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삼하9장 은혜 가득한 관계

LNCK 2026. 8. 3. 16:09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회복>

20260726ㅣ은혜 가득한 관계 Grace-ful Relationship 삼하9:1~13 Youtube

 

◈은혜 가득한 관계 Grace-ful Relationship    삼하9:1~13, 시22:1~6    2026.07.26.

 

▲도입 / 라디오 드라마 나레이션                     

므비보셋 : 「아버지, 아버지, 왕의 사신들이 저를 찾아 왔어요.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도 않았어요.

 

‘다윗 왕께서 너를 부르신다’ 그 말 하나만 계속 제 귓가를 맴돌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알았어요. ‘이제 끝이구나, 나는 끝장이구나’ 도망칠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도망칠 다리가... 제게는... 없었으니까요. 그들이 이끄는 대로, 저는 따라 나섰습니다.

왕궁으로 가는 그 길이, 제 일평생 인생에서 가장 길었습니다.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왕에게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게 가까이 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저 멀리 왕궁이 보이기 시작하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인생은 이제 여기까지였구나...’    *므비보셋은 사울 왕의 손자, 요다단의 아들

 

‘화려하고 아름다운 저 왕궁.. 모두가 부러워하는 저 곳이지만...

제게는 그 궁궐 대문 문턱을 넘는 것이 너무 두렵습니다.

 

마치 날카로운 칼이 겨누고 있는 전장에 끌려가는 것 같은 가쁜 숨...

그리고 지금, 저는 그 궁궐 문 앞에 서 있습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삶과 죽음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드디어 궁궐 대문이 열립니다. 제 심장이 터질 것처럼 뜁니다.

‘어쩌지요? 나는 이제 어쩌지요?’

 

▲드라마가 설교로 연속해서 이어집니다.

‘기구한 운명’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므비보셋처럼, 이 말에 어울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그가 다섯 살 되는 해, 어느 날 밤 다급한 목소리가 제 방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빨리 일어나세요. 지금 즉시 도망가야 됩니다.”

 

그 목소리는, ‘할아버지 사울 왕과, 아버지 요나단이 함께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과

함께 전해졌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린 므비보셋은 잘 알지 못했지만,

어른들의 겁에 질린 표정과 다급한 목소리에.. 그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유모는, 울고 보채는 므비보셋을 안고 정신없이 도망칩니다.

그러다가 그만 아이를 떨어뜨렸고,

그 사고로 므비보셋은 평생 다리를 절며 살아야 하는 장애를 입었습니다.

 

‘왜 그렇게 서둘렀을까요? 무엇이 그렇게 급했을까요?’

블레셋 군대와 싸우는 전장은 멀리 있습니다.

적이 당장 들이닥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평소에 사울 왕가를 쳐다보는, 백성들의 싸늘한 시선, 분노가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왕이 민생을 돌보지는 않고, 사사로운 질투의 감정에 휘말려,

다윗을 죽이러 다니는 동안,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왕을 강하게 질책했다는 소문이 들리면서,

‘하나님도 사울을 버린 것이야’ 백성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와중에 사울 왕이 무당을 찾아다닌다는 소문까지 돌면서,

백성들의 불신과 분노가 크게 달했다는 것을, 왕실의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과 요나단 왕자가 목숨을 잃은 이때,

언제 백성들이 횃불과 낫을 들고, 곡괭이를 들고,

왕실에 보복을 하러 올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른들의 두려움과 불안은, 어린 므비보셋의 마음에,

그리고 몸에 절게 된 다리에.. 지울 수 없는 인장처럼 새겨졌습니다.

 

▲유모에게 이끌린 므비보셋은, 로드발이라는 시골 마을에 숨어 들었습니다.

요단강 건너편, 험준한 산골짜기, 이스라엘의 가장 변방 멀리 떨어진 마을입니다.

 

‘로드발’이라는 뜻은, 로(no) + 다바르(word),

즉 말이 없는 곳, 침묵만 감도는 땅, 소통이 단절된 곳입니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말하고 싶어도 말 못하게 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을이었습니다.

 

시집 온 며느리가 3년을 벙어리, 3년을 귀머거리로 살아야 했다는 옛 말처럼,

어쩌면 오늘도 사회생활하면서, 직장에 나가서도,

부당함 앞에서 전혀 입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 말 못하고, 숨죽인 채 살아야 하는 곳인 로드발

므비보셋의 처지를 잘 말해주는, 슬픈 지명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말하지 못한다는 것,

‘아버지가 누구냐, 어떤 집안이냐, 어디서 살았느냐, 발은 언제 다쳤느냐?’

아무리 물어도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처지를, 그 동네 이름(로드발)이 잘 대변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이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성姓이 있고, 이름이 있잖아요. 당시에는 성이 없었습니다.

비슷한 이름들이 많았기 때문에, 한 동네에도 아버지의 이름을 불러서 구분했습니다.

 

바요나 시몬, ‘요나의 아들 시몬’,

벤 하닷, ‘하닷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이름을 페트로니믹 이라고 합니다.  *Patronymic, 부칭

 

서구 문화에 굉장히 많고요. 영어에도 이런 명명이 남아있습니다.

맥아더 아시죠? 맥아더란 ‘아더의 아들’이란 말이에요.

그럼 맥도날드는 뭘까요? ‘도날드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사람을 식별하는 사회...

 

여러분, 물건에도 브랜드가 있고, 라벨 label 이 붙여져 있잖아요.

사람도 ‘누구의 아들’이라는, 일종의 브랜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므비보셋은 브랜드도 없고, 라벨도 없어요.

아버지의 이름을 말 못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것입니다.

다윗의 치세에서, 혹시나 친정 체제의 충신들이, 다윗이 시키지도 않은 ‘충성’을 할 수 있죠.

 

더구나 아버지 요나단은요. 참 사려깊고 기품이 있으며 용맹하면서도 자상한 사람이었습니다.

백성들이 모두 입을 모아서 ‘사울 왕은 참 나쁜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그 아들 요나단은 최고로 존경하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멋지고, 아름답고, 신실한 사람으로

백성들이 기억하는 멋진 남자의 대명사였습니다.

 

그가 자기 아빠예요. ‘내 아버지는 왕자 요나단입니다.’

이걸 말하고 싶지만, 그 말을 삼켜야 하는 순간이 무척 고통스러웠습니다.

유모는 ‘그 사실이 알려지면... 우리는 모두 죽어요. 절대 말하지 마세요.’ 하고 교육시켰죠.

 

▲어릴 적 그에게도, 한 줄기 빛 같은 기억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절친한 벗이었던 다윗의 얼굴을 떠올리면,

‘어쩌면 그 사람이라면, 나(므비보셋)를 예뻐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살짝 스쳐가고는 했습니다.

 

집 어딘가에 아버지와 다윗 두 젊은이가, 함께 들판을 내달리는 그림이 걸려있었습니다.

그림 속의 두 젊은이는, 해맑은 표정이었습니다.

‘저렇게 투명한 미소를 짓는 사람이, 저렇게 반짝이는 눈을 가진 사람이, 나를 해칠 리 없다’

 

‘저렇게 행복한 순간을 아는 마음이라면, 보통 사람의 정치적 손익 계산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대를 조금이라도 내비치면,

주위 사람들은 자기를 비웃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마! 그럴 리가 없어..

너희 집안 사람이라면, 다윗에게는 제거해야 될 대상이야..

만에 하나 그가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권력이란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아...’

 

‘다윗 왕은 좋은 사람이라도, 그의 주위 사람들이 널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사람들은 이런 말을 던지고 잊어버렸지만,

그 말은 므비보셋의 마음에 들어와서 먹구름이 되었습니다.

 

그 두터운 먹구름은, 가끔씩 반짝이던 햇볕도 가려버렸습니다.

결코 햇볕을 받지 못하는 식물처럼, 므비보셋은 차츰 시들어갔습니다.

 

(므비보셋의 혼자 상상) 그러는 동안 그 그림 속의 선하고 아름다운 젊은 활기찬

다윗의 얼굴은, 점점 흉측하게 변해갔습니다.

 

높은 재판대에 앉아서 자기 죄를 추궁하는 재판관의 얼굴이 되기도 했고,

칼을 들고 달려드는 암살자가 되기도 했고,

때로는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자기 목을 조르기도 했습니다.

 

그런 악몽에서 소리지르며 깨어나는 밤이 많았습니다.

더 괴로운 것은, 자기가 마을을 다닐 때,

사람들이 나의 장애를 비웃고, '애비 없는 자식'이라 놀리는 동네 사람들의 얼굴에,

다윗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숨죽여 지내던 어느 날, 왕궁에서 보낸 사람이 자기를 찾아왔습니다.

다윗 왕이 자기를 찾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망갈 겨를도 방법도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다리가 아프잖아요.

 

자기를 데리고 피하려면, 누군가가 목숨을 걸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그럴 수 있는 종이 있을 리 없고,

나 자신도 염치가 없어서, 그렇게 청할 자신도 없습니다.

 

그래서 므비보셋은 체념한 채 왕궁으로 끌려갑니다.

가는 길, 보이는 모든 풍경이, 나를 비웃거나 적대하는 것 같습니다.

 

이윽고 왕궁 대문 앞에 서있는데, 자기 가슴이 쿵쾅거립니다.

여러분은 그런 기억이 있으십니까? ‘저 문이 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대로 그냥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

 

마침내 굳게 닫혀있던 육중한 문이 열리고, 빛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 빛 속에서 괴물이라고 생각했던 다윗의 얼굴에서,

여러 번 괴물이라고 생각했던 다윗의 얼굴에서,

자신을 향한 '미소'를 발견합니다.

 

그는 납작 엎드립니다.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삼하9:8

 

죽은 개 같은 나...’ 단순한 겸손이었을까요?

아니면 그냥 살아남으려는 계산 가운데 나온, 생존 전략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그의 마음속 깊이 자리잡은 처참한 자아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입니다.

 

그는 어느 날 마을 어귀에서 버려진 채 죽어가는 개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흉측하다며 고개를 돌리고 피합니다.

 

므비보셋은 그 ‘죽은 개’를 쳐다보며 한참 생각했습니다.

‘저게 바로 내 모습이구나.. 세상이 나를 보며 다 고개를 돌리는구나..

살아있는 개라면 깽 하고 짖기라도 하겠지만...’

 

아무 소리도 못하는 ‘로드발의 죽은 개’ 같은 내 신세!

그렇게 로드발은 강요당한 침묵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람이 말하지 않고 침묵한다고 해서, 분노와 원한이 사라지는 것 아닙니다.

삭이고 또 삭인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결국 어디선가... 특별히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쏟아져 나오기 마련입니다.

 

품에 안고 키워주던 유모를 통해 전해진, 사울 왕가의 불안과 두려움은

그의 내면에 깊이 뿌리 내렸습니다.

 

므비보셋이 유모를 어떻게 대했을까요?

진심으로 감사했을까요? 아뇨, 아마 원망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유모, 왜 어린 나를 땅바닥에 떨어뜨려서, 평생 장애인으로 만들었나요?

차라리 그때 죽게 내버려 두지, 왜 나를 살려서 이런 비참한 꼴을 겪게 하나요?’

 

스스로를 죽은 개라고 부르는 므비보셋의 이 비참함,

그 깊은 절망을 다윗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다윗 자신도,

젊어서 목숨을 걸고 나서서 나라를 구했는데,

오히려 수배자가 되어서 도망다닙니다.

 

나중에 갈 데가 없어서, 적국 블레셋까지 도망가잖아요.

블레셋 사람도 비웃고, 이스라엘 사람들도 손가락질합니다.

그 누구도 자기 편에 서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 지었던 시편,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22:1

 

나는 뭐라고요?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시22:6

 

한 사람이 얼마나 자아상이 무너졌으면, 스스로 벌레라고 자기를 비하했겠습니까? *다윗

죽은 개라 했겠습니까? *므비보셋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며 백성의 조롱거리니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시22:6~8

 

무엇보다 참기 힘든 것은, 하나님을 향한 나의 신실한 신앙이

비아냥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끝까지 여호와를 의지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그를 수렁에서 건지시고, 은총의 자리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했던 노래,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8:1

 

삭막한 세상, 살벌한 세상이었지만,

하나님을 알고 보니까, 이 땅이 원더풀 월드가 되는 거예요.

즉 경이로움이 가득한 세상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시8:4

이 벌레같은 내가, 존귀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알면,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사랑을 알면요.

이 세상은 더 이상 살벌한 경쟁의 장이 아닙니다.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원더풀 월드가 되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보는 시각을 변화시킵니다.

은혜는 우리의 겸손이 비굴함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줍니다.

 

▲므비보셋은 그래서 다윗의 궁에 죽은 개로 들어갔다가, 왕자가 되어 나왔습니다.

은혜의 식탁에 초대받고, 왕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음식을 먹고 일어날 때,

아버지 요나단과 같은 왕자의 당당함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이 므비보셋의 이야기는, 눅15장에 나오는 둘째 아들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하죠.

거지꼴을 하고 돌아온 아들, 아버지 앞에 엎드리려 했습니다.

‘나를 아들이 아니라 품꾼의 하나로 써주십시오’

그러나 아버지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그를 존귀한 아들의 자리에 앉혀주시고, 큰 축제를 베풀고 주인공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자신을 ‘죽은 개’라 부르던 므비보셋도, 똑같이 왕의 식탁에, 잔치 자리에 초대받았습니다.

나를 괴롭히던 괴물과도 같은 다윗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은총이 빛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은총의 햇살이 그의 마음에 먹구름을 걷어내었습니다. 할렐루야!

 

△오래전 야곱이란 사람도 그랬습니다.

고향에 돌아가야 되는데, 고향에 가면 마주쳐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에서입니다.

 

사실은 자기가 잘못한 게 많아요. 형이 나를 미워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형만 생각하면 마음에 두터운 먹구름이 낍니다. 그러다 보니 형에 대한 생각은요.

점점 더 극단적으로 치우칩니다.

‘형이 나를 미워할 거야’ 하다가 ‘형이 나를 가만히 안 둘 거야, 나를 구박할 거야..

내 재물을 빼앗고, 내 가족들도 괴롭힐 거야’

 

그러다가 어느순간에 ‘형이 나를 만나자마자 나를 죽일 거야’

이렇게 두려움이 확신이 되어버립니다.

 

먹구름으로 뒤덮힌 야곱의 마음속에서, 형 에서는 점점 괴물이 되어갑니다.

그런데 얍복강을 건너서 막상 형을 만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원수가 아니라 형제였습니다. 서로 보고 싶었던 형제였습니다.

이때 야곱이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정말 지긋지긋하게 보기 싫었던 그 얼굴, 괴물인 줄 알았던 그 얼굴,

그 얼굴만은 피하고 살아야 된다고 했던 그 얼굴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신비입니다. 므비보셋은 그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고약한 독재자, 원수,

집안의 원수, 흉측한 괴물이었던 다윗을 굴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합니다.

 

그 이후로 므비보셋이 변화됩니다. 많은 것이 변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일거에 변하지는 않습니다.

 

본문의 마지막 절, 삼하9:13절을 함께 읽습니다.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음으로 예루살렘에 사니라. 그는 두 발을 다 절더라’

 

▲여러분 이것이 결론입니다. 므비보셋의 이야기의 결론은 뭡니까?

‘그는 두 발을 다 절더라’

이것이 여러분 세상의 이야기와 세상의 동화와 성경이 다른 점입니다.

 

세상 이야기는 어떻게 끝납니까? ‘그래서 행복하게 살았더래요.’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만 있는 삶을 말하면서 결론내는 이야기를.. 우리는 좋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두 발을 다 절었더라

여러분, 의도적인 것 같지 않습니까? 두 발 저는 거, 사람들이 다 알아요.

 

근데 굳이 맨 마지막에, 다시 한 번 이 아픈 현실을 갖다 붙인 이유가 뭘까요?

우리가 은혜를 받아도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도요. 바뀌지 않는 현실이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이 땅 사는 동안에, 계속해서 부여 안고 살아야 하는 장애가 있습니다.

육체적 장애뿐 아니라, 마음의 상처, 사회적 장애, 학력의 장애, 사회적 장애 등

복잡하게 얽히는 관계의 장애가 있지만,

물론 어떤 장애는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때가 있지만요.

어떤 짐은 우리가 평생 지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바뀌었습니까?

‘그는 두 다리를 다 절더라’ 그대로입니다.

 

그런 찬송 아시죠?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 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무엇이 바뀌었습니까?

 

정말 좋은 동네에 이사 가서, 집이 다 꽃밭이 되었습니까? No

내가 다니던 주위가 많이 환경이 개선됐습니까? No

포항 지역 저녁 노을의 색깔이 바뀌었습니까? 아니잖아요.

 

내 눈이 달라진 거예요. 내 마음이 달라진 거예요.

그럴 때에 똑같은 환경을 살면서도, 똑같은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도,

똑같은 직장에 출근하면서도... 모든 것이 바뀌는 거예요.

 

Wonderful world! 은혜 안에서 경이 가득한 세상이 되고

그 안에서 무가치하다 느끼던 내 삶이 Meaningful life가 됩니다.

그리고 Graceful relationships 은혜 가득한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원수도 괴물도 피하고 싶은 사람도, 품을 수 있는 사람으로, 함께 있고 싶은 사람으로

바뀌는 거예요. 은혜 가득한 관계!

 

▲여러분, 다윗이 므비보셋을 왕의 식탁으로 초대했습니다. 무엇이 있었을까요?

진수성찬 메뉴가 어땠을까요? 파인다이닝 fine dining

 

근데 여러분 아십니까? 음식이 아무리 맛있어도요.

앉아있는 자리가 불편하면.. 함께 밥 먹는 사람이 꼴보기 싫으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밥 맛이 없습니다. 피하고 싶어요.

 

다윗의 식탁에는 진수성찬만 아니라, 따뜻한 사랑이, 용납이 있었고, 대화가 있었습니다.

이 대화 므비보셋과 여러분 다윗이 함께 대화 나누는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한국 전통문화에 정말 좋은 면이 많은데, 가장 반성할 점은요. 옛날 어른들 그랬잖아요.

‘밥상에서 말하지 마라’ 그거는 정말 바뀌어야 됩니다.

 

이럼 함께 음식 나누면서 대화하는 순간 얼마나 소중한 순간입니까?

그게 바로 식구잖아요. 食口 *집밥을 같이 먹는 관계

 

로드발은 침묵을 강요당한 채,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살아온 세월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식탁에서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이야기해주었어요.

아버지 요나단에 대해서.. 그들의 빛나던 젊은 시절과 그 웃음과 꿈에 대해서..

그 이야기 속에서, 므비보셋은 처음으로 자신이 얼마나 복된 사람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다윗 왕의 꿈이, 자기 꿈이 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므비보셋이 하는 얘기를 들어주었습니다.

다윗 앞에서 지난 세월 자신을 눌러온 어두운 날들을 하나씩 꺼내놓았을 것입니다.

 

어디 가서도 말하지 못했던 그 이야기를 하나 둘씩 꺼내놓으면서,

그 위에 하나님의 빛이, 은총의 빛이 비추는 거예요.

 

죽고 싶었던 시간들.. 죽은 개 같았고, 충격받았던 그날,

악몽에 시달리는 밤들까지... 그러면서 그 대화를 통해서,

그 마음에 먹구름이 걷히고, 다시 햇볕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왕의 식탁은 그렇게 강요당한 침묵을 풀어내는 자리,

내 마음을 얘기하고 careful listening, 돌봄 가득한 경청이 있는 자리였습니다.

 

7월 한 달 우리가 들었던 설교말씀들을, 여러분 다시 되새겨 보십시오.

Wonderful world! 주님 안에서 우리는 이 세상이 신비로운 세상임을 알게 됩니다.

하늘의 무지개가 가스 덩어리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 안에서 미닝풀 라이프, 의미 있는 삶!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은혜 가득한 관계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 8월을 지나서 9월에 careful listening이라는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돌봄 가득한 경청’

특별히 9월 한 달 동안에는 서로 말하고 듣는 것을 함께 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9월 한 달 동안에는 모든 사랑방이 다 모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랑방 열심히 잘 모였지만,

혹 모이지 못한 사랑방도 9월 달 네 번만큼은 꼭 모일 수 있도록

지금 교회에서 기도하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여름 동안에도 우리 마을지기 목자들이 함께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도 예배만 드리고 가시는 분들 있습니다. 좋습니다. 괜찮은데요.

9월달에 네 번의 사랑방이라도 꼭 참여해보시면 좋겠습니다.

멀리 계셔서 함께하기 어려우신 분들이 있습니다.

 

여행 중이거나 출장이거나 유튜브로

또 저희 교회 설교를 정기적으로 들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사랑방에 참여하실 수 있도록 줌 사랑방도 함께 준비하겠습니다.

 

화면에 보면 링크가 나오는데 이 링크로 들어가서 여러분 신청하시면

교회에서 상세히 안내해드리고 기도 제목도 함께 나누고 기도하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러분 7월 초에 나눠드렸던 거 기억하십니까? 이거 다시 꺼내서 어디 붙여놓으시고

고이 간직하시고 이 주제를 마음으로 소원 삼아서 함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밖에 조금 남아있습니다. 다시 가져가셔도 좋고요.

또 주위 분들에게 보내주시거나 전달해 주셔도 좋겠습니다.

그래서 9월 한 달 동안의 Careful Listening,

우리가 함께 하나님 안에서 내 마음을 꺼내놓고 서로 들어주는...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시는지 함께 증언하는

9월 한 달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치는 말

이 므비보셋의 이야기, 야곱의 이야기, 아버지 품에 안겼던 탕자의 이야기는

사실 하나님이 계신 모든 곳에서, 특별히 우리의 예배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이 예배에 오십니까?

많은 분들이 세상에서 치이고 깨어져 형편없이 구겨진 자존감과 나의 무가치함,

인생의 무의미함과 싸우면서 옵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 오면서도 심각한 부부 갈등, 어쩌지 못하는 나의 완고함에 절망하면서

나오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당 문이 열리고 십자가의 빛,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마음을 비추면요. 거기서 은총의 사건이 일어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변화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예배당 문을 나서서 갈 때도, 여전히 우리 현실의 다리는 절고 있을 수 있습니다.

내 몸은 여전히 아프고요. 빚은 여전히 쌓여 있고요. 직장의 문제, 관계의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여전히 힘든 공부 마주해야 됩니다.

그러나 더 이상 "내 삶이 초라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존귀하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나는 왕자다. 나는 공주다.

나는 사랑받는 존재다그러한 믿음, 자의식으로 우리 가운데 자리 잡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모든 관계가 다 바뀌어요. 우리 가족과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부부관계 다 바뀝니다.

여러분 부부관계 가운데, 자녀와 자식관계 가운데에

하나님의 은혜가 살아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요. 나와 가장 가까운데 있는 사람과의 관계를 바꿉니다.

은혜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마도 므비보셋이 다윗 궁에 나와서 가장 먼저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돌아가신 아빠 요나단이 아니라, 유모였을 거예요. 이제 은혜를 알게 되었으니,

그 늙은 유모를 찾아가서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말했을 것 같아요.

 

그때 나를 포기하지 않고 살려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인생, 하나님 때문에 내 인생이 의미있다는 것을 아는 인생은

원망이 감사로 바뀝니다. 상처가 회복의 간증이 됩니다. 상처가 회복의 간증이 됩니다.

므비보셋의 삶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지, 그의 입으로 직접 들어보시겠습니다.

 

▲라디오 나레이션

「아버지... 왕궁의 문이 열렸습니다.

왕 앞에서 저는 끝내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므비보셋!” 그 한마디에, 

그 한마디에... 멈춰있던 제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조심스레... 제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왕의 얼굴에서 저는 아버지(요나단)를 보았습니다.

닮은 얼굴도, 닮은 목소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다윗에게 남겨두셨던 언약이,

긴 시간을 건너 제 앞에 서 있었습니다.

 

저는 저는 스스로를 '죽은 개'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저를 왕의 식탁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왕의 상도, 제 자리도,

제 이름도....

 

아버지, 왕궁으로 들어가는 그 길이, 제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길이었다면,

지금 왕궁을 나오는 그 길은, 제 인생에서 가장 가벼운 길이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가벼운 길이었습니다.

 

제 다리는 여전히 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처음으로 처음으로 그 발걸음이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저는 더 이상 로드발에 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말을 잃어버린 땅

이제야 알겠습니다. 저를 살린 것은... 아버지가 남겨두신... 사랑이었습니다.

아버지와... 다윗 왕의 젊은 청년 시절,

가슴 뛰게 했던 그 우정의 관계,

 

다윗 왕의 얼굴에서 본 그 사랑,

내 가슴속에 뛰고 있는 그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