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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1장 너는 저 도시에 가서 외치라

LNCK 2026. 8. 14. 10:06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꿈, 비전, 소명

너는 저 도시에 가서 외치라! 요나1:1-3 2026.08.02. Youtube

 

◈너는 저 도시에 가서 외치라!             욘1:1-3              2026.08.02. 

 

오늘 요나서 강의 첫 번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요나의 도피 행각의 시작입니다.

 

◑욘1: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성경을 보면서, 성경 인물들 가운데 가장 과소평가된 인물, 그 대표적인 인물이 있다면

요나라고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제 요나는 불순종의 대명사, 청개구리,

그리고 주일학교에서부터 ‘절대로 요나처럼 하면 안 돼’ 이렇게 배우는 인물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1절에서 보는 것처럼, 그리고 4장까지 계속 보는데

이 사람은 평생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명확하게 듣고,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영적 상태의 사람이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요나가 경험한 이런 영적 체험과 깊이가, 저와 여러분에게도 체험되기를 축복합니다.

 

성도님들 가운데 인생의 중요한 결정은 내려야 되는데,

도대체 뭐가 하나님의 뜻인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아서 난감해하시는 분들 많잖아요.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한다면,

먼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채우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말씀과 기도는 마치 우리가 호흡을 할 때 들숨과 날숨 같은 거예요.

 

들숨으로 산소를 우리가 받아들이고, 날숨으로 내뱉을 때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거죠.

그런 것처럼, 이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내가 먹고, *들숨

그리고 기도 가운데 나의 근심과 걱정, 두려움을 다 뱉어내는 것,  *날숨

그것이 이제 말씀(들숨)과 기도(기도)입니다.

 

제가 중3 때 성경을 읽다가 성경 임재체험을 하게 됐어요.

그리고 나서는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의 음성이 너무 잘 들리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런데 어떻게 들리느냐? 신비한 음성이 들리느냐?

제가 예를 들어 볼게요. 반에 있는 친구 하나가 저를 너무 괴롭히는 거예요.

이 친구가 저를 너무 힘들게 합니다. 너무 밉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리고 기도하며 응답을 기다리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원수를 사랑해라!’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예전에는 그냥 일반적인 말씀이었죠.

근데 그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리는 거예요.

성경의 말씀이, 나를 향한 음성으로 다 들리기 시작하고,

제가 그 말씀에 즉각 순종하니까, 제 인생이 완전히 다른 단계로 들어가게 됐어요.

그래서 먼저는 성경의 세계, 말씀의 세계가.. 여러분에게 열려지기를 축복합니다.

 

▲저희가 2학기부터는 공동체별로 [보라통독] 기본 과정을 하기로 했잖아요?

그래서 공동체의 식구들이 좀 더 긴밀하게 함께 말씀을 읽고,

함께 말씀을 품고 배우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제가 보라통독 현장 강의는 더 이상 안 하기로 했지만, 두란노 온라인 강의는 계속 하고요.

그리고 [보라통독 Q&A] 집중 강의를 하려고 합니다.

 

<성경의 세계가 열리는 보라통독> 이제 구약편만 정리했는데요.

100개의 질문, 100문 100답, 그래서 집필이 거의 완료가 되었습니다.

 

▲제가 양재에서 사역을 할 때, 한 여집사님이 남편 때문에 그냥 속을 앓고 계셨어요.

남편이 축구에 대한 애정이 엄청나서, 조기축구에 미쳐서 주일 예배를 안 나온다고

아내가 계속 푸념을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한 학기가 지났는데, 어느 주일 예배에 남편분이 같이 나오신 거예요.

이분이 여기 나올 분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너무 반가워서 ‘어떻게 오시게 됐냐고?’ 그랬더니,

아내가 ‘주일 날 안 나오니까, 당신 수요일 날이라도 교회 가자’

그래서 수요일 날 저녁에, 제가 [보라통독] 강의를 했는데,

이분이 성경 배경이 되는 그 역사가 너무 재미있어서,

그 역사 배우다가 성경 읽는 재미가 들리고, 그리고 삶의 우선순위가 바뀐 거예요.

 

평생 조기축구에 미쳐서 살던 분이, 조기축구를 포기하고, 주일예배를 선택한 거예요.

기적입니다.

여러분 말씀이 임하면, 인생이 변화되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요나’의 이름의 뜻이 뭔가요?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자 그런데 비둘기 그러면, 평화의 소식을 전하는 메신저이죠.

요나는 비둘기처럼, 평생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었죠. 먼 나라에까지 가서요.

 

구약 역사를 생각해 보니까, 홍수 심판 때 노아와 그 가족들이 방주에 들어가서

얼마나 있었을까요? 1년 11일 있었어요.

그런데 그 기간 동안, 이제 바깥 세상이 안정이 됐을까?

그래서 바깥에 새를 날려보냈는데, 새가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돌아왔어요.

그 새가 비둘기였어요. 자 그래서 비둘기는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역할이에요.

 

이 비둘기에 대해서 좀 찾아보니까, 귀소능력,

자기의 집을 찾아오는 능력이 왕복 1천 킬로를 커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대요.

500KM를 떨어진 데를 가도, 다시 500KM를 날아서 집으로 찾아서 올 수 있는 능력!

 

그래서 여러분, 영화에 많이 보셨을 텐데,

‘전서구’라고 서신을 전달하는 비둘기가   *傳書鳩, carrier pigeon

고대에 기원전 3000년경 이집트 문명 때부터 사용이 됐고,

로마 시대에도 사용이 됐고, 최근 1차 대전까지 사용이 됐어요.

 

그러니까 요나(비둘기)라는 이름과, 그 사람의 평생 선지자 역할을 보면,

니느웨로 가는 게 합당한 거예요. 그런데 요나는 꺼려합니다.

 

▲그래서 제가 비둘기를 다시 좀 더 생각을 해봤어요.

구약성경을 보면 레위기에, 특별히 집비둘기와 산비둘기 얘기가 나와요.

 

그런데 우리가 도시에서 사람들이 다가와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매우 용감한 비둘기들이 있잖아요. 이 비둘기들이 집비둘기예요.

집비둘기는 굉장히 친화력이 좋고, 무리지어서 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산비둘기는 굉장히 성격이 까칠하고 예민하기 때문에, 산에 있는 거예요.

그리고 커플만, 둘만 돌아다니고, 상당히 경계심이 강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제 요나를 생각해 보니까 ‘요나는 산비둘기 같은 사람이구나’

그럼 비둘기는 순결을 상징하잖아요.

그런데 거룩과 순결이라는 것은 포용력이 떨어지게 돼 있어요. 왜 그럴까요?

 

악하고 더러운 것을 품으면, 내 거룩과 순결을 해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인간의 거룩과 순결이라는 것은, 포용력이 떨어진다고요.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가장 순전하신 분인데, 모든 죄인들을 품어주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 영성이죠.

자 그러니까 요나는 거기까지 가지를 못한 거예요.

 

◑1: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니느웨는 티그리스강 상류에 위치해 있습니다. 앗수르 제국의 수도였죠.

‘자, 너는 일어나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 :2

하나님의 명령이 이해하기가 어려운 명령이었나요?

매우 단순 명쾌한 명령이었어요.

 

게다가 평생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헷갈릴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가 순종을 했나요? 불순종했나요?

불순종했어요.

왜냐하면 ‘내가 굳이 거기에 갈 이유가 있나?’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여러분, 그 죄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될 정도면, :2

하나님의 진노의 칼이 그 위에 있는 거잖아요.

하나님이 뜻하시면, 심판하시려면 심판하실 수 있고, 거두시려면 거두실 수 있잖아요.

그래서 ‘내가 굳이 개입할 이유가 있나?’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예전에 청년부 사역할 때, 한 청년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어요.

‘중앙아시아 A국은 여성 인권 유린이 아주 심각한 수준입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예시를 들더라고요.

 

그러면서 ‘세상에 이런 악이 창궐해 있는데, 아니 선하다고 하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가만히 계실 수가 있느냐? 도대체 하나님은 뭘 하고 계시는 거냐?’

여러분 같으면 뭐라고 답변하시겠어요?

 

기독교 변증적으로, 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얘기했어요.

‘그래서 형제님을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신 겁니다.’

 

‘왜 당신을 보냈냐? 당신이 그 심각성을 느낀다면,

지금까지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본 적이 있느냐?

아니 왜 그 나라에 갈 생각을 안 하냐?

그 나라에 가서 구체적인 노력과 선교와 봉사를 해본 적이 있느냐?’

그 생각은 하지 않았겠죠.

 

여러분, 세상에 악한 자들을 보고,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보면서

‘도대체 하나님은 뭘 하고 계시느냐?’

세상에 악인들이 활개를 치는 것을 보면서 ‘도대체 하나님은 세상에 뭘 하고 계시느냐?’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거예요.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인 거예요.

 

▲자, 그러면 요나가 이런 사실을 모를까요? 너무나 잘 알죠.

평생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고, 하나님의 뜻을 대행했던 선지자잖아요.

 

그런데 자기가 다른 건 다 순종해도, 이 명령은 순종하기가 너무 싫은 거예요.

그래서 조용히 다시스로 떠납니다.

 

여러분 오늘 1:1~3절까지만 읽었는데, 요나가

‘도대체 그런 명령을 왜 하십니까? 왜 저를 보내십니까?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대사가 한마디도 없어요. 그냥 조용히 떠났어요.

 

그래서 제가 이게 교회에서 적절한 표현일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표현이 떠올랐어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

서양식으로는 ‘부엌의 열기가 싫으면 요리사를 그만둬야 된다’

 

요나가 하나님께 항의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질문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냥 조용히 내려놓고 떠났어요.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선교 파송을 하실 때, 이런 얘기를 하신 적이 있어요.

마10:14 ‘누구든지 너희를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에 먼지를 떨어버리라’

 

그러니까 예수님의 명을 받아서 정말 진심으로 복음을 전하러 왔는데,

영접하지도 않고, 영접해놓고 말을 듣지도 않고 그러면,

‘나가서 발에 먼지를 떨어버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 말씀을 읽어봐도, 적어도 그 집에 가 보고, 그 성에는 가봐야 하는 거잖아요?

하나님은, 요나가 어쨌든 간에 니느웨라는 그 성에 가보기를 원하셨다고요.

그런데 요나는 가보지도 않고, 한마디 외쳐보지도 않고, 그냥 포기했던 거예요.

 

▲이번 여름에 공동체마다 도시정탐 사역을 하고 있는 거 아시죠?

모여서 그 도시를 위해서 중보기도도 하고, 땅밟기도 하고, 플러깅 청소도 하고,

노방전도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거는 교회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지,

내가 이 무더위에 나가서 고생할 생각은 없다.

어차피 하나님이 그들을 건지시려면 건지시겠지, 내가 굳이 나설 필요가 없다.

휴가도 며칠 없는데, 나는 피서나 가야겠다’

 

그러면 딱 요나의 마음인 거예요.

저를 한번 따라해보세요. ‘너는 일어나 저 도시로 가서 외치라!’

이 하나님의 음성이 여러분에게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도시는 인간이 세운 아성이지만,

하나님은 그 도시 한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의 깃발을 세우기 원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도시문명 안에 살다 보면, 오해하는 게 있습니다.

‘아 정말 모든 것을 인간이 자급자족할 수 있겠구나.

이 도시문명의 안락한 삶은 영원히 지속되겠구나..’ 과연 그런가요?

 

여러분 역사 가운데 수많은 도시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죠.

가인이 세운 최초의 도시 에녹성은,

하나님 없이 인간이 유토피아를 만들고 싶은 목마름이었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교만과 안일함이 가득한 이 도시 한가운데

다윗처럼 전심으로 예배하는 예배공동체가 세워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예배공동체 가운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천국문이 열리는 사건들이

일어나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요나를 통해서 하나님은 도시를 변화시키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요나가 아무 말 없이 다시스로 떠나잖아요. 마지막 3절 같이 읽겠습니다.

 

◑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가 뭘 피하려고 했어요? ‘여호와의 얼굴’

여러분,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시선을 피할 방법이 있어요? 없죠.

 

인간의 시야에는 사각지대가 존재합니다.

CCTV를 아무리 많이 달아놔도 사각지대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에는 사각지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가 이렇게 피하는 걸 보면서,

저는 어린애들의 ‘까꿍놀이’가 생각나거든요.

 

애들이 자기 눈 가리고, 그리고는 상대가 자기를 못 보는 것처럼

그렇게 순간 착각에 빠지잖아요. 그걸 너무 재밌어하는 나이가 있죠.

 

그런데 그거는 자기 눈을 가리고, 자기가 안 보이는 거지,

상대는 다 나를 보고 있거든요.

요나가 자기 눈을 가린들, 자기만 안 보이는 거지, 하나님은 그를 다 보고 계시고,

그를 다 알고 계시는 거예요.

 

자 그러면 이걸 모르는 요나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저는 요나의 심리를 이번에 묵상을 하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잊어버려 주시기를 바랬던 것 같아요.

 

‘그동안 내가 하나님하고 너무 친하게 가까이 지낸 것 같아..

야 내게 이런 무리한 요구까지 하시다니.. 내가 도저히 이것까지는 할 수가 없다. 여기까지다’

하고 생각한 거죠.

 

요나의 고향이 가르 헤벨입니다. 왕하14:25

가 헤벨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갈릴리 북쪽이에요.

 

근데 그 위쪽에 앗수르 제국이 있잖아요.
앗수르 제국이 굉장히 잔인하게 이민족들을 괴롭힌 것으로 악명이 높았거든요.

그 수많은 피해를, 요나는 어려서부터 당했던 지역 출신이에요. *접경지대

 

그러니까 그들에 대한 악감정.. 이건 해결할 방법이 없었던 거죠.

그래서 요나가 스스로 사표를 내던지고, 휴가지로 떠나버린 겁니다.

그가 욥바 국제여객선 터미널에 나타난 거예요.

 

▲자, 그런데 요나가 욥바 항구에서 어디로 가려고 했어요?

다시스로 가려고 했어요.

 

다시스는 오늘날 스페인의 타르테소스로 추정을 합니다.

욥바에서 니느웨까지는 한 800KM지만,

이걸 가기 싫어가지고 서쪽으로 4000KM를 도망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 다시스는 스페인 남부의 항구도시인데, 지중해 서쪽 바다 끝이죠.

요나가 선택한 휴양도시를 보면서, 저도 충격을 좀 받은 것 같아요.

 

왜냐하면 여러분 이스라엘이 기후가 매우 안 좋긴 하지만,

이스라엘 안에도 휴양도시들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어요.

 

그가 사표던지고 은퇴하고 갈 만한 데들이 있었습니다.

북쪽으로 가면 단이라고 나오죠. 단에서 브엘세바 할 때의 그 단은,

연간 강수량이 1500MM예요. 우리 나라 정도란 말이에요.

그래서 곳곳에 계곡물이 흐르고, 산림이 울창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휴양지로 많이 찾는 곳입니다.

 

그리고 경제 수도 텔아비브도 지중해성 기후로 인해서 굉장히 온화하기 때문에

해변가 휴양도시로 사용하거든요. 이런 데로 갈 수도 있었단 말이죠.

 

그런데 그런 데를 가지 않았어요.

아예 땅 끝에 스페인의... 그 당시에 지상 낙원으로 알려졌던 다시스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스페인을 안 가봐서, 스페인이 어떤가를 한번 찾아봤더니

지중해성 기후, 온화한 기후 덕분에 세계 관광대국 2위더라고요. 프랑스가 1위.

스페인에 매년 8,500만 명의 관광객이 모인대요. 별로 안 놀라시는데 엄청난 숫자입니다.

 

▲자, 그가 뱃값을 지불하고 그리고 이제 배를 출발했는데,

학자들은 엄청난 거금을 지불했을 것으로 추정을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항로 중에서 제일 먼 목적지였잖아요.

그리고 사공들 외에는 패신저가 딱 한 사람 요나 뿐입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 이런 거예요.

여러분이 뉴욕행 비행기를 탔는데, 비행기 한 대를 여러분이 전세 낸 거예요.

그 값을 다 지불한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도대체 이 사람 왜 이렇게까지 다시스를 가고 싶었을까요?’ 라는 거죠.

‘평생 내가 일만 하고 휴가를 못 가봤으니까,

내가 항상 꿈꿔오던 다시스를 꼭 가봐야지?’ 이런 생각일까요?

 

그의 마음의 기저에 가장 중요한 동기는, 니느웨를 절대로 가고 싶지 않은 거예요.

니느웨를 절대로 가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그런데 또 한 가지 여기서 고려할 사항이,

여러분 다시스라는 저 멀리 4천 킬로나 되는 거리의 목적지,

여기로 가는 배가 얼마나 자주 왔을까요?

 

이건 기록이 나와있지는 않지만, 솔로몬 시대에 해상 무역이 가장 활발했던 때

다시스로 가는 배를 3년에 한 번 출항시켰어요.

 

그러니까 욥바 항에서 좀 더 빈도가 높아졌다고 해도,

이거는 적어도 몇 달 내지는, 1, 2년은 걸릴 만한 배가, 때마침 거기 있었다는 거예요.

 

뭔가 수상하죠. 그 배를 왜 하나님이 보내주셨는지...

그러니까 요나 생각에는 ‘아 하나님이 모른 척하고 나를 보내주시나 보다’

이렇게 생각을 했겠죠.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다음 주 설교에서 얘기할 거고요.

 

오늘 요나서를 묵상하다가, 제가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요나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니느웨를 그냥 치고 싶으면 치시면 되는데, 굳이 왜 날 보내시지?’

‘아, 하나님 날 보내서 저들이 회개하면 살려주시려고 하는구나’

하나님의 마음을 요나가 너무 잘 알았던 거예요.

 

그런데 그 하나님을 너무 잘 아는 게 문제였던 겁니다.

그래서 불순종을 했으니까요.

 

예전에 여러분 20~30년 전에 한국교회가 성장할 시기에,

부모님들이 자기 자식을 목회자로 헌신시키고, 서원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요즘은 자녀가 신학교를 가려고 해도 부모가 뜯어말립니다.

심지어 목사인 저에게 찾아와서, 자기 자녀를 말려 달라고 합니다.

제발 그런 요구를 저한테 하지 마세요. 자 그러면 왜 부모가 그럴까요?

목회가 너무 어렵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 아는 게 문제인 거예요.

그 어설프게 아는 게 문제인 거예요.

 

예전에는 젊은이들이 결혼을 당연지사로 생각했잖아요.

인생에서 결혼하는 거는, 어떻게 보면 궁극적인 목표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결혼을 굳이 왜 해야 돼?’ 비혼 선언을 하기도 하죠.

왜 그럴까요? 결혼 생활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아는 거예요.

그 아는 게 문제인 것이죠.

 

제가 온누리교회에 있을 때, 정말 열심히 사역했어요.

새벽에 나가서 한밤 중에 들어오고... ‘나는 공생애를 살고 있다’ 늘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서 하나님이 저를 선교지로 보내시면 ‘아프리카 오지에 보내셔도 순종하겠습니다.

전통적인 교회에 보내셔도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그러나 개척교회는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그렇게 기도했던 게 갑자기 생각이 나더라고요. ‘아 나도 똑같은 사람이었구나’

 

이 시대에 교회를 개척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니까요... 그 아는 게 문제인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절대로 내가 하지 않겠다’고 하는 걸, 하나님은 시키세요.

 

요나가 ‘니느웨는 절대로 가지 않겠다’는 거잖아요.

결국에는 하나님이 기어코 보내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제가 다 순종해도 절대로 이거는 안됩니다.’

그 얘기를 절대로 하시면 안되는 거예요. 진짜로!

 

왜요? 절대자는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으시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상대적 존재이기 때문에 ‘절대’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 거예요.

그 최종적 결정은 하나님께 있는 거예요.

 

▲자, 요나가 하나님도 잘 알았지만, 니느웨도 너무나 잘 알았던 것이 문제였어요.

니느웨는 티그리스 강 상류에 있는,

당시에 국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주요 도시 중에 하나였습니다.

 

오늘날 이라크 북부에 있는 모술이라고 들어보셨죠?

IS가 일어났을 때 점령했던 지역인데, 티그리스 강이 있으면,

서쪽 편에 모술이고, 동쪽 편에 니느웨가 있었어요. 바로 강 좌우 편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들이 얼마나 악랄했는지, 요나 이후에 160년 뒤에 활동한 선지자가 나훔인데요.

나훔이 이렇게 고발을 합니다.

나훕3:1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피를 흘리는 성읍’이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는 도시 니느웨입니다.

앗수르 제국은 정말 악명을 떨쳤거든요. 제국 역사 중에서는 가장 잔인한 민족으로 손꼽히죠.

 

자 그러면 요나 입장에서는, ‘내가 평생에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살았는데

적국에 유익이 될 만한 이적 행위를 할 수는 없다’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내가 다 순종해도, 이거는 절대로 못합니다. 이거 나라 망치는 일입니다.’

이렇게 주장을 한 거잖아요.

 

그런데 요나의 예상대로 됐더라고요.

여러분 결국에 요나가 북이스라엘 출신인데,

북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어느 제국에 멸망당했어요? 앗수르 제국의 멸망을 당했어요.

그가 예상한 대로였습니다. (만약 요나가 선교하지 않았다면, 북왕국이 더 일찍 무너졌을수도)

 

그래서 요나 후 160년 뒤에, 나훔 선지자가 니느웨가 망할 거라고

니느웨 멸망 직전에 예언을 했고, 그 예언대로 니느웨는 실제로 망했는데

그럼 나훔 선지자까지 여전히 북왕국이 건실하게 있지 않았느냐? 아니요.

 

여러분 나훔 선지자는 북왕국이 이미 망한 상태에서,

남유다 출신의 예언자였던 거예요. *북왕국이 멸망한 60년 후에 니느웨 멸망 예언

 

그러니까 요나는 천국에서 북왕국이 니느웨에 무너지는 걸 보면서,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이 말을 한 마디 하지 않았겠어요?

 

▲제가 2005년도에 밴쿠버에 가서, ‘하나님, 이 도시의 부흥을 주옵소서’ 하고

간절히 부흥을 위해 기도하면서, 목사님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어요.

 

‘목사님, 우리가 도시의 부흥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고 힘을 모읍시다’

그러면 대부분 목사님들이 그렇게 얘기하시는 거예요.

 

이제 벤쿠버에 온 지 1년도 안 된 사람이 그러고 돌아다니니까,

‘당신이 밴쿠버를 잘 몰라서 그래.. 여기는 안 돼’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그 도시의 부흥의 역사를 경험시켜 주셨거든요.

그래서 돌이켜보면, ‘내가 벤쿠버를 잘 모르기를 너무나 다행이다.’

내가 만약에 그 도시의 찬란한(?) 패배의 역사를 너무나 자세히 알았다면,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거고... 아니 거기에 갈 용기도 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제가 C4C, Church for Church죠. ‘교회를 위한 교회 개척운동’을 통해서

앞으로 다윗의 장막처럼 강력한 예배공동체, 복음공동체가 될 교회들을

경기도 지역으로부터 출발해서, 첫 번째가 1516 교회, 두번째가 1203 교회이잖아요. *동탄

 

앞으로 경기도로 출발해서 전국으로, 전세계로,

300개의 교회를 세우는 비전을 갖고 있습니다.

 

근데 제가 이 비전을 나누면, 어떤 분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목사님이 그게 될지 어떻게 아느냐?’ 당연히 저는 모르죠.

근데 제가 결과를 알아서 이걸 하나요? 하나님의 비전이기 때문에 시작하는 거예요.

 

모든 과정과 결과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아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너는 일어나 저 도시로 가서 외치라!’ 이렇게 말씀하시면.

 

왜요? 어떻게요? 굳이 제가요?’ 이렇게 대답하지 않고,

, 제가 가겠습니다.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그렇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시는 거예요.

 

△제가 교회 개척을 할 거라고 생각을 못했었고,

또 하나는 분당에서 교회를 시작하리라고 생각을 못했었어요.

 

그런데 작년 이맘때 저희 아버님이 소천하셨는데,

아버님이 이제 연로하시니까 ‘몇 년이라도 아버님 곁에 살아야겠다’

그래서 이제 분당으로 제가 이사 오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 도시로 가라’는 마음을 주셔서 왔고, 이 도시를 품게 하셨고,

그리고 이 도시에서 한국교회의 반전의 부흥을 일으키려고 모교회,

센터가 될 수 있는 교회를 세워놓고,

여기서 경기도로, 전국으로, 전세계로 뻗어나가는 비전을 주신 거예요.

 

▲그래서 저를 한번 따라해보세요. ‘도시정탐사역!’

도시 정탐이라는 말을 쓰기는 했지만, 여러분 도시정탐사역을 할 때 주의하실 게 있어요.

 

그건 뭐냐면 이 사역을 통해서 ‘내가 이 도시를 얼마나 잘 알게 됐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이 도시를 얼마나 잘 품게 됐는가’가 근본적으로 중요한 거예요.

 

왜냐하면 여러분, ‘정탐’ 그러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출애굽해서 가데스바네아에 가게 되죠.

여기서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냅니다.

40일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좋은 땅입니다.

그러나 거기는 거인족이 살고 있고 우리를 삼키는 땅입니다.’

 

이렇게 부정적인 보고를 해서, 온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밤새 통곡하고,

이집트로 돌아가겠다고 해서 난리가 났던 거잖아요.

 

여러분 정보 수집이 중요할까요? 도시정탐은 정보 수집이 핵심이 아니라,

그 도시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품을 수 있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래도 ‘친밀하게 서로를 가장 잘 안다’ 그런 게 누구예요?

부부하고, 부모 자녀 사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잘 알까요? 이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러나 더 중요한 건 뭐냐면,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잘 품어주는 관계일까요?

이게 훨씬 더 중요한 거예요.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을 ‘내가 뻔하게 잘 알고 있지..

내가 하나님의 마음도 너무나 잘 알고 있지...’ 너무나 잘 아는 게 문제였잖아요.

 

그런데 가족들도 마찬가지예요. 식자우환 이란 말이 맞을 때가 많죠.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다’ 이렇게 얘기할 정도로,

내가 너무 똑똑해서, 자기 가족을 수용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어요.

자기 남편, 자기 아내도 받아주지 못하고, 자식도 부모도 받아주지 못하는 분들이 있어요.

 

‘내가 너를 알지.. 내가 몇십 년을 너랑 살았는데, 너는 뻔하지.. 내 손바닥 안에 있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리고 정보를 취합합니다. 평가합니다.

그런데 가슴에 품지는 않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관계에서도, ‘사람을 얼마나 잘 아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품어줄 수 있느냐?’ 이게 훨씬 더 중요한 거예요.

 

때로는 부부관계에 있어서, 부모자식관계에 있어서,

망각의 은사가 없으면 가정은 존재할 수 없어요.

 

때로는 알지만... 여러분, 인간이 알아야 얼마나 알겠습니까?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잖아요. 하나님은 전지하시죠.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의 밑바닥을 아시죠.

우리 내면에 가장 더러운 찌꺼기까지 다 아시는 분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품어주시잖아요.

나는 내 가족조차도 어설프게 알면서도... 품어주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베드로전서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벧전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여러분 지식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는 줄로 믿습니다.

 

▲니느웨라는 도시, 다시스라는 도시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봤어요.

오늘 또 중요한 도시가 어디예요? 욥바이죠. 이 욥바를 마지막으로 묵상하려고 합니다.

 

욥바는 과연 어떤 도시였는가요? ‘아름다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천연 항구도시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오늘날 이스라엘의 수도 텔아비브, 바로 남쪽에 인접해 있는 지역입니다.

 

그러니까 욥바는 국내선도 있지만, 국제선 배가 다니던 항구였어요.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항구도시였어요.

 

제가 아까 ‘욥바 국제여객 터미널’ 이라는 표현을 썼잖아요.

제가 욥바터미널을 이렇게 묵상을 하다가,

예전부터 터미널이라는 단어가 참 재밌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여러분 ‘터미널’이라는 이 단어를 보면,

터미널은 ‘끝, 마침, 종료, 종점’ 이런 뜻입니다.

‘터미네이터’라는 영화가 있잖아요. ‘종결자. 파괴자’라는 뜻이죠.

 

요나에게 욥바는 선지자 생활의 종점을 알리는 항구였어요.

‘이제 그만해야겠다. 난 여기까지다’ 그런 거였죠.

 

그런데 고속버스 터미널에서도, 버스 터미널이 종점이자, 다시 출발점이 되잖아요.

터미널은 도착지이자, 출발지이기도 한 거예요.

‘나는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거기서부터 새롭게 시작하게 하시는 거예요.

요나에게 욥바라는 터미널은, ‘선지자 생활 끝, 은퇴자 생활 시작!’ 이런 거였죠.

 

그러나 800년 뒤에 욥바에 머물렀던 베드로 사도가, 요나가 받았던 명령처럼,

아주 부담스러운 명령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요나는 불순종했는데, 베드로는 순종했어요.

 

베드로가 욥바에서 집 지붕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환상 가운데 보자기에 깨끗하지 않은 속된 짐승들을 보여주시면서 잡아먹으라는 거예요.

 

‘하나님, 저는 한 번도 부정한 것을 먹은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세 번이나 그 환상을 보여주시더니, 사도행전 10:19~20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해 생각할 때,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베드로는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상대하지 않아요. 이방인 집에 방문하지 않아요.

겸상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그 집 안에 들어가서,

유대인으로서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고, 성령의 역사,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베드로에게 욥바라는 터미널은, 이방인 전도의 시작점이 된 거예요.

요나는 거기가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여러분 또 다른 하나님의 역사에 순종한 베드로에게는, 그 자리가 시작점이 된 거예요.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욥바라는 터미널에 종종 서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뭘 원하시는지, 뭘 하라고 하시는지, 계속해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모르는 게 아니에요.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또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고 요구하시는 걸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아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까지, 이제 그만! 하나님 제가 더 이상은 못하겠습니다.’

그렇게 끝났다고 선언을 하시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성경에서 보면 모세도, 엘리아도, 요나도.. 다 그 터미널에 서 있었던 거예요.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목자 생활하고 아닙니다.

‘나는 끝났습니다. 사람 잘못 부르셨습니다. 저는 그 다음 뭘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너는 목자로 여기서 인생이 끝나지 않는다’

그를 불러서 이 시대의 구원자로 세우시잖아요.

 

엘리아가 로뎀나무 아래에서 ‘제 생명을 걷어가십시오’

‘아니야, 너는 끝나지 않았어’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그를 불러내셔서, 그에게 역사의 다음 단계를 펼치게 만드시잖아요.

 

여러분 요나도 마찬가지고,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마음대로 ‘끝’이라고 선언을 할지라도,

하나님이 끝이 아니라고 하시면, 끝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여기를 새로운 시작점으로 만드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우리의 가정생활도 동일한 거예요.

내가 하나님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교회 생활이 뭔지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분들이 있어요.

‘난 그렇게 못 살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인생을 범생으로 못 살겠습니다.

하나님 이제 그만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그의 신앙을 다시 일으키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내가.. 우리 가족을 너무나 잘 알잖아요. 몇십 년을 같이 산 사람들이잖아요.

‘아 우리 가족은 소망이 없어.. 우리 부부는 더 이상 소망이 없어..

어휴, 맨날 사고치는 이 자식들은 이제 소망이 없어!’

 

이제 다 끝났다고 여러분이 선언을 할지라도

하나님은 거기서 다시 회복하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쓰러져가는 한국교회가 끝났다고 생각할지라도

하나님은 부흥을 시작하기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