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기도와 축복 | 열왕기상 8:22-30, 54-56 | 2024.08.18 | Youtube
◈솔로몬의 기도와 축복 왕상8:22~30 2024.08.18.
<왕상 8장의 개요>
8:1~11절 언약궤 안치
12~21절 솔로몬의 봉헌사
22~53절 솔로몬의 봉헌기도 *오늘 살펴볼 내용
54~60절 솔로몬의 축사
61~66절 화목제의 희생 드림
..........................................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또 하나님의 백성으로 한평생을 살아가며
수많은 공적예배와 사적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또 이런 공적예배에서의 공적기도를 드리게 되고 사적예배에서 사적인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무소 부재하신 편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때로 특별한 한 장소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특별하신 임재를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성전이 바로 그런 곳이였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가리켜 성경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을 가리키는 집 성전은 그런 공적예배를 드리면서,
공적인 기도를 하나님의 백성들이 드리는 장소였습니다.
▲솔로몬 왕이 이제 성전을 아름답게 완공한 후에 두 주간, 14일에 걸쳐서
성대한 축제를 축하의 시간을 갖습니다.
마침 초막절과 일정이 겹치도록 만들어서, (지방에서 상경하는 국민 감안)
더욱 성대하고 감동적인 헌당식 혹은 낙성식을 거행하게 됩니다.
왕상8:5 ‘솔로몬 왕과 그 앞에 모인 이스라엘 회중이 그와 함께 그 궤 앞에 있어
양과 소로 제사를 지냈으니 그 수가 많아 기록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었더라’
한마디로 말해서 이 제사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제사였고, 속죄의 제사였습니다.
성전을 봉헌하며 주님 앞에 넘치는 감사, 지금까지 그들의 삶 속에서 주님 앞에
성실하지 못했던 모든 죄들을 참회하며, 속죄의 은혜를 동시에 구했던 것입니다.
8: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까 하늘과 하늘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까’
솔로몬 왕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최선을 다해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성전을 지어 지금 봉헌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이 성전이란 빌딩 안에 제한될 수 없는 하나님이심을 솔로몬은 알았습니다.
하지만 주를 위하여 지었고, 주께 봉헌한 성전이기에
여기서 드려지는 기도에 특별한 임재를 그리고 특별한 응답을 구한 것입니다.
8:28~29 ‘그러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이 종이 오늘 주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이제 솔로몬 왕은 이 성전에서 성전을 봉헌하며,
일곱 가지의 특별한 기도의 제목을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이것이 8:31~53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일곱 가지 기도의 제목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공적인 예배에서 드릴 수 있는 공적인 기도>의 하나의 모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일곱 가지 공적 기도의 제목은 무엇입니까?
▲1. 첫째는 정의를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8:31~32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이웃에게 범죄함으로 맹세시킴을 받고 그가 와서
이 성전에 있는 주의 제단 앞에서 맹세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심판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의 의로운 바대로 갚으시옵소서’
한 사회, 그리고 한 국가가 제대로 법치를 운영하려면
무엇보다 정의의 실현이 중요.한 것입니다.
법정은 바로 그런 정의를 판단하고 실현하는 것입니다.
한 사회, 한 국가의 법의 판단이 국민에게 불신된다면
그 사회는 이미 가치의 기준을 상실한 혼돈에 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은 일찍 왕위에 오르면서,
무엇보다도 주의 백성들을 바르게 재판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이것을 구하는 솔로몬을 향해서 ‘네가 내 맘에 든다’ 그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이제 법정은 정의를 판단한 곳이며, 그리고 성전은 이런 판단 이전에
재판관들이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만 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드려지는 공적인 기도에서
우리는 종종 대통령을 향한 기도는 들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사법부를 위해서 혹은 국회를 위해서, 법을 정하는 국회를 위해,
입법부를 위해서 기도하는 기도를 들어보신 일이 계시나요?
네 오늘 공기도에, 저는 이런 기도가 다시 회복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법을 제대로 만들어 제정하고 그리고 법을 제대로 시행하는 재판관들의
정의로운 판단이 시행될 수 있도록 우리가 기도한다면,
이 사회는 얼마나 더 밝아지고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2. 두 번째, 솔로몬 왕의 기도 제목은, 실패 이후에 회복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8:33~34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이 성전에서 주께 기도하며 간구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주님의 백성들도 전쟁에 패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범죄때문입니다.
그래서 포로로 끌려가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억하는 대로 이스라엘 역사의 후일에, 그대로 일어났던
일종의 예언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사업하다가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끝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만약 주님 앞에 돌아와, 주의 성전에서 죄를 참회하고 기도하면 회복의 드라마가
일어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가 겪었던 625 전쟁 이라는 참화를 기억합니다.
그런데 역사 적으로 이 전쟁 이 일어나면서,
이 땅에는 진지한 기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가 가득했습니다.
전쟁이 끝나 갈 무렵, 더욱 이 기도는 이 땅에 충만했습니다.
이 위기에서 이 백성을 이 나라를 구해달라는 구국의 기도가 도처에서 벌어졌습니다.
산마다 기도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산마다 기도원이 생겨났고,
기도원 집회마다 초만원 사례였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백성들의 눈물의 기도는,
이 땅의 새로운 재건의 역사를 가능하게 했다라고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그런 기도가 지금 다시 한번 이 땅에 필요하지 않을까요?
‘실패 이후 회복을 위한 기도’ 이것이 솔로몬 왕의 두 번째 기도였습니다.
▲3. 세 번째는 필요의 공급을 위한 기도입니다.
8:35~36 ‘만일 그들이 주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이 닫히고 비가 없어서
주께 벌을 받을 때에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그들의 죄에서 떠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사 주의 종들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이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가르쳐 주시오며 주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신 주의 땅에 비를 내리시옵소서’
여러분,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비는 있어도 좋은 것이고 없어도 좋은 것이 아니죠.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일용할 양식 같은 것입니다.
지금 이 필요한 비의 공급을 위해, 성전에 나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주의 백성들의 일시적인 범죄로 말미암아 하늘에 창이 닫히고,
비가 오지 않아 가뭄으로 지금 참담한 상황을 맞이했다고 할지라도
다시 이 성전에 나와 혹은 성전을 바라보고 그들이 회개하고 기도한다면,
우리의 필요는 다시 공급된다라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의 창을 열기도 하고 하늘의 창을 닫기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5:18절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기도는 하늘의 창을 엽니다. 닫기도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민족을 향해서 주께서 다시 한 번 하늘의 창을 열어주시도록
기도의 기적이 일어나도록 기도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4. 7여년에 걸쳐 지었던 성전을 주께 봉헌하면서 드렸던 공적 기도의 네 번째 주제는,
긴급재난 구조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이게 30~40절까지의 내용입니다.
8:37 ‘만일 이 땅에 기근이나 전염병이 있거나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가 나거나 메뚜기나
황충이 나거나 적국이 와서 성읍을 에워싸거나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이 있든지 막론하고’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온갖 긴급한 재난의 상황들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지나간 3년, 4년 동안 팬데믹 코로나라는 긴급한 어려운 상황을 겪어냈습니다.
이제 상황이 조금 호전되면서 우리는 다시 방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긴장의 때가 풀어지고 우리의 기도도 약화되고 있지 않은가라는 염려가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세계의 뉴스들은 어쩌면 다시 코로나,
아니 코로나 이상의 재난의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고 지금 경고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때야말로 저와 여러분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솔로몬처럼 기도하는 것입니다. 38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8:38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이 성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무슨 말씀이죠? 할 수 있으면 주의 백성 온 공동체가 모여서
이 재난을 혹은 이 재앙을 극복하도록 기도하라고...
아니 공동체가 안 하거든, 너 혼자라도, 한 사람이라도 나가서 엎드려 기도하면,
이 재난에서 재앙에서 피할 길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아닙니까?
▲5. 성전을 주께 봉헌하면서 솔로몬 왕이 드린 다섯 번째 기도 제목은
‘이방인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8:41~43 ‘또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아니한 자
곧 주의 이름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온 이방인이라도
그들이 주의 크신 이름과 주의 능한 손과 주의 펴신 팔의 소문을 듣고 와서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이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시오며
또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
지금 솔로몬 왕이 성전을 주께 봉헌하며 대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기도를 드리고
있어요. 그런데 일곱 가지 기도 제목 가운데 놀랍게도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 가운데,
이방인을 위한 기도가 포함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십시오. 이건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뿌리가 이미 처음부터 세계적이고,
기독교가 단지 이스라엘만을 위한 신앙이 아니라
만민과 열방을 위한 선교적 신앙임을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성전이 ‘만민 all nations이 기도하는 집’이라면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닌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이 성전에 와서 기도할 수 있어야 마땅한 일이 될 것입니다.
구약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구속사의 역사를 펼쳐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구약에서부터 이방인을 외면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보편성 <보편성>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여호수아를 앞세우고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진입하면서
우리는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라합이라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여자가 아니죠. 이방인이에요.
그리고 우리가 잘 기억하는 룻의 스토리에서,
룻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모압 여자가 아닙니까?
네, 룻 그리고 라합, 이들은 장차 구세주의 족보를 형성하는 그 놀라운 족보 가운데
그들이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마태복음 1장,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안에 당당히 그 이름이 들어가 있는 사람이
라합이고, 룻, 다말(유다의 아내)이 들어가 있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이방인들을 제외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면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눈은 이방인을 주목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49:6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그래서 성전에서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기도의 제목들이 올려지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오도록,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기도가 지속적으로 들여져야 마땅할 것입니다.
▲6. 여섯 번째는 ‘전쟁에서 승리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8:44~45 ‘주의 백성이 그들의 적국과 더불어 싸우고자 하여 주께서 보내신 길로 나갈 때에
그들이 주께서 택하신 성읍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이 있는 쪽을 향하여
여호와께 기도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의 일을 돌아보옵소서’
누구도 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평화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갈망이고 숙제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으로 전쟁은 피할 수 없이 일어납니다.
지금도 전쟁이 이 지구촌, 우크라이나에서, 그리고 이스라엘 땅 가자에서
이 순간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인간의 탐욕 때문입니다.
약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의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인간의 마음 깊이 내재한 욕망, 그 욕심이..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피할 수 없는 전쟁이 일어나거든,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하라고 본문은 가르치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날 때 성전에 가서, 혹은 성전을 바라보며
주님의 도우심을, 그리고 주께서 허락하실 승리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이 전쟁이라는 명제를 연구하면서
전쟁에는 언제나 의로운 전쟁, just war,
그리고 불의한 전쟁, unjust war, 두 개의 전쟁이 있어 왔다고 말합니다. ☞<전쟁>
하나님의 백성들이 의로운 전쟁편에 서 있다면
당연히 우리는 승리를 위해서 기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7. 그리고 이제 솔로몬왕의 마지막 기도 제목입니다.
일곱 번째는 ‘총체적 기업 회복을 위한 기도’입니다. 46~53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기.. 다시 한번 주의 백성들의 범죄로 적국의 포로가 되는 이런 상황,
그리고 기업을 잃어버리는 비극이 일어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실제로 후일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는
역사적 비극을 경험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럴지라도 그것이 주의 백성들에게 역사의 마지막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로잡혀간 그 땅에서 성전을 바라보면서 회개하고, 기도한다면
회복의 드라마를 다시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런 회복을 약속하시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8:53 ‘주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 조상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주의 종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심 같이 주께서 세상 만민 가운데에서 그들을 구별하여 주의 기업으로 삼으셨나이다’
그러니까 출애굽할 때 가장 소중한 기업으로 삼은 것, 그것이 주의 백성들이라는 것이에요.
‘너희는 나의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범죄하고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포기할 수 없는 우리는 그분의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총체적 기업의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기도를 통해서, 이 기업의 회복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왜요? 성도는 주의 백성들은 포기할 수 없는 주의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하나님의 언약은 불변하며,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포기할 수 없어요. 우리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기업이 기업으로서
우리의 인생이 회복되는 놀라운 드라마가 다시 한번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일곱 가지 기도를 드린 후에 솔로몬왕은
이제 8:54절 이하 61절까지 해서 축도로 기도를 마무리합니다.
8:54~56절의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솔로몬이 무릎을 꿇고 손을 펴서 하늘을 향하여 이 기도와 간구로 여호와께 아뢰기를 마치고
여호와의 제단 앞에서 일어나
서서 큰 소리로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위하여 축복하며 이르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말씀하신 대로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태평을 주셨으니
그 종 모세를 통하여 무릇 말씀하신 그 모든 좋은 약속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아니함이 없도다’
그러니까 솔로몬 왕의 기도의 결론이 뭐냐? 기도의 결론은 한마디로 축복이에요.
지금도 오늘날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마지막 축도로 예배를 마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전통에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예배의 결론 축복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예배합니까? 무엇 때문에 우리는 기도합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기 위해서 나누고, 그 축복의 통로로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우리가 창1:28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남자와 여자, 인생을 지으시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신 최초의 하나님의 행위가 무엇이었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남자를 지으시고 여자를 지으시고
그 다음에 God blessed them 그들을 축복하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고, 그분은 축복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축복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은 인생들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비록 인생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범죄하고 잠시 축복을 잃을지라도,
우리가 참으로 예배하면, 참으로 기도하면 우리의 예배, 우리의 기도는 축복을 회복하는
시간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진정 엎드려 예배하고, 아멘 아멘 그래서 예배는 축도까지예요.
예배는 축도까지예요. 근데 사람들의 예배 습관 가운데 보면
설교 끝나고 마지막 찬송 부르고 축도하기 전에 꼭 몇 사람이 일어나서 먼저 나가십니다.
일찍 출차하려고 나가시려는 거겠죠. 미안하지만 그분들이 드린 예배는 다 무효입니다.
가장 중요한 건 마지막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축복을 잃어버린 것이에요.
축복을 받고 나가야 돼요.
여러분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이 뭘까요?
여기에 솔로몬은 마지막 축복의 기도를 드리면서 56절에 '우리에게 태평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태평, 평안'이라는 말도 될 수가 있죠.
그런데 우리는 평안 그러면 히브리어에서 샬롬이라는 단어를 연상합니다.
그런데 원문에 보면 여기서 샬롬이 아니에요.
여기서 '태평'이라는 말은 메누하라는 단어가 쓰여집니다.
이 메누하라는 단어가 어디 나오냐면 우리가 잘 암송하고 묵상하는 시편 23편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잔잔한 물가 혹은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쉴 만한'이 바로 메누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메누카는 주님의 인도를 통해서 경험하는 푸른 풀밭 그리고 안식,
그분의 놀라우신 임재가 함께하는 평안.. 이 특별한 평안을 메누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마지막 축복하면서 '이 메누카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하나님의 메누카, 하나님의 평안, 하나님의 안식, 하나님의 놀라우신 돌아오심'을
우리가 힘입고 벌떡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리고 이제 57절, 솔로몬의 축도의 절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5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함께 계시던 것 같이,
우리와 함께 계시옵고 우리를 떠나지 마시오며 버리지 마시옵고'
그러니까 축도의 핵심, 축도의 본질이 뭐예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이 말이에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그분이 우리를 버리지 않고 우리의 손을 잡고 걸어간다면!
여러분 우리가 걱정할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염려할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무엇일까요?
그분만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전지하시고 전능하시고 만물의 섭리자이신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우리와 구체적으로 함께함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2000년 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구원자 예수님을
또한 이 땅에 보내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별명을 임마누엘이라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분이 함께하셔서 오늘 우리 인생의 걸음을 같이 걸어주신다면,
여러분 문제가 많습니다. 염려도 많습니다. 인생이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뭘 걱정하세요? 뭘 두려워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이제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우리는 저 광야로 담대히 나아갈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태평이, 이 하나님의 임재가, 이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기도하시겠습니다.
........................
◑솔로몬의 봉헌 기도 왕상8:22-40
본문이 속한 열왕기상 8장은
솔로몬이 온 백성과 함께 언약궤를 성전 지성소로 옮기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장장 7년 반 동안 지은 성전이 실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또 하나님이 거하실만한 공간의 위용을 갖추는 순간입니다.
이후 솔로몬은 성전을 하나님께 봉헌하면서 모인 백성 앞에서
성전 건축 경위를 다시 한 번 밝혔습니다. 그런 뒤 그는 하나님께 긴 기도를 드렸습니다.
▲본문을 살피기 전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열왕기서 첫 독자가 누구였는지입니다.
열왕기서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시대에 기록된 책입니다.
즉, 이 책 첫 독자는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열왕기서를 읽을 때 마음이 어땠을지 헤아리는 건,
오늘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본문은 성전이 가장 깨끗하고 빛났을 시기에 드려진 기도입니다.
더욱이 나라가 가장 강성했던 시절을 이끈 왕의 기도입니다.
나라만 아니라 성전까지 상실한 독자들은,
분명 옛 영광을 추억하며 본문을 마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솔로몬의 기도문을 읽는 동안
자연스레 마음에 잠깐의 위로와 희망이 꿈틀거렸을 것 같습니다.
아마 뭇 사람이 눈물지으며, 읽고 묵상했을 그 기도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 오늘 이 본문에 있는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다 완공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 앞에 봉헌식을 드렸던 이 장면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무엇을 넌즈시 얘기할까요?
신약에서 들어오면서 살아있는 성전이신 그리스도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스도 교회에서 부활하시고, 계시록적으로 보면
새하늘과 새 땅 가운데 새 예루살렘이 세워질 진정한 성전의 영광을 바라보는 공동체,
이 성전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굉장히 유익하고 풍성한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은 그때 여러분 상황이 좋고 할만할 때 가능성 있을 때 한 게 아니라,
그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뭘 주목하겠냐?
내가 해야 할 일을 바라보게 한 겁니다.
믿음으로 순종할 때 그와 같은 복을 주신 거예요.
여러분 7년 6개월이 긴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채워진 시간이었어요.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시면요. 솔로몬이 대(단상)를 만들어 놓습니다.
거기에 올라가서 무릎을 꿇고, 손을 펴 올리고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무릎 꿇은 자가, 믿음으로 세상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통치라고 하는 것은 군림이 아니라
지도자가 하나님께 무릎 꿇음으로 시작되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 앞에 엎드림으로 시작되는 나라,
성전을 다 지어놓고 제일 중요한 왕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 이 땅에 무슨 인간의 손으로 지은 집에 하나님이 거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주님의 이름을 이곳에 두시겠다고 약속하셨사오니
주여, 주의 종의 기도를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솔로몬은 본인의 한계와 인간의 한계를 알았습니다.
‘만일 이와 같은 일이 있다면 하늘의 하나님께서 도와주십시오, 하나님 임하여 주십시오.
우리의 완악함을 불태워주시고, 우리의 거짓된 것을 불태워주시고,
다시 한 번 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그 영광.. 하나님 임하여 주십시오.’
성전의 영광은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 별것 아닌 삶이지만
그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내 삶을 가득 채울 때 주시는 그 영광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된 구원의 역사가 예수 그룹의 십자가로부터 시작되지만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성전이란 공간이 담고 있는 신학적 의미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우리의 일상의 삶으로, 여러분들의 삶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득 찬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바라보면서 기대하고 소망하고
다시 한번 다시 한번 기대했던 것이 바로 솔로몬의 성전의 영광 아니었겠습니까?
솔로몬의 기도는 그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번 한 주간도 우리가 살아가겠죠.
우리의 일상적 공간을, 하나님의 성전적 공간으로 바꾸시는 역사가 있길 축복합니다.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할 때 응답하신 하나님 역사를 경험하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윗 언약에 기초한 솔로몬의 기도 8:22~26
8:22-23 ‘솔로몬이 여호와의 제단 앞에서 이스라엘의 온 회중과 마주서서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
지금 솔로몬은 성전 마당 제단 앞에 서 있습니다.
이때 그는 성전이 아닌, 회중을 마주하고 서 있습니다. :22
22절 끝에 ‘손을 펴고’란 ‘손바닥을 펼치고’입니다.
즉 솔로몬은 지금 활짝 편 두 손바닥이, 하늘에 닿을 만큼 손을 위로 쭉 편 상태입니다.
이런 자세로 시작한 그의 기도 첫 마디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하나님을 부르는 말 중 ‘여호와’는 ‘언약의 하나님’을 뜻합니다.
솔로몬은 지금 이스라엘과 관계 맺으시는 하나님,
이스라엘과 함께 이야기를 써오신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 뒤 하나님을 신적 세계인 하늘과 인간 세계인 땅 양쪽 모두에
결코 비할 자 없는 유일하고 탁월한 신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어서 그는 하나님이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 베푸시는 분이심을 밝히는데,
그 은총의 구체적 내용은 이렇습니다.
8:24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지키사
주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을 손으로 이루심이 오늘과 같으니이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손수 지키셨습니다.
십수년 전 하나님은 다윗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아들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이름 둘 집을 건축하게 하겠다’고 말입니다. 삼하7:13
솔로몬은 이 약속을 하나님이 이뤄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은 비단 성전 건축만이 아니었습니다.
솔로몬은 직접 그 약속 내용을 하나님께 아뢨습니다.
8:2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 자기 길을 삼가서, 네가 내 앞에서 행한 것 같이 내 앞에서 행하기만 하면
네게서 나서 이스라엘의 왕위에 앉을 사람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사오니
이제 다윗을 위하여 그 하신 말씀을 지키시옵소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약속하시길, 다윗 왕조가 끊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은 바로 이 다윗 언약 마지막 부분을 이루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조금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면 다윗과 언약을 맺으실 때, 그때 하나님은 지금 솔로몬의 기도처럼
‘자기 길을 삼가고..내 앞에서 행하기만 하면’이란 조건이 없었기 때문이죠. 삼하7:12-16
*신명기적 사관 史觀이 첨가된 것임.
이 사실에 비춰 보면, 지금 솔로몬의 기도는 의아합니다.
언약 당사자도 아니면서, 은혜 가득한 그때의 무조건적 언약에, 조건을 거니 말입니다.
‘자기 길을 삼가고..내 앞에서 행하기만 하면’이란 조건.
하지만 솔로몬의 이 말을 곱씹어 보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자비로우심을 더 견고하게 드러내는 기도라는 걸 알게 됩니다.
▲하늘에서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 8:27-30
8: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계속해서 솔로몬은, 하나님을 자신이 지은 성전보다 크신 분으로 고백합니다.
‘하나님, 제가 당신을 위해 공들여 이토록 아름다운 성전을 지었습니다. 받아주옵소서’ 하며
성전의 장엄함을 강조할 상황에,
도리어 그 부족함을 설파하니,
이 역시 다소 의아하지만, 이는 분명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성전이 담을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지혜로웠던 솔로몬은 이 사실을 잘 알았기에 이렇게 기도를 이어갑니다.
8:28-30 ‘그러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이 종이 오늘 주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솔로몬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낮춥니다.
그리고 부족한 장소일지라도
하나님이 직접 내 이름을 두겠다고 말씀하신 이 성전을 향해 기도한다면,
하늘에서 성전을 내려다보실 뿐만 아니라 귀도 기울이시며 기도를 들어달라고 간구합니다.
즉 부디 성전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연결된 삶을 살게 해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란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기도는, 하늘의 하나님과 이 땅의 내가 어떤 관계인지 확인하는 통로입니다.
이때, 오늘날엔 우리가 바라보며 기도할 눈에 보이는 성전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령님을 통해 더 큰 성전이신 예수님과 연합한, 나 자신이 성전으로서 존재합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솔로몬보다 더 낫고, 더 확실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과 귀가 항상 우리를 향하고 계시기에 그렇습니다.
또한 예수님 이름으로 구하는 것만큼
하나님이 확실하게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요14:14
▲말씀을 맺기 전, 시작하며 했던 이야기,
본문의 첫 독자였던 이스라엘 포로민에게도 본문이 같은 소망을 주었을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면 바벨론에서 막 귀환한 포로민이 처한 상황이 이랬기 때문입니다.
“멸망할 바벨론 도성아,
네가 우리에게 입힌 해를 그대로 너에게 되갚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네 어린 아이들을 바위에다가 메어치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시137:8-9
이스라엘 포로민이 바벨론 어느 한 강변에서 부른 노래입니다.
이들은 슬피 울며, 바벨론에게 당한대로 갚아주는 날을 고대했는데
그 내용이 9절에 나옵니다.
바로 ‘아이들을 바위에 메어치기’입니다.
당시 포로민들은 거주지역과 사유재산을 인정받았다고 알려집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격적 대우를 보장받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포로는 포로일 뿐이라, 어린 생명도 속절없이 잔혹한 죽임을 당하며 살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 포로민들에게 솔로몬의 기도는 어땠겠습니까?
성전은 파훼 되었을지라도, 하늘의 하나님께 회개하며 수없이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의 처지는 70년 가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또 잠시 나라를 회복했다가도, 이내 열강의 압제로 인해 피식민 신세를 벗지 못했습니다.
(바벨론에서 귀환 후에도, 바사 제국의 여전한 통치 아래에 있었음)
그렇기에 이 기도는 언뜻 마음을 위로했다가도, 금세 마주하는 비참한 현실로 인해
그림의 떡 또는 희망 고문으로 읽혔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백성들의 이러한 마음까지 다 아시면서
그 시절 (바벨론 포로기~ 귀환 후) 선지자를 통해 열왕기서를 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이 기도가 사람들에 비참함을 재확인시켜주었으면서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전해진 건, 하나님도 백성도 서로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명 이 빛 좋은 개살구와 같은 솔로몬의 기도를 통해
진정한 회복과 구원의 역사를 이룰 그리스도를 대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마침내 그리스도는 오셨고
그분은 더 큰 솔로몬으로서 본문 속 솔로몬처럼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백성을 바라보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도 솔로몬처럼 두 손바닥을 쫙 펼친 채 팔을 벋었습니다.
다만, 그 손엔 못이 받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도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그런 뒤 그분은 죄인들이 받는 신명기의 모든 저주를 자신이 감당하셨습니다.
타는 듯 목마르셨고, 온몸은 찢겨 상처가 났으며, 적국에 조롱받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홀로 우뚝 서서 기도하심으로, 아무리 기도한다 한들
스스로는 죄의 굴레를 벗고 자유할 수 없는 그때 자기 앞의 사람들만 아니라
오늘 우리까지 구원하셨습니다. 더 큰 솔로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말입니다.
열왕기 독자들은 분명 솔로몬의 기도와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을 비교하는 중
그리스도를 대망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이 기도는 희망 고문 아닌
희망 고조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또 이 모든 이뤄진 일을 보고 아는 우리도 본문을 통해
더 큰 솔로몬이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기도할 힘을 낼 수 있습니다.
마침내 아들을 버리시면서까지 하나님이 응답하셨고 아들도 함께 힘썼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들으시는 분의 그 자비와 사랑은 이토록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기억하며 이 큰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다.
우리가 처한 모든 문제와 상황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해결 받았음을 감사하십시다.
그때 이렇게 기도하는 우리는 어두운 이 세상을 밝히고 개혁하는 주님의 성전으로 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