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자인가, 애국자인가? | 예레미야 37:11-15 | 2026.08.16 | Youtube
◈반역자인가, 애국자인가? 렘37:11-15 2026.08.16. [예레미야 30강]
오늘은 예레미야 37장을 본문으로 해서, “반역자인가? 애국자인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이 땅을 지나간 정치가들이
가장 처세하기 힘들었던 시대가 언제였을까요?
아마도 이씨 조선 말기, 고종시대부터 시작해서 고종말기
소위 ‘대한제국’으로 불리던 시절까지, 그리고 일본의 식민지 통치로 들어가기 직전까지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고종은 국운이 기울어지자 1897년 대한대국을 선포하고,
마지막으로 근대 국가를 세워보자는 승부수를 던집니다.
무엇보다 ‘이 나라는 중국에 속한 나라가 아니다’ 라고 그는 선포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때는 늦었습니다.
이미 이 땅에 모든 정치가들은 개혁세력과 보수세력으로 나뉘어져
첨예한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고, 이 나라에 진출하기 시작한 소위 열강의 제국들,
러시아, 청나라, 일본, 미국, 영국, 이런 여러 나라의 이해들은
이 땅을 먹이로 하려는 치열한 갈등을 이 땅에서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 땅의 관리들 소위 정치가들은, 과연 어느 나라 편에 서야 할지,
그리고 어떤 길이 애국의 길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혼란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소위 정치적 풍문아였던 이완용의 발자취가
이런 혼란을 대표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처음부터 친일파나 매국노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가정적으로 흥선대원군과 가까운 소위 수구파에 속하는 그룹이었습니다.
하지만 열강들이 이 땅에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1886년, 정부가 영어교육과 서양학문을 도입하기 위한 육영학원을 세우자,
제일 먼저 이 학원에 입학해서 영어를 배우고, 서양식 교육을 그는 수용했던 사람입니다.
*공식명칭은 育英公院, 公園 아니고 교육기관.
그리고 고종이 미국의 워싱턴에 이제 조미통상조약 이후에 조선공사관을 세우자
이완용은 공사 몇 사람 중의 한 일원으로서 미국 워싱턴에 체류하면서
대표적인 친미파 관료로 그는 변신합니다.
제가 워싱턴 DC를 가끔 이렇게 방문하면, 과거에 조선 공사관이었던 그 건물이
지금은 박물관으로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습니다. 저는 여러 번 다녀왔는데요.
또 사람들에게 소개해서 같이 가기도 하고...
그 3층짜리 자그마한 건물에 가면, 이완용의 발자취를 그대로 거기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그는 조선이 청나라나 혹은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미국의 후원이 필요하다고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이완용은 소위 윤치호, 서재필, 이상재 같은 기독교 애국자들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1896년, 그는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에 참여하며, 독립문 건립에도 참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해 1896년 소위 명성왕후 시해 직후에 신변의 위기를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소위 ‘아관파천’을 하자,
그는 급작스럽게 러시아에 속한 관료로 변신하기 시작합니다.
아관파천 시절, 그는 우리나라를 대신하는 외무대신, 농상공부 대신으로 農商工部 大臣
러시아 공사관에서 그는 관료의 직무를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러시아를 통해서 우리 조선을 보호하려는 나름대로의 애국적 변신이었다고 할 수가 있죠.
그때만 해도 그는 러시아를 등에 업고, 일본을 사실은 견제하는 입장에 섰던 사람이었죠.
하지만 청일전쟁이 일어나요. 그리고 일본이 승리합니다. 1894~1895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다시 이 전쟁마저 일본이 승리하자,
영국과 미국이 사실상 일본의 한국 지배를 용인하는 국제사회의 정치적 흐름을 보이자,
그는 갑작스럽게 친일파로 변신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정치적 이익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은 수구파에서 친미파로, 그 다음에 친러파로,
그리고 마지막엔 친일파로 갈아탔고, 그 시도가 성공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시대에 가장 까다로운 질문은 ‘누가 과연 반역자인가, 누가 참된 애국자인가?’
라는 물음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 렘37장에서 관찰하는 예레미야 시대에는
바벨론 제국과 이집트 제국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서 유대나라는 국제적인 이해 충돌 사이에서 어떻게 '국가의 생명을 유지할 것인가'
를 모색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서서히 유대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 가고,
유다를 향한 바벨론의 침략의 검은 손이 미치자,
갑자기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 외치기 시작합니다.
조국 유다 나라의 왕에게, 그리고 정부를 향해서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만이 백성들의 목숨을 보존하고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이라고!
그때 당시 당연히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저 선지자 예레미야는 과연 반역자인가, 아니면 애국자인가?’라는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자!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했다는 소식이 전해질 그 무렵
이집트에서는 유대 나라와 맺었던 과거의 동맹을 근거로, 이집트 군대가 북진을 시작합니다.
바벨론에 맞서기 위해서였죠.
그러자 잠시 바벨론은 예루살렘에서 물러서며 철수합니다.
예루살렘의 포위가 잠시 풀어지게 된 것이죠.
그래서 잠시 평화의 시기가 찾아오자,
예레미야 선지자는 베냐민 땅으로 갑니다.
렘37:12 ‘예레미야가 베냐민 땅에서 백성 가운데 분깃을 받으려고 예루살렘을 떠나
그리로 가려 하여’
‘분깃을 받으려고’ .. 받은 상속을 정리하러 가는 길이었어요.
지금 예레미야는 자기 고향이자 제사장 마을인 아나돗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북쪽으로 5 Km 떨어진 곳이에요. 먼 길은 아니에요.
지금 여러분이 이스라엘에 가면, 과거 오스만 터키 시대에 지었던 예루살렘 성이 있어요.
그 성문 바로 바깥이 베냐민 땅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포위가 풀려서) 고향을 방문하려는데,
예레미야가 빠져나올 무렵에, 성문을 지키는 유대 관리들에게 붙잡힙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벨론에 항복하려는 사람’으로 오해를 받아 감옥에 갇힙니다.
방향이 북쪽으로, 바벨론 군대가 있던 방향이었죠.
다시 그를 향한 이런 질문이 던져졌을 것입니다.
‘그는 과연 반역자인가 아니면 애국자인가?’
물론, 저와 여러분은 오늘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만 성실했던 ‘신국자’,
즉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었음을 압니다. *애국자에 빗대어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적인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참된 애국자는 누구일까요?
사람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참된 애국자는 누구이겠습니까?
◑1. 참된 애국자 그 첫번째는, <세상 권력에 편승하지 않는 사람> 입니다.
세상 권력에 편승하지 않은 사람!
우리는 한 사람의, 혹은 한 정치가의 처세에 있어서
그가 어떤 세력과 더 가까운가? 혹은 더 먼가?
이것에 따라서 친OO파, 혹은 반OO파.. 이런 별명을 붙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보면,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향해 말할 때
그는 친미파, 친중파, 친러파, 친일파 혹은 반미파, 반중파, 반러파, 반일파
이런 별명들을 지금도 붙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어디에 속하는 사람일까요?
그는 친 바벨론파일까요? 친 애굽파일까요?
아니면 반 바벨론파일까요? 반 애굽파일까요?
어떤 '파'라고 당시의 사람들은 말했을까요?
아마도 당시의 왕이었던 시드기아 왕에게,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권했던 그는,
아마도 '친 바벨론파'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 당시에 로마 제국이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또 로마 제국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예수님은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예수님도 어쩌면 ‘친 로마파’로 오해받으셨을 가능성이 가장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직접 물어보십시다.
아니 예수님에게 직접 한번 질문을 던지십시다.
‘예레미야여, 예수님이여, 당신은 어떤 파에 속하셨던 분이십니까?’
그때 예수님은 뭐라고 대답하실 것 같아요?
요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그 당시에 이 말에 실망할 사람도 많았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철저하게 그분이 오직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었음을,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을 따르는 그분의 제자, 그분의 종이라면
여러분, 오늘 우리도 어떤 길을 걸어야 할까요? *지금 좌파, 우파가 나눠어져 있잖아요.
세상에 어떤 권력에도 편승하지 않고,
오직 그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마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먼저 구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예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그분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십니다.
이 기도를 우리는 ‘주의 기도’라고 말합니다.
마6:10절의 ‘주의 기도’의 가장 중요한 대목을 같이 읽어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아멘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종된, 혹은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들은,
이 변하는 세상에서 국제정세를 따라, 이 나라 혹은 저 나라를 선호하거나,
어떤 강대국을 우리가 그냥 생각 없이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또 마치 그 강대국이 우리의 모든 것을 보장해 줄 것처럼 착각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궁극적인 그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그 나라의 왕 되신 하나님, 그 나라의 통치자이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끊임없이 교통하며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기를 추구하는
하나님의 사람,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신국자 神國者요, 참된 애국자의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 잊지 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적 의미에서의 참된 애국자가 되십시다.
◑2. 누가 진짜 애국자예요? 두 번째로 그는 <고난 중에도 믿음의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렘37:11 ‘갈대아인의 군대가 바로의 군대를 두려워하여 예루살렘에서 떠나매’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바벨론이 일시적으로 포위를 풀고 후퇴했어요.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자 잠시 찾아온 평화의 시기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한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37:12 ‘예레미야가 베냐민 땅에서 백성 가운데 분깃을 받으려고 예루살렘을 떠나 그리로 가려 하여’
예레미야는 베냐민 땅으로 갑니다.
베냐민 땅은 선지자 예레미야의 고향, 아나돗이 있던 곳으로, 제사장 마을입니다.
자, 왜 갔을까요? 얼마 전에 예레미야가 한 번 투옥되었는데
그 왕궁의 뜰에 갇혀있었을 때, 조카 하나멜이 찾아와서 자기 땅을 사달라고 말하죠.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그 땅을 샀습니다. *32장
전시 戰時에 땅을 사봤자, 아무런 이익이 없어요. 근데 샀단 말이죠.
왜 샀느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32: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지금은 전쟁터로, 유대 나라 땅이 바벨론에게 짓밟혀 있지만,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일구게 되리라’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그걸 예레미야는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조카 하나멜의 요청을 듣고 ‘이건 하나님의 뜻이다’ 믿고서 그 땅을 샀던 것입니다.
잠시 감옥에서 풀려난 이 시기에, 그는 자기가 샀던 조상의 땅, 조상의 유업,
그 땅을 점검하고,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을 확인하는 기회를 갖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사실 전쟁의 분위기는 아직도 가시지 않은 위험한 때였지만,
선지자에게 있어서 약속의 땅을 확인하는 것은, 믿음의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잠시 후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그가 마치 바벨론 군대에게 항복하기 위해서 성문을 나간 것처럼 오해를 받고,
다시 투옥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37:13 ‘베냐민 문에 이른즉 하나냐의 손자요 셀레먀의 아들인 이리야라 이름하는 문지기의
우두머리가 선지자 예레미야를 붙잡아 이르되 네가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는도다’
예레미야는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지요.
37:14 ‘예레미야가 이르되 거짓이다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이리야가 듣지 아니하고 예레미야를 잡아 고관들에게로 끌어 가매’
그래서 마침내 예레미야는 다시 투옥을 당하지요.
37:15 ‘고관들이 노여워하여 예레미야를 때려서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 집을 옥으로 삼았음이더라’
선지자는 고난 속에서도,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이 말씀으로 행동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에 대한 믿음의 행동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한 사람의 진정성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행동의 일관성, 소위 consistency, 일관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행동은 일관성이 있는가?’ 중요한 질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진정성은, 바로 그의 일관성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고난 중에서나, 평화의 때에서나,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일관적으로 전했고,
또한 자기 스스로 그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그 행동 때문에, 자기에게 더 커다란 오해와 더 커다란 고난을 초래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믿음의 행동이에요.
바로 그것으로, 그는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살았던
‘하나님 편에서의 애국자’였음을 보여주었습니다.
◑3. 자, 그가 하나님 편에 선 애국자였음을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세 번째는 <고난 중에도 그는 가감없이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37:16~17 ‘예레미야가 뚜껑 씌운 웅덩이에 들어간 지 여러 날 만에
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이끌어내고 왕궁에서 그에게 비밀히 물어 이르되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
예레미야가 대답하되 있나이다 또 이르되 왕이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지리이다’
시드기야 왕이, 감옥에 갇힌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사람을 보내어서 잠시 그를 데려오게 합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에게 이런 질문을 해요. 왕이 하는 질문이에요.
‘당신이 최근에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 있소?’
그러니까 시드기야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도 알고, 하나님도 두려워는 했어요.
그러니까 물어보죠. 선지자에게 ‘당신이 하나님께 최근에 받은 말씀이 있느냐?’
자 선지자가 어떻게 대답해요?
‘예레미야가 대답하되 있나이다 또 이르되 왕이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지리이다’ :17b
여러분, 왕이 그를 풀어주고 잠시 독대했단 말이죠. 얼마나 좋은 기회예요?
시드기야 왕에게는, 그래도 하나님의 종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심은 있었던 거예요.
자 이럴 때 왕이 좋아하는 몇 마디만 하면, 당장에 풀어주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레미야가 뭐라고 말했다고요?
‘왕이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지리이다’ :17b
여기에 예레미야의 진정성을 볼 수가 있어요.
그는 또다시 가감없이 하나님께 받은 그대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자기 이익, 손해를 따지지 않습니다.
왕은 다시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당신은 다시 왕의 포로가 되어 바벨론에 끌려갈 것이라고...
뭘 알 수 있어요?
어떤 의미에서도, 선지자는 결코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자는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선지자 그는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자였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저 사도바울의 유명한 고백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갈1:10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야 하나님께 좋게 하랴’
그렇습니다. 바울도, 예레미야도 오직 하나님께만 충성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편의 애국자’죠.
▲그렇다면 이제 제가 이 설교의 화두에서 제기한 중요한 질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누가 진정한 애국자입니까? 누가 반역자입니까?’
예레미야 선지자가 반역자가 아니라는 것은, 명확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이 역사적 급변 상황에서, 반역자는 누구일까요? 그것도 명확하죠.
사실은 시드기아가 반역자였고, 시드기야 편에 섰던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자면, 시드기야 왕이 반역자가 된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첫째는 뭐냐면,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듣고자 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청종하기를 거절했던 사람이었습니다.
37:1~2절이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니
이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유다 땅의 왕으로 삼음이었더라
그와 그의 신하와 그의 땅 백성이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을 듣지 아니하니라’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말씀을 듣지 아니아니라’
네, 그는 그가 거느린 신하들과 백성들과 함께
예레미야를 통해서 전달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거절했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그는 결국 백성들의 여론, 오늘날로 말하면 소위 포퓰리즘과 영합한
약삭바른 정치인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는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에 관심을 있었어요.
그러나 자기가 원하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을 때,
그는 언제라도 그 말씀을 거절할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런 교인들하고 비슷해요. 성경에 대한 관심이 있어요.
성경에 대한 호기심도 있어요. 교회에 나와서 설교도 들어요.
하지만 내가 그 말씀 대로 살아갈 순종의 의지는 전혀 없었던, 어떤 교인들처럼 말이에요.
말씀도 듣고, 설교도 듣고, 관심도 있지만,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갈 의지는 전혀 없는, 어떤 교인들처럼 말이죠.
그리고 마침내,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반역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 나라의 애국자’가 될 생각이 있으신가요?
시드기아는 무엇을 교훈합니까?
2) 시드기아가 반역자가 된 두 번째 원인이 있어요.
시드기야, 그에게는 기도의 흔적이 없습니다. 자기가 기도한 흔적이 없어요.
재미있는 것은요. 기도를 요청하기는 했습니다. 시드기야는 기도를 요청하긴 했어요.
그는 사람들을 보내어 예레미야에게 기도해달라고 요청합니다.
37:3 ‘시드기야 왕이 셀레먀의 아들 여후갈과 마아세야의 아들 제사장 스바냐를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보내 청하되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 하였으니’
기도 요청은 했어요. 여기까지만 보면, 그가 마치 기도의 능력을 알고, 믿고,
기도의 도움을 구하기도 하는 사람처럼 보여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가 일관성 있게,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파멸을 예언하자,
그와 그의 주변 관리들은,
그것은 그것이 그들이 기대했던 기도의 응답이 아니라는 이유로,
선지자를 다시 감옥에 투옥시킵니다.
37:21 ‘이에 시드기야 왕이 명령하여 예레미야를 감옥 뜰에 두고 떡 만드는 자의 거리에서
매일 떡 한 개씩 그에게 주게 하매 성중에 떡이 떨어질 때까지 이르니라
예레미야가 감옥 뜰에 머무니라’
감옥에 가두고 간신히 연명만 시킵니다.
그리고 이제 38:4절의 증언을 보세요.
38:4 ‘이에 그 고관들이 왕께 아뢰되 이 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하지 아니하고
재난을 구하오니 청하건대 이 사람을 죽이소서
그가 이같이 말하여 이 성에 남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나이다’
시드기야는 이런 아첨꾼들의 얘기를 들었다는 거예요.
왕은 전혀 그 문제를 붙들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할 의향은 없었던 사람이었죠.
기도의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지만, 급하면 기도해달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스스로 하나님 앞에 독대하여 무릎을 꿇을 의지가 없었던 사람.. 그게 시드기야 예요.
그래서 그는 반역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반역자가, 결국 나라의 반역자인 셈이죠)
그는 결국 기도의 본질을 붙잡고 산 사람이 아니에요.
기도의 본질이 뭡니까?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내가 동참하는 것을
자기 삶의 최고의 기쁨으로 아는 것.. 이게 그리스도인이에요.
내 이기적 목적을 위해서만 살짝 기도하고,
내 이기적 목적이 성취되지 않으면, 쉽게 하나님을 떠날 수 있는 사람...
이건 그리스도인이 아니에요.
여러분께 묻습니다. 여러분은 기도의 본질을 믿고 계십니까?
그리고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이십니까?
우리는 정말 이 기도를 할 수 왜 있을까요?
‘나라가 임하시오며 Thy kingdom come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Thy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이 땅에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알고,
엎드려 우리 나라를 위해,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 이런 애국자가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모이는 도심의 일부 집회에, 기도의 열기가 거의 사라진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거의 없는 그 집회가, 진정 애국 운동이 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