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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드슨 테일러의 고백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LNCK 2026. 8. 21. 10:49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허드슨 테일러 Youtube  ☞허드슨 테일러     ▣ 중국 선교

 

◈허드슨 테일러의 고백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1832~1905

 

 

1870년 여름 중국 양저우, 한 영국 남자가 아내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콜레라였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38세, 아내 마리아 테일러 33세 때           주1)

 

아내의 이름은 마리아, 그의 가장 가까운 동역자였고, 가장 오래된 친구였습니다.

남자의 이름은 허드슨 테일러!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중국에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고향도, 안정된 직업도, 넉넉한 수입도, 그리고 이제 아내마저...

아내가 죽었는데, 그는 왜 중국을 떠나지 않았을까요?

왜 짐을 싸서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요?

 

저는 허드슨 테일러의 이야기를 처음 읽으면서, 계속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왜 그는 선교를 멈추지 않았을까?’

‘후원이 끊겼을 때, 왜 선교를 멈추지 않았을까?’

 

‘중국 선교계 전체가 자기를 비웃었을 때, 왜 사역을 멈추지 않았을까?’

‘아내가 죽었을 때, 자녀가 죽었을 때, 자신의 몸이 망가졌을 때,

왜 그는 중국 선교를 멈추지 않았을까?’ 오늘 그 답을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1832년 영국에서 태어났습니다.

21살에 혼자 배를 타고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으려 했던 중국으로, 그리고 그는 ‘급여가 없는 선교단체’를 만들었습니다.

통장 잔고가 바닥날 때도, 절대 후원을 요청(구걸)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만 기도하고, 사람에게는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선교계는 그를 무모하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중국에서, 아내가 죽고, 자녀 넷이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주2)

그 자신 역시 척추를 다쳐 걷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그는 침대 위에 누워서 편지를 썼습니다.

선교사들에게 ‘계속 중국 내륙으로 들어가라’고요.

 

이 컨텐츠는 허드슨 테일러가 직접 남긴 자서전과,

그가 세운 선교단체 OMF 인터내셔널의 공식 기록을 바탕으로 만들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1832년 영국 요크셔 주 반즐리에서,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약사이자 감리교 평신도 설교자였습니다.

어머니 아멜리아는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이 기도를 시작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아이를 중국을 위한 선교사로 써달라고’

 

▲그런데 허드슨은 15살이 되자 신앙에서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은행에 취직하면서 주변의 또래들과 어울렸고, 그들은 종교를 낡은 것이라 비웃었습니다.

어머니는 걱정했고 아버지는 답답했습니다.

 

바로 그 같은 날 오후 50킬로 떨어진 곳에서 17살의 허드슨은

아버지의 서재에서 우연히 전도지 한 장을 집어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관한 글이었습니다.

 

읽다가 그는 멈춰서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회심 직후 허드슨의 마음속에 한 가지 생각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당시 중국은 기독교 선교가 거의 불가능한 나라였습니다.

청나라는 외국인 선교사를 환영하지 않았고,

들어가더라도 상하이 같은 해안도시에서만 머물 수 있었습니다.

 

수억 명이 사는 내륙은 선교사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으려 했습니다.

위험했고, 언어도 달랐고, 문화도 달랐으니까요.

 

허드슨은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의학을 공부했습니다.

중국어를 공부하고,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이상한 훈련을 스스로에게 부과했습니다.

중국에서의 가난한 삶을 미리 연습한 것입니다.

 

런던 빈민가로 이사해서, 죽 한 그릇, 빵 한 조각으로 끼니를 때우며 살아남는 법을

몸에 익혔습니다.

남은 돈은 이웃의 병자들을 돕는 데 모두 써버렸습니다.

 

▲1853년 9월 19일, 21살의 허드슨 테일러는 영국을 떠났습니다. 

목적지는 중국 상하이, 배로 6개월이 걸리는 여정이었습니다.

 

폭풍이 몰아치고 배가 뒤집힐 뻔한 날도 있었습니다. 그는 갑판에서 기도했습니다.

1854년 3월, 상하이에 도착했습니다. *약 6개월 소요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현실의 벽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상하이는 ‘태평천국의 난’이라는 내전으로 완전히 혼란상태였습니다.

중국인들끼리 벌이는 대규모 내전으로, 도시 곳곳이 전쟁터나 다름없었습니다.

 

선교사들은 해안도시의 안전한 구역에 모여있었습니다.

내륙으로 가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으니까요.

 

허드슨은 선교사들이 모여있는 곳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내륙을 바라보았습니다.

해안도시 너머 아무도 가지 않은 그 광대한 땅에, 수억 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는 답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으려 했기에, 자신이 가야만 했습니다.

 

▲허드슨은 상하이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충격적인 결단을 내렸습니다.

서양 선교사의 복장을, 스스로 벗기로 한 것입니다.

 

당시 서양 선교사들은 검은 정장을 입고, 서양식 구두를 신고 다녔습니다.

서양 선교사는, 중국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허드슨은 생각했습니다. ‘중국인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중국인과 같아져야 한다고’

그래서 그는 중국식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머리를 밀고 중국인처럼 변발을 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어를 배웠습니다. 만다린어와 지방의 방언까지...

 

그러자 다른 선교사들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가 이상해졌어... 서양 문명을 저버렸어...

저러면 오히려 중국인들이 무시할 거야’

영국 본국에서는 그를 향해 비웃음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허드슨이 중국 옷을 입고 내륙마을로 들어가면, 중국인들이 다가온 것입니다.

 

해안도시의 서양 선교사들에게는 문을 닫던 사람들이,

그에게는 마을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고 있었습니다.

 

선교계가 ‘무모하다’고 평한 방식이, 현장에서는 통한 것입니다.

하지만 비판은 계속되었습니다.

 

▲1868년 허드슨이 활동하던 양저우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외국인을 몰아내려는 중국인들의 시위였습니다.

 

선교사들은 위험한 상황에서 탈출해야만 했습니다.

이 사건은 바로 영국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영국 언론은 테일러를 집중 공격했습니다.

‘왜 위험한 내륙에 갔느냐? 왜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느냐?’

 

영국의회에서도 그의 이름이 거론되었습니다.

부정적인 방식으로 선교계, 언론, 의회까지...

 

그가 선교를 멈출 이유는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였을까요? 허드슨은 훗날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들의 비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냥 그 비판보다, 더 큰 것을 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중국 내륙에서 복음을 단 한 번도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수억 명의 얼굴을...

그 얼굴이 비판의 목소리보다 훨씬 더 크게 들렸을 뿐입니다.」

 

▲허드슨을 처음 중국에 파송한 단체는 ‘중국 전도회’라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단체가 재정 문제에 빠졌습니다.

선교사들의 급여를 제때 지급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허드슨은 몇 달째 급여를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후원단체에 손을 벌리지 않고, 스스로 이런 원칙을 세웠습니다.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구하고, 사람에게는 구하지 않는다.

당장 먹을 것이 없어도 후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쓰지 않겠다.’

주변 사람들은 이것이 무책임한 태도라고 말했습니다...

 

▲1865년 허드슨은 더 큰 결단을 내렸습니다.

[중국 내지 선교회]를 직접 창설한 것입니다. China Inland Mission

내지, 즉 중국 내륙을 선교하는 단체,

 

그런데 이 단체에는 처음부터 이상한 원칙이 있었습니다.

「소속 선교사들에게 급여를 보장하지 않는다.

후원자에게 모금을 요청하지 않는다. 오직 기도로만 재정을 구한다」

 

그렇게 한 것은 돈이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가 아닙니다. 돈은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다만 그는 이렇게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인간이 모금 캠페인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사람을 통해!’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통장 잔고가 바닥난 날 아침, 누군가가 후원금을 들고 찾아오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이 굶기 직전에, 이름 모를 사람의 헌금이 도착했습니다.

허드슨은 이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선교계는 여전히 그를 비판했습니다.

급여도 없이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하다고.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급여를 보장하는 단체보다, 급여를 보장하지 않는 이 단체에 지원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으로 가겠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1887년 한 해에만 102명의 선교사가 합류했습니다.

영국, 미국, 캐나다, 스칸디나비아, 여러 나라에서 왔습니다.

 

지원자 중에는 상류층도 있었고, 노동자 계층도 있었습니다.

허드슨은 학력이나 배경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결정을 내렸습니다.

미혼 여성도 선교사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 결정 또한 엄청난 비판을 받았습니다.

‘혼자서 내륙에 간 여성 선교사가 위험에 처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그런데 허드슨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중국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은, 여성 선교사뿐이라고!’

중국 문화에서 여성은 남성 선교사와 직접 대화를 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의 판단은 정확히 맞았었죠.

 

▲1858년 허드슨은 중국에서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마리아 다이어 그녀도 선교사였습니다.

 

부모를 어릴 때 잃고, 혼자 중국 땅에 와서 선교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닝보에서 결혼했습니다. 1870년 아내 소천 후 1년 반 지난 시점에 재혼

 

마리아는 단순한 아내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허드슨과 함께 성경 번역 작업을 했습니다.

선교지에서 의사 역할도 해냈습니다.

 

허드슨이 쓰러지면, 그가 일어날 때까지 곁을 지켰습니다.

[중국 내지선교회]를 함께 세운 공동창설자나 다름없었습니다.

 

▲허드슨은 두 명의 아내로부터 8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6명+2명.

그런데 중국 내륙의 환경은 가혹했습니다.

아이들이 하나씩 병으로 세상을 떠나간 것입니다.

 

첫째가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둘째도 천국으로 갔습니다. *자녀들의 사인은 주2)

 

허드슨과 마리아는 중국 땅에 자녀들의 무덤을 남기며, 계속 선교를 이어나갔습니다.

1870년 여름, 이번에는 아내 마리아가 콜레라에 걸렸습니다.

 

콜레라는 당시에 치료법이 없는 병이었습니다.

허드슨은 의사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결국 마리아도 33세 나이에 아이들을 따라 세상을 떠났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그날의 일을 기록에 남겼습니다.

아내가 숨을 거두는... 그 순간을 지켜보며 그는 하나님께 물었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이 여인을 데려가실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고?’

 

답은 없었습니다.

적어도 그가 원하는 형태의 답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허드슨은 짐을 싸지 않았습니다.

마리아가 묻힌 중국 땅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왜였을까요?

 

훈렉(전기 작가)은 이렇게 썼습니다.

‘중국을 떠나는 것은 마리아를 두 번 잃는 것이라고.

그녀가 목숨을 바쳐 사랑한 이 땅을 버리는 것이라고.

그것만큼은 할 수 없었다고...’

 

슬픔이 그를 멈추게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슬픔이 그를 더 깊이 뿌리내리게 했습니다.

 

▲허드슨은 중국과 영국을 오가며 선교사를 모집하고,

재정을 관리하고, 현장을 지휘했습니다.

 

중국에서 50년 가까이... 더 이상 몸이 버텨줄 리 없었습니다. *중국에서 52년 사역

만년에 이르러 그는 척추를 심하게 다쳤습니다.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조차 힘이 들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제 쉬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허드슨은 침대에 누웠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썼습니다.

 

중국 전역에 흩어진 선교사 수백 명에게 계속하라고, 멈추지 말라고 격려의 편지를 썼고,

기도의 편지를 썼고, 지침을 썼습니다.

걷지 못하는 몸으로 그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1900년 중국에서 의화단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소천 5년 전

외국인과 기독교인을, 적대시하는 중국인들의 봉기였습니다.

 

이 난으로 중국 내지 선교회 소속 선교사 58명과, 그 자녀 21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허드슨은 영국에서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무너져 내렸습니다.

 

자신이 파송한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자신의 결정이 그들의 위험을 빠뜨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달 동안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이 지난 뒤, 그는 다시 편지를 썼습니다.

남아있는 선교사들에게

‘우리는 계속 가야 한다고..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멈추면 안된다고...’

 

그리고 실제로 멈추지 않았습니다.

‘의화단의 난’이 가라앉은 뒤, 중국 내지선교회는

200명의 새 선교사를 추가로 파송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가 멈추지 않은 덕분에, 변화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한 명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프레데릭 프란슨 이라는 스웨덴계 미국인입니다. Fredrik Franson

프란슨은 1880년에 허드슨 테일러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중국 내륙에서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아무도 가려하지 않는 그 땅으로, 허드슨이 어떻게 갔는지의 이야기...

 

프란슨은 강연을 들은 뒤 결심했습니다.

그는 스칸디나비아로 돌아가 선교사들을 모집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급여 보장 없이 믿음만으로, 선교사들을 파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단체가 훗날 [스칸디나비아 동맹 선교회]가 됩니다.

지금도 전세계 30개국에서 활동하는 선교단체입니다.

 

허드슨 테일러, 그 사람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보고 또 한 사람이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보고, 또 다른 사람들이 일어섰습니다.

멈추지 않는 사람이 남기는 것은 업적이 아닙니다.

계속되는 이야기입니다.

 

△1905년 봄 허드슨 테일러는 73세 나이에 중국으로 마지막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미 걷기도 힘든 몸이었습니다. 기억도 예전같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중국 땅을 한 번 더 밟고 싶었습니다. 그는 중국 남부 창사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현지 교인들을 만났습니다.

그가 50년 전에 시작한 이래 열매들을 만난 것입니다.

 

1905년 6월 3일 허드슨 테일러는 창사에서 잠을 자다가 눈을 감았습니다.

중국 땅에서.. 그가 처음 발을 디뎠던 그 땅에서...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중국 내지 선교회의 규모는 이렇습니다.

선교사 825명,

선교지부 300곳 이상,

중국인 개종자 2만 5천명,

중국 18개 성 전체에 선교사가 파송되어 있었습니다.

 

21살에 혼자 배를 탄 그 청년이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마리아의 무덤 곁에, 그는 자신을 묻었습니다.

중국 땅에 그가 원하던 그 자리에.

 

허드슨 테일러는 다섯 번의 큰 고비를 넘겼습니다.

-조롱을 받을 때마다 멈추지 않았습니다.

-돈이 없을 때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죽었을 때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선교사들이 순교했을 때도

-자신의 몸이 무너졌을 때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사랑한 그 땅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계속 한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멈추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멈출 이유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이유가 충분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했습니다.

‘저는 그런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오래 생각해봤습니다.

 

아마 지금 이 영상을 보고 계신 분들 중에도 멈추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계신 분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너무 힘들어서, 너무 오래되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서...

저도 그랬습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이야기가 제게 이렇게 묻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이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냐고?

그 이유가 있다면 아직 끝이 아니라고...’

 

[살아있는 간증이야기] 유튜브 채널은 유튜브의 제재를 받아 *AI 제작이라고 오해받음

더 이상 수익 창출이 불가하지만, 이 사역과 선교 후원도 계속 이어나갈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믿음 때문에 박해받고 있는 사람들의 목적은 세상이 모르는 기적들,

아직 전하지 못한 간증들 살아있는 간증 이야기는 계속 이어나갈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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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마리아 테일러

마리아 테일러(Maria Jane Taylor, 1837년~1870년)는 중국 내지선교회(OMF)를 창립한

허드슨 테일러의 첫 번째 아내이자 영국의 중국 선교사입니다.

중국에서 태어난 선교사 자녀 출신으로, 남편과 함께 중국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다가

1870년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주2)

허드슨 테일러는 첫째 아내 마리아와 사이에서 7명(사산된 아이 제외 시),

둘째 아내 제니와 사이에서 2명을 낳아 친자녀는 총 9명이었으며

(입양한 딸 1명 포함 시 10명), 중국에서 숨진 자녀는 총 4명입니다.

 

중국 선교 중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은 4명의 자녀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레이스 테일러 : 수막염으로 사망

새뮤얼 테일러 : 양쯔강 배 위에서 혼수 상태에 빠져 사망

노엘 테일러 : 태어난 지 몇 세 되지 않아 영양부족 등으로 사망

이름 없는 아들: 출생 직후 사망 (첫째 아내 마리아의 사망 직전 출생)

 

추가로 첫째 아내 마리아 역시 콜레라로 중국에서 사망하여

테일러 가문은 중국 선교에 큰 희생을 치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