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갑 재판 막14:53-65 출처보기
▲도입 예화
러시아의 그림동화 작가 라쵸프는 <장갑>이라는 제목의 그림책을 그렸습니다.
유아들을 위한 그림책인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할아버지가 눈 덮힌 겨울에,
강아지를 끌고 길을 걸어가다가, 그만 장갑을 길에 떨어뜨렸습니다.
(참고로, 러시아인이 끼는 겨울 장갑은, 우리 것보다는 훨씬 크고 두툼합니다.)
그래서 장갑 한 짝이 땅에 떨어졌는데, 제일 먼저 생쥐가 이 장갑을 발견합니다.
생쥐가 그 장갑 속으로 쏙 들어가서, 그 장갑 속에서 살기로 결정합니다.
조금 뒤에 개구리가 나타나서 ‘나도 그 안에서 살고 싶다’ 그러니까
생쥐가 OK 해서, 개구리도 들어가서 살게 됩니다.
또 조금 뒤에 토끼가 나타나서, 장갑 안으로 들어가서 같이 삽니다.
다음에는 여우가, 그 다음에는 늑대가 나타나서 같이 살게 됩니다.
장갑이 점점 더 뚱뚱해지겠지요?
그 다음에는 곰이 나타나서, 그 안에 들어가 살게 되는데,
이렇게 잔뜩 터질 듯이 동물들이 들어가서 살고 있을 때,
할아버지가 장갑 한 짝이 떨어진 것을 알아차리고
데리고 가던 강아지를 앞세워서, 장갑이 떨어진 곳을 찾아 되돌아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오시는 기척을 들은 이 동물들은,
깜짝 놀라서, 다 그 장갑에서 뛰어나와서 도망갑니다.
이게 이야기의 끝이에요...
그런데 이 동화 <장갑>이
예수님이 재판받으시던 모습과, 어떤 연관성을 가진 것을 발견합니다.
▲본문/ 재판을 받으시는데,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드디어 잡히신 뒤에, 산헤드린으로 끌려오십니다.
산헤드린은, 유대민족에게 있어 최고의 재판기관인 공회를 말합니다.
이 공회에 잡혀 오셔서 재판을 받는 과정이 나타나는데
예수님께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으르렁거리면서
예수님을 잡아 죽이기 위해, 책잡기 위한 거짓증언들을 하고 난리치는데
예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단지 한 마디 하시는 것은
‘정말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묻는 말에 대해서만,
그렇다는 식으로 답변하십니다.
이 장면, 너무 무기력하시는 것 같은 예수님의 재판받으시는 모습을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끼고 일하시던 장갑>이었다는 겁니다.
동화에서, 할아버지가 장갑을 눈 덮힌 길 위에 떨어뜨린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가 그 동안 장갑처럼 예수님을 끼고 계시다가
그 장갑이신 예수님의 인격에서 손을 빼버리신 상태가 된 겁니다.
▲<하나님의 장갑>이셨던 예수님
요14:10에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며, 그의 일을 하는 것이라’
저는 이 말씀을, 딱 제 가슴에 품고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좋아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말도, 내가 하는 행동도...’
그러니까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끼고 일을 하신 <장갑>이지요.
‘장갑’말고, 더 적절한 표현이 있겠습니까?
‘나는 장갑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끼신 장갑이다,
내 말을/ 내 인격을/ 내 육신을, 하나님이 끼시고 움직이시는 것이고,
내 행동도 하나님이 내 몸을 끼시고 움직이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재판이 참으로 묘한 모양새가 돼버렸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말씀과 행동들을 기억해내면서
예수님이 마땅히 죽어야 된다는.. 건수를 찾아내고 있는 중인데,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것이
다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장갑으로 끼시고 행하신 것들이었으니,
지금 하나님이 손을 빼신 상태에서
하나님이 연결을 끊으신 상태에서의 예수님은.. 장갑일 뿐인데,
공생애에 행하신 모든 것은, 그 장갑이신 예수님을,
하나님 아버지가 끼시고 행동하신 것들인데,
하나님 아버지가 행동하신 것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못하고
장갑이신 예수님을 놓고, 재판을 하고 있다는 얘깁니다.
억지로 예를 들자면, 택시기사 아저씨들이 장갑을 끼고 운전을 하십니다.
그러다 점심시간에 차를 세워두고, 장갑을 벗어놓고 들어가 식사를 하시는데
주차위반이에요.
그러니까 단속반이 와서 창문이 살짝 열려 있으니까, 그 장갑을 잡아가는 겁니다,
지금 그런 형국이 돼버렸다는 거예요. 주1)
조각가가 가죽장갑을 끼고 조각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조각을 보면서 비평하기를
그 장갑을 보고.. 비평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행하신 모든 말씀과 행동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조각가로서 만들어내신 것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장갑이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손을 빼신 상태에서
예수님을 재판정에 세워놓고, 재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때는, 이렇게 침묵으로 일관하신 분이 아니셨어요.
공생애 때는, 정말 무서울 정도로 때로는 비판하시고, 판단하시고,
다투시고, 논쟁을 벌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새끼들,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시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즉 이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도저히 상상하지 못할 비난을 퍼부으십니다.
예를 들면,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창기가 더 먼저 하나님나라로 들어갈 것이다’
하나님나라와 하나님에 대한 모든 가르침을, 전매특허 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당시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창녀들이
그들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라는 말씀도.. 서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것이 다 주님께서 스스로 하신 말씀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요8:26에 보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주님도 인격체이시기 때문에 스스로도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지도자들을 향하여 할 말이 많았어요.
그런데 다 접으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장갑되기를 자처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주님의 인격>을 장갑처럼 끼시고
바리새인과 서기관 이 지도자들을 향하여
비난을 하셨고, 질책을 하셨고, 꾸중을 하셨습니다, 고치라고.
실제로는 다 하나님아버지가 하신 일이에요.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가 손을 빼신
장갑이신 예수님을 놓고, 재판을 하고 있다는 얘깁니다. 참 묘하지요?
하나님 아버지가 손을 빼신 상태에서도, 주님은 당신 혼자만으로도 하나님이십니다.
말고의 귀가 떨어진 것을 갖다 붙이시는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능력이
여전히 하나님아버지가 손을 빼신 장갑인 상태에서도 가능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철저하게 장갑인 상태로 남아계십니다.
◑적용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우리의 모습을 비교해봅니다.
‘나’라고 하는 장갑은, 스스로 움직이는데 너무 익숙한 겁니다.
‘나’라고 하는 장갑은,
하나님이 속에 계셔서 일하심에도 불구하고,
너무너무 스스로의 의지로, 다 움직이고, 말하는 장갑이라는 거예요.
도대체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 겁니까?
라쵸프의 그림책 <장갑>에서처럼, 쥐가 들어가서 움직이고 있고,
개구리가 들어가서 움직이고 있고,
여우가 들어가서 움직이고, 늑대가 들어가서 움직이고 있다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의 장갑’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진실로 회심한 자에게는, 예수님/성령님이 자기 안에 내주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지금, 내 마음을 채우고 있는 게 뭐예요?
내 인격을 누가 끼고 움직이는 겁니까?
가정을 꾸미게 된 가장일 경우에는, 자식과 아내를 부양해야 됩니다.
또 아내는, 자식들을 위해 밥을 하고 살림을 하며 남편을 내조합니다.
이게 결국은, 아내 속에 남편이 들어가서 움직이고,
자식이 들어가서 움직이는 겁니다.
‘아내’라는 장갑을 가족들이 끼고 있고,
‘아빠’라는 장갑을 자녀들이 끼고 있고,
그 속에 예수님/성령님은.. 온데 간데 흔적이 거의 없습니다.
사장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장갑 안에.. 예수님은 거의 없습니다. 자기 야망이 ‘장갑’을 움직이는 실체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누구나 다 장갑이에요.
그런데 ‘누가 그 장갑 속에 끼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장갑 속에, 마귀가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마귀의 유혹을 받는다는 뜻임)
‘아, 돈이 좋은 거다’ .. 돈이라는 게 들어와서 나를 움직여갑니다.
‘아, 높아지는 게 좋은 거다’ .. 높아지려고 애를 쓰며 움직여갑니다.
이 세상 가치로 좋다고 하는 것들을, 내 마음으로 끌어당기는 것,
이게 바로 마귀가 유혹하는 것이요, 결국은 마귀가 장갑을 끼고 움직이는 겁니다.
‘아, 돈이 없어 걱정이다’
이게 마귀가 움직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인간은 <장갑>으로 지음 받았어요.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손을 빼자마자, 정말 속수무책의 장갑이 되는데,
우리 모든 인간들은.. 마구 다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내 장갑, 내 인격 속에 들어와 있는, 다른 것들을 몰아내야 되요.
보통 육신/세상/마귀의 세 분야가
성령님과 같이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들이 장갑인 내 안에서 서로 싸우지요.
<성령님을 통해 변화된 내 모습>과
<내 육신, 세상, 마귀>가, 내 속에서 서로 싸웁니다.
‘내가 먹이 주는 쪽이 이깁니다!’
내가 날마다 성령충만 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내 장갑 속에서, 성령님이 나를 이끌어 가시는데,
내가 성령충만 하지 못하면,
육신, 세상, 마귀가 이끄는 대로.. 내가 이끌려 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달콤해서 이끌려가지만, 결국은 죽임 당하고/도둑질 당하고/멸망당합니다.
▲마치는 말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하고 기도를 마치십니다.
얼마 후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며 절규하십니다.
그러니까 겟세마네 동산 이후부터~십자가 달리실 때까지,
예수님께.. 뭔가 일어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예수님을 외면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 인간의 대표로서, (두 번째 아담으로서)
죄인의 대표로서, 하나님께 외면을 당하시고, 심판을 받고 계십니다.
그 와중에 본문이 나오는데,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모습이
마치 ‘장갑에서 손이 빠져나가버리듯이’
아무린 힘이 없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외면과 버림을 당하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아직 12영이나 더 되는 천사를 불러오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하나님이 외면하시자,
예수님은.. 아무런 힘이 없어져 버리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은, 평소에
철저히 하나님 의존적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말하고, 행동하고, 사셨습니다.
그걸 가장 쉽게 표현하면, ‘장갑’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장갑’이요, 하나님은 그 속의 ‘손’이셨지요.
‘장갑’ .. 우리 크리스천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내 속에서 주님이 역사하시는 대로.. 말하고, 행해야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행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서두에 나온 동화의 <장갑>처럼,
그 속에 각종 쥐, 다람쥐, 여우, 곰이 둥지를 틀고, 바글거리지 않습니까?
주인 할아버지가 장갑을 줍기 위해 돌아올 때,
그 인기척을 듣고, 동물들이 다 달아나 버렸습니다.
성령님을 내 속에 모시고, 다른 것들은 다 몰아내야 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재판 받으시며 한 말씀도 하지 않으시는 이 광경,
참 씹고 씹을수록 의미가 깊은 내용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끼시지 않은 상태라면,
그 누가 나를 비난하고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라도
속수무책의 버려진 장갑으로 남아있게 해주시고,
하나님 아버지 말고 다른 것들이, 나를 끼고 움직이게 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도록 저희들을 이끌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주1) 비슷한 예를 한 가지 더 들면,
공사장에 가면 손바닥 면에 빨갛게 고무를 붙인 면장갑을 일하시는 분들이 사용합니다.
그러다 보면 쓰던 장갑을 땅바닥에 버려둡니다.
그러면 동네 개들이 와서, 공사장에 떨어진 장갑을 마구 물고 찢고 난리를 합니다.
지금 딱 그 형국이 돼버린 겁니다.
예수님이라고 하는 하나님아버지가 끼셨던 장갑을 하나님이 빼자마자
예수님 스스로는 철저하게 장갑이시기를 자처하시면서
정말 개들이 달려들어 물고 찢고 할퀴고 하고 있는데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맥없는 장갑이 되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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