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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7장 항아리를 부수어라

LNCK 2026. 8. 25. 11:12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자아>   ▣ 영적전쟁

사사기강해(14)/사사기7:15-20/‘항아리를 부수어라’/ Youtube

 

◈항아리를 부수어라                삿7:15-20             2025.09.14. [사사기 14강]  

 

우리는 지금 사사기 강해 중 기드온의 이야기를 몇 주에 걸쳐 살피고 있는데요.

지난주 기드온의 300명의 용사를 공부했습니다.

처음 출정은 3만 2천 명이 따라 나섰는데, 너무 많다 해서

‘두려워 떠는 자는 돌아가라’ 해서 2만 2천 명이 돌아갑니다. 1만명이 남았죠.

 

강가에 이르러서 물을 마시는데, 1만 명 중에 9,700명은

강물에 직접 입을 대고 핥아서 먹었고,

또 300명이 손에 물을 떠서 물을 마셨습니다. 어느 쪽을 돌려보냈나요?

9,700명을 돌려보냈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자의적인 해석이 필요 없고,

즉 경계심이 투철한 군인 3백명을 남겼다.. 등의 해석은 필요 없고,

일관된 하나님의 역사의 흐름과 맥락은 ‘숫자가 많은 쪽을 돌려보내셨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작은 숫자로 역사하시기 원하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최종적으로 몇 명이 남았습니까? 300명이 남았어요.

적은 13만 5천 명이에요. 미디안 주력 부대에다 플러스 동방의 연합군 까지 합친 숫자죠.

3백 명 대 13만 2천명과 싸워야 돼요.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 주었느니라’ :9

 

하나님은 이렇게 단호하게 약속하십니다.

삿7:8 ‘이에 백성이 양식과 나팔을 손에 든지라 기드온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각각 그의 장막으로 돌려보내고 그 삼백 명은 머물게 하니라

미디안 진영은 그 아래 골짜기 가운데에 있었더라’

 

7:9 ‘그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 주었느니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 주었느니라’

시제가 현재완료형을 썼죠?

근데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사건이예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완료시제를 쓸 때는

그 일이 너무 확실할 때, 그런 식으로 말을 하죠.

성경에는 주로 선지자들이, 미래 일을 예언할 때, 이런 어법을 자주 구사했죠.

‘예언적 완료시제’ 라고 하는데,          주1)

본문에는 하나님이 ‘완료시제’로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전쟁은 벌어지지도 않았는데, 근데 하나님은 완료형으로 설명을 합니다.

이미 끝났다는 거죠.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완료형으로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라면,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믿으셔야 됩니다. 할렐루야!

아주 중요한 시각이에요.

 

▲그런데 보세요. 약속은 약속이에요.

분명히 하나님이 완료형으로까지 약속하셨어요. 그러면 확실히 믿어야죠.

 

그런데 눈앞의 현실을 보면 겁이 나요. 안 나요?

13만 5천명이 메뚜기처럼 중다한 무리가 골짜기의 들녘에 빼곡히 진영을 갖추어서

코앞에 진을 치고 있어요.

 

눈으로 보는 이 현실과, 내가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 사이에    *‘넘겨주었느니라’

항상 우리는 괴리를 느끼고, 갈등에 부딪힙니다.

 

자 주일날 이렇게 설교를 들어요. 그러면 용기도 생기고,

‘그래,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어...’ 이런 확신도 생기다가,

또 막상 저 예배당 문을 열고 나가서, 삶의 현장을 맞닥뜨려 보면

‘이제 어떻게 사나?’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의 구호는, 예배당 안에서만 유통되는

그런 한계를 가진 신앙일 수가 있단 말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의 그런 연약함을, 기드온 같은 소심함, 불안감, 두려움을 아실까요?

모르실까요? 아시죠. 그래서 하나님이 그걸 잘 아세요. 성경을 볼까요?

 

7:10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와 함께 그 진영으로 내려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니, 하나님께서

그 약하디 약한, 두려움에 여전히 붙들려 있는 기드온...

약속을 거듭거듭 확인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증표를 여러 번 확인시켜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두려움에 묶여있는 기드온을 너무 잘 아세요.

 

‘너 아직도 두려워하고 있구나.. 그러면 이렇게 하자.

네 부하, 부라를 데리고 미디안 진영으로 정찰을 가봐라.

내가 기가 막힌 확증과 싸인을 하나 보여줄게’

 

그래서 기드온은 부라 를 데리고, 미디안 진영으로 밤에 정찰을 떠났어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7:11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그 진영으로 내려가리라 하시니

기드온이 이에 그의 부하 부라와 함께 군대가 있는 진영 근처로 내려간즉’

 

그러니까 기드온과 부라가 적진에 내려간 거예요. 단 두 명이.

 

7:12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가 많음 같은지라’

 

그거 보세요. 하나님의 주어진 약속과, 눈에 보이는 현실이

어마어마한 실상 앞에 얼마나 두렵고 떨리고 무섭겠어요?

 

근데 우리가 사는 삶의 현실과 똑같아요. 약속은 약속인데,

내가 일상에 나가서 부닥쳐야 되는 현실은 이런 현실이에요.

건널 수도 없고, 넘을 수도 없고,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산맥같은 능선 앞에서,

‘이걸 어떻게 감당하나?’ 하고 난감해 합니다.

 

아마 이 가운데도 그런 막막함 ‘노답’에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답이 없음

지금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틀림없이 있을 겁니다.

 

7:13 ‘기드온이 그 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엎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

 

적진에 몰래 정찰을 나간 기드온이 이런 얘기를 듣게 된 거죠.

적의 병사 둘이가, 친구끼리 서로 얘기를 하는 걸 듣게 됐어요.

 

꿈 내용이 희한하죠. 여기서 ‘보리떡’은 기드온을 얘기합니다.

약하디 약한.. 쓸모없는 기드온을 얘기하죠.

 

그리고 지금 ‘장막’ 이라고 표현한 것은, 어마어마하게 진을 이루고 장막을 치고

이스라엘 진영 코앞에 지금 복병하고 있는 적의 진영을 얘기합니다.

 

근데 ‘보리떡’이 떼굴떼굴 굴러오더니, 그 장막에 탁 부딪히니까

장막이 다 무너졌다는 거예요.

 

본문에서 미디안 군인이 꿈 속에서 기드온의 군대를 '보리떡 한 덩어리'에 비유한 것은

기드온과 3백 용사들의 연약함, 보잘것없음, 그리고 인간적인 무력함을 상징합니다.

 

당시 보리는 밀보다 훨씬 저렴하고 천대받았으며

지금도 그렇죠. 계6:6에는 밀이 보리보다 3배 비싸게 나옵니다.

이렇게 보리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먹는 거칠고 보잘것없는 음식물이었습니다.

 

미디안 군대에 비해 기드온의 3백 용사는 보기에도 너무나 하찮고 무력한 존재임을 뜻하죠.

그 비천한 보리떡 하나가 굴러와서 미디안의 장막을 쳐서 무너뜨린 것은

승리는, 보리떡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자 여러분, 그러면 꿈이라는 것은, 의식적으로 꾸는 겁니까?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꾸는 겁니까? 그렇죠. 꿈을 자기 마음대로 꾸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면 이런 꿈은,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이런 계시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런 또 다른 계시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꿈의 내용이 성경의 내용과 일치되고, 잊어버린 성경구절을 리마인드 해 주는

꿈이라면.. 그걸 계시의 전달 수단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물론 개꿈들이 많죠.)

 

그런데 이 꿈이 이상해요. 그랬더니 그 꿈을 들은 병사 하나가, 그는 적병입니다.

꿈을 들은 병사 하나가 해석을 해줘요. 14절을 볼까요?

 

7:14 ‘그의 친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더라’

 

자기네들이 꾼 꿈을, 또 자기네들이 해석까지 해줘요.

그런데 지금 이 대화를 누가 듣고 있어요? 기드온과 부라가 듣고 있어요.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요?

 

정확하게 ‘그 보리떡은 기드온의 칼을 얘기하는데, 그가 지금 이스라엘의 지도자야.

근데 그들이 공격을 해서, 우리 미디안의 군대를 다 뒤집어 엎을 것을,

하나님이라는 신이 계시를 한 것이다’ 라는 식으로,

꿈도 자기네가 꾸고, 해석도 자기네가 해석을 다 해줍니다.

 

그걸 지금 몰래 정탐을 하러 들어갔던 기드온과 부라가 들은 거예요.

부라는 증인으로 기가 막힌 역할을 한 거예요.

기드온이 혼자 그 얘기를 들었다면, 또 신빙성이 떨어졌을 거 아닙니까.

 

기드온이 그 얘기를 들었고, 부라가 증인으로 확증해 주니,

그 들은 얘기가 확실한 거죠.

그리고는 서둘러 자기 진영으로 돌아왔어요. 더 이상 정찰할 필요가 없는 거죠.

 

7:15 ‘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하며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와 이르되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고’

 

◑그들이 손에 든 무기는 ‘나팔과 항아리와 횃불’

 

이제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선포를 합니다.

그러자 16절에 3백명을 3대로 나누어... 각 100명씩 나누었겠죠.

 

7:16 ‘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어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

 

▲1. 나팔을 불며 선포하라

이들이 들고 나간 무기가 나팔입니다. ‘쇼페르’라 그러죠.   *양뿔(양각) 나팔

두번째는 뭡니까? 빈 항아리입니다. 그 빈 항아리 속에 횃불을 감추었죠.

세 번째는 횃불.. 이 세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분명히 적의 병사들이 꾼 꿈 중에.. 그 보리떡을 이는 기드온의 칼이라그랬어요.

그러면 그 꿈을 그대로 이루기 위해서라도

단창이나, 칼이나, 무기를 들고 나가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숫자도 고작 300명에다가 적들은 13만 5천명이에요.

그러면 어쨌거나 전쟁을 하려면, 1인당 미사일은 몇 발씩 들고 나가야 전쟁이 될똥말똥한데...

미사일은 커녕 빈 항아리, 나팔, 횃불.. 이게 무기입니까? 도구입니까?

이건 무기가 아니잖아요. 이런 비상식적인 전쟁이 어디 있어요.

 

(*그래서 과거에 ‘인디아나 존스’ 같은 영화 보면, 주인공은 총, 칼 같은 무기를 쓰지 않아요.

언제나 맨주먹 같은 형식으로 싸워 이깁니다. 이런 전통이 내려온 것일 수도 있어요.)

 

‘쇼페르’ 라고 불리우는 이 양뿔나팔은 어떤 기능을 하느냐?   *재질이 양의 뿔

하나님의 임재를 얘기합니다.

나팔을 불 때, 그리고 거룩한 전쟁을 시작할 때, 선언을 하는 소리예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어 실질적으로 이 전쟁을 경영하시고 싸우실 것이다’

그런 뜻으로 나팔을 소리 높여 부는 거예요.

 

또한 그 나팔소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때 나팔소리를 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싸우실 것이다. 하나님이 임재하여 이 전쟁을 하실 것이다.

그리고 영광도 그분이 받으실 것이다. 이 전쟁은 그렇게 이루어질 거다’

한 마디로 ‘이 전쟁은 여호와의 전쟁이다’ 그 말이에요.

 

▲2. 항아리를 깨뜨리라

빈 항아리인데, 거기에다 횃불을 감춥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시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7:20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이르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 하고’

 

여기서 우리는 ‘칼’의 정의를 새롭게 해야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악한 영들에 대한 싸움’이라고 그랬습니다. 엡6:12

 

그러니까 진짜 우리의 무기는 ‘너희 칼 들고 나왔어? 길이가 몇 센치 짜리야?’

‘그렇다면 우리는 더 긴 칼을 갖추어야지..’ 이게 세상의 방식이에요.

 

‘너희가 10명 나왔어? 그럼 우리는 15명 준비할 게’ 이게 세상의 대응의 싸움 방식이에요.

크기와 크기, 수와 수의 대결이에요.

 

‘기드온의 칼, 여호와의 칼’이라고 정의된 이 칼은, 여기서 신학적으로 재정의가 됩니다.

‘항아리를 부수라’는 무슨 뜻일까요? 항아리는 항아리는 뭘로 만드는 거예요?

흙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성경에서는 ‘질그릇’이라 그래요.

 

‘질그릇’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나요? 부서지고 연약하고 한계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금 전쟁을 위해서, 승리를 위해서,

그 질그릇으로 형성된 그릇을 ‘항아리를 부숴라’

부수면 그 안에서 뭐가 드러나다요? 횃불의 빛이 드러납니다. 깜깜한 밤중에!

 

하나님께서 이 전쟁과 이 승리를 어떻게 행하시는가를 보려면,

어떻게 하겠다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 그릇이 부서져야 되요.

우리가 부서져야 되요. 산산조각이 나야 됩니다.

 

앞서 여호수아서의 정복 전쟁도, 몰아내야 될 '가나안 7족속'은,

신약적으로 해석하면,

내 속에 있는 질투, 탐욕, 의심, 미움, 음란 등의 일곱 마귀의 진을 뜻합니다.

이게 기드온 시대에는 '항아리를 깨트리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우리는 신앙의 이해를 잘못 오해하고 있어요. 이 그릇이 나예요.

그리고 여기에 보배를 담으면 보배는 누구죠?

 

고후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 질그릇 안에 보배가 담아져 있어요. 우리가 이 보배는 예수인 것을 압니다.

우리 삶의 이 삶의 질그릇에 예수를 모시고 있으면,

어떻게 우리는 잘못된 신앙의 오해를 갖고 사냐 하면,

이게 세월이 지나면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헌금 많이 하면,

이게 이제 동그릇 정도 되고,

 

조금 더 헌신하면 선교도 가고 하면, 이게 은그릇 정도 수준은 되고,

또 직분자로 뽑혀서 앞장세워 위원장도 되고, 수고를 하면 이게 금그릇 정도 되고,

또 주의 종으로 온전히 섬기면 이게 다이아몬드 정도 그릇은 되고... 이런 거예요? 아니에요.

그건 세상의 방식이에요. 이건 그냥 종교예요. 

 

그런데 성경은 정확하게 이 그릇을 부숴야 된다 그래요. 이게 부서져야 돼요.

항아리, 질그릇이 부숴져야 보배가 드러나요.        ☞ <자아의 깨어짐>

이 항아리가 깨져야 빛이 드러나요. 믿습니까?

 

그러니까 이 빛으로는 싸움을 하기 위한 빛이 아니라

어둠을 흩어내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맞죠?

 

예수님이 우리식의 싸움으로 이 세상을 빛으로 드러내셨나요?

아닙니다. 밀알의 삶을 통해서, 허리에 수건을 동이고 제자들의 발을 닦으시며,

온유와 섬김과 죽음으로 제자들을 섬기셨어요.

 

그렇게 빛으로 이 세상에 예수님은 드러나셨습니다.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살아내야 되는 방식이에요.

 

△제가 아주 오래전에... 목회를 하다보면 억울한 모함을 많이 받아요.

워낙 성도들이 또 여러 분 있다 보니까, 우리 교회에서 겪었던 일은 아닌데,

정말 너무너무 억울한 모함을 많이 받을 때가 있어요.

 

그러면 사실이 아닌데, 가슴이 너덜너덜해지죠.

그 속에 가끔가다가 불뚝불뚝 혈기가 일어나요.

‘아 이렇게 무기력하게 대응하는 게 이게 맞나? 아 정말 한번 손 좀 볼까?’

이런 생각이 들까요, 안 들까요?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이런 생각이 불쑥불쑥 올라와요.

 

그래도 계속 매일매일 새벽기도 나와서 꾹꾹 눌러 대고 밟고, 우겨넣었으면

사도바울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죽노라’

신앙생활이라는 게 영원한 가슴앓이에요.

 

사실은 그는 한참 세월이 지났는데, 제가 다른 교회로 가있는데,

그렇게 괴롭히던 분들이 하루는 저를 찾아왔어요. 제가 깜짝 놀랐어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거예요. ‘저분들이 왜 여기까지 또 오셨나?’

 

그분들이 BMW거든요. ‘빅 마우스 우먼’의 약자예요.

근데 저한테 가까이 오셔서, 제 손을 붙잡으시면서 ‘용서해 달라고 우리가 잘못했다고..’

그래서 제가 놀래가지고 뭘 얘기하시는 거예요?

 

‘아유 왜 저희가 괴롭힌 거를 목사님이 모르시겠어요?’

제기 시침을 떼고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요..?’

 

어떻게 기억이 안 나요? 하루인들 그 가슴앓이 했던 상처가 잊어질 수가 있나요?

그런데... 견디고 참고 눌러서 인내해내니까,

나중에 하나님이 시간 속에서 진상을 드러내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돼요. 쉽겠어요? 쉽지 않는 거예요.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이 악한 영들에 대한 싸움이에요.

 

뭐 제가 아주 사소한 예를 하나 들었지만, 이보다 더 험한 일들이 많잖아요.

성도님들의 생활 속에도, 살다 보면 그런 일들이 생기죠. 영적 전쟁의 상황이 생깁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 항아리를 계속 부숴뜨려야 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빛이 드러나요. 그걸로 이기는 겁니다.

그 빛으로 어둠을 흩어버리는 거예요. 할렐루야!

 

▲3. 횃불을 들고, 그 자리를 지키라

 

7:19~20 ‘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백 명이 이경 초에 진영 근처에 이른즉

바로 파수꾼들을 교대한 때라 그들이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니라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이르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 하고’

 

구약은 밤을 3경으로 나누고, 신약은 밤을 4경으로 나눕니다.

그러면 구약은 1경이 4시간 씩이고, 신약은 1경이 3시간 씩이죠.

19절의 ‘이경’은, 영어와 히브리어로 middle watch 인데,

여기서 ‘경’은 히브리어로 ‘경비’를 뜻하죠.        *영어로 watch

 

그러니까 ‘2경’은 가장 어두운 밤을 얘기합니다.

‘2경 초’에, 즉 파수꾼들을 교대한 시간이라는 거죠.

원래 경계 중에 교대 시간이 제일 느슨해질 때입니다. 그래서 교대 시간이 제일 위험해요.

 

그때 3백용사가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숩니다.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한 손에 횃불을 들고, 한 손에 나팔을 들고 불며 외쳐 이르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라’

 

자 여러분, 지금 이들이 든 건.. 칼을 든 겁니까? 하나님께서 들려준 도구를 든 겁니까?

도구를 든 거예요.

 

항아리는 이미 부서졌어요. 깨트렸으니까 부서졌죠.

그리고는 한 손에는 나팔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횃불이 들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갖고서 뭐라고 외치고 있죠? ‘여호와의 칼이라, 기드온의 칼이라’

그 기드온은 왜 등장하느냐?

기드온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칼을 보여주겠다’ 그 말이에요.

 

여기서 여호와의 칼이 뭘까요?

우리는 여기서 여호와의 칼을 재정의해야 되는 시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실질적인 칼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물리적인 칼이 아니라, 우리는 여호와의 칼을 들어야 돼요. 믿습니까?

 

△‘각기 제 자리에 서서’

7:21 ‘각기 제자리에 서서 그 진영을 에워싸매

그 온 진영의 군사들이 뛰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

 

자 보세요. 3백명과 기드온이 한 일이 뭡니까?

제자리에 서 있는 것 뿐이었어요. 그 상태로 적진을 포위하고 있었어요. 

 

이건 우리 일상의 자리입니다. 늘 하던 그 자리에,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밖에...

아무 발걸음도 안 뗐어요.

그런데 그러자 그 미디안의 어마어마한 군대가 대혼란에 갑자기 빠지는 거예요.

 

이유를 모르겠어요. 이게 누구의 칼이 작용하기 시작한 겁니까?

여호와의 칼이 작용하기 시작한 거예요.

 

이것이 성경에서 다시 재정의해야 되는 ‘칼’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칼’, 내 손에 들려진 보이는 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칼’, 여호와의 칼을 들었을 때

오늘 그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칼이, 적의 진영 안에서 자중지란에 빠지게 하는

대혼란 속에 자기네들끼리 자멸하고 말아요.

 

그럼 지금 제자리에 서 있는 기드온의 병사들은 그걸 지금 뭐하고 있어요?

‘지금 손 한 번 휘둘러’ 이렇게도 안 해요.

제자리에 서서 불이 밝혀진, 어둠이 물러간 그 캄캄한 어두웠어야 될 현장에서

하나님이 친히 싸우시는 걸 보는 거예요. 믿으십니까?

 

우리 속에... 내 힘으로 뭔가를 해결해야 된다는 충동이 일어날 때,

‘아니야, 하나님의 사람들은 평생, 뭔가를 해결하는 인생이 아니라,

해결받는 인생으로 살아야 된다’ 이걸 잊어버리지 마세요.

 

오늘도 여러분, ‘어떻게 해야 하나..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전전긍긍하면서 칼을 만들어서, 더 센 칼을 무기를 준비해서 뽑고 싶은 충동에

손이 지금 허리춤까지 가 있는 사람들은... 빨리 그 손을 내려놓으세요.

내려놓으시고 제자리에 서서.. ‘하나님이 싸우시는 싸움’을 지켜보십시오.

 

가정에 왜 문제가 생깁니까? 엄마가 아빠가 자식들이 제자리에서 떠나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어느 공동체든지 마찬가지예요.

항상 하나님이 ‘네가 거기 서 있으라’ 한 그 자리에, 뚝심을 가지고 묵묵히 서 있다 보면,

자기 실리에 따라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

그러면 공동체가 어떻게 되겠어요? 가정이 어떻게 되겠어요?

같이 뒤죽박죽 왔다 갔다 하게 되는 거죠.

 

▲오늘 우리는 세 가지를 기억하십시다.

1) 나팔을 부세요. 나팔은 무슨 뜻이라고 그랬죠?

하나님의 전쟁이 시작되는 승리를 선포하는 소리라고 그랬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하세요. 그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이 스스로 영광을 취하실 겁니다.

그게 나팔 소리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선언, 이 선포가 우리 일상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승리를 약속하셨어!’   *아이러니하게 적진에서 이 말을 재확인했죠.

 

2) 두 번째는 뭘 부숴야 돼요? 항아리를 부숴야 돼요.

질그릇이 자꾸 깨져야 돼요. 날마다 내 자아가 죽어나가는 육의 연습이 있어야 됩니다.

항아리가 깨져야 뭐가 드러나지요. 빛이 드러나서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목격하게 합니다.

 

3) 그 모든 일들이 자기 자리, 제자리에 있을 때 가능한 일이 되겠죠?

또 한 주도 여러분들이 살아낼 험한 일상의 현장에서 반드시

이 세 가지의 약속을 붙들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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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예언적 완료시제(Prophetic Perfect Tense)는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 너무나 확실하여, 마치 이미 과거에 완료된 것처럼 표현하는

문학적·수사적 기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