님이 덮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예수님의 의로 우리를 덮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덮어주심의 은혜 때문에 오늘 우리는 여기서 예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노아시대의 사람들은 다 홍수로 죽었습니다.
그들은 덮어주심의 은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덮어주심이 아니라 쌓아두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쌓아두시고, 홍수 날에 심판하셨습니다.
오늘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 쌓아두심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쌓아두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쌓아둔 모든 진노를, 각 사람 위에 다 쏟아 부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죄를 쌓아두심 아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덮어주심의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죄의 값을, 단번에 대신 치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대속의 은혜를 믿는 자들에게 오늘도 적용해 주십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십자가의 보열로 덮어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의로운 덮어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마치 우리를 죄 없는 것처럼 의롭게 보십니다.
여러분 제가 오늘도 이 자리에서 설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오늘도 저의 죄를 덮어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저를 덮어주시 덮어주시지 않으셨다면, 저는 여기선 설교할 수 없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드러내시고 다 들춰내시면
우리 중 누구도 여기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덮어주시고,
우리의 수치와 마음의 악함을 덮어주고 계시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의 짐에서 벗어나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32: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이때 다윗은 밧세바와 죄를 짓고 난 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눈물로 회개합니다.
그때 다윗이 받은 은혜의 고백이 시32:1절이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왜요?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기의 죄를 덮지 못하니까요.
스스로의 의로는 자기의 죄를, 하나님 앞에 조금이라도 없앨 수 없으니까요.
울어도 안되고, 힘으로도 안되고, 돈으로도 안되고, 심지어 목숨을 버려도
죄는 씻겨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 고스란히 남아있으니까요.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만 죄는 해결이 되니까요.
진짜 복 있는 사람은, 이 덮으심의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우리는 다른 복을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다른 복을 불허해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진짜 복을, 정말 받아야 할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홍수 심판으로도 씻을 수 없는 우리의 만가지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지고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이 덮어주심의 은혜가 우리가 받은 진짜 은혜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죄를 지었을지라도, 회개할 수 있는 은혜, 멸망하지 않는 은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은혜, 그리고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은혜,
이 덮어주심의 은혜 아래 살아가는 자가, 바로 예수를 믿는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한 주, 나의 연약함과 죄성이 드러날 때마다
좌절하지 말고 나의 수치를 덮어주시는 그 십자가의 은혜를 붙들고
그 은혜를 힘입어 담대히 살아가기 바랍니다.
▲2. 둘째, 우리도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함은, 아버지의 수치를 보고 퍼뜨렸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요.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주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두 사람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연약함과 실수, 또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가까운 가족의 허물을 볼 때도 있고요. 또 교회의 성도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볼 때도 있고요.
때로는 안타깝게도 목회자의 치부를 발견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누구의 자리에 서야 하겠습니까? 함의 자리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누군가의 치부와 실수를 발견했을 때, 속으로 마귀적 기쁨을 느끼며
우월감이나 교만한 자리로 빠져서는 안 됩니다.
교만의 자리가 아니라요. 두려움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저 사람도 넘어졌다면 나는 얼마나 더 넘어질까'
더 조심하는 자리로, 두려워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여기저기 그 수치를 폭로하고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사탄이 기뻐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셈과 야벳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형제의 허물을 보았을 때, 그것을 가십거리로 삼는 것이 아니라, 덮어 주어야 합니다.
물론 죄를 덮는다는 것이, 죄를 없던 일로 만들거나 묵인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공동체의 죄는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사람의 수치까지도 들추어내고
그것을 여기저기 옮기며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벧전4: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을 덮어주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다른 사람의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덮으심의 은혜를 경험한 자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바라기는 내 삶이 그런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누군가를 정지하는 입술보다 회복시키는 입술이 되고,
넘어뜨리는 사람이 아니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에도 그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의 연약함을 덮어주고 안아주는
따뜻한 은혜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