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과 기독교(3) by 팀 켈러 (youtube.com)
◈포스트모더니즘과 기독교
팀 켈러
최근에 제가 어느 신학자가 쓴 책을 읽었는데요.
바로 초대교회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책 제목은 <도대체 왜 사람들은 1세기에서 ~ 3세기에 기독교인이 됐을까?>입니다.
왜냐면 1세기에서 ~ 3세기의 기독교는,
로마의 그 어떤 종교보다 심한 핍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핍박을 받으면서, 도대체 왜 그들은 기독교인이 되었을까요?
게다가 당시 기독교인은, 계속 계속 늘어났거든요
그 책의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래 글에서 발췌. 원본 동영상이 그렇게 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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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과 기독교
약 20년 전에 뉴욕의 한국 목사님들 세 분이 저를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많은 한국인 청년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저에게 말했는데요.
심지어 많은 청년들이 교회를 다니며 자라났지만,
그들이 대학 갈 나이가 되면 교회를 떠나버린다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교회를 떠난 어떤 청년들이,
제가 사역했던 리디머 교회에 나간다는 걸 알았던 거죠.
그래서 한국 목사님들이 저를 찾아온 거였는데
저를 비난하려고 온 것은 아니었어요.
그분들은 저를 존중하며 대해 주셨습니다.
그저 청년들이 리디머 교회에 나오는 이유를 알고 싶었던 거죠.
'도대체 당신 교회에는 왜 청년들이 나오는 겁니까?'
그래서 저는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서, 그 목사님들께 말씀드렸습니다...
▲(설교자의 삽입 이야기)
어떤 분들에게 제가 들은 말입니다.
"만약 아시아인 교회에서, 젊은이들이
'왜 제가 크리스찬이 돼야 합니까?, 왜 기독교인이 돼야 합니까?'라고 질문하면
어른들은 이렇게 대답한다는 겁니다.
'너는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고, 너는 교회에서 자란 우리의 지체니까
따라서 너는 (당연히) 크리스천이 되어야 한다' 라고 말이죠.
젊은 세대들에게 '왜 크리스천이 진리인지'에 대한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들 부모님이나 교회 어른들은 그저 이렇게 말한답니다.
"넌 기독교가 진리인 것을 믿어야 돼.
우리가 진리라고 말하면 그런 거야.
우리가 너의 목사이고, 우리가 너의 부모니까,
따라서 우리가 그것이 진리라고 말하면, 그런 거야 (우리가 거짓말 하겠어?)"
▲(설교 흐름이 다시 이어짐)
저는, 저를 찾아온 한국인 목회자들께 이렇게 답했습니다.
"사실 저희 리디머 교회는, 아시아 청년들에 대한 특별한 전도를 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그저 모든 젊은 세대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 때문에, 청년들이 더 이상 의무감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복음이 줄 수 있는 것을, 삶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복음이 사람들에게 약속하는 엄청난 것들을, 삶으로 보여 줘야 합니다.
복음이 주는 것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강력한지를, 나누고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주1)
그리고 회의주의자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하죠.
"당신은, 이 복음이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이것이 진리라면, 정말 놀랍지 않겠습니까?"
그때 만약 회의주의자들이 "그렇네요. 만약 그게 진리라면 좋긴 하겠네요..."
그렇게 말한다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게 진리인지는 모르겠네요" 라고 말한다면,
"아 그러면 우리가 앉아서 그것이 진리인지에 대해 말해보면 좋겠네요"
라며 전도를 시작하는 거죠.
그들은 이제 동기부여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 이야기를들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그렇게 말하니까 그게 진리입니다.'
그러니 무조건 받아들이세요!' 라는 식으로 우리가 접근한다면,
즉 '묻지도 말고 의심도 마세요. 이게 그저 진리입니다' 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복음의 아름다움을, 복음의 가치를 젊은이들에게 보여주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복음에 반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청년들에게 단순히 '무조건 믿고 순종해라'는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자 그렇다면, 이 복음이 제공하는 약속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주는데요. 그것은 고난이 빼앗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은 진정한 기쁨과 만족을 주는데요. 그것은 삶의 상황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것이죠.
-그리고 복음은 우리에게 정체성을 주는데요.
그것은 약하지 않으면서도, 남을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잠시만 생각해 보세요.
크리스천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열심히 노력하여 성취하려고 합니다.
특히 아시아에서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우리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 드렸으니, 나는 훌륭한 사람이야'
'아마 맨하튼에서는 내 꿈을 이루었으니 나는 훌륭해!'
'저는 배우를, 모델을, 사업가를 꿈꿨고.. 그것들을 이뤄냈습니다.' 라고 말할지도 모르죠.
자, 두 가지 중 하나가 바로 전통적인 정체성인데요.
'내가 부모님을 기쁘게 했어!' 라는 것이고요.
또 다른 하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정체성인데
'내가 내 꿈을 이뤘어' 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가지 정체성 모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이 치열하게 살아내야 겨우 이룰 수 있는 것이죠.
-부모님이 나로 인해 기뻐하시도록, 제가 살아내야 하는 것이죠.
-내 꿈을 이루기 위해, 내가 뭔가를 충분히 달성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내가 뭔가를 성취해서 만들어지는 정체성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기반이 대단히 취약합니다.
자기 꿈을 이루고 나서도, 거기에 참된 만족이 없고 허무한게 인생이지만,
사실 자기 꿈을 이루는 것도 대단히 어렵습니다. 1%나 될까요?)
◑하지만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전혀 다릅니다.
1) 기독교의 정체성은 성취하는 것이 아닌,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날 사랑하기 때문에, 제가 사랑받는 것이죠.
그리고 그분은, 저를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저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시는데요.
제가 완벽하지 않음에도 절 사랑하시죠.
이런 정체성이야말로 절대 안전한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잊을 수 없는데요.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죠.
자 이제 여러분도, 왜 크리스천 정체성이 좋은 소식인지를 아시겠습니까?
전통적인 정체성이나, 포스트 포스트모던의 정체성은, 기독교 정체성에 비하면 연약한 것입니다.
복음이 주는 것들에 대해 약합니다. 이제 어느 정도 이해가 되십니까?
여러분은 전통적 정체성과, 포스트모던 정체성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보세요, 이게 진정한 자유예요. 이 정체성을 원치 않으세요?' 라고 말(전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성공하지 못해도,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 못해도 상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죠. '나는 사랑받은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이죠!
▲제가 최근에 어느 신약학자가 쓴 책을 읽었는데요. 바로 초대교회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제목은 <도대체 왜 그 사람들은 1세기에서 ~ 3세기에 기독교인이 됐을까?> 입니다.
왜냐하면 1세기에서 ~ 3세기의 기독교는, 로마의 그 어떤 종교보다도
심한 핍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핍박 받으면서, 도대체 왜 그들은 기독교인이 됐을까요?
게다가 그 당시 기독교인은 계속해서 늘어났거든요.
그 책의 저자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기독교가 무엇을 주었기에 가능했을까?
왜 사람들이 교회에 찾아왔을까?"
당시에는 '너 교회 가야 해!' 라는 사회적인 압박도 없었고,
교회에 감으로써 얻는 혜택도 없었고,
교회에 가면 오히려 불이익과 처벌을 받았거든요. 근데 도대체 왜 교회에 모였을까요?
책의 저자는, 기독교가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두 가지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 첫 번째는 은혜에 의한 구원이고요,
-두 번째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실 다른 모든 종교들은 '착한 일을 하라'고 말합니다.
'제물을 드리고 의식을 행하라'고 말합니다.
'그럼으로써 당신의 구원을 성취하라'고 말하죠.
세상에 어떤 종교도 '오직 예수의 공로로,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종교는 없어요.
'그저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또한 '당신이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하는 종교도 없습니다.
대신에 다른 종교는 '신께 영광을 돌리고, 그의 호의를 얻으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신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고 말하죠.
그렇게 기독교는, 이전에 다른 종교가 결코 줄 수 없던
그 두 가지를 제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 세상에 다른 종교들은, 그것들을 줄 수 없어요. 아직도 말이죠.
그리고 지금도 그 갈망은, 여전히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존재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람들이 갈망하는 것을 보여준다면, 사람들은 반응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복음과,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그 갈망을 연결할 수 있다면,
그들은 반응할 거예요. 주2)
▲여러분이 설교할 때, 여러분은 그들의 행위가 아닌, 그들의 동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사람의 행위에만 주목한다면, 여러분의 말은 그들에게 전달되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성경이 이렇게 하라 했으니, 그렇게 하세요' 라고 말하는 것과 같죠.
그것은 사람들에게 '해라 마라'를 직접 지시하는 것입니다.
물론 저도, 그런 방법이 옛날 분들에게는 여전히 통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 방법은 유교 문화에서 자란 분들에게는, 아직도 충분히 통할 수 있습니다.
또한 '내 의무를 다 하는 것이 인생의 의미다' 라고 생각하는 분들에게도 통합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
'이거 해라, 하지 마라'고 직접 말하는 것은
그들의 반항심만 불러올 뿐입니다.
그 대신 여러분은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들어가, 그들이 원하는 동기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사도 바울이 그랬죠. 제가 수많은 예시 중에 하나만 말씀드리죠.
고후8장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들에게 헌금을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에게 인색하지 마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그는 직접적으로 이렇게 해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는 '지금 헌금하라고 명령하는 거 아닙니다' 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는 사도였어요. 헌금 좀 해라고 충분히 명령할 수 있었죠.
하지만 그는 명령하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
비록 그가 부요하지만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으로 인해 우리를 부요케 하심이라...'
왜 바울은 '좀 베푸세요' 라고 말하지 않고,
'여러분 복음을 생각하세요' 라고 말한 걸까요?
그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관대함에 감동받길 원했던 거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관대함을 통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 먼저 생각하길 원했습니다.
그럼 그것이 어떻게 적용될까요?
글쎄요, 무엇이 사람들의 마음을 관대하게 만들고, 혹은 인색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교만함과 두려움입니다.
교만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이 돈을 벌었으니, 이 돈은 내 것이다.'
그들은 '이 돈은 내 거야'라는 일종의 자격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또 다른 감정은 바로 두려움인데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만약 나에게 이 돈이 없다면, 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나는 약하고 안전하지 않게 될 거야'
이렇듯 바울은 사람들이 관대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들의 마음 때문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교만과 두려움 때문이었죠.
그럼 바울은 그런 감정들을 어떻게 이겨냈습니까?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부요했지만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으신 분이십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교만을 물리쳐 주는 것이죠.
왜냐하면 여러분은 죄인이지만,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자신의 영적인 부요함을 위해 그저 천국에만 계셨다면
저는 구원받지 못했을 겁니다.
제가 구원을 받은 것은 오직 그분의 관대한 은혜 때문입니다.
그분이 저를 위해 그 모든 것을 하셨죠.
자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여러분의 교만은 사라지며, 여러분은 겸손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려왔던 그 모든 것이 전부 선물이라는 겁니다. 모든 것이 선물입니다.
그럼으로써 '이건 내 돈이다' 라는 그 생각을 내려놓게 되는 거예요.
두려움은 어떻습니까?
'내가 이 돈을 나누면 나는 안전하지 않을 거야' 라는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을 위해 이루신 것을 바라보십시오.
그는 당신에 대한 헌신을 증명하셨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을 위해 무엇이든 할 거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하셨어요.
그분은 당신의 구원을 위해 최악의 가난과 아픔을 당하셨어요.
만약에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가, 당신을 그렇게 사랑한다면, 두려울게 뭐가 있겠습니까?
자 바울은 지금 복음을 통해 예수님의 관대함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그는 그렇게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속에 복음을 넣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생각해 보라고 말합니다. 마음속에 불이 일어날 때까지 말이죠.
그래서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 그 불이 여러분 마음속에 교만과 두려움을 불태울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여러분은 관대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의지에만 어필하는 것이 아닌, 그들 마음속에 있는 복음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관대함에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모든 것들에 대해 말합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배우자에게 충실하라 부모에게 공경하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남을 속이지 말라 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여러분이 이런 말씀을 전할 때, 직접적으로 그것을 하라고 말하거나
복음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죠. 그렇게 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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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펀 글) '복음을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 선교'
2018년 여름에 제가 단기선교 선교팀을 이끌고 케냐로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선교팀과 더불어서 케냐 나이로비에 도착해서, 케냐 남부에 말린디 라는 곳까지
차로 오랜 시간을 이동하여 갔더니, 선교사님 계신 곳에 이를 수가 있었어요.
마침 저녁식사 시간에 우리가 도착했기 때문에,
선교사님 댁에서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누고 되었고,
그때 그곳 케냐 선교사님께서, 우리 선교팀원들에게 귀한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제가 아직도 기억이 나요.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케냐에 처음 와서, 큰 기대로 선교사역을 시작하려 할 때
주님께서 제 마음에 너무나 명확하게 주신 마음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큰 선교지가 바로 너의 마음이다. 너의 삶이고, 가정이다!'
그때 그 말을 듣고, 제(케냐 선교사)가 고꾸라졌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삶이 먼저 복음의 은혜와 능력을 충만히 누리기 원하시는구나'
그래서 그때 받은 그 은혜로, 지금까지 선교 사역을 감당해 오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번 선교 여정을 통해서, 여러분이 먼저 주님을 분명히 만나기를 바랍니다."
진짜 정말 그랬습니다. 여러분 먼저 우리가, 살아계신 주님을 분명히 만나고,
복음의 은혜와 능력을 우리가 먼저 누려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향하여 우리가 주님을 드러내게 되고, 즉 삶으로 증거하게 되고,
우리의 삶도, 세상 가운데서 살 길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주2) 초대교회 기독교가 성도들에게 준 매력 중 또 한 가지.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골3:24
바울의 이 권면을, 당시 성도님들이 들었을 때,
당시 성도들의 대다수가 종들이라 그랬잖아요.
그들의 가슴이 뭉클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고대 종들은 기업이 없습니다. 종도 천차만별이라서 월급 받는 종은 있었대요.
그런데 보통은, 고대의 종들한테, 기업(유산)을 안 물려주죠.
기업(유산)은 자녀나 양자들이 물려받죠.
그들은 이 땅에서 어떤 것도 가질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바울은 그들에게 이야기하죠.
'너희가 상전들을 주 그리스도를 섬기듯이 할 때,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기업의 상을 허락해 주십니다!'
이 말은 두 가지 뜻인데
-하나는 여러분의 섬김에 대해서 정당한 보상을 해 주십니다.
주님께서 바로 의로운 심판가 되시기 때문에,
여러분(우리)들의 섬김에 대해서 정당한 보상을 해 주실뿐만 아니라,
-또 하나 중요한 뜻은, 여러분 고대의 기업은 누구만 가질 수 있습니까?
바로 아들과 딸들만 가질 수가 있습니다.
기업을 주신다는 말은 뭔가 하면, 바로 '너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거죠.
이 땅에서는 종우로 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주님이 준비하고 계시는 그 기업을, 너희들은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까 너희는 다르게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