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5:7 2000.04.30. 옥한흠 목사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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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긍휼
▲예수님 당시도 오늘과 비슷하게 잔인한 세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교만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 역시 율법을 지킨다는 구실을 내걸고는 남을 불쌍히 여길 줄 몰랐습니다.
심지어 안식일 날 사람이 죽어가는 데도 안식일에 일하면 안 된다는 이유로
그들을 도와주지 아니했다는 기록들을 자주 봅니다. 얼마나 매정한 세상입니까?
늙은 부모를 마음대로 학대해도, 성전에 가서 헌금만 두둑하게 내면
사람으로 대우를 받는 세상이었으니 얼마나 비정한 세상입니까?
역사의 기록을 통해서 보면, 당시 헬라, 로마 사람들은
애를 낳았다가도 마음에 들지 아니하면 내다 버리는 것은 예사로 생각했습니다.
당시가 얼마나 비정하고 매정하고 잔인한 세상이었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인 배경을 잘 염두에 두시고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산 위에서
많은 무리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이라는 말은 요즘 잘 안 쓰는 용어요, 사회에서는 고어古語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하는 긍휼이라는 말은
<흘러넘치는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시는 하나님께서
한없이 약하고 악한 사람들을 대할 때 보여 주시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성경 내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번역이 됩니다.
‘인자’, ‘자비’, ‘사랑’이라고도 하고, 또 ‘불쌍히 여긴다’는 말로도 번역이 됩니다.
그만큼 폭이 넓고 차원이 심오한 것입니다.
▲긍휼 = 동일시 = 감정이입
이것을 아주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좋은 말을 찾기 위해 책을 뒤지며 애쓰다가
드디어 한 마디를 찾았습니다. 그것은 '동일시'라는 말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어떤 형제가 있다고 합시다.
그 형제의 처지에 나를 갖다 놓고 동일시 할 수만 있다면
그 형제의 입장에서 같이 느끼고, 같이 보고, 같이 말하고, 같이 행동하고,
그를 도와주려고 한다면.., ‘긍휼’이 되는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감정이입'이라는 고상한 말로 표현하는 것 같은데,
아무튼 나를 타인의 입장에 두고, 그와 함께 생각하려는 마음 자세를 뜻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긍휼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비슷한 말들 입니다.
▲예수님의 기가 막힌 긍휼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긍휼, 즉 ‘동일시’의 마음을 가지십니다.
'내가 할 수 있으면 네 처지에서 생각해 보고 싶다.
네가 느끼는 것, 네가 당하는 것, 네가 행동하는 모든 것을
내가 같이 당하면서 너를 이해하고 싶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사람이 되셔서> 오셨습니다.
우리와 동일시하시기 위해, '자기를 비어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영광과 특권을 다 포기하셨습니다.
또한 우리와 똑 같이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히4:15
그렇게 똑같은 시험을 당하면서 우리를 도와주셨습니다. 히2:18
정말 기가 막힌 긍휼, 동일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기 위해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를 보고 명령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라.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특별히 긍휼히 여기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①첫째, 예수님은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을 아주 긍휼히 여겼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마9:36
②예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특별히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병든 자, 장애인, 세상에서 버림 받고 천대 받는 죄인들, 귀신 들린 자,
이런 사람들을 주님이 얼마나 불쌍히 여기셨는지 모릅니다. (중략)
③우리는 예수님처럼 <무지한 원수들을 긍휼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시던 장면을 보면,
그렇게 6시간이나 십자가에서 제 정신을 가지고 버틸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운명하시기 전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저희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저들이 몰라서 저런다'는 말 그 밑바닥에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베풀어야 하는 긍휼
▲그렇지만 나의 긍휼 베풂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듯이
우리가 남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말은 쉽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막상 실천하려면 이것은 어렵습니다.
요즘처럼 이기주의가 극성을 떨고, 매정하고,
형제고 부모고 자기에게 손해를 줄 것 같으면 얼굴을 싹 돌리는 세상에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 긍휼을 우리가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긍휼을 받았으니... 나누어 준다.
누구든지 자기가 받고 경험한 것은 행동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도 내가 실제로 경험을 했다면,
그것을 비슷하게 행합니다. 정 안되면 흉내라도 냅니다.
그러나 내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것을 하라고 하면, 그거 곤란하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을 했습니까? 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긍휼을 엄청나게 경험하도록 지금까지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때, 나 같은 죄인을 불러서 무조건 값없이 죄 용서하시고,
십자가의 피로 씻어 주시고, 성령으로 인을 쳐서
'너는 이제부터 내 아들이다. 날 보고 아버지라고 불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크신 긍휼입니까?
바울은, 주님의 크신 긍휼을 이렇게 말합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 엡2:4~5
우리 안에는 주님의 긍휼을 담은 큰 샘이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긍휼을 나눠 줄 수 있습니다.
▲내가 받는 긍휼은 <조건적>이다. - 이게 무슨 말인가요?
우리가 <구원 받을 때는> 값없이 긍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다음에> 우리가 긍휼을 입으려면 이것은 조건적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너희가 긍휼히 여기면 내가 긍휼히 여긴다. 너희가 용서하면 내가 용서한다.'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조건적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눅6:38
'네가 먼저 주어. 네가 먼저 불쌍히 여겨. 네가 먼저 구제해.
그러면 내가 너를 도와준다.'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긍휼을 받고도 남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면
그 때부터는 하나님도 얼굴을 돌리신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6:15
이 조건이 충족될 때마다,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긍휼을 베풀면.. 내가 행복해진다.
▲긍휼을 베풀 때.. 하나님의 마음으로 변한다.
주님께서는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행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 하나님이 행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왜 행복할까요? 긍휼히 여기는 자가 행복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고 누구 마음입니까?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는 자는 자기 안에 누구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평안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이기심과 갈등으로 풍랑이 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소유하면 내 안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행복합니다.
버클리가 '긍휼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를 연합시키고,
긍휼히 여기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를 갈라 놓는다.'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가 긍휼히 여기면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됩니다.
그 분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입니다.
▲장애우를 섬기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갖게 되다
우리 교회 장애부를 담당하는 있는 송 목사님이 설교를 할 때
참 감동적인 말을 한 마디 했습니다.
장애우 아이들을 데리고 씨름 하는 120여 명의 교사들이
어떤 때는 하기 싫어서 내 팽개치고 싶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손가락을 물려서 고통 당하는 때도 있습니다. 얼마나 어려운지요!
그러니까 마음을 쏟아서 사랑을 흠뻑 해 주어야 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그렇게 장애우 아이들을 위해 봉사를 하다가 보니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아, 이렇게 하는 것은 내 마음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는 것이구나.
이것은 내 마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야.'
맞습니다. 그러니까 봉사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긍휼을 구하라
▲긍휼을 부탁하는 기도
구원 받고 나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아니하면
어떤 흉악한 일에 휘말릴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 같은 사람은 날마다 엎드려서 기도하는 것이 이런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오늘도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목사지만 나 같은 놈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들겠습니까?
내가 오늘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고 거룩하게 앉아서 기도만 한다 해도
나 같은 놈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들겠습니까?
그러므로 제발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것이 제 기도입니다.
▲시편 저자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
우리 주님은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성하십니다.
날마다 경책치 아니하시고, 항상 노를 품지도 아니하시고... 시103:8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듯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103:13
▲토마스 모어 경의 긍휼
16세기 영국에 토마스 모어 경이라는 대법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영국 왕이었던 헨리 8세에게 직언을 하다가
동료들에게 무고하게 중상모략을 받고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사형선고를 받는 재판정에서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재판관이 사형 언도를 했습니다. 정쟁의 희생양으로 억울하게 죽는 것입니다.
그 때 모어 경이 재판관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재판관이여, 오늘만은 내가 당신을 친구라고 부르게 해주세요.
친구여, 당신과 나와의 관계는 바울과 스데반의 관계처럼 되기 원합니다.
바울은 스데반을 미워해서 돌로 쳐 죽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바울이 예수 믿고 나서 지금은 하나님 나라에서
스데반과 가장 가까운 친구로 손잡고 영원히 살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사형을 언도했지만,
당신도 예수 믿고 나중에 저 하늘나라에서
나와 함께 손잡고 영원토록 기뻐하고 행복하게 사는 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말을 듣자 재판관이 충격을 받고
'나는 당신에게 사형을 언도하는데 당신은 어찌해서 이렇게 선한 말을 합니까?'
라고 물었더니 토마스 모어 경이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나에게 먼저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2000.04.30. 인터넷설교 스크랩, 편집 [주제별 분류] 크리스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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