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내면의 싸움을 보게 합니다 롬7:14~25 10.04.18.설교스크랩, 출처
▶문제 제기 : 그리스도인도 넘어질 때가 있을까요?
제가 신학대학원(신대원)을 다닐 때의 경험입니다.
처음 신대원에 입학 할 때는 감격과 감사가 넘쳤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의 종으로 삼으시고,
나를 위해 하실 일이 기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신대원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힘든 일이 참 많았습니다.
새벽 5시에 새벽예배부터 시작해서 저녁 늦게까지 공부를 하다 보니
체력적으로 많이 지치게 되었습니다.
또한 보수적인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기대했던 은혜보다는 답답한 마음을 많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저를 좌절하게 만드는 것은 주변 전도사님이었습니다.
다들 나같이 힘들 줄 알았는데,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잘 생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제 안에 회의가 생겼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종으로 선택하신 것이 맞을까?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종으로 택하셨다면 왜 이렇게 나만 힘들어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문제들로 인해 신대원 기간 동안 많이 힘들어하고 기도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회의는 저뿐만 아니라 여러분들도 경험할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넘어지고, 좌절하며,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 신앙생활 하는 것 같은데
나만 넘어지고 좌절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놓고, 어떤 그리스도인과 상담을 하면
‘그리스도인은 넘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승리한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나는 지금 넘어지고, 상처입고 깨어지고 있는데,
사람들은.. 내가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과연 이런 괴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서론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의 내용은 로마서 전체를 걸쳐
가장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본문입니다.
논쟁의 핵심은 과연 이 고백을 하는 사람이 바울이 맞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고, 복음에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본문에서는 죄에 의해 공격당하며 넘어지고 있는 자신을 고백합니다.
그러기에 많은 학자들은 이 고백을 바울의 고백으로 보지 않을뿐더러
그리스도인의 고백으로도 보지 않습니다.
위대한 사도바울의 고백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하고 어둡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본문을 (바울의 고백이며) 그리스도인의 고백이라고 확신을 합니다.
이런 확신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실존적인 이유입니다.
만약 이 본문이 바울의 고백도 아니고, 그리스도인의 고백도 아니라면,
저와 함께 이 시대를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넘어지고, 쓰러지고 있는
우리 성도들은 과연 무엇을 붙들어야 합니까? 어디 가서 위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넘어지지 않아야 한다면
지금 넘어져 있고, 쓰러져 있는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나 위대한 사도바울 역시도
자신의 삶을 모두 드리며 복음을 전하는 매일의 삶 속에서도
죄의 유혹을 받았고, 때로는 낙심하고 쓰러졌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죽인 엘리야 역시도
로뎀 나무 아래에서 쓰러져 죽기를 간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실존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신앙이라도 넘어질 때가 있고, 좌절할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감사한 것은 그 넘어짐 가운데서도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않는 성령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14절, 육신의 제약을 받는 인간의 내면
우리는 지난 두 번에 걸쳐서 로마서 7장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7장에서 바울은 율법이 왜 우리를 구원할 수도 없고,
성화에 이르게 할 수도 없는지를 이야기 합니다.
바울은 그 이유가 율법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안에 죄가 선한 율법을 이용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결국 이 과정을 통해 바울은 우리 내면에 있는 죄의 영향력을 이야기 합니다.
바울은 죄가 끊임없이 우리 내면에서 공작을 펼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7장 상반부에 대한 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립니다. ↓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롬7:14
바울이 율법을 보는 결론은 율법은 신령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함께 나는 육신에 속하여죄 아래 팔려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팔렸도다’라는 말은 헬라어의 ‘피프라스코(pipravskw)’라는 단어로서
고대에 노예가 팔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예가 팔리는 경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매매를 통해서 팔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전쟁에 져서 노예로 팔리는 것입니다.
14절에서 바울은 후자의 의미를 쓰고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죄에 우리 안에 거점을 만들어 우리를 속이고 공격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점령해서 우리를 노예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과연 그리스도인의 고백,
특히 가장 위대한 사도인 바울의 고백으로 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 아래 팔렸도다’라는 말에만 주목해서는 안 되고
그 앞에 있는 부분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라는 부분입니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육신에 속하였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여기서 육신이란 말은 앞의 ‘신령한’이란 말과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은 이것을 더 쉽게 해석합니다.
“We know that the law is spiritual; but I am unspiritual, sold as a slave to sin.”
즉 율법은 신령한spiritual 것이지만, 나는 신령하지 못하다unspiritual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이지만 나는 육신적이라는 것입니다.
한글 성경은 육신에 속하였다는 말로 표현하지만
더 정확히 번역하면 나는 육신의 제약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쓰고 있는 육신이란 단어는 헬라어의 ‘사륵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흔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체적 육신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쓰고 있는 ‘사륵스’라는 단어는
단순히 신체적 육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는 ‘죄의 성향(죄성)’을 의미합니다.
아담 이후부터 모든 인간의 죄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죄는 우리의 육신 안에 거합니다.
그리고 육신을 통해 내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게 됩니다.
결국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바로 이 육신에 속하여 죄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육체의 죄의 지배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구원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한 구원을 받을 때까지 여전히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육체가 우리를 제한합니다.
내 안에는 예수님을 닮과 싶고, 예수님처럼 살고 싶은 욕망이 있으나
여전히 육체적 욕망이 나와 함께 있어 내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15절, 그리스도인의 내면의 갈등
이로 인해 그리스도인은 내면의 갈등이 일어납니다.
이 부분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7:15
바울은 자신이 행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알지 못한다는 말은 ‘우 기노스코’라는 단어입니다.
기노스코라는 것은 경험적으로 자신이 아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우’는 반대를 의미하는 전치사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행동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의미로 번역하면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승인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죄의 지배와 그 지배 아래 행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것을 미워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된 행동을 합니다.
▶17~18절에서는 이런 내면의 갈등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진술합니다.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7:17~18
바울은 앞에 이야기 했던 육신의 부분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죄’라고 지목을 합니다.
즉 내 속 안에 죄가 거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가 선을 원하는 내 마음을 꺾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고 싶으나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을 하지 못했을 때의 안타까움을 여러분들은 아십니까?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가르치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을 압니까?
아픈 부모님이 계셔서 어떻게든 치료받게 하고 싶은데
돈이 없거나 치료 받게 할 방법이 없어서 마음만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아십니까?
하나님께 더 드리고 싶고, 더 헌신하고 싶은데
물질이 없고, 육신이 연약해 드리지 못하는 마음을 아십니까?
그 때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지금 바울의 마음이 이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고,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구원해 준 감격이 넘쳐서
더 예수님을 닮고 싶고, 더 예수님께 드리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여전히 내 안에 육신의 생각이, 죄된 생각이 나를 사로잡아
예수님께 나가는 선한 마음을 꺾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본질적으로 내면에 이런 안타까움과 갈등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왜 이 고백을 그리스도인의 고백이라고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세상 사람은 이런 안타까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면 항상 이런 내면의 갈등과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저도 목회자로서 섬기면서 여전히 이런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종인데 더 헌신하고, 더 섬겨야 하는데, 더 나를 드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함에 대해 항상 안타까움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아마 우리 성도님들 안에도 다 이런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고백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고,
하나님을 위해 내 삶을 전부 드리고 싶으나
여전히 육신적인 생각이 나를 사로잡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선한 마음을 품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육체적이고 죄된 생각들이 내 안에서 나를 유혹하고 넘어뜨립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렇게 죄와 얽매여 있는 삶에 비통해하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비통과 괴로움은 절대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이런 비통과 괴로워함이 그리스도인임을 부정하는 것은 더욱 더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비통과 괴로움이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깨달은 내면의 싸움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런 비통함과 괴로움 가운데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원래 그리스도인이란 의미는 조롱의 의미였습니다.
당시에 어떤 왕이나 정치가들을 따르는 열성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따르는 지도자들을 위해 싸우며 목숨까지도 버릴 정도로
열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시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열심당원이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물론 세상적으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란 끊임없이 내면의 싸움을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깨달은 내면의 싸움은 다음과 같습니다.
▶20절, 첫 번째는 내 안에 죄가 함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7:20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넘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안에 존재하는 죄의 실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기에 이제는 죄가 나와 상관없고,
나는 완전한 의인이 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자기기만입니다. 죄는 이런 자기기만을 이용해서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죄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처럼 위험한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죄에 이용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항상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의 고백처럼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선한 일을 하려고 할 때도, 여전히 내 안에 죄가 있어서,
나의 선한 마음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내 안에 있는 죄를 발견하고 그 죄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22~23절, 두 번째는 죄의 권능입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7:22-23
내 안에 죄가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이 넘어지는 이유는
그 죄를 우습게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고 죄에 대해서 승리했기에
내 안의 죄 정도야 쉽게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깨달은 죄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죄가 아닙니다.
바울이 7장 전체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죄는
하나님의 선한 율법까지도 죄의 도구로 이용하는 무섭고도 강력한 적입니다.
오늘 말씀에 바울은 죄가 어떻게 우리 안에서 싸움을 일으켜
우리를 사로 잡어 가고 있는지를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로잡다’는 말은 헬라어의 ‘아이크 말로티’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포로를 끌고 가는 의미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죄의 권능을 보여 주는 단어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지난 번 설교때 말씀한 8절에 기회를 타서라는 ‘아프로메’라는 단어입니다.
또 오늘 14절에서 말씀한 ‘팔렸다’는 단어인 ‘피프라스코’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지금 23절의 ‘사로잡다’라는 단어인 ‘아이크말로티’라는 단어입니다.
죄는 우리 안에 기회를 타서 들어와서 우리를 전쟁을 통해 소유로 만들고,
그리고 전쟁포로로 끌려가듯이 우리를 끌고 갑니다.
여기서 바울은 죄를 강력한 군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와의 싸움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님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24~25절, 세 번째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7:24~25
죄가 이렇게 강력하고 나와 싸워서 나를 사로잡아가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울은 먼저자신이 처해져 있는 비참한 상황을 고백합니다.
바울은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탄식을 합니다.
곤고하다는 말은 헬라어의 ‘탈라이포로스’라는 단어입니다. ‘비참한’이란 뜻입니다.
죄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끌려가고 있는 비참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고백이 아닙니다. 절규입니다.
그러나 이런 절망적인 절규 가운데서 금새 바울은 희망이 섞인 고백으로 바뀝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비록 죄의 권능이 아무리 강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십자가의 승리가 더 강하기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내가 죄와 싸우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실 영원한 승리가 있기에 꿈꾸며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해서 싸우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죄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내 도덕성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내 신앙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능력으로 죄와 싸우려고 합니다.
죄는 단순한 마음의 상태나, 육신의 정욕이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을 대적한 사탄의 실체이며, 우리 안에 진을 치고 있으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를 속이고 넘어뜨리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죄를 어떻게 내 의지와 능력으로 이기겠습니까?
죄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너는 강하다, 너는 신앙이 깊다,
너는 의지력이 강하다 그러기에 스스로 나와 맞서 싸우라’고 말합니다.
죄는 우리 안에 자만심을 주고, 십자가를 내려 놓고 자신을 의지해서 싸우게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죄와 싸우는 사람은 모두들 철저한 패배를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 시간 내 자신을 보기를 바랍니다.
지금 나는 무엇을 의지해서 죄와 싸우고 있습니까?
어쩌면 그 죄와의 싸움조차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안에 죄와의 싸움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서
바울처럼 우리의 내면을 보게 하시고, 죄와의 싸움을 보게 하기를 소망합니다.
▶마치는 말, 내면의 싸움을 보게 하는 복음의 능력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내면에 있는 치열한 싸움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로마서의 말씀을 통하여 복음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복음이 왜 하나님의 능력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복음이 왜 하나님의 능력입니까?
복음은 교묘하게 가려져서 세상 사람은 보지 못하는 인간 내면 안에 있는
‘죄와의 싸움’을 보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 복음을 접하는데
그 복음에는 우리 내면에서 얼마나 치열한 싸움이 있는지를 보게 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그 싸움에서 우리의 힘으로는 싸울 수 없다고 말합니다.
복음은 그 싸움에 대해서 내가 철저히 무능력한 존재임을 보여 줍니다.
이미 나는 죄는 내 안에 들어와 있고, 나는 그 죄의 노예로 팔려있으며,
죄가 나를 사로잡아 끌고 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죄의 잔악하고, 포학함과 강력함을 보게 합니다.
복음은 죄에 대해서 우리를 절망하게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복음은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복음은 이 강력한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나를 위해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나의 죄를 고백하고 십자가를 붙들고 죄와 싸워 승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 우리들 안에 이 복음의 능력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안에 이 복음의 능력이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죄의 지배를 받고, 학대를 받고, 끌려 다니던 죄인을
복음의 빛 가운데 불러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나의 연약함으로 인해 계속해서 죄에 패배하고 속고 있는 내 자신을 봅니다.
내가 오늘 말씀을 통하여 다시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죄와 싸우기를 원합니다.
내 힘과 내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십자가의 능력을 붙들고 죄와 싸우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의 영적인 눈을 밝혀 주시고, 내면 안에 있는 죄를 보게 하시며,
그 죄와 싸우고자 하는 결단과 의지를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날마다 죄와 싸워서 승리하는 은혜가
우리들의 삶 가운데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죄와 싸우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위 설교문은, 바울의 탄식으로 로마서 7장이 끝나면서, (설교본문이 로마서 7장이라서)
문제는 제기했는데, 답은 안 나와 있습니다. 답은 로마서 8장에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8장 관련설교 보기 http://blog.daum.net/rfcdrfcd/15972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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