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26 – 미니멈 신앙vs맥시멈 신앙 (2021.04.18 주일예배)
◈미니멈 신앙 vs 맥시멈 신앙 슥7:1-7 2021.04.18. [스가랴 26강]
◑도입 주1)
자, 슥7장 전반부 말씀을 오늘 살펴보려고 합니다. 7:1~7
◑슥7:1 ‘다리오 왕 제사년 아홉째 달 곧 기슬래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다리오왕 4년 9째달에 이 말씀이 임합니다.
이 전반부 환상이 언제 임했는지 여러분 기억하세요?
전반부 환상을 찾아보면, 다리오 왕 2년 8째달에 임했습니다. 슥1:1
본문 슥7장의 두 번째 환상은, 다리오왕 4년 9째 달입니다.
그러니까 약 거의 정확하게 한 2년 정도 지나고 난 후죠.
다리오왕 4년 아홉째 달이라고 하는, 두 번째 말씀이 임했던 때는,
성전이 완공되기 한 1년 조금 넘게 남았을 때예요.
약 16개월 정도 남았을 때, 그 시점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성전 재건이 2년 전에, 이제 오랫동안 멈춰져 있던 성전 재건에 대해서
스가랴와 학개를 통해서 하나님 말씀이 임하죠. 2년 전 얘기입니다.
그래서 성전 재건이 시작되고, 쭉 성전 재건이 진행되고 있다가,
완성되기 한 16개월쯤 전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거예요.
[*바벨론에서 1차 귀환 직후 제단을 쌓고 성전 기초, 즉 지대를 놓은 직후부터
주변 민족들의 거센 방해와 백성들의 무관심이 겹치면서
약 16년 동안 공사가 완전히 중단되어 있었죠. B.C. 536~520
재건 공사를 하자마자 중단된 셈입니다.
그러다가 16년 경과 후, 학개와 스가랴의 독려로 다시 공사를 재개했는데,
그로부터 약 2년이 경과하고, 16개월쯤 앞둔 시점인 거죠. B.C. 516에 완공.
지대(기초)를 놓은 것부터 계산하면, 20년 걸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거의 한 가운데쯤 되죠.
2년쯤 지났고, 앞으로도 한 1년 반 정도 남았고, 그래서 일종의 중간점검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중간쯤에,
다시 한번 말씀이 임하시면서, 중간점검을 하고 있는 그런 말씀입니다.
사람은요, 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을 때는 마음이 충만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에너지가 충만해서, 그래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를 위해서 정말 헌신하고 싶고...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그 열정이 식게 되어 있죠.
그건 인지상정입니다.
성전재건 때도 그랬을 거예요.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는
굉장히 영적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16년이나) 멈춰져 있던 성전재건이 드디어 다시 시작되는구나..
와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버리지 않으셨구나..
와 주님께서 다시 하나님의 역사를 시작하시는구나..’
흥분되고, 심장도 뛰고,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순교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될까요?
시간이 흐르면서도 그 마음을 그대로 지켜가는 사람은 참 적어요.
대부분 시간이 흐르면,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변해갑니다.
언제 변해가는지도 잘 눈치채지 못하는데,
시간이 흘러서 한 1년, 2년 지나고 나서 보면,
마음이 처음 같지 않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들 많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처음에 뭔가 하나님께서 크게 은혜를 주셔서
내 인생에 막 간증이 될 만한 사건이 일어나고,
또는 뭐 수양회 같은 데 와서 크게 은혜를 받으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헌신의 고백을 하고,
또는 뭐 예배 때 뭔가 약간 터닝포인트가 되면서,
‘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하셨구나!’ 하는 영적인 터닝포인트가 있으면,
그때는 굉장히 영적으로 충만하죠. 그래서 정말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배 나오는 것도 너무 기쁘고, 봉사하는 것도 너무 즐겁고,
‘조금 더 할 수 있는 거는 없나? 조금 더 하나님 앞에 드릴 거는 없나?’
이런 생각으로 충만한데...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되세요?
한 1년 지나도, 똑같이 그 마음이 유지되십니까? 그게 잘 안 되지요.
2년쯤 지나면 어떻게 되십니까? 다 옛날 일로 기억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옛날에 많이 헌신했던 것 같은데, 뭐였지?’ 잘 기억도 안 나요.
감동도 점점 식어가고..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또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반응했었는지, 뭐라고 고백하고, 뭐라고 헌신했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성전 재건’이라는 말만 들어도,
정말 막 심장이 뛰고, 눈물이 나고,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성전재건이라는 말을 들어도, 그냥 무덤덤해요.
아니 무덤덤한 것을 지나서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 있지 않으세요?
‘성전재건... 이거 아직도 안 끝났네? 이거 도대체 언제까지 해야 되지?
계속 이러고 있자니 이거 너무 지치고 힘드네... 이거 언제까지 해야 돼?’
이런 마음들이 슬금슬금 우리 안에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안 그럴 것 같죠? 아니요, 안 그런 사람 못 봤어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패턴을 따라갑니다.
그게 죄예요. 타락한 인간의 현실입니다.
또한 사람은요.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달라요. 그게 인간이에요.
그래서 정말 급하고 정말 큰 위기의 상황 가운데,
뭔가 하나님이 역사를 하시면, 그때는 정말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감격과 감동과 마음이 움직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위기가 해결되고, 평안한 시간이 지속되기 시작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 마음이 바뀝니다. 참 인간의 마음이 간사예요.
그래서 성경이 ‘무릇 지킬 만한 것 중에 네 마음을 지키라’고, 잠4:23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하나님 들여다보시니까, 이게 너무 간사한 거예요. 너무 간사한 거예요.
자매님들 이거 조심하십시오. 제가 여러 번 봤어요.
자녀가 없어서, 임신이 안 돼서요. 막 간절히 기도하고 울고 금식하고...
막 그래가지고서 자녀를 주셨어요. 근데 보니까 쌍둥이에요.
키우면서 힘들다고 얼마나 원망을 하는지... 이게 여러분, 사람의 마음이잖아요.
정말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온 거 다른 거 다 아시죠.
정말 하나님 앞에, ‘이 아이만 주시면 뭐든지 다 할 것 같이’
막 그렇게 울고불고 하다가, 결국 하나님 이거 선물을 주셨는데,
키우다 보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힘들거든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산후 우울증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어렵고 힘든 일이긴 하지만,
그 상황 가운데 어떻게 우리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거죠.
정말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감격하고, 정말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막 울고 했던 그 마음이,
어느 순간에 사라져버리고,
그 안에 원망과 부담과 짜증과... 이런 것들이 자리 잡기 시작하는...
그게 여러분 사람의 마음이라는 거예요.
▲성전재건도 비슷했을 겁니다. 성전재건이 처음으로 시작할 때야 얼마나 어렵습니까?
주변에서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생명의 위협도 느끼지요.
다른 민족들이 쳐들어올 것 같기도 하죠. 재정도 넉넉하지 않지요.
단순히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에 시작해야 되는 일이니까, 굉장히 힘든 일이었어요.
그런데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강권적으로 임하고,
그 일이 실제로 시작되는 것을 보면서 굉장한 감동이 있었는데,
이제 한 2년쯤 지나고 나니까... 공사가 본 궤도에 올라섰어요.
본 궤도에 올라섰고, 그냥 이대로 쭉 가면 완공될 것이 보여요.
특별한 위기도 더 이상 없습니다.
초창기 때의 모든 주변 민족들과의 갈등도, 이제 해결이 됐고,
또 중앙정부로부터 뭔가 허가도 받았고... 에스라 6:1~12 주2)
별로 어려울 게 없어요. 그냥 이대로 쭉 가면 다 될 것 같아요.
큰 어려움도 넘겼고... 네 그러다 보면 어떻게 됩니까? 긴장이 풀어지죠.
긴장이 풀어지는 게 아니고, 사실은 영적으로 해이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오직 성전, 오직 성전! 그 하나에만 집중했던 마음이 흐트러지면서
다른 것들에 마음이 가기 시작합니다. 성전 말고 다른 것들, 소소한 것들...
성전 재건을 재개할 때는, 전혀 보이지도 않고 전혀 신경도 쓰이지 않던 일들이
어느 순간에 눈에 조금씩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그쪽으로 눈이 가기 시작합니다.
그렇죠. 뭔가 안정될 것 같으면,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이제 <금식 문제>를 가지고 질문하러 찾아오는 거예요.
아니 옛날에는 이런 질문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어요.
‘아니 그게 무슨 그렇게 중요해? 지금 당장 이 일을 시작해야 되고,
이거를 지금 내가 주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느냐 없느냐?’
이렇게 막 긴장하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그럴 때였거든요.
전에 눈에도 들어오지 않던 일들이, 슬금슬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금식 규례
교회도 여러분 똑같은 거 아십니까?
교회도요. 처음에 교회가 개척돼서 시작될 때는, 시비 걸고 트집 잡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존이 걸린 문제거든요.
정말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정말 한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그래서 교회가 세워져서 교회가 부흥하고 커집니다.
그럼 그 다음에 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지 아십니까?
‘강대상은 왜 저렇게 생겼어?’
요즘은 그런 교회들이 많지 않지만, 아주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성가대 석이 왜 이쪽에서 저기로 옮겼어?’
‘피아노 위치가 왜 저기에 있어?’
‘우리 교회의 강대상은 왜 나무야? 딴 걸로 하면 안 돼?’
이제 그런 게 비본질적인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죠.
조금씩 조금씩 비본질적인 것들이, 이렇게 사람들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근데 물론 본문의 ‘금식 규례’ 문제가 비본질적인 문제라는 건 아닌데,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는 거예요. 우리 마음에 그 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
별로 중요하지 않던 것들이, 슬금슬금 보이기 시작하고,
그런 비본질적인 것들에 마음이 자꾸 쓰이기 시작합니다.
이걸 조심하세요. 우리의 마음이 지금 뭔가 흐트러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뭔가 흐트러지고 있다는 증거예요.
계속 우리가 유지해야 될 것은 뭐냐면,
처음 은혜 받았던 그 초심을 유지해야 되는 거예요.
그 마음에서 뭔가 영적으로 식어가기 시작하면
자꾸 비본질적인 것,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런 것들에 눈이 가기 시작하고
거기에 마음이 쓰이기 시작합니다.
기도도 당연히 식어갑니다. 위기가 다 지나갔고 그냥 평안한데,
무슨 죽기 살기로 기도하겠습니까?
성전재건이 처음으로 시작했을 때나, 죽기 살기로 기도했지,
위기가 지나가고 나면요, 기도의 열기가 식습니다. 사람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쩌면 이런 위기와, 또는 또 어려움들을
우리 삶의 중간중간 그냥 허락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일부러 하나님께서 위기를 만들어내시진 않겠지만,
그런 핍박과 어려움과 고난들을 겪으면서
우리 안에 ‘어이쿠!’ 하면서, 영이 다시 긴장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거죠.
어쩌면 공사 재개 2년이 흐른 이 시점, 다리오 왕 제4년 아홉째 달이 7:1
그런 시점이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갈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따라간다는 거예요. 성령으로 시작하는데, 육체로 마친다는 거에요.
처음에 성령 충만해서 뭔가를 시작합니다. 성전재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전재건의 마음을 받을 때, 충만한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뭐냐 하면,
그 일이 완수될 때까지 똑같은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느냐?
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한 일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결국 우리가 이 땅에서의 모든 삶의 경주를 다 끝내고,
결국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터인데,
결국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이 서게 될 것입니다.
저도 설 것이고, 여러분도 설 것이고... 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인데...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평가하실 때
‘얘는 어떤 사람이었나? 고성준이라고 하는 인간은 어떤 사람이었나?’ 하는 것에 대한 평가는
‘처음에 어떻게 시작했느냐’에서 결정되는 게 아니에요.
‘마지막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서 결정되는 거죠.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우 중간에요. 내가 이렇게 은혜도 받았고, 이렇게 하나님도 섬겼고,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많은 일을 했고, 제가 마음도 다 드렸고, 예배도 했고...
아무리 그렇게 시작을 했어도, 아무리 성령으로 시작을 했어도,
마지막에 내 마음은 뭐냐? 그렇게 성령으로 시작했어도 육체로 마쳤다면,
결국 그 사람은 육체의 사람인 거죠.
아무리 성령으로 시작했어도 결국 육체로 마쳤으면, 그 사람은 육체의 사람인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마음으로 살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규정하는 거예요.
여러분, 초심을 끝까지 지키십시오 물론 시작하는 것 중요합니다.
시작이 중요하지만, 그것만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그때의 마음(초심)을 어떻게 끝까지 지킬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초심이 나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마라톤 경기를 보면, 마라톤에 참석한 사람들을 보면.
처음부터 못 뛰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처음에는 대부분이 다 잘 뜁니다.
대부분이 잘 뛰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처음에 엄청나게 빨리 뛰기도 합니다.
엄청나게 빨리 뛰기도 해서, 초반 레이스만 놓고 보면
세계 신기록에 가깝게 뛰는 사람이 있어요.
제가 마라톤 경기를 TV로 본 적이 있는데, 초반 레이스를 보면,
그러니까 세계 신기록을 내려면, 각 구간을 얼마에 뛰어야 된다는 게 나오잖아요.
5km 구간, 하프 지점(21.0975km)의 기록을, 신기록과 비교하기도 합니다.
초반 레이스에 보면, 세계 기록보다 빨리 뛰는 사람들이 꽤 많아요.
웬만한 대회를 보면, 초반 레이스는 세계 기록 보유자들보다 더 빨리 뛰는 사람이
꽤 많다는 거예요.
근데 그 사람들은 반환점을 돌기 전에 대부분 다 나가 떨어져요.
대부분 나가 떨어지고, 결국 누가 우승하느냐 하면,
처음 속도를 끝까지 유지한 사람이 우승해요.
처음 속도를 끝까지 똑같이 유지하는 사람이 결국 우승이에요.
그래서 마라톤 우승 기록 보유자들을 보면,
처음에 뛰었던 속도와 마지막에 들어올 속도가 거의 똑같아요.
거의 아무 차이가 없어요. 똑같은 속도로 42KM를 그냥 그대로 뜁니다.
그 사람이 면류관을 받는 거예요.
영적으로도 여러분 똑같습니다. 초심은 누구나 좋습니다.
초심부터 잘못되었다면, 그건 신앙생활을 시작한 게 아니죠.
아직 시작을 안 한 거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하는 것은, 초심은 다 좋다는 거예요.
성령으로 시작한 거 맞습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있었고, 그 은혜를 받았고,
그 말씀 앞에 반응했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오늘 여기 계신 거 아닙니까?
뭔가 하나님이 여러분 인생 가운데 역사를 하셨으니까, 여러분이 크리스찬이 되었고,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있고, 예배를 사모하는 것이지요.
▲자 그런데 문제는, 초심이 아니고 말심(끝심)이에요.
마지막 마음은 어떠냐는 거예요.
처음에 내가 받았던 하나님의 은혜와, 그 하나님의 사랑과 감격과 말씀과
또 소망과 믿음과 그래서 하나님 옆에 들었던 헌신과 고백과...
이 초심이 말심(끝심)까지 그대로 변치 않고 유지되고 있습니까?
본문은 이 질문을 던지고 있어요.
스가랴서 7장이 처음으로 던지고 있는 질문은 ‘네 마음이 처음하고 똑같냐?’라는 질문이에요.
그래서 2년 만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 시작한 거예요.
2년 전에 내가 너희에게 말씀으로 임했을 때, 너희가 보였던 그 반응들이 있고,
그 반응이 굉장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는데,
지금 2년이 지금 이 시점에도 똑같이 그 마음을 유지하고 있느냐?
여기서 8장에 넘어가 보시면 알겠지만, 이 8장에 나오는 약속들은요.
거의 대부분이 1장부터 6장까지 했던 내용들을 다시 리피트하고 있습니다.
7장은 이제 잘못된 반응 때문에 야단치시는 거고, 8장에는요.
새로운 약속이 아니라 그냥 했던 약속들을 다시 리마인드 하세요. 왜요?
그 마음이 계속 흐트러지기 때문에 그래요.
처음 마음을 끝까지 유지하는 그런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참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성령으로 시작하지만 육체로 마칩니다.
충만했던 마음이 식어가고, 감동은 흐릿해져갑니다.
기대와 흥분은 덤덤한 지루함으로 바뀌어가고요.
헌신의 열정은 부담으로 대체되기 시작합니다.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따라요.
그래서 우리가 싸워야 될 영적 싸움은, 마음이 변치 않도록 유지하는 전쟁입니다.
은혜를 까먹지 않는 전쟁입니다.
은혜를 까먹지 않는, 예배의 감격을 흐려지지 않게 하는 전쟁입니다.
또 신앙생활의 기쁨과 약속의 기쁨을 유지하는 전쟁입니다.
초심을 유지하는 전쟁이에요. 그래서 이것을 성경은 ‘충성’이라 그러죠.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전4:2
하나님께서 충성을 보기 원하신다는 거예요.
충성된 자들을 찾으신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초심을 지키고 계십니까?
은혜의 순간에 받았던 그 마음, 그 감격 계속 한결같이 유지하고 있으십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고 느끼신다면, 다시 시작하셔야 됩니다.
다시 하나님의 앞으로 나오셔야 됩니다.
만약 뭔가 달라졌다고 느끼신다면,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셔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이 여러분의 다리오왕 4년 9째 달이 되셔야 돼요.
옛날에 받았던 은혜? 그건 옛날에 받았던 거고요.
그게 오늘의 여러분의 신앙을 보장해주는 게 아니에요.
그건 그냥 2년 전에 있었던 일일 뿐이에요.
‘오늘의 내 마음은 어떤가?’ 2년 전에 내 마음은 말고요.
‘어휴, 그땐 내게 은혜가 있었어. 그땐 내가 이렇게..’ 아니 여러분, 그건 다 옛날 일입니다.
그거 가지고 하나님 옆에 서는 거 아닙니다.
‘내가 옛날에 뭐를 했고, 옛날에 무슨 일을 했고, 옛날에 선교지에서 몇 년을 보냈고...’
그건 다 과거의 얘기고요. 지금 지금은 어떠냐는 거예요.
결국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서는 그 순간의 어떤 마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에 의해서, 그것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지,
10년 전에 뭐 했고, 20년 전에 뭐 했고, 젊어서 뭐 했고...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그건 다 과거의 얘기죠.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을 한결같이 지키시기를, 다시 한번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이어지는 7:2~3절은, 7장과 8장의 배경이 되는 질문이 이제 등장합니다.
질문을 중심으로 7장, 8장 내용이 쭉 진행이 되는데요. 질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슥7:2 ‘그 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의 부하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3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이르되
내가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 하매’
벧엘사람(:2)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사람을 보내서 묻습니다.
벧엘사람이 누군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조금씩 해석이 달라요.
찾아온 사람들의 이름이 이방인의 이름이었던 걸 보면,
‘아직도 바벨론에 남아있는 사람들이다’ 라고 해석하는 학자도 꽤 많고,
또 반대로 ‘아니다. 그냥 이스라엘의 벧엘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도 꽤 많아요.
그래서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이슈는 아니고요.
하여간 이스라엘 백성 중에 돌아온 사람이든지,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든 모르겠는데,
하여간 어떤 사람이 와서 물어봤다는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온 땅과 제사장들은 들으라’ 그러고 하나님 말씀하시는 거 보면, 7:5
이 사람들만 궁금했던 게 아니라는 거예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다 궁금했던 건데,
그냥 그가 사람들을 보내서, 스가랴 선지자에게 물어봤다는 거죠.
질문의 내용이 뭐였냐면 이거였습니다.
‘저희가 오랫동안 매년 해오던 5월 금식이 있는데, 정기금식일이 있는데,
이 5월 정기금식일을 계속해야 됩니까?’ 이 질문을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7:3
질문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5월 금식’에 대한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정기적으로 금식하는 날들이 정해져 있었어요.
당시 1년에 총 5번을 정해서 했어요. *일출~일몰 금식
우리가 무슬림들이 기도하는 라마단은 잘 알고 있는데,
라마단도 사실은 이스라엘의 정기금식을 본따서 만든 거죠.
이스라엘에서도 그렇게 정해져 있는 금식일이 있는데
1년에 총 5번을 금식을 하는데,
그중에 성경에 나와 있는 것, 모세에게 명하신 금식일은,
-대속제일날, 욤키푸르 때 하는 거 한 번이고요.
-나머지 네 번은 성경에 나와있지는 않고,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가 멸망할 때,
그것을 배경하면서 생겨났던 그런 금식일들입니다.
그래서 ‘대속죄일 금식일’에 대해서는 레위기에 나와있고요.
나머지 네 개는 어떤 금식일이냐면?
-넷째 달 금식이 있는데, 예루살렘 성벽이 파괴된 것을 기억, 애도하는 금식입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불순종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벽이 파괴됐구나’
그래서 애도하면서 금식하면서 ‘이 수치를 잊지 말자. 이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자’
그래가지고 금식하는 것이 ‘넷째 달 금식’입니다.
-다섯째 달 금식은 뭐냐면, 성전이 불타버린 날을 애도하는 금식입니다.
-일곱 번째 달 금식이 있는데, 느부갓네살이 세웠던 총독 그달랴가 살해된 날입니다.
느부갓네살이 철수하면서 그달랴를 총독으로 세웠는데,
그 사람이 살해된 날을 기억하는 것이 일곱 번째 달 금식이고요.
-열 번째 달 금식이 있는데, 예루살렘이 포위된 날, 예루살렘이 포위되어서 망하기 직전에
그것을 이제 애도하고 또 잊지 말자는 금식입니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 금식 중에서, 본문에 나오는 질문은 다섯 번째 달 금식이죠. 7:3
다섯 번째 달 금식이 뭐에 대한 금식이라고 그랬어요?
성전이 무너지고 불타버린 거, 그거를 기념하고 애도하는 날입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흥미로운 것이
BC 586년에 바벨론에서 성전이 무너진 날과
AD 70년에 로마에 의해서 스룹바벨 성전, 지금 이 스가랴 때 세우고 있는 이 성전이
다시 무너지는데 그 무너진 날이 정확히 같은 날이었대요. 흥미롭죠?
다섯째 달 9일! *5월 9일
그래서 오늘날 달력으로 하면, 대충 8월 정도가 된다고 하는데, 두 날이 일치한다고 합니다.
이건 성전이 무너진 게 우연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성전이 무너질 때, 명확한 메시지를 가지고 무너뜨리셨다는 거죠.
자, 이건 이렇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극보수 유대인들은 AD 70년에도
역시 같은 날 성전이 무너졌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 다섯째 달 금식을 계속 유지하고 있고, 지키고 있습니다.
▲자 근데 어쨋거나 이제 본문으로 다시 돌아오면,
스가랴 때 사람들이 스가랴 선지자를 찾아와서는,
‘이 다섯째 달 금식을 계속 지켜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왜 콕 집어서 ‘다섯째 달 금식 계속 여부를’ 물어볼까요?
지금 성전이 재건 되고 있으니까요.
다섯째 달 금식을 왜 한 거예요?
성전이 불타서 무너지니까, 시작된 금식 아닙니까?
‘자, 이제 무너졌던 성전이 재건되고 있지 않습니까?
성전이 무너진 것을 애도하고, 그 이유를 회개하는 금식이 다섯째 달 금식이었다면,
이제 곧 성전이 재건되는데, 그래도 계속 애도하고 금식한다고 하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굳이 이 금식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물어본 거예요.
충분히 궁금해할 만한, 합리적인 질문이죠.
직접 이 질문을 했던 사람들은 벧엘사람들이지만,
5절에서 스가랴가 온 땅 백성과 제사장들은 들으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면,
아마 다른 사람들도 다 똑같이 궁금해했던 질문이었던 것 같아요.
‘성전이 재건되고 나면, 다섯째 달 금식을 계속할 필요가 있나? 안 해도 되지 않나?’
이런 거죠.
▲자, 이 질문에 대해서 이제 하나님께서 대답을 하십니다.
그 대답이 이제 슥7장과 8장 전체의 내용이에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쭉 이야기를 하시는데, Yes / No 로 대답하시지 않고,
7장에 2개,
8장에 2개,
그래서 4가지 메세지를 주십니다.
특별히 7장에는 2가지 메세지는, 앞서 얘기했지만 조금 꾸짖으시는 예,
그래서 부정적인 메시지로 회개와 경고를 하고 있는 메시지이고,
8장의 두 가지 메시지는, 좀 긍정적인 메시지로 회복과 약속을 주시는 그런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Yes, No로 대답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긴 메시지로 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의미는 뭐냐 하면, 이 질문의 대답은, Yes도 될 수 있고 No도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사실은 신앙의 질문 중에 많은 질문들이, 이런 성격의 질문이에요.
Yes를 할 수도 있고, No를 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딱 드러나는 모습만 가지고 ‘이거 해야 돼, 저거 하면 안 돼?’
이렇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질문을 왜 던지느냐?’ 하는 우리 마음의 동기,
그리고 질문을 하는 태도에 의해서,
Yes가 될 수도 있고, No 도 될 수 있다는 신앙의 많은 질문들이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사람들이, 왜 스가랴 선지자에게 와서 이 질문을 묻고 있을까요?
이 사람들이 어떤 이유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질문을 할까요?
이 사람들이 왜 금식을 그만두고 싶어 하냐는 거예요.
1) ‘정말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감사와 은혜가 충만해서,
더 깊게 하나님을 섬기고, 더 깊게 헌신하고 싶은데, 금식 말고 더 다른 건 없습니까?’
과연 이런 동기를 가지고 지금 찾아온 걸까요?
2) 아니면 이제 성전도 세워지는데, 금식 계속하는 것도 좀 힘들고 귀찮은데...
말은 그렇게 안 하죠. 속으로 그냥 자기 혼자 갖고 있는 은밀한 동기로 이렇게 생각하죠.
‘이거 언제까지 해야 돼? 70년 동안이나 이 전통을 지키면서 우리가 금식해왔는데,
힘들고 좀 부담되고 귀찮은데..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나요?’ 이런 마음이었을까요?
둘 중 어떤 마음이었던 것 같으세요?
당연히 이후에 하나님께서 꾸짖으시는 걸 보면(4:4~7), 후자였던 게 분명하죠.
‘너희가 이 질문을 지금 왜 가지고 왔느냐?’는 거예요.
자 이어지는 7:4~7절에 보면 결국 하나님께서 꾸짖으십니다.
꾸짖으신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질문이
정말 하나님 앞에 더 깊게 헌신하고, 더 깊게 은혜에 반응하고 이러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라
‘결국 금식 절기가 부담되고 귀찮은데.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이래서 온 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4절부터 7절까지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들어봅시다.
◑7:4~7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5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6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7 예루살렘과 사면 성읍에 백성이 평온히 거주하며 남방과 평원에 사람이 거주할 때에
여호와가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이 있지 않으냐 하시니라’
7절은 무슨 의미인지, 그냥 한글만 읽으면 약간 애매한데요.
그 뒤에 이어지는 8절부터 보면 ‘결국 말했는데 너희가 듣지 않은 거 아니냐?’
그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결국 옛날부터 옛 선지자를 통해서 내가 계속 얘기해왔는데, 너희가 듣지 않은 거 아니냐?’
그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5절부터 자세히 살펴봅시다.
▲7:5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5절에서 하나님께서 물어보십니다. ‘그 금식이 나를 위한 것이냐?’
무슨 말이에요? ‘너희가 지금까지 금식 왜 한 거냐?’ 이걸 물어보신 거예요.
‘너희가 이제까지 70년 동안이나 이 금식을 해왔는데, 이 금식 도대체 왜 한 거냐?’
‘금식의 동기가 뭐고 이유가 뭐였냐?’ 이렇게 근본적인 마음의 동기를 물으십니다.
제가 목회를 하다 보면 받는 질문들 중에 이런 게 있어요.
‘크리스찬은 정말 담배 피우면 안 되나요? 담배 피우지 말라는 얘기가 성경 어디에 나오죠?’
또 ‘술 마시지 말라는 건 성경에 어디 나와 있죠?’ ‘십일조가 성경적입니까?’
또 ‘주일 성수를 꼭 해야 됩니까?’
또 요즘 젊은 세대들 같은 경우에는 ‘혼전순결에 대한 말씀이 성경에 어디 있습니까?’
이런 것들.. 그런 것들에 대해서 제게 물어보세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시는 분들도 계세요.
그런데 더 많은 분들이, 사실은 ‘하기 싫다’는 생각을 가지고 물어보시는 거예요.
‘나는 하기 싫은데... 꼭 그렇게 해야 됩니까?’ 이런 뉘앙스로 질문하는 거죠.
그래서 이런 질문들은, 공통적으로 신학적이고, 또 성경적인 것을 묻는 듯하지만,
그 실제 속마음, 질문의 의도는.. 그래서 ‘자기가 지키기 싫다’는 거예요.
모태교인이라서 교회를 안 다닐 수는 없는데, 그렇다고 이걸 다 하기에는 부담스럽고...
이게 보통 누구한테 많이 나타나냐면 모태신앙인들한테 많이 나타나요.
그래서 차마 교회를 떠나지는 못해요.
차마 교회를 떠나지는 못하는데, 다 지키기에는 부담스러워요.
그래서 차마 떠나지는 못하고, ‘이왕 하는 거 미니멈으로 하자. 최소한의 것만 하자’
이때 많이 나타나는 질문들이에요.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질문했다고 해서
죄책감 가지실 필요는 없어요. 진짜 궁금해서 할 수도 있죠.
자 그러면서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신데, 다 은혜로 주시는데,
‘이 정도 가지고 뭐라 그러시겠어?’ 이런 거죠.
은혜를 이렇게 오용합니다. 어뷰즈예요. 그러니까 은혜를 갖다가 막 갖다 쓴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진짜 은혜 받은 사람은 어떤지 아십니까?
진짜 은혜 받은 사람은, 미니멈이 아니고, 맥시멈으로 헌신하고 싶어해요.
잘 생각해 보세요. 진짜 은혜 받은 사람은요.
‘아니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생명을 주셨는데,
와 내가 영원한 지옥에 가야 될 사람인데, 나를 천국으로 옮기셨는데,
아니 십일조가 뭐냐, 십의2조, 3조도 드려야지...’
진짜 은혜 받은 사람은요, 미니멈이 아니고 맥시멈을 하려고 합니다. 그게 은혜에요.
그런데 누가 미니멈을 하려고 하냐 하면, 은혜를 누려보지 못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나에게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잘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럴 땐 무슨 말이 나오냐 하면, ‘미니멈’이 나와요.
미니멈을 재고 있는 거라는 거죠. *최소한의 헌신, 봉사, 섬김
여러분, 진짜 은혜는요.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쪼잔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은혜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넉넉하게 합니다.
아니 우리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주셨는데,
영원히 지옥에 갈 나를 구원하셨는데,
다 드리고 싶은 그게... 여러분 진짜 은혜 받은 사람 반응 아닙니까?
교회를 차마 떠나진 못하지만 미니멈으로 하겠다고 하는 분들은
사실은 은혜를 몰라서 나오는 반응이에요.
은혜 가운데 살아가신 여러분들 되셨으면 좋겠어요.
오늘 본문 스가랴서 7장에서, 이 태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질타하시는 거예요.
‘너희가 지난 70년 동안이나 금식했는데, 그게 정말 나를 위해서 금식한 거냐?
도대체 무슨 동기를 가지고 한 거냐?’ 그거 물어보시는 거예요.
▲7:6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여러분, 금식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신앙의 헌신이 마찬가지인데요.
기도도 마찬가지고 예배, 봉사, 헌신, 섬김, 헌금 모든 영적인 일이 마찬가지인데
두 가지 마음으로 행할 수 있어요.
-하나는 하나님을 위해 행할 수 있고
-하나는 나를 위해 행할 수 있어요.
‘너를 위해 행한 거 아니냐? 정말 나를 위해 행한 거냐?’
두 가지 동기로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드러나는,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은 똑같아요. 전혀 구분할 수 없어요.
똑같이 예배 드리고, 똑같이 헌신하고, 헌금하고 섬기고 봉사하고 다 할 수 있는데,
실제로 전혀 다른 마음의 동기에서 할 수 있다는 거예요.
하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그 일을 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나를 위해서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금식을 하는데, 종교적 만족을 위해서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래도 40일 금식을 했어. 이 정도면 내가 충분히 하나님 앞에 할 일을 했지’
이렇게 자기 만족을 위해서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헌금을 해도 마찬가지고, 또 봉사를 해도 마찬가지고,
‘나는 그래서 충분히 영적인 사람이야’ 하는 자기 종교적 만족을 위해서 할 수가 있습니다.
또는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할 수도 있습니다.
또 내가 있었던 죄책감을 떨어내고 싶어서,
또는 벌받는 것이 무서워서 할 수도 있어요. 자 이런 건 다 뭐예요?
나를 위해서 행하는 거라는 거예요.
이런 것은 전혀 하나님과 상관없다는 거예요.
반면에 그 동기가 철저히 하나님이에요.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겠지..’
‘또는 내게 행하신 일이 너무 감사해서.. 그냥 하나님께 더 드리고 싶어서..
그냥 하나님께 이렇게 하는 게 너무 좋아서..’ 그게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거라는 거예요.
금식을 하든, 헌금을 하든, 예배를 드리든, 기도를 하든, 봉사를 하든 뭘 하든지 간에
‘야 이렇게 하면 하나님 기뻐하시는구나’
그래서 내가 그냥 하나님께 더 그렇게 해드리고 싶은 거에요.
너무 좋아서 그냥 그렇게 해드리는 거에요.
‘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니까 너무 좋아’ 그래서 더 해드리고 싶어요...
하나님이 나에게 행하신 일이 너무 커서, 너무 감사해요.
그냥 내 생명 다 드려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아요.
이게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거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 동기를 정확히 물어보십니다.
‘너희가 그 금식은 왜 한 거냐? 너희가 그 예배는 왜 드린 거냐?
너희가 그 봉사와 섬김은 왜 한 거냐? 너희가 그 헌금은 왜 드린 거냐?’
그 질문을 던지시는 거예요.
정말 하나님 앞에 하나님으로 인하여 그 일을 한 사람은요.
결코 ‘미니멈’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히려 하나님으로 인하여 ‘맥시멈’을 하고 싶어해요.
그리고 맥시멈을 추구하는 사람은, 굳이 선지자 찾아가서 물어볼 필요 없어요.
그냥 자기가 할 수 있는 맥시멈을 하면 되지,
‘어디까지가 맥시멈입니까?’ 물어볼 거 없죠.
왜 물어보는 줄 아세요? 아까워서 물어보는 거예요.
드리긴 드려야 될 것 같은데, 맥시멈으로 드리긴 아깝고...
▲7:7 ‘예루살렘과 사면 성읍에 백성이 평온히 거주하며 남방과 평원에 사람이 거주할 때에
여호와가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이 있지 않으냐 하시니라’
이 말씀은 다음 주에 8절과 이어서 조금 더 살펴볼텐데,
‘이들에게 왜 재앙이 내렸는가’를 다시 상기시키시는 거예요.
‘평안할 때 옛 선지자들이 외친 말씀이 있지 않느냐?’
너희가 선지자들이 외친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말씀이 있었는데 듣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물론 이들이 듣기는 들었을 거예요. 물리적으로는 들었겠죠.
그러나 그 마음이, 말씀에 반응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루살렘이 망할 때 보면,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데,
물리적으로는 전부 들었어요. 그런데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어요. 마음이 반응하지 않았어요.
들을 때 이 사람들이 다 ‘나에 대한 생각’ 외에는 없었어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더 드리지?’ 이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거죠.
모두 ‘어떻게 하면 면피할까?’만 고민했다는 거예요.
이게 종교이고, 율법이죠.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미니멈을 드려서 하나님의 분노를 잠재우고,
어떻게 하면 미니멈을 드려서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걸 좀 막고
어떻게 하면 미니멈을 드려서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지 않게 하고...’
그것 외에 관심이 없었다는 거예요. 이것이 70년 포로 재앙의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삶이 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 이유이기도 해요.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이 이유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분명히 하나님께서 뭔가를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을 듣지 않는 거예요.
물리적으로 듣지 않을 수도 있고 들었지만, 자기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을 수 있어요.
네, 분명히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 앞에서 계속 미니멈을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얼마나 하면 되는 거지?’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복 있는 자는요. 하나님께 넉넉히 드리는 자예요.
맥시멈을 드리고 싶어하는 자에요. 그렇게 복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것은, 은혜를 오용해서 미니멈을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은혜로 인해서 더 깊은 헌신과, 더 깊은 열정과, 더 깊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로 나오라고 주신 거죠. 은혜로 말미암아 맥시멈을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우리에게 맥시멈을 주셨잖아요.
자신의 목숨,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주실 수 있는 맥시멈을 다 주신 거거든요.
그게 여러분 사랑이에요. 사랑은 절대로 미니멈을 지불하지 않습니다.
미니멈을 지불하는 것은 이것은 사랑이 아니고 비즈니스예요.
사랑은 여러분 줄 수 있는 맥시멈을 주는 게 사랑이지, 미니멈을 주는 건 사랑이 아니에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랑의 관계를 원하십니다.
마음과 마음이 반응하는 관계, 정말 하나님 앞에 막 더 드리고 싶어하고,
또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축복하고 싶어하시고,
이 주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정말... 다 표현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이 깊은 사랑의 연합을 원하시는 것이지,
미니멈 지불하고 그냥 끝 이런 관계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어떤 질문을 하나님께 던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질문의 의도와 태도는 어떤 것입니까?
정말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더 깊은 감격에서 나오는 더 큰 것,
하나님께 더 드리고 싶고, 더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로 들어가고 싶고,
그래서 십의 일조가 아니라 십의 이조를 드리고 싶어서 던지는 질문입니까?
‘주일 성수가 아니라 일주일 내내 예배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던지는 질문입니까?
아니면 하기 싫어서 면피하고 싶어서 던지는 질문입니까?
이 백성들이 하나님께 던졌던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반대로 질문을 던지시는 거예요.
‘너희는 그 질문을 지금 왜 던지고 있는 거니? 너희는 그 질문을 왜 던지고 있는 거니?’
다시 반문하십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2021년 한 해가
‘어떻게 안 드릴까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맥시멈을 드릴까’를 고민하는 해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게 복이 있는 마음이에요.
그래서 안 드려도 될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더 드려야 할 이유를 찾는 여러분이 되셨으면 좋겠어요.
네 그 위에 하나님께서... 스가랴서 8장을 다음 주에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정말 주의 백성들을 향한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들이 다 부어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
주1) 도입
저희가 스가랴서를 순서대로 살펴보고 있는데요.
스가랴서 전반부를 지난주까지 살펴봤습니다.
스가랴서 전반부 말씀은 1~6장까지인데 *총14장
전반부 말씀은 스가랴가 하룻밤에 봤던 8가지 환상,
그리고 마지막에 여호수아에게 금관을 만들어 씌우는 여호수아의 대관식까지가
전반부 내용이었습니다.
전반부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성전이 다시 재건되게 될 것이고, 예루살렘이 다시 회복될 것이다”는 약속의 말씀이었죠.
그리고 예루살렘 가운데 다시 하나님이 돌아오셔서,
성전에 임재하심으로 영광이 되시고, 또 불성곽으로 그 성을 두를 것이고,
그곳에 사는 주의 백성들 가운데 기쁨과 영광과 평화가 있을 것이라는
약속과 격려의 말씀이 1~6장까지의 전반부 말씀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오늘부터 이어지는 슥7장과 8장은
그 후에 이어질 후반부와의 사이에 껴있는 일종의 트랜지션(환승)하는 장인데요.
후반부는 9장부터 시작되는데, 9~14장까지는 종말에 대한 계시들이 쭉 이어집니다.
종말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그 계시들이 이어지는데
그 사이에 7~8장이 껴있습니다.
그래서 7장과 8장은 전반부의 환상과, 후반부의 환상을 연결하는
그런 특별한 위치에 있는데,
그래서 이 메시지는, 스가랴 당대를 살고 있었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권면과 도전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앞에 것과 뒤에 것들이, 환상과 계시를 통해서
어떻게 보면 특별히 뒤에 것은 이제 종말론적인 성격이 강하거든요.
그런데 7장과 8장은, 그 당대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대의 이슈를 가지고,
그러니까 종말에 일어날 어떤 이슈와 또 먼 미래의 얘기가 아니라,
당대에 살고 있는 그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그런 권면의 말씀입니다.
▲7장과 8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전반부에 8가지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놀라운 회복과 은혜를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그 말씀에, 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되는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 말씀 앞에 반응해야 되는가?
하는 것이 7장과 8장의 주제입니다.
특별히 <7장>은.. ‘잘못 반응했을 때 어떻게 되는가?’
주신 하나님의 말씀 또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데,
‘그 앞에 잘못된 태도와 잘못된 의도를 가지고 반응했을 때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심판과 경고 쪽에 조금 더 무게가 가 있고요.
그 얘기만 전체적으로 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거기에 조금 더 무게중심이 가 있다면,
<8장>은 올바르게 반응했을 때, 어떤 축복과 어떤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는가?
하는 완전한 회복의 약속과 축복에 조금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자 그래서 한 서너 번에 걸쳐서, 7장과 8장 말씀을 함께 살펴보면서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 앞에 올바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가 아니라,
주님의 축복과 주님의 회복이 더 풍성하게 임하는
그런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주2)
유대 백성들이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권면으로 주전 520년에 공사를 다시 시작하자,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 등이 찾아와 누구의 허락으로 성전을 짓는지 물었습니다.
유대 장로들은 과거 고레스 왕이 내렸던 성전 건축 조서를 언급하며 항변했고,
총독 닷드내는 다리오 왕에게 사실 조회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닷드내의 상소를 받은 다리오 왕은 바벨론의 문서 창고를 뒤져
고레스 왕의 원조서를 찾아냈고, 성전 재건이 합법임을 확인한 뒤
에스라 6:6~12절을 통해 공사를 방해하지 말고
오히려 왕의 재정에서 경비를 지원하라는 최종 허락 조서를 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