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7 : 예수님 영접 이후 왜 달라지는 것이 없을까? | 벧전 2:9-10 | 2026.07.26
◈예수님 영접 이후 왜 달라지는 것이 없을까? 벧전2:9-10 2026.07.26. [하나님 나라 7강]
여러분은 혹시 이런 고민 해보신 적 없으십니까?
'도대체 왜 나의 삶에는 괄목할 만한 신앙의 성장이 없는 것일까?'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의 삶을 한번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3년 전, 5년 전 또는 7년 전의 나의 모습보다,
오늘 나는 하나님을 더 뜨겁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5년 전, 7년 전의 나의 모습보다, 오늘 나는 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내가 용서하고 품어주고 있나요?
과거의 나의 모습보다, 오늘 나는 하루하루 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전보다 오늘 나는 더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모든 질문들 앞에서, 자신있게 “예” 라고 답하실 수 있는 분이
분명히 이 자리에 있을 겁니다. 다만 그리 많지는 않겠죠. 그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요?
어느 순간인가부터 우리의 신앙 성장이 멈춰버린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죠.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못된 구원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적인 구원관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적용을 한다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예수님을 사랑하고, 또 예수님을 닮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잘못된 구원관에 사로잡혀 있다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안일해지고 나태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성경적인 구원관을 확립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겠죠.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이 질문에 뭐라고 답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근데 만약에 우리가, 지나가는 그리스도인들 100명을 붙들고 동일한 질문을 했다면,
가장 많이 나올 답이 과연 무엇일까요? 아마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답하겠죠.
'구원이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원한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요5:28
자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구원 맞습니까?
맞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영원한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간다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분명한 진리죠. 여기서 흔들리면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구원관에는 한 가지 크나큰 문제점이 있습니다.
아니 성경적으로 틀린 게 아무것도 없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자 이러한 구원관의 문제점은, 이것이 부정확하다는 것이 아니라 정확합니다.
정확하지 않은 게 문제가 아니라, 충분하지 않은 게 문제라는 것이죠.
incorrect(부정확)한 것이 아니라 incomplete(불충분)한 것이 바로 문제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부족할까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진정한 구원관이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두 개의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오로지 한쪽 측면에만 집중을 하고 있습니다.
즉, 반쪽짜리 구원관을 붙들고 있다는 것이죠. *칭의론만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두 가지 측면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가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구원의 첫 번째 측면은,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인가?' 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우리는 구원을 받았죠?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그리고 죄의 삯은 사망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죄를 대속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을 받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짐을 받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구원의 첫 번째 측면입니다. *칭의론
2) 그렇다면 구원의 두 번째 측면은 또 무엇일까요?
'무엇을 위한 구원인가?'
하나님께서 도대체 왜 우리를 구원해주셨을까요? 아무 이유 없이 심심해서?
아니요. 분명히 분명한 이유와 그리고 목적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비전이 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그 구원의 목적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성화론, 하나님의 신부, 거룩한 백성
오늘의 본문 말씀이 이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2:9
오늘의 본문 말씀인 벧전2:9절은 구원의 양쪽 측면을 아주 균형있게 잘 다루어주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다'라는 위대한 선언으로 시작이 되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죠?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여기서 '어두운 곳'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의 원뜻은 *영어로 darkness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타락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 가운데, 이와 같이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건지심을 받았다는 것이죠.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2:9
가장 먼저 구원의 첫 번째 측면에 대해서 우리에게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서 구원의 두 번째 측면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정확하게 말씀해 줍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구원이었죠?
이는 구원의 목적을 가리켜주죠.
이렇게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어서'
궁극적으로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복음을 선포하라고,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모든 민족으로 제자 삼으려는 목적을 위해' 저와 여러분을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그렇게 전적인 은혜로 구원 받은 저와 여러분은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복음을 매일매일 살아내고, 입술로는 복음을 전파해야 되겠죠.
'복음 전파'하라고, 그 목적을 위해, 우리는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전체 기독교 인구를 우리가 생각해 볼 때, 그 중에 과연 몇 퍼센트가
일상생활 가운데 복음을 살아내고, 또 복음을 증거하면서 살아갈까요?
그러한 기독교인 인구가 과연 몇%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십니까?
10%가 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5%가 넘지 않을 겁니다.
즉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구원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죠.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첫 번째 측면에만 집중하고,
오직 거기에만 머무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칭의
아마도 교회에서 구원의 첫 번째 측면만 강조하고 집중하며,
철저하게 교육시켰기 때문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초미의 관심사는, 어쩌면 유일한 관심사는 이것입니다.
'나와 내 가족이 구원받았는가?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는가?'
항상 여기에만 관심이 있어요. 구원의 첫 번째 측면에만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조금만 스케일을 넓혀 본다면,
'나와 내 가족이 그리고 나와 친한 지인들과 친구들이 구원을 받았는가?'
그리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그 순간, 우리는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기독교 신앙을 가진 목적을 '다 이루었다'고 여기는 것이죠.
오로지 나와 내 가족의 구원만이 필수이고,
나머지 모든 것은, 그리고 전도와 선교까지도 옵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전도하고 선교하면 참 좋지만, 그렇지 못한다 해도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죠.
그냥 나와 내 가족이 구원을 받았으면, 그냥 끝났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너무나 난감해 하시겠죠?
복음 전파하려는 목적을 위해 우리는 구원을 받았어요.
▲그러므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근데 출발선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그곳을 끝이라고 생각을 하니,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게 되는 것이죠. 그냥 그 자리에 안주하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에는 당연히 괄목할 만한 성장이 없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보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할지를, 한번 살펴보시죠.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자, 다음의 상황을 한번 상상해보세요.
△여러분은 한 기업의 대표라고 가정해 보십니다. 직원 채용의 필요가 생겼어요.
그래서 이력서를 받아보고 인터뷰를 진행해보는데, 몇몇 후보들이 굉장히 눈에 탁 띕니다.
그들의 스펙이 너무나 훌륭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형편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의 이력서를 보니, 그리고 인터뷰를 해보니,
우리 회사에 들어올 수 있는 그 어떤 학력도, 경력도, 실력도, 전혀 갖추지 못했어요.
어떻게 해야 되죠? 이 사람부터 탈락시켜야 되겠죠?
근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이렇게 실력이 형편없는 청년들을 내가 선택해주지 않으면,
아무도 선택해주지 않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전적인 은혜로 그들을 선택해 주었습니다. 선택의 기준이, 실력이 아니라, 은혜였어요.
자 그렇게 해서 그들이 입사하게 되었어요.
그러면 여러분이 회사의 대표로서, 이제 그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제후로는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해 달라는 겁니다.
그랬더니 이 직원들이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이 취업난에 나는 운 좋게 선택받았어. 우리는 선택받은 족속이야. 다 이루었도다'
이제부터 시작인데 '이제부터 끝'이라고 잘못 생각하여,
업무시간에 무엇을 하나 지켜봤더니, 항상 컴퓨터로 유튜브 쇼츠 영상만 찾아보고 있어요.
그들을 바라보는 여러분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황당하겠죠.
그리고 너무나 화가 날 것입니다.
▲혹시 오늘 우리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이 이러하지는 않겠습니까?
자, 민수기와 신명기에 보면,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들은 도대체 왜 광야에 있었죠?
이 질문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답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애굽에서 뭘 하던 사람들인가요? 그들은 노예였습니다.
하루하루 애굽인들의 무서운 채찍질 아래에서 신음하면서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400년 넘게 노예 생활을 했기 때문에, 자자손손 비참한 노예 생활을 견뎌내야 됩니다.
고통이 대물림됩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그 부르짖음이 하늘에 상달되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노예 생활에서, 그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내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왜 구원하셨을까요? 아무 이유 없이 심심해서입니까?
아니요. 그들을 향한 분명한 목적이 있었죠.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제 가나안을 정복하여 하나님이 왕 되시는 나라를 건설하라고
그리고 이사야서 말씀처럼 일어나 빛을 발하여 모든 나라와 민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세상(하나님의 나라)을 만들려는 목적을 위해, 그들을 도구로 쓰시려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가나안 땅에 있지 않고 40년동안 광야에 있는 것일까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사명자가, 사명의 자리를 떠나려 했기 때문입니다.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을 하자면, 그들은 사명을 내팽개쳐버렸습니다.
자, 민수기 13장에 보면 그들이 광야를 건너 처음으로 가나안 땅 경계선에 도착했을 때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12명의 정탐꾼을 보내죠.
12명 중에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10명은 아주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이 땅의 주민들은 기골이 장대하여 우리가 스스로 보기에도 그들 앞에서
우리는 메뚜기 같아 보이더라' 그 말만 믿고 모든 백성들이 일제히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차라리 그럴 거면, 저 모세를 돌로 쳐 죽이고 우리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 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지금 광야에 왜 있죠.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목적을 이루라고,
그 목적을 위해 노예생활에서 건지심을 받았습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해 주셨고, 제사장 나라 되게 하셨는데,
사명자가 사명의 자리를 떠나려 하는 겁니다. 사명자가 사명을 내팽개쳐버린 것이죠.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고,
그리고 여호수아 갈렙을 제외한 모든 백성들은
이스라엘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다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들을 완전히 포기하시거나 버린 것은 아니기 때문에
광야에도 분명히 은혜가 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었고,
거기에도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이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40년 동안 딱 한 군데 정착한 것이 아니라,
매일 바쁘게 분주하게 치열하게 생활했을 겁니다.
짐을 싸고, 짐을 짊어지고, 오늘도 구름기둥을 따라 움직이고
내일도 또 이동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고달팠을까요?
얼마나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았을까요?
그러나 그렇게 끊임없이 이동하고 움직이고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그들의 40년 생활을 전진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방황입니다.
40년 동안 하루하루 눈코 뜰 새 없이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목표를 향해 단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무의미하게 방황하기만 했어요.
자, 그들이 죽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겠죠? 하나님 물으십니다.
'너는 뭐하다 왔느냐?' 뭐라고 답할까요?
'저는 그냥 그럭저럭, 먹고 살다가 죽어서 왔는데요.' 이것밖에는 할 말이 없겠죠.
혹시 이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모습은 아니겠습니까?
사명자가 사명의 자리를 떠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물론 그럭저럭 먹고는 살겠죠.
생존의 은혜는 거기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간신히 생존하는 것일 뿐, 거기에는 그 어떠한 성장도 성숙도 전진도 없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누리지 못할까요?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에는 기쁨과, 행복과, 능력과, 자유와, 만족과, 영광이 있다고 하는데,
솔직히 현실의 삶이 하나도 행복하지 않아요.
그냥 상황이 좋아지면 편안해하고, 반대로 고난 중에는 괴로워만 하고,
고난 중에라도 성도로서 누리는 평강은 없습니다.
나의 삶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광을 전혀 찾아볼 수 없어요.
그 이유는 사명자가 사명의 자리(복음 전파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를 떠났기 때문에,
그냥 그럭저럭 마지못해 먹고 사는 것 뿐입니다.
그런 시간이 10년, 30년, 40년이 넘게 흘러도, 그것은 방황이라고 하지,
그 누구도 전진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오늘날 대부분 성도의 신앙생활이 그렇다는 거죠. 광야 방황!
▲그래서 우리는 사명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명은, 하루하루 복음을 살아내고,
또 입술로 복음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겁니다.
그 목적을 위해 저와 여러분은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메시지가 머리로는 완벽하게 접수가 잘 되셨을 겁니다.
다만 심적으로는 여전히 부담이 되실 거예요.
'자 오늘 예배를 마치고 우리 다함께 노방전도를 나갑시다' 라고 하면,
기쁜 마음으로 달려나가실 분들도 있겠지만, 그런 분들은 아마도 소수일 것이고,
대부분의 분들은 엄두가 나지 않을 겁니다.
왜 우리는 전도와 선교의 사명 앞에서 이렇게 크나큰 부담을 느낄까요?
어디 이유가 한두 가지겠습니까?
'나는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나는 말주변이 없기 때문에..
나는 성경 지식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전도 훈련을 아직 받지 못했기 때문에..'
또는 '나는 전도훈련을 받기는 했으나, 전도폭발의 내용을 이제는 다 잊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바쁘니까.. 나는 피곤하니까.. 지금 회사에서 중요한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니까..
나의 가정생활이 녹록치 않아서..' 이런 여러가지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전도의 사명 앞에서, 그냥 머뭇거리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 물론 현재 나의 삶에 극심한 고난이 있다면, 잠시 쉬어갈 때도 있어야 되는 겁니다.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당한 이유 말고, 혹시 우리가 머뭇거리는 이유가,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전도해야 되겠다는 것은 알겠는데, 전도하려고 하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한 가지 기도를 제안해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매일 그리고 매순간 이 기도를 꾸준히 하신다면
어느 순간부터 전도를 안 하는 게 더 힘들어지실 겁니다.
그리고 단순히 힘들다, 안 힘들다를 떠나서, 이 기도를 꾸준히 하신다면,
어느 순간인가부터 너무 기쁘게, 그리고 신나게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시게 될 겁니다. 이 마법과도 같은 기도가 과연 무엇일까요?
자 지금 이 시간 다 같이 큰 목소리로 따라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심장을 공유하게 해주세요.」
이 기도를 매일 매순간 꾸준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바라보시며 애타 하시는 하나님의 그 심정을 우리가 공유한다면,
잃어버린 영혼이 돌아왔을 때 춤추며 즐거워하는 하나님의 기쁨을 우리가 함께 누릴 수 있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복음 전파의 현장으로 달려나갈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의 삶에서 이 기도를 하게 된 하나의 계기가 있습니다.
저의 대학 시절은 신앙의 방황기였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가?'라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부터 저는 씨름을 했습니다.
그렇게 방황하던 어느 날 제가 대학교 졸업반일 때, 하나님께서 저를 다시 찾아와 주셨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저는 결단했습니다.
'한 번 사는 인생,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제대로 한 번 살아보자!'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님의 마음과 저의 마음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느 날부터 결단하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심장을 제가 공유하게 해주세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제목이라 그런지, 응답도 빨랐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점점 더 저에게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제 눈에 들어온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캠퍼스와 대학가에 있는 수많은 잃어버린 영혼들이 확 눈에 띄었습니다.
'나는 예수님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저들은 영원한 멸망을 향해 가는구나'
그들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애타 하시는지,
그 마음이 조금씩 더 크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결론은 명확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대로 내가 복음을 전파하면서 살아야 되겠구나!'
다만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용기가 없었어요.
제가 다녔던 대학교는 미국 전역에서 가장 자유분방하기로 유명한 대학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캠퍼스에는 비 기독교인은 물론, 반 기독교적인 성향을 가진 교수들과 학생들이
너무나 많았어요. *UC버클리
그리고 학교 정문을 딱 나서면, 길가에 히피들이 쫘악 앉아있습니다.
여러분은 미국 히피를 실제로 만나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런 느낌의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하시면 되겠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히피 근처에만 가도 대마초 냄새가 납니다.
그런 그들 앞에 서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고민하고 있는데, 아주 소중한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 당시 캠퍼스에 있었던 모든 크리스천 클럽들, 캠퍼스 전도 단체들이
다 같이 협력하여 전도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하루를 전도의 날로 선정을 했어요.
그리고 복음 셔츠를 제작했습니다.
그때 우리가 선정했던 복음셔츠의 색깔은 형광색 노랑이었습니다. 이거 입고 딱 나가잖아요.
눈에 확 띕니다. 안 볼래야, 안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셔츠 앞뒤로 메시지를 적었습니다.
앞에는 I have a good news for you '당신에게 전해줄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뒤에는 Ask me about it '저에게 물어봐 주세요'
그 셔츠를 입고 우리에게 주어진 미션은,
하루 종일 캠퍼스와 대학가를 누비면서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군가가 물어보겠죠. '좋은 소식이 뭡니까?'
그때 복음을 전해주는 것이, 그날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였습니다.
결전의 날이 밝아왔습니다. 수백 명의 크리스찬 학생들이 정문 앞에 모여서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캠퍼스로, 대학가로 다 같이 흩어졌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었는데, 그 당시 제가 크리스찬 클럽에서 성경 공부를 가르치던
대학교 1학년 남학생들이 있었어요. 그 중에 몇 명이 저를 어떻게 찾았는지,
저에게 막 달려와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선배님, 우리 같이 다녀요.'
그들도 각개전투하기가 굉장히 부담스러웠나 봅니다.
자, 그들을 바라보는 제가 그들이 반가웠을까요? 반갑지 않았을까요?
그 순간만큼은 전혀 반갑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제가 후배들 앞에서 망신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혼자 복음을 전하다가 좀 버벅거려도 뭐 그럴 수도 있죠...
근데 후배들 앞에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들은 사람들이 매몰차게 거절을 하거나,
또는 답하기 힘든 곤란한 질문을 해서, 제가 만약 버벅이게 된다면,
제가 직접 성경 공부를 가르치는 학생들 앞에서, 너무 창피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발 이 후배들과 함께 있는 순간만큼은, 아무도 나에게 질문을 안 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을 했어요.
지성이면 감천이던가요? 아무도 정말로 저에게 질문을 하지 않은 겁니다.
점심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후배들을 데리고 식당에 갔습니다.
식사를 잘 하고 딱 나오는데, 식당 앞에 수많은 히피들이 앉아있었어요.
그 중에 한 명과, 제가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 벌써 기분이 싸~했습니다.
분명히 저 사람이 나한테 질문을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저를 딱 쳐다보더니, 실제로 입을 열기 시작하는 겁니다.
저는 그때 저에게 축지법이라는 능력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정말 어마무시하게 빠른 걸음으로... 모르는 척 하고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래서 좋은 뉴스는 무엇입니까? 나에게 전해줄 그 좋은 소식이라는 게 대체 뭔데?'
라는 소리가 제 귀에 들렸습니다.
만약에 그때 제가 혼자 있었다면, 어쩌면 못 들은 척하고 그냥 지나가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후배들이 같이 있잖아요. 이제는 복음을 전해야만 합니다. 제가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큰일 났습니다. 이제 어쩌면 좋죠?'
그때 하나님께서 제 마음 속에 답을 해주셨습니다.
'네가 경험한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전하거라'
그 순간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이 임했기 때문에, 제가 담대하게 그들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저는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가장 처음으로 다음과 같이 말을 시작했습니다.
「복음의 좋은 뉴스는, Jesus is real」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정말 살아 계시다'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말과 함께 저는 제가 경험한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증거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반응했을까? 정말 진지하게 듣더니, 눈물을 주르륵 흘리면서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들은 전혀 진지하게 듣지 않았습니다. 제 복음의 메시지가 딱 끝나자,
한 히피가 깔깔대면서 웃는 겁니다.
그 다음 순간 딱 정색을 하더니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I knew you guys were Jesus freaks 나는 너네들이 예수광신자 라는 걸 이미 알고 있어'
'Get the F out of here 여기서 썩 꺼져버려'
(여기서 F가 어떤 단어의 약자인지 제가 굳이 설명을 안 드려도 아시겠죠?)
저는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언젠가 당신들도 꼭 예수님을 영접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을
하고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너무 창피했습니다.
후배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놀랍게도 그때 그 경험을, 제 후배들은, 창피한 경험으로 생각하지 않고,
굉장히 영광스러운 체험으로 받아들였어요.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으로 저에게 이렇게 묻는 겁니다.
'그러면 선배님, 이제 드디어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 핍박을 받은 거예요?'
'아, 이 상황을 이렇게도 바라볼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제가 얼마나 위안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일주일의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이제 다시 성경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근데 성경 공부 시간이 딱 끝나자, 그날 저와 함께 노방전도를 나갔던 후배들이
저한테 오더니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선배님 저희가 지난 주부터 스타 끊었어요.'
자 당시가 1990년대에요. 1990년대에 남학생들이 말하는 '스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는 분 손들어 보세요. 생각보다 저와 동시대의 사람들이 많이 계시군요.
'스타'는 '스타크래프트'의 약자입니다.
1990년대 남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놓은 온라인 게임이, 스타크래프트였습니다.
그때 남학생들은 공부도 내팽개치고 밤새워가면서 이 게임만 했어요.
그래서 제가 얼마나 쓴소리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 게임 하느라고 성경 읽을 시간도 없고,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없다면,
이건 우상이다. 끊어라!'
그런데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소 귀에 경 읽기예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스타크래프트를 끊겠다고 하니,
제가 깜짝 놀라서 물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들이 답했습니다.
'지난 주에 선배님과 함께 노방전도를 나가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도자의 사명을 주셨다라는 사실이 기억이 났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끊어야 될 우상이
저의 경우에는 온라인 게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들의 고백을 통해서, 저에게 있어서 개인적으로 창피한 경험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제자를 세우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며칠의 시간이 더 지나갔습니다.
저희 학교에는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추우나 더우나
정문 앞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아주 인자한 흑인 할아버지가 계셨어요.
왜 그 흑인 특유의 깊고 굵은 목소리 있지 않습니까?
「Young man, believe in the Lord Jesus Christ!」
제가 너무나 좋아하고 존경하는 흑인 할아버지였는데요.
어느 날 제가 등교하는데, 저 멀리서 그 흑인 할아버지가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 옆에, 한 명의 히피가 서 있는 거예요.
근데 그 히피가 박스를 이렇게 뜯어내서, 거기에 검정색 굵은 매직으로
무엇인가 글귀를 적어서, 그것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자, 거기에는 뭐라고 적혀 있었을까요? '예수는 진짜예요. 예수님은 살아계십니다.'
제가 막 달려갔어요. 그 앞에 딱 섰는데, 한 눈에 알아봤어요.
그날 저에게 '썩 꺼져 버려라'고 말한 그 히피는 아니었지만,
그 무리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제가 그를 알아보았고, 그도 저를 알아보았습니다.
그 앞에 딱 섰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흐르던지
저도 울고 그도 울고... 우리가 부둥켜 안은 채로 한참을 함께 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이 히피가 전도하면서, 종종 다른 히피 친구들을 데리고 왔어요.
그날 이후로 함께 전도를 나갔던 저의 후배들이, 전도자로서 삶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의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복음을 살아낼 수 있을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제가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모든 역사가 어디에서 시작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역사는 무릎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이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심장을 공유하게 해주세요」라는 단 하 마디의 기도에서 출발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히피의 삶에 변화가 되고, 우리의 후배들의 삶이 변화가 되며,
제가 성장하는 모습을 스스로 보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너무나 감격스러웠어요.
너무나 영광스러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자의 영광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성도님들이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이 전도자의 영광을 경험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우리는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메시지를 정리하면서 여러분에게 단 하나의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광야에 머무르실 건가요?
언제까지 광야에서 방황생활을 고집하고 계시겠습니까?'
혹시 거기가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사명자는 사명의 자리를 떠난 그곳이, 가장 위험한 곳입니다.
사명자는 사명의 자리를 지킬 때, 가장 안전할 뿐 아니라, 가장 영광스럽습니다.
우리가 사명을 붙들고 전진해 나갈 때, 요단강이 갈라질 겁니다.
사명을 붙들고 순종의 발걸음을 내디딜 때, 여리고 성이 무너질 것입니다.
사명을 붙들고 우리 다 함께 전진해 나갈 때, 어둠의 세력이 물러가고
하나님 나라가 전 세계로 확장되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상상해 보세요. 내 눈 앞에서 요단강이 갈라지는 것을 실제로 경험했다면,
내 눈 앞에서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을 실제로 목격했다면,
정말 하루하루 소름돋지 않겠습니까? 너무나 경이롭지 않겠습니까?
너무나 감격스럽고 기쁘고 신나지 않겠습니까? 너무나 영광스럽지 않겠습니까?
이 전도자의 영광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 번뿐인 인생, 가장 영광스럽게 살아가는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