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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8장 삼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LNCK 2026. 8. 14.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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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9_로마서 강해(49)_삼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8:31-39) Youtube

 

◈삼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롬8:31-39           2026.07.19. [로마서 49강]

 

롬8:34~35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우리가 로마서의 이 위대한 본문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정리해야 할 게 있어서

오늘 이 말씀을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로마서는 어떤 서신보다도, 더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싶어하는,

로마 교회를 향해서 복음을 전하고 싶어하는 바울의 심정이 깊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1장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롬1:1절을 보면 이렇게 시작하죠.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나니’

 

바울은 분명히 알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택함을 받은 사도다.

내가 할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밖에 없다’ 이 사실을 그는 알았습니다.

 

그리고 1:2절에서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복음은...’ 하고 복음을 쭉 설명합니다.

적어도 16절까지, 1:2~16절까지가 복음에 대한 아주 대략적인, 기본적인 설명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강조하면서, 바울은 ‘나는 복음을 전하고 싶다,

내가 너희를 아직 만나보지 못했지만,

이제 내가 스페인으로 가기를 원해서, 너희를 지나 스페인으로 가기를 원하는데,

 

내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 싶어 하는 이유는,

내가 스페인으로 갈 수 있도록, 너희가 후원해 주기를 원하는 것도 있지만,

내 진정한 마음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거다.

그리고 내가 스페인 가기를 원하는 것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다.’

 

그 복음이 무엇인지, 바울은 자기가 로마에 가기 전에,

먼저 로마서를 통해서 복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죠. ‘우리는 복음을 다 안다’고요.

'우리는 이미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됐다'고요.

그런데 왜 또 우리한테 복음을?

  

아니요. 복음은 ‘도의 초보’가 아니에요.

복음은 기독교의 개론이 아니에요.

 

복음을 정말 아는 사람은, 복음을 정말 들은 사람은,

복음을 정말 경험한 사람은, 복음을 또 들려달라고 얘기하죠.

 

왜냐면 그거는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이 설교의 주제)이기 때문에 더 듣고 싶죠.

그 사랑의 속삭임을 더 알고 싶죠.

   

▲우리는 로마서 8장의 뒷부분 31~39절이 ‘이게 로마서의 에베레스트다’ 또는

‘성경 전체에서도 최고봉이다’ 할 수 있는 본문이에요.

이 본문을 우리는 살펴보고 있는데, 복음의 클라이맥스죠.

 

여기까지 우리가 살펴봐서, 이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를 우리가 이해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난 정말 복음이 필요한 사람이다. 한때 복음이 필요했던 사람이 아니고,

난 정말 복음이 지금도 필요하다. 오늘도 복음이 필요하다!’

어떻게 이 고백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복음은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입니까? 1:16

복음은..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이 마지막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얘기하는 바,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게 하는.. 정복자 이상이 되게 하는 그건 복음입니다.

다른 걸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의 타고난 능력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특별한 인내심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특별한 인격적인 장점들을 가지고,

우리는 신앙생활하는 게 아닙니다.

 

성질이 더러워도, 성질이 정말 개같아도.. 복음은 그를 바꿉니다.

그 복음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 있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복음을 아는 사람은 ‘자랑할 수 없다’고 얘기하는 거죠.

복음을 아는 사람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경력과, 이력과, 성격과, 인격과, 인품과

기타 어떤 것들을 자랑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교회가 됩니다.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이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요17:21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그게 교회입니다.

 

복음이 교회를 만듭니다. 복음은 우리의 개성을 없애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개성과 다름과, 우리의 모든 것들을 그대로 유지하게 하지만,

그것을 아름답게 만들어갑니다.

 

그래서 찬송가 205장의 가사처럼

「이 세상 헛된 영화 날 미혹할 때에, 주 예수 크신 사랑 또 들려주시오

천국의 빛난 영광 내 눈에 비칠 때, 주 예수 크신 사랑 또 들려주시오

나 항상 듣던 말씀, 나 항상 듣던 말씀

주 예수 크신 사랑 또 들려주시오」

 

복음은 이렇게 고백하게 하죠. 복음 안에서 하나님은 복음은 이런 거죠.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이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데

‘우리를 위해서’라고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게 하는 것이 복음인가?

아니요. 궁극적인 선이 무엇인지를 얘기하는 것이죠.

 

우리 인생에 진짜 선한 게 무엇인지.. 우리는 다 몰라요.

마치 우리 아이들이 지금 내가 사탕 하나 먹는 게 나에게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이빨을 썩게 할 것이라는 것을 부모가 알기 때문에

그가 원하는 대로 주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궁극적 선이 뭔지를 알고 계세요.

 

내 마음대로 살게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궁극적 선(내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하나님은 일을 하세요.

뿐만 아니라 그 궁극적 선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광과 그 아름다움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일과 일치합니다. 만납니다.

 

그래서 복음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는 없습니다.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니까요.

 

▲여러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희비극들의 주제가 뭡니까? 사랑입니다.

그 이탈리아 오페라 아리아 곡이 그렇게 유명하잖아요.

이탈리아 아리라 곡을 보면, 사랑 때문에 살고, 사랑 때문에 죽이고, 사랑 때문에...

그 노래들이 다 ‘사랑’을 사연으로 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디서 들은 말인데, 90%가 사랑 얘기래요.

 

우리나라 노래도 그렇지 않아요?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부터 시작해서,

대중가요들은 수없이 많은 사랑의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들은 희비극들이에요. 사실 아름답기만 하지 않아요. 슬프기도 해요.

고통스럽기도 해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도, 그런 부분들을 죄 때문에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얘기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이지 않은 존재가 사랑하는 거예요.

즉, 사실은 이기적인 존재로서 우리는 사랑하는 거예요.

 

사람은 ‘내가 너를 사랑할 테니까 나한테 잘 해줘. 날 좀 행복하게 해줘 봐’ 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는, 그 어떤 것으로도 비견할 수 없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선하고, 가장 참된 진리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랑이야기, 이 세상에 고전이라고 알려질 수 있는,

고전은 사실은 슬픔을 다 담고 있는데,

거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는,

다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의 모사일 뿐입니다. 카피입니다.

 

진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또 들려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은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입니다.

조금 더 선명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궁극적인 유익과 선을 방해할 수 있는 사건은,

우리 인생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인생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그런 것들이 일어나요. 일어나지만,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우리의 궁극적 유익과 선을 위해서 하시는 일에

방해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을 이루심으로써, 하나님은 놀라운 반전을 나타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라고요.

성도에게 궁극적인 선은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광을 온전하게 나타내고 드러내서

우리들을 뒤집어지게 하시는 거죠. 뭐라고 표현을 할 수 있을까요?

 

‘놀라게 한다? 행복하게 한다?’ 어떤 표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다 뒤집어지게 합니다.

 

성경 전체는 삼위로 계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죠.

이 점에서 성경은 복음으로 충만합니다.

 

성경에, 루터가 말한 것처럼, 성경의 어느 가지를 큰 나무라고 비유하면

'성경의 어느 한 구석의 가지를 건드려도, 거기는 그리스도가 있다.

그리스도가 나타난다'고 얘기를 합니다. 복음이 충만하다는 얘기예요.

 

창세기를 읽든, 레위기를 읽든, 계시록을 읽든, 오바댜를 읽든.. 복음이 충만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이니까요.

 

이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내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고 순종할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성경을 떠나서는 배울 수가 없죠.

 

◑특별히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로마서 8:31~39절 본문은,

성도가 누리는 복음의 영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격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냥 읽을 수가 없는 얘기죠.

여기에 나오는 5개의 질문과 대답들은 그냥 읽을 수가 없죠.

소리를 지르고 싶은.. 소리를 질러서 읽고 싶은 본문입니다.

 

우리가 8장을 지나서 9~11장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유대인들을 먼저 부르셨고

또 그들을 통해서 이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이방인들에게도 확장되고

하나님이 구원을 유대인과 이방인들 온 세상에 지면에 가득하게 하실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전체 경륜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것이 마칠 때 쯤인 11:33~36절도

우리는 조용히 절대로 읽을 수 없는 본문입니다.

이 본문을 소리를 좀 내서 같이 한번 읽어보십시다. 막 소리를 지르고 싶습니다.

 

롬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이걸 송영이라고 그러죠.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편지를 쓰던 바울은, 잠시 펜을 놓고

그는 하나님께 찬송을 드립니다.

‘이런 하나님을 어떻게... 이 하나님의 지혜를 어떻게 내가 설명할 수 있고, 쓸 수 있겠는가?

복음은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온전히 드러내는 건데, 내가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설명할 수 없고, 말 못 한다는 거죠.

이거예요. 우리가 복음을 제대로 안다면

11:33~36절에 말하는 것과 같은 찬송이, 종종 그리고 우리의 깊은 고통 속에서 터져나오게

됩니다.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예요. ‘나에게, 그리고 여러분에게 필요한 건 복음입니다.

우리는 복음이 필요합니다.’

 

▲복음을 우리가 제대로 알게 된다면, 성경이 설명하는 대로 복음을 알게 된다면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 나를 위해서 행하신 일을 우리가 알게 된다면

우리는 절대로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가 나 자신에게로만 향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우리의 시야는 자기 자신에게서 → 서로를 향하여, 그리고 이웃을 향하여,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영광을 받으실 세상을 향해서

우리의 시야는 넓어지게 돼있습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들은 동의하시든, 동의하시지 않든, 이거는 성경이 가르치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여러분들이 예수를 잘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나와, 내 자식과, 내 커리어와, 내 집안과, 나를 위해서,

그냥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내가 그거에 내 삶에 모든 걸 걸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복음을 제대로 모르는 겁니다. 복음을 잘못 배우신 겁니다.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이게 (개인적 기복 신앙이) 오늘날 한국교회가 전반적으로 공유하고 있고,

세상을 향해 비춰지는 모습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당대의 파수꾼들을 향해, 지도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질책했습니다.

 

사56:10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11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 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12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마시자

내일도 오늘 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그 시대의 지도자들을 향해서... 무서운 말씀이죠. ‘짖지 못하는 개’라고 얘기합니다.

소리를 잃은 파수꾼입니다.

파수꾼이 망루를 지키다가 적들이 오면 소리를 질러야 되는데, 소리를 지르지 못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다른 강단을 향해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이 강단이, 벧샬롬 교회의 강단이 먼저 이 책망 앞에 서야 합니다.

 

매주일 이 자리에서 성경에 쓴 대로의 하나님,

성경에 쓴 대로의 복음이 선포되지 않는다면,

여기가 바로 침묵하는 파수꾼의 자리가 되고,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의 자리가 되는 거죠.

 

그리고 여기에 앉아있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되겠죠.

여러분들도 이 책망 앞에 서 있습니다.

파수꾼의 소리를 듣고, ‘자기 중심’의 성을 허물지 않는 백성에게는,

파수꾼의 침묵을 탓할 자격이 없으니까요.

 

▲오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인간이 죄인으로 태어나서 가지고 있는 죄성이라고 하는 이 DNA,

벗어날 수 없는,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는 이 자기중심성이라고 하는 죄성을

벗어나게 합니다. 우리를 뒤집어 놓습니다.

 

복음은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만 되는 게 아니고,

삶의 혼란이나 죽음과 같은..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넉넉히 이기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이게 바울이 로마서 8장의 뒷부분에서 하고 있는 얘기입니다.

우리를 끝까지 삼위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도록 지켜주는 능력입니다.

 

사도는 이 복음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로마를 방문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방문하기 전에 이 편지를 먼저 쓰고 있습니다.

 

로마서의 1차 독자들은 물론 로마의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21세기 한국의 벧샬롬 교회의 성도들인 우리들에게도,

그리고 이 자리에 아직 회심하지 않은 분들에게도, 이 능력의 복음으로 찾아오십니다.

매주일 찾아오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이야기

 

로마서 전체가 그렇지만, 특별히 로마서 8장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사도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할텐데,

그거는 뭔가 하면, “성도를 위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사랑이야기”에요.

이게 복음의 핵심이에요.

 

제가 성부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와, 성령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와,

성자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를 순서대로 말씀을 드릴 텐데요.

 

▲1. 본문을 통해서 먼저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야기>를

사도가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지 보죠.

 

8:31b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성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느냐?' 라고 묻는 거예요.

수사의문문이죠.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주셨습니다.

그렇게 성부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주실 만큼,

우리를 향한 당신의 선하심을 증명하셨습니다. 더이상 증명할 게 없다는 얘기죠.

 

자기 아들을 내어줬다면, 더이상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아들보다 귀한 게 없는데, 내 생명보다 귀한 게 나의 아들인데,

하나님이 그렇게 당신의 사랑과 선하심을 증명했다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여기 32절에서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라고 되어있죠.

28절에서 이미 말한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에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

참된 그리스도인을 향해서 하는 말이죠.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절대 정죄함이 없다'고,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앞으로도 영원히 정죄함이 없다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왜요?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까,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시는 일은

우리를 위해서 완전한 선이고, 궁극적인 유익입니다. 그게 뭐예요?

 

8:29~30절에서 말한 것이죠. "미리 아신 자들을 또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미리 정하셨고, 그리고 많은 형제 중에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시는 것."

이게 하나님의 목적이고 궁극적 선이에요.

 

그 아들을 내어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이루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하면,

저와 여러분이 믿어지지 않죠. 안 믿어져요.

저는 ‘제가 예수님처럼 될 거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요. 근데 믿어요. ↙

8:29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기 위하여’

 

현실 속에서는 믿어지지 않는, 일어날 수 없는 일 같이 느껴지지만

이게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믿어요.

 

그리고 저만이 아니라,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면,

비록 지금은, 내가 진짜 용납하기 힘들고, 때로는 용서하기도 힘들고,

때로는 보기도 싫고... 그런 사람이라도, 그렇게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실 것을 믿어요.

 

이거는 부부 사이에서 얼마나 소중한 진리이겠습니까?

가족들 안에서 얼마나 소중한 진리이겠습니까?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교회라는 가족,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얼마나 소중한 진리입니까?

이 근거에서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용납할 수 있고요.

 

그래서 우리도 이렇게 말할 수 있죠.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31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성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2.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시는 사랑>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제가 롬8장 강해를 시작하면서,

롬8장이 얼마나 성령 하나님을 많이 언급하고 있는 장인지 모른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 성령을 의미하는 프뉴마 라는 헬라어가 모두 21번 나오는데

그 중에 2번은 ‘우리의 영’을 가리키는 말이고,

19번이 ‘성령’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그 중에서 15번이 1~17절 사이에 집중적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의도는 이거예요. 로마서 8장을 시작하면서,

성령 하나님이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축복과 특권들을 바울은 말하고 싶었어요.

 

왜요? 바로 앞에 7:14~25절에서 ‘율법의 무능함과 한계’를 언급했거든요.

우리는 율법을 알아요. 율법을 지키고 싶어요.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내가 번번이 죄에게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예요.

 

근데 바울은 8장으로 넘어오면서 율법의 무능과 한계를 이기게 하는 게 성령의 능력이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내가 율법 지켜야 하는 줄 알아도.. 못 지켜요.

그래서 성령을 강조하는 겁니다.

 

성령 하나님이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축복과 특권이 있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바울이 강조한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뺏길 수 없는 특권, 확신... 그건 확신이에요.

 

우리의 구원은 뺏길 수 없다는 것이죠.

이딴 일 정도로 내 구원이 흔들릴 수 없다는 것이죠.

 

그리고 바울은 8:26~27절에서, 성령께서 특별히 하시는 일을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하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께서 친히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신다.. 그는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특별히 이것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정말 모를 때,

그냥 지식적으로만 모르는 차원이 아니고,

숨이 막히고 답답하고 죽을 것 같아서, 무슨 말을 해야 될지를 모를 때...

그럴 때가 왜 없겠어요? 그때 성령께서 도우신다고 말해요.

 

내가 탄식밖에는 낼 수 없을 때, 그 탄식이 어떤 언어로 표현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가 되도록, 온전한 기도가 되도록,

성령께서 나를 위해서 기도하신다고 말하는 거예요.

 

우리 이런 일을 많이 겪죠. 때때로 겪어요.

그때 성령 하나님이 친히 나를 위하여 탄식하며 기도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하는 거죠.

 

로마의 성도들은 그렇지 않았겠어요? 그런 일들을 수없이 겪었을 겁니다.

이 뒤에 하는 말들을 보면, 성령 하나님께서 탄식하는 우리 곁에서,

좀더 깊게 얘기하면 우리의 탄식보다도 더 깊은 곳에서... 함께 탄식하십니다.

‘친히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신다’고 말해요.

 

너희에게는 이런 존재가 있다. 너희의 모든 것을 아시는...

너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께,

이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너희는 나아갈 수 있다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 말씀은, 기도할 수 없다고, 기도가 힘들다고 느끼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성령 하나님 덕분에...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행하시는 요지는 이거예요.

‘성령 하나님이 왜 나를 위해서 이렇게 하셔? 사랑하셔서!’

‘왜 사랑하셔? 모르죠. 이유가 없죠. 사랑하시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 덕분에,

나를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서 울 수 있습니다.

 

제럴드 싯처의 책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울다> 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책이 있는데,

원래 제목은 그게 아니에요. 원래 제목은 <변장된 은혜> 예요.

『A Grace Disguised: How the Soul Grows Through Loss』

 

근데 제가 볼 때는, 정말 한글 번역책 제목을 만든 분이, 기가 막히게 제목을 만들었어요.

‘하나님 앞에서 우는 거’ 이게 진짜 신앙이에요.

 

▲3. 우리는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행하시는 일을 살펴볼텐데

 

8:34~35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사람으로 오셔서 죽으셔야 했죠?

이 본문에서 사도가 명시적으로 쓰고 있지 않지만, 우린 압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낮아지셔서 우리를 위한 대속물이 되시기 위해서,

영원 전에 약속하신 삼위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복종하시는 그 자리에 와서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그래서 삼위 하나님이 정하신 뜻을 그 목적을 이루셨습니다.

이게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그리고 죽으신 목적입니다.

 

또 이것은 우리를 위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영광, 궁극적인 영광과, 우리의 궁극적인 유익은 일치합니다.

 

주님은 죽으셨을 뿐 아니라, 오늘 이 말씀을 보며 34절에 ‘살아나셨다’고 얘기를 합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고 말씀하죠.
뭘 하시나요?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신다’고 또 말합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얼마나 알고 사십니까? 얼마나 의식하고 사십니까? 얼마나 생각하십니까?

여기서 그리스도의 34절에 ‘죽으실 뿐 아니라’부터 시작해서, ‘간구하시는 자니라’ :34

이거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에요. 어떤 질문?

34절 시작이 뭐예요? ‘누가 정죄하리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이에요.

 

그래요. 우리는 죄를 지어요. 넘어져요.

근데 ‘누가 나를 정죄해?’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담대하게 말할 수 있죠?

우리의 무죄함 때문입니까? 천만의 말씀이죠. 우린 무죄하지 않습니다. 죄인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죄를 짓고 우리는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마귀는 밤낮 쉬지 않고 우리를 정죄하는 자입니다.

그 앞에서 우리가 뭐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바로, 바울이 말한 그대로입니다.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하는 34~35절.

  

요일2:1절에서 이렇게 사도는 얘기를 했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니’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대언자’는, 보혜사 성령을 가리킬 때, 보혜사하고 똑같은 말입니다. *파라클레토스

여기 ‘정죄하리요?’라고 하는 말에 대한 대답으로,

지금 살펴보는 건데, ‘정죄한다’는 것은 법정적인 용어예요.

 

사실은 그래서 여기서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신다’는 이 표현도

사실은 법정적인 뉘앙스를 가져요. 뭔가 우리를 변호하신다는 얘기예요.

어디서? 하나님 우편에서!

 

마귀가 우리를 정죄하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변호하신다는 얘기예요.

어떤 것으로? 우리에게 전가해 주신 의를 가지고,

성부 하나님 앞에 서서, 당신의 피를 증거물로 제출하시고,

우리의 변호사(대언자)가 되셔서 친히 성부 하나님께 간구하신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겐 정죄함이 없다’고 얘기를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얘기하는데, 그럼 언제 간구하실까요? 8:34

특정한 순간에 간구하십니까?

우리가 죄를 짓고 넘어질 때마다 그렇게 하십니까?

 

아니요. 사실은 특정한 순간에 머물지 않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 우편에서 계속 기도하신다는 것은,

‘계속 무릎을 꿇고 탄원하신다’ 그런 의미는 아니에요.

 

많은 신학자들은 이걸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못자국과 창자국을 지니신 몸을 가지고, 항상 성부 하나님 앞에 계시는 그 임재 자체로서

말한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못자국을 보이십니다.

부활하신 몸임에도 불구하고 그 못자국이 있었습니다. 물론 창자국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는 주님은

지금도 그 인성의 몸을 입으시고, 그 몸에는 창자국과 못자국이 있는 그 몸을 가지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다고 얘기를 합니다.

 

이것을 지금 바울은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요한계시록 5:6절에서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사도 요한이 하늘 보좌의 환상을 보는데, 그때 예수님을 발견했을 때

그는 이렇게 표현을 했어요.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의 창자국과 못자국을 통해서 알았겠죠.

 

그리스도께서는 상흔이 있는 그 몸으로, 성부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는 거에요.

우리가, 기도할 수 없는 밤에도, 낙심해서 우리가 기도가 끊어져 버린 계절에도,

예수님의 몸에 있는 상처는.. 아버지 앞에서 지워지지 않는 언어로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아벨의 피가 땅에서 호소한다’고 말을 했죠. 창4:10

예수님의 피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피는 하늘에서 ‘더 나은’ 것을 증언합니다.

아벨의 피가 ‘제 피값을 갚아주십시오’ 라고 소리친다면,

예수님의 피는 ‘용서받았다’고 선언합니다. 히12:24참조

 

▲‘그리스도의 간구(8:34)’라고 여기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여러분 히브리서 7:25절을 한번 찾아보세요.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여기서도 간구한다고 얘기하죠.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간구하시는데 뭐라고 얘기해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과, 예수님의 간구가 연결된다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항상 살아서 죽지 않으시고,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간구하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면,

우리의 구원이 (내가 나 자신을 보기에) 이렇게 허접해 보이고,

뭐가 되는 것 같지 않고, 여전히 넘어지고 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원이 온전하게 완성될 것을 보여줍니다.

구원의 완성을 보장하는 얘기예요.

 

그러므로 우리의 간구는... 여러분이 기도하실 때,

‘그냥 내가 기도한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성경을 우리가 제대로 안다면, 우리의 불완전한 기도는,

성령 하나님의 탄식, 친히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며 기도하신다는 성령 하나님의 간구와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그리스도의 간구 사이에 있는 거예요.

 

말하자면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교제 속으로

우리가 영광 가운데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게 성도의 기도예요.

 

성도의 기도는.. 성령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중보의 간구 사이에서 온전해집니다.

신자들이 좋아하는 노래 가운데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가 있죠.

 

근데 이게 왜 사람들이 좋아할까요? 뭐 좋아하는 이유가 다 있잖아요.

이거는 왜 좋을까요? 기분이 좋잖아요.

‘난 기도 안 하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그 누군가가.. 엄마 생각날 수도 있고, 아빠 생각날 수도 있고,

나의 영적 멘토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데 이 노래를 부를 때, 정말 성령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간구하고 계시고,

성자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간구하고 계시는구나...

누군가가 바로 성령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이 노래를 부르셨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엘리야가 날 위해서 기도해 줘도 참 영광이겠어요.

모세나 엘리야나 바울 정도가 날 위해서 기도해준다면

‘아니 그분이 나를 알아?’ 영광이겠어요.

 

근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기도하신다고?

생각하고 여러분들이 이 노래를 부르셨나요?

 

도널드 그레이 반하우스는 이런 말을 해요.

‘성자 하나님의 간구는 성도의 삶의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주1)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자가 아니요.’ 히4:15

 

▲마치는 말

영광을 얻으신 성자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안전합니다.

바울은 이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여러분, 삼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들으셨습니다.

이런 거에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더러 있어요.

그리고 세상에서 진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더러 있어요.

 

그러나 상관없어요. 삼위하나님께서 일치단결하셔서 작정하시고, 날 사랑하세요.

내가 그런 사랑을 입은 사람이예요.

 

누가 나한테 함부로 대하든.. 그걸로 상처받지 않아도 돼요.

삼위 하나님의 이 사랑이 아니면,

저와 여러분의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것 하나도 설명될 수 없습니다.

 

구원의 확실성을 보장할 수 있는 더 나은 증거와 더 나은 설명이 없기 때문에,

바울은 이 복음,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는 것이죠.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지?’

 

바울사도는 15절에서 이렇게 말했죠.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냐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만나고 그 무한히 선하신 아버지 앞에서

우리는 내 모든 장벽을 헐고 나 자신이 됩니다.

 

성도는 그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걸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불경스럽다고 느끼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운다’ 하나님 앞에서 징징댈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 앞에서 을고 징징대는사람은 싫죠. 그렇죠?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징징댈 수 있는 특권을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종은 주인에게 징징 댈 수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불호령이 나죠.

자식만의 특권입니다. 삼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나아갈 수 있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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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도널드 그레이 반하우스는 이런 말을 해요.

‘성자 하나님의 간구는 성도의 삶의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인데,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풀지 못할 정도로 큰 문제는 없다.

그리스도의 지혜로 풀지 못할 정도로 복잡한 문제도 없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지 못할 정도로 하찮은 문제는 없다.

그리스도의 속죄하는 피가 사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죄는 없다.

 

예수님에 관해 가장 놀라운 표현 가운데, 복음서에 서너 번 나오는 구절이 있다.

불쌍히 여기셨다는 구절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셨다. 당신도 사랑하신다.

 

당신에게 문제가 있는가? 예수님은 그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

그 문제가 뭐든 상관없다.

당신의 마음에 두려움이 있으면, 예수님은 즉시 그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

그 두려움을 아신다. 당신 마음의 슬픔이 있으면, 그분의 마음에도 즉시 슬픔이 있다,

당신의 마음의 비탄함이 있으면, 그분의 마음에도 즉시 비탄함이 있다.

 

당신이 살면서 사별하거나, 하나님의 자녀에 관하여 다른 어떤 감정이 있으면,

그리스도의 마음에도 똑같이 슬픔이나 비탄함이나 사별이 즉시 새겨진다.」

 

이게 히브리서에서 말한 그 말씀이잖아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자가 아니요.’ 히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