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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8장 선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LNCK 2026. 8. 7.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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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2_로마서 강해(48)_선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8:31-39) Youtube

 

◈선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롬8:31-39           2026.07.12. [로마서 48강]

 

롬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복습 및 서론

 

우리가 지난 주일에 살펴본 말씀에 따르면, 참된 성도 안에서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주권적인 역사를 막거나, 방해하거나, 중단시킬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이건 성도가 살면서 겪게 되는 모든 일들, 어떤 일이든지,

그것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다르게 만듭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이 똑같은 삶을 살아가죠.

두 발을 현실의 땅에 디디고 똑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똑같이 살아가진 않습니다. 다르게 삽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지난 주에 우리가 생각했던 그 모든 말씀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롬8:28

 

그리고 그 사람들은 누구냐?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사람들이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미리 정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부르시고, 의롭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얘기를 합니다.’ 8:29~30 *golden chain

 

이것(하나님의 구원 과정)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이 말이 사실이고, 이 말씀을 하신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그리고 성실하시고 신실하신 분이라면,

이 일은 성도들에게는 일어나는 일이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고,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가 무슨 일을 겪든지 상관없이, 우리의 결국은... 그렇게 됩니다.

 

이것을 알고/ 모르는 것은 다릅니다.

이것을 믿고/ 안 믿는 것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를 믿는다는 거는, 그냥 주일날 교회를 오는 것이 아니라, 이걸 믿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내 인생이 망하지 않는다’ 이걸 아는 사람은 다르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소위세상에서 사람들이 하는 말이 뭐예요? ‘망했다, 망했다..’

요즘에는 더 심하게 ‘폭망했다’ 또는 ‘이생은 망했다’

다음 생이 있는지도 알지도 못하면서...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망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망하게 할 수 있는 조건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구원의 완성)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8:28

 

존 뉴턴이 이런 말을 하죠.

‘그분이 허락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고,

그분이 만류하시는 것은 어떤 것도 불필요한 것이다’

 

근데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고난 등)을, 우리가 필요하다고 느끼지는 않아요.

사실 일어나지 않아야 될 일들이 우리 삶에 일어나니까,

이분의 말에 동의하기가 쉽지가 않아요.

 

그러나 우리가 감정적으로 동의할 수 있느냐, 동의할 수 없느냐의 문제를 떠나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에 따라서, 우리가 이 말씀에 동의할 수 있는가 하는 건

되게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허락하신 것은, 그게 필요하니까 허락하셨다.

왜 필요한지는 난 모르겠다. 그러나 필요해서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한테 주시지 않는 것은, 필요하지 않아서 안 주신다.

내게 유익하지 않기 때문에 안 주신다.’

사실 이게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삶을 바라보는 태도인 것 같아요.

 

만일 우리가 롬8:28절부터... 뭐 28절부터가 아니에요.

성경 전체가 진리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고,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선하시며, 신실하신 분이라면,

하나님의 약속이 정말 헛되지 않죠.

 

이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많아요. 약속이 얼마나 많아요?

이 약속들이 진짜 헛되지 않다면, 그리고 이 약속을 하신 하나님이 성실하신 하나님이시고,

능치 못하신 일이 없으신 하나님이라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믿게 되죠.

즉 우리가 구원의 완성에 이르게 됨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게 되죠.

그게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5가지 질문을 던져요.

그 5가지 질문으로 우리는 나아가게 되는 거예요.

 

◑본론 / 로마서의 에베레스트, 최고봉, 절정

 

이건 질문의 형태이긴 하지만, 선언적 질문입니다. 이런 거죠.

 

1) 첫 번째 질문은,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아니, 그 하나님이 내 편인데, 누가 나를 대적해?’

 

2) 두 번째 질문은, 아들을 내어줄 정도이니,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은 내 편이실 뿐 아니라, 자기 아들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은

나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나를 위해서 아끼실 게 없다.

그분은 전능하신 분이고, 전능하신 분이 내 편이시고,

전능하신 분이 나를 위해서 아끼실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3) 세 번째 질문, 누가 성도를 고발하리요?

 

8: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누가 감히 우리를 고발해요?

하나님이 우리 보고 괜찮다고 그러시는데...

 

성도가 하나님의 법정에서 완전한 무죄 선언을 받았으며,

그 어떤 고발이나 정죄도 효력이 없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4) 네 번째 질문 ‘누가 정죄하리요?’ 세 번째와 네 번째는 비슷해요.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정죄해요? 나를 의롭다고 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요.

최후의 심판, 재판장이 나를 의롭다고 하시는데, 누가 나를 시비 걸어요?

 

5) 다섯 번째,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답은 뭐예요? 못 끊는다예요.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여기까지 우리는 가게 되는 거죠.

이 질문들 다섯 가지를, 오늘 본문 롬8:31~39절에서 다루고 있는데,

이걸 각각 따로 나누어서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결국 이게 다 같은 하나의 결론으로 지금 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을 31절부터 39절을,

보통 ‘로마서의 에베레스트’ 라고 불러요.

 

누가 처음에 그렇게 불렀겠죠. 그다음부터 다 동의가 되니까 그렇게 말해요.

‘로마서의 에베레스트다!’ 최고봉이다. 가장 절정이다.. 라는 뜻이죠.

 

근데 로마서는, 성경 전체가 다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중에서 굉장히 특별하다고 여기는 이유가 있죠.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속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이 로마서처럼 우리에게 선명하게 명백하게 분명하게 드러내주는게 없기 때문이에요.

그 로마서 전체 중에서도 본문이 절정이에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또 이렇게 이 본문을 말합니다.

‘성경이라는 히말라야 산맥 중에 그 최고봉이 8:31~39절이다’

 

그래서 이 본문에 5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 이 본문의 풍성한 깊이를

한 번의 설교로 다 다룰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나눠서 따로 생각하기도, 되게 어려운 본문이지만

그래서 아마 두세 번 정도 이 본문을 좀 우리가 함께 살피려고 합니다.

 

먼저 이 31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죠.

그 최고봉(8:31~39)은 이렇게 시작을 해요.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이제 에베레스트 산에 올라가려고 하는데, 이렇게 시작을 해요.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이 일이 뭐죠?

짧게는 8:28~30절을 뜻하고

조금 더 길게 보면 8:18~30절을 뜻합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그리고 저도 마찬가지고,

사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5:1절부터 시작했던 긴 논의에 결론을 내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5:1절부터 ~ 8:30절까지 했던 얘기에 결론을

오늘의 본문 8:31절부터 ~ 39절에 쓰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일’은, ‘5장 1절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이해를 하시면 돼요.

 

▲그래서 5:1~11절까지.. 그게 5장의 처음 11절이에요.

그 다음에 여기서 8:31~39절까지.. 그게 마지막 9절이죠.

 

이 두 문단이 로마서 5장, 6장, 7장, 8장의 괄호(처음과 끝) 같은 역할을 해요.

인클루지오 inclusio 라고 말하는데, *수미쌍관법

 

그래서 바울이 이 로마서에서 하고 싶은 말을

서론에서도 한 번 쾅 때렸고 5:1~11

마지막에서도 한 번 아주 강력하게 때리고 있는 거예요. 9:31~39

 

그게 뭐예요? ‘내가 받은 구원은 너무나 영광스러운 특권을 누리는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삶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셨다’

비록 35절에서 얘기하는 바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이 없지는 않지만.

 

5장부터 8장에서 바울이 얘기하려고 하는 것은

‘성도가 믿음으로 얻은 구원이 얼마나 되돌릴 수 없는 것이며, 즉 불가역적인 것이며,

얼마나 종말까지 확정적인 것이며, 영원히 확정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원의 은혜로 우리가 지금 허덕이며 살아가는 살아가는 삶에,

때로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서 살아가는 이런 우리의 현실의 삶 속에 있는 로마교회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게 바울의 목적이에요. 이 부분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결론부에서 바울은 다섯 가지 담대한 질문들을 던지는 거죠.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특권, 그 영광의 다섯 가지!

 

여기 이 다섯 가지 질문은요. 큰 소리로 읽어야 되는 본문이에요.

바울의 감정이 깊이 배어있는 본문들이에요.

 

‘누가 감히 우리를 정죄해? 누가 우리를 고발할 수 있어?

누가 우리를 대적해? 그런데 대적하는데, 성공할 수 있는 존재는 없잖아?

나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끊어낼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누가 있어? 죽음? 천만에!’

이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사도의 첫번째 수사적인 질문을 보면, *수사의문문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이게 첫 번째 질문이에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1

여기 ‘만일’이라고 하는 거는 가정법이죠.

 

그러나 여기서 얘기하는 ‘만일’은

‘혹시 그럴 수 있다면.. 만일 내가 배를 탄다면..’ 

근데 여기서 ‘만일’이라고 하는 거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즉, 수사의문문이죠.

실제로 대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각을 이끌어내기 위해, 강한 긍정이나 부정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의문문이죠.

 

예를 들어서 설명할게요. ‘만일 물이 100도에서 끓는다면’ 이라고 말하면,

이건 ‘만일 제가 배를 탄다면’ 과는 다르죠.

 

배는.. 내가 앞으로 탈 수도 있고, 안 탈 수도 있지만

물이 100도에 끓는 것은.. 반드시 끓어요.

바울이 사용한 ‘만일’은, 후자의 의미, 수사의문문(결론 내놓고)으로 지금 묻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거죠.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이 말은 대적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데, 누가 대적을 하냐?

어떤 강도가, 어떤 악인이, 어떤 테러리스트가, 어떤 마귀가

우리를 대적하는데 성공할 수 없다. 나를 성공적으로 대적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이게 바울의 대답이에요.

여러분이 두려워하는 인생에서, 두려워하는 모든 대상이 여기에 다 들어가겠죠.

 

다시 말하면, 크리스천은 하나님 말고는 두려워할 대상이 없어요.

어떤 상황도, 어떤 대상도 어떤 가정적 내 인생에서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그런 미지의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관건은 뭔가 하면, 이 말씀이 우리에게, 그런 확신에 이르게 하느냐 하는 것은,

결국 어디에 달려 있는 문제인가 하면,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다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잖아요.

성경에 하나님께서 ‘나는 이런 하나님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을,

제대로 깨닫고 이해하고 믿는 게 아니고...

 

우리들에게 그런 본성이 있단 말이에요. 다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어요.

나는 죄를 심판하시는 사람이 별로예요. 나는 그냥 everything is okay!

그런 뒷방 할아버지 같은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도 있어요.

 

‘너무 까다로운 하나님은 나는 싫어!

뭐 걸핏하며 화내고, 때리고, 야단치는 그런 하나님은 싫어!’

이런 식으로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그런 믿음을 우리가 갖고 있어요.

 

▲여러분 그런 제가 수요기도회에 설교하면서 언급했던

1952년에 영국에서 나온 책인데, 어떤 사람이 쓴 책에 보니까

‘20세기를 움직인 1백권의 책’ 가운데 이 책을 꼽았더라고요.

 

J. B Phillips가 쓴 <당신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

이게 1950년대 영국 교회를 보면서,

성공회 목사인 J. B Phillips가 ‘영국 교회의 문제는 뭔가 하면,

지금 영국 교회의 문제는, 하나님이 너무 작다’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우리를 대적할 수 있는 게 많겠죠. 그렇잖아요.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고, 우리를 낙심하게 하고, 우리를 절망하게 하고,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데리고 가고, 우리를 이리저리 휘두르고,

우리를 채찍으로 때리고, 우리를 묶어서 그냥 원하는 대로 데리고 갈 수 있는 세력이 많겠죠.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들이 세상에 산재하겠죠.

 

왜요? 하나님이 너무 작으니까!

내가 지금 직면하고 살아가는 문제보다도 작고,

내가 두려워하는 내 직장의 보스보다도 더 작고, 무능하시고, 능력이 없으시고,

그러니까 우리 신앙의 많은 문제가, 이 ‘지극히 왜소한 하나님 인식’에 기인한다는 거예요.

 

반면에 직장의 사장님은 아주 큰 존재예요.

내가 지금 세상에서 성공해야 되는 거는 너무나 큰 문제예요.

내가 하고 싶은 거 너무나 커요. 근데 하나님은 별로 도움이 안 돼요.

하나님이 너무 작아서, 능력이 없으니까요.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기에는 무능하시니까.

내 인생에 원치 않는 이 일로부터 나를 건져내시기에는 힘이 모자라시니까.

 

우리는 전부 대립의 세계를 살아가죠.

인류는 선과 악의 대립, 빛과 어둠의 대립, 대등해 보이는 두 세력 사이에

대립과 갈등의 시대를, 그리고 전쟁의 시대, 다툼의 시대를 우리는 다 살아갑니다.

갈등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기적이라고 얘기해요. :31

왜냐하면 게임은 끝났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니까, 게임은 끝난 거예요.

아무나 나를 건드릴 수 없어요. 대적할 수 없어요.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나에게 악한 일은 하나도 없어요.

 

왜냐면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선으로 합력하여 만드시고,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니까,

고난조차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끄는 도구가 되게 하시니까,

최악의 사건도 최상의 것으로 바꾸시니까요.

 

그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에요. 온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에요.

창조하신 세상을,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섭리하시고, 다스리시고, 통치하세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여러분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 보셨나요? 한 번 보세요.      주1)

이렇게 이 세상을 이렇게 놀랍게 전능하신 능력으로 완벽하게 다스릴 수 있는 존재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무한하신 지혜로, 그 무한한 능력으로, 무한한 선하심으로

그 일(우리를 위하심,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 온 세상은 심판을 받을 겁니다.

마지막까지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로, 온 세상을 심판하신다고 말합니다.

거기서 피할 자가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면,

이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을 대적할 존재도 당연히 없습니다.

 

바울은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거죠.

세상과 욕심과 마귀가 합심해서 성도를 대적해도.. 소용없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귀신의 영들,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영들이 연합해서

온 천하의 왕들을 모아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지만.. 소용없다’는 얘기입니다.

성공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전쟁을 겪었던 다윗이 시편에서 이런 고백을 하죠.

시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무서워할 존재가 없다는 거예요. 이런 고백의 메아리가 시편에 넘쳐나죠.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사40:15~19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그렇게 크게 생각하지 않죠. 크게 믿지를 않죠.

미국 같은 나라를 보세요. 요즘 ‘미국을 다시 한번 위대하게 만들겠답니다.’ MAGA

하나님 뭐라고 그러세요? ‘물 한 병이 아니고요. 물 한 방울 같은 존재’라고 말씀하세요.

 

참.. 이걸 뭐라고 얘기해야 될까요?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 그들은 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

‘우리는 다시 위대해 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하나님은 누굽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우린 먼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않을 길은 없습니다.

내가 대단해 보이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그렇게 그 인식이 무너집니다.

관건은 이거예요. ‘내가 성경에 기록된 그 하나님을 아나? 내가 그 하나님을 믿고 있나?’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1

바울은 ‘아무도 없다’ 말합니다. *수사의문문

 

하나님이 전능하셔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바울사도는 31절에서 첫 번째 질문을 드릴 때, 암시적으로 전제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그런데 32절에서 두 번째 질문을 할 때는 하나님의 속성을 명시적으로 얘기합니다.

그 속성이란..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선하시다’는 말을 명시적으로 쓰진 않았어요.

그러나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든 사람을 내주신 이.. 그런 분이 어딨죠?

그 말은, ‘아들을 주셨는데, 다른 거 아낄 게 뭐가 있어?

그분이 모든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고,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인데...’

 

그렇지만 그 논리를 따라간다고, 우리에게 이 사실을 다 이루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이건 믿음의 영역이에요.

 

만일 여러분들이 이 논리를 따라서, 이 믿음을 고백한다면

그리스도인은 불평할 수가 없고, 감사하지 않을 수도 없고,

짜증과 원망으로 갈 수도 없어요. 그렇지 않나요?

 

바울이 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나요? 무슨 근거로?

이런 근거로요.

 

▲바울은 롬5장을 시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증명합니다.

5: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이 사건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증명하셨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5장부터 8장의 서론과 결론을 우리가 같이 살펴보는 건데, *수미쌍관법 inclusio라서

5:8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얘기를 했어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서!

 

그리고 이 마지막 부분에서는 지금 뭐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8:32절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든 사람을 내주셨다’

 

‘아끼지 아니하시고’ 그랬잖아요.

‘아들을 아끼지 않았다’는 똑같은 표현이 어디에 나오나 하면, 창22:16절에 나와요.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는 장면이에요.

 

그때 하나님께서 ‘스톱! 그만해! 그게 아니야! 멈춰!’ 천사를 통해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하시죠.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이게 히브리어말로 쓰여졌는데, 헬라어로 번역한 게 70인경이라고 했잖아요.

 

‘아까지 않았다’라는 똑같은 단어를          *οὐκ ἐφείσω not spared

로마서 8:32절에서 ‘아까지 않았다’고 쓰고 있어요.      *οὐκ ἐφείσατο

누구를 아끼지 않았다? 독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걸 똑같이 쓰고 있어요.

 

어떤 의미일까요?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아들을 아끼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나 하면

'네가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아브라함 편에서 보면, 아들을 아끼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그의 신앙의 증명이었어요.

 

그래서 롬8:32절을 통해서 창22:16절을 보면,

사실은 창세기에 있는 이 본문은

‘인간 편에서 하나님을 경외해야 돼’ 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본문인가요?

아니예요. 로마서 8:32절을 가르쳐 주는 본문이에요.

 

말하자면

우리에게 ‘너 아들을 더 사랑해, 하나님을 더 사랑해?’ 그런 도전을 주시는 차원보다는,

 

‘인간 편에서 하나님을 경외해야 돼,

아들을 아끼지 않고 아들을 희생할 만큼 하나님을 사랑해야 돼’ 하는 것을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명하는 이야기’라고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이삭이 예수님을 예표하죠)

 

우리는 창세기 22장을, 처음 성경을 읽는 독자들은 이렇게 보죠.

‘와! 말도 안 돼! 나보고 죽으라 그러면 죽겠는데, 아들을 갖다 바치라고?’

 

어떤... 미국 목사님이 설교하면서, 이런 얘기하는 걸 인상적으로 들었어요.

아들을 낳았대요. 아들을 낳았을 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대요.

‘내가 이 아들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그 다음에 딸을 났대요.

그 다음에는 ‘내가 이 딸을 위해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겠구나’ 그 생각을 했대요. *공격하면

 

이 말은, 여러분 이 본문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았대요.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서 내주셨대요.

 

그 아들을 이 내주셨다는 이 표현은,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그 일을 하셨다는 얘기죠.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위해서요.

하나님의 선하심을, 어떻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명하시나요?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증명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뭐가 있을까요?

없어요.

 

하나님은 독생자를 내어주심으로써 당신의 선하심을 증명했다는 것이

두 번째 질문을 통해서, 바울이 얘기하는 것입니다. :32

 

사도는 단순히 성도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거 아니에요. 왜요?

우리의 확신이라고 하는 것은.. 감정은.. 아침저녁으로 바뀌잖아요.

어떻게 확신이 우리의 감정에 뿌리를 내릴 수 있겠어요?

 

바울이 하는 얘기는 뭔가 하면, 복음이라는 사실에,

우리의 확신이 뿌리를 내리게 하는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주신 일입니다.

 

그럼 복음은 뭐예요? 이 본문에 의하면 복음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내주신 일입니다.

 

그 일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성육신 부터 시작해서 율법 아래에 오셔서,

율법을 순종하여 사신 것과,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까지 모두를 포함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바울이 하는 말을 잘 봐야 돼요.

바울은 복음이라는 이 사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의 사람이 되어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까지, 이 사실에 우리의 확신이 뿌리를 내려야,

그 다음으로 할 수 있다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8: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사도가 세 번째(:33), 네 번째(:34) 질문에서 다루는 것은 비슷합니다.

‘누가 고발하리요? 택하신 자들을 누가 고발하리요?’ :33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하는 얘기입니다. :34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는 자라고 일컬어지는 마귀가 그 일을 합니다. 계12:10

아침 저녁으로 그 일을 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나를 고발하고, 아침 저녁으로 나를 정죄합니다.

 

어떻게 해요?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내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서 하기도 하고,

또한 내 양심, 내 안에 있는 양심을 통해서도 그 일을 합니다.

고난의 현실을 마주하고 살아가는 우리의 약함을 집중적으로 공격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고발하고요. ‘네가 그러고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인가?

사람들은 모르지만 너와 내가 알고 있는 게 있잖아?’ 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 고난의 현실, 우리가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힘들에 대해서

사도는 35절에서 또 이렇게 말하죠.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이랴’

이런 것들을 우리는 마주하고 살아가요. 우린 이 속에서 약해집니다. 약함을 느낍니다.

 

고난의 현실에 끝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싸워야 하는 생각이 있다고 바울은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게 뭔가 하면 바로 33절과 34절에서 얘기하는 세 번째, 네 번째 질문입니다.

‘양심의 고발과 정죄감’입니다.

 

양심의 고발과 정죄감을 통해서 우리가 좋아지지 않아요.

절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겐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을

우리가 누릴 때 사람은 변합니다. 8:1~2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다면, 내가 이런 상황 속에 내버려둠을 당할 수 없어’

라고 우리는 생각하게 되죠. 이 생각과 싸워야 한다는 겁니다.

 

성도가 가볍다고 생각할 수 없는 죄를 지을 때가 있습니다.

성도가, 또다시 같은 죄에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정죄감 아래 들어가서 신음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하신 것을 의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8:28절의 약속을 믿지 않게 됩니다. 의심으로 이어지게 되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도

결코 선이 될 수 없는 일은 존재해!’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사도는 인간의 약함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가 여기서 35절에서 얘기한 것

그리고 그 뒤에서도 얘기하는

이런 인간의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고난의 문제들을,

사도는 이거 다 자기가 몸으로 겪은 것들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그는 이것들을 낱낱이 얘기를 한 바 있죠.

그는 영적인 슈퍼맨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같이 연약한 사람이었다고요.

그리고 그는 종종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라고 말할 때 고후4:16등

저는 이 사람이 얼마나 낙심과 싸웠던 사람인가를 생각합니다.

 

이렇게 고난의 현실이 우리의 믿음을 흔들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게 뭘까요?

양심이 나를 고발하고 정죄할 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의심이 내 안에 일어나기 시작할 때,

우린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때 이런 질문을 하게 돼요.

 

‘하나님이 정말 선하시면, 어떻게 이런 일이 하나님을 믿는 나에게 일어나지?

어떻게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내버려 두시지?’ 이런 생각을 한다고요.

어디에 방점이 있냐면 ‘하나님이 정말 선하신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되는 거예요.

 

사도의 대답이 여기에 있어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게 사도의 대답이에요. :32

 

이런 의심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기 시작할 때,

우리의 생각 속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는 생각들이 올라올 때, 이 말을 하는 거예요.

 

사도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명하는 수단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아니라고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겪은 일은 수천, 수만, 수십만, 수백만 개겠죠.

그 모든 것들을 여러분들이 정확하게 분석을 해서 AI를 통해서 분석을 해서 통계를 해서

하나 하나를 귀납법적으로 저울에 양쪽에 올려놓고 보면,

‘하나님의 선하심’이 51%이상이예요. 선한 게 조금 더 무거워요. *이건 올바른 방법 아니죠.

 

그러면 앞으로 여러분이 살아가야 할 길을,

낙관적으로 ‘하나님은 선하실 거야’ 라고 확신할 수 있어요?

그거는 인생을 확률에 맡기는, 운에 맡기는, 우습지도 않은 일이죠.

그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심을, 여러분들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전체 통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여러분들에게 증명하지 않으세요.

그걸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명하지 않으세요.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라고

계시록 6:9절에 쓰고 있는 그 순교자들이 역사상 얼마나 많았습니까?

얼마나 많은 교회사의 영웅들이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교수대로, 화형장으로 끌려가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을 그 자리에서 건져내시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증거하고 죽었어요.

이걸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가진 신앙은 별개의 신앙이고, 우리의 신앙과는 다릅니까?

우리 보통 사람들의 신앙과? 아니요. 동일한 믿음이라고 베드로는 말한 바 있습니다.

특별한 믿음 없습니다. 동일한 믿음입니다. 벧후1:1

 

▲제가 시118편 설교할 때 여러분들에게 소개했던 교회사의 사건을 하나 좀 나누고 싶습니다.

1745년 프랑스의 위그노 목사였던 루이 랑은 Louis Ranc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면 목숨을 구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지만

그는 제안을 거절하고 사형을 받게 됩니다.

 

사형장으로 가면서 그는 시편 118:24절을 프랑스어로 찬송했습니다.

그때 위그노들이 부르던 아주 유명한 노래예요.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아시죠. 그 찬양? ‘이 날은 이 날은’ 얼마나 즐거운 노래예요?

이 노래를 부르면서 그는 사형장으로 갔습니다.

프랑스어 번역을 그대로 우리말로 번역하면 ‘이 날은 여호와께서 만드신 날이다

우리 이 날을 기쁨 속에서 살자. 환희로 크게 기뻐 뛰자’

 

몇 주 후에 또 다른 위그노 목사, 80세가 된 자크 로제가,

30년 동안 당국을 피해 숨어 지내다가 결국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로제도 처형장으로 끌려가면서 루이 랑이 부른 그 노래를 똑같이 불렀습니다.

 

프랑스의 또 다른 위그노 순교자, 1762년, 한 17년 지나서 프랑스와 로쉐트는 역시

그리스도를 버림으로써 목숨을 부지하기를 거절하고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거리에 마련된 교수대로 끌려갔습니다.

‘이 날은 여호와께서 만드신 날이다, 우리 이 날을 기쁨 속에서 살자.

환희로 크게 기뻐 뛰자’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들 수 있었던 것은

바울 사도가 여기서 가르쳐준 것을 그들이 알았기 때문이고,

그것을 그들의 삶에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 하나하나를 통해서 증명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이렇게 섬겼는데, 하나님은 마지막에 나를 이런 식으로 비참하게

내 인생을 데려가셔?’하고 그들은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기뻐뛰었어요. 그렇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명하고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내 인생의 사건들을 통해서 증명하고 신뢰하려면,

우리는 공정하게 우리의 인생의 모든 것들을 다 평가할 수 있어야 될 겁니다.

 

근데 아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인생을 운에 맡기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을 겁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인생의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당신의 선하심을 증명하신 방식을 사도는 32절에서 말하는 겁니다.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을 위해서 내주셨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하나님이 당신의 선하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독특하고도 역사적이고 불가역적인 증명 방식입니다.

 

이건 심증이 아니고 물증이다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믿는 성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건 어떤 의미예요?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건 여러분들에게 어떤 의미예요?

 

내 삶에서 지금 마주하고 있는 현실의 고난 속에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들게 하고

하나님이 나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명하신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모든 이것도 선하심으로 만들고야 마시는

그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무한히 선하심,

그리고 무한히 지혜로우심의 증명이고, 약속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현실, 있을 수 있죠.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왜 나는 이 고통 속에 살아야 되지?

왜 나는 이 고통에서 하나님이, 나를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냥 살짝만 미뤄도 나는 여기서 나올 텐데.. 좀 더 즐겁게 살 수 있을 텐데..’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보면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죠.

‘하나님이 악해서 나에게.. 이 일을 그냥 내버려 두시고 못 본 척 하시고

너 고생 좀 해 그러는 건 아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은 십자가 복음으로 그걸 증명하셨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다.

 

나를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나를 건져내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무한하신 지혜로, 내 머리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내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일도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시는 선함이요,

은혜에 변장된 축복이라고 말씀하시는 거구나...’ 라고 할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겸손해지죠. 내 머리로 하나님을 재단하고 판단하지 않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내리는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바울사도와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선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이 선언적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고 계신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입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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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

브루스 올마이티 -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