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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종 이사야42:장 출처1, 출처2
*새 일 : 9절에 나옵니다. 그외 43:19, 48:6.
40:장에서 해방의 메시지를 선포한 후,
41:장부터는 바벨론의 멸망과 제2의 출애굽을 선포합니다.
42:장 오늘 본문에서는 바벨론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할
하나님이 택하신 종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41:장에서는, 아직 힘도 없는 바사 국이,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줄 것이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는 고레스라는 자를 통하여
자유의 기쁨을 누리도록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42:장에서는 더 믿기 어려운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즉 메시야를 세상에 보내시겠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18절에 보면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소경들아 밝히 보라” 할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귀머거리요, 소경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 말씀을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너희들이 깨닫지 못하고, 듣지 아니하고, 관심을 보이지 아니할지라도
하나님의 계획대로 세상을 이끌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깨닫지 못할지라도
후세에 이 말씀을 보고 깨달은 자들이 있을 것을 아시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날 갑자기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오래 전에 미리 계획하심 속에서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놀라운 새 일을, 우리 또한 이사야 선지자처럼 알리는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새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종’은 누구십니까? 사42:1~9
▲1절,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나의 종...나의 택한 사람’
본절에서 이 인물은, 하나님의 신을 받은 자로 묘사되고 있는데,
본문의 문맥상 이상적인 통치자 곧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특히 11:2에서는 다윗 계통의 왕에게, 동일한 신이 임할 것을 예언한 바 있습니다.
바사국 고레스 왕을 택하여 이스라엘을 육적으로 해방의 기쁨을 주셨다면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종은 영적 기쁨을 주실 분이십니다.
이러한 종을 하나님은 직접 소개하시고 계십니다. 이 종이 누구이십니까?
일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이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 자들을 의미합니다.
‘종’이라고 하니깐 사명자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종의 관계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이 말씀은 이 관계성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관계성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세 가지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종의 관계입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둘째, 하나님의 마음에 기뻐하는 관계입니다.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야,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을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릴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도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롬8:7-8)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오늘날 하나님의 종들이나 성도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전부 육적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예수님을 진실로 믿고 있다면
육의 생각은 뒤로 하고, 영적인 생각을 먼저 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성령을 받고 정의를 행하는 관계입니다.
공의는 하나님의 속성 중에 하나입니다.
“공의” 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미쉬파트” 라고 하는데
법률적으로 선언된 정당한 판결을 의미합니다.
불의를 보고 그냥 쳐서는 안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의가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이어서
2~4절까지 <여호와의 종의 성품>을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 종은 조용하고 겸손한 성품을 가지실 것입니다. (2절)
▲2절,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크고 분에 찬 목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에 대해 묘사합니다.
그렇다면 본절이 묘사하고 있는 왕은, 칼과 창으로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고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했던 고레스와는 그 모습이 전혀 다릅니다.
즉, 이분의 통치 방식은 세속적인 정복자의 모습과는 너무 다릅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위세를 떨거나 군림하기 위해서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하지만
예수님은 이 땅에 태어나실 때에도 조용히 오셨고, 구유로 겸손하게 오셨고,
33년을 사시면서도 조용히 사셨고 겸손하게 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도 조용히 죽으셨고, 부활하실 때에도 조용히 부활하셨습니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주1)
둘째는 그 종은 공의의 성품을 가지실 것니다. (3절)
▲3절,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여기 '갈대'는 늪이나 습기가 많은 지대에서 서식하는 연약한 줄기 따위를 의미하는데,
'상한 갈대'란 바람 때문에 그 연약한 줄기가 상처를 입었지만
꺾이거나 뽑히지는 않는 갈대를 말합니다.
본문은 마치 상한 갈대와 같이 연약하고 결점투성이인 인생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은혜로써 강하게 세워주시는 메시야의 구원 사역을 말합니다.
“공의” 라는 말이 1절, 3절, 4절 세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 거룩이나 진실이 내적으로 가지고 계신 속성이라면
공의나 사랑은 외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자비를 베푸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공의는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하나님의 판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종들에게 거룩함도, 진실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공의로 세상을 판단하는 분별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그 하나님의 공의로 상한 갈대는 꺾지 아니하셨고,
꺼져가는 등불은 끄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공의의 잣대로 행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는
오직 성령 안에서 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개인의 감정으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아닌 내 감정의 행동은 마음 상한 자의 마음을 더 상하게 하여
갈대를 꺾는 것과 같고, 꺼져가는 등불을 꺼버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셋째로 그 종은 어떤 고난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담대한 성품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4절)
▲4절,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문자적인 뜻은 '섬들이 그의 법을 고대한다' 인데,
이것은 1, 2절이 묘사한 분의 의로운 통치를,
열방을 포함한 온 세계가 바란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쇠하지 아니했습니다.
“쇠하지 아니했다” 는 것은 곧 “약해지거나 흐려지지 아니했다” 는 것입니다.
고난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조금도 위축되거나 물러서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고난 때문에 “낙담도 하지 아니했다” 는 것입니다.
“낙담”은 히브리어로 “라차츠” 라고 하는데 “산산조각 나다” “깨지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난 때문에. 핍박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깨뜨리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 중에 가장 큰 힘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입니다.
더럽고 추한 세상 속에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기 위해서는
그 어떤 고난도 핍박도 감당하는 게 하나님의 종의 성품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사셨습니다. 제자들 또한 그렇게 사셨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그렇게 사셨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성도들이라면 종들이라면
고난 앞에서 내게 주신 사명을 헌신짝처럼 내던져 버리는 비굴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롬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5절,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호흡을 주시며... 영을 주시는’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온 만물에 대한 통치권을 갖고 계신 하나님이
그의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특정 인간을 취하여
중개자로 삼으신다는 점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6절 이하에는, 하나님의 종의 사역에 대해 다룹니다.
결국, 본절은 창조주이시고,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그 종의 사역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5절에서 이사야는,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신 자가 누구이신지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분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들의 생명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이방의 빛>이 되기 위해서 42:6, 49:6
하나님의 의로 불렀고, 하나님의 손으로 붙잡아 주셨고,
백성들과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만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와 언약이
온 천지에 전해져서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성을 말씀하신 하나님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6-9절까지 세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이방의 빛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6절)
▲6절,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백성의 언약’
종의 사역 중 하나가 소개됩니다.
그 내용은, 종의 사역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언약 관계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짐을 암시합니다.
즉, 메시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맺으신 언약을 회복, 완성시키십니다.
우리는 이 사역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의미를 상기하게 됩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20).
이 새 언약은 혈통적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
곧 영적 이스라엘을 위한 것입니다.
‘이방의 빛’ 42:6, 49:6
본 사역은 종의 구원이 땅 끝까지 이르게 하는 것,
곧 열방에 생명의 축복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그를 찾아온 헬라인(이방인)과 나눈 대화 속에서 밝혀졌습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12:32).
초대 교회 당시 그리스도의 이러한 취지를, 가장 활발하게 받든 인물은
바울 사도였습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갈2:8)
둘째로 예수님은 빛의 사역을 하셨습니다. (7절)
▲7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눈먼 자들의 눈...갇힌 자...흑암에 앉은 자’
종의 사역을 설명하는 본절에서 등장하는 이 용어들은
종의 사역의 내용을 깨닫게 합니다.
얼핏 보면, 이 용어들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된 상태에 대한 암시로 생각됩니다.
특히 '갇힌 자', '흑암에 처한 자'는 바벨론에 포로된 상태에 대한
비유적 표현으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먼 자들의 눈’은
포로 상태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 표현은 본서에서 영적 무지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이고 있습니다.(43장)
본문의 종의 사역도, 영적 무지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즉, 메시야의 놀라운 계시로 말미암아, 흑암과도 같이 캄캄한 무지상태로부터
찬란한 구원의 빛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눅4:18)
빛이 되신 예수님은 그 빛이 말로만 끝나지 않고, 실제로 빛이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빛을 비추어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요1:9~10)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7절에서 말한 소경과 갇힌 자와 흑암에 처한 자를, 문자적으로만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벙어리를 말하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신 것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한다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무지한 자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역 하시면서 병든 자를 고쳐주신 것은 틀림없지만
그 사역 속에는 영적인 의미의 깊은 뜻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빛으로 오신 것은 영적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하시고,
영적 귀머거리를 귀를 열게 하시고, 앉은뱅이 신앙인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 은사를 받은 자들도 육신의 병을 치료하는 것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영적인 질병을 먼저 치료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8-9절)
▲8절,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여호와'라는 칭호의 뜻은,
하나님이 친히 모세에게 가르쳐 주신 바와 같이 '스스로 있는 자'로서(출3:14),
초월적이며 절대적인 주권자이심과 함께(창21:33, 시90:2, 139:7-12)
언약의 주체이심을 강조하는 이름입니다. (출3:7-15)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스스로 나타내시는 까닭은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인정하고 하나님께만 찬양을 돌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9절,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전에 예언한 일...새 일’
계속해서 과거사와 미래사가 제시되는데,
이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며 참신이심을 보이는 증거입니다.
한편 '전에 예언한 일'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때까지 전달되어졌던 모든 예언을 가리키며,
그중에서도 특히 39:5-7의 예언을 암시합니다.
그렇다면 '새 일'이란 1차적으로 바벨론으로부터의 포로 귀환을 가리키며,
더 나아가서는 메시야 시대의 위대한 영적 해방을 시사합니다.
9절의 말씀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루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아직 오지 아니했는데 과거 완료형으로 이루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되기 때문에
예언서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언적 완료시제
여러분!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이미 역사적으로 알고 있고 개인의 신앙으로 믿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 시대에 이루어지지 않는 일을 이루어진 것처럼 믿고
메시야를 너희들이 진실로 기다리는 자들이 되라고 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는데..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2. 새 노래로 (‘종’의 사역을) 노래하라 사42:10-17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실 때 천군 천사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찬양을 하였습니다.
첫째로, 새 노래로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10절, 항해하는 자들과 바다 가운데의 만물과 섬들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
‘섬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임'은, 먼 곳, 땅 끝까지를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되나,
여기서는 전세계 민족을 가리킵니다.
‘새 노래로...찬송하라’
문맥상 여기 '새 노래'는 하나님의 놀라운 새로운 구원 역사에 감격하여
땅 끝까지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입니다. 이는 궁극적인 의미에서
메시야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감사, 찬양하는 것입니다.
새 노래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새로운 일을 계획하신 일을 의미합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의 구원을 이루실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경험한 자라면
온 세계 모든 민족들이 모든 만물들이 구원의 노래를 부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곧 십자가 구원의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새 노래로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시98:1)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대저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도다”
둘째로, 산꼭대기에서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11절, 광야와 거기에 있는 성읍들과 게달 사람이 사는 마을들은 소리를 높이라
셀라의 주민들은 노래하며 산꼭대기에서 즐거이 부르라
‘게달 사람들이 사는 마을들’
'게달'은 이스마엘의 후손의 이름(창25:13)이나,
후에 아라비아 사막을 '게달'이라 불렀습니다.
‘셀라의 주민들’
'셀라'의 문자적인 뜻은 '바위'이며,
후에 '페트라'로 알려진 에돔의 성읍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다시 말해서 높은 곳에서 담대하게 나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부끄러워하지 말고 구원자 예수를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눅9: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12절,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며 섬들 중에서 그의 찬송을 전할지어다.
‘섬들 중에서 그의 찬송을 전할지어다’
다시 온 세계를 가리키는 용어인 '섬들'이 등장합니다.
저자는 온 세계에 구원을 베푸시고자 하는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재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그의 이름을 높이는 자에게
하나님은 13~17절에, 다음과 같이 약속하십니다.>
▲13절, 여호와께서 용사 같이 나가시며 전사 같이 분발하여 외쳐 크게 부르시며
그 대적을 크게 치시리로다.
‘용사...전사’
하나님께서 강력한 권능으로 그 대적을 쳐서 멸하실 것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2, 3절에 나타난 메시야의 한없이 자애롭고 부드러운 모습과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실체를 아는 자들은,
이 두 모습이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외견상 무력하기 짝이 없어 보였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은
강력한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에게는 걸려 넘어지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도리어 위대한 구원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고전1:22-24)
13절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용사 같이 나가시며” “전사같이 외치시며” “대적들을 크게 치시리로다”
우리가 구원의 복음을 세상 속에서 부끄럽지 않게 외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때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용사처럼 싸워주시겠다는 것입니다.
▲14절, 내가 오랫동안 조용하며 잠잠하고 참았으나,
내가 해산하는 여인 같이 부르짖으리니 숨이 차서 심히 헐떡일 것이라
‘숨이 차서 심히 헐떡일 것이라’
'숨이 차서'에 해당하는 '에숌'은, 원래 산고 중에 있는 여인이 내뿜는
거친 호흡을 뜻하지만, 문맥상 매우 강도가 높은 분노를 암시하는 말입니다.
'심히 헐떡일 것이라'의 히브리어 '에쉬아프' 역시 거친 호흡을 뜻하는데,
특히 급박하게 대적을 쫓을 때 내뿜는 분노의 콧김을 가리킵니다.
이 두 용어는, 문맥상 용사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앞절인 13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랫동안 그 백성의 고통을 지켜보시던 하나님은
이제 일어서시어 활동하실 것인데, 그 활동 내용은 후속절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15절, 내가 산들과 언덕들을 황폐하게 하며 그 모든 초목들을 마르게 하며
강들이 섬이 되게 하며 못들을 마르게 할 것이며
본절의 '큰 산', '작은 산' 등은 하나님과 그 백성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들을 가리키며,
'강들'은 그들의 활동을 가능케 하는 동인(動因)을 의미합니다.
▲16절, 내가 맹인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이 알지 못하는 지름길로 인도하며
암흑이 그 앞에서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
바로 앞 구절들에서 그의 대적에 관해 말씀하신 하나님은
이제 그 대상을 바꿔 당신의 백성에 관하여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주목할 구절은, 소경된 그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끄실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이끄실 이 길은, 단순히 포로 귀환으로만 해석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길은 이스라엘이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새 길을 말합니다. (새 일)
특히 본장의 주된 문맥이 메시야의 구원에 관해 말하고 있음을 볼 때,
이 길은 이스라엘이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방법의 구원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영적 소경들이, 참 목자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17절, 조각한 우상을 의지하며 부어 만든 우상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는 자는 물리침을 받아 크게 수치를 당하리라
본절은 구약 성경에서 자주 취급되는 우상 숭배자들의 불행한 종말을 다루고 있습니다.
(시35:4, 70:3, 97:7, 겔16:52 등).
그러나 16절과의 연관성 속에서 볼 때, 본절의 핵심은
우상 신뢰자들의 불행한 종말보다는
이스라엘을 소경으로 만들어버린 요소로서의 우상, 헛된 신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바로 깨닫고 회개한 자들도
예전에는 그러한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18절 이하에서는, 또 다른 차원의 소경, 귀머거리가 언급됩니다.
◑3. 너희는 (‘종’의 사역을) 듣고, 보라 (18~25절)
▲18절, 너희 못 듣는 자들아 들으라, 너희 맹인들아 밝히 보라
‘귀머거리들...소경들’
16절에서 언급되었던 소경이 재언급되고 있고,
또 다른 부류인 귀머거리가 첨가되고 있습니다.
여기 '귀머거리'란 듣는 능력을 상실한 자를 뜻하지만,
문맥상 영적 분별력, 참 진리에 대한 이해력을 결여한 자를 뜻합니다.(20절)
▲19절, 맹인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내가 보내는 내 사자 같이 못 듣는 자겠느냐
누가 내게 충성된 자 같이 맹인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맹인이겠느냐
‘맹인이...내 종이 아니냐’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 수행해야 할 종이, 영적 소경이었습니다.
‘사자같이 못 듣는 자겠느냐’
'사자'는 '보내심을 받은 자'로 고쳐 읽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종을 가리킵니다.
본절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특별한 일을 행하기 위하여
택하신 ‘하나님의 종’이
귀머거리요 소경이라니.. 참 아이러니한 말씀입니다.
다음 구절에 보면, 그 의미가 더 확실합니다.
▲20절,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하지 아니하며,
귀가 열려 있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
과거 한국에, ‘갓 시집 온 며느리는 벙어리 3년, 소경 3년으로 지내라’는 말이 있는데,
‘하나님의 종’이 바로 그러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성령의 감동이 아니면, 다른 사람의 죄에, 개인적으로 너무 관여치 마십시오.
딤전 5:22,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오늘날에도, 그런 일들이 똑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럴지언정, ‘하나님의 종’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기가 소경처럼, 벙어리처럼.. 그렇게 지냅니다.
남들이 당신의 사역을 질투해서, 여러 가지로 꼬투리를 잡으려 해도,
같이 다투지 마십시오. 그냥 소경처럼, 벙어리처럼.. 그렇게 지내십시오.
일찍이 스펄전 목사님도, 이 진리를 깨달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에 관해서 좋은 설교를 남기셨으니, 참고 바랍니다.
▶21절, 여호와께서 그의 의로 말미암아 기쁨으로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하게 하려 하셨으나
‘그의 의로 말미암아’
'자기의 의로우심을 위하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의의 수준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엄과 의로우심을 나타내신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이 의로우시므로
그 백성도 마땅히 의로워야 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한편, 여기 '의'(체데크)는 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어떤 학자가 말했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의를 생각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의를 생각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랑과 의, 둘은 항상 같이 존재하지, 하나만 따로 떼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같은 사랑과 의의 밀접성을 전제로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상기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인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죄인을 죄없다 할 수 없는 공의를 동시에 충족시키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22절, 이 백성이 도둑 맞으며 탈취를 당하며, 다 굴 속에 잡히며 옥에 갇히도다.
노략을 당하되 구할 자가 없고 탈취를 당하되 되돌려 주라 말할 자가 없도다.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의 계시를 받는 등, 선민으로서의 온갖 특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존귀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모습,
곧 약탈당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비참한 모습을 자초한 이스라엘의 비극상이 제시됩니다.
▲23절, 너희 중에 누가 이 일에 귀를 기울이겠느냐, 누가 뒤에 올 일을 삼가 듣겠느냐
‘이 일’
이스라엘이 당한 비참한 포로의 현실
혹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율법의 계시를 가리킵니다.
▲24절, 야곱이 탈취를 당하게 하신 자가 누구냐
이스라엘을 약탈자들에게 넘기신 자가 누구냐, 여호와가 아니시냐
우리가 그에게 범죄하였도다. 그들이 그의 길로 다니기를 원하지 아니하며
그의 교훈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본절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심판당하고서도
심판당한 이유를 깨닫지 못한 사실을
반문하는 형식을 통하여 들춰내고 있습니다.
▲25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을 이스라엘에게 쏟아 부으시매
그 사방에서 불타오르나 깨닫지 못하며,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도다.
‘그 사방에서 불타오르나 깨닫지 못하며’
또 다시 이스라엘의 영적 소경됨이 지적되고 있는데
그 소경됨이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무지, 듣지 않으려는 완악함
그리고 당하고 있는 현실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의미에서 소경이요 귀머거리였습니다.
이쯤 되면 본장 앞부분에 언급된,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인
종의 주요한 사역의 의미를 읽을 수 있겠습니다.(7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역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백성의 영적 무지와 맹목을 깨우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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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펀 글)
이사야서 전반부(1~39장)와 후반부(40~66장)의 특색 중 하나는
메시야에 관해 예언할 때 전자에서는 ‘만왕의 왕’으로
후자는 ‘여호와의 종’으로 묘사되어 나타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전자에서는 "그 어깨에 정사를 메고 영화롭게 나타나는 평강의 왕이요"(9:1-7),
후자에서는 "풍채가 없는 여호와의 종"(42:1, 5:3,2)으로 나타난 점을 주목해 볼 수 있다.
하나의 성경 이사야서 안에 이런 특징이 존재하는 것은
어떤 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사야서의전반부와 후반부의 저자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 아니다.
비록 호칭은 다르나 ‘종’이라는 호칭 속에는, 왕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종’에는 선지자의 개념과 제사장의 개념까지도 함축되어 있다.
후반부 본문을 보면, 그 종은 "진리로 공의를 베풀자"이며, (42:3)
또 "아름다운 소식을 전할 자"라고 했는데 (40:9, 41:27)
이것이 ‘선지자’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면,
그 여호와의 종은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려 흑암에 처한 자를.. 나오게 하리라"는 말씀들은 (42:7)
그 종의 ‘왕’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며’(42:4),
이방의 빛(42:6)이 되며, ‘기쁜 소식을 전하며’(41:27),
‘학자의 혀를 받은’ 선지자는, (50:4)
곧 ‘다스리고’, ‘제도를 베풀며’, ’갇힌 자를 끌어내는’
권위를 행사하는 왕이기도 하다.
그 종은 또한 왕이기 전에 수난의 죽음을 죽어야 하는
대제사장이기도 하다. (52:13~53장)
이렇게 볼 때 왕으로서 본 이사야서의 전반부는
그 후반부에 와서도 그 개념이 더욱 확대되고 심화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주제가 ‘여호와의 종’으로 표현된 이사야서의 후반부(40~66장)에는
이른바 ‘종의 노래’라는 네 개의 아름다운 시문이 있다.
즉 42장1~9절,
49장1~9절,
50장4~11절,
52장13절~53장12절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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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이 세상에서 조용하게 겸손하게 살고 싶으십니까? 예수님에게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그 배움이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 멍에를 메어야 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세상 속에서 마음의 평강을 얻으며 편하게 조용하게 겸손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멍에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의 멍에가 무엇일까요?
멍에는 짐승의 목에 메여 짐을 끌게 하는 기구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의 멍에”는 곧 고난의 십자가입니다.
죄인들의 죄를 위해서 짊어지신 그 고난의 멍에를 우리에게도 메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눅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저에게도 이런 고난이 없었다면 지금도 온유하지 못하고 겸손하지 못하지만
나에게 고난이 없었다면, 아마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교만한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어떤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나를 온유하고 겸손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종의 성품을 가지게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어진 고난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감사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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