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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청함’의 의미 2682

LNCK 2010. 10. 9. 19:51

◈‘강청함’의 의미                     눅11:5~8                           출처보기



누가복음 11장,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는 곧잘 오해된다.

이 비유의 핵심은 “강청함을 인하여 준다.”는 말씀이다.


이 비유(눅11:5~8)는 주기도문에(눅11:1~4) 이어서 나온다.

이 비유는, 주기도문에 관한 부연설명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주기도문을 살펴보자.


주기도문을 살펴보되,

마태복음의 주기도문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을 둘 다 살펴보려고 한다.



◑마태복음에서 주기도문과 부연설명


마6장에서는 주기도문의 서론격인 장면이 이렇게 되어 있다. 

마6:7~8,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연이어서 주기도문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6:9~”


그러니까 마6장에 의하면, 주기도문이 소개될 때, (또는 기도에 관한 교훈에 있어서) 

주기도문과 함께 이해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이다.


중언부언이 무엇인가?

중언부언은 쉽게 얘기해서 치성을 드리는 것이다.

기도라는 것 자체가 치성에 의해서 효과를 본다고 생각하는 것을

중언부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한테 그대로 남아있는 종교성이다.


왜 철야기도를 좋아하는가?

그 기도가 치성을 많이 들인, 공을 들인 표가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야기도를 좋아하고 금식기도를 좋아하고 기도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집에서 하는 것보다 기도원 가는 것이 그래도 낫다고 생각한다.


기도원을 가면 분명히 정신적으로 독립된 자유로움을 가진다.

아무래도 주변의 방해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 효과가 있는 것이지

그것을 '치성/공드리기' 측면으로 생각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그 중언부언의 개념이 우리한테 있다. 치성이란 말이다.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생각, 그러니까 응답의 관권이

기도하는 사람의 정성에 달려있다고 보는 생각이다.


하나님이 보고 들어줄 만한가 안 들어줄 만한가를

우리가 기도하는 꼴을 보고 결정하신다는 뜻이 된다.

예수님은 그러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니까 마6:7~8, 중언부언 하지 말라는 말씀은

‘응답에 대해서는 아예 걱정을 하지 말라.’ 이것이다.


그리고 주기도문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가 나오는 것이다. 6:9~


기도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응답을 받아내는가”에 있지 않다. 응답은 늘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주기도문과 부연설명


그러면서 눅11장에서는 주기도문을 어떤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는지

마태복음과 비슷하지만, 약간 다르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눅11:1~4절이 주기도문이고, 이어지는 11:5~8절이 소위 ‘강청하는 기도’이다.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눅11:5~8


여기서 강청이라는 말이 재미있다.

벗됨을 인하여는 안주는데, 강청함을 인하여는 준다고 한다.


'강청'이라는 말은 부끄러움 없는 고집 “shameless persistence”이라는 뜻이다.  주1)


우리나라 문화에 영어가 들어와 상치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고맙다 Thank you’ 와 ‘사랑한다 I love you’이다.


우리나라 문화는 부모가 자식에게 해 준 것에 대해서

자식이 부모한테 감사하다는 말을 안 하는 문화이다.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식이 부모한테 “아버지,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면

“그럼 넌 아버지가 그런 것조차도 안 해 줄 나쁜 아버지임을 기대했단 말이냐?”

라고 말하는 문화이다.


왜 외국에서는 Thank you 라고 하는가?

이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부모와 자식도 남남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도 친구라는 말을 쓴다.


미국에서는 부부 사이도 언제나 I love you. 라고 표현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저녁에 잘 때도 I love you 라고 이야기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무언가 부부사이가 심각한 상황이 아닌 이상

I love you 라는 말을 잘 안 한다. 당연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


▶‘벗됨(보통친구관계)을 인해서 가 아니다.

강청함(당돌함)을 인해서다’라는 본문의 의미는,

 

친구가 오면 “야, 손님 왔다. 빵 빨리 내 놔!” 이렇게 당돌하게 말한다는 뜻이다.

“야, 미안하다. 부탁이다.”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주 친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기도를 하는 데 있어서, 이 관계를 놓치면 기도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것이 강청함의 의미이다. 그래서 이 비유를, 주기도문과 연결해서 두는 것이다.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때, 그 바탕에 친밀한 관계성을 염두에 두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이런 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가?

신앙이란 결국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얼마나 깊이 있게 이해하느냐?

의 싸움이다.


    여기서 중요한 핵심단어가 <관계>이다.

    친구가 한 밤중에 이웃집에 가서 <강청, 당돌> 할 수 있는 것은

    그럴 수 있을 만큼 친밀한 관계가, 평소에 이미 성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할 때,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을 염두에 두지 않을 때

    기도가 중언부언 되어지고,

    오래도록 치성을 드려야 응답될 것 같고,


    또한 기도의 응답 중에는 Yes/No/Wait/Grow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아버지와 관계가 친밀하지 않으니까, 그 분을 신뢰하지 못하니까,

    Yes만 응답이라고 내가 고집하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를 신뢰하는 관계가 되는 사람은,

    아버지께 뻔뻔하고, 당돌하게 뭘 언제든지 기도로 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응답이 뭐라도.. 자기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 줄 믿는다.

    그 응답이 No/Wait 기다려라/Grow 성장한 후에 주마! ... 이더라도!

 

그러나 우리는 기도할 때, 무조건 Yes만 응답으로 여긴다.

그래서 심지어는 ‘조건부 협상’ 카드를 내밀기도 한다.

“이것만 해 주시면... 어떻게 어떻게 하겠나이다”

왜 그렇게 기도하는가?


<관계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친밀한 관계>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맡기고 신뢰하는 아버지로 대하지 못하고,

꼭 무슨 사업관계의 협상 파트너로 대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리시려고 ‘강청함’을 비유로 드신 것은

신자의 가장 중요한 신자된 특권, 기도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원하셨다.


이 본문에서 기도의 응답이 무엇 때문에 생기게 된다는 건가?

벗됨을 인해서가 아니라 강청함을 인해서 생긴다고 했다.


서로 예의를 지켜는 친구 사이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와서 당연히 빼앗아 갈만큼 자신감을 가지고 “내 놔!”라고 말하라는 것이다.


‘내가 저 사람의 친구니까 가서 구하면 혹 들어줄 수도 있겠지.’라는 미심쩍은 마음으로 오지 말고,

“안 내 놔?” 이런 당돌한 태도로 찾아오라는 말이다.



▶정리하면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 또는 소위 <강청하는 기도>는

뭘 땡깡 부려서 얻어내는 기도라기보다는,

그 의미는,

중언부언 하지 말라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그 관계성에 의해서

당당하게 아버지께 요구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반드시 응답해 주심을 믿는 것을 전제한다.


주기도문을 포함해서, 모든 기도를 드릴 때,

아버지께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을 갖고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이것을 구하면 과연 들어주실까?’ 의심하지 말고...


어쨌거나 ‘살살 말하면 안 들으시니까, 땡깡 부려서 응답받는다’는 식으로

본문을 오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비록 ‘강청한다’는 번역이 그런 오해의 소지가 있더라도...

그런 오해를 불식하려면, ‘당돌하다’의 번역이 더 좋을 것 같다.



※성경의 다른 본문에 ‘땡깡 부려서 (강청해서) 응답받는다’는 본문이 있는지는

계속 연구해 볼 과제임. 예를 들면 눅18장 과부의 기도.

 

또한 기도를 오래하는 것이 다 나쁘다는 뜻은 절대 아님.

중언부언하면서 오래 기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지,

주기도문 기도는 짧아도, 예수님도 어떤 때는 밤새워 기도하셨음.

할 수만 있으면,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기도를 오래하는 것은 좋은 것임.



주1)

강청함(anaideia)은 신약성경에 본문 눅11:8절에서 단 한 번 나오는 단어다.

단 한 번 나온다는 뜻은, 비교할 본문이 없어서, 그 의미 파악이 쉽지 않다는 뜻.


사전Lexicon적 의미는,

shamelessness 부끄러움이 없음, 또는 impudence무분별, 경솔함이다.

KJV는 importunity끈덕짐으로 번역했고, NIV는 boldness담대함으로 번역했다.                             ▣ 기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