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한국교회사의인물들 성결출판사
플로렌스 머레이의 생애 1부 | 조선을 사랑한 여의사 | 시대를 밝힌 여인
◈조선을 사랑한 여의사 플로렌스 머레이의 생애 1부
Florence Murray 1894~1975
※1921년 당시 조선의 생활상, 선교사가 운영한 병원 상태를 엿볼 수 있습니다...

플로렌스 머레이는 1894년 2월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 북부 해안에 있는
픽토우 랜딩이라는 마을의 외할머니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다음 해에는 남동생 알렉산더가 태어났습니다.
당시 그녀의 아버지는 장로교 신학대학에 재학중인 Pine Hill DIvinity Hall
신학생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학교를 졸업한 후, 핼리팩스 근처에 있는 로렌스 마을에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플로렌스가 여섯 살 때 얼타운이라는 마을로 이사했고,
아버지는 그곳에서 10년간 목회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남동생 에드워드와 찰스, 또 여동생 안나가 태어났습니다.
그때 남매들은 10학년까지, 한 교실에서 모두 함께 공부하는 작은 학교에 함께 다녔습니다.
시골에서 자라다 보니, 여자아이들이 미래에 꿈꿀 수 있었던 전문직업은
교사, 간호사, 속기사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플로렌스는 목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부모님께 ‘나는 목사가 되고 싶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캐나다 교회의 본부가 있는 핼리팩스로 데리고 갔습니다.
본부 간사들은 좋게 생각은 하지만,
안타깝게도 장로교단에서는 여성 목사를 맞이할 준비가 아직 안 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플로렌스는 차선책으로 의사를 선택했습니다.
부모님은 그녀가 그 목적을 이루도록, 있는 힘을 다해 뒷바라지해 주셨습니다.
당시 아버지의 봉급은 1년에 750달러로, 매우 가난하게 살았던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난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웃이 가진 것만큼은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갖추고 있었고,
장난감 같은 것은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플로렌스는 ‘나름대로 재미있고 좋은 시절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옷을 손수 만들어 입히는 등
하나부터 열까지 절약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어머니 자신이 필요한 것들은, 하나도 갖추지 못한 채 지내셨습니다.
▲아버지는 신학대학에서 함께 공부했던 세 친구들과 함께,
해외 선교사로 나가기를 희망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교회 예산은 세 사람 몫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내와 아이들을 부양하고 있었으므로, 독신자들보다 생활비가 더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독신자들이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는데,
이들은 훗날 조선에서 캐나다 장로교 선교의 개척자들이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이 후에 안식년 휴가를 받아 귀국했을 때,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그때 플로렌스는 이들이 들려주는 조선의 생활상과 환경에 대한 이야기에 매혹되었습니다.
로버트 그리어슨 박사는 조선에서 병원을 운영하며, 의료진들을 훈련 양성한다고 했는데,
플로렌스는 정말 훌륭하고 보람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케이트 맥밀란 박사 역시, 방 두 개만 있는 흙담집에서 병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좀 더 깨끗하고 좋은 건물에서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날 이후 플로렌스는, 아버지를 대신해 그곳(조선)에 가서 봉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버지의 다음 목회지는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였습니다.
플로렌스는 동생 알렉산더와 그곳의 중심도시 샬럿 타운에 있는
프린스 오브 웨일스 대학에 다녔습니다.
그때 4년마다 열리는 북미 학생선교자원대회가 내슈빌에서 열렸습니다.
Student Voluntray Mission Movement (SVM)
이 회의에 참석한 대학교 학생들은, 세계선교상황을 상세하게 보고하면서
동료 학생들에게 교육, 전도, 의료, 각 분야에 걸친 해외선교사역에 지원하라고
열렬히 권장했습니다. *SVM 선교대회를 이끈 주최측이 주로 같은 대학생들
(*미국 네슈빌에서 SVM 대회가 열린 시기는 1906년 02.28.~03.04. 이때는 12세.
그러므로 1920년 아이오와주 데스모인스로 보는 것이 합리적. 이때는 26세.
이듬해 1921년에 조선에 선교사로 입국. 당시 27세.)
그때 알렉산더와 플로렌스는 둘 다 해외선교사로 자원했고,
태어났을 때 이미 자녀를 주님께 바치기로 마음먹었던 부모님은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둘은 서로 지원 결심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에, 각자 자기만 지원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함께 지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부모님을 통해서였습니다.
남매는 각각 자신이 결심한 내용을, 편지로 부모님께 알렸던 것입니다.
플로렌스는 헬리펙스에 있는 달하우지 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습니다.
Dalhousie Medical School
나중에 알고 보니 맥길대학교나 그 외 유명한 대학 의과대학에서는
아직도 여학생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달하우지 대학교는, 다른 대학교보다 훨씬 빨리 자격 있는 여학생들을 뽑기 시작
했으므로, 당시 우수한 여자 졸업생들이 많았습니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 대학의 교장을 비롯한 각계 인사들이,
플로렌스에게 의과대학 진학을 다시 생각해보라고 만류했습니다.
이유는 ‘대학 강사와 학생들이 여학생이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므로,
학교에서 견뎌내기 힘들 것이다’ 라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의과대학을 다니는 5년 동안, 플로렌스가 여자라는 이유로
자기를 불쾌하게 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동기 남학생들은 하나같이 신사였고, 학업을 마칠 때쯤엔 거의 형제처럼 서로 친해졌습니다.
▲플로렌스가 의과대학에 들어간 때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1914년이었습니다. *20세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와 남학생들은 입대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10명만 남아 공부했습니다.
남아있는 학생들은, 형제와 동료가 프랑스의 참호 속에서 싸우며 죽어가고 있는 이때,
춤과 같은 오락으로 시간을 보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끔 산책이나 영화 관람만 했을 뿐,
대부분의 여가는 적십자 사업을 도우며 보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주로 했던 일은, 전선의 군인들에게 보낼 양말, 음식, 초콜릿 같은 것을 만들고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1917년 12월, 의대 4학년 재학 중에, 어마어마한 폭발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까지 역사상 인간이 저지른 폭발사고 가운데, 가장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TNT를 가득 실은 프랑스 군수물자 수송선 한 척이
핼리팩스 항만에서 벨기에 선박과 충돌해서 생긴 대폭발이었습니다.
도시의 절반이 파괴되었고 자그마치 사망자가 2,000명, 부상자는 1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 외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썰물에 쓸려 들어갔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의과대학 상급반 학생들은 모두 구조에 나섰습니다.
군대에서는 응급병원을 설치했고, 수천 명의 응급환자들을 보살폈습니다.
그때 플로렌스는 기독교 청년회에 설치된 ‘응급병원’에 배치받았습니다.
지휘장교가 물었습니다. ‘학교에서 마취학은 배웠소? ’
플로렌스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장교는 수술실로 가서 환자를 마취시키라고 명령했습니다.
첫 번째 환자는 6살난 어린아이였습니다.
어린이에게도 어른만큼의 마취제를 사용해야 하는지,
아니면 적은 양을 사용해야 하는지.. 플로렌스는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아이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마취가 어느 정도 됐는지 판단할 수 있을 텐데,
불행하게도 그 아이는 폭발로 이미 두 눈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하는 수 없이 두려움에 떨면서 마취를 시켰습니다.
하루종일 다른 사람들도 이런 방법으로 마취시켰습니다.
다음날 아침, 지휘장교는 플로렌스를 정식 마취사로 임명했습니다.
▲의대 5학년이었던 1918년, ‘스페인 독감’이라고 불리는 세계적인 전염병이
이곳을 강타했습니다.
처음에는 이 질병이 무슨 병인지, 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여러가지 합병증이 나타났고, 수백 명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11시쯤이었습니다.
주의 공중위생 책임자가 플로렌스를 불러냈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락포트로 가시오. 그 작은 어촌에서 두 명이 사망했는데,
그곳의 의사도 병에 걸렸습니다.’
플로렌스는 ‘제가 가서 도와주고 싶지만, 저는 아직 의사 자격증도 없고,
의료기구도 갖추지 못한 학생이라서 난처합니다.’
그러자 그가 말했습니다. ‘나도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지금 이것저것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많은 의사들이 전선으로 나갔기 때문에, 그곳에 보낼 의사가 없어요.
의료기구는 그곳 의사가 쓰던 것을 사용하면 됩니다.
만일 무슨 말썽이 생기면 나한테 연락하세요.’
다음날 아침, 플로렌스는 열차편으로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락포드 시내를 돌아보니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어떤 가정은 가족 모두가 스페인 독감에 걸려, 음식을 마련해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마을 공회당에 응급병원에 설치하고, 간호사들을 핼리팩스에서 전화로 불렀습니다.
이틀 후에 두 사람이 도착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이미 열차 안에서 전염되어
락포드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으로 직행했습니다.
그곳 주민들 가운데는, 설령 자기가 병에 걸린다 해도,
치마 입은 여의사는 자기 곁에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하겠다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정작 병에 걸리자, 마음이 바뀌어 치마 입은 플로렌스를 찾아왔습니다.
플로렌스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그 전염병이 가장 극성을 부리던 시기여서
이후에 더 이상의 사망자는 생기지 않았습니다. *전염병 특성상
그녀는 그곳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했던 것 이상으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많은 강사와 학생들이 전쟁터로 나가서, 학교 수업은 제대로 못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의사가 모자랐던 시기였으므로,
폭발사고와 전염병으로 생긴 많은 환자들을
실제로 치료하는 귀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과중한 일에 시달리고 있는 전문의들을 도와서, 외과 수술을 하거나,
산부인과에서 실습할 기회도 있었습니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빅토리아 종합병원]에서 인턴 과정을 밟았습니다.
그런데 그 병원 원장은, 남성과 여성을 차별하는 기업인으로,
여자 졸업생은 인턴으로 받지 않았습니다.
플로렌스는 인턴으로서 수련만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월급도 받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부모님이 교육비로 쓴 돈을, 다만 얼마라도 갚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유일하게 보스턴의 [롱아일랜드 병원]에서 인턴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일주일에 11달러나 되는 후한 봉급을 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플로렌스는 그 병원에 지원해서, 인턴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 병원에서는 인턴들을 특별히 지도하거나 가르치지 않고,
각자 알아서 일하게끔 내버려 두었습니다.
대부분의 환자가 궁색한 사람들이거나, 외로운 노인 또는 미혼모들이었습니다.
병원 직원들은, 이들을 마치 오물이 잔뜩 묻은 더러운 것을 대하듯 했습니다.
몇몇 의사들만이 이들을 동정해 친절히 대해주었을 뿐,
병원 측에서 환자들을 대하는 태도는 대체로 거칠었습니다.
의료 수준은 형편없이 낮았고, 환자들의 입장은 조금도 생각해주지 않는 의사들에게,
플로렌스는 몹시 실망했습니다.
한 번은 어떤 의사가, 당뇨병에 걸린 할머니의 입속을,
비누로 닦아내는 광경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평소에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는 환자들은,
(의료진이) 그런 식으로 골탕 먹여 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모습들을 본 플로렌스는, [롱 아일랜드 병원]은 결코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말 휴가를 얻어 핼리팩스로 돌아온 플로렌스는 노바스코샤 주의 저명한 외과의사인
맥도걸을 만나 의논했습니다.
플로렌스는 졸업반 시절에 그의 조수였는데,
그는 독립적으로 의원 간판을 내걸고, 환자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롱아일랜드 병원]을 사직하고, 이윽고 ‘외과대학의 해부실습 강사’ 자리를 얻었습니다.
부모님께 적지 않은 돈을 돌려드린 다음에,
캐나다 장로교 해외 선교위원회에, 선교사로 나갈 준비가 되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당시 조선에 있던 케이트 맥밀란 박사가, 자기를 도와줄 여의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과연 조선으로 갈 것인가?’ (아버지 신학교 동기로, 어릴 적에 집에서 만난 적이 있었음)
플로렌스는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왜 그렇게 먼 나라에 가려고 하는지, 혹시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닐까?’ 하고요...
▲결국 플로렌스는 조선으로 갔습니다. *1921년, 당시 27세
그때 조선에는 서양 사회보다 질병이 만연해 있었던 데 비해,
교육받은 의사는 거의 없는 탓에
많은 사람들이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한 채, 무지와 미신의 희생자가 되고 있었습니다.
여의사 맥밀란은,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 수년 동안 홀로 외롭게 일하면서
다른 의사들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맥밀란 의료 선교사는, 플로렌스가 도착한 이듬해인 1922년에 순직하죠.
케이트 맥밀란(Kate McMillan, 한국 이름: 맹미란, 1868~1922) 선교사는 캐나다 장로회 소속의 여성 의료 선교사로, 20여 년간 함흥 제혜병원을 설립·운영하며 조선의 가난하고 병든 환자들을 위해 헌신하다 순직. 1922 당시 54세 |
플로렌스는 젊고 건강했으며, 의술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전쟁이 끝나 군대에 갔던 의사들이 모두 돌아올 것이므로,
더 이상 캐나다에 머물 필요가 없었습니다.
조선으로 떠나지 못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여튼 그것은 대단한 모험이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더구나 플로렌스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자랐기 때문에,
자신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에서 일생을 바치겠다는 강한 신념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남에게 봉사하고,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신념을,
악령의 두려움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에서 접한 여러 상황들은
그녀가 의과대학에서 배우지 못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맥밀란 박사는 어떤 상황에 부딪혀도,
다 처리할 수 있는 최상의 요령을 터득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달구지 한 대가 함흥시 선교병원 문 앞에 다다랐습니다.
맥밀란 박사가 먼저 나갔고, 플로렌스도 뒤따라갔습니다.
달구지를 몰고 온 한 떼의 사람들은 기진맥진해 있었고,
얼굴에는 걱정과 조바심으로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달구지 위에는 다친 사람이 누워있었는데, 상처가 꽤 깊은지 말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저희 형님이 사흘 전에 황소뿔에 받쳤어요.
곧바로 달구지에 태워 여기까지 오긴 했는데.. 돈이 없어요. 제발 좀 도와주십시오.
형님을 살려주세요.’ 하고 달구지를 몰고 온 남자가 애원했습니다.
‘선생님, 제발 이 사람 좀 살려주세요.’
죽어가는 사람의 아내와 어머니도 애걸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애원하는 사람은, 환자 자신이었습니다.
말 못하는 환자의 눈이, 더 깊고 강렬하게 애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디 봅시다’ 맥밀란은 환자가 덮고 있는 피로 범벅이 된 이불을 젖혔습니다.
배가 터져 벌어진 틈으로 튀어나온 내장이, 벌써 새까맣게 말라 굳어있었습니다.
맥밀라는 이불을 가만히 덮고는 그들을 타이르듯이 말했습니다.
‘집으로 다시 데리고 가십시오. 이분을 살리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환자는 냉혹하게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순간 플로렌스는 깜짝 놀라며 박사를 바라보았습니다.
‘비록 살리기에는 늦었지만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를 마땅히 입원시켜,
최대한 편안하게 해 주어야 하지 않는가?
또 몇 날 며칠 동안 달구지를 몰고 오느라 지칠 대로 지친 가족들에게도
잠깐만이라도 들어와 쉬어가라고 해야 옳지 않은가?’
맥밀란은 주저앉아 목 놓아 우는 그들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기면서 입을 떼었습니다.
‘여기 사람들은, 만일 저 환자가 병원에서 죽으면,
그 혼령이 가족을 괴롭힌다고 믿지...
가족들도, 그가 생면부지의 낯선 장소에서 죽느니,
길가에라도 차라리 집으로 가다 죽는 것을 바랄 거야.
만일 환자가 상황을 파악하고 말을 할 수 있다면,
반드시 집으로 가자고 고집할 게 틀림없어.
객사해서 자신의 혼이 영원히 방황하는 걸, 그가 원할 것 같은가? 천만에.
그리고 환자를 그냥 돌려보내는 이유가 또 있지.
병원에서 누가 죽으면, 입원한 환자들은 귀신이 나온다고,
아무도 병원에 남아있으려 하지 않아.
또 가족이 통곡하는 울음소리가, 길 건너편 영생 여학교에까지 들려
700명의 학생들이 다 알아차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 [재혜병원 濟惠病院]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이 금세 사방에 퍼지게 돼.
그러면 환자들은, 낮에도 우리 병원에 오지 않을 거야.
그러니 오히려 회복 가능성이 있는 환자들을 좀 더 성의껏 돌봐주는 게 낫다고 생각하네’
플로렌스가 듣고 보니, 자신의 생각은 너무도 감상적이고, 단순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일은 조선에서의 의료봉사활동을 위한 첫 번째 교훈이 되었습니다.
▲맥밀란은 키가 크고 몸이 가냘픈 여의사로,
얼굴에는 주름이 많고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어, 실제 나이 54살보다 더 늙어 보였습니다.
20년이 넘게 아무런 장비나 시설도 없이, 그 힘든 일을 혼자 책임지고 이끌어왔으니,
그럴만도 했습니다.
연약한 몸은 매우 지쳐 보였지만, 그녀의 파란 눈은
자신의 사명에 대한 의지와 신념으로 언제나 불타올랐습니다.
선교병원은 2층짜리 건물로, 각 층에는 작은 상자 같은 방이 여러 개 있었고,
방 안에는 침대가 두세 개씩 놓여 있었습니다.
복도는 높이가 1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데다가
90도로 꺾여 있어, 환자를 태운 들것은 모퉁이를 통과할 수 없었습니다.
환자가 걸을 수 없을 경우에는, 다른 사람이 환자를 업어야 했습니다.
좁은 복도에는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항상 어두컴컴했습니다.
그 복도를 따라가다 보면, 입원실과 외래환자 대기실이 서로 마주보는 곳에 이르러
복도 바닥 높이가 갑자기 20CM 툭 솟아나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나 한 번씩 곡예를 해야 했습니다.
‘이 건물을 세울 때 양끝에서부터 각각 지어오다가, 중간 지점에서 마무리를 했기 때문에
바닥 높이가 어긋나서 그렇게 되었지.
그래서 사람들이 이 지점에서 항상 넘어질 뻔하지만, 아직 다친 사람은 없어’
처음 이곳에 도착했던 날, 맥밀란이 설명해 주었습니다.
수술실은 창문이 남향이라, 여름이면 햇볕 때문에 열기가 대단했고,
나무로 만든 마룻바닥 위에 덮인 콘크리트는, 군데군데 파여 있었습니다.
수술기구도 제대로 없는 데다, 그나마 있는 것들은 다 낡은 구식이었습니다.
침대 위에는 짚으로 만든 깔개를 깔아놓았는데,
안 그래도 딱딱한 것이 뭉치고 덩어리져서, 그나마 쓸만한 것은 몇 개 안 되었습니다.
그나마 환자들이 알아서 침구를 가져와서, 그런 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공립병원에서도 환자들이 알아서 침구를 가져다 썼던 터라,
여기에서 으레 그러는 것이려니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무침대에 쪼개진 틈새로 곧잘 빈대가 기어나왔습니다.
더욱 기막힌 일은 병원 안의 수도시설은커녕,
목욕탕이나 하수도시설이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박사님,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일을 하십니까?’
‘자네는 캐나다에서 금방 왔으니, 그렇게 묻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맥밀란이 계속 말을 이어갔습니다.
‘전에 비하면 훨씬 좋아진 게 이렇다네.
전에는 흙벽으로 된 방 3개짜리 초가집에서 일한 적도 있는걸..
여러 해 동안 여기에는 조선인 의사나 간호사가 없었네.
조수를 뽑아 훈련시키는 게 급선무였지..’
버티는 것이 오랜 세월 동안 나를 도와준 유일한 조수지.
형편이 여의치 않아, 의료기구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네.
그러나 지금은 교회에서 의료사업을 전보다 잘 도와주고 있고,
자네도 왔으니, 둘이 힘을 합해 한번 열심히 일해보자고..‘
’해야 할 일이 상당히 많겠군요.‘
플로렌스는 환자들로 꽉 찬 대기실을 바라보면서 말했습니다.
‘수돗물이나 목욕시설은, 자네가 걱정하는 것만큼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니야.
환자들은 목욕하는 걸 매우 싫어해.
우리가 목욕을 강요하면, 환자들은 집으로 돌아가버릴 걸세.
또 간호하는 사람들도, 환자와 똑같은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냥 이런 상태로 다들 만족해하지...’
‘오랜 관습을 고치자면 시간이 많이 걸리겠네요.’
‘물론이지 그러나 그들도 변하고 있네.
기회를 봐서 꼭 고치려고 벼르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변소야.
변소 시설은 반드시 개선해야 돼!’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병원을 둘러보았습니다.
외래환자 진료소의 조선 간호사들은, 작은 진찰실과 치료실에서 분주하게 일하고 있었습니다.
환자들은 모기나 파리가 날아다니는 것을, 오히려 집에 있는 것 같이 편하게 생각하는지,
모기장이 쳐져 있어도, 모조리 의자로 받쳐서 열어놓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조선인들은 침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자다가 떨어질까봐 겁이 나서인지, 그냥 방바닥에서 자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병실은, 환자를 보살피러 온 가족들로 항상 붐볐습니다.
환자 한 명에, 보통 한 사람 이상의 가족이 딸려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환자와 보호자가 함께 침대에 누워 있거나,
환자는 바닥에 있고, 보호자가 침대에 누워 있기도 했습니다.
가족들은 환자를, 자기네 방식대로 돌보았습니다.
병원 간호사들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의사나 병원 직원들이 그렇게 못하게 하면,
가족들은 아무 말도 없이 무작정 환자를 데리고 집으로 가버렸습니다.
병동 뒷쪽에 변기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는 똥, 오줌이 그대로 방치되어 담겨 있었고,
피묻은 붕대를 넣은 통과, 고름이 가득 담긴 그릇이, 그 옆에 함께 놓여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거기에는 파리가 새까맣게 들끓고 있었습니다.
플로렌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온몸이 오싹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제대로 일을 꾸려나갈 수 있을까?’
환자 치료도 급하지만, 우선 환경 개선부터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러자면 병자 치료뿐만 아니라, 위생에 대한 계몽과 교육이 시급했습니다.
▲캐나다 장로교 교단에서는, 의료선교사 플로렌스 외에도
교육선교사인 아네타 로즈와 크리스티나 큐리를 함께 조선에 보냈습니다.
이 셋은 캐나다 동부에 있는 각자의 집을 떠나, 캐나다 서부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그때 일주일 동안 열차로 대륙의 동서를 횡단하면서,
난생 처음으로 캐나다의 대평원과 산맥들을 보았습니다.
세 사람은 벤쿠버에 도착한 후, 캐나다의 태평양 횡단 기선을 타고
출항한 지 2주일 만에 일본 고베 항에 내렸습니다.
뜨거운 날씨였지만, 이국의 정취를 맛보러 거리로 나섰습니다.
색색의 화려한 기모노를 입고 거리를 오가는 모습들이 볼만했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놀라웠던 것은
강변 바로 뒷길에서 벌거벗은 남자가 어슬렁거리며 걷는 광경이었습니다. *아마 훈도시
또 일본 사람들은 모두 나무로 만든 나막신을 신고 있었는데,
그 신을 신고 걸을 때 나는 소리가 어찌나 시끄럽던지,
바로 옆 사람의 말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생선 요리 냄새가 하수도에서 나오는 악취와 뒤섞였고,
여기에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상야릇한 냄새까지 범벅이 되어, 온 거리를 뒤덮었습니다.
‘아, 바로 여기가 동양이구나’
처음 이런 광경을 접하며 ‘어떻게 이런 환경에 적응해 나갈지’ 걱정에 휩싸였습니다.
낮에 고베에서 시모노세키까지 열차를 타고 가면서,
일본 시골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1921년 경
진흙으로 지어진 자그마한 농가들, 초록색의 논, 울창한 숲으로 뒤덮인 산,
머리에 원추형 밀짚모자를 쓰고, 허리를 굽혀 일하는 남녀의 구릿빛 얼굴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조선의 관문인 부산으로 향하는 연락선을 타보니 *시모노세키-부산
몇 안 되는 1등과 2등 선실에는 이미 빈자리가 없었습니다.
3등실은 갑판 바로 밑에 있었는데, 승객들이 얼마나 빽빽하게 들어찼는지
아무리 비집고 들어가도 발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바닥에는 다다미가 깔려있었고 그 위에는 300명쯤 되는 사람들이
각자 짐을 끼고 앉은 채 자리를 잡고, 밤을 지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배가 부산항에 도착하자, 선교사들은 부지런히 서둘러 승객들 가운데,
제일 먼저 부산 땅을 밟았습니다.
일본에서 이미 입국수속과 통관 절차를 마쳤으므로,
부산에서 할 일은, 달러를 조선화폐로 바꾸고, 서울행 열차표를 사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부산역에서 조선인 승객들을 살펴보니, 대부분이 3등석 표를 사기에
두 사람도 3등석 표를 끊었는데, 막상 열차에 타고 보니 아차 싶었습니다.
열차칸에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플로렌스는 통로에 가방을 놓고,
그 위에 올라서야만 했습니다.
다른 많은 승객들도, 서울까지 장장 12시간을, 줄곧 서서 갔습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선량하고 친절했습니다.
한 소년이 열차칸에서 통로를 지나다니며, 작은 나무 도시락에 조선음식을 담아 팔았습니다.
플로렌스와 일행은 도시락을 사서, 난생처음으로 젓가락질을 하며
쌀로 만든 조선음식을 먹었습니다.
작은 사기 잔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일본차도 한잔씩 사 마셨더니, 속이 따뜻해졌습니다.
소나무가 우거진 산과 산 사이로, 기차가 점차 속도를 내며 달리자,
처음에는 진한 초록색에 띄었던 논의 벼들이,
북쪽으로 갈수록 마치 황금을 뿌려놓은 듯 누런 금색으로 변했습니다.
흰옷을 입은 농부들이 머리에 망건을 쓰고, 입에는 긴 담뱃대를 문 채
엄청나게 큰 짐을 지게 위에 지고 나르는 광경이 보였습니다.
여자들도 흰옷을 입었는데, 길이가 짧고 소매가 넓은 저고리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주름치마를 입었습니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등에는 아기를 업고, 머리에는 짐을 이고서
포플러 나무가 늘어선 좁은 도로를 타박타박 걷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남자들은 등에 짐을 지었기 때문에 허리를 구부리고 걷는 데 반해,
여자들은 머리 위에 짐을 이고 있었으므로, 꼿꼿이 서서 걸었습니다.
순박해 보이는 조선의 아이들은 논둑을 뛰어다니며, 즐겁게 놀고 있었습니다.
마을의 집들은 갈색 흙벽 위에 짚을 엮어 만든 회색 지붕을 머리에 이고,
산기슭에 옹기종기 모여있어서, 멀리서 보면 마치 버섯이 피어있는 것 같았습니다.
좁은 계곡이나 산비탈에도, 계단처럼 땅을 개간해 논을 만들었고
논 사이에 있는 논둑에도 콩같은 농작물을 심은 것으로 보아
한치의 땅도 그냥 놀리지 않는 듯 했습니다.
줄줄이 반듯하게 심어진 벼포기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논바닥의 물은,
햇빛을 반사해, 마치 금이 녹아내려 반짝이는 듯 했습니다.
논고랑, 소달구지,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있는 마을, 흰옷을 입은 남정네와 아낙네,
뛰어노는 어린이들의 모습은.. 조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습니다.
▲이들 세 명의 선교사 일행은 밤에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에드너 로렌스가, 남대문역으로 마중 나왔습니다.
흑갈색 머리에 명랑한 그녀가 가방을 받아 지게꾼에게 넘겨주자,
지게꾼은 그 짐을 지게 위에 차곡차곡 쌓아 끈으로 단단하게 맨 다음,
쭈그리고 앉아 지게 멜빵을 자기 어깨에 걸었습니다.
조선의 일꾼들은 등허리가 튼튼하고 잘 단련되어 있어서,
모든 짐을 지게로 나르기를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심지어 손잡이가 달린 가방도, 지게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지게꾼은 그렇게 많은 짐을 지고도 끄떡없이 일어서더니,
에드너가 인도하는 대로, 길 건너편에 있는 세브란스 병원으로 갔습니다.
그날 밤 플로렌스 일행은, 에드너와 함께 간호사 숙사에서 조선에서의 첫날밤을 보냈습니다...
플로렌스 머레이는 1894년 캐나다 노바스코샤州 픽토우 랜딩에서 태어났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 칼리지 졸업 후,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주지 않는 당시 교단 규정에 따라 의료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달하우지 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1919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 자격을 취득했다. 1921년 캐나다 장로교회 파견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했다. 한국 이름은 모례리(慕禮理)로 정했다. 1922년 간도 용정의 제창병원장을 거쳐 1923년 함남 함흥의 제혜濟惠병원장으로 취임했다. 1923년 함흥 재임 시절 결핵 환자들의 비참한 실상을 목격하고, 1928년 한국 최초의 결핵 요양소를 설치했다. 1929년 제혜간호학교를 설립하여 조선인 간호 인력 양성에도 힘썼다. 1942년 강제 추방되어 캐나다로 귀국했다. 이유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일제의 외국인 탄압 극심. 1975년 81세로 소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