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하나님을 찾는 사람3 - 소금과 빛의 사람 (마5:13-16) Youtube
◈소금과 빛의 사람 마5:13-16 2026.08.16. [산상수훈 3강]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하나님을 찾는 사람” 세 번째 시간 <소금과 빛의 사람>입니다.
자 무리 가운데서 제자들이 산 위로 올라와 예수님 앞에 앉았습니다.
예수님이 그 제자들의 눈을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부터 너희는 소금이다. 오늘부터 너희는 빛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대로 들으셨습니까?
예수님이 ‘오늘부터 너희를 소금으로 만들 거다, 오늘부터 너희를 빛으로 만들 거다’
이렇게 미래형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소금이 되어야 한다, 빛이 되어야 한다’ 명령형으로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두고 봐라 기어이 너희를 소금으로, 빛으로 언젠가는 만들 거다’ 약속형으로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담백한 현재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부터 너희는 소금이다 오늘부터 너희는 빛이다!’
라고 존재 선언을 하신 겁니다. *현재는 계속의 뜻을 담고 있음
제자들은 굉장히 당황스럽죠. 만들어 주시는 것도 아니고,
언젠가는 되겠다고 시간적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산 위로 올라와서, 예수님 좋아서 올라왔는데,
준비도 안 된 그들을 향해 (미안하다며, 당황스럽겠지만 이 말은 해야겠다)
‘오늘부터 너희는 소금이다 오늘부터 너희는 빛이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제자들은... ‘소금으로 살 거냐, 말 거냐, 빛이냐 아니냐?’ 따질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너희는 소금이다, 빛이다’ 말씀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의 선택은 이제 하나밖에 없습니다.
‘좋은 소금이 되느냐, 나쁜 소금이 되느냐,
빛나는 빛이 되느냐, 숨겨진 빛이 되느냐?’
그건 우리의 몫으로 살아내야 할 책임입니다.
▲제가 목사안수 시취위원장을 한 20년 이상 하고 있는데, *고시 위원장
목사안수를 받겠다고 논문도 쓰고, 여러 가지를 하고
마지막 면접을 할 때, 제가 늘 이야기하는 게 있습니다.
‘이제 이 시취를 통과하고 목사가 되면, 평생 목사로 살아야 합니다.
싫다고 목사 아닐 수가 없습니다. 잘 생각하고 안수받아야 됩니다.
평생 목사가 되지만, 그때부터 앞에 형용사는 그대들이 만들어 가야 합니다.
좋은 목사냐, 나쁜 목사냐? 신실한 목사냐, 타락한 목사냐?
그건 우리의 몫으로 남겨진 책임입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앞에 제자들이 나왔습니다. 그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시는 메시지가 이겁니다.
‘너희는 오늘부터 죽을 때까지 제자다.
그러나 좋은 제자가 될지, 그렇지 않은 제자가 될지는 너희의 삶으로 증명해내라.
너희는 소금이다! 원해도 소금, 안 원해도 소금이다.
원해도 빛, 안 원해도 빛이다. 오늘부터 너희는 빛이요. 소금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소금다운 소금, 빛다운 빛, 그건 너희가 살아내야 할 몫이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이 ‘너희는 소금이다, 빛이다’라고 현재형으로 말씀하신 다음에,
마지막 16절에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명령형입니다.
그래서 소금과 빛인 것은.. 우리에게 주신 존재 선언이고,
맛을 내는 소금, 빛다운 빛으로 사는 것은.. 우리가 살아내야 할 명령이라는 것이죠.
이게 오늘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마치 이런 것과 같죠. 미국에 이민을 와서 오매불망 미국 시민권을 따는 것,
모든 이민자들의 바램 아니겠습니까?
드디어 시험에 통과해서 미국 시민권을 받는 날,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오늘부터 United States of America, USA의 시민입니다."
‘시민이 될 겁니다’가 아닙니다. ‘오늘부터 시민입니다!’
그렇게 그날부터 시민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모범 시민이 되는 건, 자기의 삶으로 살아내야 되는 거지요.
‘오늘부터 너는 내 제자다.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희는 내 제자로 살아야 한다.
신실한 제자가 되는 것은 너희의 몫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자 그렇다면 좋은 소금으로 산다는 것, 그리고 좋은 빛으로 산다는 것,
이건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무슨 의미인가?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먼저 <소금>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마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예수님 당시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소금이 그 당시에는 안 쓰이는 데가 있었겠습니까만,
수렴해서 크게 네 가지로 보면, 우리가 다 잘 아는 것처럼
-음식을 만들 때 맛을 내는 역할
-부패를 막는 부패방지의 방부제의 역할
-제사를 지낼 때에 제사장이 제물을 각을 뜨고 거기에 소금을 넣는 제사용
-그리고 너와 나의 언약 체결을 할 때, 소금 언약으로, 언약 체결의 도구로 사용하는 등이죠.
그러니까 크게는 맛을 내고, 그 다음에 부패를 방지하고,
재물에 함께 드리는 언약의 도구로 사용되어졌던 기능이 있었죠.
소금이 사용되는 데는, 그것보다 기능은 훨씬 많아요.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이 본문을 읽다 보면,
소금인 이런 기능, ‘이런 역할을 해야 되니까 이렇게 살아라’ 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는 소금이다’ 한 가지만 강조하고 계셔요.
기능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너희는 맛을 잃어버리지 않는 소금이 되라’
이걸 강조하고 계셔요.
소금인데 한 가지 너희가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맛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된다’
왜 그럴까요?
맛만 안 잃어버리면, 음식 만드는 사람도 찾을 것이고,
그리고 부패가 방지되어야 될 때도 찾을 것이고,
제사장도 찾을 것이고, 언약 체결할 때도 찾을 것이고,
온갖 곳에서 필요할 때마다 ‘맛을 잃어버리지 않는 소금’은 저절로 찾게 되어 있기 때문이죠.
‘그 소금은 어디를 가도 밟히지 않고 환영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맛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된다’
이게 예수님의 오늘 소금이라고 말하는 데, 제일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늘 소금의 맛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5:13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이 뭘 강조하는 거죠? 소금의 짠 맛입니다.
그러면 왜 소금이 맛을 잃어버릴 수 있나요?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예수님 당시에는 굉장히 흔한 일이였습니다.
당시에 소금은 대부분 어디에서 왔냐면 사해 남서쪽에 있는 에돔산에서
대부분 채취해온 소금 덩어리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해에서도 소금을 채취했지만, 그건 아주 고급 소금이고,
보통 시중에서 쓰는 소금은 사해 근처 산에서 채취했죠.
이게 양이 많고 실용적인 상업용 소금이었습니다. *암염
요즘도 소금 광산이 있고, 산에서 소금을 채취하는 나라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소금 덩어리(암염)는, 소금만 있는 게 아니라 안에 석회가 많아요.
그리고 거기 안에는 다른 광물질이 많아요. 그리고 캐내왔기 때문에 흙덩어리도 많아요.
그러니까 소금이 있는데, 흙이 있고 석회가 있고 광물질들도 포함되어져 있는 거죠.
그런데 이 에돔산에서 채취한 이 소금덩어리는, 습기나 물에 굉장히 약해서
물에 노출되거나 습한 곳에 두면, 나머지는 그대로 있는데.. 소금기가 다 빠져버립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냐면, 보기에는 영락 없이 소금 그대로인데,
맛을 보면 소금이 사라져버린... ‘맛 없는 소금’이 돼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이제 염기가 빠져나간 줄도 모르고, 시장통에 유통되어져서
‘야 소금 이거 참 보기 좋다, 쓸만하다’ 해서 사와서 음식에 넣어보니까,
음식은 하나도 맛이 없고, 생선도 상해 버리고,
‘아 속았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그러면 화가 나서 그 소금을 문을 열고 밖에 던져버리면,
‘길에 밟히는 소금’이 되는 거죠. 그런 일들이 당시에 허다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치 복불복 처럼, 어떤 소금은 나머지 불순물이 다 빠져나가고
석회도 다 정제되어서 나가고, 오로지 소금 안에 있는 소금만 남아서
진짜 소금으로 유통되는 게 있는가 하면,
있어야 할 소금기는 다 빠져나가 버리고, 불필요한 것만 소금의 모양을 하고 유통되는 게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맛을 잃은 소금’이라고 말씀할 때는
제자들은 단번에 알아듣고, 심지어 어떤 제자는 그날 아침에도 그 소금에 속아가지고
밖에 던져버리고 씩씩대면서 올라왔는지도 모르지요.
‘맛 없는 소금’을 먹어본 적도 많고, 속고 산 적도 많았던 제자들 앞에
예수님의 이 비유는, 너무 피부에 와 닿는 비유였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아디다스인 줄 알고 사왔는데
집에 와서 자세히보니 아다다스 라는 거죠.
우리도 살다 보면, 가짜인 줄 알고 샀다면 모르겠는데,
진짜인 줄 알고, 제 값을 주고 샀는데, ‘아다다스’면 화가 나죠.
그리고 상표는 ‘아디다스’가 맞는데, 품질이 현저히 떨어지면.. 속았구나 하고 화가 나죠.
▲우리도, 예수님 믿을 때에 다 죄도 있고, 부족한 단점도 있고, 약한 부분도 있고,
그렇지만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가지고
우리가 또 예수님도 닮고 있고... 다 시작은 그렇잖아요.
-그런데 그 두 종류의 소금 중의 한 소금은,
시간이 갈수록 소금만 남고, 불순물이 없어지고, 죄도 없어지고, 중독도 없어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삶도 없어지고, 점점 정결하게 정결하게 되어져서
진짜 맛깔나는 소금이 되어가는 소금이 있고,
-또 ‘맛을 잃은 소금’이 있어서,
똑같이 시작했으나 버려야 할 것은 움켜쥐고,
석 흙덩어리나 불순물의 광물질은 그대로 있는데,
시간이 갈수록 겉모양만 남고, 안에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예수의 생명은 사라져버린다면..
‘소금같이 생긴, 소금 아닌 소금’인 거죠.
이게 오늘날에도 두 종류가 유통되고 있다는 겁니다.
제가 지금 뭘 말씀드리냐면, 시작은 똑같았다는 거예요.
다 부족하고, 또 은혜로 버무려져서, 시작은 다 미약하게 출발했지만,
-하나는 멋진 맛이 나는 소금이 되고,
-하나는 아무 데도 쓸데 없는.. 길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는 흙덩어리가 되어버리는 것,
무슨 차이가 있죠?
시작이 다른 게 아니라, 끝이 달라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 놓고 ‘너희는 오늘부터 소금이다’
그리고 ‘너희를 세상으로 내보낼 거다’ 그랬을 때,
‘너희는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되지 말라. 흙덩어리가 되지 말고 소금덩어리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뭐냐면, 지금 저 산 밑에 시장에,
소금의 모양은 하고 있으나, 맛은 다 잃어버린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누구냐면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었다는 거예요.
누가 봐도 멋진 소금의 옷을 입고, 누가 봐도 멋진 하나님의 토라를 읊고,
누가 봐도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 같고,
사거리 가장 붐비는 곳에서 기도의 목소리가 우렁찬 것 같은데,
그게 전부 석회 덩어리, 광물질 덩어리, 흙 덩어리지,
그 안에 소금기가 하나도 없는.. 맛을 잃어버린 소금...
‘그 세상으로 너희는 내려가서, 그들을 당황시키는 사람이 되라!’
'소금처럼 생긴 사람이 아니라, 너희를 경험했을 때
너희의 맛도, 그들이 경험할 수 있는 짠맛을 내어, 거짓된 소금을 당황시키라'는 거예요.
▲성경에서 이런 소금의 모양만 있고, 소금의 맛을 잃어버린 예수님의 비유가 많이 나오죠.
바리새인들을 향해 하신 말씀이 뭡니까?
‘저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자로다’ 딤후3:5
같은 산상설교의 뒷부분 7장으로 가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들은 큰 소리로 주여! 주여! 하고 기도의 모양은 있으나,
기도의 능력은 하나도 안 믿는 자들이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서,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제일 멀어진 사람들이다.
짠맛은 온데간데 없고 모양(외모)만 점점 더 갖추어져 가는 사람이다.'
예수 믿고 10년 되고, 20년 되고, 30년 되면,
이제는 모르는 찬양이 없고, 기도를 해도 유창하게 하는데,
심지어 성경구절을 외우는 모양도 점점점 갖추어 가는데,
그 안에 주님이 진짜 찾으시는 그러한 짠맛이 있는가 했을 때,
그 맛을 잃어버린 성도들이 많이 있음을 고발하고 있는 거죠.
자 이 소금의 비유처럼, 모양은 똑같이 이렇게 예배당에 앉았는데
-갈수록 점점 진짜 소금이 되어가는 사람,
-갈수록 점점 흙덩어리가 되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심각하게 여기서 여러분에게 한번 질문을 드려봅니다.
지금까지 오늘 이 자리에 앉아있는 여러분은, 여러분 속에 어느 성분이 더 많습니까?
무엇이 되어가고 있습니까?
-나는 시간이 갈수록, 더 염분이 많아지는 ‘소금의 사람’으로 빚어지고 있나요?
-아니면 점점점 외모는 멋스러워지는데... 소금을 닮은 ‘흰 석회덩어리’가 되고 있나요?
'당연히 예수님이 너희는 소금이라고 했으니, 나는 소금이겠지...
소금이면 당연히 짠맛이 있겠지...' 이러고 살아가는 게 아니라,
내 속에 있었던 염분이 빠져나간 건 아닌지...
분명히 염분이 있었는데, 그건 벌써 다 녹아져 없어진 것은 아닌지...
모양만 갖추고 능력은 상실되고,
기도는 하지만 기도의 능력은 믿지 않고,
입술로는 가까우나 마음은 하나님께 멀어진 그런 모습이라면,
우리는 누가 뭐래도 소금같이 생긴 석회 덩어리로 변하고 있는 겁니다.
저는 강중침 모든 권속들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더 소금이 되어져 가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소금의 네 가지 기능 외우지 마라. 소금이 맛만 있으면 요리사가 안 찾겠냐?
소금이 맛만 있으면, 고기를 잡아온 어부들이 안 찾겠느냐?
소금이 맛만 있으면 제사장이 제사 지낼 때, 너희를 안 가져가겠느냐?
소금이 제 맛을 내는데, 사람들이 언약을 맺을 때 너희를 안 찾겠느냐?’ 주1)
이게 소금인데.. ‘제대로 된 맛을 내는 소금이 되라’는 게 예수님 말씀의 요지이고,
다음은 빛인데.. ‘빛을 드러내고 숨기지 말라’는게 요지입니다.
◑2.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고,
이건 명령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를 말하는 겁니다.
16절에 ‘빛을 비추라’ 라고 하셨던 것은 명령입니다.
빛을 비추는 건 내가 좋으니까 비추는 게 아니라 순종인 겁니다.
그러니까 비추면 칭찬받고, 안 비추면 책망 받습니다. 선택사항 아닙니다.
그래서 빛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매우 부담스럽지만
어디를 가든지 간에 사람 눈에 잘 띄는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이들 부르는 찬송에 ‘이 작은 나의 빛, 비추게 할 테야’가 있죠.
This little light of mine, I gonna let it shine
Everyday I gonna let my little light shine
'빛을 감추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됫박)로 덮어두지 말고, 등잔대 위에 올려놓아서
집안 사람들에게 비추어,
그들이 어디로 가야 될지 모를 때,
흑암에 있는 백성들이 너 때문에 길을 알고, 예수님을 볼 수 있도록 하라! .. 이 말이지요.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절에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자, 여기에 두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 한 빛은.. 집안을 비추기 때문에, 등불을 켜서 집안을 비출 만한 등잔대 위에,
등경 위에 세워지는 빛이고,
- 또 하나의 빛은.. 집안을 비추는 게 아니라 온 동네 도시를 비추기 위해
동네 제일 높은 산 위에서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늘 말씀을 하시면서 참 재밌는 장면이 나와요.
지금 제자들이 어디에 서 있습니까? 산 위에 올라와 있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설교가 무슨 설교예요? 산상설교죠.
지금 예수님 앞에 제자들이, 예수님은 앉아계시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서있는 사람, 앉아있는 사람들이 있었겠죠.
그들이 등불입니다.
그들이 고개를 돌려 보면, 산 아래 동네가 휜히 내려다보이는 겁니다.
아마 산아래 동네에서도, 산위 경사지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육안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너희가 산 위에서 비추는 빛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셔요.
그리고 산 밑에 있는 무리들이 어디로 가야 될지 모를 때,
산 위에서 너희가 비추는 빛을 보고, 그들이 산 위로 올라와서, 나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
이게 제자들이 빛을 비춰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서 빛이 안 나오면, 산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어두워서 어디로 가야 될지 모르다가,
더 산에서 멀어져서 하나님을 영영 떠나게 되겠죠.
‘사람들이 너희를 보고, 산 위로 올라올 수 있도록, 너희는 빛이 되어야 된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이 빛은, 누구의 빛인가요?
제자들이 만들어내는 빛입니까?
아니면 그들 앞에 서 있는 예수님의 빛이, 제자들을 반사해서 비춰지는 겁니까?
빛은.. 누가 뭐래도 이 세상 유일한 빛인 예수님 아닙니까?
요1장에 보면 사람들이 다 400년 만에 등장한 침례 요한을 보고
‘저는 빛이다. 흑암의 400년을 뚫고 이 땅에 온 빛이라’고 그랬을 때,
침례 요한은 손을 내저으면서 ‘빛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참 빛!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있는 빛이 있으니 그가 예수 그리스도다’ 라고 하죠. 요1:9
그럼 사람들이 묻습니다. ‘그럼 너는 누군데?’
요한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요1:8
‘우리는 빛(발광체)이 아니고, 예수님의 빛을 증거하기 위해서 비추는 빛이다(반사체다)’
이 말이죠.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6
여러분,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빛이신 예수님을 직접 볼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예수 믿는 사람다운 착한 행실이 빛이 되어서,
여러분을 통해서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거죠.
▲옛날에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사극 드라마 중에 [해를 품은 달]이 있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러닝하면서 열심히 봤던 사극입니다.
그때 제가 14키로를 뺐던 놀라운 드라마입니다.
드라마가 재미없으면 살이 조금밖에 안 빠져요. (조금 밖에 안 뛰어요)
재미있으면 밥 먹고 가서 뛰고, 아이패드 놓고 보면서,
또 보고 왔는데 다음 편이 궁금해가지고 또 뛰면서 보고...
그래서 드라마가 재밌으면 살이 잘 빠집니다.
※[해를 품은 달]
조선시대 가상의 왕 이훤과 비밀에 싸인 무녀 월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 궁중 로맨스.
그 드라마에서 해와 달이 나오죠.
해는 자체적으로 빛을 뿜어내는 발광체입니다.
달도 빛이 나지만, 자체적으로 빛을 비출 수 있는 능력이 없어
해를 반사해야만 비출 수 있는 반사체입니다.
달이 햇빛만 하겠습니까마는,
깜깜한 정월 대보름에 두둥실 하늘에 달 하나만 떠 있어서,
햇빛을 반사만 해도 밤길 어지간한 데는 길 잃어버리지 않고 걸어가게 만드는 게, 달입니다.
(참고로, 중동 지역의 달빛이 한국보다 밝게 느껴지는 이유는
대기의 건조함으로 인한 빛의 산란 감소와, 주변 환경의 암흑 효과 때문입니다.)
달은 자기 빛을 비추는 게 아니라 해를 품고,
해의 빛을 반사시켜, 그 빛을 우리가 보게 되는 거죠.
유명한 찰스 스펄전이 그래서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리스도는 햇님이고 교회는 달님이다”
그런 차원에서 예수님이 ‘너는 빛이다. 내가 앉았고 너희가 서 있고
산 아래에 있는 사람은 나를 볼 수 없으니
내가 너희를 통해서 비추는 이 빛을 너희는 반사시켜
그들도 이 빛 가운데로 산 위로 올라와 나 예수를 믿고
천국 백성되고 나를 따르는 제자가 되게 하여야 한다
내 빛이 너희에게 비쳐서 그들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헤매다가 영영 지옥으로 가게 되고 만다.
이와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저희로 너희의 착한 빛나는 행실을 보고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정체성이 분명해야 합니다.
내가 잘난, 내가 빛나고, 내가 알아가지고 성공하고, 내가 못하는 게 없어서
나를 빛내는 존재가 되는 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빛을 못 만듭니다.
여러분에게서 나가야 할 빛은, 여러분의 성공을 자랑하는 여러분의 빛이 아니라
내 속에 역사하신 그리스도를 비추는 반사체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항상 ‘해를 품은 달’이라는 것을,
‘내게 나가는 빛은 언제나 해를 반사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빛을 비추는 것은 명령이요, 사명입니다.
선택이 아니고 무조건 비추어야 하기 때문에
이 중에 단 한 분도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하는 그 빛을 숨겨서,
말(됫박) 안에 숨겨두는 분이 없어야 합니다.
마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됫박)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숨기면서 살지 마십시오.
산 위에 가장 높은 곳에서 온 동네를 비추는 그런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직장 동료가 여러분하고 같은 직장 옆 테이블에 앉은 지 10년인데도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 왜요? 꼭꼭 숨겨 두니까.
아는 순간 피해는 내가 다 보고,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누구에게도 나는 을이 되고,
그것 때문에 불편해서, 이제는 내가 성질대로 못하고...
‘예수 믿는 사람이 그렇게 사냐?’ 하면서, 안 들어도 될 욕 들을까봐,
10년째 말 아래, 됫박 아래 숨겨두고 직장 갔다 왔다가
오늘 예배 때 잠시 나온 빛들 축도 마치고 나갈 때는 꼭꼭 덮어두고
나가다가 아는 사람 만나면 ‘어, 자네 어디 갔다 와? 자네 교회 다녀?’
‘아니, 투썸플레이스 갔다 오는 거야’
‘어, 교회에서 나오는 것 같은데?’
‘엘리베이터 타고 나온 거야’
마치 큰 범죄가 들킨 것처럼 둘러대면서,
‘에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내가 자네 맞나 싶어서 봤는데,
교회 예배당에서 나오던데?’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우리 집사람 내가 한 번 기분 좋게 해주려고 온 거야’
우리 동네에 매일 퇴근길에 들르는 편의점, 10년째 드나드는데,
그 집 주인도, 그 집 아르바이트생도,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거 말하지 않는 이상,
내가 크리스천인줄 모르고,
내가 끼니 때가 되면 가서 밥을 먹는 단골 식당 주인도,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거 절대 모르고...
왜요? 그들이 알면, 내가 젠틀하게 대해줘야 되니까,
잔소리도 못 하고, 팁이라도 하나 더 줘야 되니까...
교사와 교수로 내가 수많은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학생 그 누구도 내가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내가 거래하는 고객이 10년째 단골 고객인데도
내가 크리스천인지를 모르고... 왜요?
알려지는 순간, 불편하고..
알려지는 순간, 정직해야 되고..
알려지는 순간, 아무 이유도 없이 그는 갑이 되고 나는 을이 되어 살아야 하니,
숨기는 게 제일 유리한 방법이겠죠.
그러나 주님은, 드러내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죠. *주제
▲벌써 오래된 얘기입니다는, 설교말씀 준비하다 보니 문득 떠오릅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주일이 되었는데도
그때 제가 있던 부대가 굉장히 좀 특별한 기간을 보내고 있었서인지,
주일이 되면 종교 행사 참여의 권리가 있는데,
몇 주째 종교 행사에 못 가고, 작업만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군인도 작업할 때 작업해야 되고, 더 열심히 해야 되지만,
주일 날 교회를 빠질 수가 없죠.
절에 다니고 불자나, 성당을 가는 천주교인은 거기에 대한 불만이 없을지 몰라도,
교회를 다니는 저는, 교회를 못 가게 한다는 것은 안 될 것 같아서,
모든 부대의 크리스찬들 명단들을 제가 다 적어서,
그 당시에 총책임을 맡고 있었던 작전장교실에 들어갔습니다.
주일날 아침에 ‘특공병장 최병락, 작전장교실 용무있어서 왔습니다.’
‘여차여차여차해서 지금 몇 주째 교회를 못 가고 있는데, 교회만 한 시간 보내주시고 오면,
두 배로 저희들이 일하겠습니다. 교회를 보내주십시오’
즉시 돌아오는 말이, ‘대가리 박아!’ 바로 그 자리에 머리를 박았습니다.
한 시간 넘는 시간 동안 머리를 박고, 온갖 수모의 말을 그분으로부터 들으면서
‘너만 예수 믿냐?’ 해서부터, 온갖 잔소리를 제게 다 퍼부었습니다.
그 마음도 이해가 되지만, 나중에 다시 ‘그래도 보내주셔야 합니다.
저희는 교회 갔다 와야 됩니다. 지금 교회 가야 되는 명단이 제 손에 있습니다...’
다음 주가 되면, 제가 또 찾아갑니다.
‘교회 보내주십시오 갔다와서 두 배로 다 열심히 할 겁니다.’
‘대가리 박아!’
그날도 그렇게 또 한 시간 이상 머리를 박고, 예배 참석도 못하고 내무반으로 돌아오는 길에
몇 주일 저를 지켜보던 소대장 중위가, 벌써 우리 부대에 온 지 2년이 되어가던 중위가
저를 따라오더니만, ‘최병장!’ 하고 불러요. 저를 데리고 구석으로 갑니다.
그가 느닷없이 제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나도 예수 믿는 사람인데, 지난 몇 주 동안 내가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예수 믿는다는 말을, 한 사람에게도 한 적이 없어서...
나는 대학 시절에 CCC 총순장까지 했던 사람인데,
너무너무 이 군대가 무서워서, 아직 내가 예수 믿는다는 말을 못했는데...’
그분은, 제가 그렇게 말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 괴로웠다는 거예요.
그분이 눈물을 글썽글썽이면서 제게 얘기합니다.
‘너무 미안하네.. 너무 미안하네...’
그 다음 주부터 그분이 변했습니다. 그분이 작전처장을 설득하기 시작하고,
그러고 난 뒤에 부대가 변화되어,
부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어떤 신우회 행사나, 종교 행사를 돕는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런 유사한 일들이 제게 많이 있었습니다.
세상에는, 자기의 삶의 편리와 괜히 드러냈다가 당할 불편함 때문에,
할 수만 있다면 예수 믿는 걸 숨기고, 말(됫박) 아래 숨겨 살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무리 예수의 빛이 찬란해도.. 숨긴 빛이 어떻게 드러납니까?
여러분 ‘어디를 가도 너의 빛을 비추라’고 하는 것은 청유형, 권유형이 아니라 명령형입니다.
하는 게 당연한 거고 안 하면 불순종이에요.
‘미안해, 나는 그거 못 해!’ 그거 불순종이에요.
선택이 아니고 예수를 믿었다면 빛인 겁니다. ‘너희는 세상에 빛이다!’
‘그리고 사람 앞에 비추어라’ 주님의 명령입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예수의 맛을 내고, 예수의 빛을 비추다 보면,
처음에는 여러분을 칭찬할 거예요.
달처럼 빛을 비추는 여러분을 보고는 *달빛은 성도
‘착하다, 사람이 저렇게 살아야 돼!’
‘와 예수 믿으니까 좀 화내야 되는데, 화를 안 내네?
말도 참 교양이 있어 태도도 굉장히 젠틀하고...’
처음에는 여러분의 달빛이 궁금해서 여러분을 칭찬하다가
나중에는 진짜 빛인 햇빛인 예수님을 궁금해하다가
예수님께 나와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햇빛인 예수님을,
교회와 성도가 달빛이 되어 어두운 세상을 비추어야 되는데
그 빛이 너무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빛을 힘있게 비추어도, 지금 그 빛을 보고 나올까 말까 한데
교회의 빛이 숨겨지고 희미해지니, 산 아래 세상 사람들이 갈 곳을 몰라 방황하다가
산 위로 올라오기는커녕, 산과 점점 멀어져서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은
과연 그들의 책임일까요? 빛을 잃어버린 우리의 책임일까요?
우리 강중침 성도만큼은 산 위에 빛이 되어서
‘아, 저 사람 보니 예수 믿고 싶다’ 하고는
산 위로 올라올 수 있는 사람이 많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여러분 주변에 집안을 밝히 비추는 등경 위의 빛이 되어주고
우리가 다 모인 우리 교회는 한 도시를 비추는 산위의 빛이 된다면
적어도 이 도시에는, 예수님 몰라서 지옥 가는 사람이 없고
산으로 올라와 그 빛의 본체이시 예수님 만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책을 읽다 보니, ‘방 안에 촛불 하나만 켜놓아도
그 방 안에 겨울날 그릇에 물이 얼지 않는다’ 그러더군요.
여러분 한 분이 욕심너무 내지 말고, 오늘부터 ‘나는 산 위의 빛이다’
한 걸음에 거기까지 다 가려고 하지 말고,
여러분이 비출 수 있는 부분부터 시작하십시오.
‘집안의 등잔 위에 등불’이라도 충분합니다.
여러분이 집안에서 예수 믿는 똑부러진 한 사람이 되면
그 예수 믿지 않는 집안도, 다 결국은 예수 앞으로 돌아와
그 생애가 얼어붙지 않을 것입니다.
한 사람, 한 교회만 제대로 자기의 빛을 비추어도.. 세상은 얼지 않는다는 겁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의 빛을 숨기지 말고 비추어서, 지금은 집안의 등불이지만
내일은 우리 도시 안의 등불이 되고, 모레는 대한민국의 등불이 되어서,
나아가 열방을 비추는 등불로 쓰임받는 저와 우리 교회 되기를 축원합니다.
..................................
♣성도가 세상에 쉽게 동화되는 이유
염전을 하시던 장로님의 이야기다.
어느 날, 장로님이 염전 일을 하다 실수로 소금 가마니를 바다에 빠뜨리셨다.
금방 건졌는데, 커다란 가마니 속 소금이 거의 다 녹아버려 있었다.
소금이 물에 잘 녹는 건 알았지만,
김장때 배추를 절이기 위해 소금을 물에 녹일 때면
물을 힘껏 휘젓고도 한참을 기다려야만 겨우 녹는데,
소금이 가득 찬 가마니를 바닷물에서 즉시 건졌는데도, 소금이 많이 녹아 없어져 있었다.
장로님은 매우 의아해했지만, 금방 이유를 깨달았다.
소금은 애초에 바다로부터 취한 것이기 때문에
담수에서와 달리, 바닷물에는 금세 녹아버린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다. 바다로부터 취한 소금은 순전하게 구별되었다가도,
바다를 만나면 금세 옛 모습으로 돌아가고 만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취한 존재다.
따라서 세상과 섞이기 시작하면 금세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만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의 깊음이 필요하다.
항상 세상의 유혹들을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자신을 살피지 않으면
자신의 구별됨을 순전하게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싸움터는 세상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의 빛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교회의 소금이다, 교회의 빛이다’가 아닙니다.
여기서 ‘교회’란 일차적으로 우리 성도 각자를 가리키며,
이차적으로 성도의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우리 각자의 미션(사명)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그 도시에 가로등 숫자는 점점 늘어가는데
도시는 밤에 점점 더 어두워간다면, 말이 안 됩니다.
신실한 지도자는,
교회에서 모임을 적게 가지더라도,
가급적 세상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성도들을 인도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을 교회에서 모임을 많이 가지도록 유도하면서,
세상에서 아무 영향력도 발휘 못하게 한다면
시대에 뒤떨어진 무능한 지도자가 되는 셈입니다.
♣빛을 원하는 세상
아프리카에서 일생을 선교에 헌신한 선교사님 돌아가셨다.
복음을 받고 예수를 믿게 된 주민들이
선교사의 묘지에 이렇게 비문을 새겨놓았다.
“당신이 올 때는 어두움이더니, 당신이 떠나간 지금 우리는 빛이니이다.”
이 세상은 빛을 원하고 있다. 빛의 자녀를 원하고 있다.
애굽이 요셉을 원했듯이
페르시아가 에스더를 원했듯이
바벨론이 다니엘을 요구했듯이
세상 속에서 빛을 발하는 하나님의 일군들을 원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도시가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를 절실히 원하고 있다.
이 세상의 빛이 되는 내일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가로등”이란 글이 있다.
'가로등, 밝은 대낮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두워지면 밝게 살아나 밤거리를 밝혀준다.'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서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지만
자기 곁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친구처럼, 연인처럼, 희망처럼 빛이 되어준다.
가로등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란다.
...........................................
주1) 그리스-로마시대에서는, 사람들이 작은 주머니를 차고 다녔는데,
그것은 소금을 찬 주머니였습니다. *오늘날의 지갑
그래서 이제 사람들이 만났을 때,
그리고 탁자에는 포도주와 빵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한 개의 빈 그릇이 놓여 있어요.
아까는 ‘손님을 환대할 때’, 집주인은 소금을 꺼내서 내놓았고,
지금은 ‘친구 관계를 맺을 때’, 이제 각자 자기 주머니에서 소금을 조금 집어서
탁자 위에 놓인 빈그릇에 꺼내놓는 것입니다.
세 사람이 만났다면, 세 사람이 꺼내놓은 소금이 그 빈그릇에 함께 담겨지겠죠.
그 다음에, 그 빈그릇을 흔듭니다. 자연히 거기 담긴 소금이 서로 섞이겠죠.
(‘피를 나눈다’는 말이 있듯이, ‘소금을 나누는(섞는)’ 것입니다.
각자의 주머니에서 소금을 꺼내 한 그릇에 섞는 것은
'서로의 운명을 하나로 묶는다'는 의미를 가진 강력한 상징적 의식입니다.
당시는 소금이 귀한 것이니까, 귀중한 것을 서로 공유하는 관계는.. 보통 사이가 아닌 거죠.
그리고는 이제 빵을 떼서 그 섞인 소금에 찍어서 먹어요.
그 다음에 포도주 마시고... 그 모든 행위에는 상징적인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게 ‘소금 언약’인데, 다시 말하면 ‘우정 (을 맺는) 언약’이고,
‘친구 관계를 맺는 언약’인 것입니다.
이 ‘소금 언약’은 이런 걸 표현하는 거예요.
‘나와 당신은 언약을 맺은 친구니까, 당신의 것이 내꺼이고, 내 것은 자네 것이야’
그러니까 이런거에요. ‘자네가 이제 앞으로 원수한테 어려움을 겪으면
내가 같이 가서 싸워주겠네’
‘친구가 어려움이 있으면 내가 항상 가서 돕겠네’
이런 우정의 맹세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