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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2장 눈물은 길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LNCK 2026. 8. 22. 09:57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죄, 복된 회개

20260816ㅣ눈물은 길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삿1:27 - 2:5 - YouTube

 

◈눈물은 길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삿1:27~2:5        2026.08.16.  

 

‘불효자는 웁니다’는 1938년에 나온 노래입니다.

그 후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재생되었고

술집에서, 골목길에서, 군대에서 불려진 노래입니다.

 

이 노래 제목만 들어도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도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불효자는 웁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어머님, 아버님을 생각하고 눈물 많이 흘렸는데... 그 다음은 어떻게 됐을까요?

그 울음을 울고나서, 효도를 다 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을까요? No

그저 한 때 우는 감정적 안정을 누리고.. 끝내버렸을 것입니다. (사사기가 그랬다는 거죠)

 

◑사사기는 ‘영적 오답노트’

 

오늘부터 구약성경 <사사기의 강해> 시작합니다.

<사사기>라는 성경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이스라엘 민족적 큰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뭔가 잘못됐구나.. 이 사람들이 뭘 대단히 잘못했구나.. 그래서 뉘우치고 있구나...’

 

그러면 그 울음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질문은 사사기 전체를 해석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울었는지 함께 살펴보십시다.

삿2:1~5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여호와의 사자가 왔습니다.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 왜 예배 안 드리느냐, 왜 제사 안 드리느냐?’가 아니고, 두 가지를 책망하십니다.

 

-너희가 언약 맺지 말아야 할 사람들과 언약을 맺고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방신들의 제단을 왜 헐지 않았느냐? 하고 지적하십니다. 2:2

 

이 말을 듣고 이 백성들이 얼마나 비통하게 슬프게 울었는지,

그 지명이 ‘보김 - 우는 자들’이라고 바뀌었습니다.

 

지명이 바뀐다는 게 무슨 말일까요?

몇 해 전에 포항에 ‘힌남노’ 라는 태풍이 닥쳤습니다. 피해가 어마어마했죠. *2022

밖에 나가면 만나는 사람들마다 ‘포항 힌남노 괜찮아요?’ 하고 우리에게 물어봤습니다.

 

근데 지금 생각하면요. 그런 일이 있었나 싶어요.    *힌남노 : 라오스 어

근데 만약에 그날 이후로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도시 포항을

‘포항’이라 부르시지 않고 ‘힌남노’라고 바꾸어 부른다면,

여러분, 그것이 얼마나 깊이 새겨진 기억이겠습니까?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에 가장 슬프고 비통하게 울어본 적이 언제입니까?

결코 잊을 수 없는 쓰라린 슬픔의 날이 있었습니까?

사사기는 ‘보김’ 그런 비통한 울음으로 시작합니다.

 

▲여러분 <사사기>라는 성경책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교회 학교 다닐 때, 어릴 때부터 기드온의 300용사, 삼손같은 장사,

블레셋을 멋지게 무찌르는 장면... 신나죠. 멋지죠.

 

그러나 그들의 뒷이야기에는, 모두 어두운 그림자가 있습니다. 씁쓸하고 비통합니다.

사사기는 처연하고(쓸쓸하고 구슬픈) 우울한 이야기입니다.

 

가끔씩 빛나는 승리가 있긴 하지만, 반짝하다가 그 영웅들의 뒷모습은

우리에게 더 깊은 절망을 줍니다. 그래서 우울합니다.

이렇게 침울한 성경을, 우리가 왜 읽어야 하는가요?

 

△요즘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자기주도 학습이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하지요.

여러분 스스로 공부를 잘 하기 위해서는요. 시험을 잘 보는 것뿐 아니라,

시험 보고 나서가 중요해요. 틀린 문제를 붙잡고 씨름하면서

‘내가 왜 틀렸느냐?’를 알아보고, 꼼꼼하게 문제를 새로 푸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답 노트’를 만듭니다.

자기가 틀린 것을 요약해서 기록해 둠으로써, 다시는 틀리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기업들도 보면, ‘실패 보고서’를 쓰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종의 ‘오답 노트’이지요.

 

여러분, 성적이 오르는 학생과, 별 진전이 없는 학생들의 차이는요.

‘가위표 가득한 엉망인 시험지 붙들고, 얼마나 후회하는가, 얼마나 슬피 우는가?’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틀리고 난 뒤에, 그 틀린 문제를 다시 들여다보는 거예요.

푸는 거예요. (*한국 축구 국대팀이 생각납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의 영적 오답 노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긴 한데,

오늘 우리도 틀리기 쉬운, 아니 이미 틀리고 있는 문제들로 가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사기>는 중요합니다.

 

◑가장 좋은 환경에서 시작해서, 가장 힘든 환경으 마치는 <사사기>

 

오늘은 사사기 첫날이니까, 이 책이 어디쯤 놓여 있는지를 보아야 됩니다.

창세기, 그 다음에 출애굽기부터 ~ 신명기는 같은 동시대예요.

모세가 태어나면서 출애굽기가 시작되고, 모세가 죽으면서 신명기가 끝나죠.

그 4권은 120년 사이의 일입니다.

 

그 다음에 <여호수아>, 그 다음에 <사사기>입니다.

여호수아의 전쟁, 정복, 승리, 가나안 정착, 그 다음에 <사사기>가 나오는데,

이 성경들을, 출발로 보면 사사기가 가장 좋습니다.

 

창세기는 혼돈에서 출발하죠. 창1:2

출애굽기는 노예생활에서 출발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남자아이가 태어나는 족족 전부 다 죽여버리는 정말 살벌한 시대였습니다.

 

여호수아서는 모세의 사후, 모세도 없고, 이 말 안 듣는 백성들 데리고

가나안 땅에 무시무시한 적들이 도사리는 땅으로 가야하는 엄청난 부담에서

여호수아서가 시작했습니다.

 

그럼 사사기는요?

가나안 정복전쟁은 끝났고, 광야에서 집 없이 떠돌던 백성에게, 집이 생기고 땅이 생겼습니다.

가장 좋은 환경에서 사사기가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가 마칠 때는 최악입니다.

가장 좋은 조건에서 시작해서, 가장 나쁜 상황에서 마치는 이야기가 사사기입니다.

 

▲여러분 좋은 집안에 태어나서, 좋은 시대에 최고의 조건과 환경에서 출발해서,

최악으로 마치는 인생, 그런 나라, 그런 시대가 있는 거 아시죠?

그게 사사기입니다.

 

여호수아서의 마지막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수24:13 ‘내가 또 너희가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설하지 아니한 성읍들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에 거주하며

너희는 또 너희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열매를 먹는다 하셨느니라’

 

그러니 사사기는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갖추어졌습니다.

이제 그냥 살면 됩니다. 열심히 성실히 살면 돼요, 잘 살 수 있는 조건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우리 부모님 세대를 떠올려보십시오 이북에서 보따리 하나 들고 피난 내려온 분들,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혹은 젊어서 남편 여의고 혼자 자식 키우는 엄마,

시장 바닥에서 좌판을 깔고, 리어카 끌고, 남의 가게 뒷방에서 잠 자면서

온갖 멸시와 설움을 겪어가며 버텼습니다.

 

그러다가 겨우 가게 하나 냈고, 밤낮으로 일해서

방 두 칸짜리 집 장만하고, 자식들 가르치고,

마침내 번듯한 사업체를 일으켜 자녀들에게 물려주며 말합니다.

‘너희들은 나처럼 고생할 필요 없다. 그냥 성실하게 가게 잘 지키고 살면 된다’

 

근데 그 후에 어떻게 됩니까? 살만해졌는데, 그때부터 무너지는 집안들 많아 보지 않습니까?

그 아들은, 아버지가 새벽마다 가게 셔터를 올리던 그 소리를 모릅니다.

가게는 물려받았지만, 그 가업을 세우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던

기도의 무릎은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 부모세대도 비슷합니다.

자녀에게 집 한 칸, 높은 학벌, 안정된 자리(사업)를 남겨주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평생을 다 바칩니다. 귀한 자녀 사랑입니다.

 

그러나 땅은 물려주면서, 언약은 물려두지 못 합니다.

아이의 성적표 앞에서는 밤새 걱정하고, 울기도 하면서,

텅 빈 아이의 예배 자리에 대해서는 울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사기>입니다.

 

여호수아 세대는 광야를 건넜고, 요단강이 갈라지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 와중에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며, 온갖 고생을 다 했습니다.

 

그 다음 사사기 세대는, 잘 차려진 밥상 앞에서 인생을 시작했어요.

우리 세대 부모들은, 배고픈 시대를 살면서 먹을 것을 매일 걱정했었는데,

지금은 냉장고 문만 열면, 먹을 것이 쌓여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세대가 ‘못 살겠다, 그리고 불행하다’ 그러면서 무너지고 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쫓아내지 못하였더라

 

여러분 사사기 1장 후반부를 읽어보면요. 똑같은 말이 계속 반복됩니다.

‘쫓아내지 못하였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다’

 

여러분 성경을 쓸 때, 그냥 이 아까운 지면에, ‘모두가 안 쫓아냈다’ 그러면 되는데,

므낫세도, 에브라임도, 스불론도, 아셀도, 납달리도...

지파를 하나하나 거명해 가면서, 성경에 적시하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문장을 일부러 반복하는 거는 아닐 테고요.

왜 그렇습니까?

 

그 세대, 그 지파들을 고발하는 거예요. 하나하나가 다 그랬다는 겁니다.

피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한 지파의 실수가 아니라, 한 가정의 잘못이 아니라,

온 민족의 풍조가 되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삿1:28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힘이 없어서, 능력이 부족해서, 못 쫓아낸 것이 아닙니다.

힘이 생긴 다음에도, 할 수 있는 일을 안 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거 해야 되는 거 맞는데.. 순종도 하고 헌신도 해야 되는데, 아직은 아니다...

애들이 대학만 들어가면 좀 여유가 생길 것이니, 그때 신앙생활 제대로 해야지...

이 회사만 들어가면,, 이 자격증만 되면.. 이 바쁜 프로젝트만 끝나면 좀 제대로 해볼 텐데...

 

그런데 오늘 본문은 뭐라고 말합니까?

‘강성해진 이후에도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않았다’

 

여러분 지금 안 하면요. 내일은 또 다른 이유가 생깁니다.

바쁠 때 안 하면, 여유가 생겨도 못합니다.

 

살림이 빠듯할 때 십일조 안 하는 사람은, 여유가 생기면 할 것 같습니까?

여러분 십일조는요. 액수가 많아질수록 더 힘들어집니다.

수입이 적을 때 안 하면, 많아지면 더 못합니다.

 

강성해진 이스라엘이 선택한 것은, 순종이 아니라 이익이었습니다.

쫓아내는 것보다 부려먹는 게 훨씬 이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순종의 명령과 손익의 계산, 신앙의 순결과 나에게 남는 유익이 부딪힐 때, 충돌할 때,

그들은 계산, 실리 쪽을 선택했습니다.

 

여러분, 손해볼 각오 없으면, 어떤 가치 있는 것도 가질 수 없고, 이룰 수 없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위해서, 영원한 것을 위해서, 가치 있는 것을 위해서,

덜 가치 있는 것을 손해보는 선택이고, 훈련입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루 정도야 어때?’

이게 한 번이 되고,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 네 번이 됩니다.

 

여러분 못된 짓 하는 친구들... 어른들도 그래요.

처음에는 친구들이 하니까 분위기 깨지 않으려고 그냥 따라가요.

두 번, 세 번 하고 즐깁니다. 어느 새 내가 앞장서고 있습니다. ‘괜찮아, 가자!’

 

하나님을 부인한 적 없어요. ‘내가 막 살겠다, 함부로 살겠다’ 결심한 적도 없어요.

‘잘 하겠습니다. 하나님 잘 섬기겠습니다.’ 하면서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거예요. (이게 ‘쫓아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나온 영화 <오디세이>.. 세계가 난리입니다.

8월 마지막 주일에 이 주제로 설교하겠습니다.

 

10년 동안 전쟁을 치른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다시 10년이 걸립니다.

6개월이면 돌아갈 것 같은데, (전쟁 끝나고 편안해지니까) 10년이 걸리는 겁니다.

 

왜 오래 걸립니까? 폭풍을 만났다? 뭐 공격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니에요. 여러분 원전을 보면요. 이게 참 묘한 리듬이 있어요.

 

환대와 냉대가 번갈아 나옵니다.

원전에, 온탕과 냉탕이 번갈아 나옵니다.

 

사람을 잡아먹는 외눈박이 거인이 있고요. 배를 부수는 식인 거인 족이 있습니다.

반대로 극진히 대접하는 섬도 만나고요.

여신이 차려주는 천상의 맛을 보여주는 식탁도 있습니다.

 

냉대와 극진한 대접, 이 둘 중에서,

오디세우스 부대의 귀향을 늦춘 것은 무엇일까요?  극진한 대접이죠.

 

그를 죽이기로 했던 자들이 아니에요. 여러분 목숨이 걸린 도전의 자리에서는요.

금방 뛰쳐나왔어요. 며칠 내에 그 곳을 떠났습니다.

 

정작 그들을 붙들어 맸던 것은.. 먹기만 하면 고향도 잊게 만드는 달콤한 열매였습니다.

1년을 머물게 한 여신의 식탁이었습니다.

매력적인 여신과 아름다운 바닷가를 함께 거니는 시간이었고,

아픈 나를 극진히 돌보아주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이면서 내 눈을 들여다보는

그 여신의 애절함이었죠.

그의 또는 그들의 발목을 잡은 것은 괴물이 아니라, 달콤한 친절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요.

대개 박해나 고난이 아니에요. 혹독한 비판자, 엄격한 상관이 아닙니다.

무거운 일, 공부가 아닙니다.

 

함께 놀아주고, 한 번도 안 가본 데 데려다 주고 함께 가주는 친구잖아요.

추운 날은 따뜻한 아랫목입니다. 달콤한 디저트입니다.

나를 칭찬만 해주고, 혹은 내가 편하게 살기 좋게 해 주는 그런 관계들이에요.

그것이 종종 우리를 망하게 합니다. (사사기가 처음에 좋았던 시절이었다니까요)

 

단칸 셋방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 없이는 하루도 살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형편도 나아졌고, 직급도 올라갔어요. 재산도 이만큼 쌓였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무뎌졌습니다.

 

퇴근하고 가면서 술 한 잔 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고,

작은 거짓말로 챙기는 이익도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 내 마음을 두드리는 나쁜 생각..

 

여러분 처음에는 내가 자신있는 것 같았어요.

‘이 정도는 내가 관리할 수 있다.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시작합니다.

 

그러나 마음 자체가 무뎌져요. 어느새 ‘관리할 수 없구나’ 깨달았을 때,

그게 올무인 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내가 올무에 꼼짝없이 갇힌 거예요.

 

삿1:34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그들이 쫓아내지 않으니까, 쫓아낼 수 있을 때 쫓아내지 않으니까,

조금 지나니까요. 아모리 족속이 그들을 쫓아내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쫓겨나는 겁니다.

(만사에 때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죄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죄를 짓습니다.

그러지만 나중에는 죄가 나를 이끌고 가게 됩니다.

내가 관리하겠다고 남겨둔 것에 의해서, 내가 관리당하는 거예요.

 

2: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가시와 올무’

지금은 부려먹기 좋은 일꾼이지만, 그래서 쫓아내지 않고 남겨두었지만,

나중에는 그게 내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가 되고요. 발목을 거는 올무가 됩니다.

그때는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지 못하는 올무가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역사에는 이 경고가 그대로 실현된 장면들이 많습니다.

한일합방이 되었던 1910년, 여러분 일본도 원래 조그만 나라예요.

그때 일본이 무슨 힘으로 한국을 집어삼켰을까요?

 

일본이 일찍 개화했다고 하나, 여러분 처음엔 그만큼 안 됐습니다.

간도 크게 청일전쟁 이겼고, 러일전쟁도 이겼잖아요. 어떻게 가능했는가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영국은 남하 하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 일본과 동맹을 맺고

군함을 지어주면서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일본의 주력 전함들이 영국의 조선소에서 건조되었습니다.

 

미국 또한 이 복잡한 아시아 정세 안에서, 일본을 균형추로 부려먹기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미국 금융계가 유대인들이 장악하고 있잖아요.

특별히 이 사람들이 러시아를 되게 싫어합니다.

 

러일전쟁의 전비를 대는 일본 국채를, 미국 금융계가 대량으로 인수해줍니다.

여러분, 당시같이 그 불안한 상황에서, 일본같은 나라의 국채를 산다는 것은요.

금융상식에 어긋나는 일이었어요. 그런데도 대량으로 일본의 국채를 인수해 줬습니다.

그 돈으로 일본이 러일 전쟁에서 이겼어요. 뒷배가 있었죠.

 

전쟁이 끝난 뒤, 미국은 강화를 중재해줬고,

그 과정에서 일본이 한반도를 장악하는 것을 묵인해 주었습니다.

*'강화'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적대하던 국가들이 서로 맺는 평화 조약(講和)을 뜻함.

 

그때 당시로는 영국과 미국으로서는, (일본을 도와서 키워주는 것이)

아주 합리적인 선택이라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렇게 키워준 일본의 힘이 어떻게 쓰였습니까?

 

40년이 지나지 않아서,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잖아요.

또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아시아의 영국 식민지를 차례로 무너뜨리잖아요.

영국이 자랑하던 전함들을 바다에 가라앉히잖아요. 주1)

 

부려 먹으려고 남겨두었는데, 일본의 힘을 키워줬는데,

그 나라가 결국 영국과 미국에게 칼을 들이댑니다.

영국은 거의 나라가 망하는 위기까지 갔습니다. 자기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들이 너의 옆구리를 찌를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백성들의 반응을 함께 보십시다.

 

◑여호와 앞에서 울고는.. 계속 우상을 섬겼습니다.

 

2:4~5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운지라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울었습니다. 소리 높이고 울었습니다.

이것은 진심입니다. 마음이 찔린 것도 사실이고, 제사를 드린 것도 사실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하나님이 ‘너희들 왜 예배, 제사 안 드리니?’ 하지 않았습니다.

‘왜 이방의 제단을 헐지 않니?’ 라고 말했죠.

그 제단을 헐었다는 말이 없어요.

 

삿2:2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이방인과 맺은 조약을 파기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여러분 부모님이 찾아와서 눈물 흘리면서 ‘이거 좀 제발 하지마라’ 당부했는데,

그 말 안 듣고, 그 말은 싹 제껴놓고,

부모님께 용돈 드리고, 선물 드리면.. 부모님이 좋아하시겠습니까? 아니죠.

 

그럼 이스라엘은 이방 제단을 왜 헐지 않았을까요? 헐면 되는데.

‘혹시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가 아니라,

이방 신이 힘이 있어서 나한테 해꼬지 하면 어떡하지?’

그렇죠. 그런 마음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도 잘 보이기 싫고, 이방 신에게도 찍히기 싫은 거예요.

‘좋은 게 좋은 거야’ 그래서 그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2:4~5절에 울고 나서, 계속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것입니다. ↙

 

2:11~14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 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 넘기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제단은 허물지 않고 그대로 놔두고, 여호와를 계속 섬기는 거예요.

여호와와 이방 신을 둘 다 섬기는 거죠. 혼합주의죠.

 

얼마 못 가서요.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고 있어요.

그래서 이 민족의 역사가 침몰하는 거예요.

고통 가운데로 자기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겁니다.

 

여러분, 그들의 뼈아픈 눈물, 후회의 눈물과

보김에서 실컫 눈물을 흘려놓고는.. 곧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것입니다.

가짜 눈물이었던 거죠. 진짜 삶을 돌이키는 회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배할 때 감동합니다.

말씀 듣는 중에 가슴이 찔리기도 하고, 찬송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오늘은 정말 달라져야 되겠다’ 다짐도 합니다.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도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당을 나서서 주사장에서 차문을 열리는 순간,

그 결심은 이미 절반쯤 사라져 있습니다.

 

이틀 밤 지나서 화요일쯤 되면, 주일에 무엇 때문에 울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눈물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울 때는 울어야 됩니다.

 

‘내가 지금 잘못된 자리에 와 있구나’ 깨닫고 마음 아파하는 것.. 그것도 은혜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는 게 문제예요.

 

△사울왕도 그랬어요. 다윗 잡으러 다니다가 ‘이게 아니구나’ 할 때 소리 높여 울었어요.

얼마 못 가서 다시 창을 들고 다윗 잡으려고 쫓아다녔습니다.

 

사무엘의 옷을 붙잡고, 사무엘의 옷이 찢어질 정도로 매달리면서 ‘잘못했습니다’ 그랬습니다.

삼상15:27

 

에서도 눈물을 흘리며 뉘우쳤지만, 그러나 돌이킬 기회를 얻지 못하였죠. 히12:17

 

반면 베드로는 큰 실수를 했지만, 울었고, 그 눈물이 회복으로 이어졌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고후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세상에 두 가지 근심이 있는 거예요. 모든 근심이 다 나쁜 거 아니고요.

다 좋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고, 세상 근심이 있어요.

 

사람은 근심 하다가, 근심 속에 죽을 것입니다.

이 두 근심,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의 차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게 예수님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입니다.

 

아버지 재산을 가지고 멀리 갔다가,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도 먹지 못하는 상태까지 떨어진

상태에서, 성경을 보시면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먼저 마음을 돌이키는 거죠.

 

여러분 이때 탕자의 표정을 생각해 보세요. 울었겠죠. 근심했겠죠.

자기가 망쳐버린 세월, 아프게 한 아버지의 마음 때문에 스스로 목이 메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울어도요, ‘불효자는 웁니다’ 노래처럼,

그걸로 세상이 바뀌지 않습니다. 20절에 뭐라 그래요?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할렐루야!

 

첫째는요. ‘스스로 돌이켜’ .. 마음의 변화예요.

그 다음에 삶의 방향이 바뀌는 거예요.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구약성경에서 회개를 이렇게 말합니다.

사55: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네, 회개는 이것입니다. 두 개를 바꿔야 돼요.

길을 바꾸고 생각을 생각을 바꾸는 거예요.

 

탕자가 ‘이에 돌이켜 스스로 이르기를’ .. 생각을 바꾸는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가니라’ .. 가던 길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마음의 변화로만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주 그렇게 말합니다. ‘내 마음 좀 알아주세요. 내 진심을 믿어주세요.’

믿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나도 내 마음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막상 코너에 몰리면, 눈물 흘리고 가슴을 치면서 후회하지만,

당장 내일 아침에 내 마음이 어떻게 식어버릴지도 모릅니다.

 

그 눈물이 마르고 나서, 무슨 말을 무슨 일을 할지 모릅니다.

결국 회개는... 그 진정성은 그 사람의 말, 표정, 믿어달라는, 강한 표현,

눈물의 양으로 알 수 없어요. 단 하나입니다.

 

지금 일어나는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발걸음이 아버지 집을 향해서 가는가로만.. 우리가 회개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단 한 발짝이라도 주님께로 나아가야 됩니다. 그게 회개입니다.

마음으로만 안 됩니다. 마음과 발이 함께 가야 됩니다.

생각을 바꾸고, 그랬으면 이제는 길을(삶의 방향을) 바꿔야 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는 정말 좋은 조건, 거의 완벽한 조건에서 망하는 사람들,

망하는 집안들이많 습니다.

반대로 시련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도 있어요.

 

나라도 그래요. 자원이 풍부하고 먹을 것 걱정 하나 없는 나라가

얼마나 피폐하며, 정치권이 서로 싸우며 부정과 부패 가운데 사는지 여러분, 알지 않습니까?

조건은 사람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여러분 자녀를 위해서 아무리 좋은 조건을 만들어줘도요.

그것이 여러분 자녀의 삶을 절대로 지키지 못합니다.

 

▲사사기 전체, 특별히 사사기 맨 마지막에 하이라이트 클라이막스가 삼손이네요.

삼손 한 사람의 삶이 사사기 전체를 굉장히 잘 요약해 줍니다.

 

삼손은 좋은 조건, 모태에서부터 특별히 구별된 나실인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그를 감동하셨습니다. 좋은 능력, 엄청난 기력, 세상 모두가 부러워하는,

요즘 말로 상남자의 조건을 다 갖췄어요. 믿음의 부모까지 있습니다. 최선의 조건이죠.

 

그런데 그 좋은 모든 좋은 거의 완벽한 조건을 가지고도 파멸의 길로 갑니다.

왜요? 작은 타협... 내 품에 안겨있는 여인에게, 그 정도 알려주는 것쯤은 괜찮다고.. 

자기 안에 자신감이 있죠. '내가 이 정도 힘이 센데...'

 

여러분, 우리의 소망은 나의 힘, 나의 능력에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재산, 여러분 자녀의 스펙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심지어 나의 결심, 나의 진심에도 우리의 소망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2:1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할 것이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

여러분, 우리의 소망은요. 나의 결심 나의 진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결심 하나님의 진심에 있는 줄 믿습니다.

한번 맺은 언약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어기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여러분 백성들이 울 때에 비통하게 눈물 흘릴 때, 하나님은 어떤 마음으로 계실 것 같습니까?

자녀가 아프면 부모는 다 아픕니다. 자녀가 울면, 부모는 웃으면서 '괜찮아' 그러지만

돌아서서 더 슬피해 우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거예요.

오셔서 우리를 위해 흘리시는 하나님의 눈물을 보여주셨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또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심한 통곡과 눈물, 간구와 소원의 삶이었습니다. 히5:7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왜 오셨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우리를 구하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게 끝이 아니에요. 여러분, 보김의 백성들은 제사를 드리고

그냥 각자의 성읍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그 눈물의 자리에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든 슬픔과 질곡의 고통의 원인이 되는 자리까지 걸어가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와 대결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예요.

예수님 친히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시며 걸어가시고

마침내 우리를 위한 길이 되신 줄 믿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눈물, 그 사랑 이 만드신 길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요. 더 깊은 근심, 더 뜨거운 내 눈물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 울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않으리라' 그랬잖아요.

백성들이 그걸 믿었을까요? 안 믿었을까요?

믿는다 하다가도 삶의 고난을 만나면요. 흔들리는 거에요. 의심하는 거예요.

 

왜 하나님 우리 도와드리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십자가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할렐루야

 

언약의 신실함!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도록, 더 이상 분명할 수 없도록,

분명히 우리에게 확증해 주신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 친히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사랑을 알면, 십자가의 사랑을 알면 우리는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내 눈물은 귀한 것이지만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울고 뉘우치는 것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죄 안 짓고 정직하게 살겠습니다' 다짐하고 결단하는 것은 훌륭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줄 믿습니다.

오직 예수 십자가 사랑만이 그 은혜만이 우리에게 길이 되십니다.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하십니다. 그 하나님 품에 깊이 안기시는 우리 모두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사랑의 품 안에서 우리의 모든 것이 바뀔 것입니다.

우리의 울음이, 눈물로만 끝나지 않고, 새롭고 산 길,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열매 맺게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또 우리 자녀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살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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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1년 12월 10일,

말레이반도 동쪽 쿠안탄 인근 해상에서 벌어진 말레이 해전에서

일본군 항공대가 영국 해군의 주력함을 격침했습니다.

 

침몰한 영국 군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 (영국 최신예 전함)

리펄스 (영국 전투순양함)이 침몰되었습니다. 일본 폭격기에 의해서.

 

바다 위에서 오직 항공기 공격만으로 당시 최강으로 불리던 거대 전함들이

속수무책으로 가라앉은 대표적 사건이었으며, 해전의 주도권이

거대 전함(수상함)에서 → 항공모함과 항공기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