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5:8 2000.05.28. 옥한흠 목사님 설교 정리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5:8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13:16
▲쉬우면서도 어려운 본문
설교자는 성도들이 말씀을 잘 이해하고 깨닫도록 전달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데,
어떤 본문에서는 이것이 의도한 대로 쉽게 풀리지만
어떤 본문에서는 어렵게 고전을 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라는 본문도 설교자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어려운 본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성도들이 이 말씀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는 살아있는 음성으로 받을 수 있도록 바로 전달할까?’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한 주간 동안 내내 씨름하면서 느꼈습니다.
제가 고심을 많이 하고 기도도 했는데,
결국 설교를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하기는 하지만 자신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설교를 통해서도 성령께서 여러분 각자의 마음 마음에
'이 말씀의 의미가 이것이고, 이 말씀은 바로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본질은, 뭘 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는 것
▲‘본다’ = ‘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본다.'고 할 때 이 '본다'와
거의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는 용어가 또 하나 있습니다. '안다'라는 단어입니다.
즉, '하나님을 본다'와 '하나님을 안다'는 이 두 말은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그 예로 엡1:17~19절까지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도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가 사랑하는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아침이고 저녁이고 그 차가운 돌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는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가만히 보면 참 놀라운 말씀이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에베소 교인은 이미 예수 믿는 신실한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보는 눈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무엇이라고 기도합니까?
'하나님이여,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에베소 교인들에게 허락하셔서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시고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시옵소서. (눈을 열어 ‘보게’ 아니라 ‘알게’)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예수님 알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성령을 더 알게 해 주시옵소서.'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해달라는 말이 정상입니까?
알게 해달라는 말이 정상입니까? (‘보게’ 입니다.)
눈을 열어서 보게 해달라고 해야 그 말이 앞뒤가 맞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게 해 달라고 하지 않고 더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음의 눈으로 '본다'는 말이나 '안다'는 말이나 별 차이를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다'라는 표현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깊이 인지하고 경험하면 벌써 보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가득히 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분을 아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가득 차게 아는 것’
바울이 ‘알게 해 달라’는 뜻으로 사용한 헬라어 '에피그노세이(epignosei)'는
이 말은 차원이 깊은 말입니다.
빈 자리가 없도록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가득하게 채워 달라는 것입니다.
빈 자리가 없도록 하나님을 가득하게 알 수 있게 되는 정도면
'본다'고 하나 '안다'고 하나 차이가 없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마음의 눈은 더 밝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 보게 됩니다.
모르면 모르는 만큼 하나님은 희미하게 보이고 작아 보입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과 보는 것은 때놓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를 잘 믿는 에베소 교인을 위해서
바울사도는 <하나님을 더 알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 기도가 얼마나 필요한지요.
날마다 날마다 이 기도가 얼마나 우리에게 필요한지요.
◑마음이 청결해야 “본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꼭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그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기 위해 하나님을 아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려면 꼭 필요한 요건이 또 하나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해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청결하다’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우선 말 그대로 깨끗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몸에 있는 눈은 하루에 한 2만 5천 번 정도 깜빡거린다고 합니다.
깜빡거리면서 눈물샘에서 나온 액으로 안구를 계속해서 씻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먼지 하나라도 남아 있지 않도록 깨끗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밝게 만물도 보고 사람도 보고 글도 보는 것입니다.
‘청결’이라는 말은 우리 눈을 이런 식으로 닦는 것처럼 깨끗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죄는 마음을 더럽게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남을 미워해 보십시오.
마음이 침침해지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점점 흐릿하게 보입니다.
증오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대해 보십시오. 마음이 달라집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계속 미움의 불길이 타오르면
그 마음의 눈은 어두워집니다. 그럼 누가 안 보입니까? 하나님이 안 보입니다.
음욕을 품어 보십시오. 잘 생긴 여자를 볼 때마다 이상한 생각을 해 보십시오.
벌써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안 보입니까? 하나님이 안 보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알고 있어도 더러워지면 안 보이는 것입니다.
마치 눈을 갖고 있어도,
눈에 무엇인가가 덮이면 아무 것도 안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거짓말을 함부로 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옆에 두고도 못 봅니다.
마음이 더러워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음이 더러워지면 더러워질수록 하나님은 안 보이고, 내게서 멀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죄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됩니다.
▲청결함의 두 번째 의미는 마음이 갈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중적이지 않은 마음, 위선적이지 않은 마음이 청결입니다.
마6:24절에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기든지 해야지
두 사람을 똑같이 섬길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그런데 이 말씀 바로 앞 구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둡다.' 마6:22~23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마음이 갈리면 하나님이 안 보인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조금 주었다가 또 세상에 나와서는 돈에 마음을 주면
마음이 갈립니다.
하나님을 똑바로 보아야 될 신령한 영안을 가지고
세상적인 것들을 추구하면 마음이 갈려서 하나님이 안 보입니다.
왜냐하면 청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생각을 한꺼번에 갖고 있으니
그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청결하지 못한 것입니다.
눈을 감으나 뜨나 하나님을 보면서 살기를 원합니까?
청결해야 합니다. 마음이 두 주인을 섬기듯이 갈라지면 안 됩니다.
(비록 물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정욕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탐욕 등 우상을 섬기면
하나님이 깨끗하게 보이지 않게 되고,
항상 판단과 결정에 실수하게 됩니다.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오늘 성령께서 사랑하는 형제들의 영혼을 향하여 이렇게 물으시기를 바랍니다.
'너는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거룩한 열망이 있느냐?
하나님을 보고 싶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분을 알고 싶은 거룩한 열망이 너의 마음에 있느냐?'
그런 열망이 있다면 우리 마음을 더럽히는 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갈라놓는 것을 금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을 보는 행복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몰두할 때 청결해 진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독신으로 지냈기 때문에 창녀의 유혹을 자주 받았습니다.
언젠가 그가 마음에 드는 어떤 창녀 때문에 몹시 고통을 당했습니다.
거기에 말려 들어가면 어려워진다는 것을 그도 잘 알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마음에 자꾸 끌리자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몹시 고통을 당하다가
결국 일기장에 이런 말을 써 놓았습니다.
'마음의 깨끗함, 진정한 마음의 깨끗함은 오직 한 가지 목적에 몰두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목적에 내가 몰두할 때에
나는 내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거룩한 열망,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가고자 하는
거룩한 열망으로 가슴이 불 탈 때면 마음이 더러워질 틈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킵니다.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열망이 불타면 내 마음은 깨끗해집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간단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이 말은 '하나님을 가까이 가서 보라.'는 의미입니다.
이어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필요하다고 말씀합니다.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약4:8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보기를 원할 때에는 꼭 기억해야 될 중요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자’가 행복하고 복 되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눈을 감으나 뜨나 하나님만 눈앞에 보이는 사람,
그 마음을 하나님으로 가득히 채우고 있는 사람,
세상에 이 사람만큼 만족하고 살만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내 마음에 가득합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좌우하시는 하나님을 밤이고 낮이고 보면서 삽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고 없는 것 가운데 있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항상 내 눈앞에 계십니다.
우리가 그처럼 하나님의 존전 의식을 가지고 매일 매일 살 때
우리를 두렵게 할 것이 천하에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보이는 사람을 누가 두렵게 만듭니까?
그 사람의 마음에 어떻게 불만이 쌓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 눈을 가득히 채우고 있는데 무엇이 불만입니까?
그 사람이 어떻게 좌절하고 앉아서 탄식할 수 있겠습니까?
일찍 이런 경험을 했던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16:8~11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것은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솔직히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시는 옛날 부모님들이
날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마음의 눈으로 보면서
그 하나님 때문에 세상적인 것은 갖추지 못한 것이 너무 많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만족하고 감사하고 웃고 찬송하고 사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습니다.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일부분만 본다.> (중략, 화면 상단 우편 출처 참조)
▲스펄전의 체험
위대한 설교자 스펄전은, ‘하나님’이라는 주제가 우리에게 크나큰 위안이 된다면서
이렇게 감격적인 말을 했습니다.
'오!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것에는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치유제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명상하는 것에는 모든 슬픔을 근절시켜 주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의 감화력 안에는 모든 아픈 곳을 잊게 해 주는 진통제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슬픔을 잊고자 합니까? 여러분의 염려를 잊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신성의 깊고 깊은 바다, 하나님을 보는 깊고 깊은 바다에 잠겨 보십시오.
하나님의 광대함에 몰두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편히 쉬다가 나오는 사람처럼 기운이 나고 생기가 돌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열심히 묵상하는 것 보다, 더 영혼에 위로를 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슬픔과 비탄의 굽이치는 파도를 그처럼 진정시키며
시련의 바람들을 평온하게 해 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참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을 더 알고 하나님을 가까이 가서 보는 사람은
마음의 병을 싹 쓸어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적용, 마치는 말
건강한 신앙생활은 무엇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열정의 연속입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자 하는 갈망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왜 창조되었습니까?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왜 살고 있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입니다.
영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더 잘 알고 날마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 보는 것보다
더 높고 숭고하고 매력적인 목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겸허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왜 나는 날마다 비참해지는가요?
눈에 누가 안 보이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날마다 힘을 잃고 주저앉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어디 있는가를 찾읍시다.
우리의 마음이 정결하지 못할지 몰라요. 무엇인가로 더러워져 있습니다.
마음이 두 주인에게 나눠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여도 희미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내 가정이 왜 이 모양인가?' 하고 탄식하지만 말고 원인을 찾으십시오.
부부 사이가 왜 이렇게 사나운가 이유를 찾으세요.
내 자식이 왜 저 모양인가 이유를 찾으십시오.
하나님을 보고 살면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 영광 중에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가득히 채우고 있는데
세상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문제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주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마음이 청결하여 하나님을 보는 자는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세상을 보지 마십시오. 세상에 속습니다.
사람을 보지 마십시오. 사람에게 실망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 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2000.05.28. 인터넷설교 정리, 축약 [주제별 분류] 크리스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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