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은혜 세상 속에 임한 은혜 2026-08-02 Youtube
◈무은혜 세상 속에 임한 은혜 삿13:1~5 2026-08-02
사사기 13장, 이제 삼손에 대한 이야기를 3주에 걸쳐서 할 텐데요.
현대인의 가장 위험한 질병을 ‘스트레스’로 꼽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가 됐습니다.
'스트레스 검사'가 있어요.
여러분들이 스트레스에 잘 적응하는지 검사할 때 보면, 이렇게 스트레스를 줍니다.
동전 쌓기를 한다던가, 아주 어려운 연산 문제 같은 걸 내서,
이게 처음에 쉽다가, 점점점 어려워지면서 스트레스를 받잖아요.
그럼 진땀도 나고, 손에 땀도 나고, 심박수도 증가하고.. 이런 걸 보는 겁니다.
이 검사의 핵심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스트레스 지수가 올라가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병이 되는 사람은 뭐냐면,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스트레스가 안 와요.
이게 좋은 게 아니거든요. 이게 스트레스가 와야지, 위험 때 사람이 대처하는데,
스트레스가 없으면.. 위험할 때 대처를 못하기 때문에, 이게 병이라고 진단되는 겁니다.
영적으로도 똑같아요. ‘영적인 스트레스’가 있는 게 좋은 겁니다.
이게 영적으로 예민하고 민감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데,
죄를 지으면 마음이 아파야 되는 거예요.
문제가 생기면 절박하게 하나님을 찾아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영적인 무감각증이 와버리면,
뭐 이게 문제가 생겨도, 생긴지를 모르고...
죄인데 죄인지를 모르고...
하나님을 찾아야 되는데, 찾지 않을 때가 있게 된다는 것이죠.
이게 반복이 되면, 하나님 안 찾는게 너무 평범한 일상이 돼 버려요. - 삼손 때 이스라엘
▲사람이 살다 보면, 사람을 별로 이렇게 의지하지 않게 되잖아요. 왜 그렇습니까?
‘아휴, 원래 사람 사는게 다 그런 거지..’
큰 문제가 있어도 ‘아휴, 살다 보면 다 그런 거지..’
이렇듯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와의 관계도, ‘이렇게 사는 거지..’ 하고
자꾸 넘어가 버리는 거예요.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을 안 찾으면, 불안했던 마음은 다 없어지고,
기도하지 않으면 불편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말씀 보지 않아도.. 참 하루가 뭔가 이렇게 찜찜했던 것이 하나도 없어지고,
기도하지 않아도, 말씀 보지 않아도, 예배에 나가지 않아도, 헌신하고 봉사하지 않아도,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혹은 하나님이 멀어져도.. 뭐 특별하게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처럼 여기면서,
영적인 무감각증에 휩싸여 살아가는 순간이 가장 위기라는 것입니다.
문제가 오면, 하나님을 구하며 영적으로 이겨내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그냥 고통의 상황에 무감각해져 버리는 거죠.
‘다 그런 거지 뭐.. 교회가 다 그런 거지.. 신앙이 다 그런 거지..’
자기 죄를 십자가 앞에서 아픈 마음으로 해결하는 게 아니고,
그냥 죄와 타협하면서 ‘다 이렇게 사는 거지..’ 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버리는 그것이,
바로 ‘영적인 무감각증’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누가 좀 이렇게 죄에 대해서 지적하고,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해도,
그냥 자기 합리화하고, 변명하는 세련된 언어들만 자꾸 발전하는 거예요.
여러분, 그래서 고통당하는 현실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냥 고통에 적응해버리는 겁니다.
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죄를 편안하게 여겨버리는 것이고요.
죄의 종이 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이 복음의 자유함을
더 이상 열망하지 않게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 사사기 13장, 삼손이 사사로 쓰임받을 이때가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이 딱 영적인 무감각증이에요.
블레셋의 압제가 40년이나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안 느껴져요. 고통이 고통이 아니에요.
한 영성 작가는 자신의 책에서 이런 내용을 적습니다.
「우리는 무은혜의 지배에 깊이 길들여졌다. 이 시대는 무은혜의 시대이다.」
오늘 설교도이 책의 글을 좀 차용했습니다. *무은혜의 시대
‘무은혜의 시대 속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
무은혜는 뭐예요? 은혜의 반대말이겠죠.
은혜는 뭡니까? 자격이 없어요.
나는 막 분주하고 오늘 준비가 잘 안 된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주시는 거예요. 그게 은혜죠.
나는 자격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무은혜는 뭡니까? 이게 전형적인 ‘세상의 능력주의 법칙’입니다.
제국주의적인 법칙입니다. 뭐예요? 힘의 논리!
‘너 그렇게 살면 안 돼, 너는 너를 증명해야 돼! 공짜는 없어, 노력한 만큼 되는 거야!
열심히 하는 것만큼 되는 거야, 거기에 대한 보상이 오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 은혜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뭐 저 세상 나라의 이론 같은 거죠.
세상은 일한 만큼 대가를 주고, 자격을 갖춘 사람만 받아들입니다.
힘과 능력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죠.
▲본문의 이스라엘의도 40년의 블레셋의 지배를 받다 보니까,
조건과 대가에 의해서만 무언가 보상이 주어진다는 ‘무은혜의 법칙’에 익숙해져 버린 겁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의 법칙'을 상실한 거죠.
‘내가 이 모양 이 꼴로 사는데, 하나님이 내 소리를 들으시겠어?’
‘나 같은 자에게 무슨 은혜가 있어? 내가 열심히 살아야지...’ 이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오늘 이 사사기 13장 본문에서, 매우 중요하게 주목해야 될 사항이 뭐냐 하면,
예전의 사사시대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신에게로 돌이키게 하려고,
외부의 적들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압제하도록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그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사사를 세우고 구원해 주셨죠.
그런데 오늘 사사기 13장에 사라진 게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통하여 40년 동안 압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부르짖지 않아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단지 기도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불감증이에요.
‘은혜가 어딨어?’ 40년 동안 무은혜의 시대 속에 살아가다 보니까,
은혜의 감각이 상실되어지는 거예요. ‘은혜는 없어!’
사사기 13:1절을 보세요.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므로’
늘 까먹죠. 망각하니까 다시 하나님이 압제를 주시잖아요.
‘여호와께서 그들을 40년 동안 블레셋 사람 손에 넘겨주시니라’ 13:1
이거 하나님이 돌이키게 하시려고 블레셋을 통해 압제를 주신 건데,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부르짖지 않습니다. 도와달라고 말하지 않아요.
이미 무은혜의 세상 속에 익숙해진 겁니다. 자유를 상상하지 못하는 거예요.
이 압제로부터 벗어난 세상을 상상하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에 대하여, 상상할 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사사기 13장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야 돼요.
‘사람이 구원을 원하지 않을 만큼, 하나님을 찾지 못할 만큼 무감각해져 있을 그때,
하나님은 그들을 어떻게 하시는가?’ 이게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
답이 뭘까요? 이 중에 혹시 영적인 무감각증에 지금 내가 빠져있다 판단되시는 분이 있다면,
오늘 이 말씀이 ‘영적인 문둥병자’
이게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고통이 와도 무감각하게, 아무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영혼들에게,
다시 한번 은혜의 자극이 되어서,
은혜를 갈망하는 성도로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사사기 13장을 통해 세 가지 메시지를 전하겠습니다.>
◑1. 이 ‘무은혜 시대’ 속의 은혜는.. 우리의 부르짖음 보다도 앞섭니다.
성도가 부르짖어서 은혜가 오는 게 아니고,
놀랍게도 은혜는, 부르짖기도 전에 오더라는 것입니다.
사사기에 반복되는 공식이 뭐였습니까?
죄짓고, 징계당하고, 그게 힘들어서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사사를 통하여 구원하시고...
그걸 다시 망각하고, 다시 죄짓고... 이게 반복이잖아요.
그 안에 징계와 압제가 올 때, 항상 부르짖음이 있었습니다.
자기 삶이 가나안 이방의 압제로 힘드니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 사사기 13장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
오늘 본문을 해석하는 고리 중에 하나가,
“이스라엘에 부르짖음이 빠져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냥 노예생활이 편한 거예요.
블레셋 40년의 통치가 익숙한 거예요. 적응해 버린 거예요.
또 그렇게 블레셋 나라의 힘에 따라서, 내가 적응해서 살다보니까, 살기가 편하거든요.
그 방식도 괜찮더라는 얘기입니다. 그걸 정상적인 삶으로 받아들여버린 거예요.
그럼 더 이상 하나님 안 찾겠죠.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는 거죠.
▲이 때 하나님은 은혜를 상실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시는가요?
‘놀랍게도 하나님이 먼저 움직이시더라’ .. 이게 사실 결론입니다. 은혜죠.
부르짖을 힘조차 없고, 무은혜의 세상속에 익숙해져버린 그들을,
하나님이 먼저 찾아가십니다.
왜 찾아가시는가요?
‘야 이놈들, 안 되겠네. 블레셋 40년의 압재로도 안 바뀌어?
이제 더 센 압재를 줘야지!’가 아니고,
하나님의 압재를 주셔도 부르짖지도 않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세요.
이게 아버지 마음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역사하셨더라’
‘내가 진심으로 회개했더니, 나를 사랑해 주시더라’
‘내가 믿음으로 붙잡았더니,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더라’ 라고 말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우리는 기도해야 하고, 간구해야 되고, 하나님을 붙잡아야 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것보다 더 깊은 은혜를 말하고 있죠.
인과응보가 아닙니다. 내가 한 만큼의 대가가 아니라는 얘기죠.
내가 하나님을 붙잡고 찾기 전에,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고,
내가 주께로 돌아가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나를 향해 찾아오시고,
내가 살려달라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을 그때, 하나님은 이미 살리기로 작정하시더라는 거죠.
그게 성경이 말씀하는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부르짖음’이라는 인간의 행위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 편에서 베푸시는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없기에, 늘 겸손해야 합니다.
부르짖을 힘조차 잃어버린 자를 향하여, 먼저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포기할 수 없는,
그 긍휼하심! 이것이 사사기 13장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죠.
▲제가 언젠가 ‘리액션과 액션’에 대한 이야기로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도 다시 한번 정리해 드리려고 해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반응만 하시는 분이 아니고, 주도적으로 역사하시는 분이세요.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인간의 열심이나 반응에 따라 움직이는 리액션이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했더니, 거기에 대해서 반응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라는 것은, 그 어떤 인간의 자격이나 조건에 매이지 않는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선제적인 액션이다.」 그 하나님을 우리가 신뢰해야 돼요.
그래서 ‘추적하신 하나님’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막 도망쳐서 어디 반대방향으로 달려가도,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추적하십니다. 그 사냥개의 예를 들거든요. 주1)
사냥개가 한번 먹잇감을 잡으면 끝까지 쫓아가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추격하십니다.
그리고 기어이 찾아내시고 구원해내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추적하기를 멈춥니다.
이미 40년 블레셋의 제국의 힘에 길들여져 버렸어요. ‘무은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추적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먼저 선행적으로, 선제적으로 행하시더라는 거죠.
▲제가 요 근래에 가장 많이 선포하는 성경 구절 중에 하나가 이겁니다.
롬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하는 자에게는’
그럼 대가는 그냥 보수를 줘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은혜는 아니래요. 그럼 역설적으로 은혜 받으려면 뭐 해야 되는 거예요?
일을 안 해야 되는 거예요. 일을 안 해야 은혜가 오는 겁니다.
이 얘기는 뭡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구원 은혜는, 우리 열심에 따라, 혹은 내가 한 만큼의 행위에 따른 보상이 아니다...
그 이상의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거죠.
‘너희가 아무것도 못할지라도, 때로는 하나님을 등지고 떠날지라도,
하나님은 너희를 추적하시고 발견해 내시어 은혜를 베푸신다’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늘 겸손해야 돼요.
△'한국교회'라고 얘기를 할게요. 저희 교회도 마찬가지고,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고,
왜 자꾸 문제가 생기느냐? 다 별거 아닌 인생들이거든요.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떠나버리시면 진짜 별거 아니거든요.
근데 은혜 받고 나서, 본인이 별거인 줄 알아요. 여전히 별거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버리고,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그 뛰어난 지혜와 지식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내어,
내 힘과 내 주도대로 신앙생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지 않는 그 순간도, 추적하여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삶은 다 은혜로 점점이 점철된 거예요.
그걸 아는 사람은 늘 겸손하죠.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 가운데 우리가 있기에,
그 약속을 늘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아래에 있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고 회개하고 기도하면 안됩니까? 안된다는 얘기가 아니죠.
순서의 문제예요. 순서적으로 은혜가 늘 앞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무엇을 함에 따른 반응이 아니고, 리액션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도적인 액션, 선제적 행위다’ 라는 것을 알라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애 낳고 아이가 막 우니까, 그제야 부모가 돼요? No
원래 부모가 아니었는데... 사랑이 없었는데...
애가 아파서 막 우니까, 그때부터 모성애, 부성애가 나옵니까? 아니잖아요.
이미 부모이기 때문에, 작은 신음에도 반응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때로는 이 아이가 먼저 아플까봐 선제적으로 액션을 취하잖아요.
아무것도 안 하다가, 애 안 보고 있다가, 애가 울 때만 돌봐줘요? 아니잖아요.
부모는 울 때든, 안 울 때든.. 그냥 애기 때 보면, 그 눈을 떼질 못하잖아요. 추격하는 거예요.
기어다니기 시작하면, 아이가 내 눈앞에 안 보이면 ‘어디 갔어? 어디 갔어?’
하고 막 찾아가잖아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기도로, 하나님이 없던 사랑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이미 사랑받는 존재이므로,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사랑해 주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사사기 13장, ‘기도조차 할 수 없던 순간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놓지 않으셨다’가 결론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내딛는 이 첫걸음, 내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 인도하심을 받는 그 순간,
그게 내가 잘 해서가 아니고,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가 반응하는 거예요.
삿13:3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서’
하나님이 찾아오셔야 돼요. 하나님이 오셔야 해결되는 겁니다.
부르짖음이 없는데도...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거예요.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임신하지 못함으로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스라엘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무슨 군대가 오는 게 아닙니다.
화려한 지도자가 딱 등장하는 게 아니에요.
지도에도 안 나오는 ‘소라’라는 아주 작은 마을,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는 한 여인,
삼손의 아버지는 '마노아'라고 이름이 나오지만,
삼손을 출산한 여인, 엄마는 누군지 이름도 나오지 않아요.
그것도 태의 문이 닫혀서 괴로워하고 있는..
고난 가운데 한 여인의 닫힌 태를 여시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시작하시죠.
사람의 눈으로 봤을 때, 구원의 징조가 하나도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이미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인생에 어떤 문제가 있는데, 일이 해결될 기미가 안 보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안 계시는 거라고 오해하고 계시다면,
우리에게 해결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그 사실이,
하나님께도 아무 일도 하실 수 없다는 것은 아니에요.
▲여호와의 사자(천사)가 하는 말이, ‘네가 삼손이라는 아이를 임신하겠다’
그 사실이 눈에 보여요? 안 보이죠.
그게 당장 두드러지게 나타나집니까? No
게다가 삼손이 태어난다고, 바로 막 응애응애 울다가
어떤 나라 신화처럼, 막 어린애가 한 살짜리가 태어나자마자 칼을 들고 나설 수 있어요?
아니죠. 얘를 또 키워야죠.
그가 쓰임 받기까지, 20세든지 30세든지... 그 아이를 오래 키워야 될 거 아닙니까?
그 시간 동안에는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운데 이미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느리게, 천천히 일하십니다.
여러분, 자꾸 내 생각과 내 제한된 경험 속에, 하나님을 가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이 상황을 내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기에,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라고 자꾸 절망하지도 마세요. ‘하나님께는 방법이 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신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의 가능성이 닫힌 자리에서, 새 역사를 이루어 내십니다.
아니 수많은 여인들이 아이를 낳았을 거 아닙니까? 그 낳은 아이를 쓰시면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닫힌 태를 여셔요. 이게 메시지예요.
닫힌 문을 여시고, 닫힌 상황을 여시고,
늙은 사라,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셨지만,
이게 태문이 열리자니까 막 괴로워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태를 여시잖아요.
이삭을 낳잖아요.
한나 역시 태의 문이 열리지 않아서 얼마나 괴로워하며 웁니까?
그제야 사무엘을 주시잖아요.
늙은 엘리사벳에게, 오래 기도하게 하신 후에 세례 요한을 주시잖아요.
‘하나님은 간절히 원하면 무엇인가 주신다’는.. 그런 기도 성공의 법칙이 아니고,
인간의 자격이나 가능성이 닫힌 그 상황을 하나님이 여신다... 그 메시지가 성경에 나와있죠.
그거 믿으라는 게 성경 아닙니까?
▲삿13:5절을 보세요.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
그러면 여러분, 삼손이 태어날 때부터 시작이에요? 아니면 지금부터 시작이에요?
이 ‘시작’이라는 단어는, 삼손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얘기에요.
이 시작을 누가 하는 겁니까?
삼손이 태어날 때부터 시작이에요. 하나님이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사기는 영웅들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사사 삼손.. 왜요? 힘이 세니까.. 우린 그런 영웅을 바라잖아요.
막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이런 존재를 바라보잖아요.
성경은 그 영웅 같은 사람 바라보지 말고, 그 영웅을 나오게 한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겁니다.
사사기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다!
이 구원의 시작이 누구로부터 이루어지는가요?
하나님으로부터 이루어집니다!
계속 거기에 주목하라는 얘기입니다.
여전히 블레셋의 압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고, 아무도 주목할 수 없는 한 여인의 태,
그 태동으로부터 구원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너무 쉽게 낙망하지 마세요.
내 눈에 보여지지 않는다고 해서, 기미가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일하지 않는 게 아니라고... 계속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겨울나무가 죽지 않은 이유는 뿌리가 살아있기 때문이고요.
씨를 던지자마자 싹이 나지 않는다고 절망하지 말 것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거든요. 영적인 원리는 그런 겁니다.
삿13:24~25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
그 여인이 아들을 낳았대요. 약속대로 낳은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불임 여인의 태의 문을 열어서 구원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가 태어나니까, 하나님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
모두 누가 일하고 계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은혜죠!
▲여러분, 혹시 여러분에게도 닫혀있는 무언가가 있으세요?
뭐 그게 쉽게 변하지 않는 우리 자녀들의 문제일 수도 있고,
배우자의 문제일 수도 있고,
관계의 상처일 수도 있고,
진짜 오랫동안 기도하고 있는데, 닫힌 문처럼 열리지 않는 그 기도 제목일 수도 있습니다.
또 어쩌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잘해보고 싶은데
잘 안 고쳐지는 죄의 습관들... 그것도 마찬가지로 ‘닫힌 문’처럼 보이겠죠.
또 교회를 좀 생각하시는 분들 계세요?
한국 교회를 보면서 ‘너무 막막하다, 소망이 있나?’ 하고
문이 닫힌 것처럼 보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우리 눈에 모두 닫힌 태처럼 보여지고,
아무리 노력하고 시도했지만 안 열려질 것 같고,
그래서 ‘이제 끝났다’라고 우리 마음에 절망하고 있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신다, 항상 새 일을 시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여러분 가운데, 그 일을 시작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삼손이 잉태된 거예요. 그건 눈에 보이지 않죠)
그러므로 새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
그것을 오늘 이 사사기 13장, 태의 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믿음으로 보시고,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임을 받아들이시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가능성 때문이 아니고, 약속이에요. 성경이 우리에게 약속이잖아요.
왜 삼손에게 임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늘 은혜는 우리의 부르짖음보다 앞선다는 걸 기억하시기 바래요. *삼손 시대
◑2. 두 번째, 은혜는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항상 크게 옵니다.
그래서 기도에 대해서 제가 가끔 설교할 때, 이런 얘기를 드리잖아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선택권을 준다면, 그거 꼴랑 쓰지 마시라고’
‘하나님 그거 한 가지, 요거를 꼭 주세요!’ 이렇게 하지 말고,
‘나는 기꺼이 그 선택권을 하나님께 돌려드립니다!’
왜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 이게 진짜 믿음이죠.
그 분은 한 개만 주시는 분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참 쉽지가 않죠. 내가 원하는 게 있으니까...
이상하게 하나님은.. (내가 기도로 구할 때) 조금 주실 것 같거든요.
(뭐 하나 주시면서) 좀 나를 고생시키실 것 같고... 막 헌신을 요구하실 것 같고...
내가 원하는 돈은 안 주실 것 같고... 이게 우리의 오해 아닙니까?
하나님이 가장 좋은 거 주신다고 믿는다면, 기도는 하나님께 자꾸 맡겨드리는 겁니다.
13:8절을 보세요. 마노아가 아들의 탄생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한 가지 기도를 하는데,
‘주여 구하옵나니 주께서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오게 하사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이 마노아가 얼마나 귀해요? ‘아휴, 이제 약속만 하고 떠나셨는데
다시 오시면 물어볼 게 있는데, 아 애가 태어나면 어떻게 키워야 되냐?’ 이거예요.
부모인 우리가 뭐 해야 되느냐는 거예요.
아이가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어떻게 행할지를 좀 알려달라는 거예요.
굉장히 신앙적으로 보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이렇지 않아요? 이게 우리의 약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뭔가 이 ‘무은혜 시대’ 속에서, 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언가 해법이 명확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내가 이해가 되어지고, 방법론도 내게 명확해야지.. 이게 힘이 되어지고,
이 시대를 돌파하고 뚫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대부분의 내용들이... 좀 명확하게 달라는거죠.
‘이거 해야 됩니까? 사업 투자해야 됩니까? 자녀 여기 이 대학에 보내야 됩니까?
이 사람과 결혼해야 됩니까?’
그러니까 마노아가, 아들이 나실인으로 쓰임을 받으려면, 부모가 잘 해야 되잖아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어떻게 키워야 되지?’ 매뉴얼이 필요하잖아요.
그리고 또 태어나면 얼마나 쥐잡듯이 또 잡겠어요?
‘너 하나님의 사람인데, 이거 하면 안 돼, 저거 하면 돼,
이거 먹으면 안 돼, 이거 먹어야 돼!’
이렇게 또 얼마나 매뉴얼대로 하겠습니까?
그러면서 애들이 힘들어하면 뭐라 그래요?
‘너는 하나님의 나실인이라고... 그래서 똑바로 해야 된다고...’
그러니까 은혜가 없는 거예요. 은혜가 없는 거예요.
롬4:4절에, 그렇게 열심히 하면 월급 받는다니까요. 은혜 받는 게 아니라니까요.
‘목사님, 그거 좀 심하신 말 같은데, 그래도 열심히 잘 키워야죠.’
오늘 본문을 보세요. 하나님은 안 알려주세요. (어떻게 키울지) 답을 안 알려주신다고요.
마노아한테 ‘와 너 진짜 기특한 부모네, 너 참 좋은 아빠네...
딴 부모들은 이런 거 알려달라고 요청 안 하는데.
넌 알려달라고 하네.. 너무 기특하다.. 내가 100가지를 알려줄게...’ 이렇게 안 알려주세요.
그건 우리가 원하는 거예요. 나 속 편하려고, 나 편하려고 자꾸 바라는 거예요.
‘이 아이에 대한 사용 매뉴얼 주세요.’ 그런 기도는 응답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어떻게 행해야 되는지에 대한 매뉴얼 대신, 하나님을 보여주시죠.
그 얘기는 뭡니까?
매뉴얼 갖고 사는 게 아니고, 날마다 문제를 만날 때마다, 하나님,dmf 찾으라는 얘기예요.
그때 그때마다 하나님은 갈 길을 보여주십니다... ★★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인 거예요.
그러니까 맨날 한 걸음씩 보여주시는 거예요. 헤드라이트가 아니라니까요. 작은 랜턴이에요.
우리는 인생의 세밀한 사용설명서 원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얼굴 보여주길 원하십니다. 늘 찾아오길 바라십니다.
△제임스 패커 목사님이 쓰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 책 내용도 똑같아요.
사람들은 하나님께 정보 얻기를 더 갈망한대요.
내 아들에 대한 정보, 내 앞일에 대한 정보를,
하나님을 통하여 얻기를 원하는... 정보에 치중한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해결할 수 있는 설명서(성경?)만 주시고
‘앞으로 잘해봐, 기특하다’ 하시고 떠나시는 게 아니고,
날마다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기묘한 일을 보여주시길 바라시죠.
▲그래서 마노아에게 뭐라고 답하십니까?
13:18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
기묘자.. 그러니까 기이하고 묘하니까, 설명해 줘봐야 못 알아듣는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시는 거예요?
‘나 기묘한 자야 너는 이해 못해. 그때그때 믿음으로 순종해야 돼.
이해되는 하나님이 아니고, 믿음으로 따라가야 될 하나님이야!’ 그거 알려주시는 겁니다.
기묘자가 뭡니까? 인간의 이성, 인간의 계산으로는 도저히 헤아려질 수 없는
경이로운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하잘 것 없습니까?
기도의 제목이 다 우리 계산이잖아요. 이렇게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우리의 이성이잖아요.
우리의 논리잖아요.
하나님의 오늘 마노아를 향한 말씀, ‘나는 기묘자라’
그러므로 ‘너의 계산기로 나는 계산되지 않는다...’
13:19 ‘이에 마노아가 염소 새끼와 소제물을 가져다가 바위 위에서 여호와께 드리매
이적이 일어난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본즉’
기묘자가 기묘한 일을 일으키십니다.
13:20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간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그것을 보고 그들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
여러분, 마노아가 제사드릴 때, 제단에서 불꽃을 일으키려고 제사드렸습니까?
아니에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하나님을 경배한 것 뿐입니다.
그런데 그때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죠. 제단에서 갑자기 막 불꽃이 일어나고,
그게 하늘로 올라가는 기묘한 현상이 보여지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우리가 알 필요는 없어요.
그 불꽃이 뭐고, 제단에서 일어난 게 뭐다... 해석할 필요도 없습니다. 뭘 보여주시는 거예요?
‘넌 제단에서 제사드릴 때, 이런 일이 있을지 몰랐지?’ 그거예요.
‘네가 하나님을 찾을 때 계산되어진 기도 제목대로 나타날 하나님이 아니다’ 라는 뜻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너는 그냥 기도해, 너는 하나님을 찾아, 너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하나님을 예배해!
그럼 내가 너의 인생에 기묘한 일을 보여줄게!.. 그걸 믿느냐?’ 그 얘기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우리의 원함보다 항상 놀랍다’ 이걸 믿는 거죠.
하나님의 역사는, 내 기대치보다 항상 훨씬 더 크다는 거죠.
▲창15장에서 아브라함도 똑같잖아요.
아들이 없는데 ‘아들 하나 주세요.’ 때 하나님이 뭐라고 얘기하십니까?
창15:1 ‘아브라함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들 하나 달라 했는데, 아들 주시면 되지, 뭐 이런 얘기를 하세요?
‘아브라함은 아들을 원했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주셨다’ 그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뭘 원하는가요? 여러분은 예배할 때, 하나님을 찾을 때, 뭘 원하고 계세요?
하나님은 ‘나를 찾으라’고 계속 우리에게 요구하시죠.
룻기를 보면, 룻이 원했던 건 뭡니까? 나오미가 원했던 건 뭐예요?
보리 이삭이에요. 이삭 몇 줌, 그걸 먹고 살아야 되니까요.
근데 하나님은 보아스를 주시죠. 이삭의 주인을 줘버리시죠.
이게 하나님의 역사인데, 우리는 ‘아 보아스 필요 없어요. 그냥 이삭이면 된다니까요.
보리면 된다니까요. 먹고 살면 된다니까요...’ 그게 우리 기도 제목이에요.
우리 머릿속에 보리 이삭으로 가득한 거에요.
하나님이 아무리 좋은 걸 주신대도 ‘원더풀(기묘)한 거 필요. 없어요.
기이한 거 필요 없어요. 난 보리 이삭이 필요해요. 보아스는 필요 없어요.’
그럴 때가 얼마나 많을까요?
참된 신앙은, 인생의 모든 질문에 답을 얻고,
여러분들이 원하는 기도 제목들로 다 되어서 찾아오는 평안이 아니고...
‘내가 걸어가는 신앙의 여정에, 내 옆에 누가 계시는가?’ 입니다.
△지난주 설교의 핵심, 에녹에 대한 얘기 했잖아요.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갔더라’ 그 동행 속에서 오는 평안과 안식,
그것이 우리의 참된 신앙에서 오는 유익인 것이죠.
답이 더디 오고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을 구하는 일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오늘도 어떤 닫힌 상황 속에 놓여 있더라도
‘하나님, 제게 와 주십시오. 나의 길과 나의 문이 되어주십시오’
고백하는 성도들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현실을 모르시는 게 아니고요.
그 기도 제목 하셔도 됩니다. 우리가 필요하니까 구하는 거잖아요. 그거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오늘 메시지를 통해 알려주고 싶은 건 순서예요.
신앙은 똑같은 얘기도 순서가 바뀌면, 다른 얘기가 된다고... 제가 자주 얘기 드리잖아요.
‘하나님이 자신을 주신다’는 말은
현실의 고통, 우리의 상황에 관심이 없다는 뜻이 아니고,
나의 필요가 채워져야만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인정하겠다.. 라는 뒤바뀐 순서를
정상적으로 바꿔놓는 거예요.
‘나에게 증명되어야 하나님을 인정하겠다’가 아니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라고 믿음으로 고백하라는 얘기죠.
‘그러고나면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을 구하는 인생, 그러므로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인생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세 번째, 하나님의 은혜는 늘 두려움을 이긴다!
‘두려움’이라는 건 사실 해석에서 오는 거거든요. 사실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침소봉대하여
‘내가 생각해보니까 이런 일이 앞으로는 얼마나 큰 일이 벌어질까?’라는 불안함이거든요.
그런 불안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얘기를, 본문이 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사사기 13장에서, 마노아 부부가 제사 드렸더니, 제단에서 갑자기 불꽃이 일어났어요.
너무 놀란 겁니다. 특별히 누가? 삼손의 아빠가 되는 마노아가 너무너무 놀란 거예요.
13:20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간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그것을 보고 그들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
마노아가 그의 아내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라’ :22
당시 유대인들은 그때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면, 불경한 우리는 죽는다’
마노아가 ‘지금 하나님의 사자를 봤으니까, 이제 우리가 죽지 않겠느냐?’ 말했을 때,
정작 마노아의 아내는, 그 장면을 봤지만, 다른 고백을 한단 말이죠.
13:23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
‘아니 우리를 죽일 것 같으면, 뭐하러 삼손을 예언하시고,
제단에 불꽃 일으키시고, 뭐하러 나타나서 얘기했겠느냐?’
여러분, 같은 불꽃을 똑같이 봤는데
마노아는 ‘우리가 하나님을 봤으니, 이제 죽을 거야’ 라고 해석하고,
아내는 그 불꽃을 보고 ‘하나님의 신실한 은혜’에 근거하여 해석해요.
‘하나님이 나의 태의 문을 열어주시고, 자신의 아들을 나실인으로 써 주시겠다’
이거 은혜 아닙니까?
‘아니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에게 오셨는데, 저 불꽃이 어찌 심판의 불꽃이 있을 수 있겠냐고’
마노아의 아내는, 은혜의 근거에 해석하는 거예요.
이게 중요.합니다. 여러분, 자꾸 두려움한테 해석을 넘기지 마셔야 돼요.
깜짝 놀라가지고, 내 감정의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딱 찾아오니까,
그 감정의 근거해서 ‘내 앞 길이 무너질 거야.. 힘든 희생을 하게 될 거야..
난 죽을 거야.. 난 끝날 거야’ 라고 해석하지 말고, 어떻게 해석해야 된다?
이미 받은 은혜가 있잖아요. 우리에게 이미 주신 은혜가 있잖아요.
그 은혜 주신 하나님을 근거로, 오늘의 상황을 재해석하는 법을 자꾸 배우셔야 돼요.
신앙은 결국 이겁니다. ‘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제가 왜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는 줄 아십니까?
제가 왜 복음을 자꾸 기준이라고 말하는 줄 아십니까?
이 기준의 근거에 해석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 ‘무은혜의 시대’ 속에서
늘 갈등하고, 흔들리고, 두려워하고, 불안해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러나 은혜가 들어오면, 우리에게 이미 주신 은혜에 근거하여, 오늘을 해석할 줄 알거든요.
결국 잘되게 하실 하나님을 알거든요.
그래서 무슨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길 때마다
‘또 뭐 좋은 일 주시려나 보지... 좀 견뎌보라고 하시나 보다...
이 조급한 나를 훈련시키시나 보다...’
이렇게 은혜로 자꾸 해석하셔야지,
분노와, 두려움과, 자기의 기준과, 자기의 논리를 가지고 해석하면.. 화날 것밖에 없잖아요.
분노할 것밖에 없잖아요. 은혜 다 쏟을 것밖에 없잖아요.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제물로 내어주셨잖아요.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잖아요.
우리는 문제를 만나면 너무 쉽게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라고 결론을 내려버려요.
우리의 불안은,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로, 오늘 우리를 자꾸 끌고 가서 정죄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침묵을, 응답의 지연을
‘하나님께서 나를 거절했다’라고 자꾸 해석하지 않습니까? 잘못된 해석이죠.
자꾸 자기 영혼에게 선포하셔야 돼요.
여러분, 우리 버릴 것 같으면, 우리 지옥 보낼 것 같으면.. 왜 예수님이 오셔요?
왜 성령을 보내셔서, 오늘 우리에게 감화감동을 주시겠습니까?
믿음은.. 슬픔이나 두려움을 부정하진 않아요.
슬픈 일이 오고, 두려운 일이 오는데,
왜 두려워하지 않고, 왜 슬퍼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감정으로 해석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그 감정으로 최종 해석권을 넘기지 말라는 얘기예요.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하시라는 얘기입니다.
‘복음만이 우리의 해석의 기준이다!’
저는 이걸 자꾸 얘기 드리는 거예요.
이 맥락에서 로마서 8장 32절은 우리가 매일매일 되뇌해야 될 성경 말씀이죠.
우리 같이 한번 큰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아멘!
하나님의 신실한 성품,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라는 렌즈로
현실을 새로 읽는 영적인 능력을 갖는 성도들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의 두려움을 물리치는 은혜가 되길 주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축원드립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영국의 신학자인 체스터턴이 한 얘긴데요. 제가 한번 적어봤습니다.
「이 세상에 기적이 부족했던 적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없다.
(기묘자이신 하나님의 역사가 끊어진 적이 없어요.)
다만 우리가 마땅히 놀라워해야 할 그 거룩한 경이로운 감각을 잃어버렸을 뿐이다」
왜요? 우리 자꾸 능력주의에 빠지거든요. 제국주의라는 힘의 논리에 자꾸 빠지거든요.
무은혜의 세상에 무감해지고 있어요.
‘은혜라는 것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세상’이라는 불신앙에 빠져있을 때가 많다는 얘기죠.
교회는 나오지만 하나님은 의지하는 신앙이 많다라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한 주간 무은혜에 저항합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 아래에 있다면, 무더위도 이유가 있겠지요.
모든 일을 은혜로 해석하는 신앙의 사람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결코 미안해하지 않는다’는 말이 진리입니다.
우리 인생에 하나님은 ‘미안하다’하고 말씀 안 하실 거예요.
왜요? 완벽하게 인도하실 거니까!
‘김집사 미안해.. 그때 내가 잠깐 졸았네.. 아이고 그때 내가 깜빡 딴 데 보느라고
왼쪽으로 갔어야 되는데, 오른쪽으로 가라고 너를 내버려 둬서 정말 미안해’
사실이 그렇다면 너무너무 끔찍한 일이죠.
기묘자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이 믿음 가지고 무은혜 속에 하나님의 여전한 은혜를 바라보고 승리하시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는 항상 우리의 부르짖음보다 앞섭니다.
-은혜는 우리의 원함보다 늘 큽니다.
-은혜는 감정이나 현실로 내 상황을 해석하는 게 아니고
그래서 두려움에 빠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주신 은혜에 근거하여 오늘을 해석하게 합니다.
이 세 가지를 붙잡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같이 한번 찬양하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겠습니다.
.....................................
주1) 영국의 신학자 존 스토트는 저서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가장 궁극적인 이유로
프랜시스 톰슨의 시에 나오는 '천국의 사냥개(The Hound of Heaven)'를 꼽았습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도망치려 할 때도 끝까지 쫓아와 붙드시는
하나님의 끈질긴 추적과 사랑을 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