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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비전이란? 잠29:18 12.05.27.설교일부녹취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잠29:18
▶신자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비전’이다.
내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비전’이다.
이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단체/공동체적으로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교회의 비전’이다.
그런데 오늘날, 가장 오해되어지고 있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비전’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꿈은 이루어진다’ 하는 식으로,
자기 마음에 소원의 입을 크게 벌리는 것.. 그것을 ‘비전’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것은 비전이 아니라, 야망 ambition이라고 한다.)
◑성경적 의미의 비전
▶성경적 의미의 비전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목적을 우리에게 보이신 것’이다.
세부적으로 말하면, 비전이란,
-하나님의 꿈과 목적이어야 한다. 내 꿈과 목적(즉 야망)이 아니라!
-그것이 나에게 계시로 보여져야 한다. 내가 억지로 품는 것이 아니라!
즉, 성경적인 관점에서 올바른 비전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세운 큰 목표나 비전이 아니라, 명목상 ‘주님을 위해서’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목적과 비전이.. 곧 나의 비전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헨리 블렉가비 목사님도
비전은 곧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한다.
▶본문이 그 사실을 잘 뒷받침 해 준다.
잠29: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라고 되어있는데,
KJV성경이 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perish 라고 번역해서
우리는 ‘비전이 없으면.. 백성이 망한다’라고 이해하면서
청년들이 자기 비전/자기 목표/자기 꿈을 분명히 세우면,
방자히 행하지 않고.. 성공하게 된다... 이렇게 이해하고, 가르쳐왔다.
(KJV성경이 번역을 잘못 했다는 뜻은 아니며,
다만 vision이란 말이, 원래는 '계시 revelation'라는 뜻이었으나, KJV성경 번역 당시에는 문제가 없었음
20세기에 들어서, 그 의미가 '자기 꿈, 야망 ambition'으로 변경된 것임. 그래서 혼란이 온 것임)
일례로, 뭐 대학에 졸업할 때, 꿈과 목표를 분명히 세운 학생들과
그렇지 못한 학생들을 대비할 때,
전자의 학생들이.. 20년 후에..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이 되었더라..
그래서 ‘꿈(비전)을 확실히 정하고, 그 꿈을 향해 달려가라. 꿈은 꼭 이루어진다!’
는 식으로 위 잠29:18절을 이해해 왔다.
이것은 본문 잠29:18절을 오해한 것이다.
NKJV, NIV 성경은 이렇게 번역한다.
Where there is no revelation, (the people perish!)
‘계시’가 없는 곳에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
비전이 아니라.. 계시라는 것이다.
자기 마음속에 자기가 세운 계획, 꿈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이다. - 이것이 참된 비전이다.
※그래서 새번역, 공동번역 등도
‘계시’라고 번역하고 있다.
개역은 ‘묵시’라고 했는데.. 그것도 ‘계시’라는 뜻이다.
▶정리하면,
성경적 의미에서 진정한 비전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이다. .. 이것이 성경적 비전의 참 뜻이다.
◑제가 ‘성경적 목회 비전’을 정립하게 된 계기
▶목회자로서, 제가 비전이 불분명했던 때가.. 과거에 한 때 있었다.
저는, 주님이 저를 목회자로 부르셨음을 뚜렷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목회 이외에, 교수 등의 다른 길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제가 미국에서 유학 할 당시에도, 교회를 개척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느 날, 제가 ‘방랑자’임을 깨닫게 되었다. *비전을 상실했다는 뜻
왜냐하면 목회자적 소명감은 갖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목적으로서의 비전은 뚜렷이 없다’는 것을..
그날, 제가 깨달았기 때문이다.
제 얘기는 하나님이 제게 보이신 하나님의 목적,
즉 <성경적 의미의 비전>이, 당시에 제게 아직 선명하게 없었고,
그것을 향해서, 제 온 삶으로 달려가는 그 목표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리 저리 성경을 뒤지며 복음적인 설교를 했을지라도,
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하나님이 주신 방향 없이 목회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은 1995년 1월 2일이었다.
제가 처음에 서울에서 교회를 개척했을 때인데, 그 작은 교회가 반쪽 나 버렸다.
그때 저는 너무나 힘들었다. 밥 먹을 힘조차도 없었다.
만약 제가 ‘성경적 비전’을 확실히 갖고 있었다면,
즉 목회를 통해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게 하고,
-형식적 종교생활이 아니라, 내면적/친밀한 관계적 신앙생활로 인도한다는
그런 ‘비전’만 확실히 갖고 있었더라면,
교회가 반쪽 나더라도.. 제가 그렇게 힘들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전을 향해 가는 길에.. 당연히 치러야하는 대가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또한 그 당시 교계적으로도, ‘꿈은 이루어진다’식의 비전이 활개치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성경적 비전’을 확립하기도.. 쉽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성경적 비전’을 가르치는 분은 아주 희귀했고..
‘성공주의적 비전’이 너무나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제가 기도원에 올라갔다.
처음 개척한 교회가 반쪽이 나서,
저는 아무 의욕도 없어서, 먹지도 않고, 그냥 기도원에서 지냈다.
그 기도원에서 원장님이
그 당시 성장하는 교회 담임을 겸하고 있었는데,
그의 설교를 딱 2번 들었는데,
제가 느낀 것은,
주님이 만약 그 원장 목사님께 오셔서
‘OOO 목사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해 주기를 원하느냐?’
그러면, 그 분은 즉시
‘예, 주님! 요렇게, 조렇게 해 주십시오..’
이런 자기 비전(야망)이, 그 분은 확실히 갖고 있었다.
정말 자기 꿈을 종이에 적어서,
아침저녁으로 거울을 보면서 외운 모양인지..
그 분의 말씀이 지금도 또렷이 제게 기억난다.
그 분은, 옆구리만 쿡 찌르면, 그 비전이 쏟아져 나올 정도로..
자기의 목회적 비전을 확실히 달달 외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 비전이, 사람들에게 매우 어필할만한 것들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당시에, 그분의 목회는 대단히 잘 되고 있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그게 일부는 성경적인데, 일부는 성경적이 아니었다.
지금 그 분은 목회를 안 하고 계신다...
▶그런데 어찌 되었건 간에,
그 분의 모습을 보니까, 제 모습이 대비되어 보였다.
나는 그게 (꿈이, 야망이) 없었던 것이다.
과거에, 저도, 제 나름대로 많은 계획/비전을 세웠던 적이 있었다.
몇 개년 계획, 언제까지 몇 명 달성하고 그런 것!
그런데 꿈대로 되기는커녕, 오히려 교회는 반쪽 나고 말았다.
그래서 실망이 더 컸던 것일까?
그런데도 ‘위대한 꿈을 품고 기도하라!’는 식으로 설교하는
그 기도원 원장님의 설교는, 저를 더 힘들게 만드는 것을 느꼈다.
‘해 봐도 안 되던데요..’
제가 푸념하다시피 혼자서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 그럼 저는, 앞으로 어떻게 교회를 목회해야 됩니까?’
(저는 아무런 숫자적 계획이 없는데요.. 구체적인 꿈과 목표가 없는데요..)
저는 그렇게 푸념을 하면서도,
주님이 제게 즉시로 응답을 주실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제 말이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전혀 예상치 않았는데, 주님이 마치 기다리셨다는 듯이
뚜렷하게 뭐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그때부터 제게, 주님의 비전(주님의 목적)을 보여주시기 시작하셨다.
그것은, 제가 설교시간에, 여러분과 나누고 있는 것들이다.
-습관적 종교생활이 아니라, 주님과 인격적 교제 생활
-하나님을 더 ‘알아’ 가는 것
-하나님의 손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신앙
-올바른 성령 운동
-올바른 하나님이 주신 비전 갖기.. 등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기독교 신앙의 본질 추구>이다.
▶어떤 교회가 숫자적으로 성장하면,
그 교회에서 하는 프로그램을 배워 와서, 자기 교회에 도입함으로써
그러한 숫자적 성장을 추구하는 교회들이 많다.
그래서 때로는 세미나 비용만 하더라도, 수 십 만원 되는 돈을 아끼지 않고
그렇게 해서라도, 그 프로그램을 도입해서, 교회가 성장만 한다면 얼마나 좋겠나! .. 하면서
다른 사람의 성공을 따라하는 목회자도, 과거에 많이 있었다.
저도 과거에, 하나님께서 저를 성장시켜 가실 때,
1년에 한 두 차례 미국의 세미나에 참석해서 배우기도 했다.
또한 새롭게 나온 책들을 구입해서 읽기도 했다.
그런데 저는, 그 교회의 프로그램을 배운 것이 아니라
A교회가 주님이 참으로 함께 하신다면
‘그 배후에 있는 가치관, 영성, 신앙관이 무엇인가?’
그것을 발견하고자 애썼다.
그것은 흙속에 파묻힌 뿌리처럼,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 교회의 가치관/우선순위/신앙관..
즉 그들의 내면적 신앙을 먼저 유심히 살피고,
거기서 나오는 프로그램을 살펴보았다.
프로그램을 배우지만,
그 속의 내면적 신앙을 먼저 배우려 했던 것이다.
참고로 저는, 개척초기부터, 목회를 잘 못할 것 같은 면이 보였다.
제가 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서울에서 처음으로 교회를 개척했는데,
그때 신학교 강의를 나갈 때였으니까, 신학생 2명이 함께 하겠다고 왔다.
그들이 교육전도사로 섬겼는데, 그들이 가끔 설교를 했다.
그 교육전도사들의 설교를, 제가 앉아서 들어보니
‘나는 목회자로서는.. 영 힘들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설교를 하는데, 현재 성도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딱 보았다.
성도 중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이 보이면
‘경제적으로 축복받는 비결’ .. 설교가 이렇게 되어졌다.
그러니까 설교를 듣는 성도들의 눈이, 번쩍 번쩍 뜨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보이니까, 그들과 비교되는 제 모습이 보였다.
저는 어떻게 설교 했느냐 하면, 우선 성도들의 필요 자체가, 제 눈에 보이지 않았다.
제 관심과 초점이 거기에 있지 않았다.
제 관심과 초점이 어디에 있냐 하면,
‘신자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그러니까 설교도 ‘이것이 우리 삶에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는 식으로 나왔다.
그러면 일부 성도는
‘내 발 등에 지금 불이 떨어져 있는데, 내 삶에 하나님의 뜻이 무슨 상관이냐?’
이렇게 반응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그래서 저는 처음부터 목회 못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여러분, 필요에 의해서 세워진 비전은, 효과적일지는 모르나,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을 수 있다.
그런 성도와 교회는..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결코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리더십은.. 영향력이다.
리더십(지도자)이 꼭 가져야할 덕목이.. 성경적 비전인데,
이러한 비전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리더십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도 일맥상통한다.
▶리더십에 있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로버트 클린턴 교수는
리더십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했다.
‘리더십의 중심임무는,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 (즉 vision을 향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여러분! 요즘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리더십에 대해서 어느 정도 공통적 이해가 이뤄져 가고 있는데,
<리더십은 영향력>이라는 정의다.
리더십은 직분, 직책이 아니라, 영향력이다.
예를 들면, 제가 담임목사인데, 이 직책과 직분은 갖고 있는데,
저를 통해서 여러분께 올바른 성경적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면,
저는 리더로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장관’이란 직책은.. 그것이 진정한 리더십이 되려면
‘선하고 올바른 영향력을 끼칠 때’이다.
그저 그의 직책과 직위가.. 그를 진정한 리더십으로 세워 주는 것은 아니다.
국민들에게 올바른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면,
리더로서 역할은.. 전혀 못하는 것이다. 리더십은 영향력이란 뜻이다.
그러면서 클린턴 교수는, 리더십은 영향력인데,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목적에 이르게 하는 것..
그가 바로 영적리더십(영적지도자)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영적리더십이신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 가도록, 지금 영향력을 미치고 계신가?’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도, 영적 리더십을 정의하면서, 같은 맥락으로 얘기한다.
그는 ‘영적 리더란, 사람들을 하나님의 agenda(현안, 의제)로 이끄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클린턴 교수나, 블랙가비 목사의 리더십에 대한 정의는,
표현의 차이만 약간 다르지, 그 본질은 같은 것이다.
즉, 영적 리더십이란
하나님의 목적 또는 agenda를 향해,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쳐서,
그들이 거기로 가게끔 인도하는 것이
바로 영적리더십이다.
지금 우리는 ‘성경적 비전’을 살피는 중인데,
그것은 ‘영적 리더십’의 사명과 일맥상통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시라. 우리가 가져야 할 비전이란,
하나님의 의제, 하나님의 목적이 나에게 보여지는(계시된) 것이다.
내게 이 비전이 없으면,
우리가 이 비전을 보지 못하면,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뿐만 아니라
리더십으로서, 우리는, 사람들을 어디로 인도할지 몰라서 방황하게 된다.
그래서 리더십에게는, 성경적 비전이 더욱더 중요하다.
▶마치는 말
여러분, 비전이 없으면,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게 된다.
성경 말씀대로, 방자히 행하게 된다.
그러면 회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세워지지 않고
교회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세워지지 않는다.
돈만 많이 번다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회가 숫자적으로만 성장한다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출세한다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뜻이 이루어지겠는가?
무엇을 향해 달려가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 목표에 이르겠는가?
벽돌만 많이 쌓아놓았다고 집이 되는 것은 아니다.
벽돌이 모아져서, 그 모양대로 되어져야 방도 되고, 거실도 되는 것이지..
그런 것처럼, 교회만 해도,
숫자적으로 사람만 많이 모인다고.. 하나님이 의도하신 교회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그런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교회가, 성도들이 그 비전에 자기 삶이 드려져야..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이루어진다.
-나는 올바른 성경적 비전(계시)을 가지고 있는가?
-사람들이 그 길로 가도록,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진정한 리더십인가?
위의 2가지 질문에, 내가 Yes 라고 확신있게 답할 수 있다면,
건물이 크든지/작든지
사람이 많든지/적든지
예산이 많든지/작든지..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
당신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기 정체성과 삶의 만족을 누리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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