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이면의 고난을 보기 눅9:28~36 인터넷설교 녹취, 편집
◑고통 없이 되는 일은 없다. - 네팔 성경 번역 일화
어떤 (아마 미국) 선교사가 네팔의 쿡스 부족에 가서
19년 동안 신약성경을 번역했다.
그 부족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려면, 그 부족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 부족 사람들이 선교사에게 도움을 주다가 붙잡히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된다.
드디어 19년 만에 신약성경을 다 번역한 후에
선교사는 이런 감동적인 보고를 했다.
“우리가 이 신약성경을 번역하는 동안 이러 이러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번역하는 기간 동안에
이 일과 관련해서 누군가 감옥에 수감된 날짜에다 성경 장章 수를 나누어 보았더니
이 성경의 1장을 번역하는 동안
누군가 9.3일 동안 감옥에 갇혀있어야 했고
이 일과 관련해서 누군가 걷고 차를 타며 이동한 거리에다 번역된 성경 장 수를 나누어 보니
한 장chapter 번역에 누군가 75킬로를 움직여야 했었습니다.”
고통 없이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주님의 사역은 특히 그렇다.
◑영적으로 잠들면... 자기 눈에 영광만 보인다.
예수님이 기도하시려고 다볼 산에 제자들과 함께 올라갔는데,
예수님은 마지막 예루살렘 올라가실 길을 앞두시고 열심히 기도하신 반면,
제자들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렇게 졸다가 한 순간 눈을 번쩍 떠 보니,
예수님의 변화되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천상의 영광의 모습이,
자기들 눈앞에 쫙 펼쳐지고 있었다...
▲그런데 제자들이 꼭 봐야 할 장면을.. 잠자느라 놓쳐버렸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별세 하실 것을 모세와 엘리야와 의논하시는 장면>이었다.
즉 제자들은 <죽음의 고난>은 보지 못하고, <변화된 영광>만... 보고 있었다.
그것도 잠결에...
그렇다. 신앙생활 잘 하는 비결, 한 번 뿐인 인생을 잘 사는 비결은
<성공한 영광>만 보기보다는,
<그 영광의 자리까지 오게 된 과정에서 쏟았던 그 엄청난 피땀>을 봐야 한다.
예수님의 부활의/천상의 <영광>이 있기 이전에
예루살렘에서 죽어야만 하는 <고난>의 과정이 반드시 있는데,
제자들은 -자다가 번쩍 눈을 떠 보니까- 자기들 눈에 <영광>만 보이는 것이다.
▲이게 뭐가 그렇게 안 좋은가?
고난 못 보고, 영광만 보는 것이.. 그리 큰 문제인가?
그렇다. 큰 문제가 된다. ↙
①그래서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며 자리다툼하게 된다. 눅9:46
영광만 보니까 그렇다.
십자가 지고 죽는 자리라면, 그렇게 추하게 자리다툼 안 했을 것을...
②고난이 오면 못 견뎌 한다. ★
미리 고난이 올 것이라는 것을 전혀 상상치도 못하고 있다가
갑자기 엄청난 고난이 밀어닥칠 때.., 못 견뎌 한다.
그냥 중도에 포기해 버린다. 자기 마음으로 미리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고난을 거친 후에 영광이 오는 것을 알았더라면,
고난이 올 때, ‘드디어 올게 왔구나! 꼭 거쳐 가야 할 과정이구나!’
하면서 담담하게 맞이하게 된다.
▲영적으로 잠자는 사람에겐 ‘고난’은 안 보이고, ‘영광’만 보인다.
예수 믿고 신앙생활하면서도
자꾸 영광만 바라보고,
왜 좋은 일 안 생기느냐고 짜증내는 사람은
‘영적으로 잠자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잠자는 사람에게는 영광만 보이기 때문이다.
세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그랬다.
그래서 초막을 짓겠다는 둥 버벅거리고 말았다.
◑적용
▲영광 이면을 보는 눈을 가져야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올림픽에서 선수들이 딴 금메달만 보고 막 흥분한다.
거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얼마나 엄청난 고난을 겪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 잘 하려면, (또한 인생살이도 마찬가지다.)
<영광> 뒤편에 있는 <고난>을 정확하게 볼 줄 알아야 한다.
제자들처럼 잠자고 있다가, 영광만 보고 정신 못 차리면... 안 된다.
▲세상에는 영광만 찾고, 영광만 보기 원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영광 뒤에 숨어있는 피땀의 순간은 보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그런 엄청난 피땀이 없어도, 사람들이 쉽게 성공하는 줄 알고,
그런 손쉬운 성공/영광을 동경한다.
그래서 남의 인생은 쉽게 가는 것 같은데, 어쩐지 자기 인생은 안 풀린다.
그래서 절망하거나 자포자기한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착각하면 안 된다.
주님의 부활의 영광 뒤에 있었던 고난의 십자가를,
우리에게 ‘값싸게’ 구원받게 하기 위해, 주님이 얼마나 ‘값비싸게’ 값을 치르셨는지..
▲고난 없이는 영광 없다. No Cross, No Crown
지금 내가 그 어떤 놀랍고 휘양 찬란한 영광을 꿈꾸고 있다면
거기에 비례하는 대가(고난, 십자가)가 그만큼 따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 그런 대가 없이, 그런 영광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가르친다면,
그야말로 거짓교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위해 큰 영광 돌리겠다는 사명자들은
항상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큰 고난당하는 만큼.. 큰 영광 돌리게 되어 있다.
작은 고난당하는 만큼.. 작은 영광 돌리게 되어 있다.
(그래서 누가 ‘고난 비례의 법칙’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허황된 꿈
한 때 과거에 우리는, <고난>의 과정 없이,
<축복>이란 미명아래, 허황된 꿈과 영광만 잔뜩 심어주었던 때도 있었다.
제자들은 눈감고 졸았지만, 우리는 눈뜨고 졸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 믿기만 하면, 모두 성공하고 축복 받는다’는 식의 얘기였다.
‘믿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고난’은 거론하지 않았다.
요즘 이런 찬송도 잘 부르지 않는 것 같다.
♬세상 부귀 안일함과 모든 명예 버리고..,♪ (옛492장 2절)
이 찬송을 부르다가 보면, 다 버린 게 아니라,
세상 부귀 안일함과 모든 명예를 간절히 구하며
살아가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그런다.
“예수 믿는 거나, 다른 종교 믿는 거나.. 다 복 받자는 거 아닌가!”
▲<고난>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그것이 닥쳐 올 때 이긴다!
신앙생활의 과정에 <고난의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지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래야 고난이 닥칠 때 (반드시 닥치게 되어있다),
어쩌면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그것을 이겨내는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뒤에 있는 <영광>을 이루기 위해
자기가 꼭 거쳐야 하는 과정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쓴 잔을 결코 거부하지 않는다.
<08.08.24. 인터넷설교에서 발췌, 편집 *원제목 : 변화산의 가르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