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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6장 하나님의 심오한 모순

LNCK 2026. 8. 5.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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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강해(11)/사사기6:25-27/‘하나님의 심오한 모순’ Youtube

 

◈하나님의 심오한 모순             삿6:25-27                2025.08.24. [사사기11강]

 

◑지난 시간 복습 / ‘절망의 힘’

 

사사기의 순환 패턴으로 이스라엘의 죄악이 계속 반복됩니다.

삿6:1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

 

그들 이스라엘이 7년 동안 미디안의 압제 아래서, 고통 중에 부르짖으니까,

하나님께서 또 사사 한 사람을 준비하셔서, 역사의 전면에 호출하세요.

그 인물이 기드온입니다.            *'베어 넘기는 자'라는 뜻

 

6:11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

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여기 보십시오. 설명이 필요해요. ‘어, 왜 이렇지?’

기드온이 우리가 평상시에 들어오던 선입관은 ‘기드온과 삼백용사’

여기에 익숙해져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미디안 군대는 어떤 전략을 썼는가 하면,

침략해 와서 완전히 전멸을 시킨 게 아니고, 필요한 것만 때가 되면 들이닥쳐서 걷어가요.

파종할 때, 추수할 때, 농작물을 싹 걷어갑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내버려 둬요.

 

그럼 이스라엘은 먹고 살아야 되니까, 남은 소유를 가지고 또 농사를 열심히 1년 동안 지으면

추수할 때쯤 되면 또 들어와서 걷어갑니다.

 

그런데 어마어마한 군대의 수를 보유하고 있는 군대가, 당시 미디안 군대입니다.

‘메뚜기 떼 같다’ 그랬어요. 6:5

 

기드온이 이제 ‘포도주 짜는 틀’ 안에서, 지금 몰래 숨어서 타작을 하고 있어요.

이 광경이 그 시대를 딱 한 컷의 장면으로 잘 보여주고 있어요.

또한 기드온이 얼마나 이스라엘을 구원하기에는 부적격자인가를 드러내는 이중적 그림이죠.

 

원래 포도주를 짜는 틀은, 이물질이 들어오면 안 되니까

그러면 극상품의 포도주가 생산이 될 수 없으니까,

밀폐된 공간에 좁은 데서 포도주를 짜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포도주 짜는 틀 안에서, 숨어서 밀타작을 하고 있어요.

원래 타작은, 바람이 사방에서 잘 불어오는 넓은 공간에서

도리깨로 턴 다음에, 겨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타작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바람이 잘 부는 넓은 평지나, 조금 높은 언덕 같은 데서

사방이 툭 터진 데서 타작을 해야 돼요.

 

근데 지금 이게 무슨 그림인가 하면, 그 좁은 포도주 짜는 틀 안에서,

그것마저도 빼앗기면 안 되니까, 미디언 군대가 들어와서 또 그것마저도 걷어갈까봐,

몰래 숨어가지고 이러고 있는 거예요.

 

6: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근데 하필 그때 12절을 한번 보세요. 여기 ‘큰 용사’라는 말은 상당히 넌센스입니다.

본문에 그려진 기드온의 첫 장면은 용사다워 보입니까? 굉장히 소심해 보입니까?

굉장히 소심해 보이죠.

얼마나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에는 부적합한 자인가를 설명하는 거예요.

 

그런데 동시에 여기에 해학적 선포가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전면에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는 구원자로 등장시켜서

내가 반드시 너와 이스라엘을 큰 용사로 만들겠다’

미래에 대한 창조적 선포가 ‘큰 용사여!’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하나님의 해학적 (유머적) 그림이 감춰져 있습니다.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역사의 전면에 들어서, 큰 용사로 사용되도록

내가 만들 것이다!’

누구의 의지를 담아낸 선언인가 하면, 하나님의 의지를 담아낸 선언입니다.

 

우리 좌우로 ‘큰 용사여!’ 한번 격려해 주세요.

이 선언에는, ‘지금 비록 나는 오그라들고 있고, 쫄아 있고, 뭔가 눌려 있고,

내가 갖춘 어떤 컨디션을 보면, 뭔가 하기에는 준비도 안 될 것 같고 약해요.’

 

그런데 이 시간 하나님의 이 선언을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런 여러분들을 향해서 ‘큰 용사여!’ 하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자 그러자 기드온의 반응을 좀 보세요.

6:13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이건 사실상 대드는 겁니다. 여호와의 사자에게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나를 보고 큰 용사라고요? 놀리지 마세요.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이 민족을 미디안 군대에 넘기셔서

이런 치욕을 겪게 하시고, 이런 고통을 겪도록 그냥 버려 두시겠습니까?

옛날에 우리 조상들을 애굽에서 꺼내낼 때 펼치셨던 그 놀라운 이적들은 어디 간 겁니까?’

 

이거는 사실상 하나님 앞에 대드는 거예요.

그러자 하나님이 재미있는 반응을 여호와의 사자(천사)를 통해 해주십니다.

 

6:14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

 

자 여기서 주목할 것이 뭐냐? ‘이 너의 힘으로’ 

이 너의 힘이 도대체 무슨 힘이냐? 그 말이에요.

이것을 절망의 힘이라고 얘기합니다. 절망의 힘!

 

무슨 뜻인가 하면, 기드온이 지금 이렇게 대드는 거예요.

‘하나님, 웃기지 마세요. 하나님이 살아계셨다면

우리가 지금 거의 죽게 생겼는데 이렇게 내버려두시는 게 맞습니까?’

 

이게 사실 대드는 거예요. 그러면 여호와의 사자가 거기에 대꾸한 말의 본질이 뭐예요?

‘너 그렇게 대들 힘이 있으면, 가서 이스라엘을 구원해라!’

 

여러분, ‘대드는 게 신앙’입니다. 이것을 보통 ‘절망의 힘’이라고 얘기합니다.

그 대들 힘이 있으면, 그 절망에 처한 힘이 있으면,

그 ‘죽을 힘’을 가지고, 한 번 싸워보라는 것입니다.

 

(*약간 부적절한 예지만, 쥐가 고양이에게 쫓기다가 코너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하잖아요. 죽을 때가 되면, 초인적인 힘이 나온다는 겁니다.

 

수영선수가 자기 기록을 1초 단축시키기 위해서는,

훈련할 때, 죽을 고비를 넘기는 훈련을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계속 하면 나는 죽을지도 몰라’ 그런 마음이 들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스트로크를 계속 한다는 거죠.

그렇게 죽기살기로 계속 연습하면, 자기 기록을 0.5~1초 단축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어느 형제가 마포대교에서, 신발을 벗고 뛰어내릴까 말까 머뭇거리는 걸 제가 봤어요.

예를 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차를 타고 가다가 놀래가지고 달려가서,

그의 허리춤을 붙잡고 ‘너 미쳤니? 이놈의 자식아, 이게 무슨 짓이야?

아직 시퍼렇게 젊은 녀석이! 이러면 안되지!’ 그랬더니,

 

대뜸 ‘아저씨가 나 책임질 거예요? 냅둬요. 내 맘대로 하게 냅두세요!’

그럼 제가 그때 뭐라 그러죠?

‘네 이놈아, 그렇게 나한테 대들 힘이 있으면, 그 힘으로 살 생각을 해 봐!

이렇게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힘으로 한 번 죽도록 열심히 살아 봐!’

 

이게 무슨 힘이에요? 바로 ‘절망의 힘’이에요.

근데 이상하죠? 하나님은 그 ‘절망의 힘’...

 

젊은이고 나이가 든 사람이고, 그런 절막적 생각을 한두 번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밑바닥, 심연의 끝까지 가본 그 절망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과 일하심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이걸 우리는 ‘절망의 힘’이라고 얘기합니다.

그 밑바닥을 쳐봐야, 십자가의 공로와 구원의 은혜가 뭔지를 깨닫게 돼요.

 

바람이 불고 있는 물 위를 잘 걸어가던 베드로가,

갑자기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갔다 그랬어요.

그때 베드로가 자기도 모르게 터졌던 비명같은 절규가 뭐였는지 기억나세요?

‘나를 구원하소서!’

 

그 말은 오늘 우리식으로 말하면 이런 뜻이에요.

‘주여, 나 좀 살려주세요!’ 이게 ‘절망하는 힘’ 이에요.

 

‘주여, 나 좀 살려주세요!’ 그건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비명이에요.

베드로는 지금 ‘내가 뭐라고 소리쳐야 쪽이 안 팔릴까?’ 그럴 겨를이 없어요.

죽음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비명이에요.

 

여러분, 이걸 보통 우리는 철학적 표현으로 ‘절망하는 힘’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참 신비스럽게도, 그 밑바닥을 쳐본 사람을 들어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세요. 믿습니까?

 

▲6:15 ‘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

 

이때 하나님께서 딱 한 가지만 약속하세요.

‘걱정하지 마! 내가 네 팔뚝에 근육을 붙여줄게, 내가 군대를 붙여줄게,

내가 신무기 도입시켜 줄게, 아무 걱정하지 마, 군대 숫자를 늘려 줄게!’

이런 말씀을 하지 않았어요.

 

어떤 조건을 증강시켜 주겠다는.. 어떤 벌어진 현실을 보완해 주겠다는..

그런 표피적이고, 증상만 해결하는 어떤 조건이나 옵션을 약속하지 않으셨어요.

 

6: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하나님의 약속은 뭐였어요?

‘걱정하지 마. 내가 군대 더 보태줄게.. 전차 동원시켜줄게..’가 아니고,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그러니까 우리의 가장 현실적인 준비는 뭐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살면서...

이것도 좀 하나님이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고, 저것도 좀 하나님이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고...’

그런데 그런 옵션들이 우리 신앙의 사실 본질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그런 우리 니즈들을 외면해 가시면서,  needs

허겁지겁 목말라 하는 우리에게

누구와 동행하는 법을 배우라는 겁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빈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현실이 돼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대안도 갖지 말아야 돼요.

 

하나님이 대안이에요. 하나님이 현실이고,

신앙은 밸런스 게임이 아니라고 그랬어요.

신앙은 합리적인 것도 아니라고 그랬어요.

그냥 하나님께 엎어지는 거에요. 올인하는 거에요. 믿으십니까?

 

◑1. 외부적 문제를 해결하려면, 내부적 문제를 먼저 해결하라!

 

자, 이제부터 오늘 본문입니다.

6:25 ‘그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 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6:26 ‘또 이 산성 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두 가지를 명령했어요.

 

▲1. 먼저 네 아버지 집에 바알의 주상과 아세라 목상을 찍어라. 파괴해라.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스라엘 공동체의 최고의 현실적인 문제는 미디안이

연합군을 조직해서, 코앞에 진을 치고 다 털어가는 거에요. 공격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럼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그거를 타개할 수 있는, 극복할 수 있는 어떤 옵션을

증강시켜 주시거나, 보강시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뜻밖에도 전혀 다른 얘기를 하세요.

‘먼저 네 아버지 집에 우상을 다 찍어라, 무너뜨려라’

이렇게 내부적인 문제를 말씀하십니다.

 

여기가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이해가 다른 지점이에요.

우리는, 당장 군대 수도 좀 많았으면 좋겠고, 이것도 좀 보강이 됐으면 좋겠고,

저것도 하나님이 좀 도와주셨으면 좋겠다는 것이... 우리 현실적인 필요였다면,

 

하나님은 전혀 그 원인이 딴 데 있다는 걸 말하고 있는 거예요.

먼저 네 내부에 그 우상을 찍어내라 무너뜨려라!

 

자 이 얘기를 하게 된 이유를 살펴보려면,

잠깐 역사의 맥락과 시대적 맥락에서 설명이 필요합니다.

 

가나안은 농경사회였습니다.

농경사회는 하늘만 쳐다봐야 돼요. 태양이 떠야 되고, 해가 또 져야 되고,

그래서 태양을 주관하는 바알 신이 있었어요. 그 아내가 되는 신이 아세라 신입니다.

 

이 여신은 비, 구름, 습도 이런 것들을 주관하는 신이 그 아내인 아세라 신입니다.

실제로 주관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고,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그렇게 믿었다는 거죠.

 

농경사회의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항상 사고구조가 하늘만 쳐다보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바알과 아세라를 안 믿으면 불안한 거예요.

 

고대시대에, 언제 비가 올지, 언제 추위가 갑자기 닥칠지.. 알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그 불안한 미래를 담보해 줄 신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게 바알과 아세라 신입니다.

 

그 신은 결국 누가 만든 거예요? 사람이 만든 거예요.

왜 사람들이 우상에 매몰되는가 하면... 불안해서 그래요.

 

사실은 이 땅에 많은, 우상숭배의 현상들 밑바닥을 보면,

사람들이 다 죽음의 문제, 질병의 문제, 길흉화복의 문제... 이것들 때문에 불안하니까

찾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보세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착하기 시작한 이스라엘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가나안화 되어가고 있는 거예요.

 

지금 누구의 집에서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까? 기드온의 집에서!

이스라엘 족속의 집에서, 그 우상들이 떡하니 주인 노릇을 하고 있어요.

 

이게 뭐죠? 혼합주의입니다.

혼합주의는, 여호와 신앙과 비슷한 게 아니라, 다른 게 조금 섞여 있는 게 아니라,

아주 불신앙입니다. 비슷한 건 다른 거에요.

 

△그런데 오늘날에도 종교현상 중에, 가장 걷어내야 될 무서운 죄가 ‘혼합주의’입니다.

‘예능’이라는 이름으로, ‘문화’라는 명목으로

온갖 매체에 이런 것들이 익숙하게 자꾸 출연되고, 등장하면서..

 

‘예능인데 뭐? 하나의 문화잖아?’

그래서 우리 정서에 어느새 이렇게 친밀감을 갖도록 이미 굳어져있어요.

 

그래서 TV에 여러 예능프로에 자주 나오는 ‘타로, 뭐 점치는 거, 무당 굿!, 관상...’

어느 것 하나도, 우리 기독교인들이 비슷하게라도 흉내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기독교인들이 점집에 많이 찾아온다고 해요.

업자들 얘기를 들어보면, 설마가 아니에요.

교회 권사님들도 오시고, 장로님 사모님들도 오시고... 리얼입니다.

그러니 뭐 일반 성도들이야 왜 안 가겠습니까? 가는 거에요. 불안하니까!

 

이게 혼합주의의 시작이고, 혼합주의는.. 정확하게 섞여 있는 게 아니라, 불신앙입니다.

이스라엘의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 된 거예요.

 

그들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니까,

그들을 고치기 위해서 미디안에게 이스라엘을 7년 동안을 넘겨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외부에 벌어진 어떤 상황이, *미디안의 침략이

진짜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 뭐가 문제라는 겁니까?

 

너희들 안에 뿌리 깊게 내려져 있는, 너희가 손을 놓지 못하고 야무지게 붙잡고 있는,

그 불신앙, 그 혼합종교가 문제다! 먼저 그걸 찍어내라!’

 

▲2. 여호와의 사자의 두 번째 명령은, 우상을 찍어서 번제 땔감으로 삼아라!

 

6:26 ‘또 이 산성 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라고 명령합니다.

이 번제는 태워서 드리는 제사인데, 반드시 불을 피워야 돼요.

 

불을 피우려면 피울 수 있는 나무가 있어야 됩니다. 소스가 있어야 돼요.

뭘로 그걸 삼으라는 겁니까? 우상을 찍어낸 그 나무조각으로,

하나님께 태워서 드리는 번제의 불쏘시개로 삼으라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아세요?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우상은 공존할 수 없다. 섞일 수 없다’

그 말이에요.

 

‘과거에 너희들이 주인으로 모시고 섬겼던 그 목상들을, 그 우상들을 찍어서

하나님의 재단에 드리는 번제 제사의 불쏘시개로 태워서 하나님께 드리라!’ 그 말이죠.

완전히 정권 이양을 얘기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가운데 여러분들이,

그 마지막 끈까지 아직 머뭇거리고, 쩔쩔 매고, 놓지 못하고, 결단 못해서 질퍽거리고 있는

그 무엇을, 그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을

이 시간 하나님의 번제단에, 결단하고 태워드리는 결단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 결단이 먼저 주어지지 않으면, 어떠한 신앙의 성장과 성숙과 역사가 일어날 수가 없어요.

우상과 사귀지 마세요.

 

(*항상 우리 마음에는 빈공간이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으로 채워지든지, 그 외 다른 무엇으로 채워지든지...

그게 무엇으로든지 채워져 있게 되어 있지, 빈공간으로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오늘 내 마음의 빈방에는, 무엇이 채워져 있습니까?

만약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다면,

내가 늘 그것을 생각하며, 그것으로 인해 나의 만족과 즐거움을 찾는다면...

하나님은  미디안의 공격에 나를 노출시키십니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게만 하십니다.

그 우상 버리라고요!)

 

그러니 여호와의 사자는,

그걸 찾아내어서, 그걸 불태워서 하나님 앞에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먼저 그 일이 선행되어질 때, 미디안과 같은 대적을 승리할 수 있게 해 주시는 겁니다.

 

◑2. 하나님의 심오한 모순

 

6:27 ‘이에 기드온이 종 열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가문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기드온이 두려워하여, 그 일을 낮에는 못하고 밤에 행했다.. 이렇게 돼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자꾸 기드온의 이 못난 모습만 주목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여기 진짜 반전이 뭔지 아세요?

자, 두려움이 없는 인생이 어디 있어요? 겁이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No

 

'아, 이거 이러다가 내가 가진 게 이게 전부인데, 거덜나는 거 아닌가?‘

’다른 친구들은 다 쭉쭉쭉 잘 나가는 것 같은데, 나만 뒤쳐지는 것 아닌가?‘

 

그리고 사람이면.. 누구나 겁이 나요.

책임을 져야 될 공동체가 있고, 가족이 있고... 이럴 때는 그 두려움이 더 크지요.

 

이 당시 고대사회 용사들의 전형적인 모습은,

백주대낮에 자기의 위용을 드러내서 적을 굴복시키는 방법입니다.

골리앗이 대표적인 인물이죠. 엘라골짜기에 벌어졌던 그 전투.

 

그런데 지금 기드온은 밤에, 두려워서 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용기라는 것은, 두려움이 없는 게 용기가 아닙니다.

무섭지만, 두렵지만 하나님의 약속에 붙들려서,

찔끔찔끔 눈물을 곱씹으면서도 전진해 걸어가는 게 용기예요. 믿습니까?

 

자꾸 자신의 용기 없음에 대해서, 두려움에 대해서 자책하지 마세요.

그건 인간이면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이 기드온에게 하나님이 딱 한 가지 약속만 했어요.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16

그게 여러분들의 현실이 돼야 됩니다. 믿으십니까?

 

그래서 용기라는 것은.. 두려움이 없는 게 용기가 아니고,

밤에 숨어서 몰래 할지라도,

그래도 약속에 붙들려서, 울면서 순종해 나가는 게 용기입니다.

 

오늘 무언가 나를 흔들고, 나를 침체시키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 문제 앞에... 우리는 쫄 수밖에 없어요. 겁이 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우리를 붙잡는 것이 ‘너는 죽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갈 것이다’ 아멘!

하나님의 약속을 현실로 붙잡고, 또 한 주간을 전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직 가방 싸지 마세요. 진짜 결론이 남았어요.

동네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마을이 쑥밭이 됐어요.

우상이 다 엎어져 있고.. 쪼개져 있고...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이거 누구 짓이냐?’ 탐문을 해보니까, 기드온의 짓이에요.

그래서 그 아버지 요아스의 집에 벌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6:28 ‘그 성읍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바알의 제단이 파괴되었으며

그 곁의 아세라가 찍혔고 새로 쌓은 제단 위에 그 둘째 수소를 드렸는지라

29 서로 물어 이르되 이것이 누구의 소행인가 하고 그들이 캐어 물은 후에 이르되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이를 행하였도다 하고

30 성읍 사람들이 요아스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을지니

이는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고 그 곁의 아세라를 찍었음이니라 하니’

 

자, 마을 사람들이 달려와서 요하스에게 ‘네 아들은 반드시 죽을지니라’ 선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서, 진짜 죽을 사람들이 누구예요?

그 마을 사람들이에요. 우상 숭배하던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 자녀인 우리를 늘 죽일 사람 취급을 합니다.

근데 하나님은 뭐라고 약속하셨습니까?

 

6: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을 사람들은 기드온을 죽이겠다고 그랬어요.

하나님의 약속이 이겼습니까? 아니면 마을 사람들의 다수의 함성이 이겼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이겼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때 아버지 요아스가 나섭니다.

6:31 ‘요아스가 자기를 둘러선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 하니라’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가 이렇게 얘기한 거예요.

‘바알이 참 신이라면, 너희들이 그 신을 위해서 보호하고 싸워주고 변론할 이유가 있느냐?

바알이 참 신이라면 그가 직접 싸울 것이다!’

 

▲맞습니다. 우린 여기서 세 가지 추론이 필요해요.

1) 첫째 요아스의 이 발언은, 자기는 우상숭배를 했지만,

자기 아들의 목숨의 위기 앞에서 부성애적 발언이 나온 것일까요?

 

2) 아니면 갑자기 종교적으로 은혜를 받아서 헷가닥한 건가요?

 

3) 아니면 정치적 실리를 따져서 정치적 발언을 한 것인가요?

 

어떤 정확한 대답도, 여기 성경에 나와 있지 않아요. 여러분은 어느 쪽 같아요?

정치적 발언일까요? 부성애적 발언일까요? 종교적 발언일까요? 모호해요.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이 ‘하나님의 심오한 모순’ 입니다.

이 상황 자체가 굉장히 모순이죠.

 

그런데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은, 성경에 없어요. 굉장히 모호해요.

그런데 더 중요한 높은 의미가 여기 툭 불거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호한 요아스의 발언 속에서는 해답을 찾을 수 없지만,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게 왜 인생을 살면서 중요한지 아세요?

우리가 직장생활을 하든지, 또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인생의 시간표에 놓여지는 일들을 보면,

우리가 수학 시간에 딱 계산해서 답이 떨어지듯, 그렇게 답이 안나오는게 거의 대부분이에요.

(*모호한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필 우리 부서에 왜 저 사람을 보냈을까?’

그 사람이 우리 부서로 오고 나서는, 직장 생활이 너무 힘들어요.

 

그런데 나중에 먼 훗날 돌이켜 볼 때, 과거 그 시간을 반추해 보면,

그 사람이 내 인생에 꼭 손해만 끼쳤던 것이 아닌 것이... 훗날 드러날 때가 있어요.

 

이게 산수로 계산할 수 있고, 수치화할 수 있는 인생의 명제가 아니에요.

답이 딱딱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뭐라고 그랬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 선은 하나님의 토브 good 를 얘기해요. 하나님의 경영을 얘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살면서... 젊은 날은 이런 인생의 모호함이 더 많죠.

 

인생은 어느 정도 이제 저처럼 70이 다 된 나이쯤 되면, 예측이 대충 될 때가 있어요.

‘저 일은 이렇게 되겠다...’ 결국은 그러면, 사실 경험치의 결말로 봐서,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젊은 날은.. 가보지 않는 시간, 해보지 않는 일, 걷지 않은 길들이 더 많아요.

그러니까 뭐예요? 어수선해요.

‘이건 뭘까? 그 사람은 내 인생에 무슨 의미일까?’

자꾸 질문을 던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닌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더 중요하게 붙잡아야 될 것은,

그 모호함 속에서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선을 향해서 일하십니다. 믿으십니까? 아멘!

 

그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고, 오늘도 또 한 주간 순종과 담대한 용기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 일어나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