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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의 눈물

LNCK 2012. 2. 11. 09:18

◈선지자의 눈물            렘4:19~22        1988.06.19.설교스크랩

 

성도는.. 자기 슬픔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자기 죄악을 회개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보다 차원 높고 귀한 눈물이 잇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가졌던 선지자의 눈물입니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선지자들은 선지자이기에

그들만이 느끼는 고통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일상적인 슬픔이 없는데도, 자기 회개의 눈물이 아닌데도,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성경에서 눈물을 가장 많이 흘린 선지자로 우리는 예레미야를 생각합니다.

예레미야서를 읽어보면

그 어떤 사람보다 눈물을 많이 흘린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1. 다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하는 눈물

 

선지자의 눈물은 먼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가 당하는 공감적인 슬픔입니다.

쉽게 말해, 다른 사람의 슬픔을 함께 슬퍼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의 영적인 잘못을 보고 슬퍼하는 것이 선지자의 눈물입니다.

 

현대를 가리켜 흔히들 단절된 사회라고 말합니다.

이 시대는 얼핏 보면 모든 것이 잘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세계 어디서든지 전화로 즉각 통화할 수 있고,

누구든지 쉽게 빨리 만날 수 있습니다.

 

모든 조직과 인간관계가 잘 발달된 도로망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서로 멀어져만 가고

도무지 서로 연결되지 않는 것이 현대사회입니다.

 

모두가 철저한 개인주의, 이기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나는 나고, 너는 너입니다.

이러니 남의 아픔이 내 가슴에 전달될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 비유로 말씀하신 그대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무정한 세대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남의 아픔을 슬퍼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같이 느끼고, 같이 아파하는 괴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악을 볼 때 슬퍼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선지자는 죄를 지적하고 죄를 책망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옳습니다. 선지자는 다윗의 죄를 지적한 나단과 같이,

아합의 죄를 지적한 엘리야와 같이 죄를 책망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죄를 지적하는 선지자의 가슴 깊은 곳에는

한없는 아픔과 눈물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대를 보십시오. 모두가 소리 높여 죄를 책망하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그 죄로 인해 슬퍼하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모두가 너는 죄인이고, 나는 의인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돌을 들어 치려고 하는 사람은 많은데,

슬퍼하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아픔과 그 죄악이 내 가슴에 전해오는 진한 그 무엇인가가 없을 때는

차라리 지적도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죄를 책망하는 선지자의 가슴에는 뼈를 깎는 눈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울었습니다.

백성들의 죄를 생각하고 그들이 당한 슬픔을 생각하고 울었습니다.

 

본문에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 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9:1절에 보면, 내 머리가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의 근원이 되었다 했습니다.

이 슬픔, 이 눈물을 아시겠습니까?

 

예레미야뿐만이 아닙니다. 바울도 로마서 9장에 보면,

믿지 않는 동족을 생각할 때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멸망으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바라보면서

마음에 괴로움이 그림자처럼 있었습니다.

 

구약의 모세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셔서 

이 백성은 목이 곧은 백성이다. 다 진멸해버리고

너와 네 후손으로 새 민족을 삼아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모세에게 말씀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아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속을 썩이고 애먹였던 백성들이었습니까?

그리고 또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러나 모세는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사하지 아니하시려거든

차라리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주시옵소서.’

자기백성이 망하는 것 보고는 살고 싶지도 않다는 기도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중보적인 고통이요 아픔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에 대한 중보자요, 민족의 중보자입니다.

우리는 저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저들의 죄악을 슬퍼해야 합니다.

너무 쉽게 말하지 맙시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다른 사람이야 죽든 말든 나 하나 잘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형제와 슬픔을 함께 나누며,

위하여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다.

그리하여 이 패역한 시대에

선지자의 눈물을 소유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선지자의 눈물은 또한 미래를 아는데서 오는 눈물입니다.

 

젊은이들이 할 일없이 놀러 다니는 것을 보면,

나이든 분들은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

자식이 공부는 하지 않고 놀 궁리만 하고 엉뚱한 생각만 할 때,

부모는 가슴이 아픕니다. 그 미래, 그 결과를 알기 때문입니다.

 

얼마안가 가슴 치며 후회할 날이 오는 것을 압니다.

왜 젊었을 때 놀았을까 하고 후회하는 모습을 미리보기 때문에

나이든 분들은, 안타까워합니다.

 

선지자의 눈물이 이와 같습니다.

저렇게 나갈 때 어떻게 된다고 하는, 앞에 있는 고통을 미리 알고,

미리 보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선지자에게는 영적 통찰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래서 아직 일어나지 아니한 미래를 알게 되고,

때로는 그 미래로 인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막상 당하는 것보다 더 큰 아픔이요, 더 큰 고통입니다.

 

어릴 때, 무엇인가를 잘못해서 아버지로부터 매를 맞은 기억이 있습니다.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이제는 매를 맞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매를 맞는 것도 괴롭지만,

매를 맞는 그 시간까지의 불안이 더 괴롭습니다.

 

매를 맞아 아픈 것이 아니라,

앞에 있는 매를 생각할 때 미리 아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눈물입니다.

 

현대인들은 깊이 생각하기를 싫어합니다.

불안한 미래를 가급적 잊고 생각하지 않으려 합니다.

술이며, 향락, 오락 다 잊어버리자는 행위입니다.

 

사실 모르면 편합니다. 생각하지 않고, 의식하지 않으면.. 고통도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는다고 미래가 닥쳐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미래는 닥쳐오고 맙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있고, 하나님의 심판도 있고, 죽음도 있습니다.

 

시49:20에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했습니다.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결국은 짐승처럼 망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의 죄를 보았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보았습니다.

내 마음이 이렇게 답답하고 잠잠할 수 없는 것은

나팔소리와 전쟁의 경고를 들음이라고 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평안하다. 평안하다 할 때에

예레미야는 무서운 미래를 봅니다.

죄를 보았고, 그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봅니다.

나팔소리를 들었고 전쟁의 경고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무너지고, 성전은 불타고, 백성들은 죽임을 당하고

왕은 눈이 뽑혀 끌려가는 참혹한 미래를 내다보았습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회개할 줄 모릅니다.

본문에 있는 그대로 ‘우준한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도무지 무지’합니다. 렘4:22

 

그래서 그는 울었습니다. 울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고 슬퍼서, 어떻게 많이 울었든지

눈병이 났고, 눈에 항상 진물이 흘렀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선지자적인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그대로 가든 괜찮겠습니까?

이 백성이 이대로 가도 괜찮겠습니까?

이 상태로 그대로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의 어두운 면은 더욱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합니다.

며칠 있으면(88.6.19설교) 6.25 38주년을 당합니다만, 6.25가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6.25는 분명 한국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요 경고였습니다.

 

6.25를 생각할 때, 우리는 한국교회의 죄악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신사참배를 외면하기는커녕 신사참배에 가담한 자들이 더 큰 소리를 쳤고,

거룩해야할 교회가 아귀다툼과 정치다툼으로 주먹이 난무하는 싸움터가 되었습니다.

 

이 무서운 죄에 대해 하나님은 6.25의 징계를 주셨습니다.

6.25는 분명 하나님의 큰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니 진실로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눈물입니다.

옷은 찢지 말고 가슴을 찢어야 합니다. 미래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눈물이 참으로 요구되는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아픔을 받아들이는 아픔

 

선지자에게는 또한 하나님의 아픔을 받아들이는 아픔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슬퍼하시니 그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흘리는 눈물이

선지자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보세요.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그리고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고 거듭거듭 경고하십니다.

 

망한다는 말을 왜 미리하십니까?

망하는데도 준비가 필요하니 망할 준비하라는 뜻이겠습니까?

그렇게 계속가면 망할 수밖에 없으니 돌이키라는 간절한 마음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탄식소리를 들어보십시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내 백성은 깨닫지 못 하는도다.’ 사1:2~3

 

소도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의 구유를 아는데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아픈 마음이 여기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 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끝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매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 하느냐?’  사1:5~6

상처뿐인 저들에게, 또 매를 들어야 하는 하나님의 아픔이 여기에도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오니 그것을 누가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는 내 앞에 가져오지 말라.’ 사1:12~13

 

그 기뻐하시는 제물마저도, 가져오지 말라 하시는

하나님의 슬픈 마음을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인간의 죄악과 인간의 미련 앞에는, 하나님의 진한 아픔이 있습니다.

의인 열명만 있다면 소돔고모라를 용서하시겠다고 하셨습 니다.

의인 열명이 없어서 소돔고모라를 멸하실 때,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하셨겠습니까?

 

렘5:1에 보면 ‘너는 예루살렘 거리로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고 했습니다.

 

의인 한 사람이 없어서 예루살렘을 심판해야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의인 한 사람을 찾을 수가 없어서

그토록 사랑하시고 그토록 아끼시고 돌보시던 이스라엘을 멸망시켜야 하시는

하나님의 심정, 여러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예레미야는 이 아픔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너무도 괴롭고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탕자가 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는 밤이나 낮이나 먼 곳만 바라보고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립니다.

안타까운 가슴으로 아들이 떠나간 곳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맏아들이 조금이라도 아버지를 생각하는 아들이라면

괴로워하는 아버지의 슬픔이, 그 가슴에 전달되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괴로워하는데 나는 좋아해도 되겠습니까?

아버지는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데 나는 즐거워해도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아들은, 집나간 탕자보다 더 못난 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오늘날, 누가 자기 공동체 많이 모인다고 자고한다면..

  그거 맏아들의 마음과 비슷합니다.

 

좀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아버지의 마음이 전달되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눈물이 없는 세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 소원이루지 못해서 흘리는 눈물,

자기가 더 가지지 못한데 대한 아픔의 눈물뿐입니다.

정말 신령하고 고귀한 선지자의 눈물이 아쉬운 시대입니다.

 

특별히 6.25를 생각해 볼 때, 이 시대가 두렵기까지 합니다.

민족의 죄를 슬퍼하며 안타까워하는 눈물이 아쉽습니다.

저 먼 미래를 바라보며, 오늘을 애통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아픈 가슴을 생각하고, 눈물이 있어야겠습니다.

 

주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위로함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눈물이 많은 자에게는 위로도 많습니다.

선지자의 눈물이 있는 자에게는 선지자의 위로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선지자의 눈물이 있어서

그것이 우리와 이 민족의 소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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