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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11장 오버 베팅 금지

LNCK 2026. 8. 10. 16:08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삶의 통찰력

오버 베팅(Over-betting) 금지 | 2026-07-05 Youtube

 

◈오버 베팅 Over-betting 금지         삿11:1~40           2026-07-05  

 

본문은 사사기 11장, 입다 사사에 관한 내용입니다.

‘오버 베팅 금지, 과도한 타협, 과도한 협상은 위험하다’ 이런 주제를 좀 나누려고 하는데요.

원래 오버 베팅이란 말은, 과도하게 베팅하는 것을 뜻하죠.

 

본문 사사기 11:1~40절 전체를 살필 텐데,

저희는 29절에서 34절까지 교독하겠습니다.

 

▲‘승자의 저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업을 합병할 때나, 뭔가 입찰 시장에서 입찰을 받으려고 할 때,

적당한 금액을 제시해야 되잖아요.

 

다른 경쟁 상대보다 더 많은 액수를 써야지 입찰을 받고, 경쟁에서 이기게 되는데,

과도하게 베팅, 다시 말하면 너무 큰 금액을 써 내면,

그 기업을 인수하고, 입찰 품목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결국 이 회사를 운영하거나 기업을 경영할 때, 무리하게 베팅하는 바람에

이윤을 남길 수 없어 망한다는 얘기입니다.

 

입찰에는 승리했지만 결국, 그 기업이 망하게 되는 것을, '승자의 저주'라고 말합니다.

뭐든지 과도한 것은.. 처음에는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에, 승리한 사람 자신도 무너뜨릴 수 있다...

이런 위험을 경계하는 말입니다.

 

▲오늘 사사기 11장의 입다는 ‘너무 너무 잘 하겠다’고 해서, 오버 베팅을 한 인물입니다.

결국 영적으로 ‘승자의 저주’의 면모를 보여주는 그런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거래 대상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입다는 늘 협상을 잘했기 때문에,

하나님하고도 협상하고 타협하여, 자기가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겠다 라고 했던 인물입니다.

 

하버드 대학 교수 마이클 샌델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는 책에서

‘삶의 모든 부분은 가격을 붙이는 순간, 그 의미를 왜곡하게 된다’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정’이라든가, ‘감사’라든가 ‘사랑’ .. 이런 것에 가격을 매겨보세요.

‘너가 나를 정말 친구로 생각한다면, 힘들 때 천만 원을 빌려줘야지’

그럼 그 우정은 천만 원짜리가 되는 겁니다. 우정의 의미가 이미 퇴색되는 거죠.

 

사랑을 하는데 조건을 거는 거죠. ‘얼마짜리를 사 줘야지 너가 나를 사랑하는 거야’

하는 순간, 그 사랑은 조건부 사랑이 되면서, 그 의미가 퇴색되는 겁니다.

 

감사도 마찬가지죠. ‘얼마 정도 나에게 내야지, 그게 진정한 감사야’ 라고 한다면,

그건 감사가 아니고 가격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너무 소중한 것들에 가격을 붙이는 순간, 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얘기죠.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 이 호칭이 얼마나 익숙합니까?

너무나도 익숙하죠.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은연 중에, 하나님께도 가격을 붙이는 우를 범할 때가 많습니다.

거래를 하는 거죠.

 

예를 들어 ‘빵을 천 원 주고 샀다’ 그러면, 이 빵의 가치가 천 원인 겁니다.

천 원의 가치를 매기듯이, 하나님께도 내가 부지불식간에 가격을 매길 때가 있다는 거예요.

 

언제입니까? 특히 기도할 때, ‘하나님, 내가 이만큼 헌신했으니, 이만큼의 보상을 주십시오’

‘이만큼 열심히 기도했으니, 이만큼 기도한 것을 주십시오’

이 정도만 해도 양심 있는 사람입니다.

 

근데 어때요?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더 주시는 분이니까

‘나는 이만큼 드렸으니, 하나님은 몇 곱절 저에게 갚아 주세요!’

이건 거래죠. 타협입니다.

 

분명히 ‘기도’라는 신앙의 언어를 쓰고, ‘헌신’이라는 신앙의 언어를 쓰고 있지만,

그 이면을 보면, 세상에서 거래하듯, 세상의 언어, 시장의 언어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옷을 입고 있지만,

그 마음은 항상 계산서와 청구서를 가지고,

내 헌신의 가격을 매겨서,

하나님도 나에게 얼마를 줘야 된다... 라고 거래하고 있는 거죠. ‘거래적 신앙’입니다.

 

오늘 사사기 11장 입다에 대한 얘기는,

한마디로 나는 혹시 입다와 같이 하나님과 거래하고 있는 것이 없는가?

나는 협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점을 살펴봐야 됩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을 거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면,

오늘 그 마음을 돌이켜 거래가 아니고,

철저하게 신뢰하는 마음으로 돌이키는 은혜가 있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입다를 좀 살펴볼텐데요.

‘입다’라는 사람의 특징을 한마디로 얘기하라면, 탁월한 사람이에요. 탁월한 사람입니다.

 

‘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

기드온 같은 사람은 원래 용사는 아니고 쫄보였는데,

포도즙을 짜는 틀에다가 밀을 타작하는 아주 심장이 작은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앞으로 네가 큰 용사가 될 거야’ 6:12

이렇게 불러주신 반면에,

 

입다는 실제적으로 물리적으로 용맹한 싸움꾼이었다는 얘기입니다. 태생이 그렇다는 얘기죠.

입다는 일단 큰 용사고, 계속 읽어보면,

기생이 길르앗에서 낳은 아들이었고... 모계쪽 출신이 기생이에요.

본처의 아들도 아니고, 첩의 아들도 아닙니다.

서자 정도가 아니고 ‘그냥 모르는 여자’의 아들인 거예요. 아빠만 같은 거예요.

 

11:2 ‘길르앗의 아내도 그의 아들들을 낳았더라

그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며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여러분 아무리 모르는 여자의 아들이라도, 집에 와서 사는데

별 볼일 없고 형편없으면, 그냥 밟으면 되는 겁니다. 종처럼 쓰면 돼요.

그런데 입다를 왜 쫓아냈을까요? 뛰어나니까, 탁월하니까!

다른 형제들의 적이 되니까 쫓아내는 거예요.

 

11:3 ‘이에 입다가 그의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에 거주하며 잡류가 그에게 모여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잡류’ .. 이게 쌍스러운 말이 아니고, 중심부에서 벗어난 사람들,

뭔가 소외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vain men, worthless fellows

그들이 입다에게 몰려들었다는 얘기고, 입다는 이런 잡류들의 리더가 됐다는 얘기예요.

 

자, 그럼 입다가 어떤 사람이에요? 큰 용사, 하지만 기생의 아들이라 쫓겨난 인생인데,

쫓겨난 그곳에서 리더십을 발휘했던 사람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입다가 쫓겨나서 거절감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처받았다, 거기에 대한 울분이 있다’ 그런 얘기를 안 해요.

 

다시 말하면 물론 그 마음에 거절감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감정을 쉽게 표현하는 사람은 아니다, 감정에 끌려다니는 사람은 아니다.. 라는 거죠.

 

이런 상황에 놓여 있을 때, 돕 땅에서 리더십을 가지고, 잡류들의 리더로서 살아갈 때에

갑자기 고향 길르앗에서 장로들이 찾아옵니다.

 

전쟁을 치러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경고하기 위해서,

압제자로 ‘암몬’이라는 나라를 강하게 하셨는데,

길르앗이 암몬하고 싸울 용사가 없는 거예요.

 

그때 그 동네 사람들이 누구를 떠올려요?

‘아, 입다! 입다는 태생적으로 싸움꾼인데, 용사인데...’

그래서 돕 땅으로 찾아와서, 입다를 다시금 데려가려고 하는 장면입니다.

 

11:6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하니’

 

여러분, 여기서 눈여겨 봐야 될 단어가, 처음에 장로들이 입다에게 제안한 보직은 장관입니다.

‘너는 장관으로 써줄 테니까, 우리와 함께 돌아가자’

 

그렇게 얘기했을 때, 입다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11:7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하니라’

 

사람이 필요할 때는 찾고, 필요 없으면 버리고.. 하는 게 인간사인데,

자기의 쓸모가 생겨서 왔다는 걸, 입다가 아는 거예요.

입다는 이제 이거를 이용하는 겁니다.

 

입다는 감정적으로 장로들한테 ‘야, 나를 버릴 때는 언제고, 내가 토사구팽 당했는데,

내가 너희한테 돌아갈 것 같아? 전쟁 나서 한번 망해 봐!’

이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았어요.

 

또 반대로 ‘아이고 잘됐네요. 저도 가고 싶었는데..’

하고 그들에게 엎드려 장관직을 쉽게 수용하지도 않습니다.

긴장감을 주는 거예요. 냉철하게 타협하는 겁니다. *입다의 은사가 ‘협상’이에요.

 

입다가 쭈뼛쭈뼛 하면서, ‘장관’으로 만족 못 하고, 좀 더 큰 걸 요구하는 듯 하니까

장로들이 이제 손을 듭니다.

 

삿11:8 ‘그러므로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하려 함이니

그리하면 당신이 우리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 하매’

 

‘머리’가 ‘장관’보다 더 큰 겁니다.

 

삿11:10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여호와는 우리 사이의 증인이시니

당신의 말대로 우리가 그렇게 행하리이다 하니라’

 

장로들은 여호와 앞에서 맹세합니다.

‘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함께 가니, 백성이 그를 자기의 머리와 장관으로 삼은지라’ :11

 

▲11:11b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니라’

우리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버림받은, 소외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는 가슴만 치고 앉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기 사정을 다 고했습니다.

  

그는 암몬과 싸우러 나가기 전에,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아뢰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입다의 모습을 보세요.

그는 하나님께 대한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성도는 시련이 찾아오면 더욱 참된 신앙을 소유하게 됩니다. 믿음이 더욱 견고하게 됩니다.

그 역경 때문에 주님만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입다는.. 우리처럼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 부족함, 약점을 드러내는데요...

 

맨 처음에 장로들이 왔을 때, 입다를 자기들의 머리로 삼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장관’이라는 히브리어의 정확한 뜻은 용병이에요.

한시적으로, 일시적으로 암몬하고 싸울 동안만,

입다가 군대 장관으로서 역할을 해주기를 바랬던 겁니다.

 

전쟁이 끝나면 또 돕 땅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너는 우리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머리’라는 것은, 군사력의 통수권뿐만이 아니고

정치적으로, 행정적으로 1인자가 된다는 얘기입니다. :11

그래서 실제로 입다가 ‘사사’가 된 겁니다. 우리도 입다를 ‘사사’로 부르잖아요.

 

그러니까 결국 입다는, 장로들과 협상을 통해서, 장로들을 압도하여

‘장관’에서 머물 수 있는 자기 자리를, ‘머리’가 되는 자리로 옮겨 놓은 것이죠.

 

그래서 입다의 별명이 ‘협상의 달인’입니다.

그는 이후에, 암몬을 물리칠 때에도, 먼저 ‘협상’을 통해서 그들을 물리치려 합니다.

11:12~27 물론 암몬이 그 협상에 따르지 않아서, 결국은 전쟁을 하게 됐지만요. :32~33

 

그러니까 입다는 감정적으로 휘둘리지도 않아요.

감정적으로 내가 쫓겨났던 거절감에, 감정적으로 장로들을 대하지도 않고,

매우 현실적이고 냉철하고 타협할 줄 알고,

자기가 원하는 걸 얻어낼 줄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상황이 불안한 거예요. 영적으로 보면. 왜요?

이 과정에 하나님이 없다니까요.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입다처럼 지혜로운 자’ 라고 적용하거나,

‘입다처럼 우리가 협상을 잘 하자’가 우리의 적용점이 아니고,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오히려 불편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없구나.. 하나님이 주도하는 게 아니고,

장로라는 사람들에 의해서.. 또 입다의 탁월한 협상력에 의해서..

모든 상황이 되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입다의 탁월함을 부러워하거나, 그가 길르앗의 머리가 됐다라고 다행히 여길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 없음으로 인하여,

앞으로 입다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에 대한 불안한 징조로 보셔야 되는 거예요.

 

△성경은 탁월함을 ‘죄’라고 말하진 않아요. 탁월함이 ‘악하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요셉을 보십시오. 다니엘, 바울, 다 탁월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탁월함은 ‘은혜 아래에 있는 탁월함’이에요.

그 탁월함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분야에 그 탁월함이 쓰여져야지.. 사람을 살리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도 없고, 은혜도 없고,

(입다처럼) 자기의 탁월함이, 자기의 본성을 통해서 드러나버리면,

그건 자기 증명의 도구가 되죠.

그리고 이후에 하나님까지 협상의 대상으로 놓는, 교만한 자의 자리까지 나아가는 겁니다...

 

▲조금 더 입다를 살펴보겠습니다. 입다는 협상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장로들과도 협상해서, 자기가 원하는 걸 얻어냈고,

이제는 암몬 왕과 전쟁을 해야 될 때도,

큰 용사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칼로 나아가지를 않아요.

 

먼저 사신을 보냅니다. 사절단을 보내서

‘너 도대체 왜 우리랑 싸우려고 하는지, 이유나 들어보자’ 하고 사신을 보내요.

 

11:12 ‘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사자들을 보내 이르되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땅을 치러 내게 왔느냐 하니’

 

:13 '암몬의 왕이 입다의 사자들에게 대답하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단까지 내 땅을 점령했기 때문이니

이제 그것을 평화롭게 돌려 달라 하니라’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단까지’는 현재 길르앗 땅을 뜻하죠. 암몬 왕은

‘그거 원래 내 땅이었는데, 너희가 지금 점령하고 있으니까, 돌려달라’는 얘기예요.

 

입다가 말합니다.

:14 ‘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다시 사자들을 보내

:15 그에게 이르되 입다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이 모압 땅과 암몬 자손의 땅을

점령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입다는 지금 정확한 역사 지식을 가지고 암몬왕의 논리를 깹니다.

그는 협상가거든요. 외교술이 뛰어난 사람이거든요.

 

23절을 보십시오. 길르앗은 원래 너희 땅 아니라는 거예요.

원래는 아모리 인의 땅이었고, :23

출애굽 때, 우리가 그들을 쫓아냈으니, 이제 우리 땅이라는 거죠.

 

24절에 ‘네 신 그모스가’ 암몬의 신이 그모스거든요.

그모스가 네게 준 땅을 너희가 차지해서 지금 살고 있는 것처럼, *암몬 땅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모리 족속을 쫓아내고,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데, 뭐가 잘못이냐?’

 

‘그러므로 너희가 이 땅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어’ 이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또 26절에 ‘이스라엘이 헤스본과 그 마을들과 아로엘과 그 마을들과 아르논 강가에 있는

모든 성읍에 거주한지 300년이거늘, *지금 길르앗 땅

그동안에 너희가 어찌하여 도로 찾지 아니하였느냐?’

 

‘지난 300년 동안 너희가 가만히 있었잖아? 평화로웠잖아?

너희 암몬의 어떤 왕도 여기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는데,

왜 300년 있다가 지금 난리 치냐?’는 얘기예요.

 

▲암몬 왕은 ‘말로는 이게 안 되겠다. 논리로는 이길 수 없다’ 싶으니까, 전쟁을 선택합니다.

여러분, 탁월함은 나쁜 게 아니에요.

그런데 입다의 탁월함은, 그냥 사람 수준의 탁월함입니다.

 

사람끼리는 좀 탁월하고, 덜 탁월하고...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대할 때는, 우리의 자기 탁월함을 주장하면 안 돼요.

 

우리의 경험이나 우리의 가진 것을 주장하면 안 됩니다.

왜요?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하나님이세요.

고전1: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는 순종이 필요한 거지,

하나님을 움직여서, 하나님과 협상해서, 하나님의 뜻을 바꿔서,

하나님을 움직이겠다는 생각은... ‘그거는 불경한 생각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뭔 말인가 하면, 나중에 입다가 전쟁에 나갈 때, 하나님과 협상 같은 걸 합니다.

‘내가 이기고 돌아올 때, 집에서 제일 먼저 맞이하는 것을,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이렇게, 내 계산으로, 하나님을 뭔가 협상 테이블에 끌어들여서,

어떤 딜을 하면 안 된다는 거죠. 하나님은 딜 deal을 할 대상이 아니시라는 거죠!)

 

△우리는 쉽게 입다처럼 하나님과 협상하려 합니다.

‘새벽기도를 통하면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겠지’

‘내가 철야해서 주님을 움직일 수 있겠지’

‘내가 금식하면 하나님 뜻을 움직일 수 있겠지...’

 

그게 습관이 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마음 없는 금식, 마음 없는 철야, 마음 없는 새벽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협상의 도구로 새벽을 철야를, 헌신을, 봉사를, 헌금을 이용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너무 쉽게 거래를 하려고 하는 거죠. give & take 식으로요.

 

제가 권면드립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의 유일한 자세는 겸손입니다.

‘하나님, 제게는 답이 없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기도한다라는 대안조차도

사실은 이 어리석은 양의 기도이오니, 주님이 이 기도를 점검해 주시고,

때로는 막아주시고, 하나님의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

 

이런 긍휼함을 구하는 겸손함만이, 하나님께 나가는 유일한 태도예요.

그러므로 날마다 은혜 앞으로 나아가시길 바래요.

 

그리고 여러분의 기도가 협상이 아니고, 하나님을 구하는 간절함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입다는 말로는 신앙적이었어요.

암몬 왕을 대항해서 전쟁에 나가면서 뭐라고 얘기하냐면

‘암몬 왕과 우리 이스라엘 사이를 하나님께서 판결해달라고’ 합니다. :27

 

게다가 11:29절을 보십시오.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의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했습니다. 11:29

우리가 기드온 살펴볼 때도,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했다는 걸 어떤 의미를 해석했습니까? 6:34

‘여호와의 영이, 성령께서 기드온을 옷으로 입으셨다’ 라는 뜻입니다.

*‘임했다’의 히브리어 라바쉬가 ‘to dress, wear, clothe, put on clothing, be clothed’

즉 ‘옷을 입다’는 뜻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11:29

똑같아요. ‘여호와께서 입다를 옷으로 입으셨다!’

(기드온 때와 히브리어가 다르지만, 비슷한 말로 보면 됩니다. *하야)

 

우리는 장갑 같은 존재인데,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입으셨다’

그럼 장갑은, 이제 뭐를 기다리면 되는 겁니까?

손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장갑처럼 입으셨다’

입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했으니,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무엇인지, 그 명령이 무엇인지

그분께 집중하여 말이 떨어지면 순종하면 되는데,

 

그 전에 그의 마음에 ‘아.. 전쟁에서 지면 어떡하지?’

늘 자신의 탁월함으로 결과를 잘 이루어왔잖아요. 어떤 탁월함입니까?

협상, 말로 설득해서 다 이루어 봤거든요.

 

이번에도 하나님께 ‘혹시 하나님이 안 해주실 수도 있으니 그냥 멍하니 있으면 안 되고,

하나님께 나아가 협상하자 타협하자’

 

입다의 문제는, 이 탁월함이 지나쳤다는 게 있는 거예요.

오버 베팅! 하나님께는 베팅하면 안 돼요. 하나님하고는 협상하면 안 됩니다.

 

삿11: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결국 그는 하나님의 뜻을 듣기 이전에, 여호와께 서원을 해 버립니다.

여러분, 서원은 좋은 거 아닙니까? 그러나 때로 서원이 위험한 게 뭐예요?

 

거래 저는 성도님들의 기도제목 나눌 때, 그런 비슷한 거 많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만 해주시면...’

‘자녀 합격만 되면...’ 이런 거죠.

‘그때는 제가 뭐든 해드리겠습니다.’

 

입다에게 이 서원은 일종의 거래입니다.

하나님께 승리를 안 주실 수도 있는데,

이 거래를 통하여 승리를 얻어내고자 하는 것이죠. 뭐라고 거래합니까?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조건문이죠? 안 주실 수도 있는데, 하나님 꼭 주셔야 됩니다.

‘제게 승리를 주시기만 하면, 제가 하나님께 드릴 게 있거든요.’

협상하는 거예요.

 

‘하나님, 혹시 지금 승리를 안 주실 마음이 있으신 거 아니에요?’

‘응답 주시기만 하시면, 제가 톡톡히 대가지불 하겠습니다’ 라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 대가지불이 뭐예요?

31절 ‘내가 암몬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번제물이 뭐예요? 이게 신학자마다 조금씩 해석의 차이가 있습니다.

-진짜로 이방인들의 제사처럼, 인신제사를 드리겠다는 뜻

 

-또 하나는 한나가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리듯,

그 여자를 처녀로서 하나님께 일평생 드리겠다.. 이런 해석이 둘 다 가능하지만,

 

어쨌든 간에 입다가 승리를 해서 돌아올 때,

그 집 문에서 첫 번째로 나오는 그 사람은 무슨 죄예요?

그게 그 사람의 자발적 헌신도 아니잖아요.

입다의 거래에 이용당하는 사람 아닙니까?

(입다의 집에 종들이 많았나 봐요. 설마 자기 외동 딸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거죠)

 

그런데 입다는 이런 삶에 익숙해요.

‘자기 것을 주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 내는’ 방식이죠.

 

길르앗 장로들과도,

암몬 왕과도

외교적으로 자신의 삶에서 늘 거래해왔거든요.

 

여러분, ‘협상의 기술’에서 말하기를

‘사실 협상은 우리 일상의 80%를 해당한다’고 하는 건 진리입니다.

우리가 서로 내줄 건 내주고, 받을 건 받으면서 살아가는 삶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러면 안 된다는 얘기예요.

하나님은 협상의 대상이 아닙니다.

 

입다는 오버베팅 했죠.

전쟁에 나갈 때, 하나님의 방식에 귀 기울이는 대신,

자신의 승리 방식을 하나님께 제시한 것입니다.

 

입다가 왜 이랬을까요? 정확하게 그 심리를 알 수는 없지만,

주석가들은 이런 해석을 합니다.

 

‘기생의 아들로 쫓겨난 것에 대한 거절감, 늘 눈치보며 살았던 삶,

그 안에는 또다시 쫓겨나고, 또다시 거절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어렵게) 자기 고향 땅에 와서 1인자의 자리를 얻고, 군대 장관이 되었는데

혹시 여기서 실패한다면, 전쟁에서 진다면, 또 쫓겨날 것에 대한 불안한 마음...’

그것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거래해서라도 승리를 얻어내야겠다는 마음을 줬다... 이런 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죠.

요즘 사회를 수축사회라고 말합니다.

 

한동안 대한민국도 경제가 팽창하던 때가 있습니다.

계속 아파트 짓고요. 경제가 계속 성장하고, 성장률이 12% 이렇게 될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1~2%대.. 뭐예요? 자원이 줄어들고 있어요.

사회가 수축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럼 어때요? 사람은 똑같이 있는데, 나눠야 될 자원이 수축하고 있다는 건 뭡니까?

훨씬 더 경쟁이 심해지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나타나는 게 뭐예요? 양극화.

 

그 자원을 독점하는 사람은, 더 독점을 하고,

없는 사람은 더 얻을 수 없고, 집중화, 도심에 집중되잖아요. 서울에 집중되잖아요.

그러니까 다 불안해지는 거죠. 왜요?

 

‘나는 저것을 가지지 못하면 어떡하지? 내가 집중되어진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면 어떡하지?’

우리 자녀를 향한 걱정도, 다 그런 걱정 아닙니까?

메인스트림에 타지 못할까 봐...

 

그러면 하나님이 이 자녀를, 혹은 그 가정을, 그 일터를

어떻게 쓰셔야 될지에 대하여 음성에 귀 기울이기 전에,

우리가 자꾸 제시하는 거예요. 하나님께,

 

‘하나님, 이거 해주시면, 제가 이거 보답해 드릴게요.’

왜요? 불안하니까.

‘우리 자녀, 이렇게 해주시면, 제가 이렇게 해 드릴게요.’

 

목회자나 교회 지도자는 ‘이 교회, 이렇게 되면, 이렇게 해 드릴게요.’

직장인은 ‘우리 일터..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해 줄게요.’

왜요? 불안하니까!

 

여러분, ‘내가 이만큼 하면, 하나님도 이만큼 해야 한다’는 식의 신앙은

매우 위험한 신앙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님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세요.

 

우리가 받은 은혜는, 우리에 의하여 만들어진 은혜는 하나도 없습니다.

거저 받은 것들이에요. 거저 주시는 것들이에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드려야 될 마음은 신뢰입니다.

그 아들(예수님)도 우리가 구하지도 않았는데, 가장 큰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안 주시겠는가요?

 

물론 삶에 아무 의욕을 가지지 말고 살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하여 거래하고, 협상하려는 그 마음은 위험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길르앗과 암몬과의 전쟁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11:32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저는 이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주셨다’라는 구절을 읽을 때,

‘입다는 이 전쟁의 승리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궁금합니다.

 

성경에 자세히 나오진 않지만, 입다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하나님이 암몬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했다고 생각했을까요?’ 80~90% 그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부분이라도 입다는 '내가 하나님과 번제물을 드리기로 서원하지 않았더라면,

이 전쟁은 승리하지 못했을 수도 있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본인이 그렇게 기도했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 하나님과 거래하지 마세요.

불안하고 조급한 마음으로 거래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이 어떤 조건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것이 응답되잖아요?

응답돼도 문제라니까요... 자신 마음에 뭐가 생겨요? 공식이 생겨요.

‘아, 내가 이거 조건 걸어서(서원해서), 응답받았구나.

이거 드린다니까 하나님이 움직이시는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고요.

우리가 내 건 조건을 보시면서 ‘아이고 조건이 너무 좋네.. 내가 응답해 줘야지’ 하시는

하나님은 아니라고요.

 

아마도 입다는, 자신의 협상의 결과, 승리를 얻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성경에는 입다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찬양이 나오질 않아요. 감사가 나오질 않습니다.

의지했다는 마음도 나오지 않고요.

 

간절히 기도했다고도 나오지 않습니다. 기도라 봐야 그 서원의 기도죠.

여러분, 결국 오버 베팅,

하나님께조차 탁월함을 가지고 협상했던 지나친 그의 탁월함은.. 문제가 됩니다.

 

은혜 없는 탁월함, 하나님 없는 탁월함은

자신을 무너뜨릴 뿐만이 아니고, 주변을 무너뜨려요.

 

암몬과의 전쟁에 승리를 얻고 고향 땅으로 갔는데, 입다의 마음은 이랬겠죠.

‘아 내가 하나님과 협상을 잘 했고, 하나님은 나에게 승리를 주셨으니,

이제 내가 하나님께 협상했던 그대로,

마을에서 처음 마중 나온 그 사람을 번제물로만 올려드리면,

이 모든 협상은 종결되고, 해피엔딩으로 끝나겠구나...’ 라는 마음으로 돌아왔는데,

이런 승전보를 가지고 고향 길르앗으로 돌아올 때, 황당한 일이 벌어지죠.

 

11:34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제일 먼저 누가 나와요? 자기 외동 딸이 나오는 거예요.

그럼 딸을 지금 번제로 올려드려야 될 판이 된 겁니다.

 

여러분, 어떠세요?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입다를 보십시오.

 

11:35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이 워딩을 잘 보세요.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로다’

 

말이 잘못되지 않았습니까. 본인 입다가 거래를 했잖아요.

그래서 지금 딸이 죽게 생겼잖아요. 그럼 말을 어떻게 바꿔야 됩니까?

내가 너를 참담하게 한 자로다.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구나라고 말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그 후반절에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입다라면, 이 순간 어떻게 하셨을 것 같으세요?

서원했다면서요. 서원은 어기면 안 되는 거라면서요. 그렇습니까?

 

저 같으면 하나님께 회개했을 것 같아요. 차라리 제 자신을 내어드리겠죠.

‘제가 오히려 제물로 올라간다’는 말을 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자기가 지금 잘못된 거래를 한 것 아닙니까?

그러나 입다는 결국 이 협상을 스스로 책임진다니까요.

딸을 내어놓습니다. (아무리 당시에 자식을 자기 재물로, 소유로 생각하는 풍습이 있다 해도,

이건 하나님의 사람이 취할 행동은 아니죠)

 

입다의 실수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실수는, 하나님을 거래 대상으로 삼은 것,

두 번째 실수는,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한 거예요.

 

하나님이 번제를 올리는 제사를 어찌 기뻐하시겠습니까?

입다는 스스로 회개하고, 제3의 길을 찾을 수 모색했더라면,

어쩌면 하나님은 그걸 더 용납하지 않으셨을까요?

 

11:38~40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을 기한하고 그를 보내니

그가 그 여자 친구들과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두 달 만에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온지라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 이것이 이스라엘에 관습이 되어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

 

두 가지 해석이 있다고 그랬잖아요.

-하나는 진짜로 번제로 올려드려지는 것,

-또 하나는 하나님께 바쳐진 인생이 되는 것,

 

그래서 40절에 ‘두 달만에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왔다’는 말은,

처녀의 몸으로 일평생 보내야 되는 것 때문에, 애곡하고 온 장면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 입다의 탁월함을 ‘은혜 없는 탁월함, 하나님 없는 탁월함’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하나님 없이, 은혜 없이, 너무 탁월한 부모는.. 자녀를 희생시킵니다.

 

하나님 없는, 은혜 없는 리더의 탁월함은.. 공동체를 힘들게 하고요.

교회도 마찬가지고, 가정도, 일터도 그 탁월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이죠.

 

말로는 하나님을 위해서이지만, 그 속 안에서는 자기 불안함이에요.

불신앙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죠.

 

진짜 용기는, 내 체면이고 뭐고 틀렸다면, 하나님 앞에 나가 회개하는 것이죠.

진짜 용기는 하나님 제가 무지했습니다. 제가 오해했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달라

회개하는 용기인 것이죠.

 

여러분 스스로를 너무 믿지 마세요.

복음이라는 것은 우리 스스로에게는 소망이 없음을,

서로에 대해서는 믿을 수 없는 존재임을 알고,

십자가의 용서를 서로에게 베푸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잘못할 수 있죠. 그러나 하나님 앞에 엎드려지는 것이 매우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의 입다는 참혹한 ‘영적 승자의 저주’의 한 단면을 보여주죠.

 

무대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자신의 탁월한 리더십을 가지고

하나님에게까지 그 타협의 리더십을 발휘했다가

결국 가장 사랑하는 딸을 제물로 올리게 된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비극적인 모습을 묵상하면서, 우리 존재를 ‘페이지 터너’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페이지 터너’라는 것은, 말 그대로 종이를 넘기는 사람,

클래식 피아노 연주하는 분 옆에서, 피아노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페이지 터너’라고 불러요. page turner

 

이 페이지 터너는 당연히 음악을 잘 알아야겠죠. 악보를 볼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러나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연주자에게 향하고 있거든요.

근데 페이지 터너가 자기도 너무 조명을 받고 싶어가지고,

피아노 치는 연주자 옆으로 가가지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막 V자를 그리면서 '아 저도 이 곡을 알아요. 저도 이거 칠 줄 아는데..’ 막 그러면 되겠어요?

 

연주자가 화려한 옷을 입고 자기의 독무대를 펼칠 때,

이 페이지 터너는 무채색의 옷을 입고, 자기의 색깔을 가리고,

조용히 페이지만 넘기는 겁니다.

 

그런데 페이지 터너가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페이지를 넘기진 안 거든요. 연주자보다 앞서면 안 됩니다.

주인공인 양 행세하는 것은 안 됩니다.

페이지 터너의 탁월함은, 오직 연주자의 연주를 완성시키는 돕는 자로서의 탁월함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연주하고 계십니다. 우리 인생을 오케스트라 지휘하고 계십니다.

그분이 주도하고 계신다고 하면, 그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한 사람 한 사람의 탁월함을 하나님이 쓰셔서, 하나님이 연주자로서 빛나시는 거예요.

복음이 빛나는 겁니다.

 

나의 이야기가 자꾸 쓰여지고 나의 자랑이 많아지는 게 아니고,

우리가 받은 은혜의 이야기, 이 복음의 기쁜 이야기,

하나님의 하나님의 선하신 이야기를 많이 많이 알리라는 것이거든요.

만들어내라는 것이거든요.

 

페이지 터너는 그런 역할을 하는 거예요. 당연히 페이지 터너는 이 곡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연주자가 연주하는 걸 보면서,

‘왜 이렇게 느리게 연주하지?’ 하면서 페이지를 빨리 넘긴다거나

‘왜 이렇게 빨리 연주하지?’ 하고 악보를 천천히 넘긴다거나 하면 안 돼요.

 

우리는 하나님의 발걸음에 맞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내가 막 어떤 꿈을 꾸고, 목적을 세운 다음에, 내가 하나님을 기도로 끌어간다’고 생각해요.

 

이게 협상하는 거, 이게 오버베팅입니다.

입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셨잖아요.

이 무가치한 인생, 기생의 아들의 인생, 내버려두면 거절감에 휩싸여서

그렇게 돕땅에서 잡류들의 리더가 되어 살아갈 인생을, 하나님이 개입하신 인생 아닙니까?

 

그럼 그분이 행하시는 타이밍에 순종하길 바라며,

그분의 음성에 귀기울여야지,

왜 ‘장갑’이 ‘손’을 움직이려 하느냐는 얘기입니다.

 

서원... 굉장히 신앙적 용어 같죠. 그런데 우리는 완벽할 수 없어요.

그때마다 여러분, 엎드리셔야 됩니다.

‘서원했으면 다 지키면 다 된다’ 이것도 공식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얘기합니까?

‘맹세하지 마라’ 우리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맹세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늘 흔들리는 존재가 무슨 맹세합니까?

그럼 ‘맹세하지 마라.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해라’

 

지금 혹시 어떤 간절함 때문에, 어떤 절박함 때문에

하나님께 협상의 기도 하시고 계시는 분들 계세요?

 

오늘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잘 기억하면서,

거져주시는 은혜가 우리 삶 가운데 늘 있음을 안다면,

우리의 삶은 주님의 은혜의 손길 아래 늘 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믿고,

좀 자녀를 하나님께 던지세요. 맡기십시오.

 

여러분의 일터를, 지금 상황을, 어려움을 주님께 철저하게 던지십시오.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렇게 하나님을 더욱더 신뢰하는 주의 백성들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뢰하지 못하니까, 협상하고 서원하려 드는 거잖아요.

 

우리 인생의 유일한 마에스트로, 지휘하시는 하나님의 그 세밀한 손길을 좀 보시고

완벽한 연주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손을 좀 보면서

그분이 가시는 만큼 가고, 그분이 멈추라고 하면 멈출 줄 아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복된 성도들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이 설교가 여러분의 인간적 탁월함을 비하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우리의 강점이, 때로는 하나님을 떠나는 가장 위험한 약점이 될 때도 있더라고요.

 

혹시라도 내가 이것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쓰시지라고 생각하신다면

‘하나님은 우리 존재 자체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이 믿음을 꼭 가지시길 바라요.

그래서 서로서로 좀 용납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시는 은혜가 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