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깊이 생각하면 히3:1-4 출처보기
신앙생활의 중심은 오직 예수입니다. 늘 예수를 생각하며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본문 3:1절에 보면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생각하라’는 원어를 보면 "카타노에인"인데 이말은 "깨닫고 배우라" 는 뜻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했으니 "예수를 깊이 생각해보면..?"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3:1절에 보면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라는 말은 앞에서 내용을 근거로 결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깊이 생각하기 위해서는 2장에 나오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면,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될까요?
◑1. 낮아지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높아지기도 어렵지만 낮아진다고 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인간의 본성 속에서는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남보다 더 높아지려고 부단히 노려하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낮아지셨습니다.
히2:9절에 보면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신 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이것은 예수님이 낮아지신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하늘 보좌 높은데 계신 분으로, 낮아지실 이유가 없는 영광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낮아지셨습니다. 얼마만큼 낮아지셨나요.
빌2:5절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종의 형체를 입고 이땅에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마구간에 태어나신 것부터, 나 보다 더 낮아지신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아무리 가난해도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으셔야 하는 데
그의 생애 전체에서 환영과 대접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고난과 핍박을 받으셨으니
나보다 더 낮아지신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낮아지신 주님의 모습에서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그것은 우리도 주님처럼 낮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의 모든 문제는 낮아지지 못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남보다 낮아지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아니 내 가정 내 교회의 모습은 한층 더 밝아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성도들이라도 이런 마음을 가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롬12: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또 겔21:2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출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성도의 길이란 섬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남을 섬기는 것이 성도의 길입니다.
예수를 따르면서 섬기지 못하면 예수님을 바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섬기려면 낮아져야 합니다.
여러분!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맘을 가져보십시오.
다툼이나 분쟁이 왜 일어나겠습니까?
다른 사람을 훌륭히 여기는 데 왜 남들이 나를 싫어하겠습니까?
우리 남에 대하여 냉소적이며 입술을 비쭉이고 비웃는 태도를 버리고
적극적으로 발을 씻어주는 섬김의 도를 실천합시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나 보다 더 낮아지신 예수님을 말입니다. ☞상석에 앉으면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2. 나를 구속하신 분이었습니다.
2:9b절에 보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대신 죽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구속사역을 의미합니다.
구속이란, '값을 지불하고 속량했다!'는 뜻입니다.
원래, 값을 지불하고 노예를 사서 자유롭게 한다는 말로 쓰인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도 적용됩니다.
친족이 그 죄에 대한 합당한 가격을 지불하면
그 감옥에서 나오게 되는 일에 쓰였던 단어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20:28절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죄인의 구원에 대한 대가로 주시기 위해서 온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보면, 모든 사람들은 죄를 짓고 죄에 엉겨서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롬3:23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이 죄의 노예에서 해방을 하려면 속전을 지불해야 하는데
죄에 대한 속전은 '죽음' 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롬6:23에,"죄의 삯은 사망" 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법칙에 의하면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그래서 모두 심판을 받아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을 위해 죄 값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치르셨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고 죽으심으로 말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사람의 죄를 씻기 위해서 짐승을 잡아 그 피를 제단에 뿌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짐승을 잡지 않습니다. 이미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속죄의 피를 흘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피의 종교입니다.
히 9:22절에 보면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피는 생명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를 드려 우리의 구속을 이루셨습니다.
엡1:7절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는 구원의 방법을 제시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그 자체입니다. 예수 피는 곧 내 생명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전 인류가 자력으로나 그 어떤 힘으로도 해결하지 못한 죄의 문제를
주님께서 단번에 속죄의 제물이 되심으로 해결하셨습니다.
▶금식을 하면 냄새에 대하여 아주 예민해집니다.
평소에 느끼지 못하던 냄새들이 아주 역겹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희한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음식 냄새만큼은 어떤 냄새도 다 좋더라는 것입니다.
97년 11월 수양산 기도원에서 20일 금식기도를 할 때
기도원의 식당 근처를 지나는데, 아주 구수한 냄새가 식당안에서 새어나왔습니다.
그 냄새가 어찌나 좋던지 도대체 무슨 음식을 만들기에 이렇게 구수한 냄새가 나는가 하고
식당안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관리집사님이 개밥 주려고
음식 찌꺼기에 시래기같은 것을 넣어 삶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며칠 굶었다고 개밥 냄새도 맛있게 느껴지는 육신이었습니다.
이런 육성을 지닌 인간은, 금식을 백날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그것으로 의인될 수 없습니다.
100일기도 천일 기도하고 금식을 밥먹듯 한다해도 경건에 도움은 되지만
인간의 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욕심은 살아있고 죄된 성품 여전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만 가능합니다.
그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고 정결케하며 의롭게 하십니다.
예수의 보혈을 믿읍시다. 의심하지 말고 어떤 죄라도
그리스도의 피가 깨끗게 하실 줄 믿을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을 깨끗게 하실 것입니다.
◑3. 나를 붙들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해 보면 그분이 나를 붙들고 계신 분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2:16절에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붙들어 주려함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란 믿음의 사람들 즉 구원받은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사 41:10절에 보면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라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오른 손으로 나를 붙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붙들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붙들어 주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붙들어 주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믿음의 사람을 붙들어 주십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변치 않고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순종으로 충성하는 사람을 붙들어 주십니다.
믿음은 구원을 주고 순종은 축복을 줍니다.
오늘날 교회는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은 많은데, 순종으로 축복 받은 일군은 많지 않습니다.
모두가 자기의 경험과 지식을 내세우고, 주님의 생각이나 뜻은 마음에 두려하지 않습니다.
내가 가장 화 날 때에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화낼 수 있을까?
내가 가장 속상하고 원망 불평이 나올 때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원망할 수 있는가?’
장군이 전쟁터에 갈 때에, 복종하지 않는 군인은 데리고 가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주님 자신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붙들어 주시는 법입니다.
-고난 중에도 낙심하지 않는 사람을 붙들어 주십니다.
2:18절에 보면 "자기가 시험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리라"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히4:15-16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의 모든 삶을 다 체험하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사정과 형편을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떤 형편에 있든지 낙심하면 안됩니다.
언제나 희망을 바라보고 그것을 구하여야 합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도록 은혜의 보좌를 바라보면서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을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기도원의 목사관 2층에서 금식기도를 하기 위해 있었습니다.
기도원에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도 개를 키웠습니다.
몇 마리의 개들은 개집에 가두어 놓고 한 마리는 사슬로 묶어 놓았었습니다.
그런데 묶어놓은 개 주변에, 낯선 개 한 마리가 나타나서 맴돌았습니다.
주인 없는 떠돌이 개임에 분명했습니다.
기도원 개들은, 그 개가 오면 짖고 야단입니다.
아마도 자기가 묶여 있는 것이 불편하다고 불평하는 것이겠지요.
제가 듣기에는 떠들이 개가 부러워서 짖어대는 것 같았습니다.
저녁때 목사관 2층에서 내려다보고 있는데 개밥을 주려고
송 집사님이 밥통을 들고 나와서 먹이통에 개밥을 쏟아부어주었습니다.
기도원 개들은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떠돌이 개는 기도원개가 먹는 동안에 우두커니 서서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기도원 개가 먹고 난 나머지라도 먹으려고 밥그릇으로 다가갔을 때
송집사님이 나타나더니 밥그릇을 빼앗고 개를 쫓아버렸습니다.
못내 아쉬운 듯 뒤를 돌아보면서 달아나는 그 떠돌이 개의 허기진 배를 보면서
왜 그렇게 쓸쓸하고 불쌍하게 보였는지 모릅니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에게 붙들리고 묶여서 자유가 없다고 때론 불평도 하고 원망도 하지만
주님의 은혜의 줄에 묶였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이 붙들고 계신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은혜의 줄에 묶여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붙들고 계신 분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 주님을 믿고 순종하며, 우리의 앞길에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낙심하지 말고
오늘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해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갑시다.
'분류 없음 > 2004~2005'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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