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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3장 율법이 만드는 세상, 은혜가 만드는 세상

LNCK 2026. 8. 5.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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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29] 율법이 만드는 세상, 은혜가 만드는 세상 갈3:9-14 2026.8.2

 

◈율법이 만드는 세상, 은혜가 만드는 세상       갈3:9~14       2026.08.02.[갈라디아서29]

 

2026년도에는 갈라디아서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은혜와 믿음, 구원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책이죠.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후반부, 특별히 오늘 본문을 포함해서 25절까지 말씀에서

“그렇다면 율법의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면, 율법은 아무 필요가 없는 것인가? 율법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교회에게 가장 필요한 어떤 핵심적인 질문이고 대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이라면, 착한 행실은 필요 없다는 것인가?’

 

'그럼 예수 믿는 사람은..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간음하고 이래도 상관없다는 것이냐?'

사실은 여기에 대한 대답이, 오늘날 교회가 처해 있는 상황이라고 믿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고, 밖에서도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지 않으면,

우리의 삶이... 구원받은 자나, 구원받지 않는 자나 사실은 아무 차이가 없게 되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 교회의 권위라든지, 교회의 순수함들이 점점 무너져갑니다.

 

또 교회 외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신자들이 볼 때 ‘아니, 너희나 우리나 별 차이 없는데, 너희가 하나님 믿었다고 천국 가고,

우린 지옥 가고... 그건 동의 못하겠다’는 거죠.

‘어떻게 보면 너희보다 우리가 차라리 더 의롭겠다’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거죠.

 

그래서 이 ‘율법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은혜로 우리가 공짜로 구원을 얻는 것이라면, 율법의 역할은 무엇이고?

또 율법이 오늘날을 해석하면 ’착한 행실‘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대답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교회 내부에서도 교회를 무너뜨리는 이유가 되고, 외부에 대해서도 할 말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율법의 역할은 무엇인지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래서 오늘부터 한 두세 번에 걸쳐서

<바울이 얘기하는, 또 갈라디아서가 이야기하는 율법의 역할은 그럼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율법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앞서서,

서론으로 그렇다면 <율법의 문제점은 뭔가?> 하는 것을 먼저 살펴보고요.

그리고 다음 주, 또 그 다음 주에는,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율법의 문제점>부터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자, 율법의 문제를 한마디로 얘기하면 이렇습니다.

 

갈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자, 율법의 문제는 이겁니다. 율법으로 살려는 자들,

오늘날 얘기하면 ‘뭔가를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사람은 저주 아래 갇히게 된다’는 거예요.

저주 아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을 항상 행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3:10

이게 율법의 문제예요. 모든 일을 항상 행해야 된다는 거예요.

 

▲보통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선을 행한 것이 있고, 악을 행한 것이 있으면

저울에 달아봐서 선을 행한 것이 대충 더 많으면 오케이, 자기가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이슬람 같은 경우에는 정확히 그렇게 얘기하죠.

이 땅에서 삶을 다 마치고, 저곳에 알라 앞에 가면, 천칭 저울이 하나 있는데

저울 한쪽에는 선행을 행한 것, 저울 저쪽에는 악행을 행한 것 딱 달아가지고서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냐에 따라서.. 천국, 지옥이 결정된다고 얘기합니다.

 

이슬람도 그렇고,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 여기 문제는 뭐냐면,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지 않으셨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선이 악보다 많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이 그렇게 안 정하셨어요.

선이 악보다 많으면 대충 오케이, 이렇게 안 정하셨고요.

 

하나님이 정하신 법은 뭐냐면, 모든 일을 항상 율법대로 해야 된다는 거예요. 3:10

이게 하나님이 정하신 법입니다. 모든 일을 항상 율법대로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이게 율법이 가지고 있는 문제입니다.

 

▲기독교인뿐만이 아니라 불신자들도 패턴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안 믿었지만 난 착하게 살았어. 그러니까 지옥에 가지 않을 거야’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뭐예요? 두 가지 문제가 생기는데,

 

이런 생각에는 두 가지 결정적인 문제가 있는데,

1) 첫 번째는 지난주에 살펴봤던 거예요. 내가 ‘로기조마이’ 하려는 거예요.

내가 정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준을 내가 정합니다.

 

여기에는 창조주에 대한 존중이 없습니다.

창조주가 뭐라고 정하셨는지를 귀 기울여 듣고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합니다.

 

‘선행을 많이 하면 천국 가는 거 아니야?’ 기준을, 커트라인을 내가 정한다는 거예요.

이것이 천국에 가지 못하는 첫 번째 이유이고, 가장 큰 이유입니다.

왜요? 창조주를 존중하지 않으니까요.

 

천국은 뭐예요? 하나님이 왕이신 곳이거든요.

하나님이 왕이신 곳인데,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이 들어간다? 그건 어불성설이죠.

 

이건 그 말 자체가 모순이에요. 그러니까 천국은 어떤 곳이냐면,

하나님을 왕으로 존중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을, 천국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아요. 그런데 어떻게 천국에 가겠어요? 말 자체가 모순이죠.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기준을 그렇게 정하지 않으셨는데, 그건 무시하고 기준을 내가 정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로기조마이’ 합니다. 마치 학생이 스스로 시험 문제 내겠다는 것과 똑같죠.

 

‘내가 시험 문제 내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풀겠습니다.’ 이거하고 다를 바가 없다는 거예요.

창조주에 대한 존중 없이, 자기가 스스로 구원의 기준을 정합니다.

자기가 하나님 노릇 하겠다는 거죠. 이것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제일 원인입니다.

이것 때문에 못 들어가는 거예요.

 

이 다음에 하나님 앞에 가면 죽어서 심판대 앞에 서면,

딱 하나님이 하나를 물어보신다는 거예요.

‘너 예수 믿었어?’ 이거 하나 물어보시는데, 이게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인데,

‘나는 그걸로 심판 안 하겠습니다. 나는 예수 믿었든 안 믿었든.. 그건 잘 모르겠고,

착하게 살았느냐, 안 살았느냐로 (시험, 당락을) 판단해 보겠습니다.' 이게 뭐예요?

 

학생이 자기가 문제 내고, 자기가 풀겠다는 거잖아요.

창조주에 대한 존중이 없기 때문에, 결국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믿음을 의로 보시겠다’고 정하셨어요.

그러면 거기에 토달아 봐야 소용없어요. 창조주가 정하셨어요.

‘믿음을 의로 정하겠다!’

착하게 사는 것이 의라고 하는 뇌피셜은 창조주 앞에서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의로 정하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생각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도덕질해도 괜찮고, 사기쳐도 괜찮고, 무조건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까?

이게 공평합니까?'

 

‘이 사람들아, 하나님도 생각이 있으시겠지.. 하나님도 생각이 있으시겠지..’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하셨겠어요?

 

그러니까 이런 질문은 뭐냐면, 창조주를 존중하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그렇게 하면요, 그냥 공짜로 용서해 주시면,

사람들이 자기 맘대로 살아서 개판이 됩니다...’

아, 하나님도 생각이 있으시겠죠.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반응하는 이유는,

하나님보다 우리가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게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제일 원인이라는 거예요.

창조주에 대한 존중이 없는 거예요.

 

‘아 생각이 있으시겠지.. 하나님은 아무 생각 없이 천국을 개판으로 만드시겠습니까?’

안 그러실 거라는 거예요. 다 하나님도 계획이 있으십니다.

계획이 뭔지는 뒤에 가서 좀 더 살펴볼 텐데... 하여간 하나님도 다 계획이 있으세요.

그거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문제입니다.

 

(*그 계획이란.. 믿어 의롭게 된 자에게 성령을 주셔서,

성령을 따라 행하여 율법을 지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완벽하진 않더라도요.

 

그런데 폴 워셔 목사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그냥 예수님을 자기 마음으로 믿는 것은, 그건 ‘지적 동의’에 빠질 가능성이 크고,

진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삶의 변화된 증거’가 나타나야 한다.

그 사람만 진짜 예수를 믿는 것이다.. 라면서 변화, 회심, 삶의 증거를 강조합니다. 고후13:5

 

즉, 모태교인으로 태어나 예수 믿은 사람이, 회심 못 하고, 즉 삶의 방향을 바꾸지 못하고,

자기 삶에 ‘회개와, 믿음의 증거인 변화된 삶’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려서부터 믿어온 그 믿음을 재고, 점검, 의심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교회 30년 이상 다녀도.. 아직 '믿지 않는, 믿음 없는' 상태라는 거죠)

 

2) 두 번째 문제가 있는데, 두 번째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이,

율법을 지키려면, 모든 것을 항상 지켜야 된다는 거예요.

모든 것을 항상 지켜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의에 이를 수 있다는 거예요.

 

율법이 악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율법은 좋은 것이고 선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항상 다 지킬 수만 있다면... 할렐루야, 의롭게 될 수 있어요.

그런데 이게 가능하겠냐는 거예요.

 

그래서 11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갈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봐요.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킬 수 있겠는가? 아니요.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는 거예요.

이거는 말할 필요도 없지 않느냐? 모든 일을 항상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

아무도 없지 않느냐?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율법으로 말미암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는 거예요.

 

왜요? 문제는 ‘모든, 항상’ 이 두 단어가 문제예요. ‘모든, 항상’   3:10

그 얘기는 뭐냐면 99번은 지켰어요. 그런데 한 번 어겼어요. 그러면 땡, 탈락이라는 겁니다.

9999번은 지켰어요. 그런데 한 번 어겼어요. 그럼 땡, 탈락이라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이거는 태어나자마자 죽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죽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요.

 

그런데 사실 태어나자마자 죽어도 어렵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 율법은 못 지켰잖아요.

‘좀 울지 마’ 그래도 아기는 울고요.

‘밤에는 좀 자!’ 그래도 아기는 안 자고요. 부모를 공경을 안 하잖아요.

그럼 이게 뭐예요?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 율법을 태어나면서부터 어긴 겁니다.

 

그래서 이거(태어나자마자 죽는 것)로도 어려워요.

자 이 ‘모든, 항상’으로 인해서, 율법으로는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거예요. 3:10

 

△그래서 율법은 우리를 저주 아래 있게 합니다.

자 저주라고 하는 게 뭡니까? 저주는 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저주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신 복이 있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잘 처음 하신 것은, 복을 주신 거였어요.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창1:28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에는 복이 따라온다는 거예요.

 

그런데 저주는 뭐냐면, 그 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저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율법은 그 복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는 거예요.

율법은 우리를 저주 아래 가둡니다. 저주 아래 가둡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만 삽니다.’ 갈3:11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 뭘까요?

그 복에 대해서 오늘 갈라디아서에서 보면, ‘아브라함의 복’ 이렇게 얘기합니다.

 

갈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떠났던 인간들을 다시 부르시면서

아브라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시작하시죠.

 

그러면서 원래 주시려고 했던 복(창1:28)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회복시키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복’이라는 건 뭐냐면,

하나님이 창조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했던 복이에요.

 

그런데 타락으로 말미암아 멀어졌다가 다시 구원으로 돌아오는 자들,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에게 주시려고 했던 복이, 아브라함의 복이라는 거예요. 3:14

 

자 그럼 아브라함의 복은 뭘까요?

성경에 보면 특별히 창세기를 살펴보면 대충 한 네 가지 정도로 요약됩니다.

  

▲1. 아브라함에게 주신 첫 번째 복은 이겁니다.

갈3:9절에 보면 이렇게 얘기하죠.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이 아브라함에게 주시려고 했던 복이, 우리 복이 된다는 거예요.

그 복에 참여하게 된다는 겁니다. 첫 번째 복은 이렇습니다.

 

창15:6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첫 번째 복은 뭐냐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이라는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주신 첫 번째 복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더 이상 저주가 없고 형벌이 없습니다. 이게 크고 첫째 되는 복이죠.

 

그리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삼무의 복인데, 세 가지가 없는 복이에요.

그게 뭐냐면 믿는 자들에게는 정죄가 없고, 수치가 없고, 형벌이 없어요.

삼무의 복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의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결코 정죄하지 않으세요.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롬8:1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아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거예요.

어떤 정죄함도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죄는 하나님께 속한 게 아닌 거예요. 모든 정죄는 마귀에게 속한 겁니다.

모든 정죄는 마귀로부터 나온 거예요.

 

혹시라도 여러분들이 어떤 정죄감을 느낀다면,

그것이 뭐 스스로에 대한 정죄든, 아니면 뭐 상황에서 오는 정죄든,

아니면 누군가로부터 정죄의 말을 들었던.. 하여간 이거는 그 소스가 하나님이 아닙니다.

모든 정죄는 마귀로부터 나오는 거예요.  *성령이 주시는 conviction은 제외. 요16:8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왜요?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은 예수께서 다 소멸하셨어요.

십자가에서 다 지워버리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으세요. 아멘이십니까?

 

혹시라도 여러분 가운데 정죄감이 들어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닙니다.

보통 대부분의 이단이 사용하는 방법이 뭐냐면, 정죄감이거든요. 죄책감과 정죄감이에요.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나를 어떡하실까?' 그게 두려워서, 그 안에 머물게 하고...

하여간 이런 것들 이게 정죄인데, 그 정죄는 마귀에게 속한 겁니다.

 

그리고 율법이 그 정죄를 자꾸 일으켜요. 물론 율법 자체가 악한 건 아니에요.

그런데 ‘율법으로 틈을 탄다’ 그러죠.

 

마귀가 율법으로 틈을 타서, 우리로 정죄감을 느끼게 해요. 정죄를 느끼게 해요.

아니요. 정죄는 하나님께 속한 게 아닙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랬어요. 롬8:1

 

정죄가 없으니까 당연히 수치도 없죠. 정죄가 없으니까 당연히 형벌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삼무의 결과는 완전한 자유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완전한 자유를 주신다는 거예요.

 

이게 아브라함에게 주신 첫 번째 복입니다.

이 삼무의 복을 누린 여러분 되시기를, 자유를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아브라함에게 준 두 번째 복이 있습니다.

 

창17: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두 번째 복은 뭐냐면,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가 그분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두 번째 복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거예요.

 

▲3. 아브라함에게 주신 세 번째 복입니다. 곧 믿는 자가 아브라함과 함께 받는 복이죠.

 

갈3: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세 번째 복은, 성도는 언약 백성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상속자라는 거예요. 이게 세 번째 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이 우리 것이라는 거예요.

이건 여러분, 우리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복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육체를 가지고 사는 동안은, 이게 뭔지 다 몰라요.

그런데 이 다음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되면, 아마 놀라서 입이 쩍 벌어질 겁니다.

하나님이 가지신 모든 것들이, 우리 것으로 상속된다는 거예요.

이 복을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어요. 누구에게?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하는 자에게!

 

그게 누구예요? 믿는 자들!

믿는 자들에게 이 복을 주신다는 거예요.

 

▲4. 네 번째, 심히 번성케 되는 복입니다.

 

창17: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창17: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네 번째 복은 뭐냐면, 심이 번성케 되는 복이에요.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심이 번성케 하시겠다는 거예요.

믿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풍성하게 되고, 번성케 되는 복이 있습니다.

이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복이고요.

이 복에 믿는 자들이 참여하게 될 거라는 거예요.

 

이 네 가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

-언약백성이 되는 복,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복,

-심히 번성케 되는 복,

 

이 네 가지가 성경에서 얘기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주셨던 복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우리가 이 복에 참여하게 됩니다.

 

◑성령의 약속을 받는 복

 

그런데 이 아브라함의 복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약속하신 게 있어요.

 

믿는 자들에게는 첫째, 아브라함의 복을 누리게 된다 하는 게 첫 번째 약속이었고요.

그런데 또 하나 더 약속하세요. 다음 절 같이 보십시다.

 

갈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하시는 거예요.

-첫 번째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하시는 걸 약속하시고요.

-두 번째는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시는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받게 된다는 거예요. 언제? 하나님을 믿을 때!

믿음은.. 여러분, 성령을 받게 합니다. 믿음은 성령을 받게 해요.

 

서두에 제가 ‘하나님이 다 계획이 있으시겠지요’ 했는데,

다 계획이 있으세요. 믿을 때 그냥 칭의만 일어나는 거면, 우리 걱정이 맞아요.

뭐 개판이 되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계획이 있으셔요.

 

믿을 때 칭의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칭의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의 복이거든요.

네 믿음을 의로 여겨주시겠다.. 이게 아브라함의 복인데, 이것만 있는 게 아니라

성령께서 내주하신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셨어요.

성령께서 내주하시면, (믿어 의롭게 된 자가) 개판으로 살고 싶지 않게 된다는 거예요. 아멘!

 

▲자 그래서 율법믿음에는 크게 두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1) 첫째는 의롭다 하심을 받는 칭의예요.

율법은 뭐냐면, 의로움을 내 힘으로 쟁취해야 된다는 부담인데,

믿음은 뭐냐면 의롭다함을 입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냥 하나님이 의롭다고 칭해주시는 칭의이고요.

 

2) 두 번째 차이는 뭐냐면, 성령이 내주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믿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그래서 칭의가 법적인 측면이라면,

성령의 내주하심은 실제적인 능력입니다.

 

(*그런데 시중에

-모태교인도 예수님을 믿으니까, 다 성령이 내주해 계신다..는 입장이 있고,

-모태교인 중에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지적 동의로 믿는 거니까, 성령이 내주하지 않으신다..

고 보는 입장이 있죠)

 

이게 여러분 ‘법적인 칭의’만이 우리가 믿음의 결과라고 생각한다면,

앞서 얘기했던 걱정이나 우려가 맞아요.

앞서 얘기했듯이 ‘아니 그럼 도둑질해도 괜찮고, 뭐 해도 괜찮고, 막 살아도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까?, 그럼 개판되는 거 아닙니까? 그게 어떻게 공의로운 겁니까?’

-이런 일 자체가 일어나지 않게 된다는 거죠. 성령이 내주해 계시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이 계획이 있으셔요. 칭의뿐만이 아니라,

믿을 때 또 하나의 약속이 ‘믿으면 성령을 받는다’ 그랬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믿음의 진짜 내용이 뭔지를, 현재 우리가 반쪽만 이해하고 있는 거예요.

많은 경우는 칭의만 자꾸 이해를 하고 붙잡고 있으니까,

믿음으로 구원 받는 거에 대한 진짜 내용을 모르는 거예요.

 

믿음으로 구원 받는 칭의만 가지고는, 이것은 그냥 법적인 측면이지,

우리 안에 삶의 변화가 일어나진 않아요.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니까 개판이 되겠죠.

 

그러고 ‘믿으니 천국 간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이렇게 읊겠죠. 밖에서 볼 때도 이상한 거죠.

‘쟤는 우리하고 다른 게 하나도 없는데, 왜 천국에 간다고 저러냐?’ 이상한 거죠.

 

그런데 믿을 때, 또 하나의 약속이 있단 말이에요.

믿을 때 뭐라고 그랬냐면 ‘아브라함의 복, 그의 믿음을 의롭다 하신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두 번째가 있다는 거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3:14

 

▲앞서도 여러 번 얘기했듯이,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 마음의 새로운 소원 새로운 마음, 탈레마라고 그랬죠.

탈레마를 만드시는 거예요. desire

 

탈레마의 뜻은 뭐냐 하면 소원, 원함, 열망, 갈망 이런 뜻입니다.

근데 이 탈레마는 뭐냐 하면, 하나님을 기뻐하는 마음이에요.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말해요. 성경이 내주하시기 전에는 육체의 탈레마가 있습니다.

우리 육체, 타락한 육체가 만들어내는 마음이 있어요.

그것은 '육체의 정욕'이라고 성경은 얘기하죠. 별로 좋은 것들이 아닙니다. 육체의 정욕이죠.

 

사람에겐 그런 원함(육체의 정욕)이 있는데, 그것을 율법이 억제하는 거예요.

그런 마음이 있는데... 교회 다니다 보니까, 하면 안 될 것 같아,

원하는 건 이건데 하면 안 될 것 같아, 율법의 정욕...

그러니까 율법이 그것을 억제하고 억압합니다. 이것을 ‘율법주의’ 또는 ‘종교’라고 부릅니다.

 

여기는 자유가 없습니다. 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건 뭐예요?

육체의 탈레마 육체의 탈레마인데, 그거는 못하고요. 거룩한 척 해야 돼요.

거룩한 척, 이것을 예수께서는 위선이라고 부르셨어요.

 

이건 복음이 아닙니다. 이건 복음이 아니에요.

복음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인데,

왜냐하면 믿을 때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그 성령께서는 전혀 다른 마음을 만들어 내시는데,

그 마음은 뭐냐면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에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이것을 ‘성령의 탈레마’라고 부릅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그 율법과 종교 위선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왜 자유가 없냐 하면 자유는 자유의 정의는 뭐예요? 내가 하고 싶은 거라는 게 자유죠.

그런데 내가 뭘 하고 싶어요?

 

육체의 원함, 육체의 정욕, 육체가 원하는 텔레마가 있단 말이에요.

그게 진짜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율법종교는, 그것을 하지 말라고 자꾸 억압해요. 그러니까 자유가 없는 거죠.

 

△제가 옛날에 대학에 다닐 때, 제 친한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이 친구가 노는 걸 정말 좋아해요. 주색잡기에 능해요.

사람은 좋아요. 또 친구 만나는 것도 좋아하고 막 이러는데,

 

제가 그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열심히 복음을 전했는데, 한 번은 그러더라고요.

‘성준아, 네 말을 들어보니까 대충 다 맞는 말인 것 같아..

근데 그래도 나는 교회는 안 나갈 거야’

 

그래서 ‘왜?’ 그랬더니,

‘교회 가면 내가 누리는 이 자유를 다 뺏길 것 같아...’

 

제가 약간 쇼크를 받았어요. ‘분명히 복음은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했는데,

왜 이 사람에게 들리는 복음은 자유를 뺏기는 것처럼 들리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느끼죠. 왜 그럴까요?

탈레마가 다르니까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이 자유라고 하는 건 뭐냐면, 탈레마대로 살 수 있는 걸 자유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내주하시기 전에는, 우리 안에 있는 탈레마 desire 는 하나밖에 없어요.

'육체의 원함' 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걸 마음껏 하는 걸, '자유'라고 해요.

 

그런데 교회에 나오게 되면, 성령 받기 전까지는 뭐예요?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뭐예요?

‘이거 못해, 이거 해야 되는데 하지 말라고 그러고,

주일날 어디 놀고 싶은데 와서 예배드리라고 그러고’

그러니까 자유를 뺏기고, 억압되는 게 맞죠.

 

△그런데 성령 안에서의 자유는 뭐냐면

이 행동 자체를 바꾸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이 바뀌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내용이 달라지는 거에요.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건 예배드리고 싶은 거,

진짜 하고 싶은 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싶은 거,

그래서 나는 그냥 이것을 따라 하는 거... 이게 자유잖아요.

 

그래서 이 자유는 뭐냐면, 하나님 안에서 주어지는 자유라는 거예요.

이 자유는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죄를 짓지 않을 자유가 생기는 거예요.

 

그 전에는 죄를 지을 자유밖에 없었어요.

육체의 탈레마를 따라서 살아가는.. 그 자유밖에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없었는데,

 

그런데 예수 믿고, 성령이 내주한 이후로는, 이걸 안 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긴 거예요.

그게 성령의 내주하심입니다.

 

여러분, 복음은요.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 이전에 마음을 변화시키는 거예요.

행동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을 뭐라 그래요? 율법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물론 복음은, 결과적으로는 행동도 변화시킵니다. 마음이 변하면 행동이 따라오는 거죠.

그런데 마음은 그냥 두고, 행동만 바꾸려고 하는 걸 뭐라 그래요?

율법 또는 종교라고 부르는 겁니다.

 

복음은요. 여러분, 율법이 아니에요. 마음을 그냥 두고 행동을 바꾸는 게 아닙니다.

그럼 뭘 바꾸는 거예요? 마음을 바꾸는 거예요.

 

마음이 하고 싶은 내용이 달라지는 거에요. 어떻게?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그래서 결국 복음은 뭐냐 하면 '내주하시는 성령님'이에요.  *이신칭의 하나만으론 불충분

그리고 이거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신비에 속한 영역입니다.

 

△왜 갑자기 내가 원하는 게 달라졌는지.. 설명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신비입니다.)

아마 대부분 다 그러실걸요?

 

저도 대학교 2학년 때 성령을 받고 나서

‘왜 내가 갑자기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어졌는지,

왜 내가 예배 드리는 게 그렇게 좋아졌는지..’ 설명할 수가 없어요.

 

제가 성령 받고요. 일주일에 일곱 번을 교회를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매일 저녁 수업 끝나면 그냥 하여간 교회를 찾아다니는 거예요.

 

주일 예배 드리기 전에 금요일 날은 기도원에 올라가고,

화요일 날은 그 당시에 예수전도회 화요모임이 있었는데, 거기 다니고,

하여간 월화수목금 토요일 계속 가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 그냥 하루 만에 일어난 변화예요.

갑자기 왜 그러는지 설명이 안 되죠.

 

여러분, 그래서 우리 마음의 변화는, 진짜 신비에 속한 영역인데, 그 신비가 뭐예요?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그래서 성령을 받으셔야 돼요. 성령을 받으셔야 돼요.

 

성령 받지 않으면, 계속 종교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 받지 않으면 계속 율법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근데 시중에 ‘지적 동의’로 예수 믿고 있는 사람이, 벌써 성령이 내주해 계신다는

가르침이 팽배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만 그 진위를 아시지만요!)

 

주일날 교회 나오기 싫은데 끌려 나와야 되고,

아내에게 끌려 나오든 아니면, 엄마에게 끌려 나오든 끌려 나와야 되고,

하기 싫어 죽겠는데 해야 되고...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도망갈까만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빠질까만 생각하고...

여러분 성령 받지 않으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그건 종교고, 율법이고, 그걸 예수님께서 뭐라고 그러셨냐면 ‘회칠한 무덤’이라고 그러셨고,
그걸 뭐라고 그러셨냐면 ‘위선’이라고 그러셨어요.

 

▲복음의 내용은 뭡니까? 복음의 내용은 두 가지예요.

-너희가 믿을 때 아브라함의 복,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칭의와

-두 번째는, 성령의 약속을 받는 것! 즉 약속된 성령을 받는 것,

이게 복음의 내용입니다.

 

성령이 내주하실 때, 우리는 비로소 원함이 달라집니다. 죄와 싸울 힘을 얻습니다.

성령이 내주하실 때, 우리는 위로를 받고, 인도하심을 받고,

성령이 내주하실 때 우리는 기쁨을 누리고,

성령이 내주하실 때 우리는 자유를 얻습니다.

 

어떤 자유? 하나님 뜻대로 살 자유.

어떤 자유? 죄를 짓지 않을 자유. 할렐루야!

 

여러분은, 성령 받으셨습니까? 왜 이렇게 자신이 없어요?

성령 받으셨습니까? 잘하셨습니다. 성령 받으셔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뭐예요? 율법의 저주 아래에 놓인다는 거예요.

저주는 복을 못 누리는 거라고 했죠.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릴 수가 없다는 거예요.

 

성령 충만한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자 그래서 ‘하나님이 생각이 이거였다’는 거예요.

 

이걸 오직 ‘칭의’로만 구원이라고 하는 걸 자꾸 제안을 하면.. 그러면 이해가 잘 안되죠.

그럼 칭의 받고 개판되는 거 아닙니까?

 

믿으십시오 하나님도 생각이 있으세요. 아멘

(그 생각이란, 믿는 사람이 성령을 받아서,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이제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칭의가 분명하면, 성화는 자동으로 연결되어집니다. 도미노처럼)

 

▲이어지는 3:11절과 12절입니다.

11절과 12절은 두 가지 삶을 대비하는데 이렇습니다.

 

갈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여기 보면 두 가지 삶을 대비하는데요.

-하나는 믿음으로 사는 삶이고

-또 하나는 율법으로 사는 삶입니다. 두 가지 삶이 있다는 거예요.

 

의인은 믿음으로 살고,

율법을 행하는 자는 율법 가운데서 산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기서 ‘산다’ 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자오’ 인데요.

이 자오는 단순히 존재의 존속, 삶의 지속이란 뜻뿐만 아니라

번영, 행복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동사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고, 율법을 행하는 자는 율법 가운데 산다’라는 의미는,

단순히 생존의 의미를 넘어서,

삶의 번영과 행복이 그 안에서 결정된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율법을 행하는 자는 율법 가운데 산다라는 것은

율법이 만들어내는 구조 속에서, 행복과 번영을 추구하게 된다.. 이런 말이에요.

 

그건 뭐예요? ‘모든, 항상’ 율법을 다 지키면 행복해지는.. 이걸 추구하면서 산다는 거예요.

그게 ‘율법을 행하는 자는, 율법 가운데 산다’ 이런 뜻입니다.

 

‘율법 가운데서, 율법이 만들어내는 세계 가운데서, 행복과 번영을 추구하면서 살게 된다’

이런 뜻이에요. 그건 뭐예요?

 

율법을 모두 항상 지켜야 되는 거죠.

이것이 12절에서 말하는 ‘율법 가운데 산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즉 율법이라는 삶의 방식, 또 그 율법이 만들어내는 어떤 구조, 그 환경,

그 속에서 행복과 번영을 그 규칙대로 추구해야 된다는 거죠.

율법이 만들어놓은 규칙에 의해서 행복과 번영을 추구해야 된다.. 그것이 ‘산다’는 말뜻이죠.

 

두 세계가 있어요. 그래서 두 공간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만들어내는 세계와,

-율법이 만들어내는 세계예요.

 

믿음도, 율법도.. 다 어떤 구조를 만들어냅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을 누릴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그 안에서 번영할 수 있는가?’

하는 구조, 시스템을 만드는 거죠.

 

그래서 두 세계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눈에 보이는 세계는 구분되지 않지만,

영적으로는 두 세계가 존재하고 있는 거예요.

영적으로는 두 구조가 존재하고 있는 거예요.

 

1) 믿음이 만들어내는 세계, 거기는 은혜의 법이 통치하고 지배하는 세계고요.

거기는 정죄도 없고, 수치도 없고, 형벌도 없어요. 거기는 용서와 자유가 있습니다.

 

2) 반면 율법이 지배하는 세계가 있어요. 율법이 통치하는 어떤 구조가 있어요.

자, 이것은 말 그대로 율법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거기는 정죄가 있고, 형벌이 있어요.

그래서 그곳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곳은 모든 법을 항상 지켜야만 의로움에 이를 수 있어요.

모든 법을 항상 지켜야만, 행복과 번영에 이를 수 있어요. 그게 ‘산다’라고 하는 뜻이에요.

 

근데 이거는 법이 지배하는 한, 당연한 귀결입니다. 법이 지배하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거짓말은 안 해도, 도둑질을 하면.. 형별을 받죠.

 

그러니까 이 ‘법’이라는 것이 지배할 때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거짓말 안 하고, 도둑질 안 해도, 간음을 하면.. 그게 또 문제가 되고...

그러니까 이 모두 항상 지켜야 되는 거예요.

이게 법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피할 수 없는 귀결입니다. 뭐 그렇잖아요.

 

난 도둑질도 안 하고요. 거짓말도 안 하고요. 간음도 안 하고요.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근데 사람을 몇 명 죽였어요. 뭐 이러면 이게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법이 지배한다고 했을 때는,

모든 것을 항상 지켜야만 의미가 있는 거지,

거짓말 안 하고, 도둑질 안 하고, 간음은 안 했지만.. 사람을 죽였어요.

이러면 의미가 없어지잖아요.

 

그래서 이건 법이 지배한다고 했을 때는 어쩔 수 없는 귀결이에요.

하나라도 한 번이라도 어기면 형벌이 따르는 거예요.

이것이 법, 율법의 속성상 그렇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지배하는 것은 달라요. 믿음이 지배하는 것은 달라요.

거기는 항상 용서가 있고요. 거기는 그래서 항상 자유가 있어요. 아멘.

 

사람은 여러분, 이 두 세계 중에 반드시 한 곳에는 속합니다.

물리적으론 우리가 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 살아도,

영적으로는 이 두 구조 중에 한 곳에 속해 있어요. 두 공간 중에 한 곳에 속해 있어요.

그 속에서, 그 세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율법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은, 모든 법을 항상 지킴으로 행복과 번영을 추구하고요.

반면 믿음의 세계에 사는 사람은, 은혜로 아무 조건 없이 은혜로 삽니다.

거기서 행복과 번영을 누립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어떤 세계에 속하셨습니까? 어떤 세계 속에서 사십니까?

그게 여러분의 행복과 번영을 결정하고요.

그게 여러분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게 됩니다.

 

▲자 예수께서 하신 일은 뭔가요?

그 예수께서 하신 일은, 우리를 율법의 세계에서 → 은혜의 세계로 옮기신 거라는 거예요.

그게 예수께서 하신 일이라는 거예요.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께서 하신 일은 뭐냐면, 우리를 율법이 만들어낸 세상에서 꺼내셔서

믿음과 은혜가 만들어내는 세상으로 옮기셨다는 거예요.

우리는 원래 어디에 있었습니까?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었어요.

율법이 만들어내는 세계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모든 저주를 다 대신 받으셔서, 우리의 저주를 속량하셨어요.

그래서 우리를 다른 세계로 옮기셨는데, 그것은 믿음이 만들어내는 세계라는 거에요.

은혜가 만들어내는 세계라는 거에요.

 

우리를 다른 세계로 옮기셨습니다. 다른 법이 지배하는 세계로 옮기셨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예수를 믿는 순간,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 된 겁니다.

이전과는 다른 세계로 옮겨진 거에요. 알고 계십니까, 믿고 계십니까?

 

‘더이상 정죄가 없습니다. 어떤 죄를 지어도 정죄가 없어요. 더이상 수치도 없습니다.

어떤 죄를 지어도 여러분은 의인입니다. 더이상 형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그 죄의 값을 다 치르셨습니다.

그래서 그 율법과 정죄의 세계에서 → 여러분은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옮겨졌습니다.

 

예수께서는 전혀 다른 세계로 우리를 옮기셨어요.

옛 나라의 삶은 잊어버리십시오.

여러분은 다른 나라로 이민 가신 겁니다.

옛날 나라 법을 따를 필요 없어요.

 

이제부터는 이민 가서, 새롭게 사시게 된 그 나라 법을 따르셔야 되는 거예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나라의 법, 그 법이 만들어내는 구조 속에 살게 됐다는 거예요.

 

▲제가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제가 1993년도에 미국에 유학을 갔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처음으로 다른 나라를 간 거였어요.

다른 나라를 갔는데, 그곳에 가서 코스트코에서 물건을 하나 샀습니다.

전자제품이었던 것 같은데, 그 당시에 코스트코가 있었어요.

 

그런 물건을 하나 샀는데, 한 두 달쯤 쓴 것 같아요. 한 두 달 썼는데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아 그거 말고 다른 거 샀어야 되는데...‘ 이런 마음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하루는 셀 그룹에 가서,

‘그 물건을 샀는데 마음에 안 든다고, 그때 다른 걸 샀어야 되는데...’

그랬더니 미국에 오래 살았던 분이 저한테 ‘그럼 가서 물러!’ 그러는 거예요.

 

‘아니 두 달 썼는데 물러줘요?’

그랬더니 막 웃으면서 ‘당연하지.. 가서 물러 봐, 그냥 가서 물르면 돼’ 그러는 거예요.

오히려 저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거예요.

 

미국은요. 반품이 당연한 세상이었습니다.

제가 예전에 살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어요.

요즘은 한국도 이렇게 반품을 잘 해주는데, 1990년대는 전혀 그렇지 않았거든요.

한 번 사면, 그걸로 끝나는 거지... 그것도 두 달 쓴 걸 누가 바꿔줘요? 당연히 안 바꿔주죠.

 

그런데 제가 다른 나라로 옮겨간 거였어요.

그 나라에서는 두 달이 됐든, 세 달이 됐든, 그냥 마음 안 들면 물러주겠다는 거예요.

안 믿어지죠. 그런데 그렇다는 거에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안 믿어지는 거예요. 정말 안 믿어지고 익숙하지 않은 거예요.

‘아니 한 달, 두 달 사용했던 것을 물러달라고?’

제일 먼저 드는 게 뭔지 아세요? 죄책감이에요.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두 달 쓴 걸 어떻게 물러?’

죄책감, 정죄감 ‘그러면 나쁜 놈이지’ 하는 정죄감이 생기는 거죠.

 

그런데 환불이 된다니까, 제가 코스트코에 물건을 들고 갔어요.

‘이렇게 물러주세요’ 라고 얘기하는데, 수치감이 막 올라왔어요.

 

‘내가 막 나쁜 놈이 된 것 같아요.. 아 이거는 말이 안 되는데..’

그래서 막 주저하면서 ‘이거 좀 물러주실래요?’

 

그런데 놀랍게도, 직원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물러주더라고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오케이!’ 이렇게 물어주고, 돈을 그냥 내주더라고요.

(결국 제조회사로 반품이 되겠죠)

 

이신칭의... 근데 여러분, 제가 그걸 경험하고도요.

한동안 불편해서 잘 반품도 하지 않고요. 반품하면서도 계속 정죄감이 따라왔습니다.

‘내가 나쁜 놈이 아닐까? 이걸 물러달라고 그러는 게 말이 되나?’

 

여러분, 이게 왜 생겼을까요? 사는 세상이 달라진 거죠.

자 여러분! 새로운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게 뭔 것 같으세요?

믿음이에요. 믿음!

 

‘아 이거 물러달라 그러면 물러주는구나’ 하는 믿음,

‘이거 물러달라고 하면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물러주는구나’ 하는 믿음!

 

그런데 우리 안에는 왜인지 그게 잘 안 돼요...

옛날에 그런 세상에서 안 살았던 거죠.

제가 20년, 30년 살았던 세상은 그런 세상이 아니었던 거예요.

두 달 쓰고 물러달라고 하면 나쁜 놈이거든요.

두 달 쓰고 물러달라고 하면 파렴치한 사람이거든요.

 

그러니까 정죄감, 수치감.. 이게 계속 드는데, 그런데 새로운 나라로 들어왔단 말이에요.

이 나라에선 그래서 뭐가 필요한 거예요?

‘이건 정죄할 필요도 없고, 이건 수치감 느낄 필요도 없고, 이건 당연한 거야!’

라는 믿음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왜요? 법으로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여기서 중요한 게 뭐냐면, 법과 믿음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믿어도, 법이 그렇게 안 되어 있으면, 소용없는 것이고요.

반대로 법이 그렇게 되어 있어도, 믿음이 없으면 못 누려요.

법이 그렇게 되어 있어도 믿음이 없으면 못 누려요.

 

예수께서 여러분,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옮기셨습니다. 아멘!

이제 뭐가 바뀌었어요. 법이 바뀌었어요.

법이.. 율법이 아니라, 은혜의 법이, 은혜법이 통치하는 세계가 된 거예요.

우리는 새로운 나라로 들어갔어요.

 

이전에 율법이 통치하던 곳에서, 은혜법이 통치하는 새로운 나라로 들어갔다는 거예요.

옮겨졌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주는 사라졌습니다. 아멘!

그런데 이걸 누리려면 뭐가 있어야 돼요? 믿음, 믿음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믿음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보니까 처음에 제가 죄책감이 왜 자꾸 들었냐면

‘이거 너무한 거 아니야? 파렴치한 거 아니야?’

그런데 사실 보니까 결국 미국에서는, 그 제품 가격을 매길 때,

이것(반품 처리비용)까지 다 포함해서 매기더라고요.

 

데이터가 많으니까, 대충 ‘이 제품은 반품 확률이 얼마 정도 돼’

그러면 그 값을 이미 다 판매가격에 부과해서 매긴 거에요.

 

무슨 얘기냐면, 제가 그 물건 살 때, 반품할 것까지 다 산 거란 말이에요.

예수께서 값을 다 치르셨단 말이에요. 예수께서 값을 다 치르셨단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옛 세상에 살다 보니까, 우리가 이미 다 치러진 값인데도,

이거를 못 믿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꾸 죄책감, 정죄감 이런 거 느끼는데.. 이미 예수께서 다 치르셨어요.

 

그냥 물르세요. 그냥 가져가면요. 아무 말도 안하고 물러줍니다.

이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예수께서 값을 다 치르셨어요.

여러분은 자유고, 여러분은 이미 의롭습니다. 할렐루야!

 

▲정리하면,

이런 ‘믿음’을 얘기하면 사람들이 묻습니다.

‘그러면 은혜가 지배하는 세상은 개판 아닙니까?

아무거나 해도 괜찮다는 거잖아요. 그게 말이 됩니까?’

 

이걸 막아주는 게 뭐예요? 그게 3:14절이 얘기하는 복음입니다.

갈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정확히 예수 믿는 복음이 뭔지 얘기하고 있잖아요.

‘아브라함의 복을 누리게 하고...’ 이건 뭐예요?

‘칭의’ 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는 복이죠.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라 또 뭐예요?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14

이게 복음의 내용입니다.

 

믿을 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 그 성령께서 우리 안에 새로운 탈레마를 주십니다.

 

‘은혜로 다 용서받으면 개판되는 거 아닙니까?’

‘아뇨, 개판되지 않습니다.’

 

‘왜요?’

‘개판으로 살고 싶지 않게 돼요.’

이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계획입니다.

 

너희는 율법으로 다 통제해야만 개판이 안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하수고, 진짜 고수가 있어!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개판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싶은 것,

이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계획이라는 거예요.

 

‘예수님 믿을 때, 너희 안에 성령을 부으셔서, 개판으로 살고 싶지 않게 하시겠다’는 거예요.

할렐루야!

 

물론 우리 안에 육체의 흔적이 남아있긴 해요.

그래서 넘어지기도 하고 실수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탈레마가 역사합니다.

 

찬찬히 여러분의 마음을 들여다보십시오,

우리 안에요. 죄에 대한 유혹이 아직 있어요. 그건 사실입니다.

타락한 육체 가운데 살기 때문에, 죄의 유혹이 있어요. 없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때론 실수하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그래요.

 

하지만 그와 동시에 여전히 여러분 안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지 않으세요?

이 죄의 유혹과 동시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으세요?

그게 바로 여러분이 새로운 세계로 옮겨졌다는 증거라는 거예요.

이 마음을 키워갈 수 있다는 거예요.

 

비록 우리가 넘어지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지만, 그건 하나님께서 칭의를 해결하셨어요.

예수께서 그 값 다 치렀어요.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그 값 다 치렀어요.

그거 이미 가격에 다 포함되어 있는 거에요. 그냥 가서 물러달라고 하면 돼요.

왜요? 예수께서 값을 다 치르셨어요!

 

그거 신경쓰지 말고, 우리 안에 있는 성령으로 인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마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거 있잖아요?

그 마음 있으시지 않으세요?

 

그게 바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뜻이고, 우리가 새로운 세상에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옛 나라에 속한 존재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새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이 새로운 나라의 법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의 법이고요.

이 새로운 나라의 법은 성령의 법입니다. 롬8:2

 

이것을 여러분 누리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이 새로운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의 약속을 누리신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일어나서 같이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가 새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여 주십시오.

혹시 이 가운데 아직 그 마음이 없으신 분이 있다면,

하나님, 내게도 성령을 부어주십시오. 성령이 내주하게 하여 주십시오.’

 

제가 대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예수님 만나고요. 이해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내가 왜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싶은지, 이해할 수 없는데... 그렇게 하고 싶어요.

이게 성령 받는 능력입니다.

 

이미 성령이 내주 하시는 분들은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내가 정죄와 형벌과 수치심의 세계에서 살지 않습니다.

나는 은혜의 세계 속에 살아갑니다. 은혜의 복음으로 살아갑니다.

나로 더 충만하게 하여 주시고, 이 원수의 거짓말에 속지 않게 하여 주시고,

우리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날마다 걸어가는 은혜의 복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여 주십시오.

내 안에 있는 성령의 탈레마 desire 가 더 충만해지게 하여 주십시오’ *성령의 소욕

이 마음 가지고 우리 주여 한번 부르짓고 다같이 합심해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