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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라

LNCK 2012. 8. 22. 21:55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라           출3:1~5           출처보기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기 전에 모세의 모습을 보면,

어떻게 보면 미성숙한 인간이며 불안정한 인물처럼 보여집니다.

무엇을 할 만한 지도자가, 결코 될 수 없는 인물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모세를 만났을 때에

그는 믿음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쓰실만한 민족의 지도자로 바뀌어지게 됩니다.

분명히 모세는 타고난 지도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말입니다. ‘어떤 이는 위대하게 태어난다.

어떤 이는 자기 노력으로 위대해진다. 또 어떤 이는 강제로 떠밀려 위대해진다.’


수많은 비범한 지도자들이, 강제로 떠밀려 위대해졌다는 그 사실은

역사의 증언이기도 합니다. 모세가 아마 그런 경우 같습니다.


2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십니다.

이 떨기나무란 ‘가시 돋친 관목’입니다. 우리말로 쉽게 표현하면 가시덤불입니다.


미디안 광야에 수십만 그루가 있는,

그런 관목(키가 작은, 50센티 되는 덤불류 나무) 중의 하나입니다.


광야에 뜨거운 태양 빛이 쏟아지면, 쉽게 불이 붙어 가지고,

한번 불이 붙으면, 금방 타 없어지고 앙상한 재만 남는

광야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나무입니다. 널려진 것입니다.


어디에나 볼 수 있는 그 나무에,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모세를 만나기 위해서 찾아오십니다.


그 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혼잣말로 중얼거립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그러면서 돌이켜 그 곳을 향하여 나아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의 늘 반복되는 그 일상의 삶 가운데 찾아오십니다. 일상 속의 모세를 찾아오셨듯이


내가, 여러 가지 각도 속에서, 관심을 가지면서 깨어있으면,

주님은, 내가 알아보실 수 있도록, 내 삶에 찾아오십니다.


‘잠깐 멈추어라! 나를 보아라! 좀 되돌아보아라!

네가 갖고 있는 일상적인 삶 그대로 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너를 만나시고, 너를 사용하시고, 너의 삶 속에 동행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을 깨달으라고, 우리들에게, 성경의 본문을 통해, 이 모세의 이야기를 가르쳐 주십니다.


▲1.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모세처럼 잠깐 멈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이켜 보려고, 그 앞에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호기심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놀라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내게 주었던 약속을 현실로 바꾸는

이 결정적인 삶의 자리에.. 바로 모세의 이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3절에 “어찌하여 떨기나무가 타지 아니하는고”

나의 삶을 일상적으로 살아가다가..

이런 질문이, 나로 하여금 다시 나 자신을 돌이켜 보게 합니다.


‘어찌하여 하나님 이런 일이 내 삶의 사건 속에서 왜 일어납니까?

왜! 내가 이런 문제를 지금 당해야 합니까? 내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것입니까?’


“어찌하여 왜!” 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다가오시는 그 떨기나무 불꽃을 향하여 나아가게 됩니다.


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마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출생 때부터 지켜보고 계셨던 것이

성경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바로의 궁전에 있었던 40년동안 모세를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모세를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있었을 때, 그를 지켜보셨지만

아직도 그를 사용할만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80세가 된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모세를 만나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모세에 앞에 하나의 사건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돌이켜야 했습니다.

질문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했습니다.


성도님들! 우리가 부딪히는 일상적인 얼마나 많은 사건들 가운데서

그 많은 시간과 공간을, 우연적인 사건으로 무시해서, 내팽개쳐 버린 적이

얼마나 자주 있었습니까?


그것은 나하고는 상관없는 무의미한 사건으로

때로는 재수 없는 사건으로

왜 내게 이런 일이 부딪히는가? 하면서


내 자신을 들여다보며 하나님께서 네게 다가오시는 음성을 듣기보다는

그냥 지나쳐 버린 적이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래, 너를 어떻게 해야, 너의 가는 길을 멈추게 할 수 있는가?

너로 하여금 네게로 돌아와서, 내 뜻을 질문하게 하려면, 어떤 방도가 있는가?’

하고 우리에게 오히려 묻고 계십니다.


▲2. 모세가 이 떨기나무를 향해서, 그의 얼굴을 돌려 쳐다보며 다가갔을 때,

하나님이 그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모세가 깨닫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성경에 보면, 바로의 궁에서 40년 동안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직접 이야기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또 광야에서 40년 동안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40년, 80년의 침묵을 깨고

드디어 모세라고 하는 이름을 부르시면서, 모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또는 때가 차면,

주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것처럼, 지금 우리의 이름을 부르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와 함께 있고 싶어 하시고,

우리의 생애를, 하나님과 동역하는 생애로 바꾸고 싶어 하십니다.


▲3. 이때 모세의 대답은 한 마디뿐입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어쩌면 모세는 그가 바로의 궁에서 40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자기를 불러 민족의 지도자로

이 백성을 이끄는 사람으로 자기를 선택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자기의 능력과 힘이 넘쳐흐를 때,

자기가 쓰임 받으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하나님이 모세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40년간에 광야 생활 속에서 그는 낮아졌습니다.


광야학교에서 그는,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닌 인생인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침묵해서, 아무도 누구도 그의 이름을 알아주지 않는

그런 별 볼일 없는 존재 nobody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모세는 “제가 여기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특별한 달란트와 재능에 대해서 감동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리석은 자랑에 현혹되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하나님을 만나기를 열망할 때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사용하고 싶어 하십니다.


▲4.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이 땅위에 내보내고 싶어하신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5절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깨달았을 때,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려고 했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거절하십니다. 여기에 중요한 변화가 있습니다.


분명히 떨기나무 불꽃가운데서 나타났지만

모세가 응답하는 그 말소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네가 있는 이곳이 아니라, 네가 선 그 자리가 내가 함께 하는 곳이고,

거룩한 땅이라’고 모세에게 가르쳐 줍니다.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거룩이란 무엇입니까? 구별됐다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얘기한다면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거룩한 장소입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그 자리가 거룩한 자리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사람이 바로 거룩한 사람이 됩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여러분, 신을 벗으면 발이 깨끗해질까요?

오히려 신을 신어야 발이 더러워지지 않고, 깨끗해집니다.


먼지 묻은 발, 땀과 오물로 범벅된 그 발,

그러나 거룩(깨끗)해지기 위해선, 네 신발을 벗으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고 계십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네가 갖고 있는 너의 과거로부터 탈출하라!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 하나님께서 동행한다고 하는 것은

네가 지금까지 갖고 있던 너의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라!


네가 가졌던 너의 가치관으로부터 탈출하라!

너를 묶어놓았던 열등감에서부터 벗어나라!

지금까지 게을렀던 너의 삶의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라!

네가 너와 함께 있겠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그가 지금까지 신고 있었던 신발을 벗어버리라고 이야기합니다.

불붙은 떨기나무에 하나님이 계셨으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응답하는 모세가 선 그 자리에,

그와 더불어 함께 계시겠다고 하나님은 약속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모세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말하는 순간에

우리의 과거는 더 이상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교육도 별것이 아닙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

하나님의 사건을 볼 수 있는 눈, 그리고 깨닫는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세처럼,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 전에

먼저 달려갔던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 젊고 확신에 차있을 때, 마치 40년전에 모세처럼

하나님께서 보내지도 않으셨는데, 내가 먼저 하겠다고 그러면서

실패하고 좌절하고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그러면서

스스로 비참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때, 우리의 이름을 부르실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응답하기만 하면

네가 서있는 그 자리가 바로 거룩한 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존 맥스웰은 ‘거인들의 인생법칙’ 이라는 그의 글에서

모세에 떨기나무 경험은 세 가지의 그의 삶을 극복한 경험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첫째는 과거의 경험을 극복했습니다.

애굽의 왕궁이라고 하는 풍요로운 안전지대에 살고 있었던 모세가

자기 힘으로 모험을 강행했으나 실패했고 두려움에 떨며 도망갔는데

실패에 두려움, 과거에 쓰라린 경험에서 탈출시키게 하는 것이

떨기나무 경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는 현재의 안락함을 극복했습니다.

현재 자기가 하는 일에 그만 젖어들어

“이제 뭐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나님만 생각하면 마음속에 두근두근거리던 그 설레임도 사라지고

그냥 인생 뭐 이렇게 살다가 가는 거지..”


하고 변화의 가능성을 찾을 수 없는 자기 삶에 낙담된 자리에서

떨기나무사건은 새롭게 그것을 극복하는 귀한 경험이 된 것입니다.


세 번째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극복한 경우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모세는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말도 잘 못합니다.

나는 나이도 들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이 민족을 이끌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자기의 무능을 고백할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입과 함께 하고 너와 함께 하겠다.”

미래의 많은 불안과 걱정이 있지만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것을 통해서

자기의 새로운 미래를 행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는

그런 경험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 얼마나 현상 유지라고 하는 생각에 붙잡혀 있습니까?

고정관념이 나를 꽉 족쇄 매고 새로운 변화를 주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까?

감옥에 우리를 가두는 고정관념이라고 하는 그 간수가 도대체 어떤 이름입니까?


굳어버린 전통? 변화에 대한 두려움?

실수를 하지 않으려는 완벽주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는 게으름과 나태?

이것이 불침번처럼 내생을 꽉 가로막아서 아예 탈출조차 시도하지 않고

내 인생이 그냥 이대로 주저 않자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려 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스스로 정신적인 세뇌를 통해서

자기를 더 이상 하나님 앞에 내놓지 않으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우리와 함께 가시겠다고 하는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건을 보아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낙담합니다.


맥스 루카도가 감히 <하나님께 말싸움을 건 사람의 이야기>를 이렇게 표현하는데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모세한테 했던 것처럼 떨기나무에 불을 붙여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따르겠습니다.

여호수아에게 했던 것처럼 성벽을 무너뜨려 주십시오,

하나님 그러면 내가 싸움하겠습니다.

갈릴리에서 했던 것처럼 파도를 잔잔케 하십시오, 하나님 그러면 내가 듣겠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떨기나무 옆에, 성벽 근처에, 바닷가에 앉아

하나님이 입을 열고 행하시기를 기다렸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말을 듣고 응답하셨다.

하나님은 불을 보내셨다. 그러나 떨기나무에 붙일 불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에 붙일 불이었다.


하나님은 성벽을 무너뜨리셨다. 돌로 만든 벽이 아니라,

인간의 죄의 벽을 무너뜨리셨다.


그 분은 폭풍을 잔잔케 하셨다. 바다에 폭풍이 아니라,

영혼에 이는 폭풍을 잔잔케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람의 반응을 기다리셨다.

기다리시고..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셨다...


그러나 그 사람은,

마음이 아니라 떨기나무에

마음이 아니라 돌벽에

영혼이 아니라 바다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일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하나님은 아무 일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고 단정지어버렸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을 보며 물었다. “하나님, 당신은 능력을 잃어 버리셨나요?”

그때에 하나님은 그를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얘야! 내가 말했는데, 내가 일을 했는데,

넌 아직 듣지 못했느냐? 아직도 보지 못했느냐?”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장소가, 바로 거룩한 자리입니다.

그 어느 곳에 거룩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어느 곳에 지정된 거룩한 땅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실 때 “ 예, 제가 여기에 있나이다.” 라고

응답하는 그 자리가 바로 거룩한 자리이고

응답하는 그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응답하는 말이.. 거룩한 말이고

하나님 앞에 응답하는 내 손이 만지는 그 자리가 그 곳이.. 거룩하게 되는 곳이고

내가 보는 그 곳, 내가 일하는 그 장소가.. 거룩한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직업이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의 전공이 무엇이든,

여러분이 가정이 있든, 직장이 있든,

여러분이 이 사회 속에 어떤 일을 담당하든 우리들을 부르실 때,

 

“예, 제가 여기 있나이다.” 이렇게 고백하는 그 자리가 거룩한 땅으로 변화되고

우리의 언어와 그 행동이 나타나는 바로 그 사건이

하나님의 거룩한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일을 위해서, 오늘도 우리 각자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시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뤄 드리지 못하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찾아올 때, “주님, 내가 여기에 있나이다.”하고

응답하게 하셔서, 우리가 있는 그 자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땅이 되는 역사가, 믿음의 역사가, 하나님의 사건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