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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1:1~3 이새의 줄기에서

LNCK 2006. 8. 14. 07:12

[하루 한 장] 이사야11장_이새의 줄기에서 - YouTube

 

◈이새의 줄기에서            사11:1~3                            출처

 

이사야서는 우리에게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지만,

심판만 예언하는 게 아닙니다.

심판을 말한 다음에 회복을 예언하고.. 계속 심판-회복의 메시지가 반복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점점 상승되고 있습니다.

점점 상승되면서 우리가 그 심판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어디 있느냐?

심판 이후의 우리 삶은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것을

 

예수님에 대한 상징을 보여주는 것으로 강화되고 있습니다.

 

사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And there shall come forth a rod (branch, twig) out of the stem of Jesse, 

and a Branch shall grow out of his roots:

 

그런데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뭔가 능력이 많으시고, 권세가 크시고

아주 위엄있는.. 그런 크시고 굉장하신 분의 이미지를, 예수님에 대해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림으로 그릴 때,

잘 생긴 서양 남자, 무슨 미식축구 선수같은 그런 기품있는 모습으로 그립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좀 다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났다,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한다..’

And there shall come forth a rod (branch, twig) out of the stem of Jesse, 

and a Branch shall grow out of his roots:

 

여러분,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상징인데

이것은 아주 보잘 것 없는 모습을 그리고 있어요.

 

‘줄기에서 싹이 나고,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난다’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뿌리는, 이미 끊어진 그루터기의 뿌리입니다.

 

지금 남유다의 상태입니다.

유다 나라가 베어져서 지금 뿌리 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 둥치가 베어지고 난 후, 다 죽어가는 나무의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온다면..

그게 대단한 가지일까요? 크게 쓸모 있을까요?

 

크고 튼튼한 가지에서 싹이 뻗어나와야

그게 뭔가 볼만한 가지가 될 터인데

다 죽어가는 나무의 뿌리에서 나오는 가지는.. 별로 기대할 게 없습니다.

금방 어쩌면 죽어버릴 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보잘 것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왜 하필 ‘이새의 줄기’입니까?   stem of Jesse

‘다윗의 줄기’라고 하면 될 터인데요..

 

이새의 아버지는 오벳입니다.

오벳은.. 룻과 보아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룻은 모압여인입니다.

모압여인과 보아스가 결혼해서 낳은 아들이 오벳입니다.

오늘날 우리로 치면 ‘다문화 가정’ 출신입니다.

 

21세기 우리나라에서도 ‘다문화 가정’ 출신자에 대한 차별이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고위 공직에 진입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3천년 전에, 그것도 혈통주의를 아주 철저히 강조하는 유대문화에서

오벳-이새 같은 ‘다문화 가정 출신’은

‘너는 우리 편이 아니야’ 할 정도의 아주 심한 차별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새의 줄기’라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가문은, 누가 봐도 보잘 것 없고,

누가 봐도 내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가정입니다.

아주 평범하면서도.. 어쩌면 그 이하입니다.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기서 뿌리는 ‘네째르’인데,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나사렛 동네에서 자라나셨습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지방에서도 아주 척박한 산골지역입니다.

아주 가난하고 비천한 동네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라고 말할 정도로

무시당하기 딱 알맞은 시골마을이었습니다.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마2:23

 

위 말씀의 관주에 보면, 이사야11:1절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나사렛 사람’이란 말이 안 나옵니다.

선지서 어느 쪽을 뒤져봐도 ‘나사렛’이란 지명이 안 나옵니다.

 

그러면 마태는 무엇을 보고, 마2:23에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라는 말씀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사11:1절의 ‘한 가지’ 때문입니다. *히 ‘네째르’

이 ‘네째르’에서 ‘나사렛’이 나왔거든요. 발음이 비슷하지요?

발음이 약간 다른 것은, ‘네째르’는 히브리어가, 헬라어로 변이되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마태가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이다 라고 선지자가 말했다’는 것은

‘나사렛’이란 지방을 뜻한다기 보다는

‘예수님은 보잘 것 없다’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네째르, 한 가지’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헬라어 성경은 ‘나사렛이라고 불리는 도시에서’ 라고 되어있음.)

 

▲그럼 ‘네째르 a branch’가 왜 그리 중요한가요?

왜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는가요?

 

바로 전 절인, 사10:33~34절을 보면

앗수르가 얼마나 큰 나무인지가 나옵니다.

그걸 보면, 사11:1절과 완전히 비교가 되죠. 너무 작고 볼품 없는 가지(또는 싹)이니까요.

 

사10:33~34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혁혁한 위력으로 그 가지를 꺾으시리니

그 장대한 자가 찍힐 것이요 그 높은 자가 낮아질 것이며..

쇠로 그 빽빽한 숲을 베시리니 레바논이 권능 있는 자에게 베임을 당하리라’

 

지금 유대를 괴롭히는 앗수르는 ‘장대한 가지, 높은 가지’입니다.

‘혁혁한 위력으로만 꺾여지는’ 아주 튼튼한 가지입니다.

쇠로 베어야 되는 빽빽한 숲입니다.

 

레바논은 아람 땅입니다.

아람과 앗수르.. 이런 대단한 나라들은 빽빽한 숲입니다.

백향목이 저 하늘까지 닿을 정도로 뻗은 거대한 나무들을 가진 나라이고,

은유적으로 군사력을 뜻합니다. 강한 군대를 뜻합니다.

 

그 어마어마한 나무들을, 하나님이 베신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에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가 이어집니다. 사11:1

 

한 싹, 네째르는.. 나사렛 사람, 예수님인데

그 힘 없는 '가지'가 바로 장차 열방을 다스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늘 이기는 편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몸에 배인 것이 ‘이기는 편이 우리 편!’

무조건 쎈 편이 우리 편!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리 봐도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왜 세상에서 힘있고, 모든 것을 갖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싫어하는가요?

 

예수님은 아무리 봐도, 연약해 보이는 것입니다. 사11:1

괜히 병든 사람들하고나 어울리고, 가난한 사람들과 맨날 함께 지내시고..

‘저 분이 우리 메시야일 리가 없어!’ 그렇게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네째르’(한 가지)에 걸려 넘어집니다.

그런데 ‘네째르’는 우리에게 걸려넘어지게 하는 함정이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입니다.

 

우리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죄인입니다.

우리의 본질은 연약한 인생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많이 가지고, 많이 누리고, 뭐 대단하게 보여도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네째르’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인생,

오늘을 살지만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연약한 인생들입니다.

 

그런 ‘네째르’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

‘네째르’로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싹, 네째르’ 위에 무엇이 임합니까?

 

사11: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여기서 ‘강림 rest upon’이 중요합니다. *내릴 강, 임할 임

한 싹 위에 여호와의 영이 임하십니다.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니까

그 영이 함께 하는 ‘가지’는 어떻게 됩니까?

3절을 보십시오.

 

▲사11: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는다’를 원어로 보면 이런 뜻입니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호흡한다’ ‘경외함으로 숨을 쉰다’

 

우리가 도시에 살다가, 공기 좋은 시골에 가면

공기가 너무 좋다고 크게 숨을 들이키고 내쉽니다. 그러면서 ‘아이고 좋다’하죠.

 

마치 그것처럼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긴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경외하기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실 때, 그 분의 즐거움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었어요.

 

그러면 오늘 나는 무엇으로 숨쉬는가요? 무엇을 마시는가요?

좋은 공기가 아니고, 좋은 음식이 아니고

나는 여호와를 즐거워함으로,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내가 호흡하는 것.. 이런 주님의 모습을 우리가 닮기 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을 나의 즐거움으로 삼기 원합니다.

 

(위 설교 처음~11:42까지 녹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