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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따르라

LNCK 2012. 6. 15. 21:34

◈너는 나를 따르라          요21:18~25         01.11.11.설교스크랩, 출처, 정리 


 

◑1. 자기 실력을 알고, 좌절해야 합니다.


내년에 2002 월드컵이 열립니다. 2001년 당시 설교

그래서 히딩크 감독이 국가대표 선수들을 다른 팀들과 시합을 붙이고 있습니다.

평가전입니다. 왜 평가전을 가지는 것입니까?

우리의 실력을 알라는 것입니다. 아직도 형편없습니다. 이것을 인정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TV를 보면서 무어라고 합니까?

‘아이고 저것도 한골 못 넣나?’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입으로 평가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운동장에서 축구 선수들이 뛰는 정도로 십분만 뛰면 숨 넘어갈 것입니다.

119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말들은 잘합니다.


우리가 모든 성경을 보면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면,

‘성경에서 가장 악질적이고, 가장 나쁜 놈으로 나타나는 그 사람이 바로 나!’

라고 볼 필요도 있습니다. 그래야 성경이 제대로 보입니다.


모세와 바로와의 다툼에서는

내 자신이 바로 강퍅한 바로왕의 모습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망과 불평만 늘어놓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모세가 자기들을 구원하려고 왔건만

그들에게 고역이 가중되자

당장 하나님께 ‘모세에게 벌 내려달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출5:21, 새번역, 공동번역


구원을 해 주려면 고생을 시키지 말아야지

이렇게 고생시키는 모세가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자기 고통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지금 새벽기도시간에 열왕기하를 보고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벌써 앗수르에 의하여 망하였고,

남 유다도 바벨론에 포로되기 직전 상황입니다.


그런데 여호야김 왕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구술하고,

바룩이 두루마리에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여호야김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대로, 칼로 잘라서 화롯불에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렘36:23


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자기에게 듣기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 저주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보면

칼로 오려내어 버리고 싶은 말씀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지요?


예를 들면, 이제 사업을 하여서 큰 성공을 꿈꾸고 있는 자들에게

야고보서 4장의 말씀은 찬물을 끼얹는 말씀입니다.

‘네가 어디에 가서 일년을 사업하여 돈을 벌자고 계획하느냐?

그러나 인생이란 안개니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획을 잘 세워서, 사업에 성공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땅에서 기반 잡고, 번듯하게 살려고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계획을 하든지,

이 땅에서 내 뜻을 펼치면서.. 잘 살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자아의 실현을 위하여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수단과 방법 중의 하나가 종교인 것입니다.

그러니 종교니.. 신이니.. 하는 것도

결국은 나의 꿈을 이루어주는 종교이고..

나를 잘 되게 해 주는 신이어야.. 좋은 종교이고, 좋은 신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똘똘 뭉쳐있는 인간에게

성경이란 그야 말로 폭탄선언입니다.


아무리 이리 저리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가서 버티려고 하여도

성경은 완벽하게 차단하여 버립니다.


-해아래 새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될 뿐이고,

-모든 인간의 노력이 바람을 잠으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 자체가 한줄기 바람과 같은 것이고, 입김보다 가벼운 것이라고 합니다.

-호흡이 그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조차 없다는 것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열심히 격려를 받아도, 살기가 쉽지 않은 세상에..

    성경은 계속해서 찬물을 끼얹고 있습니다.


    성경뿐만 아니라, 설교도 마찬가집니다.

    여러분 ‘잔소리 같은 설교’(선지자적인 설교를 의미함) 매일 들어 보십시오.

    아마 거의 고문당하는 기분이 들 것입니다.

    (물론 듣기 싫은 설교를.. 진지하게 들을수록.. 내게 좋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통하여 가장 뚜렷하게 대비되는 것은

그렇게 목숨을 걸고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겠다는 제자들이

얼마나 예수님과 동상이몽이었는가를 드러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어떻게 하면 서로 높은 자리 차지하는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진심으로 ‘주님께서 고난 받지 않도록’ 하고자 한 말에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성전을 위한다고 열심을 내면 낼수록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는 마귀의 짓이었다는 것이

얼마나 생생하게 드러났습니까?


지금까지 드린 위의 장황한 내용들은

한 마디로 말하면 ‘내 실력을 알고, 좌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베드로는, 자기가 최고로 수제자요, 믿음이 좋은 줄 알았다가,

주님을 3번 부인함을 통해, 자기 실력을 깨닫고, 좌절하게 됩니다...


◑2. 신앙은..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의 주도권을 따르는 것


그러므로 인간이 스스로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아무리 목숨 바쳐 충성을 다짐하였지만

결국은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세 번이나 부인한 결과만 남았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결정과 의지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어느 정도로 불가능한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히 무너진 베드로, 완전히 깨어진 베드로,

그 상한심령에 주님께서 처음에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이루시고자하신 그 목표를 다시 이루어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신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인간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베드로처럼, 이렇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믿고 의지하였던 것들을, (자기 열심, 자기 자존감, 자기 괜찮음 등)

결국 다 내려놓게 하시고서, 내 자아가 깨어지게 하시고서,

겸손의 고백, 사랑의 고백을 받아 내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성공의 자리가 아닙니다. 내 능력이 빛나는 자리가 아닙니다.

반대로 내가 철저하게 무너진 자리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주님 나의 모습이 이러함을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3. 주님을 따르는 것은.. 십자가를 따르는 것


그러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21:18~19,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그러나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자의 모습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갈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모습입니다.


신앙에는 ‘하나님의 주권, 예정’이란 큰 그림이 있고,

또한 ‘인간의 선택, 자유의지’같은 작은 그림도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믿어야 하고, 내가 책임 있게 신앙생활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 는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주님이 이끌어 주십니다.

거기에, 내 힘을 빼고, 이끌림을 받아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Divine driven (신적인 이끌림) 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제자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입니다.

전에는 자신의 힘과 능력과 의지적 결단으로 다녔으나

이제는 남이 띠를 띠우고, 내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리고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중간 과정에

-자아의 깨어짐

-내려놓음

-얍복강의 야곱 체험

-자기를 신뢰하지 않음 (똑같은 말을, 다른 표현으로 한 것임)

등이 있습니다.


아직 그 ‘깨어짐’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신자는,

예수를 믿지만

자기가 원하는 곳에 가고 싶어 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기도를 드려도

맨날 ‘이거 주세요, 저거 주세요!’ 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제자들은,

본문의 베드로처럼, 자아가 깨어진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악’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로 살아갈수록

오히려 원하지 않던 일들이.. 내게 닥치게 됩니다.


하나님이 계속적으로, 그를 만들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성숙’은.. 한 번의 과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평생 계속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최고의 기도는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 주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 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도에게 동일한 요구는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8


‘남이 네게 팔을 벌리게 하고, 띠를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물론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을 죽을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제부터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메인바 되어서

내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본문 말씀도, 서두의 여호야김 왕처럼

우리가 ‘삭둑 삭둑 잘라서, 불에 태워 버리고’ 싶지요?


‘이 본문은, 베드로 같이 특별한 사람이나 받은 거야, 나는 아니야!’

이런 신자는, 구원 받지 못할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자기가 원하는 구미대로만 믿고, 성경을 삭둑 삭둑 잘라내는 신자를..

주님이 천국에 데려가실 리 없습니다.


그러니 신자는.. 이러한 길로 부름을 받았기에

묵묵히 그 부름받은 길로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가야할 길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죽는 길’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내가 죽는 길 외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으로부터 요구받고 있는 것은,

-내가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 행함도 아닙니다.

-사람을 많이 모으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업적을 남기는 것도 아닙니다.


위의 것들이 다소 필요하다 하더라도, 결정적인 것들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으로부터 요구받고 있는 것은,

그 결정적인 것은

-내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앞장 서신 분이 십자가를 지고서 가신 것처럼

지금 그 뒤를 따르는 베드로에게

어떤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길로 가는 것도 주님께서 하셔야 되지요!

물론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하셔야 됩니다.


주님이 명하신 일은.. 주님이 주권적으로 이루십니다.

주님이 ‘나를, 내가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시면’

주님이 ‘내가,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주권적으로 힘주시고, 역사하십니다.


물론 나의 순종이 필요하지만, 그건 ‘작은 그림’이고,

내가 순종하기만 하면, ‘큰 그림’은 주님이 이루어 나가십니다.


순교 또는 순교적 삶을 사는 것, 십자가의 길이 꼭 필요한 것은,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매 시기에 중요한 고비마다,

반드시 ‘순교의 제물’을 택하여, 기쁘게 받으십니다.


꼭 목숨을 버리는 순교가 아니더라도,

한 공동체에 오늘의 영광이 있기까지는,

그 과정에 누군가의 눈물, 희생, 헌신 등, ‘생활의 순교, 순교적 삶’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대부분은 베드로와 똑같은 길은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나 ‘생활의 순교’는 누구나 가게 되어 있습니다. 


순교를 허락하시는 하나님               ☞ 당신도 부름 받았습니다

 

◑4. 남과 비교하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을 듣고서, 베드로가 말없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남과 비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20-21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런 것을 상관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왜 엉뚱한데 신경을 쓰느냐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결론부분이, 제자들의 이러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들에게 결국 주님이 보내신 성령이 임하시게 되고,

모두가 주님의 뒤를 따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의 일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늘 곁눈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주님 앞에서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눈치를 살피고,

'저 사람이 저 정도이니, 나는 이만하니 잘한다' 라는 식의 비교를 하기 쉽습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주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너는 (옆 사람 쳐다보지 말고, 비교하지 말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결론입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너는 나를 따르라!' .. 이것은 십자가의 길을, 너도 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십자가의 주님'을 따르지 않고,

다른 것을 따를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러한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십자가의 주님'을 따르게 하시고야 마시는 것이

‘너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운명은

‘주님을 따르는 것’이 되고 맙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 이것은 실현 가능성이 없는 얘기가 아닙니다.

‘너는 나를 따를 것이다’ .. 를 내다보시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주권이 ‘너는 나를 따르도록’ 강권적으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의 운명이 나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에 있음을 인정하시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