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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8장 1~22 바벨론에서 나온 이후

LNCK 2006. 1. 13. 09:12

 

◈바벨론에서 나온 이후        이사야 48:장 1~22절                출처

 

이사야 47장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벨론에 있어서는 안 되고,

그 곳에서 뛰어나와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왜냐면 바벨론은 망할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은 정치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총체이기 때문에 망할 것입니다.

 

이처럼 망할 도시인 바벨론에서 나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죄와 악을 피하여 용서함을 받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이 점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왜 당신께서는 이렇게 악한 바벨론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이 포로가 되는 벌을 주셨습니까?”

  (*본장 사48장에는 이 질문의 성경적 근거가 안 나오나 그럴 개연성 있음)

 

구약성경의 하박국서를 기록한 하박국 선지자가 마음에 품었던 의문도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악인을 사용하여 의인을 벌주셨습니까?”

 

▲이에 대해 이사야 48장의 전반부는

하나님의 택한 유다 백성들이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말씀해줍니다.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유다의 근원에서 나왔으며

거룩한 성 백성이라 칭하며,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성실치 아니하고 의로움이 없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는 너희는 이를 들을지어다 (사 48:1~2).’

 

유다 백성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자라고 말하면서

성실하지도 않고 의로움도 없었습니다.

 

‘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악하며 네 목의 힘줄은 무쇠요 네 이마는 놋이라’ :4

 

사람의 목에 있는 힘줄은 부드러워야 합니다.

그런데 목의 힘줄이 구부러지지 않는 무쇠처럼 되었다는 것은

유다 백성들이 목이 뻣뻣한 자, 교만한 자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네가 과연 듣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으며

네 귀가 옛적부터 열리지 못하였었나니

이는 네가 궤휼하고 궤휼하여 모태에서부터 패역한 자라

칭함을 입은 줄을 내가 알았음이라’ :8

 

유다 백성들은 모태에서부터 궤휼하고 패역한 자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믿는 자라고 하면서도 유다 백성들은 성실하거나 의롭지 않으며,

교만하고 뻔뻔하며, 패역하고 궤휼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냥 놔두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을 연단하십니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10

 

연단을 하시되 은을 연단하듯 하지는 않으십니다.

은은 보통 한 번 연단하는 것이 아니라

일곱, 여덟 번 연단해야 순수한 은이 나온다고 합니다.

 

만약 은을 연단하듯 하나님께서 바벨론과 애굽과 앗수르 등을 일으켜서

유다 백성들을 일곱, 여덟 번 연단하셨으면

아마 유다라는 국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연단하신 이유는

고난의 풀무에서 악과 불의의 찌꺼기, 즉 우상숭배의 찌꺼기를 제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멸망하지 않도록 단 한 번만 바벨론에 포로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유다 백성들은 또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바벨론에서 건져내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이사야 9절과 11절입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할 것이며 내 영예를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9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11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이 완전히 망하지 않도록 지키신 이유는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도

때로는 불성실과 불의와 교만과 패역 때문에

하나님의 연단과 징계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두셨기 때문에

이 이름으로 인하여 연단은 받되 버림은 받지 않고,

고난은 당하되 멸절 당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아주 망하기는 다 틀린 사람들입니다.

가끔 얻어터질 수는 있지만, 완전히 망하지는 않습니다.

 

▲유다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고난의 풀무 가운데서 그들을 연단하셨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멸망시킬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이 흐른 후에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내 백성아! 바벨론에서 나올지어다! 내 백성아! 갈대아인을 피할지어다!” :20

 

바벨론은 나라를 지칭하고, 갈대아는 바벨론의 언어를 지칭하므로

바벨론과 갈대아는 똑같은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결국 고레스 왕이 일어나서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주전 539년에 선포된 고레스 칙령으로 인해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이 또 하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를 해방시켜주신 것은 감사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면

사막을 통과해야 하는데 거기에는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습니다.

어떻게 그 사막을 통과하겠습니까?”  (*이렇게 물었을 개연성 있음)

 

그러자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막으로 통과하게 하시던 때에 그들로 목마르지 않게 하시되

그들을 위하여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게 하시며

바위를 쪼개사 물로 솟아나게 하셨느니라’ :21

 

하나님의 능력은 무궁하므로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빠져나와 가나안으로 향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바위를 쪼개서 물을 내실만큼 능력이 무궁하신 분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야곱아 나의 부른 이스라엘아 나를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마지막이라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에 폈나니 내가 부르면 천지가 일제히 서느니라’ :12~13

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전능하심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일으키실만큼 능력이 무궁한 분이시기 때문에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동안 그들을 돕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1. 포로 귀환의 목적

 

하나님의 대답을 들은 유다 백성들은 한 가지를 더 질문합니다.

“하나님! 왜 우리를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키셨습니까? 해방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대답이 본문 20절 후반입니다.

‘너희는 바벨론에서 나와서 갈대아인을 피하고 즐거운 소리로 이를 선파하여 들리며

땅 끝까지 반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종 야곱을 구속하셨다 하라.’ :20

 

이 말씀에는 중요한 동사가 두 개 있습니다.

‘선파하며 반포하라(announce and proclaim)’입니다.

 

선파 하는 것은 설명하는 것이고, 반포하는 것은 큰 소리로 외치는 것입니다.

마이크를 대고 외치는 것처럼 큰 소리로 외치라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선파하냐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종 야곱을 구원하셨음을 선파해야 합니다.

땅 끝까지, 즐거운 소리로 선파해야 합니다.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나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할 일은

선파하고 반포하는 일입니다.

이 목적 때문에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건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42:장 6절을 통해서도 이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이 세상은 아주 캄캄하고 어둡습니다. 해외여행을 많이 다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까?

이방 종교, 거짓 종교가 자신들을 먹여 살려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상한 색깔을 칠하고 이상한 옷을 입으며 우상을 숭배하면서 어둠 가운데 거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향해 그들을 위한 빛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두움에 사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창조주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지으셨다. 하나님께서 죄에 빠진 너희를 건져주신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건져 주신다”는 진리들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전파된 나라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냄새도 깨끗하고, 도로와 집도 모두 깨끗합니다. 딱 한 군데 예외가 있다면 일본입니다.

일본은 우상숭배를 하면서도 매우 깨끗하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일본을 제외한 나머지 나라는 도로도 지저분하고

가난하며 잘 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통해 흑암에 처한 이방 나라에

빛을 비추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43:장 10절을 통해서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나와서 방황하고 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빛을 비추고

하나님은 구원자이심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죄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예루살렘에 들어간 유다 백성들은

그 안에서 또 다른 질문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서

느부갓네살이 파괴한 성전을 다시 지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성전을 다시 짓는 것이 유다 백성들이 증인이 되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증거 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심적인 증인이 되었습니다.

 

구심적 방법이란 이방 나라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방 나라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보면

‘이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는구나! 이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을 구심적 선교(centripetal mission)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는 전하는 사람이 직접 찾아가는 선교,

즉 원심적 선교(centrifugal mission)가 진행되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유다 백성들은 아직 구약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구심적인 방법, 즉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는 방법으로 증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성전의 건축은 하나님의 임재의 회복, 예배의 회복,

축복의 회복, 증인된 삶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주전 539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바벨론을 멸망시킨 후에 고레스 칙령을 발표합니다.

에스라 1:장 2~3절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고레스의 입을 통해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목적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나와서

총독 스룹바벨의 인도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모두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바벨론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 곳에 정이 들어 떠나기 싫은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에스라 2장 64절을 보니까 ‘온 회중의 합계가 4만 2천 3백 60명이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2. 목적 실현의 실패

 

스룹바벨의 인도로 예루살렘에 돌아온 사만 이천 여명의 유다 백성들은

성전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성전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2년 2개월 동안 전지대만 가까스로 놓았습니다.

그 후로 무려 16년 동안이나 건축을 조금도 진척시키지 못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는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성읍입니다.

 

앗수르가 주전 721년에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때,

사마리아에 사는 사람들을 잡아가고 앗수르 사람들을 그 곳에 이주시켰습니다.

그 바람에 사마리아는 피와 종교가 섞인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도 유다 백성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 취급하였습니다.

종족뿐만 아니라 신앙도 혼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오면서도 급한 일이 생기면

점을 치거나 사주팔자를 보러 가는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순수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 하나만 붙들어야지,

두루 두루 섞어가지고 이것도 믿고 저것도 믿는 사람들은 성전을 건축할 자격자도,

예수님의 증인도 될 수 없습니다.

 

▲이 사마리아인들이 스룹바벨에게 와서

예루살렘 성전을 짓는데 참여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스룹바벨은 우리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하신대로,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고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스4:3

 

혼합종교는 배척하고 유일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으로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리라는 의지였습니다.

 

스룹바벨의 대답을 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페르시아의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면서

성전의 건축을 방해하고 온갖 못된 짓을 다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보통 불신자들보다 이상하게

믿는 가짜 신자들에 의해 더 방해받는 법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마귀의 책동을 받아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전건축이 답보된 두 번째 이유는 유다 백성들의 이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돌아가면 성전을 지어야겠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래도 내 집을 먼저 지어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이기심입니다.

 

이와 같은 이기심 때문에 학개 선지자가 유다 백성들을 꾸짖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찌니라(학 1:3~5).’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을 포로에서 해방시키고

예루살렘에 가서 성전을 먼저 지으라고 말씀하셨지만,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살 판벽한 집, 아파트와 같은 집을 먼저 지어놓고

성전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경제가 어렵다”는 핑계를 대면서 자꾸 미뤘습니다.

 

은과 금이 모두 하나님의 소유임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들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예수님의 증인 된 삶, 이방의 빛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은

무균지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밖에서는 원수인 마귀가 언제나 우리를 방해하고,

안에서는 우리의 죄성이 방해를 합니다.

 

원수 마귀의 방해와 우리 안에 있는 이기심 때문에

“때가 안 되었다, 아직은 이르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학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보내신 목적을 실현하지 않았을 때의

비참한 결과에 대해서 선포합니다.

‘너희가 많이 뿌릴찌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찌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찌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학 1:6).’

 

돈을 실컷 벌어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담는 것처럼 모두 새 나가버립니다.

‘그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학 1:10).’

 

자연 재해도 찾아옵니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폭풍과 곰팡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었느니라(학 2:17).’

 

폭풍과 곰팡과 우박의 재앙이 찾아옵니다.

곰팡이도 재앙이냐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우습게 보면 안 됩니다.

저는 곰팡이가 아주 싫습니다. 냄새도 나고, 사람의 몸에 붙으면 병을 일으키면서

잘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지하실을 얻어 개척을 했습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는 동안 자꾸 기침이 나오더니 급기야 각혈까지 했습니다.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 봐도 폐결핵은 아니라는 진단만 나왔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가만히 살펴보더니 이런 병이 30년 전에 대한민국에 있었는데,

바로 곰팡이가 폐에 들어가서 폐를 망가뜨리는 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폐 검사를 해보니까 아니나 다를까 곰팡이가 발견되었습니다.

곰팡이도 때로는 무서운 질병이 됩니다.

 

 

◑3. 목적 실현의 결과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서 나와 예루살렘에 거하지만

하나님의 정한 목적에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자연 재해와 핍절과 가난과 각종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한 이들을 위해 두 명의 선지자를 일으키셨습니다.

한 사람은 학개요, 다른 한 사람은 스가랴입니다.

 

학개와 스가랴가 일어나서 유다 백성들을 훈계하고

산에 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것을 명했습니다.

 

그러자 모든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청종하여

하나님의 전 세우는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6년 만인 주전 516년에 성전이 완공되었고

그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사라졌지만 스룹바벨 성전이 새롭게 세워졌습니다.

유다 백성들 가운데 어른들은 어마어마했던 솔로몬 성전을 회상하면서

조그만 스룹바벨 성전을 보고 슬퍼하기도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슬퍼하지 말라. 만국의 보배가 이 성전에 임할 것이다.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클 것이라.

이 성전에 만국의 보배 되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발이 서게 될 것이다.”

 

▲유다 백성들이 성전 건축을 시작하자 모든 좋은 결과들이 몰려왔습니다.

‘유다 족속아,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방 가운데서 저주가 되었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로 축복이 되게 하리니

두려워 말지니라 손을 견고히 할지니라...

이제 내가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지니라(슥 8:13, 15).’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학 2:19).’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찌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찌어다(학 2:4-5).’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 2:7, 9).’

 

마치는 말

 

우리는 이미 바벨론에서 나온 성도들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망하거나 지옥에 가기는 다 틀린 성도들입니다.

 

우리는 바벨론에서 나와서 예루살렘에 거하는 성도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거하는 것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예루살렘 성에 거하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방의 빛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된 삶을 살아합니다.

 

물론 우리의 입술로 증거하고, 선교도 해야 합니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전도와 선교는 예수님의 지상명령(至上命令)이 아닙니까? (마 28:19-20).

 

그러나 우리는 전도와 선교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생 전체를 통해서도

예수님의 증인 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축복하신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저 사람을 보니 예수를 믿으면 저렇게 되나 싶어서 못 믿겠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더니 어째서 저 사람은 하는 일마다 다 실패하는가?

왜 인생에 풍재, 깜부기, 메뚜기, 곰팡이 재앙이 끊이지 않는가?”라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예수님께서 축복하시고 구원하셨다는 증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 이외에 우리에게 어떤 소망이 있습니까? 예수님 이외에는 인류의 소망이 없습니다.

지금 연세가 70세인 분들은 죄송한 말씀이지만

10년 정도 더 사시면 이 세상을 떠나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80세가 넘으신 분들은 어마어마한 복을 받으신 것입니다.

60세이신 분들은 10년, 길면 20년이 남았습니다.

50세이신 분들은 20년, 길면 30년이 남았습니다.

그 짧은 생에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돈을 벌면 소망이 있습니까? 출세하면 소망이 있습니까?

판벽한 집에 거하면 소망이 있습니까? 그런 것들은 단지 필요하니까

그냥 가지고 있는 것이고, 우리의 진정한 소망은 우리에게 영생과 부활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해주신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을 통해 예수님을 증거 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깨닫고 그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이고, 여러분도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피영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