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안에 거룩한 슬픔이 있는가? (2026-07-10) - YouTube
◈당신 안에 거룩한 슬픔이 있는가? 출33:1~6 2026-07-10
도입 / 세상의 악과 재난에 대한, 기독교 변증적 대답 주1)
◑자,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출애굽의 사건”은 이렇게 해석하면 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바로의 압제를 받으며 노예 생활을 했잖아요.
이것은 뭘 말해요? 구원받기 이전에 우리가 죄의 종으로 살았던 삶을 말합니다.
애굽의 삶은, 구원받기 이전에 죄의 종으로 살면서
사탄의 지배를 받으며 살았던 과거의 우리 삶을 말하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이 구원자 모세를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냈잖아요?
이 모세는 뭘 말하죠? 장차 우리의 구원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거에요.
그들이 어떻게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어요?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었어요?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구원을 받았잖아요.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름으로써, 그들이 보호를 받고 구원을 받았어요.
이것은 뭘 말하죠? 유월절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흘리실 주님의 보혈을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침내 그들이, 약속받았던 가나안에 들어가는데
이 약속했던 가나안은 뭐예요?
구원받은 우리가 장차 들어갈 영광스러운 천국을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그들은 어디를 통과해야만 했어요?
광야를 통과해야만 했어요.
이 광야는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구원받은 우리가 통과를 해야 될
이 세상을 말한다는 거예요.
자, 이렇게 보게 되면, 여러분 출애굽의 사건이 완벽하게 이해가 되지요.
이렇게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보지 않고,
도덕과 윤리적인 관점에서 보게 되면,
여러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출33:1~2절의 말씀을 나누는데,
1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백성들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너희 조상에게 맹세하여 내 자손에게 주기로 약속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셨죠.
출33: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땅
그 땅으로 올라가라’
하나님은 이미 400년 전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그 가나안 땅을 주기로 약속하셨어요.
400년이 지난 지금, 하나님은 그 약속을 잊지 않고 기억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나를 배신했지만,
내가 너희 조상들과 맺은 언약 때문에,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겠다’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올라가라’ 이 말은 무슨 말이라고 그랬어요?
‘저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오늘 우리에게, 인생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넘어졌을지라도 다시 일어나서
하나님의 구원의 최종 목적지인, 저 가나안을 향하여, 즉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구원받은 자들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에요? 광야가 아니라, 가나안입니다.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들이 들어가야 될 인생의 최종 목적지는.. 가나안이에요.
가나안은 뭘 말하는 거에요? 천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와서 우리 한국교회에 이런 정서가 있어요.
‘우리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 이렇게 말하면,
그런 복음을 ‘값싼 복음’이라고 말하면서,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물론 성경을 보게 되면, 이 땅의 (현재)천국을 말하고, 또 미래의 천국을 말하고 있죠.
아니 어쩌면 미래에 들어갈 천국보다는,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리고 경험해야 될 ‘하나님의 나라’를 더 많이 말하고 있어요. *현재천국
그렇지만 여러분, 우리의 구원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에요? 광야가 아니라 천국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아무리 이 땅에서 우리가 잘 살아도,
최종 목적지인 가나안 (미래 천국) 땅에 들어가지 못하면.. 그건 저주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는 아무리 인생이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 중에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우리 모두가 최종 목적지인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우리 성도 중에 한 사람도, 이 믿음의 대열에서 낙오하지 않고,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달려서, 우리 모두가 우리의 인생의 최종 목적지인
영광스러운 가나안 땅에 입성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거룩한 슬픔이 있었던 이스라엘
출33:2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사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힘만으로 가나안 땅에 데려가서
가나안의 원주민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는 힘이 없었어요.
왜냐면 그들은 430년 동안 노예 생활만 했지, 군사 훈련을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 그들이 어떻게 철과 병거로 무장된 가나안의 원주인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의 사자들, 다시 말하면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을 앞서 보내서
너희를 대신하여 싸우게 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게
해 주겠다’라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3절에 보게되면, 하나님께서 아주 충격적인 선언을 하시게 됩니다.
출33:3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내가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 약속대로 내가 너희를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겠고,
내가 사자(천사)들을 앞서 보내어, 그들이 싸워서 가나안의 족속들을 다 물치게 해 주겠다.
그렇지만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노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하나님께서 동행 거부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광야의 인생길은, 하나님이 앞장서서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공급해 주시고,
싸워 주셨는데... (금송아지 사건 이후부터)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하지 않겠다’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여러분 이보다도 큰 충격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동행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예요?
33:3b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동행할 수 없는 이유를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너희가 목이 곧은 백성이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게 뭐예요?
하나님은, 목이 곧은 백성과는 함께 동행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보게 되면,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것이 뭐냐?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것은, 바로 목이 곧은 것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지은 ’목이 곧은 죄‘는 뭐예요?
바로 앞 출32장에 나와 있는 사건이죠.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지 40일이 지났어도 내려오지 않게 되니까,
기다리다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우상숭배를 했어요.
그때 하나님은 그 모습을 보시면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2: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10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고, 목이 뻣뻣하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목이 뻣뻣한 것은, 목에다 힘주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그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하나님이 아닌 또 다른 우상을 숭배하는 거예요.
여러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들을 만들어 숭배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목이 곧은 사람은,
한마디로 말하면 목에다가 깁스를 하고 힘주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닌, 내가 내 인생의 주인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목이 뻣뻣한 사람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을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을 했냐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오늘은 그걸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첫째로, 그들은 슬퍼했어요. 거룩한 슬픔을 가졌습니다.
33:4a ‘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백성들은, ‘내가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라’
이 하나님의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했습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게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제안은요.
결코 나빠 보이지 않아요. 일단은 두 가지 목표가 해결되는 거 아니에요?
이미 하나님이 약속했잖아요.
-‘내가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지만, 내가 너희들을 그 땅으로 인도할게.
약속대로 내가 그 땅으로 인도할게’
-또 ‘내가 사자들을 앞서 보내서 그 가나안의 원주민들을 다 물리쳐줄게’
여러분 이 두 가지 정도만 해결되어도, 사실 밑지는 거 없잖아요. 여러분 그러지 않아요?
인간적으로 계산해보게 되면, 손해될 게 하나도 없어요.
하나님이 두 가지를 약속해 주셨잖아요. 그렇다면 이렇게 반응해 볼 수 있지 않겠어요?
‘하나님,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시겠다고요? 알았어요.
우리가 금 송아지를 만들었다고, 금 송아지를 만들어 섬겼다고 그렇게 삐지셨어요?
그럼 우리끼리 올라가겠습니다.
우리가 들어가게 될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면서요?
그러니 우리가 그 땅에 들어가서, 우리끼리 집도 짓고, 농사도 짓고 잘 살게요.’
여러분 이렇게도 반응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으리라 동행 거부의 선언을 들었을 때에’
그들은 매우 슬퍼했습니다.
그들은 인생의 여정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음이 가장 슬픈 것임을 알았어요.
그들은 하나님이 없는 축복은 진정한 축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거예요.
비록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우상을 숭배하는 과오를 범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했어요? 슬퍼했어요.
그러므로 이들은 이 슬픔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저는 이 슬픔을 ‘거룩한 슬픔’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거룩한 슬픔!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이 거룩한 슬픔이 없다는 거예요.
당신 안에 이 거룩한 슬픔이 있는가요? *설교 제목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삶을 살면서도,
아니, 하나님과 점점 멀어져 가는 삶을 살면서도
그 안에 거룩한 슬픔이 없다는 것입니다.
눅19장을 보게 되면 나귀를 타시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입성하시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 멸망당할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의 성을 바라보시면서 눈물을 흘리며 우셨어요.
눅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자 여기서 ‘우시며’ 라는 말이 있어요.
클라이오 라는 말이에요.
이 말의 뜻은 ‘목 놓아 엉엉 울다, 가슴을 치며 통곡하다’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목이 놓아 울 정도로 통곡하셨다는 거예요.
막 가슴을 치면서 통곡을 하셨다는 거예요.
그들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다가올 참혹한 심판과 멸망을 바라보시면서,
그들의 영적 무지와 완악함을 보시면서... 주님은 통곡하며 우셨어요.
또 눅23:28절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닥칠 심판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우셨어요.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자녀를 위한, 자녀를 향한 슬픔,
이런 거룩한 슬픔의 눈물이 있습니까?
어쩌면 제가 이 말씀을 준비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참 사랑합니다. 정말 자녀를 위해서라면
우리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자녀를 위해서 모든 것을 쏟아붓습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의 자녀가, 불타는 지옥의 불못에 던짐을 받는다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내 자녀가 지옥의 불못에 던짐을 받아서, 세세토록 이를 갈며 슬피 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내 자녀가 지옥에서 받을 영원한 형벌을 생각하며, 여러분은 목 놓아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는, 내 자녀가 성공하고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만 있지,
거룩한 슬픔이 부모에게 없다는 거에요.
내 자녀가 잘되고, 성공하고, 축복을 받기만 원하지,
내 자녀가 지금 하나님과 멀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자녀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된 우리의 마음에 거룩한 슬픔이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자녀가 시험만 조금 못 봐도, 너무 속상해 합니다.
우리 자녀가 학교에서 왕따만 당했다라는 소식을 들어도 못 견딥니다.
심지어 여러분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만 죽어도,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슬퍼합니다.
다른 일로는 우리가 그토록 서러워하고, 마음 아파면서도,
자녀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은 삶을 사는 것에 대하여, 그렇게 마음 아프지 않습니다.
내 자녀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자녀가 하나님과 멀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된 우리의 마음에 거룩한 슬픔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큰 슬픔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삶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가장 큰 슬픔은, 가난도 아닙니다. 실패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가장 큰 슬픔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과 멀어짐에 대한,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음에 대한,
거룩한 슬픔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음에 대한 아픔이 우리 안에 있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가졌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아닐까요?
고후7:10에 보게 되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고, 세상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어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후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뭐예요? 하나님과 멀어진 것을 슬퍼하는 근심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음에 대한 거룩한 슬픔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철저한 회개로 이어져서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근심은 뭐예요? 육신의 정욕을 따라하는 근심입니다.
세상 근심은 세상적인 것을 혹시나 잃지 않을까? 세상적인 것을 잃지 않을까라는 근심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근심은,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어있습니다.
이 세상의 근심은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결국은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라
그 충격적인 말씀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어떻게 했어요? 슬퍼했어요.
거룩한 슬픔을 가졌어요.
▲2. 두 번째로, <자기 몸을 단장하지 않았습니다.>
출33:4b '한 사람도 자기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 라는 충격적인 선언을 들었을 때에
그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자기 몸을 단장하지 아니했어요.
여러분, 왜 자기 몸을 단장하지 않았을까요?
자신들의 슬픔과 회개에 대한 표현으로서
자신들의 몸을 단장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요?
사람은 경우에 따라서 옷을 입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그렇죠?
어떤 경우에 어떤 옷을 입어야 되는지, 우리가 잘 알잖아요.
결혼식이라든지 기쁜 잔치에 갈 때에는, 우리의 옷차림이 달라지잖아요.
상을 당한 장례식에 갈 때의 옷차림과 다르죠.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사람들은요.
슬픔과 회개의 표시로 굵은 배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며 기도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그 슬픔과 회개에 대한 표시로서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게 되면 그들의 그들이 하나님의 동행 거부의 선언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를 알 수가 있어요.
▲3. 하나님의 동행 거부의 선언을 들었을 때에 그들이 보인 반응의 세 번째는
<장신구를 제거했습니다.>
33:5b '너희는 장신구를 떼어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겠노라'
하나님의 그 말씀 앞에 그들은 어떻게 반응했어요?
33:6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산에서부터 그들의 장신구를 떼어내니라’
여러분 그 장신구를 떼어냈어요.
그러면 왜 하나님은, 목이 곧은 백성들에게 장신구를 떼어내라고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이 장신구들이 결국은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다시 말하면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이 여러 가지 장신구들 있잖아요.
귀걸이, 손목걸이, 발목걸이 뭐 팔찌 이런 거 있잖아요. 이거 다 어디서 났을까요?
다 애굽에서 나올 때 가지고 나온 거예요.
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스스로 이런 것들을 만들었을까요?
아니에요.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가지고 나온 것들이거든요.
그런데 이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장신구들에는,
실제로 다양한 우상의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몇 군데 찾아보니까, 태양신 또는 호르스를 상징하는 매 형상의 장신구도 있었고요.
또 스카라베, 쇠똥구리, 호르스의 눈, 하토르 여신, 코브라 형상의 장신구,
이런 여러 가지 장신구들이 그때 있었다는 거예요.
물론 뭐 그들이 가지고 온 이런 장신구들이 어떤 마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종교성이 있잖아요. 그래서 광야의 인생끼리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그 장신구에 있는 우상들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주문을 외운다든지
그것들을 의지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장신구를 떼어내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근데 여러분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은,
예술이 아닌 숭배의 대상으로 형상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셨어요.
그래서 십계명 중에 제2계명이 뭐예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아래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에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여러분 예술적인 작품을 금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해서, 예술적인 활동도 하지 않은 분이 있는데,
예술적인 작품을 만들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뭘 만들지 말라는 거예요?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 다음에 나오는 게 뭐예요? ‘절하지 말며, 섬기지 말라’
그러니까 믿고 의지하는 대상으로서 어떤 걸 형상화하지 말라는 거예요.
섬김의 대상으로서 어떤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거예요.
근데 사람들은요. 언제나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신을 형상화하려고 하는
그런 본능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끊임없이 농경사회에서는 풍요의 신을,
전쟁을 할 때는 전쟁의 신을,
상업사회에서는 재물의 신을,
쾌락 중심의 사회에서는 사랑과 성의 신을 형상하여 숭배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우상의 형상을 보면서 그 신의 성격과 능력을 상상하고 의지했습니다.
여러분 고대만이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악한 영들은, 자신을 형상화 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어떤 마을에 들어가서
그 지역을 잡고 있는 악한 영이, 어떤 영일까 보게 되면,
마을 입구 같은데 보게 되면, 악한 영들은 자신의 성품과 관련된 형상들을
꼭 형상화 시켜놓습니다. 악한 영들은요. 늘 자신을 이렇게 형상화 시키려고 해요.
그래서 우상을 섬기는 곳에 가보게 되면, 여러분 어떻습니까?
온갖 형상과 부적들이 많이 있어요. 악한 영들을 섬기는 곳에 가보셨어요?
푸닥거리하는 곳만 가봐도, 점집에 가봐도, 여러분 여러 가지 형상들이 많아요.
자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은요. 다른 우상의 형상만이 아니라,
영이신 자신을 형상화하는 것도 하나님은 원치 않으셨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형상화시키려고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신명기 4:15절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호렙산의 불가운데에 임재하여 말씀하실 때에
어떤 형상도, 보여주지 않으셨음을 강조하고 있어요.
신4:15 ‘여호와께서 호렙산의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으니 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하나님이 어떤 형상도 보여주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세요.
하나님이 분명히 임재하셨지만, 그러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형상화하려면 안 돼요.
이 땅의 모든 신들은요. 잡신들 악한 영들은요. 자신을 형상화하려고 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을 형상화하는 것도 금하셨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왜 하나님은 자신을 형상화하지 못하게 했을까요? 그 이유를 알아야 돼요.
어떤 형상도 하나님의 본질을 담아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형상도 하나님의 본질을 담아낼 수가 없어요.
여러분, 처음과 나중이 되시고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를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그 충만하신 하나님을,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형상화해서 하나님의 본질을 담아낼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떤 형상도 하나님의 본질을 담아낼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을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그 수준으로 축소시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키는 어리석은 죄를 짓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이 어떤 하나님을 형상화시킨다고 한다면, 그것은 뭐예요?
하나님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하나님을 인간들이 생각하는 수준으로 하나님을 축소시키는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키는 어리석은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형상화시킬 수가 없는 겁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은 애굽에서의 우상이 우상의 형상에 새겨져 있는
모든 장신구를 떼어내라 말씀을 하셨어요.
그 이유는 이것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어려움을 당할 때에
또다시 그것들을 의지하고 섬길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쉽지 않았지만, 말씀에 순종하여 장신구를 떼어냈습니다.
여러분 이거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게 돈으로 계산해도, 상당한 금액이 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말씀에 순종해서 그들은 장신구를 떼어냈어요.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에, 또다시 장신구로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므로
목이 곧은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장신구를 떼어내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33:5b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한순간이라도 너희 가운데에 이르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장신구를 떼어내라'
그러니까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광야의 인생길에, 또다시 우상을 숭배할 위험이 있으므로,
그래서 목이 곧은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장신구를 떼어내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자, 그러면 여기서 ‘장신구를 떼어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광야 길에, 또다시 우상을 숭배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완전히 내어 던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호크마 주석은, 이 ‘떼어내라’는 말을 ‘완전히 내어 던져라’ 그렇게 해석하고 있어요.
그러면 여러분, 장신구를 몸에서 떼어내서 내가 던졌다고 했는데, 그럼 길거리에 던졌을까요?
아니면 땅속에 묻었을까요? 궁금하죠?
여러분, ‘장신구를 떼어내라’고 그러셨는데,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했을까?
장신구들이 얼마나 많이 모아졌겠어요? 상당수 금이나 은으로 된 것들인데,
돈으로 계산해도 상당한 가격이 나가는 거 아니겠어요? 길바닥에 버렸을까요?
아니면 야곱의 가족들처럼 땅속에 묻었을까요? *창35장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지 않아요.
‘길에다 버렸다, 땅속에 묻었다’ 라고 언급하고 있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가 추론해 볼 수 있는 것은, 이 사건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짓고
성막의 기구들을 만들고자 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많은 금예물을 드렸어요.
출35:22 ‘그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팔찌와 귀걸이와 가락지와 목걸이와 여러가지 금품을
가져다가 사람마다 여호와께 금예물을 드렸으며’
그러니까 이것을 우리가 추론해보는 겁니다. 이 구절을 보면,
그 많은 장신구들을 길에다 버리거나, 땅속에 묻은 것 같지는 않아 보여요.
민31:50절로 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에
그 금폐물과 발목걸이, 손목걸이, 인장반지, 귀걸이, 목걸이들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이런 신앙의 고백을 드립니다. 읽겠습니다.
민31:50 ‘우리 각 사람이 받은 바 금 패물 곧 발목 고리, 손목 고리, 인장 반지, 귀 고리,
목거리들을 여호와께 현금으로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죄하려고 가져왔나이다’
자 왜 그들이 이런 금폐물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고백합니까?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죄하려고, 이 금 폐물을 가져왔다라고 말하죠.
그러니까, 생명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이 귀한 예물을 하나님께 드린다라고 고백을 하고 있어요.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장신구를 완전히 내어던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장신구들을 길거리에 버렸거나 땅속에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래 주셨던 그 목적대로,
성막을 짓고 성막의 기구들을 만드는 일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온전히 내어드렸음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그 많은 금과 은과 이런 패물들을 가지고 나오게 했을까요?
이런 장신구들을 가지고 나오겠을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는 성막과 성막에 관한 기구들을 만드는 일에
쓰임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이 애굽에서 출애굽을 할 때
그걸 가지고 나오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가지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
했어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자신들을 치장하고 단장하는데만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제서야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본래의 목적대로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뭐예요? ‘장신구를 떼어내는’ 것입니다. 33:5b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에게 '장신구'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러분의 귀걸이, 지금 팔찌를 다 빼라는 거예요? 그 얘기가 아니죠.
‘장신구를 떼어내라’ 이 말씀은 무엇을 말하는가요?
하나님께서 은혜로 내게 주셨는데, 언젠가 나의 우상이 될 수 있는 그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셨는데, 이것이 내 인생의 우상이 되는 것, 그것이 장신구입니다. ★
그러니까 나의 지식,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 하나님이 내게 주신 달란트,
하나님이 내 가정에 맡겨주신 자녀...
어쩌면 이것들이 오늘 내가 떼어내야 될 장신구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하시고, 많은 지식을 얻게 했는데,
그 지식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었다면, 그 지식이 뭐예요?
그 지식이 바로 내가 떼어내야 될 장신구라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은혜로 사업장도 열어주시고, 사업을 할 때 여러 가지 어려움도 있었지만,
고비고비마다 피할 길을 열어주셔서... 이렇게 많은 물질도 얻게 해 주셨는데,
그 사업장과 물질 때문에 내가 하나님과 멀어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 사업장이 뭐예요?
그것이 오늘 나의 장신구라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귀한 자녀를 선물로 주셨는데,
하나님이 내 가정에 주신 그 자녀를, 내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므로
하나님보다 내 자녀를 더 의지하므로, 내가 그 자식에게 매어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사랑하는 자식이 오늘 내 인생의 장신구라는 거에요. 내가 떼어내야 될 장신구라는 거예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왜 하나님께서 장신구를 떼어내라고 말씀하시는가요?
두 가지 이유입니다.
첫째로, 목이 곧은 백성에 대해서, 광야의 인생길에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심판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그래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들이 약속의 말씀을 따라서 장신구를 떼어냈을 때에,
7절 이하를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임재하셨고,
14절에 보게 되면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친히 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셨어요.
‘내가 너희와 함께 동행하겠다. 내가 친히 너희와 함께 가겠다’
광야의 나그네 인생길을 걷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만큼 아름답고 멋있고 영광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그 동행 거부의 선언을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했습니다. 거룩한 슬픔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슬픔과 회개의 표시로, 자기들의 몸을 단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장신구를 떼어내라’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장신구를 떼어냈습니다.
여러분 남은 인생의 여정 하나님과 아름다운 동행을 원하십니까?
하나님과 멀어짐에 대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게 된 것에 대하여 철저하게 회개하면서,
‘거룩한 슬픔’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오늘 나의 인생길에 행여나 우상이 될 수 있는 그 장신구들을 떼어내십시오.
나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지 못하게 만들고, 항상 나의 마음을 빼앗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 장신구를, 떼어내십시오.
‘떼어낸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겨주신 그 지식과 달란트와 재물과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올려주신 그 목적대로 사용하는 것이고, 원래 목적대로 쓰임받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그 달란트를 왜 주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 물질을 주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 사업장을 주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에 그 자녀를 맡기셨을까요?
장신구를 떼어내서 원래의 목적대로 쓰임 받게 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장신구를 떼어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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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도입 / 세상의 악과 재난에 대한, 기독교 변증적 대답
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왜 이렇게 악이 많고 고통이 많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불가지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이렇게 이 세상에 악이 많고, 고통이 많을까?’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자들이나 불가지론자들(‘알 수 없다’는 자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있는데요. 바로 찰스 템플턴 목사입니다.
이 사람은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막역한 친구로서
1950년대에 이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과 함께, 미국 전역에 부흥을 일으켰던
아주 유명한 전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템플턴이, 갑자기 목사직을 그만두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그런 불가지론자가 되었어요.
그 이유는 <라이프> 잡지에 실린 한 장의 사진 때문에 그랬어요.
그 사진은 극심한 가뭄으로 기근이 든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하늘을 원망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였어요.
이러한 유사한 사진을 보면서, ‘지금 저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비인데,
왜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주시지 않은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고,
‘세상에 이러한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들 주변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이런 악과 고통이 많은가?’
‘이것을 보게되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서,
그래서 무신론자가 되고, 불가지론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변증학자들은, ‘도리어 이 세상에 악이 있다라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력히 증거하고 있다’라고 반론을 제기합니다.
자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악이 이미 정해진 규범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하잖아요.
그렇다면 여러분, 정해진 규범이 있다라는 것은,
그 규범을 만든 설계자(하나님)가 있다는 것을 뜻하지요.
자 우리 사회에도 법이 존재하는 것은, 그 법을 만든 입법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라는 것은... 바로 이 세상에 악과 선의 규범을 만드신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주는거지요.
(하나님이 안 계시면, 악을 악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겁니다.
오늘날 그런 사람들이 있죠. 선과 악의 개념을 스스로 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객관적인 도덕적 가치가 존재한다’라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라는 거예요.
△반면에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악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면,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 하나님이 악을 만들지 않았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왜 이렇게 악이 존재하는가?’ 라고 반문을 하죠.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은 본래 이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후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면 어떻게 악과 고통이,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어떻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이렇게 수많은 악과 고통이 들어오게 되었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인간의 타락 때문이라고!
자유의지를 가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괴하고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 인간 세계에 뭐가 들어왔어요? 죽음이 들어오게 되었어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고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세움을 입었던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인간 스스로가 인간이 주인 되는 그 순간부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악이 자연 발생학적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라는 거죠.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악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무신론자들 이런 반론을 제기하죠.
‘그러면 왜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느냐?
자유 의지를 주시지 않았다면, 인간은 타락하지 않았을 텐데...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악이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을 텐데...
왜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느냐?’ 그렇게 따지죠.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기계와 로봇으로 지으시지 않으셨어요.
당신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유롭게 선택하고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우리에게 주셨어요.
여러분, 이 자유의지는, 우리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 자유의지는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에요.
우리 인간의 인격과 존엄성을 가능케 하는 핵심 요소가 뭐냐면.. 이 자유의지라는 거예요.
자, 사랑의 관계에서 이 자유의지라는 것은요.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이 자유의지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거거든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인격적인 사랑을 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해야 되는 거예요?
우리는 프로그램된 행동으로, 어쩔 수 없이, 마지 못해서
강제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사랑을 우리가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잖아요.
그런데 우리 인간은, 사탄의 유혹을 받아서, 그 소중한 자유의지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악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거죠.
하나님이 악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통해서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인간이 스스로 인간이 주인이 되는 그러한 악을 선택함으로 인해서,
우리 인간 세계에 그 악과 고통이 들어오게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또 무신론자들은 말합니다. ‘왜 하나님은 악을 빨리 없애지 않으시는가?’
무신론자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한다면, 왜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을 통해서
악을 빨리 없애지 않으시고, 이 땅 가운데 악을 허용하시는가?’ 이렇게 따져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 악을 허용하심으로써,
우리 인간이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그러니까 악을 행할 때마다 즉각즉각으로 그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허용하심으로 인해서,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해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의 시간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을 찾게 되고,
그 고통의 시간들을 통과하면서, 사람들이 오염된 부분들이 제거되어지고,
그리고 성숙해지는 주님의 제자로 거듭나게 되는... 그러한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죠.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세상에 악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곧바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그 악과 고통을 이 세상 가운데에 허용을 하신다는 것이죠.
하지만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로 심판하시고,
모든 악을 제거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젠가 하나님은요. 그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서
이 땅의 그 악을 하나님은 제거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완전히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이 이루어지는 그날에, 악과 고통은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전도를 하거나,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다 보게 되면,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그렇게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죽일 수 있나요?’
‘아니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전쟁과 지진과 그 자연재해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도록 방관하시나요?’
이런 도발적인 질문을 우리가 받을 때가 많이 있어요.
실제로 하나님은, 그 땅에 죄악이 관영함을 보시고,
노아의 시대에 홍수로 세상의 사람들을 심판하셨어요.
아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그 땅의 족속들을 진멸하라고 말씀을 하셨고요.
아말렉에 대해서는, ‘그의 모든 소유까지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그래서 실제로 성경을 읽다가 ‘진멸하라’는 이런 (과격, 잔인한) 하나님의 모습에 실망해서,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다는 한 청년의 이야기도 제가 들었습니다.
△여러분,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그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계시, 그리고 구원계시를 목적으로 성경을 주신 것이지,
도덕과 윤리의 경전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계시, 그리고 구원계시를 목적으로 주신 것이지요!
그러니까 성경은 ‘이렇게 착하게 살아라. 이렇게 착하게 살면 내가 너에게 복을 주리라’
이 말씀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성경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다는 거예요.
도덕과 윤리의 경전으로 주신 것이 아니에요.
성경은, 타락한 죄성을 가진 우리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 성경이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기계시 ... 좀 어려운 말이죠?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 성경이 기록됐어요.
또 하나의 목적은 뭐예요?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죄의 사함을 받고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지... 그 구원계시,
그 구원 계시를 목적으로 성경이 기록되었다라는 사실이죠.
그러므로 반드시 성경은, 구속사적인 관점으로 보아야,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이 출애굽의 사건 역시,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보지 않고, 도덕과 윤리적인 관점에서 보게 되면,
그 많은 죽음을 우리는 이해할 수가 없는 거예요.
성경에 나오는 막 진멸하는 이런 모습들 있잖아요?
이것들을 우리는 이해할 수가 없게 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