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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1장 무너진 바벨탑

LNCK 2026. 8. 19. 17:23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흩어짐>     ▣ 삶의 통찰력

2026 08 16 창세기 강해 (25) / 11:1-9 / 무너진 바벨탑 Youtube

 

◈무너진 바벨탑                      창11:1-9                    2026.08.16. [창세기 25강]

 

지난 시간 우리는 노아의 세 아들, 셈, 함, 야벳의 족보를 살펴봤습니다.

이 노아의 세 아들을 통해 인류가 온 땅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흩어짐은, 인구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이동이 아니었습니다.

이 흩어짐에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바벨탑 사건입니다.

 

바벨에서 탑을 쌓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바벨탑 사건은 너무 유명한 사건입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대부분 아는 이야기입니다.

 

EBS에서도 이 바벨탑 사건을 다룬 적이 있더라고요.

EBS뿐만 아니라 많은 유튜브 채널에서도 다루는 걸 봤는데요.

16세기 네덜란드의 거장 피터르 브뤼헐이 그린 '바벨탑'이라는 작품입니다.

 

 

또 바벨탑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들도 있습니다.

오늘은 이 바벨탑 사건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21세기에도 바벨탑은 계속 쌓아 올려지고 있습니다.

불과 20세기 말에는, 생명 공학, 유전자 정보 조작 등에서

(선하게 사용하는 분야 제외) 인간은 바벨탑을 쌓았는데,

 

요즘은 인공지능 AI, 휴머노이드 로봇 등으로

마치 하나님의 영역에 도전하듯,

세상의 모든 지식을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통제하려는 디지털 시대가 가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분야에서 ‘윤리’와 ‘도덕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통치를 무시하고,

즉 ‘윤리’와 ‘도덕성’과 ‘신앙’을 무시하고

끝없이 발전해가는 유전자 조작, 인공지능 AI, 휴머노이드 로봇 등은

다름 아닌 ‘바벨탑’인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창11: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동방으로 옮기다가’

원래 인류는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는 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디로 옮겨갑니까? 동방으로!

성경에서 동쪽은 단순히 지리적인 방향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남쪽도 아니고 북쪽도 아니고 동쪽으로 옮겼다’ 그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서 ‘동쪽’은 어떤 방향이라고 했었죠?

하나님을 등지고 떠나 죄인의 방향, 영적인 방향을 상징합니다.

 

기억나세요? 아담과 하와도 에덴 동산 동쪽으로 쫓겨났습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도 동쪽으로 쫓겨납니다.

나중에 롯이 이제 아브라함을 떠나는데요. 점점 동쪽으로 옮겨갑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동쪽으로의 이동’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어디에 자리를 잡냐면, 시날평지에 자리를 잡습니다.

 

시날평지는 현재 이라크 남부지역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위치한 아주 비옥한 지역입니다.

농사짓기에 좋은 땅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너무나 좋아했겠죠.

‘와 넓고 비옥한 땅이다. 거기에다 평지이다. 살기가 좋은 땅이다’

그래서 이 시날 평지에서 멈췄습니다. 그리고 뭘 하냐면 성읍을 만듭니다.

 

즉 도시를 세웁니다. 그리고 탑을 쌓습니다. 문제가 된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그러면 탑을 쌓으면 안 되는 건가요? 고층 빌딩을 쌓으면 잘못된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저희 교회 근처에 큰 L타워가 있는데요. 탑을 쌓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탑을 쌓은 동기였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위해 탑을 쌓았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겠죠.

그러나 탑을 쌓은 동기가 악했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나오는데요.

 

◑11: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기 보면 세 가지 잘못된 동기가 나옵니다.

-첫 번째 잘못된 동기는 ‘하늘에 닿게 하자’

-둘째, '우리 이름을 내게 하자'

-셋째, '우리가 흩어지지 말자.'

 

겉으로 보면 뭐 그렇게 큰 문제인가? 이게 뭐 그렇게 잘못된 건가?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 이 세 가지 동기 하나 하나가 다 불신앙입니다.

 

▲1. ‘하늘에 닿게 하자’ 왜 이게 문제일까요?

왜 갑자기 높이에 대한 갈망이 생겼을까요?

 

전망 좋은 집에 살고 싶어서?

아니면 오션 뷰나 스카이 뷰를 위해서?

 

아닙니다. 여러분 하늘은 어떠한 곳입니까? 하나님이 계시는 처소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에 닿게 하자’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자’ 입니다.

 

마치 선악과 사건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교만입니다.

 

이게 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것,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시도, 이 죄의 본질이 바벨탑을 쌓은 동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바벨탑 사건은, 에덴에서의 타락의 반복인 거죠.

에덴에서 시작된 죄의 본질이 계속 확산되다가 이 바벨탑 사건에서 터집니다.

결국 이 바벨탑의 배후에는 교만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자’

 

△자, 그뿐만이 아닙니다. 불신도 있습니다. 앞에서 하나님은 노아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내가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노아 언약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모여서 뭐라고 말하냐면 ‘야, 우리가 하늘에 닿을 때까지 한번 높게 쌓아보자’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혹시 홍수를 보내도, 우리가 안 죽을 만큼 높게 쌓아보자.

물이 우리를 잠기게 하지 못할 정도로 하늘에 닿을 만큼 높게 쌓자’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거죠.

 

‘무지개가 뜨면 하나님이 약속하셨지.. 물로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고!’

이렇게 믿어야 했는데.. 그들은 불신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언제 변할지 몰라.. 물로 우리를 또 멸망시키실지 몰라..

우리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돼!’ 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강력한 증거가 본문 3절에 나옵니다.

3절에 보면, 이제 구운 벽돌로 탑을 쌓습니다. 그리고 진흙 대신 역청을 발랐습니다.

 

여러분, 이 역청 기억나세요? 이 역청의 기능은 방수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짓고 나서, 방주 안밖으로 바른 게 이 역청이었습니다.

나무와 나무를 쭉 이어붙이면 빈틈이 있잖아요. 그 사이를 역청으로 발랐습니다.

방주에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런데 바벨탑을 쌓았는데, 하필 뭘로 칠합니까? 진흙이 아니라 역청으로!

이 역청을 벽돌과 벽돌 사이에 바른 겁니다. 왜요?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러니까 이 바벨탑을 쌓은 기저에는, 불신이 있는 거죠.

‘하나님이 혹시 물로 심판하셔도, 스스로 죽지 않을 길을 찾자’는 거였습니다.

 

여러분 앞에서 본 또 가인의 이야기와 겹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가인을 보호하겠다고 표를 주셨는데, 가인이 못 믿어가지고 성을 쌓았습니다.

 

지금 이 사람들도 똑같은 거죠.

하나님이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무지개 주셨는데,

그거 믿지 못해서 또 탑을 쌓고 있습니다.

 

결국 이 바벨탑의 배후에는 불신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내가 나를 지키겠다’는 불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닿자’는 말은, 단순히 오션뷰나 하늘 뷰와 같은 전망을 위한 동기가 아니었죠.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자’ 하는 교만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 없이 내가 나를 지키겠다는 불신이 그 동기였습니다.

 

▲2. 건축의 동기, ‘우리 이름을 내자’ 이것도 불신앙입니다.

도시나 나라마다 랜드마크가 있습니다. 초고층 건물이 있습니다.

이유는 자기 나라나 혹은 그 도시를 혹은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함입니다.

 

프랑스에 보면 에펠탑이 있는데요. 에펠탑을 만든 사람이 에펠이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에펠탑을 보면서 ‘에펠’이라는 사람을 기억하게 되는 거죠.

 

바벨탑을 지은 동기도 자기들의 이름을 높이기 위함입니다.

‘우리 기술이 이렇게 훌륭하다. 우리의 능력이 이렇게 대단하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높이려고 했습니다.

 

*바벨탑을 쌓은 이들은 함의 후손인 니므롯과 그를 따르는 무리가 주도적 역할을 했으나,

함의 후손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당시 온 땅의 모든 인류

(노아의 세 아들 셈, 함, 야벳의 후손)가 함께 동참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니까 바벨탑은 하나님을 높이기 위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인간의 영광을 위한 프로젝트였습니다.

 

▲3. ‘흩어짐을 면하자’ 이건 좀 더 직접적인, 노골적인,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무슨 명령을 주셨습니까?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창1:28

홍수 후에 노아에게도 같은 명령을 주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9:1

 

하나님은 여러 차례 흩어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는 것입니다.

 

이 흩어짐은 단순히 영토를 확장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온 세상으로 확장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거 싫다는 거죠.

 

‘하나님 나라 확장’ 같은 거는 관심 없다는 거죠.

대신에 흩어지지 않으려고 거대한 도시와 탑을 건설했습니다. 왜요?

한데 모이면 힘이 생기니까요. 자기들만의 왕국이 생기니까요.

결국 바벨탑 사건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세상 나라를 세우려고 한 것에 있습니다.


정리해 보겠습니다. 바벨탑의 배후에는

첫 번째, 교만과 불신이 있습니다.

두 번째,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한 프로젝트였습니다.

세 번째, 흩어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면적인, 노골적인 거부였습니다.

 

그 동기가 다 철저히 불신앙적 동기로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말씀이 5절에 나옵니다.

 

◑11: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탑 건설 현장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왜요?

사람들이 건설하는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습니다. 여러분 너무나 재미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내려오지 않으시면 못 보시는 분입니까? 아니죠.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모든 것을 보십니다.

 

그런데 왜 굳이 내려오셨다라고 말할까요?

인간이 만든 탑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낮은지를 보여줍니다.

 

하늘에서 보시니까, 잘 보이지 않아서

하나님 보시기에는 한참을 내려와야 겨우 보일 정도로,

너무나 낮고 초라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어요?

‘야 우리 진짜 높게 쌓고 있다.. 이거 조금만 더 쌓으면 하늘까지 닿겠는데?

야 우리 진짜 미친 거 아니야?’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이 쌓는 거대한 탑이 안 보여가지고, 내려오셔야 했습니다.

‘야, 니네 어디 있냐? 대체 쌓고는 있는 거냐?

지상이 아니라 지하로 들어간 거 아니냐? 야 안 보인다’

그게 ‘내려오셨다’라는 신적인 풍자입니다.

시2: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여러분 우리도, 이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 너무 대단한 거 아니야? 내가 이렇게 돈을 많이 쌓아놨어,

내 캐리어가 이렇게까지 높이 올라갔어,

내가 쌓아놓은 명예, 내가 쌓아놓은 인맥, 내가 쌓아놓은 권력, 내가 쌓아놓은 물질...’

 

하나님 없어도 될 것처럼 막 어깨뽕이 올라가고, 힘주며 살아가는데,

하나님이 내려오셔야 겨우 보일 정도입니다.

 

예전에 개그맨 박명수 씨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티끌 모아 티끌이라고’

하나님 보시기에는 ‘야 쌓았다고 하는데 어딨냐? 안 보인다야,

어째서 너희들은 다 티끌만 잔뜩 모아놨냐?’ 그거는 의지할 만한 게 전혀 아니라는 거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도 같이 높아지면 안 된다는 거죠.

재미있게도 이 하나님의 풍자가 6절에도 나옵니다.

 

◑1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임으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유머가 있습니다. 바로 ‘자’ 라는 표현입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자, 우리가 내려가자’고 하십니다.

 

여러분, 앞에서 사람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자, 벽돌을 만들자. 자, 성과 탑을 건설하자’ :3, 4

마치 운동선수들이 서로 주먹을 쥐고 힘차게 파이팅을 외치는 것처럼

‘우리 해보자. 한번 높이 쌓아보자. 하나님 없이 한번 해보자’

그 비장함의 표현이 ‘자’라는 외침입니다.    *영어성경에 ‘come'

3절과 4절에서 인간들이 ’자‘ 한 것을, 하나님이 받아서 ‘자’하고 흉내내신 거죠.

 

하나님도 ‘자, 우리가 내려가자’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들을 흉내 내신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풍자적 표현이죠.

인간들의 교만하고 비장한 이 결의가,

하나님 앞에서는 이런 웃음거리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제 삼위 하나님께서는 개입을 하십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갑자기 여기서 브레이크를 거실까요?

사실 하나님은 이전부터 개입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동쪽으로 옮기는 그 길 위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개입하실 수 있었습니다.

또 도시를 만들고 탑을 쌓으려고 벽돌을 구울 때도, 개입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탑을 쌓을 때까지... 가만히 내버려 두십니다.

그리고 탑을 쌓는 중간에... 하나님이 굳이 여기서 개입을 하십니다. 이유가 뭘까요?

왜 여기서 막으시는 걸까요?

 

6절 뒷부분에 보며 이유를 말씀하시는데요.

‘이같이 시작하셨으니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6b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후에 막을 수 없다’라는 것이

‘나중에는 하나님이 하고 싶어도 못한다’ 이런 뜻이 아닙니다.

 

‘이들이 더 탑을 쌓고 발전시키면, 이후에는 하나님도 막을 힘이 없다’라는

하나님의 능력의 한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막을 수 없다는 것은, 그들의 죄를 내버려 두면,

죄가 점점 더 확장되고,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회복 불가능한 심판을 받기 전에,

그 고리를 끊어내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벨탑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거죠.

바벨탑을 성공하게 되면 그 이후로, 훨씬 더 큰 악을 저지를 것입니다.

그걸 하나님이 막으시겠다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노아 언약을 통해 더 이상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은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여기서 멈춰 세우는 것입니다.

죄가 더 커져서 돌이킬 수 없는 심판에 이르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바벨탑이 무너진 것은 심판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이기도 합니다.

내버려 뒀으면, 회복이 불가능한 심판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을 받게 되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여기서 막으신 것, 무너뜨리신 것, 심판해 주신 것, 사실 은혜입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반복되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바로 ‘내버려두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 두는 게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부끄러운 욕심에 상실한 마음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게’

더 무서운 심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개입해 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 보통 무엇인가를 내려주시는 것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길을 열어주시고,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것만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내버려 두지 않는것으로 나타납니다.

막으시는 은혜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막으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길을 막으실 때가 있습니다.

내가 계속 붙들고 있는 것을 내려놓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내가 쌓아온 것들 무너뜨리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막으심이 나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만약 그때 내가 가고 싶은 길을 하나님께서 막지 않으셨다면,

그 길은 어쩌면 하나님을 떠나는 길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때 내가 그렇게 원했던 일이 계속해서 이루어졌다면,

어쩌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예배의 자리에 없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만약 그때 내가 열심히 쌓아 올린 것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나는 지금도 하나님보다 그것들을 더 의지하며 살았을지 모릅니다.

 

그때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이 은혜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내 삶의 바벨탑’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 나름대로 공든탑을 쌓았는데, 하나님이 무너지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속상하죠.

심판 같죠, 하나님의 부재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사실 그게 은혜입니다.

그거 무너지지 않았으면, 내가 얼마나 더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빨리 무너지는 게 은혜입니다.

 

내가 벽돌 하나 올려놨을 때, 하나님이 개입해 주시는 게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은혜뿐만 아니라, 막아주시는 은혜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막아주시는 은혜도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잘못된 길로 갈 때, 하나님께서 막아달라고...

내가 죄를 붙들 때, 내려놓도록 알려달라고...

내가 교만해지면, 깨닫게 하시고

내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면, 다시 돌아오게 해달라고

나를 내버려 두지 마시도록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나를 살리는 진짜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벨탑 사건은 심판이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버려 뒀으면 얼마나 더 큰 심판이 기다리고 있었겠습니까?

인간이 얼마나 더 교만해져서, 하나님 앞에 악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개입하시는데 그게 은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개입을 하시는가? 바벨탑의 결과인데요.

우리 본문 7절을 같이 한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11: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십니다.

원래는 언어가 하나였는데 여러 언어들로 나누셨습니다.

덕분에 우리가 외국어를 배워야 하는, 영어를 공부해야 하는 고통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언어를 나누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벽돌 가져와’ 하면, 역청을 가져 오고,

‘물 가져와’ 하면, 술을 가지고 오고,

망치 달라고 하면, 못을 가져다 주고... 서로 소통이 되지 않았습니다.

서로 협력이 안 되는 거죠. 결국 어떻게 됩니까?

 

◑11: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결국 공사가 중단되었습니다.

 

◑11: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여기 바벨은 ‘혼잡하다, 혼란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갑자기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서로 언어가 다르니까요.

서로 같이 살기가 힘든 거죠.

 

그때는 지금처럼 외국어 학원 이런 게 없으니까요.

그래서 언어가 같은 사람들끼리 모이게 되면서, 결국 온 땅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결론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1. 첫째는 하나님 없이 쌓은 바벨탑은 결국 무너진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쌓은 바벨탑은 무너졌습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의 힘으로 자신을 지키고,

자기의 이름을 높이고, 자기의 미래를 보장하려고 쌓았던 바벨탑은 결국 무너졌습니다.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공든탑이 무너지랴?’

정성과 노력을 많이 들여 쌓은 것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이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을 했겠죠. 얼마나 많은 벽돌을 구웠겠습니까?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동을 쏟았겠습니까?

또 얼마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쳤겠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쌓은 탑이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게 공들여 쌓은 탑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아무리 공들여 쌓아도, 하나님 없이 쌓은 것은 영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고백한 성경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이 솔로몬인데요.

시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에 깨어있음이 헛되도다’ 아멘.

 

여러분 믿으십니까? 하나님 없이 쌓는 모든 성들은 모래성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없이 내 힘으로 가정을 세우겠다고요.

하나님 없이 내 계획대로 자녀를 교육시켜 보겠다고요.

하나님 없이 내 노력으로 내 꿈을 이뤄보겠다고요.

그것들은 다 파도 한 번 탁 치면, 부서져버리는 모래성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하나만 건드리셔도, 우리 인생은 여러분 쉽게 무너집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이 바벨탑 무너뜨리실 때, 많은 거 건드리신 게 아닙니다.

딱 하나 건드렸습니다. 그것도 가장 기본적인 의사소통의 수단 하나를 막았는데,

모든 게 마비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도 겪지 않았습니까? 코로나19 때 하나님이 많은 거 건드리신 거 아닙니다.

너무 작어서 눈에도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하나 때문에,

모든 일상이 진짜 마비가 되었습니다. 세계가 마비가 되었죠.

 

아무리 AI가 발달하고 로봇이 만들어지면 뭐합니까?

바이러스 하나만 하나님이 건드리셔도 모든 게 마비가 되는데요.

 

우리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뭔가 나의 힘으로

하나님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건강 하나만 건드시면 또 끝납니다. 질병 하나만 딱 건드시면요.

모든 일상이 마비되고 정지됩니다. 활동을 못합니다. 공부도 못하고 일도 못하고

그냥 누워 있어야 됩니다.

 

갑자기 어떤 사고가 터졌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너무나 잘 되고 계획대로 되고 있는데,

불의의 사고가 터졌습니다. 모든 게 정지가 되는 거죠.

한순간에 모든 걸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는 날마다 기억해야 하는 거죠.

우리는 존재를 부여받은 피조물입니다.

행17: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우리가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는 것, 모든 생명과 우리의 호흡과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만물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이중에 하나님이 하나만 건드리시면 끝납니다. 많이도 아닙니다.

하나만 문제가 생기면 모든 게 마비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요? 하나님 없이도 바벨탑 쌓을 수 있다고요?

내가 쌓아놓은 것으로 하나님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요?

아니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에 깨어 있음이 헛됩니다.

 

내 삶에 어떠한 부분은 하나님 없어도 되는 영역이 있다고요?

나 혼자 잘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고요?

이 부분은 하나님이 필요하지만, 어떤 부분은 하나님 없어도 된다고요?

아니요. 하나님이 바벨탑 무너뜨린 것은, 말씀드린 대로, 많은 것 하신 게 아닙니다.

폭탄으로 폭발시킨 것 아닙니다. 물로는 심판을 못하시니까, 불로 심판하신 것도 아닙니다.

언어 하나 건드렸을 뿐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가능한 내 삶의 어떠한 영역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절대 의존적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신앙입니다.

 

이 절대 의존적 신앙,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이 함께 해주셔야만 된다는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갈 때, 무너지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십니다.

 

물론 이 믿음으로 살아도 형통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고난도 있고요. 시험도 있을 수 있습니다. 실패할 때도 있고요.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도 다 병에 걸려서 늙고 늙고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으로 사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확실한 고백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시편 23편의 다윗의 고백인데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도, 성도들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인생을 붙드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붙드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2. 두 번째 이 결론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흩어짐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흩어짐’이라는 단어인데요.

본문 4절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8절에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9절에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계속해서 ‘흩어진다’는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첫사람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1:28

또 하나님이 홍수로 심판하신 이후에 노아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9:1

 

흩어짐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 흩어짐은 단순히 이동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또 영토를 확장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온 세상으로 확장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이렇게 ‘통치’적인 개념이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영역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자 그래서 흩어지라는 말씀은, 단순히 인구를 늘리고 땅을 넓히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온 땅에 나타나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왕이 되시고,

온 땅의 사람들이 믿는 우리를 통해 함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가지셨던 뜻입니다.

 

△그런데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흩어지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강제로) 흩으십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흩으심은 신약에서도 계속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28:19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예수님께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흩어지라는 말씀이죠.

 

행1:8절에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며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땅끝까지 이르러 흩어지라는 말씀인거죠.

 

그런데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작년에 사도행전 살펴봤는데요.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을 받았는데, 흩어지지 않고 예루살렘에서 뭉쳐 살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사도행전 7장에서 박해를 허락하십니다. 스데반이 순교합니다.

그리고 8장부터 대박해가 시작됩니다.

 

흩어져야 하는데 흩어지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박해를 허락하십니다.

그때 성도들이 핍박을 피하여 곳곳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흩어진 그곳 사마리아, 안디옥 등지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각 처에서 복음이 퍼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흩어진 열 두 지파’들에게 편지했습니다. 약1:1

베드로 사도는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편지했습니다. 벧전1:1

 

하나님은 우리를 다 흩으십니다. 곳곳에 흩으십니다.

그곳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도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똑같은 곳으로 보내지 않으십니다.

모두 똑같은 동네에 살게 하지 않으십니다.

모두 똑같은 사람들과 만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해서, 우리 자녀들이 다 스카이 대학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어떤 자녀는 스카이를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녀는 지방으로 갑니다.

 

어떤 자녀는 대학에 가고 어떤 자녀는 다른 길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단순히 누가 더 좋은 곳에 갔느냐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면 안됩니다.

흩어짐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는 이곳으로 보내셨구나

하나님께서 이곳에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 아이를 보내셨구나’

이 흩으심의 관점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공부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 결과를 다르게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흩어짐의 관점으로요.

 

직장도 마찬가지겠죠. 어떤 사람은 병원에서 일합니다. 어떤 사람은 학교에서 일합니다.

어떤 사람은 공장에서 일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무실에서 일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게를 운영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정에서 자녀를 키웁니다. 다 다릅니다.

다 다른 곳으로 하나님이 보내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야 곳곳에 복음이 전해지니까요. 곳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니까요.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이 되니까요. 그래서 우리의 직업과 삶의 자리를 성도는요.

우열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안됩니다. 누가 더 낫냐 우월이 아니라요.

흩어짐의 관점으로 봐야 합니다.

 

‘아 나는 하나님이 이 은사와 재능을 주셔서 이곳으로 보내셨구나’

‘저 사람은 저 은사를 주셔서 저기로 보내셨구나’

진짜 그렇잖아요. 저는 ‘마이너스 손’입니다.    *‘마이더스의 손’에 빗대어

제가 만지면 다 고장납니다. 제가 수리점을 했다고 가정해 보세요. 망하겠죠.

 

이 흩어짐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나은가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흩흐신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며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내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내가 있는 자리에서 복음의 통로가 되고 있는가?

나는 선교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질문으로 우리의 삶을 평가하실 것입니다. 흩어짐의 관점으로요.

그게 하나님의 뜻이니까요.

 

△그러므로 한 주도 흩어짐의 관점으로 살아갑시다.

내가 있는 곳, 때로는 내가 원하지 않는 곳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필요해서 우리를 그곳에 흩으셨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이 관점을 가지고, 흩어진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바벨탑 사건과 짝을 이루는 신약의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입니다.

 

바벨탑을 쌓은 결과 언어가 혼잡해지고 소통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행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이 임하시자 기도하던 제자들이 각기 다른 나라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 즉 복음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누가 있었습니까? 마침 오순절을 지키려고 세계 각지에서 흩어진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제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복음을, 각자 자기 나라의 언어로 듣습니다.

 

행2: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바벨탑에서는 언어가 혼잡해져서 사람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에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음에도

복음 안에서 서로 소통하기 시작합니다. 이게 오순절 사건 때 일어난 현상입니다.

 

바벨론에서 언어가 흩어지고 불통이 되었지만

오순절 성령 강림 때, 하나님 나라 안에서, 한 복음 안에서 소통이 되었습니다.

바벨탑의 불통 사건이 오순절 성령 강림때에 소통사건으로 반전이 일어납니다.

 

바벨탑의 저주가 뒤집혀졌습니다. 바벨탑 사건의 역전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입니다.

그래서 다른 언어를 말하지만, 한 복음의 언어로 하나님을 다같이 찬양하고 예배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신약교회의 탄생입니다.

 

교회는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였지만, 한 복음의 언어로 소통하고,

하나님을 다 같이 찬양하고 예배하는 곳입니다.

 

여러분 만약 교회 안에도 불통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한쪽에서는 믿음의 언어, 복음의 언어를 말하는데

한쪽에서는 세상의 언어, 불신의 언어를 말합니다.

그러면 교회가 세워지기 어렵게 될 겁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교회는, 서로 다른 사람이 모였지만

한 복음의 언어로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가 더욱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바벨탑 사건을 살펴봤는데요. 적용 위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1) 바벨탑 심판은 한편으로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막아주시는 건 내 삶을 채워주시는 것만 은혜가 아니라

내 삶의 바벨탑 무너뜨려 주시는 것도 은혜입니다.

 

2) 또 하나님 없는 바벨탑은 결국 무너집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절대 의존적 신앙으로 살아갑시다.

모든 삶의 영역 모든 삶의 순간 우리 마음 높아지지 않고

하나님을 절대 의존하는 신앙으로 살아갑시다.

 

3) 또 하나님의 뜻은 흩어짐입니다. 하나님은 한주도 우리를 세상에 흩으십니다.

이 흩어짐의 관점으로 내 삶을 돌아보고

흩어진 그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그려내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그래서 새롭게 시작되는 한주도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이루어지고

하나님 안에서 승리하며 살아가는 복된 한주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