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설교는, 성도의 <구원>을
-신분의 변화 *칭의
-성품의 변화 *성화
-생활의 변화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화
오늘날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보면
신분의 변화 (칭의) 만으로 끝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틀리지 않고 맞는데, 불충분한, 함량 부족의 복음입니다.
물론 성품의 변화, 생활의 변화(성화)는,
그 다음 시간에, 다른 시간에 이어서 전하면 되겠죠.
그런데 복음을 ‘신분의 변화(칭의)’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큰 실수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보십시오.
그가 칭의의 복음을 전한 다음에
성령으로 인한 변화의 삶(성화)을 동시에 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에도 보면, ‘후반부’가 꼭 있습니다.
‘전반부’는 복음을 가르치고, ‘후반부’에는 성화, 변화된 삶을 가르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였습니다.
그리고 산상설교에서 길게 ‘천국 성도의 변화된 삶, 변화된 생활’에 대해서 가르치셨죠.
산상설교(마5~7장)가 복음입니까?
네, 예수님이 가르치신 복음이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는, 그게 복음이 아닌 것처럼 여겨집니다.
예수님은 ‘변화된 삶, 성품의 변화, 생활의 변화’를 중점적으로 가르치셨으니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 = 바울의 복음으로 믿어야지,
예수님의 복음 ≠ 바울의 복음으로 믿으면 안 됩니다. (현실은 많이들 이렇게 믿고 있죠)
설교를 듣다 보면, 또는 녹취를 하다 보면,
항상 복음을 전한다는데, ‘신분의 변화(칭의)’로 복음 증거를 끝내버리는 게
많이 아쉽습니다.
그것은 틀린 것은 아닌데, 일부분만 (동전의 앞면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복음을 전하는 분들은,
예수를 믿고 신분의 변화와 아울러 *칭의의 복음
성품의 변화, 생활의 변화까지... 이어지는 복음을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성화의 복음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을 보십시오! 신분의 변화(칭의)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폴 워셔는, 성품의 변화, 생활의 변화(성화)가 드러나지 않는 사람은,
신분의 변화(칭의)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봅니다.
칭의가 일어났으면, 성화가 자동 뒤따르기 때문이죠.
※또 아래 설교에서 요일3:2절의 해석이 나옵니다.
이 해석이 맞습니다. 그 구절은
‘우리가 예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고, 성숙되어져 간다’는 뜻이지,
그 구절이 ‘우리가 죽고 나면, 예수님의 성품처럼 확 바뀌어 변화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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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 요.한1서 3:1-3 | 2025.12.03 | Youtube
◈변화 요일3:1-3 2025.12.03.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변화됩니다. 우리가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생의 주인이 바뀌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바뀌면 모든 것이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은 후에 여러분의 삶에는 어떠한 변화가 있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을 믿었다면
우리의 삶에 반드시 있어야 되는 <변화>가 무엇인지를 3가지로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로, 우리 삶에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이 달라질까요?
자, 예수님을 믿는 순간 최우선적으로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가 찾아올까요?
◑1. 첫 번째 변화는, <우리의 신분이 변화>됩니다.
요일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어요.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는 것이죠.
그럼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는 뭘 하던 사람이었고, 누구였던 것인가요?
우리는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종노릇 하던 자입니다.
그런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서, 하나님의 자녀를 삼아 주셨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변화된 것입니까? 우리의 신분이 변화가 된 것이죠.
우리는 영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은혜 가운데 주님을 믿게 되었을 때,
영생을 누리는 천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중에서 우리를 건져내서 의롭다 칭해주셨기 때문이죠.
자 이 시점에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네, ‘용서받은 의인된 죄인입니다.’
우리는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인이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의인이에요.
자 그렇다면 이제는 후속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러분은 죄를 다 깨끗이 청산하시고, 의롭게만 살아가고 계시죠?’
아니에요? 의인이라면서요. 아니 의인이 의롭게 살아가지 않나요?
의인인데... 우리는 실제 우리의 현실을 뚜껑을 열어보면,
수도 없이 많은 죄를 날마다 지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우리의 이러한 현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라는 질문 앞에서, 망설일 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성경에서는 나를 의인이라고 칭해주셨는데,
나의 삶을 보니 나의 현실을 들여다보니,
나는 매일 수도 없이 많은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거든요.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서, 도저히 내 입술로는 ‘내가 의인입니다’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현주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찌된 일이며, 어떻게 정리를 하면 좋겠습니까?
여러분이 이미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가 신분상으로는 의인입니다. *‘법정적 의인’
하나님께서 의롭다 칭해주셨기 때문이죠.
그런데 실제 우리의 행함과 행실로는 죄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는데,
그러면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죄는 내가 지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죄값을 대신 치러주셨기 때문에,
빚은 내가 졌지만, 예수님께서 그 빚을 대신 갚아주시고 완불해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예수님의 의로
그 주님의 의가 나에게 전가가 되어, 나는 이제 무죄 판결을 받고, 의인이 된 겁니다.
나는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분상으로는 의인이에요.
그러나 실제 우리의 행함과 행실로는 죄성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구원을 설명할 때 법정 용어를 사용하죠. ‘칭의’라고 합니다.
우리가 실제로 의롭게 살았기 때문에, 그 의로움을 인정받아
하나님께서 ‘너는 의인이다’ 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죄성을 그대로 갖고 있고, 날마다 사고치고 죄를 범함에도 불구하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예수님의 의가 나에게 전가가 되어,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 나를 바라봐 주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은혜 덕분에, 우리를 의롭다 칭해 주셨기 때문에.. ‘칭의’ 입니다. 중략 주1)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 1절을 다시 한번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요일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여기서 ‘보라’는, 강조헤서 말할 때 쓰는 표현이죠.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를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해주셨는지를,
하나님의 그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그냥 천하의 죄수인, 추악한 죄인인 나를 과거를 보셨고,
이미 미래도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기 전에도 하나님 속썩이다가
예수님 믿은 후에도 여전히 속썩일 것을 이미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내어주셨다고요?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희생시키시사,
하나님의 아들의 목숨값을 주고 우리의 신분을 변화시켜 주셨다는 겁니다.
‘나는 이 사람을 꼭 (구원하기) 원해!’ 하셨는데,
그를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기가 막힙니다.
과거도 처참하고, 미래도 형편없습니다. 근데 이 사람을 (구원하기) 원한다는 겁니다.
너무나 원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목숨 값을 내어주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어요.
그렇게 우리의 신분이 변화가 됐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신분이 변화가 됩니다.
하나님 자녀 되었다는 사실을, 오늘도 감사하고 감격하면서 살아가게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2. 두 번째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무엇이 달라질까요?
우리의 삶에 반드시 찾아오는 두 번째 변화는 <우리의 성품이 변화>됩니다. *성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어요. 실제로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셨어요.
우리가 잘한 게 하나도 없고, 못한 것밖에 없는데...
실수투성이요. 죄투성인 우리를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어요.
‘네가 죄를 청산하고 오면, 네가 거룩하게 살면,
네가 정말 의로운 사람이 되면, 그때 내가 구원해 줄게’ 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잘한 것 하나도 없는데,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그때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받아 주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그냥 죄투성인체로 계속 살아도
뭐 하나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과 아무런 상관없이 살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시는 분이니까,
우리를 계속 그대로 내버려 두시겠죠?
아니에요? 왜죠?
죄인인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시잖아요.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잖아요. 앞으로도 그러시겠죠.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 무궁토록 동일하신 분이시니까요.
아니에요? 왜 아닐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처음엔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지만,
또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는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살아 역사하시기 시작하시죠.
그래서 오늘의 본문 말씀 2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놀라운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요일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 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자, 3:1절에서는 우리의 신분을 변화시켜 주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분상의 변화예요.
우리가 실제로 모든 죄를 다 청산하고, 다시는 죄를 안 지는 완벽한 의인이 된 건 아니에요.
그런데 본문 2절 말씀에 보면, 언젠가는 주님을 만나게 될 텐데,
주님을 만나게 그날에는, 우리가 누구와 같을 것이라고요?
주와 같을 것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주와 같이 된다고?’ 내가 주님을 닮은 사람이 된다고요?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계속 죄투성인 모습으로 살아가는데요.
왜 언젠가 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되는 그날에, 주와 같을까요?
(주님과 비슷한 성품과 인격이 되어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와 한 걸음 한 걸음 동행하사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시고야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은 그분의 저서 "Just Like Jesus"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습니다. *한국어 제목 <예수님처럼>
"Jesus loves you the way you are,
but He refuses to leave you that way.
He wants you to be just like Jesus." .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그와 동시에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또한 묻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안 변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 집에도 있잖아요.
세상에서 가장 안변하는 게 뭘까요? 사람이예요.
10년이 지나면 강산이 변합니다.
그런데 10년이 두 번 지나고 열 번 지나도 ... 사람은 여전히 안 변해요.
30년 전에 제가 떠났던 한국과, 지금 제가 돌아온 한국은 완전히 다른 나라예요.
완전히 다른 나라예요. 옛날에 제가 살던 동네로 가면, 살았던 집도 제대로 못 찾을 거예요.
옛날에는 단독주택에서 이렇게 동네 친구들과 뛰놀면서 흙바닥에서 자랐는데,
이제는 가 보면, 다 아파트 숲으로 번했죠. 완전히 다른 나라예요.
10년만 지나도 강산이 변하는데요. 사람은 그대로예요.
하여튼 기필코 안 변하는 게 사람이에요. 사람은 참 안 변합니다.
그런데 변합니다.
복음은 우리 성품을 새롭게 변화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마치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것처럼, 본성이 (죄성이 남아있으면서도) 변화됩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가끔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나, 자기 삶이 변화가 안 되었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건 아직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질적 변화’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걸 사람들은 보통 회심 conversion 이라 부르죠.
이 변화 transformation 가 나타나지 않으면,
신자는 자기의 구원을 철저하게 의심하며 되돌아봐야 됩니다.
오늘날, ‘변화’가 없는 ‘구원’이 유행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경적 구원관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능력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사람이 정말로 변합니다.
모세의 삶을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정말 혈기를 잘 주체 못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혈기왕성하던 40대 때, 애굽 사람을 때려죽입니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질긴지 아세요? 어지간하게 때려서 사람이 죽지 않아요.
사람의 숨통을 끊어놓으려면, 정말 어마무시하게 많이 때려야 됩니다.
아니면, 그가 운이 없어서, 한 대 맞았는데 그만 급소를 맞았든지,
또는 어디 뾰족한데 부딪혀서 쉽게 죽기도 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사람을 죽일 만큼 혈기를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어요.
하나님께서는 미디안광에서 그를 40년 동안 훈련시키세요.
그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던 사람을, 온유한 사람으로 바꿔버리십니다.
그런데 역시 그 혈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어요.
광야를 지나면서 언제 그것을 우리가 결정적으로 볼 수 있을까요?
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서 우상숭배를 하죠.
그러자 그가 가지고 내려온 십계명 돌판을 내던져서 산산조각 내버립니다.
아니 이게 뭐 의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의분을 표출하고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산산조각 내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역시 혈기를 주체 못하는 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 또 광야에서 훈련을 시키세요.
자 이제 마지막으로 민수기 12:3절에 보면
그가 죽음을 앞에 두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총망라하여
‘모세는 말이야 이런 사람이야’ 라고 딱 한마디로 요약을 해 주십니다.
‘모세는 지면에 있는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더하더라’ 주2)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하나님은 그의 성품을 변화시켜 주신 거예요.
완전히 한쪽의 극단에서 다른 극으로 가버릴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반드시 변화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마찬가지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사마리아 성에서
그들이 유대인이요,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보고, 예수님 일행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뭐라고 이야기를 하죠?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눅9:54
그냥 한마디로 ‘저 싸가지 없는 것들 싹 다 불태워 쓸어버리십시다.’
그만큼 그들도 혈기를 주체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를 예수님께서는 다듬어 가십니다. 모난 부분을 깎아 내려가십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훗날 ‘사랑의 사도’라는 별명을 얻게 돼요.
그 사람이 누구죠? 오늘의 본문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사도 요한이에요.
요한과 야고보 형제가 그렇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들을 그냥 다 싹 진멸시켜 버리옵소서’ 라고 말하던 그 요한이 *우레의 아들
예수님의 다루심의 손길을 통과한 후에
‘사랑의 사도’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온유하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입만 열면 항상 똑같은 메시지를 전했다고 합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맨날 그 메시지만 전했대요.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보세요. 제가 수요예배, 금요예배, 주일예배 때,
입만 열었다면 ‘여러분 서로 사랑하세요’ 이 메시지만 전했다면,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처음에는 좀 은혜롭다가도, 맨날 밤낮 똑같은 메시지만 전하니까, 이제 식상하겠죠?
그래서 교회 전승에 보면, 어느 날 교인들이 찾아와서 사도요한에게 물었대요.
‘사도님, 서로 사랑하라고요? 알겠어요. 계속 그 메시지만 전했잖아요.
그러니까 이제는 좀 다른 메시지, 새로운 메시지를 좀 전해주세요.’
그러자 사도 요한이 뭐라고 답했을까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그 정도로 온유한 사람이, 사랑의 사도가 되었다라는 겁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람은 반드시 변합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절대로 가만 놔두지 않고, 반드시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변할 것이라는 희망을, 소망을, 우리는 품고 살게 되죠.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누구의 성품의 변화를 기대해 볼 수 있을까요?
지금 혹시 남편 얼굴 떠올리고 계신 건 아니죠.
혹시라도 시어머니나 며느리 얼굴을 떠올리셨다면,
또는 나를 괴롭히는 상사나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친구나 동료를 생각하셨다면,
지금까지 모든 메시지를 잘못 들으신 겁니다. 나 자신을 떠올리셔야 합니다.
주 안에서 사람은 반드시 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런데 가장 관건은 누구의 성품이 변하느냐 하는 겁니다. 누구예요?
나의 성품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만큼, 여러분 남편이 아내가 변하지 않을 거예요.
근데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만큼, 누가 변한다고요?
남이 아니라 내가 변합니다.
그리고 내가 변하면? 모든 것이 변화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품은 소망입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사람은 변하니까, 내 남편도 변화시켜 주겠지.. 라고 하지 마시고요.
그건 헛된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변화되겠지’ 그 소망을 품고,
오늘도 행복하게 주님과 동행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3. 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삶에 무엇이 변화가 될까요?
마지막 세 번째 변화는 <우리의 생활이 변화>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장 먼저 신분이 변화가 되죠.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성품이 변화가 됩니다.
성품이 변화가 되니까 자연스럽게 또 뭐가 달라질까요? 우리의 생활이 달라질 수밖에 없겠죠.
성품의 변화로, 우리의 가치관이 달라지고, 인생관이 달라지며, 세계관이 달라졌어요.
그러니 우리의 생활이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예전에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이
예수님을 믿고 보니 왜 이렇게 하찮게 여겨지던지,
예전에는 크다고 생각하는 게, 왜 이렇게 작게 보이던지,
또 예전에는 작게 보이던 것이 왜 이렇게 크게 보이는지,
삶의 우선순위가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졌기 때문에, 생활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시점에서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면 어때요? 불쌍하죠.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우리는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알고,
창조자 하나님이 시퍼렇게 살아계시다는 것을 알며,
이 삶이 끝나면 영원한 세계가 펼쳐질 것을 알고,
심판대가 기다리는 것을 알고 있으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서 오늘도 여전히 나와 함께 동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믿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걸 모른단 말이죠. 구원도 모르고 창조주도 모르고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그냥 마치 이 세상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여기에 전부를 내어 걸고 사니, 세상에 이것만큼 불쌍한 삶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을 굉장히 불쌍히 여깁니다.
그러면 그들 입장에서 바라본 그리스도인들은 어떨까요?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참으로 놀랍게도, 우리를 불쌍히 여겨요. 왜 그럴까요?
아니, 우리가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되는데
왜 그들도 우리를 불쌍히 여길까요?
▲제가 미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 신학교를 가기 전에, 잠시 직장 생활을 했었어요.
그때 저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나의 상사와 직장 동료를 예수님 믿게 할 것인가?’ 였죠.
근데 이게 생판 처음에 그냥 생고구마인 사람을, 갑자기 딱 앉혀놓고
‘선생님, 오늘 밤에라도 이 세상을 떠나신다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이렇게 말할 자신이 없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래서 제가 제일 처음 먼저 했던 것이,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겁니다.
일단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알리면,
그 다음부터 자연스럽게 교회 이야기 할 수 있겠죠?
자연스럽게 성경 이야기도 할 수 있겠죠?
궁극적으로 자연스럽게 예수님 이야기 하려고, 제가 그리스도인 이라는 사실을 알렸어요.
그랬더니 하나같이 이렇게 반응을 하는 거예요.
‘참 불쌍하다. 너 어쩌다가 그렇게 됐니?
너 멀쩡하게 생겨가지고서는 왜 예수를 믿고 교회 생활을 하는 거니?’
그들은 정말 저를 불쌍히 여겼어요.
수요일 저녁에 수요예배 가야 되죠. 금요.일 저녁에 금요예배 가야 되죠?
그 다음에 주일날에도 놀러가지도 못하고 맨날 교회가고
그 외에도 무슨 청년부에서 행사만 있으면, 저는 그것 때문에 정신이 없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주위에서 저를 맨날 불쌍히 여겨요.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생활이 달라진 걸 보고 그것을 좋게 여기는 게 아니라, 불쌍히 여깁니다.
아이고 이런 이야기를 하죠.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재미로 사나? 술도 못 마셔, 담배도 못 펴, 클럽에도 못 가,
그 흔한 거 피워보지를 못해, 아니 주말이 되면은 이제 좀 여행도 가고,
딱 골프장에서 골프도 치고 말이야, 삼겹살을 먹을 때는 음료도 같이 걸쳐서 먹고 해야지...’
‘이런 재미로 살아야지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재미로 살아요?’
그런 질문 진짜 많이 받아보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우리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그래서 서로 긍휼히 여기는...
이런 상황이 연출된단 말이에요.
이거 손해보는 장사 아닌가요? 뭐 물론 뭐 천국에선 영생을 누리겠죠.
근데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진짜 재미없게 부담 100배로써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걸까요?
당연히 아니죠. 성경은, 그게 절대로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라
가장 수지 맞는 장사라고 합니다.
우리의 생활이 변하는데요. 우리가 억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소망과 소원을 두고 “자연스럽게”
그 길로 기쁨으로 이끌어 가신다는 거예요.
내가 그 생활을 좋아하고, 내가 그 경건 생활을 즐기는 거죠. 억지로, 외식이 아니라요.
▲그래서 오늘의 본문 말씀 3절에 보면 무엇이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요일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 생활이 확 달라져요. 깨끗해져요. 정결해져요.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돼요. 죄의 습성과 세상의 쾌락을 다 끊어내게 돼요.
그런데 그것이 억지로 해야 되니까 왕의 명령이니까,
의지를 쳐서 복종시킨 결과가 아니라, 마음의 소원으로 인해서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언젠가 내 사랑하는 그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그때 내가 정말 깨끗한 모습으로 서야지,
그때 내가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서야지,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니까, 그렇게 되고 싶은 거예요.
△한번 이렇게 생각을 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 미혼도 있을 수 있겠지만, 아마 대부분의 경우 결혼하셨죠?
그럼 이제 여성분들 같은 경우는 웨딩드레스를 입으셨을 거예요.
모든 사람들에게 그날만큼은 제일 예뻐 보이고 싶은 거예요.
그 소망이 있어서 기쁨으로 뭐를 해요? 다이어트를 해요. 그 힘든 다이어트를 합니다.
누가 막 총 들고서는 강요해서 하지 않고, 내가 기뻐서 나의 마음에 있는 소망으로 인하여
스스로 다이어트를 하는 거예요.
본문 2절에 보면, 예수님을 만나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했죠.
그날에 나는 우리는 주님과 같을 것이라고 했어요.
자 이제 마지막으로 읽은 3절에 보면,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목숨도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서 기꺼이 내려놓으신
나의 신랑 되시는 나의 삶을 무한한 은혜로 감싸 안아주신 주님,
내 과거를 봐도 처참하고, 미래를 봐도 형편없는 나를 선택하사
오늘도 나와 함께 계시고, 언젠가 나를 신부삼으러 신랑으로 다시 오실 그분을 만날 소망으로
다이어트 하겠다는 겁니다. ‘나는 스스로 나를 깨끗하게 하리라!’
그날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 내가 예뻐 보이고 싶거든요. 그날에 예수님께 칭찬받고 싶거든요.
그날에 예수님을 활짝 웃게 해드리고 싶거든요.
그 소망으로 인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니까 가슴이 설레여서,
다른 사람은 미친 짓이라고 해도 나는 기뻐요. 나는 즐거워요.
내가 자원해서 자발적으로 깨끗하게 정결하게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 그게 신앙생활이에요.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정말로 만나면요. 생활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오늘 무엇이 달라지는지를 함께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첫 번째로 신분이,
두 번째로 성품이,
세 번째로 생활이 달라지는 겁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이 변화됩니다.
그 변화된 삶을 누리며 기뻐하며 오늘도 신나게 주님과 동행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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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중략된 부분
자, 그렇다면 이 시간에,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너무나 의롭게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또는 전적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를 어여쁘게 여기서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니죠.
우리는 죄의 구렁텅에서 굴러다니던 사람입니다. 생각하는 것마다 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전적인 은혜로, 무상으로,
은혜와 긍휼을 쏟아부어 주사, 우리를 구원해 주셨어요. 나는 어마어마한 은혜를 입은 것이죠.
그럼 그렇게 큰 은혜를 입은 우리가,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예전에는 죄가운데 살았어요. 근데 이제 정말 은혜로 영생을 누리게 됐잖아요.
정말로 그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면, 앞으로는, 이제후로는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마땅히 의롭게 살아야 되겠죠. 마땅히 순종하며 살아야 되겠죠.
그런데 우리의 현주소를 들여다보니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 믿기 전에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오늘도, 지금도 그리고 내일도 죄를 열심히 지으면서 살아갈 겁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시기 때문에, 우리 과거만 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재와 미래도 이미 알고 계셨죠.
그래서 주님은 그렇게 은혜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희생시켜 우리를 구원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죄를 지을 것을 알고 계셨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선택하셨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은혜이죠.
△자 여러분도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여러분이 아주 탁월한 투자가라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여러분이 한 사람에게 이제 어마어마한 금액을 투자하실 겁니다.
그 사람의 뭐를 보시겠습니까? 둘 중에 하나는 보시게 될 거예요.
과거를 보든지, 미래를 보든지...
과거를 보니까, 이 사람이 똑똑하고, 명문대를 졸업했으며,
실제로 지혜롭게 일을 처리하고, 사업을 잘 경영하더라는 거예요.
과거를 보니까 실력도 탁월하고 머리도 똑똑하고 성품도 성실합니다.
그러니 과거가 좋으니까, 그 좋은 과거를 보고 투자해 주실 수 있겠죠.
또는 과거의 전력은 뭐 이렇다 할 만한 탁월성이 보이지는 않아요.
그러나 이 청년의 미래를 예측컨대, 장래가 촉망된단 말입니다.
지금은 병아리 수준이지만, 나중에는 굉장히 크게 대성할 친구예요.
그 미래가 좋아 보이면, 미래를 예측하며 또 투자를 할 수가 있겠죠.
그래서 과거를 보든지 미래를 보든지, 둘 중에 하나는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의 과거를 보니까 처참해요. 미래도 예측해보건대 여전히 처참하다면,
여러분 같으면 투자하시겠습니까? 그런 사람 아무도 없겠죠. 그거는 바보 짓입니다.
근데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미 다 보셨어요.
우리의 과거를 보니까, 총체적인 난국이에요.
미래를 보니까 여전히 구제불능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아시고도 선택해 주셨다는 겁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창6:6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한탄하셨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왜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바라보시면서 한탄하셨을까요?
창6:5절에서 그 정확한 이유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사람이 마음의 생각하는 것마다 악함 뿐임을 보시고’
우리의 가운데 선한 게 없어요. 생각하는 것마다 악해요.
뼛속까지 죄인인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한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슬퍼하셨습니다.
그것이 비단 창세기 6장에 등장하는 사람들만의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니요. 롬7장에서 똑같이 같은 현실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말씀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아침에 눈을 떠서 하루를 쭉 살아가면서
우리의 중심에 가장 지속적으로 가장 끈질기게 가장 간절하게 있는 생각이
‘어떻게 하면 나의 삶의 모든 순간 가운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나를 더 희생시켜서, 다른 사람을 섬기고 도와주고 사랑하며
나에게 상처 준 사람도 용서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복음 붙들고, 복음을 전파하고, 복음을 살아낼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가장 간절한 바람이요. 나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생각 맞습니까?
아니면, 그런 생각을 안 하는 건 아니지만,
부수적으로 시간 날 때 산발적으로 가끔씩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대신에 우리는 아침에 눈을 떠서,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하면 나와 내 가족이 더 출세할 것인가? 더 잘 먹고 잘 살 것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 남편이, 내가, 내 자식이 더 잘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다 어쩌다 한번,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는 아니겠습니까?’
그게 우리의 현주소에요. 그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걸 알고도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 1절을 다시 한번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요일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주2) ‘모세는 지면에 있는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더하더라’ 민12:3
민수기는 '가데스바네아 정탐꾼 파송, 보고 사건'을 기점으로,
민수기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뉩니다. 대략 민수기 14장을 기준으로 볼 수 있죠.
그렇다면 모세의 온유함이 뛰어나다는 민12:3절은,
민수기 전반부 사건으로 볼 수 있으나, 그렇게 기계적으로 잘라서 볼 필요 없고,
그러나 민수기 저자가.. 오랜 세월 후에, 민수기를 두루 조망하면서
‘모세는 지면에 있는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더하더라’
이 구절을, 거기(민12:3에)에 끼워넣은 것으로 봅니다. 꼭 민수기 전반부 시점이 아니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