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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강해(13)/사사기7:1-9/‘기드온과 300용사’ Youtube
◈기드온과 300용사 삿7:1-9 2025.09.07. [사사기 13강]
우리는 지금 기드온 이야기를 계속 몇 주에 걸쳐 하고 있어요.
강권적인 하나님의 부름 앞에 어쩔 수 없이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고 있는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합니다. 6:34 *지난 주 설교 보기
정확히는 ‘하나님의 영이 기드온을 입으셨습니다.’
그러면 대만족이었을 것 같은데, 기드온이 증표를 요구합니다.
‘하나님, 죄송하지만 증표를 좀 통해서 확인시켜 주십시오.
그래서 양털 뭉치가 마당에 있는데,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양털뭉치에만 이슬로 젖게 하시고, 그 주변 마당은 마른 땅으로 보여주시면 제가 믿겠습니다.’
말도 안 되죠. 근데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맞추어 주세요.
그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정말 기적같은 일들이 벌어진 겁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본인도 알죠? ‘노하지 마옵소서’
자기도 이게 물을 질문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악착같이 확인받고 싶었던 거예요.
이것도 불신 쪽의 차원보다는, 믿음의 한 측면이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기억나시죠?
이게 자꾸 의심을 갖는 것도, 불신의 영역으로만 볼 게 아니라,
정말 믿고 싶어서 그러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제 다음날 아침에는 양털만 마르고, 마당만 적셔주시면 진짜 내가 가겠습니다.’
하나님이 ‘알았다.. 그러면 반대로 해주면 되지?’
기드온이 다음 날 일어나 보니까, 그대로 됐어요. 그 이야기가 삿6장 마무리입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본문 사사기 7:1절이 또 기드온의 이야기가 이어지는데요.
◑7;1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하롯 샘 곁에 진을 쳤고 미디안의 진영은 그들의 북쪽이요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
1절은 우리가 무심히 흘려버릴 너무 평범한 문장인데,
사실 이스라엘 백성과 기드온의 상태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 입니다.
이게 뭐 어쨌다는 얘기일까요? 여룹바알은 기드온의 별명이죠?
이거 누가 붙여준 겁니까? 고향 동네 사람들, 우상 숭배자들이,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의 설득에 따라서,
‘그래 바알이 살아있는 신이라면 바알이 당연히 우상을 파괴한 저 기드온과 싸워줄 것이다.
즉 다투어 줄 것이다’ 해서
우상단지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린 기드온에게 별명을 붙인 겁니다. ‘바알이 다투는 자’
그러면 기드온의 입장에서는, 졸지에 의도하지 않았지만, 누구와 다투는 자가 되어버립니까?
‘바알과 다투는 자’가 된 거예요. *여룹바알
그러니까 그런 거예요. 기드온은 전혀 의도도, 계획도 없었지만,
역사의 전면에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리더로 부각이 자꾸 되는 겁니다.
기드온은 너무 싫어요. 성격상 소심하고...
근데 여기 지금 1절에 ‘여룹바알’이라 하는 이 말은,
어쨌든 투쟁적인 의미가 담겨져있고, 적과 싸워야 되는 수장首長의 그림을 담고 있어요.
그런데 뒤에 그 사람 이름이 뭐예요? ‘기드온’이에요.
기드온이 역사의 전면에 처음 등장할 때 어디에 있었나요?
포도주 짜는 틀 속에 남은 그 조그만 곡식이라도 빼앗길까봐, 숨어서 타작을 하고 있어요.
키질을 하고 있었어요.
기드온이 그러니까 매우 두렵고 소심하고... 흔한 시장용어로 ‘쫄아있는’
아주 전형적인 소심한 모습의 장면을 들키게 됩니다.
그러니 이 이름이 얼마나 언발란스해요. 앞뒤가 안 맞죠.
하나(여룹바알)는 대적 앞에 나라를 구할 투쟁해야 될 큰 용사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고,
그 뒤에는 그래야 될 사람이 기드온이에요. ‘여룹바알 이라 하는 기드온’ :1
비록 기드온의 이름 뜻이 '찍어 넘김', '베는 사람', '베어 넘기는 자'라 하더라도,
자연인 기드온은 우리에게 그 포도주 즙 짜는 틀 안의 모습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소심하고, 두려워하고, 떨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기드온 한 사람의 그림이 아니라, 사실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이고,
오늘 우리가 흔하게 마주하게 되는 우리 신앙의 멘탈의 그림이에요.
우리도 그렇잖아요.
지금 여기 앉아계신 분들 가운데도, 나이를 막론하고
각각 자기가 처한,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큰 산맥 앞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러고 서 있는 사람들.. 우리들의 모습이죠.
또 여러 가지 현실적인 책임, 필요.. 이런 것들이 산적해 있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여건으로 봐서는 감당 못할 여건인데,
나는 거기에 비해서 너무 부족하고, 가진 것도 없고,
앞뒤 나의 현실과 내가 감당해야 될 책임은...
내 존재와 안 맞는, 엇박자가 자꾸 나는 거죠.
그러니까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
이 말 자체가 정확하게 그 그림을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자 그런데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일찍 일어나 어디에 진을 쳤습니까?
‘하롯 샘 곁에 진을 쳤고’ 이 지명이 굉장히 또 재미있습니다. :1
‘하롯’이라는 말은, 하렙이라는 말에서 시작이 된 뿌리를 갖고 있는데 이런 뜻입니다.
‘떨다, 두렵다, 떠는’ 이런 뜻입니다.
샘 이름이 하필 그런 곳에, 이스라엘이 진을 쳤어요.
그래서 앞에 미디안 대군이, 그것도 아말렉이라는 연합군과 함께 합세해서,
몇 명이 지금 골짜기에 진을 쳤는가 하면, 13만 5천명이 진을 쳤어요. 8:10
그러니까 그 대적들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원수요, 싸워야 되는 대적인데,
넘을 수 없는 벽이에요.
그러니까 ‘하롯 샘 곁에 진을 쳤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오늘 이 글을 대하고 있는 독자들의 냉엄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구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전부 하롯 샘(떠는 샘) 곁에, 어떤 위축되어 있고,
떨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되는 거죠.
◑7:2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여러분, 이제 이렇게 기드온이 순종해서 병사들을 인솔해서,
어쨌든 적과 마주하기 위해서 하롯 샘 곁에서
이런 심적인 두려움과 불안과 걱정을 끌어안고 서 있다면,
‘너 굉장히 지금 떨고 있구나.. 아직도 걱정하지 마.. 저쪽이 13만 5천이 지금 들어와 있는데,
내가 3배의 병력을 증강시켜 줄게. 내가 그건 들 못하겠냐?
너를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어서,
너를 따르는 병사로 내가 소집을 했는데, 내가 그거 못하겠냐?’
이래도 지금 이게 안심이 될똥 말똥 한데
하나님은 ‘오히려 지금 숫자가 너무 많다’고 하십니다.
그때 이스라엘 병력이 몇 명인가 하면 3만 2천명이에요.
그러면 적의 13만 5천명과 비교하면, 1/4밖에 안 되는 턱도 안 되는 숫자입니다. 7:3
근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군대의 숫자가 많대요.
하나님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자꾸 줄여나가기 시작하시는 거죠. 왜 그랬을까요?
자, 여러분 묻습니다. 적들이 13만 5천이 들어와 있으니까
-2배의 병력을 증강하는 게 승리의 요건일까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게 승리의 요건일까요?
△사사기 강해를 해 오면서, 앞서 '소 모는 막대기'를 들고 있던 농부 출신 삼갈 사사! 3:31
그때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렸어요.
‘사사의 자격이 뭐냐? 첫 번째 자격이 뭐예요?’
그가 얼마를 갖췄냐, 어떤 능력을 구비했느냐가 자격조건이 아니라고 그랬어요.
사사의 자격 첫 번째는 ‘하나님이 사사로 부르신 것’이 자격이예요. 믿습니까?
마찬가지로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기드온을,
소심한, 상황 앞에 떨 수밖에 없는 이 기드온을 부르신 게 자격이에요. 믿습니까?
두번째 자격이 뭐예요?
두 번째 자격은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느냐’가 아니고,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느냐가.. 자격이에요. 믿으십니까?
그 부르심에 순종하느냐가 자격이에요!
▲가끔 젊은 목회자들이, 아주 기특한 생각을 갖고 제게 질문을 해요.
‘선배님, 앞으로 선배님이 걸어가시는 그 길을 걷기 위해서,
제가 지금 신학교 공부로 준비하고 있고, 또 청년 목회자로 지금 살아가고 있는데,
앞으로 훌륭한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제가 뭘 갖춰야 되겠습니까?’
그냥 기특한 생각이죠. 과거에 저는 그런 질문을 한 적도 없어요. 그러니 훌륭한 사역자죠.
그럴 때 제가 이런 대답을 꼭 합니다.
‘자격을 갖추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먼저 하나님이 너를 부른 게 네 자격이고,
두 번째는, 그 부름 앞에 어떤 경우에라도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 순종하느냐가 자격이다.
어떤 조건이나 스펙을 갖추었냐가 자격이 아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믿으셔야 됩니다.
‘내가 어떻게 뭘 갖추었느냐?’ 이게 자격이 아니에요.
여기 가장 중요한 자격은, 병력을 두 배 세 배 증강시켜주는 게 승리의 요건이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붙잡고 밀고 나가는 게’ 승리의 필수 조건입니다.
▲신명기 8:17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여기 '손'이라는 단어가 등장을 합니다.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은 중의적 표현
이 얘기를 사실 기드온도 흘끗(곁눈질로 슬쩍 봄) 남겨놨어요.
사사기 6:36절을 한번 보세요.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기드온이 하나님께 증표를 요구하기 전에
‘알겠습니다. 하나님, 그런데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것을
내가 확실히 하기 위해서, 증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양털 증표’를 요구한 거예요.
여기도 기드온이 ‘내 손으로’라는 표현을 써요.
△그런데 이 경계선에 서 있는 크리스찬 들이 굉장히 많아요. 우리는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
‘사실 하나님! 저한테 이런 이런 사명과 명령을 하시겠으면,
내 손으로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나에게 능력을 보여주셔야 될 거 아닙니까?
내 손으로 이 일을 이루시려면, 제게 이것 저것 갖추어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얼핏 들어보면, 그런 요구가 그리 틀린 요구 같지 않아 보이지만,
사실은 틀린 거예요.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기드온을 '입으셨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6:34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 ‘임하시니’ 라는 말이 ‘옷을 입다’는 뜻
모든 역사는 기드온의 손이 움직이지만, 실제 누구의 손이 역사하시는 겁니까?
하나님의 손이죠!
그래서 여기 ‘손’이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예요.
원래 ‘손 또는 팔’은, 성경에서 ‘능력’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오늘 설교의 첫번째 교훈이 뭐냐 하면,
‘내 손에서 모든 것을 → 하나님의 손으로 이양하는’ 거에요.
모든 일을, 현실적으로는 내 손을 통해 하지만,
이게 내 손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누구의 손이? 하나님의 손이!
내 손에서 → 하나님의 손으로!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2 이걸 하나님이 염려하시는 거죠.
그래서 3만2천이 모인 이스라엘 군대를, 자꾸 집으로 돌아가라고 독려하시는 거예요.
▲제가 종종 설교 시간에, 이렇게 여러분들에게 도전을 하곤 했어요.
인생을 길게 살아보면, 많은 갈래길이 나오고,
사소한 문제에서부터 어마어마한 문제까지 부딪히는데... 결국은 선택의 문제예요.
그런데 그 수많은 모양의 선택들이.. 결국 질문은 딱 하나입니다.
돌아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그 한 가지 질문을 반드시 하십니다.
‘이거 네 손으로 할까? 내 손으로 할까?’ 결국 이 질문이에요.
그래서 오늘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뭐냐면,
내 손에서 누구의 손으로 주권을 넘겨야 됩니까?
하나님의 손으로 주권을 넘겨야 돼요.
이게 매일매일 내 일상에서 치열하게 올라오는 싸움입니다.
◑7:3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만 명이었더라’
이에 돌아간 백성이 2만 2천명이면, 남은 자가 1만 명입니까?
2/3가 돌아가버린 거예요. 이건 분위기상 파장이에요.
예를 들어서 3만 2천 명이 있다가, 1만 명이 가버려도, 이건 게임이 끝난건데
많은 쪽(2만 2천)이 가버렸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의 돌아간 이유, 그 기준이 뭡니까?
‘두려워 떠는 자들’이에요. :3
자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어요.
신20:8에 ‘책임자들은 또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두려워서 마음이 허약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그의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낙심될까 하노라 하고’
이 ‘절망, 낙심’은, 전염병과 같아서, 의외로 공동체를 쉽게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렵거든, 떨리거든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7:3
그런데 거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3만 2천 명 중에, 2만 2천 명이 가버렸어요.
그리고 남은 백성들은 1만명 뿐이에요.
안 그래도 지금 적 미디안은 13만 5천명이 골짜기에 진을 치고,
언제라도 덤벼들 기세로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제 전쟁은 하나 마나죠.
이스라엘은 ‘자, 이제 다 끝났다. 뭐 죽으라는 얘기지...’ 그랬을 거 아니에요?
우리도 어떤 일에 급급하게 떠밀리다 보면,
이게 뭐 조금 여지가 생겨도 희망을 겨우 끌어올릴까 말까 한데,
더 곤두박질 칠 때가 있습니다. 업친데 덮친다 그러죠. 그런 경우가 종종 있어요.
그래서 아주 내 마음을 더 좌절시키는 일들이.. 그러니까 안 좋은 일은 쌍둥이로 와요.
항상 같이 와요.
◑7:4 ‘여호와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 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이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너와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면 그는 가지 말 것이니라 하신지라’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하나님은 아직도 이스라엘 군대가 많대요.
지금 1만 명이 남았는데, 아직도 많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여기서 일관된 맥락은 뭡니까?
약한 쪽, 적은 쪽을 택하시기로 작정하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시험을 하세요.
성경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아주 이상한 시험을 하세요.
‘이 남은 병력들을 데리고 다 (하롯 샘 :1) 물가로 가서 물을 마시게 해라.
그런데 물을 마실 때 두 종류가 나누어질 것이다.
그래서 어느 쪽이든, 내가 결정해서 너를 따르도록 하는 사람을 데리고 전쟁터로 나가라’
‘그리고 내가 집으로 돌려보낼 사람들을 지목할 때는, 그들과는 전쟁터로 가지 마라’
이렇게 이제 하나님이 방침을 정했어요. 기준을 정했어요.
하나님이 기준을 정해주셨어요.
이게 이제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기드온도 모르고, 다른 병사들도 몰라요.
그리고 이제 전부 1만 명이 물가로 가서 지금 물을 마십니다.
◑7:5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 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개가 핥는 것 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들을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누구든지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도 그와 같이 하라 하시더니
6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 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
1만명 중에 일부는 물을 손으로 떠서 마신 거예요.
그 인원을 세어보니까 이게 3백 명이에요.
그래서 흔히들 이 부분에 제목 붙이기를 ‘기드온과 삼백용사’ 라는 이름을 붙여줘요.
그 해석의 근거가 뭐냐? 이렇게 손에 담아서 물을 핥아먹을 때,
군인답게 좌우에, 적들을 경계하면서 살피면서 보았기 때문에,
전쟁에 적임자라 그 말이에요.
그리고 땅바닥에 엎드려 물에 직접 입을 대고 먹는 병사들은, 경계심도 없고 부적격자다...
그래서 나머지를 돌려보냈다 ... 이런 해석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해석은 굉장히 알레고리칼한 해석이고, 일단 성경에 뒷받침이 없어요.
그거는 독자들이 풍부한 상상력에 근거해서 해석을 하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이 해석의 기초를, 어디서 기초해야 되는가 하면, 성경에서 기초를 해야 돼요.
성경은 계속 일관되게 지금 뭐라고 하나님이 설명하고 있죠?
‘수가 너무 많은 즉’
그럼 하나님이 택하고자 하는 수는 적은 쪽이에요.
그러니까, 반대로 3백명이 물을 엎드려 핥아 먹었고,
나머지 9천 7백명이 물을 손으로 떠서 먹었다 해도,
하나님은 물을 엎드려 핥아 먹은 사람들 3백명을 택하셨을 것이다.. 라는 거죠.
하나님이 이렇게 구분하시는 목적은, "숫자가 작은 쪽을 선택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지,
지금 그들의 ‘군인으로서의 자세, 정신 상태’들을 고려해서, 정예군을 골라내시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손에, 이 최종적 승리가 있다는 것을 증명토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의 손에 승리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믿습니까?
※그래서 이런 관점으로 해석할 경우
3백 용사가 '물을 손으로 떠서 주위를 살피며 경계하며 먹었다'는 것은..
겁쟁이 행동으로 해석됩니다. 하나님이 그런 '겁쟁이들'도 들어쓰신다는 거죠.
실제로 요세푸스 같은 사람이 그렇게 해석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앞서 돌아간 2만 2천 명과, 또 9천 7백명이 돌아가요.
그러면 1만명에서 300명만 남은 거에요.
그러면 1만명 중에 9,700명이 집으로 돌아간 거예요.
그러면 그 돌아간 사람들은, 정말 졸장부 같은 인물들이고, 불신앙적인 태도를 가진 걸까요?
그것도 아니라는 거죠.
우리는, 이것을 조금 넓은 하나님의 섭리에서, 그 사람들의 역할을 생각해 봐야 됩니다.
그 사람들은 전쟁을 위해서 돌아간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고 여겨지겠지만... 생각을 해보세요.
결과론적으로 이 전쟁은 하나님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그러면 이 전쟁은, 병력의 숫자나 군대의 용감함에 있지 않았다는 말은,
누가 제일 확실히 증거할 수 있을까요? 돌아간 9천7백명.. 그들이 증거할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이 위대한 승리에 뭐가 돼요?
증인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우리는 크게 잘못 한 것 없는데,
줄을 잘못 서서 집으로 돌아왔다? 줄만 잘 섰으면, 우리도 3백용사처럼 될 수 있었는데...
앞서 두려워서 집에 돌아간 2만2천명은, 이렇게 말하기 힘들겠죠. :3)
하나님 안에서는 쓸데없는 인물도 없고, 쓸데없는 인물도 없어요.
다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도마의 의심도 하나님이 사용하셨어요.
하나님의 주권을 믿어야 돼요.
당장 불행해 보이고 슬퍼 보이는 일들이,
영원히 불행해지고 영원히 슬퍼보이는 일이 없어요.
오히려 그들이 나중에, 정말 이 전쟁의 승리야말로
하나님의 위대한 주권과 능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제일 강력하게 증언할 사람이.. 그 사람들입니다. 믿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은, 앞으로 (다음 주부터) 격렬하게 벌어질 전쟁의 원리를
우리에게 던지시는 거죠...
◑7:7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
하며 미디안을 네 손에 넘겨 주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자기의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
하나님은 이 3백명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겠다고 승리를 이루겠다고 선언, 선포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선언과 하나님의 선포가 결국 답이에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삶의 결국 궁극적인 답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갖춰야 될 절대적 요소가 있어요. 그 절대적 요.소가 뭔지 아세요?
믿음의 역사입니다...
▲풍랑이는 바다에, 밤 사경에, 풍랑 속에 헤메는 제자들에게
저쪽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형편을 아시고, 물 위를 걸어서 구하러 오세요.
이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유령으로 귀신으로 이해했습니다. ‘귀신이다!’
‘얘들아,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때는 야단을 안 쳐요. 안심을 시켜요.
그러면 제자들이 ‘어이 깜짝이야, 선생님이셨군요!’ 이래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이때 베드로가 ‘정말 선생님이 맞다면, 나를 명하사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한번 해보십시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질문의 수준에 맞추어서 ‘걸어 와봐라!’
그래서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서, 물 위에서 발걸음을 한 발씩 떼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바람은 휘이잉 소리를 내며 세차게 불고 있어요?
베드로 물 위를 걸어서 갔어요, 안 갔어요?
갔어요. 물 위를 걸어서 갔어요!
성경에 보면 ‘바람을 보고’
물 위를 걸어가면서도.. 바람은 불고 있었다는 얘기예요. *요즘 말로 초속 40노트 쯤 세게
그런데 갑자기 우리의 신앙에 흔한 증상처럼,
예수님이 ‘오라’는 말씀을 의지해서 가다가,
갑자기 ‘풍랑’이라는 현실적 상황이 베드로를 덮어버렸어요.
말씀을 의지하던 베드로의 신앙을, 믿음을, 바람과 풍랑과 파도가 덮어버렸어요.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마14:30
그런데 예수님이 건져 올리십니다. 그때 꾸지람을 해요. 그때 꾸지람한 내용이 뭡죠?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마14:31
결국 이 라인으로 우리를 밀어넣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그래서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베드로 안에서 끓어오르는 게.. 믿음이 아니에요.
그 믿음은 결국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하느냐, 안 하느냐?’의 싸움이에요.
우리의 시선이 예수님이 아닌 세상의 풍파(환경)로 향할 때 빠지게 되지만,
그때 주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믿음이 연약한 우리를 붙잡아 주십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있다면, 베드로처럼 시도하라는 거죠.
물에 빠지면 어떻합니까? 주님이 붙잡아 주십니다. 건쳐내 주십니다.
시도 안 하는게 믿음이 아니고, 시도하는 게 믿음입니다. 베드로처럼, 기드온처럼!)
▲성경에서 칭찬받았던 교회 중에 여러 교회가 있었겠지만,
특별히 데살로니가교회를 주목하셔야 됩니다.
성경에 보면 ‘큰 환난 속에 있었다’고 그랬어요. 살전1:6
그런데 이 교회는 오고 오는 시대에, 3가지 강력한 사도바울의 칭찬을 받습니다.
살전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1) 한 가지가 ‘소망의 인내’를 칭찬했습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두 팔을 늘어뜨리지 않고,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하는.. 사도바울은 그 소망의 인내를 칭찬했습니다.
2) 또 한 가지 칭찬을 하는데 자기들도 지금 형편이 어려워요.
데살로니가 교회도 지금 환란 속에 있기 때문에 힘들어요.
그런데 사랑의 수고가 있는 교회라고 칭찬합니다.
어렵지만, 빠듯하지만, 자기도 살기 힘들지만,
환난을 당한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보냈어요. 나누었어요. 믿습니까?
3) 또 한 가지 칭찬이 뭐예요? 믿음의 역사를 칭찬했어요.
결국 소망의 인내, 사랑의 수고가 뭐에서 기반된 겁니까?
믿음의 역사예요.
믿음이라는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으쌰으쌰 해가지고
자의적으로 자발적으로 끌어올린 믿음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그 믿음을 얘기합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오늘 2부예배 성가대가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찬양을 불렀어요.
그 찬양을 부르는데 제가 은혜 받았어요.
이 설교와 주제가 일치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지금 3부 예배 때 엔딩송을 좀 바꿔야 되겠습니다.
지금 다 일어나셔서 그 찬양을 같이 하십시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오늘 사사기 7장의 말씀을 통해서, 모든 인생의 주권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내 손의 삶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믿음과 순종의 역사가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오래 기다려야 되고, 안 되면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되고
그래야 어떤 사는 길을 하나님이 열어주시고,
우리의 잘못을 회개하고 뉘우치고 반성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우리가 일본에게 36년 동안 억압 당 할 때도, 독립운동을 아무리 했지만
우리 힘으로 되었습니까? 하나도 안 되었습니다.
미국을 통해서 원자탄을 일본에 떨어뜨려서 하나님이 해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6. 25사변 때도 하나님이 세계의 나라를 불러들여 우리의 문제를,
이 만큼의 자유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의 뜻을 찾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잘못된 것만 회개하면 길이 열립니다.
“네가 형통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면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앞날에
아무도 막을 자가 없이 형통할 줄로 믿습니다.
♣무사의 칼과 하나님의 폭풍우
오래 전에 일본에 훌륭한 무사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는 선교사들에 의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와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폭풍우에 배는 금방이라도 파선될 위기에 있었습니다.
아내가 두려워 떨고 있을 때
그는 갑자기 갖고 있던 칼을 빼어 들고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이 칼이 무섭소?”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그 칼이 사랑하는 당신 손에 있는데 왜 무섭겠소.
그런데 이 상황에 왜 갑자기 칼을 빼어 나에게 보여 주시는 거요?”
무사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이 칼이 무섭지 않듯이
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이 폭풍우가 무섭지 않소.
이 칼이 내 손에 있듯이 이 폭풍우는 하나님의 손에 있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절대로 우리를 해치지 않으실 거요. 두려워하지 마시오.”
그 말이 끝나자 거짓말처럼 폭풍우는 잠잠해지고 미풍이 불어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 폭풍우가 잠잠해지지 않았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것이니까요. 폭풍 속에서도!
♣<아침은 늘 눈부시다>라는 책 속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도사님의 남편은 농협대학의 교수로 가르치시면서
신실한 믿음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사십이 넘으면서 직장암의 발병, 수술을 받고 치료를 받았지만,
다시 재발해서 결국은 죽음의 날이 가까워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전도사님의 남편은 자기의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지만
환자들을 많이 사랑했습니다. 암이 발병되기 전에도, 평소에 전도를 많이 했습니다.
자기가 아팠기 때문에, 자기와 같이 아픔을 겪는 다른 형제들을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
'동병상련'이라는 말 그대로였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6개월 전 남편이 하루는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여보, 나 하나 살아보겠다고, 이 기도원 저 기도원 다니고
이사람 저사람 찾아다니면서 안수 받을 게 아니라, 죽기 전에 전도를 해야겠어.
그래도 전도하다가 죽으면 순교가 아니냐구."
그때 아내 전도사님은 웃었습니다. 당시는 아직 전도사님이 아닐 때..
"당신이 전도를 하다니요? 전도도 건강할 때 이야기지,
지금 그 몸을 해 가지고 어떻게 전도를 한다고 그래요,
당신은 누가 보아도 죽어 가는 암환자인데...
해골같이 비쩍 마른 당신이 어디서 어떻게 예수를 전한다는 말이에요?"
남편의 제안은 믿음 없는 나로서는 터무니없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남편이 오히려 딱하게 여겨졌습니다.
"암이 낫게 되면 그때는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세요.
하지만 그 몸으로는 절대로 안돼요. 오히려 하나님 영광만 가린다고요.
‘예수 믿는 사람이 기도했는데도 왜 낫지 않느냐?’고 하면 뭐라고 할래요?
한 발짝도 떼기 힘든 당신이, 어떻게 전도를 한단 말이에요?
여보, 하나님의 은혜로 암이 나으면 그때 우리 전국 방방곡곡을 함께 다니면서
간증하고 전도합시다. 그때까지는 안돼요."
전도사님의 말은 무척이나 논리적으로 들렸겠지만
남편의 신앙은 논리를 떠나 있었습니다.
"전도가 뭐 내가 할 수 있어서 하는 것인 줄 알아?
전도는 내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구,
병들었으면 병든 이 모습 이대로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